소설리스트

전생검신-162화 (162/1,615)

0162 ----------------------------------------------

삼황오제(三皇五帝)

나는 그 후 동방무결을 진랑곡으로 데려왔다. 동방무결은 목갑에 넣어져서 내게 동행될 때만 해도 무슨 일인지 잘 모르는 기색이었으나, 이내 내가 기습하듯 그의 혈(穴)을 찍자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니...!!"

파앗

그가 갑작스럽게 잠재된 내공을 발현시키려 했으나 내 쪽이 훨씬 빨랐다. 나는 빠르게 화씨백팔침의 금제법을 사용해서 그의 16개의 혈을 찍으며 재차 내공을 봉인했다. 결국 동방무결이 허우적대며 주저앉자 나는 그를 싸늘히 내려다보며 말했다.

"극호의 내공으로는 당신 정도의 내공을 완전히 금제할 수 없소. 당신도 그걸 알고 있으니 지금까지 여유작작했겠지만 지금 건 다르지. 화씨백팔침의 비전수법으로, 내 내공을 불어넣었으니 빠져나올 수 없을 것이오."

"윽, 웃기는 소리..."

동방무결이 자신의 내공을 더욱 끌어올리려 했으나 무거운 추를 달고 뛰어다닌 듯 피로한 표정이 되었다. 아무리 해도 사지백해에 내공이 흩어져서 올라오지 않으니 당혹스러울 것이다. 나는 씩 웃으며 말했다.

"포기하시오. 진랑곡은 공기 좋고 물 맑은 곳이니 여기서 편히 쉬시길."

"이 놈...!! 이게 무슨 짓이냐! 내 내공을 돌려줘!"

"말귀를 못 알아듣는군."

스윽

내 호권(虎拳)이 그의 이마 위에 올려졌다. 위협을 느낀 동방무결은 발버둥을 멈추고 입을 다물었다. 단순한 호권의 자세이지만 딱밤 때리듯 때리는 순간 그의 머리통이 터져나갈 위력이 있다는 걸 알아챈 것이다. 나는 슬며시 호권을 풀며 말했다.

"이광은 당신을 고문실에 가두고 오랜 시간 정보를 밑바닥까지 훑어내기를 원했소. 하지만 그건 너무 비인도적인 처사라서, 그저 내공을 금제하고 여기 가두는 걸로 합의를 본 거요. 반천맹주에게 고맙다고 말하시오."

"이... 이런 천하의 쌍놈들. 대체 내게 왜 이러는 것이냐? 내가 대체 무엇을 잘못했다고!"

"걱정 마시오. 천년만년 가둬둘 생각은 없으니까. 나중에 때가 되면 풀어드리겠소."

"으으... 이놈..."

동방무결은 앓는 듯한 목소리를 냈으나, 내공을 못 쓰는 상태였으므로 별 수 없이 진랑곡의 숙소에 처박혔다. 앞으로 그는 진랑곡을 위해 의술을 사용하게 될 것이었다.

' 좀 너무했나?'

하긴 동방무결 입장에서는 일방적으로 피해를 본 셈이었다. 조금 미안한 감정은 있었지만 나중에 뇌신류가 개파하고 전력을 갖추게 되면 그때는 풀어줄 용의가 있었다. 나는 동방무결을 숙소에 넣어둔 후 망량에게로 갔다.

"이야기는 잘 됐소?"

"이광도 동의했소."

"그렇군."

망량이 흡족한 듯 말했다.

"그럼 백련교에 사자로 갈 준비는 다 됐소?"

"물론이오."

망량과 이광, 그리고 뇌신류 고수들이 모여서 이야기를 한 결과 뇌신류의 개파협상을 해야한다는 쪽으로 이야기가 모아졌다. 그리고 그 사자로 누가 가면 좋을지를 의논하다가 내가 가장 좋다고 망량이 제시했고, 이광이 그 제안을 검토한 후 승낙하면서 동방무결과 함께 진랑곡에 보낸 것이다.

망량이 말했다.

"당신은 비등의 주인이니 언제든 몸을 뺄 수 있으니 가장 좋소. 당신보다 적확한 인선은 있을 수가 없지."

"흐음, 그럼 이제 감숙성으로 가야하는 건가?"

아직 태어나서 감숙성 쪽은 가본 적이 없다. 또다시 한바탕 뜀박질을 해야한다는 생각 때문에 내가 머리를 긁적이자 망량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백련교의 정문으로 가는 건 미친 짓이지. 그보다는 뒷길을 사용하면서 실리를 챙겨 봅시다."

"무슨 소리요?"

"이제부터 낙양으로 가면 되오."

낙양?

무슨 소리인가 싶었지만 이내 망량의 말을 듣자 납득이 갔다.

"가장 가까운 곳에 백련교의 사자가 있잖소?"

파앗

나는 잠시 후 낙양에 도착했다. 사람이 없는 뒷골목에 등장한 나는 이윽고 대로변에 나왔고, 약간 걷자 한씨세가의 정문이 보였다. 나는 한씨세가의 정문을 지키고 있는 문지기 외에 별도의 고수들이 매복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신중하게 그쪽으로 다가갔다.

이윽고 문지기가 내게 물었다.

"꼬마야, 넌 뭐냐?"

나는 망량에게 들은대로 대답했다.

"가장 은밀한 곳에서 온 손님이오."

"아..."

그러자 문지기는 약간 놀란 표정을 짓더니 안쪽으로 뛰어들어갔다. 잠시 후 문지기가 다시 오더니 말했다.

"소가주(小家主)께서 기다리고 계시니 별채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나는 문지기를 따라서 한씨세가 안으로 들어갔다. 간만에 들르는 한씨세가였으나 곳곳에 매복한 식객과 고수들의 기세 때문에 쉽게 걸어다닐 수가 없었다. 동시에 쓴웃음이 났다.

' 과거에 내가 이런 용담호혈에서 배 째라고 까불었단 말인가? 정말 믿을 수가 없구나.'

이윽고 별채에 도착해서 왠 방 안에 들어가자, 거기에는 한씨세가의 소가주인 한진성이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한진성을 몇 번이나 본 적이 있지만 아마 그는 내가 첫대면일 것이다. 내가 그의 맞은편에 앉자 한진성이 말했다.

"귀한 손님께서 오셨군요. 맹주께선 잘 지내십니까?"

역시 망량에게 들은대로 반천맹은 한씨세가의 도움을 받고있는 모양이었다. 본래 반천맹의 특성상 낙양에서 비밀리에 활동하기는 힘들텐데도 한씨세가 덕분에 정보가 노출되지 않은 채 많은 정보를 손에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망량은 그 댓가로 소정의 금전을 한씨세가에 지불하고 있었다.

이른바 공생관계이지만 주도권은 한씨세가에 있었다. 나는 그 사실을 머릿속에 되새기며 천천히 한진성에게 말했다.

"잘 지내십니다."

"오늘은 어떤 일로 오셨는지?"

고아하게 대답하는 그의 용모는 송옥이나 반안에 비길 정도로 잘생겼다. 그가 낙양제일의 미남 중 하나로 손꼽히는 것도 이유가 있는 것이다.

"다름이 아니라 연결다리를 놓아주실 수 있을까 하여 찾아왔습니다."

"어떤 연결다리를 말씀하시는지...?"

나는 한진성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백련교주께 직접 드리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그 다리가 되어 주십시오."

"......!!"

한진성이 설핏 놀란 얼굴을 했다. 그러더니 대답했다.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군요. 백련교주는 감숙성의 백련교에 있으니 그 쪽을 찾아가 보시길."

역시 이것도 망량의 말대로였다. 망량은 한씨세가가 백련교의 호법사자 가문이자 화신류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한씨세가는 결코 그런 사실을 밝힌 적이 없으며 앞으로 밝히지도 않을 것이다. 나는 힐끔 주변을 쳐다보다가 그에게 전음을 보냈다.

[ 뇌신류(雷神流)의 일이자 소교주의 일입니다. 농담같은 게 아니니 꼭 대답해 주십시오.]

"......"

한진성의 얼굴이 잠시 창백해졌다. 그는 뭔가 고민하는 듯 하다가 말했다.

"손님께선 성명별호가 어찌 되십니까?"

"백웅이오."

"백웅 님. 저를 따라와 주십시오."

그는 나를 데리고 한씨세가의 후원으로 갔다. 그리고 거기에는 예전에 보았던 것처럼 인형처럼 아름다운 외모의 흑발소녀가 서 있었다. 인적없는 정원을 거닐고 있던 소녀는 한진성이 찾아오자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진성아 무슨 일이냐? 반천맹 사자 같은 건 네가 알아서 하라고 말하지 않았더냐?"

한진성의 입술이 달싹였다. 그녀에게 전음을 보내는 것이었다. 잠시 후 한진성의 전음을 전해들은 소녀의 눈빛이 예리해지더니 나를 강하게 노려보았다.

"... 넌 누구냐? 반천맹주가 대체 무슨 이야기를 꺼내려 하는 거지?"

나는 눈 앞에 있는 게 백련교의 3대 호법사자 중 한 명이자 화신류의 수장인 한백령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 무위는 이광보다 위일지도 모르며 무한의 내공인 천령단을 얻어버린 반선급의 절대고수였다. 당연하지만 지금의 나로써도 그녀를 상대로 일백 초를 버티면 기적적일 것이다.

나는 한백령이 날뛰기 전에 급히 말했다.

"저는 백웅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들으신 대로, 뇌신류의 일과 소교주의 괴질에 관해서 함께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빌어먹을 놈... 만일 헛소리를 지껄이는 거면 살아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두쿵

나는 그 순간 한백령에게서 뿜어져 나온 무형지기(無形之氣)가 뻗어나와서 내 심령을 옭아매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는 마치 거미줄에 전신이 칭칭 덮힌 느낌 때문에 꼼짝달싹 할 수가 없었다.

무형지기!

이것은 고수가 내뿜는 살기와는 차원이 다른 것으로, 의념(意念)을 이용해서 발생시킬 수 있는 고유한 능력이었다. 무형지기의 살기의 형태로 내뿜으면 심력이 약한 자에게 심즉살(心卽殺)을 시전할수도 있으며, 정신력이 약한 자를 그대로 제압해버리는 공능도 있었다. 무엇보다도 무형지기가 무서운 것은 왠만한 의지력으로는 감당이 되지 않으므로 무공을 한번 써보지도 못하고 고꾸라져 죽을 수가 있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나는 오랜 세월 수련한데다가 이광에게서 무형지기의 실체에 대해서 설명을 들은 바가 있으므로 대응법을 알고 있었다. 나는 머리 정점에 있는 혈(穴)에 기운을 모으면서 정기(精氣)를 똑바로 모아서 집중했고, 이내 눈을 부릅뜨며 무형지기의 압력을 이겨낼 수가 있었다.

파앙

"호오...?"

내가 무형지기의 속박을 풀어내자 한백령이 눈에서 이채를 띄며 나를 쳐다보았다. 한진성도 놀라워하는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방금 전에 약간 내상을 입은 것 같았기에 옅은 피기침을 토해내며 말했다.

"쿨럭... 헛소리가 아닙니다."

"흐음."

한백령이 골똘히 생각하는 듯 했다.

"반천맹주가 너와 같은 고수를 부릴 수 있단 말이냐? 아니... 너는 반로환동한 것 같지도 않은데 나이에 비해 대단한 실력과 내공이군. 누구의 제자냐?"

한꺼번에 질문과 의문이 쏟아졌다. 나는 그 대부분이 독백같은 거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일단 대답을 했다.

"저는 뇌신류 이광의 제자이자 반천맹의 일원입니다."

"이광! 과연... 그 녀석이 너같은 제자를 키워냈단 말이지."

"이야기를 들어주실 수 있겠습니까?"

"......"

한백령이 고민하다 말했다.

"네 실력을 시험해보고 나서 들어 주겠다."

부우웅

동시에 허공섭물의 경지로 정원 어딘가에서 쌍검이 뽑혀나와서 한백령의 손에 들렸다. 나는 저 쌍검이 휘둘러지는 순간 경천동지할 위력이 뿜어져 나온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마른 침을 삼켰다. 특히 비기 진야월영이 펼쳐지는 순간 나는 피하지도 막지도 못하고 죽어버리고 말 것이리라.

"손속에 사정을 둬 주십시오."

"후후, 아무려면 너같은 꼬마아이에게 전력을 다하겠느냐? 어디 한 번 받아보아라."

낭랑하게 웃은 한백령이 한쪽 손을 가볍게 휘둘렀다. 그와 동시에 엄청난 검풍(劍風)이 열두 개나 뿜어져 나와서 내 주변을 에워쌌다. 나는 이런 검술경지를 본 적이 없었으므로 급히 전륜(轉輪)의 수법을 이용해서 검풍의 막을 빠져나왔고, 다섯 걸음 뒤로 물러선 내게 빛살같은 검기가 날아들어왔다.

카강!

내가 그 은밀한 일격을 막아내었지만 거기에 실린 힘이 굉장해서 다시 두 걸음을 밀려나고 말았다. 등 뒤의 기둥에 쿵하고 부딪히자 잠시 진동이 울려퍼졌고, 나는 다시 진각을 밟으며 힘을 땅으로 밀어내었다.

쐐애애액

한백령의 오른쪽 손에서 재차 검풍이 날아들었다. 나는 이번에는 하늘거리며 느린 공격이라고 생각했지만, 이내 그 실체가 살인적인 밀도의 검염(劍炎)이라는 걸 깨닫고 긴장했다. 그리고는 침착하게 장삼봉의 심득 중에서 굴공검(屈空劍)을 이용해서 한백령의 초식을 옆으로 흘려내고는 자세를 바로잡았다.

여기까지 약 십여 초수를 막아내자 한백령이 즐거운 듯 웃었다.

"아하하! 대단하구나. 검술의 묘(妙)에 달해 있다니, 설마 세상에 이런 기재가 있었단 말인가."

"제 역부족입니다. 제발 공격을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마. 너는 제법 훌륭한 실력이다."

스으으

한백령이 쌍검을 거두어서 멀리 땅에 뿌렸다. 그녀는 무기를 거둔 후 팔짱을 끼며 말했다.

"어디 이야기를 들어보자. 뇌신류와 소교주가 어쨌다는 거냐?"

나는 겨우 한숨을 돌리고는 말했다.

"뇌신류의 수장이신 이광 사부께서는 이번에 개파(開派)를 하시기로 마음먹으셨습니다. 그리하여 그 사실을 백련교에 전하기 위해 한씨세가를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

그러자 한백령이 믿기지 않는듯 침묵하다가 말했다.

"개파라고...? 정말로 이광이 그렇게 말했단 말이냐?"

"그렇습니다."

"미쳤군. 설마 내 손으로 이광을 죽이게 될 줄이야."

나직이 중얼거리는 한백령의 말에는 아무런 감정이 없었기에 더 무서웠다. 지금까지 한백령이 정 때문에 뇌신류의 존재를 알면서도 가만히 놔뒀다는 걸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공과 사를 구분할 줄 아는 인물이었다. 만일 백련교주의 토벌명령이 떨어진다면 그녀는 망설임없이 화신류의 전력을 이끌고 와서 뇌신류를 전멸시키리라.

하지만 그래서야 안될 일이었다. 나는 한백령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그리고 한가지 더 말씀하셨습니다."

"뭐냐?"

"소교주의 괴질을 치료할 단서를 쥐고 있으니, 개파 후 뇌신류에 간섭하지 않으면 좋겠다고."

"......!!"

"협상을 하고싶다는 겁니다."

한백령은 물론 한진성의 얼굴도 기묘하게 변했다.

한백령이 나를 노려보더니 말했다.

"믿을 수가 없다. 이광 놈은 대체 어디 있느냐? 놈이랑 직접 이야기를 해야겠다."

"어째서 믿으실 수 없는 겁니까?"

"네놈들이 단서를 쥐고 있다고? 그게 사실이라는 보장이 어딨지? 백련교가 그런 헛소리에 휘둘릴 정도로 만만하지 않다는 걸 깨닫게 해 주마."

"으으..."

나는 황당하면서도 내심 감탄했다. 여기까지도 망량이 예상한 대로였기 때문이다.

나는 그녀가 막 무력을 써서 나를 제압하려는 순간 말했다.

"뇌신류는 끝까지 정도를 지키고 있는데 어째서 당신은 뇌신류에게 한 번의 기회도 주지 않으시는 겁니까?"

이게 망량이 내게 준 '말'이었다. 나는 여기에 모든 걸 걸 수밖에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한백령은 손을 쓰다말고 멈칫했다. 그녀는 당황과 불쾌함이 섞인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며 물었다.

"무슨 말이냐."

"그 말대로입니다. 뇌신류가 추방될 때, 화신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뇌신류의 호법사자가 죽을 때도요."

"그... 그건..."

한백령이 눈에 띄게 당황했다. 지금껏 그녀가 뇌신류에 가지고 있던 죄책감을 정면으로 공격했기 때문이다. 나는 그녀의 눈을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허나 저희 뇌신류에서는 그 의리의 잘잘못을 따지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화신류의 수장이신 한백령 님께서 그 분을 진정한 친구로 생각하셨다는 사실을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화신류를 잠재적인 동지로 생각지 않았다면 이 자리에 전언을 가지고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

"저를 죽이셔도 좋으나 똑바로 말씀해 주십시오. 정녕 뇌신류에게 한 번의 기회도 주지 않으실 셈입니까?"

한백령은 약간 충격을 받은 표정으로 서 있었다. 한진성은 뭔가 깊은 고민에 빠져있는 듯 했다. 한백령이 한참 후에야 대답했다.

"그렇지는 않다."

"그러면 기회를 주시는 겁니까?"

"으음..."

한백령이 눈쌀을 찌푸리다가 말했다.

"... 좋다. 정 그렇다면 자리를 한 번 만들어보마."

"감사합니다."

"장소와 시간은 반천맹주에게 나중에 전하지."

그렇게 말한 한백령이 엄포를 놓듯 말을 이었다.

"허나 똑바로 알아두어라. 만일 그 전언이 잘못되었거나 거짓부렁이거나... 교주께서 너희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신다면 어쩔 도리가 없다. 너희는 천하제일인의 분노를 정면으로 마주하게 될 것이다."

"알겠습니다."

나는 태연하게 엄포를 받아넘기고는 품 속의 목갑에 손을 넣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안에서 쌍검을 꺼냈다.

녹옥빛을 뿜어내는 신령스러운 쌍검!

이것은 대뢰옥에서 얻은 물건이었고, 언제고 써먹으려고 놔둔 물건이었다. 한백령이 놀란 눈으로 말했다.

"그건 또 무엇이냐?"

"촉한 소열제 유비의 쌍고검(雙股劍)입니다. 자웅일대검(雌雄一??)이라고도 불리죠."

"......!!"

"이번 교섭에 다리를 놓아주시는 댓가로 저희 반천맹에서 성의를 표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내가 녹옥빛을 흘리는 쌍고검을 공손하게 한백령에게 내밀자, 그녀는 얼떨결에 받아들었다. 한참동안 검신을 눈으로 쓸어보던 한백령이 탄식했다.

"과연... 내 애검(愛劍)에 못지않은 명검이구나. 이게 정말 쌍고검이라면 반천맹은 내게 정말 큰 선물을 준 것이다."

"받아주시겠습니까?"

"물론이다. 내 이름을 걸고 반드시 교섭자리를 만들어주겠다."

"감사합니다."

나는 일이 끝났다는 걸 느꼈기에 망설임없이 벗어나려 했다. 그러자 한백령이 나를 불러세웠다.

"백웅."

"네."

"너는 정말로 뛰어난 기재구나. 나중에라도 내 밑에 올 생각이 없느냐?"

"......"

"왕후장상(王侯將相)의 자리도 줄 수 있다."

일개 무림세가에서 왕후장상의 자리를 논하는 건 거창해보였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우선 한씨세가의 금력은 천하제일이기 때문에 왠만한 벼슬자리를 사들이는 건 일도 아니었고, 권력가에 입김을 넣어서 요직에 넣어주는 것도 쉬웠다.

게다가 고관대작들도 한씨세가에 돈 유통 때문에 벌벌 길 정도인 것이다. 또한 만일 소교주가 치유된다면 무림도 백련교가 장악하게 될테니 한백령의 제안은 결코 허황된 소리가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저는 이대로가 좋습니다."

"그런가..."

나는 아쉬워하는 한백령을 등지고 한씨세가에서 나왔다. 그리고 반천맹으로 돌아가서 망량에게 협상이 성공했음을 알렸다. 그러자 망량은 크게 기뻐하며 말했다.

"잘했소!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는데 잘 해냈군. 이걸로 한씨세가의 도움을 한층 크게 받을 수 있을 거요."

"다음으로는 뭘 하면 되오?"

"당연히 정사파의 수장들과 교섭해야지."

망량이 훗하고 웃으며 태연하게 다음 의뢰를 넘겨주었다.

"이제 가서 무당파부터 손에 넣으시오."

============================ 작품 후기 ============================

문피아에서 북천팔가라는 글 읽어봤는데 아쉬운 건... 이제 이렇게 잘 쓴 무협도 올라가기 힘들다는 거군요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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