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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황오제(三皇五帝)
잠시 후 동방무결을 큰 탁자에 앉히고 뇌신류 고수들이 둘러싸듯 앉았다. 일단은 동방무결이 천하오대의원이자 강호의 명숙인 건 사실이었고 우리가 그를 무력으로 을러서 납치해온 것도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이광은 그래서인지 정중하게 동방무결에게 말했다.
"반갑소. 나는 이광이라 하오."
"섬서무림을 진동시켰던 청룡(靑龍)을 이렇게 만나게 되는군."
"나 또한 괴의를 보게 되어 반갑소."
가볍게 서로간의 인사를 마치자 동방무결이 말했다.
"어디서부터 듣기를 원하나?"
"물론 모든 것을."
"내 나름대로 성의를 다하라는 건가."
"그래야하지 않겠소?"
이광은 점잖게 말하고 있는 듯 했으나 속에는 칼날같은 기세가 담겨 있었다. 겉으로는 예의를 차리고 있으나 언제 분위기가 험악하게 돌변할지 모른다는 뜻이었다. 일반 서생처럼 이광을 대하는 것처럼 멍청한 짓도 천하에 달리 없었다. 그런 이광의 본심을 짐작한 듯 동방무결이 쓴웃음을 지었다.
"좋아. 나와 백련교가 어떻게 해서 인연을 맺게 되었나부터 이야기하겠네."
좌중의 시선이 그에게 고정되었다.
"지금부터 약 수십 년 전의 일일세. 아마 자네들 뇌신류가 쫓겨나고 나서의 일이겠지. 나는 천하가 좁다하며 돌아다니고 있었는데 백련교에 호기심이 생겨서 백련교의 본단을 방문하게 되었지.
그 때 나는 백련교에 입교(入敎) 할까도 생각했으나, 왠지 백련교는 외부인을 많이 배척하는 분위기였네. 그래서 적당히 손님으로써 구경만 하고 나가려 했는데 백련교주가 나를 부르더군."
"백련교주가?"
"그는 내게 천지를 돌아다니며 용화수(龍華樹)를 찾아줄 것을 부탁했네."
그 말을 들은 이광이 잠시 생각하다가 대꾸했다.
"용화수란 건 불교에서 말하는 미래불(未來佛)이 하생(下生)한다는 전설의 나무가 아닌가?"
"그렇네."
"지금 내게 농짓거리를 하다가는 무사하지 못할 것이오."
쿠오오...
이광이 몸에서 살기를 일으키며 엄포를 놓았다. 그 기세는 주변에 앉아있던 뇌신류 제자들조차 흠칫하고 떨 정도였다. 동방무결은 내공이 금제되어서 그 살기를 받자 얼굴이 창백해졌지만, 이내 강단있게 말했다.
"내 이름을 걸고 말할 수 있네. 분명히 교주는 용화수를 찾아달라 했어."
"......"
"미륵(彌勒)이 현신한다는 그 나무가 맞네."
미륵!
미륵이란 불교에서 말하는 미래불이었다. 석가모니가 열반에 든 이후 56억 7천만년이 되었을 때 도솔천에서 이 세상으로 하생(下生)한다고 한다는 전설이 있었으며, 미륵은 하생하기 전까지 도솔천(兜率天)의 보살로 머물면서 중생을 교화하고 있다고 알려졌다. 이 때문에 미륵을 보살이라고도 하고 부처라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너무나 까마득한 56억 7천만년이라는 세월과 함께, 용화수는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신화(神話)의 상징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불교를 모시는 절에서야 용화전이나 미륵전을 만들어서 그 존재를 기리지만 실제로 용화수가 존재하는지 어떤지는 고승조차도 확신할 수 없는 일인 것이다.
하물며 천하무림의 지존이라 할 수 있는 백련교주가 용화수를 찾아달라고 하다니!
이광은 일단 들어보기로 한듯 살기를 진정시키며 물었다.
"그래서 뭐라 대답했소?"
"당연히 알겠다고 했지. 교주가 자신의 이름을 걸고 [용화수는 존재한다]라고 내게 확신을 주었기 때문일세."
"... 뭐라고...?"
"나는 그 날 이후부터 백련교에 자유출입할 수 있는 권한을 얻었고 호법사자들과도 데면데면하게나마 이야기를 틀 수 있었지. 그리고 천하를 돌아다니면서 용화수의 존재를 찾기 위해서 여행을 했네."
이광은 물론 듣고 있던 우리들까지 입을 다물고 들을 수밖에 없었다. 특히 이광의 얼굴은 썩 좋지 않은 낯빛이었는데, 백련교주가 용화수의 존재를 확신했다는 사실을 충격으로 여기는 모양이었다. 이광이 가만히 듣고 있다가 그에게 대꾸했다.
"용화수라는 나무는 중원에도 있소. 존재하는 나무지. 설마 그런 걸 찾으려고 당신은 남만까지 갔던 거요?"
동방무결이 훗하고 웃었다.
"흥, 내가 그거 하나 모를거라 생각하나? 물론 수종(樹種)으로써의 용화수는 흔하지는 않지만 중원 여기저기에서 볼 수 있는 나무지. 허나 교주가 말한 용화수란, 바로 미륵이 강림할 수 있는 신력(神力)을 머금은 고댓적의 시원(始元)의 품종을 말하는 것일세. 부처라고 불리는 신적인 존재가 강림할 수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네."
"신력이라... 그런 미신같은 걸 백련교주가 믿는다는 말인가."
"내게 따지지 말게. 나는 천하제일인 백련교주가 확증해주는 말만 믿었을 뿐이니까."
이광은 물론 자리에 앉아있던 뇌신류 고수들이 복잡한 안색이 되었다. 다만 나는 신화나 주술, 그리고 인외(人外)의 존재에 익숙한 탓에 그리 놀랍지는 않았다. 백련교주가 천하제일인인 이상 초월적 존재들과 관련이 반드시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동방무결의 말이 이어졌다.
"그래서 중원의 온갖 곳을 뒤적거리고 신화나 전설을 따라서 탐색했는데 영 보이지가 않더군. 그러던 중에 갑작스럽게 백련교에서 사자가 와서 소교주의 괴질을 치료해 달라고 나를 소환했네."
"천하오대의원이 한 자리에 모였던 일이군."
"그래. 다른 녀석들도 의술에 나름대로 능통한지라 이정도면 세상의 그 어떤 병도 치유할 수 있다고 자부했지. 허나 그 괴질은 뭔가 격(格)이 달랐어. 완전히 이 세상의 병증이 아닌 것 같더군."
한숨을 쉰 동방무결이 말했다.
"이후의 일은 자네들도 알다시피 천하오대의원이 중원의 따가운 시선을 받고 괄시받는 것으로 마무리되었지. 단, 나는 다른 놈들과 달리 괴질이 술법이나 저주에 의한 것이라는 걸 알아차리고 백련교주와 대담을 했어."
"백련교주가 뭐라고 했소?"
"백련교주가 말하기를, 순수한 성련이나 용화수 같은 신성한 물건을 구해오거나, 혹은 저주의 근원을 해치우지 않는 이상 어쩔 수 없다 했네."
듣고 있던 이광이 이상하다는 듯 팔짱을 꼈다.
"그럼 애초에 천하오대의원을 왜 부른 거지?"
"혹시나 하는 마음이었겠지. 의술으로써 어떻게 해볼 수 있지 않은가 시험해 본 것일게야. 허나 결과는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던 것일세."
"그렇군... 그래서 당신은 다시금 용화수를 찾아나서기 위해 천축(天竺)까지 갈 결심을 한 것이군."
"그 말에 맞네."
"도중에 남만에 들린 이유는?"
동방무결이 어깨를 으쓱했다.
"천축만큼은 아니지만 남만의 여러 열국(列國)들도 불교 신화에 깊게 연관되어 있는 곳일세. 기왕 용화수를 찾기로 마음먹었다면 꼼꼼히 뒤지기로 했네."
이광의 눈이 날카롭게 변했다.
"뭔가 괴질을 고칠 해결책을 찾았군. 그래서 중원에 돌아온 거야."
"그 말이 맞네. 다만 바로 찾아내진 못했지."
"그 해결책이 무엇이오?"
이광의 물음에 동방무결이 대답했다.
"이야기해 주겠지만 그 전에 나도 한가지 듣고싶은 게 있네."
"말해 보시오."
"저 꼬맹이는 대체 뭔가?"
동방무결의 시선이 향한 것은 바로 내 쪽이었다. 모두의 시선이 내게로 향하자 동방무결이 마치 요상망측한 무언가를 보는 듯한 눈으로 나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저 황금비등도 그렇고 목갑도 그렇고... 술법(術法)의 기물이라고 하기에도 너무 엄청난 물건들을 들고 있다니. 게다가 무공수준도 도저히 저 나이대라고는 믿기지 않아. 도대체 저 백웅이란 아이의 정체가 뭐지?"
"......"
잠시 침묵하던 이광이 대꾸했다.
"백웅은 뇌신류의 제자요. 내겐 그 사실만이 중요하오."
"저 희한한 기물의 연원을 묻지 않는 것인가?"
"흐음."
이광이 힐끔 나를 바라보더니 불쑥 물었다.
"백웅. 황금비등과 목갑을 어디서 얻은 것이냐?"
간단해 보였지만 대답하기 힘든 질문이었다. 하지만 어차피 이광을 비롯해서 뇌신류 고수들을 반천맹과 합류시킬 예정이었으므로, 나는 조금 시기가 빨라졌다고 여겼을 뿐이다. 그래서 천천히 대답했다.
"이건 해적을 토벌하고 얻은 물건입니다."
"해적?"
"고려로 향하는 상로를 장악한 혈도단을 개인적으로 토벌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황금비등과 목갑을 혈도단의 본거지에서 얻은 것처럼 대답했다. 물론 목갑은 황연장군을 가두고 있던 대뢰옥에서 습득한 거였지만 그 얘기까지 하다보면 황연 대장군이나 반천맹 이야기가 안나올 수가 없었기에 그 이야기를 숨겼다. 또한 황금비등과 목갑의 효능을 알아내서 사람들을 도와준 이야기까지 하자, 이광이 감탄했다.
"너는 정말 의협(義俠)의 기질이 있구나. 아무 댓가도 바라지 않고 사람들을 그렇게까지 도와줄 수 있단 말이냐?"
"과찬이십니다."
나는 대답하면서도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지금 이광은 물론이고 진소청이나 극호도 진심으로 감탄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것은 내 모험담이 재밌어서 빠져있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내 의협심에 놀라워하는 것이다.
' 뭐지? 내가 그렇게 의로운 일을 한 건가?'
나는 그런 일은 당연한 것이라고 망량에게서 들었다. 그래서 크게 내세우거나 잘난척할 기분은 들지 않았다. 내가 내심 고민하고 있을 때 이광이 물었다.
"그런데 왜 내게는 그런 물건이 있다 이야기하지 않은 것이냐?"
"이야기할 여건이 되지 않았습니다."
"흐음...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하자. 아무튼 알겠다."
"네."
이광은 우선 이야기를 접어두고는 다시 동방무결에게 고개를 돌렸다.
"들은 바와 같소. 이 아이는 뛰어난 기재인지라 자신의 일을 찾아서 한 것 뿐이오. 뇌신류의 제자라는 사실을 더 의심할 필요는 없는 것이오."
"흐음..."
동방무결은 마뜩찮은 눈으로 나를 쳐다보다가 말했다.
"아무튼 나는 남만 월국에서 해결책을 찾을 수 있었네. 월국의 국왕인 흑태자(黑太子) 나레쑤언의 도움을 받아서 월국에 있던 고대의 도서관을 열람할 수 있었고, 그 곳에서 용화수의 위치, 그리고 칠요(七曜)의 전설을 알아냈다네."
"당신 월국어도 할 줄 아오?"
"이 나이까지 멋으로 산 것은 아니지. 주변 7개국의 언어를 모두 할 줄 아네."
"호오..."
그들이 적당히 이야기를 이어가고 있었지만 나는 그걸 듣자 깜짝 놀랐다.
칠요!
어째서 여기서 칠요에 대한 언급이 나온단 말인가? 내가 그들의 대화에 주의깊게 정신을 기울이자 동방무결의 말이 이어졌다.
"용화수라는 건 화요(火曜)의 비보 곁에서 화기로 자신의 씨앗을 데우며 억겁의 세월을 기다리는 존재라고 하네. 즉 화요의 비보가 숨겨져 있는 장소를 찾아낸다면 용화수 또한 손에 넣을 수 있겠지."
"그래서 어디 있는 거요?"
"......"
잠시 우물쭈물하던 동방무결이 말했다.
"음 뭐라고 해야할까... 정말, 정말로 먼 곳에 있을 것일세."
"그러니까 어디?"
"남만 월국에서 더 내려가면 있는 남쪽 섬나라 군도에서 더더욱 밑으로 내려가면 대양(大洋)이 나오는데... 거기서 더욱 몇천 리를 남쪽으로 가면 신농씨가 황제에게 패해서 유배되었다는 전설의 대륙이 나올 것일세."
"......"
"......"
좌중이 침묵으로 물들었다. 보통 남만이나 천축만 해도 어마어마하게 머나먼 새외라는 인식이었는데 지금 동방무결이 언급한 장소는 환상, 혹은 세상의 끝이라 불러도 부족함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이광이 약간 짜증을 냈다.
"당신 정말로 나를 놀리는 거 아니오?"
"빌어먹을! 이래서 얘기하기 싫었던 것일세. 백련교주나 믿어주지 대체 누가 믿어주겠는가? 하지만 이건 전부 내가 직접 조사한 것이고 얻어낸 성과일세."
"크흠..."
이광이 불편하게 헛기침했다. 아마 그의 감각에 동방무결이 '사실'을 말한다는 게 포착되었기에 뭐라 강경하게 나가기가 힘든 탓이리라. 그 때까지 가만히 듣고 있던 진소청이 손을 들며 질문했다.
"감숙 서쪽에 있는 백련교에 가서 그 사실을 이야기하려 한 거요? 결과적으로 당신이 찾아낸 것은 세상의 남쪽 끝에 가면 된다는 건데, 그걸로는 좀 부족하지 않았겠소?"
그러자 동방무결이 약간 찔리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렇지. 그래서 또 하나의 전설에서 다른 치료법을 하나 더 알아왔네."
"그게 무엇이오?"
"바로... 순수한 태초의 성련(聖蓮)이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이지!"
이광이 끼어들었다.
"성련이란 건 백련교에서만 재배되는 영약 아니오? 그게 순수한가 아닌가의 차이가 큰 상관이 있소?"
"으음... 그게 말이지, 지금의 백련교 성련은 양산을 위해서 본래의 품종에서 신기(神氣)를 빼버린 것일세. 순수한 태초의 성련이라면 소교주의 괴질을 바로 치료할 수 있을테지만 지금의 성련은 그저 내공만 늘여주는 영약에 지나지 않지."
잠시 숨을 고르던 동방무결이 눈을 빛냈다.
"내가 월국의 고대도서관에서 알아낸 바에 의하면, 그 순수한 태초의 성련은 수요(水曜)의 유적 근처에 피어나는 흑백련(黑白蓮)의 형태라고 하네! 수요의 유적은 중원 어딘가에 있는 게 분명하니, 그것만 찾아내면 분명히 순수한 흑백련으로 소교주의 괴질을 치유할 수 있을 것이야."
그 말을 들은 이광이 감탄한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굉장하군... 당신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는 억만금같은 정보요."
"으하하."
"그래서... 수요의 유적은 어딨소?"
그러자 동방무결이 뻘쭘한 표정을 지었다.
"어 그게... 나도 잘 모르네. 삼황오제(三皇五帝) 전욱(?頊)이 마지막으로 치수(治水)의 증거를 남긴 태곳적의 산(山)이라고 단서는 가져왔는데, 어딘지는 잘 모르네..."
"흐음. 알겠소."
그들이 얼추 이야기를 마무리하려 했지만 나는 입이 근질근질한 걸 참기 힘들었다. 그리고 웃음을 참느라 혼났다. 나는 속으로 외쳤다.
' 그래서였구나!'
과거 고려에서 유출한 흑백련이 백련교로 흘러들어가자 백련교가 살아났던 이유.
그리고 흑백련을 찾으려고 호법사자가 고려까지 왔던 이유.
10번째 전생에서 겪었던 일의 인과가 14번째 전생이 되어서야 풀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