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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황오제(三皇五帝)
내가 다시 동방무결이 있던 곳으로 돌아오자, 거기서는 한창 대결이 진행 중이었다. 동방무결은 마치 무진장의 내공을 지닌 것처럼 쉴새없이 수십 장 단위로 거대한 장력을 파도처럼 뿜어내고 있었으며, 그 광경은 인간의 무공이 아닌 것처럼 생각됐다.
쿠오오오
그리고 진소청은 그 엄청난 공격에 맞서서 멸혼보를 전개하며 차분하게 틈을 노리고 있었다. 진소청에게 제대로 격중된 공격은 아직 하나도 없어보였으며 그가 번뜩이는 매의 눈으로 헛점을 찾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결국 그 사실을 알아차렸는지 동방무결이 장력을 잠시 거두며 진소청을 노려보았다.
"이 놈... 무슨 놈의 신법이...!!"
진소청은 땅에 내려섰다.
"더 안 하시오? 못 하는 건가?"
"......"
진소청이 느긋하게 대꾸하자 동방무결은 입을 꾹 다물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자 현재 상황을 짐작 가능했다.
' 내력이 많이 떨어졌군.'
아마 왠만한 고수들은 동방무결이 거대한 장력을 뿜어내는 것만으로도 충격과 공포에 휩싸여서 죽었을 것이다. 저 범위 내에 들어가면 피하는 것도 막는 것도 용이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소청이 멸혼보를 이용해서 모조리 피해버리자 자신의 내공만 소비하는 꼴이 된 것이다.
"흠!"
그렇다 해도 나는 진소청의 멸혼보 성취에 놀라서 침음성을 흘렸다. 분명히 뇌신류 고수들 모두가 멸혼보를 익히긴 했지만, 내가 방금 동방무결의 공격을 진소청처럼 한 식경 넘게 피해낼 수 있느냐고 하면 그건 어려운 문제였다. 진소청의 멸혼보 경지는 고작 몇 달 동안에 굉장히 진보한 게 틀림없었다.
타다닷
어느 새 극호가 장내에 도착해 있었다. 그는 전신에 땀을 흘리고 있었는데 꽤나 격전이었던 모양이었다. 극호가 씩 웃으며 말했다.
"뭐야뭐야, 여기가 제일 늦는 거야? 창피하다 진소청."
"민망합니다 사형. 하지만 저 자의 내공이 정말 막대하군요."
극호가 사방에 펼쳐진 장력의 흔적을 힐끔 보았다.
"그런 거 같구만. 이 놈이 대장이구나."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어떻게 하긴? 다구리 쳐."
스스스
극호의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우리 셋은 삼재진(三才陣)의 형태를 갖추어서 동방무결을 포위했다. 동방무결은 어리벙벙한 기색으로 우리를 둘러보았는데, 특히 내 쪽을 보면서 이상하다는 듯 말했다.
"애송이. 네가 설마 백원쌍마를 이겼다는 거냐?"
"물론. 안 그러면 그가 나를 가만히 놔뒀겠소?"
"크... 이 무슨..."
동방무결은 당혹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백원쌍마가 질 가능성 같은건 염두에도 두지 않았던 듯 싶었다. 하긴 그들 하나하나가 초절정급 검도고수였으니 어찌 그런 생각을 하겠는가! 하물며 나같은 어린애에게 일대일로 꺾이리라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으리라.
나는 검을 겨누며 말했다.
"당신을 죽이자는 게 아니라 서로 도울 수 있다고 분명히 얘기했소. 순순히 포기하지 않으면 당신 목숨은 책임 못 지오."
"......"
동방무결이 힐끔힐끔 포위진을 곁눈질하는 기색이었다. 삼재진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세 방위를 틀어막을 뿐이지만 뇌신류 고수들이 구성원이 된다면 더할나위 없는 포위진이 되었다. 동방무결이 설령 내공을 폭발시키듯 뿜어내서 빠져나가려 해도 셋 중 누구도 거기에 당해줄 사람이 없기에 결국 동방무결은 당하고 말 것이다.
동방무결은 진소청을 바라보더니 말했다.
"정말이냐? 정말로 소교주의 괴질때문에 온 것이냐?"
"그렇소."
"으으... 내 목숨을 보장한다면 투항하겠다."
"물론."
스으으
동방무결이 이내 기세를 낮췄다. 그리고 극호가 천천히 걸어가서 그를 포승줄로 포박했다. 물론 동방무결의 무공이라면 이런 포승줄 따위는 내공을 일으키는 것만으로 끊어버릴 수 있기에, 극호는 뇌신류의 수법으로 내공금제를 가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끄으응."
순식간에 이류급 무인 이하로 떨어진 동방무결은 괴로운 소리를 냈다. 하지만 우리 셋 모두가 동방무결 때문에 한차례 고생한 뒤라서 그에게 동정의 여지를 주지는 않았다. 극호가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꼬맹아. 네가 물어봐라."
극호의 생각에는 이번 일을 주도한 게 나였으니 내가 심문하는 게 가장 좋다고 생각하는 듯 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동방무결에게 다가갔다.
"천상괴의 동방무결. 나는 백웅이라고 하며 뇌신류의 제자이자 화씨세가 의술을 전해받은 방계의 혈족이오. 내가 당신을 찾은 이유는 천하오대의원과 백련교 소교주의 괴질에 얽혀있는 비사를 알기 위해서였소."
"......!!"
동방무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화씨 일족? 너는 광명신의 화서명에게서 내 이야기를 들은 것이냐?"
"그렇소. 당신들 다섯 명이 백련교에 반강제로 초빙되었다는 걸 알고 있으며, 그당시의 일도 전해들었소."
"......"
"그리고 당신만이 유일하게 괴질의 정체를 짐작하고 있을 거라고 짐작했었소. 괴질의 정체를 저주의 일종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더군."
동방무결이 자신의 상체에서 약간 힘을 빼었다. 그는 나무에 기대어서 한숨을 쉬었다.
"아무래도 평범한 무뢰배는 아닌 것 같군. 정말로 그 일이 궁금해서 나를 찾아온 것이냐?"
나는 그를 냉엄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다른 천하오대의원은 모두 자기 살 길을 찾아서 강호에서 몸을 숨긴 상황이오. 그런데 유독 당신만이 사천당문과 부딪히는것도 감수하며 남만 월국까지 갔다왔지. 당신에게 괴질을 치유하려는 강한 의지가 있다고밖에 볼 수 없소."
"으음..."
"우리 뇌신류는 반드시 당신이 무엇을 노리고 있는지, 괴질에 대해 어디까지 알아냈는지 알아봐야겠소."
그렇게 말하자 동방무결이 끌끌 웃었다. 그 웃음은 비웃음이라기보다는 허탈한 웃음이었다.
"흐흐... 뇌신류. 너희라면 나를 찾아올 만 하구나. 백련교에서 추방되었으니 그 자들의 약점을 조금이라도 알고 싶겠지."
"지금은 우리가 당신을 속박해두었지만, 앞으로 우리가 서로 도울 부분도 있으리라 생각하오."
"......"
동방무결은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모습이었다. 한참 후 그가 말했다.
"포승을 풀어다오. 그렇지 않으면 이야기를 하지 않겠다."
나는 극호와 진소청을 힐끔 바라보았다. 그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포승은 만에 하나를 대비해서 묶어놓은 것일 뿐, 실질적으로는 내공금제로 동방무결을 묶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동방무결의 포승을 풀어주자 그는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한 가지 제안하고 싶은 게 있다."
"무엇이오?"
"나는 백련교에서 꼭 얻고싶은 게 있다. 그걸 얻는 걸 도와줄 수 있겠느냐?"
"으음."
예상치 못한 소리였다. 그러자 옆에서 듣고 있던 극호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건 우리 사부께서 결정하실 일. 하지만 이야기에 따라서는 받아들일 수도 있다."
극호가 우리를 인솔하는 최연장자였기에 이런 이야기를 빠르게 결론내려준 듯 했다. 동방무결은 극호의 대답에서 우리의 관계를 어느 정도 감잡았는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그럼 선제시를 해놓고 나중에 대답을 듣지."
"맘대로 하시오."
"결론부터 말하지. 추측한대로 백련교 소교주의 괴질은 저주로 인한 것이다. 너희 생각대로 나는 그 저주를 풀기 위해서 천하를 돌아다녔다."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물었다.
"사천당문의 독술을 배우려 했던 것은 무형지독으로 저주를 해제하기 위해서였소?"
"거기까지 캐냈느냐? 넌 정말로 내 일에 관심이 많구나."
혀를 내두르던 동방무결이 말했다.
"그렇다. 하지만 무형지독이라는 건 적어도 몇 세기가 지나야 등장할 수 있는 것 같더군. 그래서 나는 독에 대해서는 일단 포기하고 남만 땅으로 가보기로 했다."
"남만에는 왜 갔소?"
"정확히는 남만을 넘어서 천축(天竺)까지 가볼 생각이었다. 그들은 신묘한 술법에 달통해 있으며 오랜 역사동안 신화(神話)나 저주에도 해박하다 들었기 때문이다."
무엇을 얻었는가.
우리가 궁금해서 그를 바라보자, 동방무결이 손에 깍지를 끼며 말을 이었다.
"짐작한대로 나는 남만에서 얻을만한 게 있었고 그래서 천축까지는 가지 않고 중원에 돌아왔다."
"무엇을 얻었소?"
"......"
동방무결이 히쭉 웃더니 말했다.
"여기서는 할 수 없다. 너희의 수장에게 이야기를 해야겠다."
"그래야 할 이유는?"
"너무나 믿기가 힘든 이야기이기 때문이지. 똑바로 전달되지 않는다면 내가 한스러워서 참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잠시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극호가 말했다.
"괜히 있어보이는 척 하지 마쇼. 우린 지금 당장 강제로라도 이야기를 들을 수 있으니까."
스스스스
극호의 손에 기운이 떠올랐다. 그것은 뇌신류의 고문비술인 팔괘봉인을 시전하려 할 때 나타나는 형상이었다. 역시 그 또한 뇌신류의 비전을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러자 동방무결은 눈 하나도 깜짝하지 않고 말했다.
"멋대로 해라. 하지만 고문으로 끌어내는 정보가 확실치 않다는 건 너희도 알고 있을 텐데? 내 정보에는 천금의 가치가 있다고 자부하는데 섣불리 행동하다 모두 그르쳐도 좋은 건가?"
"......"
동방무결의 말은 사실이었다. 이광처럼 고문에 달통하며 숙련된 자가 아니라면, 팔괘봉인을 써서 극도의 고통만을 가하는 건 위험한 고문법이었다. 왜냐하면 극한의 고통이 마음의 족쇄를 끊어서 비밀을 털어놓게 할 수는 있지만, 세부적인 정보가 과도한 고통때문에 혼선을 빚어서 왜곡된 정보가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섣불리 고문을 반복할 경우 상대방의 정신이 먼저 망가져버릴 우려가 있었다.
진소청이 투명한 눈으로 동방무결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렇게 믿기 힘든 이야기를 우리 수장께서 믿어주신다는 보장은?"
"없지. 그건 전적으로 내 책임이니 감수하겠다."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우선 넘기겠소..."
진소청이 동방무결의 이야기를 받아들였지만 나나 극호는 그다지 딴지를 걸 수 없었다. 동방무결의 허세에 눌린 기분도 들었지만 섣불리 행동하다가 대업을 그르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나는 그에게 질문했다.
"그 두 명의 검객은 백원쌍마라고 하더군. 그 자들은 사천 무후사의 도박판에 참여한 거 같았는데 대관절 무슨 경위로 당신을 따라다니게 된 것이오?"
"그들은 내 나름대로 고용한 호위(護衛)였다."
"호위?"
"네놈들이 알지는 모르지만 백원쌍마는 월녀검(月女劍)을 익힌 고수들이었다. 사파에서는 손꼽힐 정도지. 나 홀로 운남을 거쳐 남만으로 가는 여로가 불안해서 그 자들을 마작판을 이용해서 끌어들였다."
"그거 때문에 사천 무후사에서 마작을 쳤단 말이오?"
"그렇다. 짜릿함을 즐기고 싶었지."
"......"
나는 상황이 어찌된지 알자 어이가 없었다. 동방무결은 자신의 호위를 구하기 위해서 마작을 친 것이다! 그리고 마작에 확실히 이기기 위해서 도왕 벽지상을 끌어들여서 승리를 주도했고, 백원쌍마가 도박에 져서 동방무결의 남만행에 동행하게 된 셈이었다. 하지만 그저 짜릿함만을 위해서 굳이 무후사에서 마작을 쳤다는 건 그의 정신상태를 의심하게끔 만들었다.
"그럼 하남쪽으로 중원에 돌아온 이유는?"
"그야 절강성 쪽의 해로(海路)를 타고 월국에서 돌아왔는데 안휘성을 지났더니 하남이었을 뿐이다."
"어디론가 향하고 있었군. 어디요?"
"감숙(甘?)으로 가고 있었다."
감숙성.
그곳은 서북에 위치한 지방으로써 섬서에서 한참 북으로 가면 나오는 지역이었다. 서량이라고도 불린 곳이었으며 전반적으로 척박한 대지가 많았다. 나는 동방무결의 행로를 머릿속에서 중원지도를 통해서 재어보다가 황당해서 말했다.
"아니 그냥 육로를 통해서 다시 사천을 통해서 직통으로 감숙에 올라오는게 훨씬 빠르지 않소? 뭐하려고 몇천 리 떨어진 절강성까지 가서 육로로 중원을 가로질러서 감숙성에 간다는 말이오?"
"백원쌍마가 자기들 문파를 관리해야 해서 꼭 들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
"놈들도 일파의 종주인데 내기에 져서 따라온 거니까."
백원쌍마의 문파 본거지는 아마 절강성이나 안휘 쪽에 있는 모양이었다. 하긴 몇천 리나 떨어진 남만 땅에 갔다가 돌아온 거면 고향이 그리울 수밖에 없으리라. 퉁명스럽게 대답한 동방무결이 말을 이었다.
"내 일행이 하남성에서 미적거린 이유도 궁금하겠지. 그건 누군가가 우리를 추적하는 기색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뭐라고?"
"그래서 적당히 미끼를 던진 후 걸리기를 기다렸던 거다."
그 이야기를 들은 진소청이 한숨을 쉬었다.
"신녀문의 추적이 들통났었군."
이광이 마도팔문 신녀문을 고용해서 정보를 얻은 것까지는 좋았는데, 동방무결과 백원쌍마는 다들 초절정고수였기에 그들의 추적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그래서 일부러 빈틈을 보이는 척 하면서 추적자를 잡으려 한 셈이다. 초절정고수가 셋이나 있으니 천하에 두려울 게 없었으리라. 그러나 이쪽 뇌신류의 전력이 한 수 위였다는 게 그들의 오산이었다.
동방무결이 말했다.
"헌데 너희는 정말 각오가 되어있는 것이냐?"
"무슨 각오 말이오?"
"내게서 괴질의 비밀을 듣는 순간 빠져나갈 수 없는 수렁에 빠질텐데."
"그런 건 당신이 걱정해줄 일이 아니오."
"크흐흐..."
"그럼 이동하겠소."
우리는 동방무결을 데리고 이동하기로 했다. 물론 내공을 금제한 동방무결을 데리고 몇날며칠을 뛰어서 섬서까지 돌아가는건 너무나 고생스러운 일이었으므로, 나는 어쩔 수 없이 비등을 꺼냈다.
"사제 그건 무엇인가?"
"아주 좋은 물건입니다."
나는 대충 대답하고는 비등과 목갑에 대해서 설명했다. 그러자 세 사람의 얼굴에 경악이 감돌았다. 물론 올 때 왜 비등을 쓰지 않았느냐에 대한 것은 내가 하남에 온 적이 없다고 거짓말을 함으로써 해결되었다.
잠시 후 세 사람을 목갑에 넣은 후 비등을 시전했다.
파앗!
나는 청룡무관 와룡전 안에 도착해서는 목갑에서 세 사람을 해방했다. 그들은 순식간에 몇천 리를 격해서 와룡전에 도착하자 어리벙벙한 안색이었다.
그리고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무슨 일이냐?"
이광이 이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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