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검신-158화 (158/1,615)

0158 ----------------------------------------------

삼황오제(三皇五帝)

타다닷

나, 진소청, 극호는 멸혼보를 응용해서 빠른 속도로 하남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멸혼보를 쓰면 통상의 보법보다 훨씬 적은 내력과 체력소모로 말보다 훨씬 빨리 오랫동안 달릴 수가 있었다. 원래는 나처럼 무지막지한 내공을 가지고 있어야 가능한 주파력이, 멸혼보를 이용하면 쉽게 얻어지는 것이다.

' 멋진데.'

당연한 말이지만 원래부터 내공이 많았던 내가 멸혼보를 쓰자 아주 날아다닐 것 같았다. 4박5일을 계속 뛰기만 해도 될 것 같았다. 이제 천하를 내 집처럼 돌아다닐 수 있다고 생각하자 유쾌한 기분이 들었다. 뭐, 비등을 사용하면 더 쉽긴 하지만 그렇다 해도 이동력이 높아졌다는 건 즐거운 일이었다.

그리고 그런 이유로 나는 두 사람의 속도와 체력에 맞춰서 가야 했다. 지금까지 그들에게 비등의 존재를 숨겨 왔기에 이제 와서 꺼내기도 뭣한 일이었다. 비등을 꺼내도 무방하긴 하겠지만, 왠지 비등은 숨기는 편이 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나무등걸에 앉아서 쉬고 있던 극호가 이마의 땀을 닦으며 말했다.

"허억... 헉... 미치겠군. 이 꼬맹이 내공이 뭐 이렇게 엄청나?"

어색한 격식이 거짓말처럼 극호는 예전 상태로 되돌아가 있었다. 반 년 이상 같이 무학토론을 하고 대련을 하는 동안 극호나 진소청과는 많이 친해져 있었다. 까불락거리는 극호의 목소리를 듣자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천년설삼 드십쇼."

"허허 이 새끼가 농담하는 꼬라지 보소? 펫."

헛웃음을 지은 극호는 땅에 살짝 침을 뱉고는 말을 이었다.

"뭐 됐고 정말 동방무결이라는 늙은이 무공이 그렇게 세냐? 정말 우리 셋이 다 가야할 정도야?"

그러자 옆에서 나무열매를 오물거리며 먹고 있던 진소청이 대답했다. 진소청이 나이로 밑이었고 타 뇌신류 전승자였기에 평소에 극호에게 사형 대접을 하고 있었다.

"음... 극호 사형. 그렇지 않을까요. 백련교 호법사자도 섣불리 대하지 않을 정도면 굉장히 강한 거니까."

"야 나무열매 맛있냐? 그거 쓴맛 아냐?"

"드셔보실래요?"

"줘봐."

극호가 이내 열매를 씹어먹더니 인상을 찡그렸다.

"에잉 맛없어."

"뭐 나무열매가 그렇죠."

"으휴... 팔자에도 없는 하남행이라니 나원참."

나는 투덜거리는 극호에게 말했다.

"극호 사형. 합격술같은 거 혹시 아십니까?"

"합격술이 뉘집 애 이름이냐? 뇌신류에도 합격술이 있긴 했지만 그건 지금 우리 중 아무도 몰라. 이광 사부도."

"그럼 누가 아는데요?"

"내가 아냐? 중원에 흩어진 뇌신류 전승자 중 누군가가 알고 있겠지."

"아쉽네요."

그러자 극호가 털털하게 웃었다.

"푸하핫 긴장빨지 마~ 우리 셋이 덤비는데 이길만한 놈은 저 멀리 백련교에나 한두 놈 있겠지. 그런 늙은이한테 합격술씩이나 안 써도 당연히 이겨."

"그렇겠죠."

내 생각은, 만일 뇌신류 합격술이 있다면 나와 극호가 함께 그걸 펼치면서 손쉽게 동방무결을 포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극호의 말마따나 우리 셋이 덤비면 천하에 두려운 자가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정말로 동방무결의 무공이 호법사자급이라면 모를까 그렇지 않고서야 당연히 이기는 조합이었다.

' 사천당문 하나 어찌하지 못한 걸 보면 동방무결이 호법사자급일 리는 없겠지.'

애초에 호법사자급 무력이란 건 절대자의 무력을 상징했다. 혼자서 무림을 광란으로 휘저을 수도 있는 절대적인 힘이었다. 그렇기에 은근히 초절정고수들이 여기저기에 숨어있다 해도 호법사자와 비견할만한 자는 절대로 찾을 수가 없는 것이다.

내가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진소청이 말했다.

"사제. 동방무결과 무력충돌 외에는 협상할 방법이 없겠나?"

나는 고개를 저었다.

"제가 그에 대해서 정보를 모은 바로는... 없습니다."

"그건 아쉽군."

"봐주다가는 저희가 당할지도 모르죠."

그랬다.

동방무결에 대한 공통적인 평가는 [힘쎈 미친놈] 혹은 [개새끼] 혹은 [미친 또라이] 같은 무시무시한 것이었다. 그것도 근엄하기 그지없는 강호의 명숙들이 공통적으로 내린 평가이니, 천상괴의 동방무결이 평소에 얼마나 막나갔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런 인물과 정상적인 대화나 교섭이 통할 리가 없었다.

' 독의 명가인 사천당문에 싸움을 걸 정도니 말 다했지.'

보통은 은원을 질까 두려워서 누구든지 사천당문을 피하는게 보통인데 가주 당무극까지 열받게 한 동방무결은 확실히 미치광이였다. 나는 도저히 그런 인물과 정상적인 대화를 할 수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어떻게든 무력으로 제압해야만 할 것이다.

극호가 좌공으로 체력을 다 회복했는지 말했다.

"이제 백여 리만 더 가면 하남성 내다. 그 자식은 그 안에서 배회하고 있다니까 반드시 잡자고."

"네."

타다닷

우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하남성에 들어설 수 있었다. 물론 신분을 증명하는 패에 돈까지 지니고 있었으므로 무리없이 통과했다. 성 안으로 들어오자 꽤나 북적북적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하남성도 크군요."

"크지. 대신 여기는 사파가 굉장히 융성하다고 하더군."

"흐음."

나도 들은 적 있다. 하남에 있는 무영문에 서문혜와 인질들을 데려다줄 때 들은 이야기였다. 그 때는 별 생각 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약간의 의문이 생겼다.

"왜 그럴까요. 구파일방의 태두인 소림사가 이렇게 버티고 있는데."

그러자 극호가 피식 웃었다.

"정상적이라면 소림사의 영향으로 사파의 기가 죽어야 정상이겠지. 그런데 하남성주 때문에 그런가봐."

"네?"

처음 듣는 소리다. 하남성주라면 하남성 일대를 다스리는 황족, 혹은 귀족일 텐데 그가 무림세력과 무슨 관련이 있단 말인가? 길을 걷던 나와 진소청이 극호를 돌아보자, 극호가 허리를 쭉 펴면서 느긋하게 대답했다.

"하남성주가 소림사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 모양이야. 그래서 소림속가가 근 몇십 년동안 많이 움츠려있고 소림사에서도 탕마(蕩魔) 활동을 쉽게 나서지 못한다더군. 게다가 하남의 명문정파나 세가들은 다들 돈 모으기 바쁘니, 사파들이 손쉽게 세력을 확장할 수 있다고 하더라고."

"흐음..."

극호가 이런 정보를 잘 알고 있는 이유는 아마 천하를 방랑할 때 하남에 들러본 적이 있기 때문이리라. 나도 하남에 와본 적은 있었으나 그리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처음 듣는 정보였다. 극호의 말을 들은 진소청이 이해가 되지 않는 듯 말했다.

"사파놈들은 세상의 치안을 나쁘게 할 뿐 아닙니까? 성주가 알아서 자기 일을 만든다니."

"에에, 소청아. 세상 일이 그렇게 단순하게 돌아가는게 아니야~ 성주쯤 되면 그런 자질구레한 무림의 일은 별로 신경쓸 것도 아니고, 되려 사파들이 눈치보면서 뇌물을 한아름 안겨주면 어떻겠어? 니네 알아서 하라고 내버려두겠지."

"그럼 민초들은 어떻게 합니까?"

그러자 극호가 황당해했다.

"엉? 높으신 분들이 민초를 왜 신경써? 너 바보냐?"

"......"

"그리고 하남에서 가장 강력하고, 마도팔문에서도 최강이라 불리는 무영문이 일대를 꽉 잡고 있잖아. 무영문이 최대한 잔챙이들을 통제하고 있으니 큰 사건이 벌어지지 않을테고, 그놈들 나름대로의 [질서]란게 잡히는 거 아니겠냐. 그래서 아무도 현재 상태를 바꾸려고 안 하는 거겠지."

진소청은 납득이 가지 않는 듯 했다. 그는 곰곰히 생각하다가 한숨을 쉬었다.

"어렵군요, 사형."

극호가 키득댔다.

"소청아~ 니 무공은 엄청 높지만 아직 세상일을 잘 모르는구나~ 차라리 저 꼬맹이가 훨씬 더 잘 알겠다."

나는 지목당하자 머리를 긁적였다.

' 그야 그렇지. 내가 겪은 세상사도 있으니 지금의 진소청보단 잘 알지. 하지만...'

막상 세상에 출도했을 때 더욱 중요한 것은 본인의 순수한 무력일 때가 많았다. 진소청은 기본적인 지혜가 있으므로 처음에는 좀 허우적댈지 몰라도 조금만 경험이 쌓이면 되려 나보다 쉽게 강호행을 할 것이다. 진소청은 기본적으로 신중해서 큰 실수를 안 하는 편이고, 그건 강호에서 매우 큰 장점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잡담을 하다가 객잔에 도착해서 짐을 풀었다. 그리고 방을 잡고 음식을 시킨 후 극호가 우리를 모아놓고 말했다.

"사부가 이용한 정보통은 마도팔문(魔道八門) 신녀문(神女門)이야. 오늘은 쉬고 내일 신녀문과 접선해서 동방무결을 찾자."

"네."

"발견하면 닥치고 패서 제압한다. 알겠지?"

"알겠습니다."

이광은 신기하게도 마도팔문 중에서도 가장 베일에 싸인 여인들의 문파, 신녀문과 인연이 있는 듯 했다. 그리고 신녀문의 정보력을 자유자재로 이용할 수 있었다. 이광에게 어떤 과거사가 있는지 궁금한 대목이었으나 본인에게 물어도 대답해주지 않을 게 뻔하다.

다음 날 우리는 신녀문의 고수와 만나서 정보를 전해들었다.

"성 내에서 북문 근처의 전봉객잔에서 동방무결이 묵고 있습니다."

신녀문의 고수는 여인으로써 무공이 그리 강해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면사포 뒤에 가려진 얼굴은 형태만 봐도 아름다운 편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극호는 잠시 헤벌레하며 쳐다보다가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험! 놈은 혼자요?"

"아니오. 두 명의 동행이 있습니다."

"두 명?"

"원숭이 가면을 쓴 흑의의 괴인들입니다. 물론 객잔 밖으로 거의 나오지 않지만 그들이 동방무결의 방수인 것은 확실해 보입니다."

그와 동시에 우리는 서로의 눈을 쳐다보았다. 극호는 그녀에게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그 자들의 무공은 어떻지?"

"죄송하지만 저희는 특수한 비법으로 원거리에서 비밀리에 관찰합니다. 무공을 판별할 정도로 접근하지 않아요. 확실한 건 동방무결이 그 자들과 거의 떨어지려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으음..."

"더 드릴 정보는 없어요. 그럼 가보겠습니다."

"살펴 가시오."

휘익!

신녀문의 고수가 사라지자 우리는 다시 객잔으로 향했다. 그리고 극호가 이야기를 꺼냈다.

"꼬맹아. 니가 저번에 말했던 그 원숭이가면 놈들 맞지? 그 뭐냐 무후사에서 넷이서 마작쳤다고 하는 놈들."

"네. 틀림없을 겁니다."

진소청이 팔짱을 꼈다.

"설마 그 길로 사천에서 남만 월국까지 동방무결과 함께 움직였단 건가?"

"확실하지 않습니다."

"그렇지. 중원에 와서 합류했을 수도 있고. 하지만 지금 같이 움직인다는 사실이 중요해."

잠시 고민하던 극호가 말했다.

"꼬맹아. 그 놈들 무공이 어떻다고 했었냐?"

나는 도왕 벽지상의 증언을 떠올렸다.

"분명히 제가 들은 정보에 의하면 굉장히 고강합니다. 동방무결이 놈들에게 무력을 사용할 엄두도 못냈다고 하니까요. 동방무결과 동수이거나 최소한 초절정 턱밑까지 와있는 자들일 겁니다."

극호가 인상을 찡그렸다.

"씨바, 더럽게 꼬이는군. 저 놈들이 호위처럼 붙어있으면 동방무결을 잡기 힘들어."

"어떻게 해야할까요?"

"난 잘 모르겠다. 소청아, 넌 어떻게 생각하냐?"

극호는 시원스럽게 진소청에게 결정권을 넘겼다. 진소청은 계속 생각을 하고 있다가 대답했다.

"저희가 정보를 듣고 움직인지도 꽤 시간이 지났죠."

"뭐 그렇지. 섬서에서 하남까지 오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었지."

"그런데도 동방무결 일행이 계속 성 내의 객잔에서 움직이지 않았다는 건 뭔가 목적이 있어서 기다리고 있다는 겁니다."

"무엇을?"

"그건 모르겠지만... 그걸 알면 일이 쉬워질 겁니다."

나는 진소청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동방무결은 언뜻 제멋대로 움직이고 있는 것 같았지만 [소교주의 괴질을 치료한다]라고 하는 분명한 목적에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지금 하남성에서 며칠 내내 대기하고 있는 것도 이유가 있는 것이리라.

침묵이 흐르고 나서 극호가 말했다.

"그럼 이렇게 하자. 성 내에서 싸우면 분명히 피해가 발생할 테니, 놈들이 움직이기를 최대한 기다렸다가 외딴 곳으로 몰아서 한놈씩 맡는 게 어떻냐? 그렇게 되면 포획할 확률이 높아질 거다."

개개인의 무공으로 승부를 보자는 이야기였다.

"동방무결은 누가...?"

"그야 소청이가 맡아야지. 너랑 나는 원숭이가면을 한 놈씩 맡자."

"알겠습니다."

"전봉객잔은 세 명이 삼교대로 감시하는 걸로 하자. 최소한 칠 주야는 잡자."

그렇게 우리는 전봉객잔을 출입하는 자들을 원거리에서 뛰어난 안력으로 감시하기 시작했다. 상당한 거리를 두고 있었기에 동방무결에게 감시를 들킬 확률은 적었다. 만에 하나 들키더라도 계속 서로 연락망을 확보하고 있었기에 즉시 쫓으면 되는 일이었다.

변화가 생긴 것은 그로부터 사흘 후였다.

"움직이는군."

동방무결과 원숭이가면 둘이 전봉객잔을 나와서 어디론가로 향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기척을 숨기며 조심스럽게 그들을 추격했다. 그들은 성을 나와서 한참동안 인적 없는 풀숲으로 가더니, 왠 야산의 초입부에서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잠시 후 동방무결이 이쪽을 보면서 우렁우렁 외쳤다.

[ 이 애송이들아! 할 말이 있으면 나와서 하는 게 어떻냐?]

우리는 약 육십 장 정도 떨어진 곳에 은신해 있었다. 극호가 인상을 찡그렸다.

"제기럴. 역시 들켰군."

"저 놈들 도망치지 않네요."

"제놈들도 무력에는 자신있다 이거지. 골치아픈 놈들일세."

극호가 할 수 없다는 듯 진소청에게 말했다.

"소청아. 부탁한다. 원숭이가면의 실력이 미지수인 이상 니가 잘 해줘야 한다."

"네. 맡겨두십시오, 사형."

"가자!"

파앗

우리는 거의 동시에 앞으로 뛰쳐나가서 동방무결 삼인방 앞에 섰다. 중앙에 서 있던 동방무결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우리에게 말했다.

"다들 어린 놈들이군. 어디의 방파에서 나온 놈들인지 몰라도 잘 걸렸다."

"어이구~ 무서워라. 너무 쎄서 지리겠어."

"......"

극호가 되려 도발로 맞받아치자 동방무결은 순간 할말을 잊은 듯 했다. 하지만 분노하지 않고 우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는데, 동방무결 옆에 서 있던 원숭이가면 한 명이 말했다.

"동방무결. 어쩔텐가?"

"이런 애송이들에게 일일이 쫄아서야 대업을 이룰수는 없지. 놈들의 배후를 듣자고."

동방무결과 원숭이가면은 동격인 듯 했다. 아마 이득을 위해서 손을 잡은 일시적인 동료같은 관계이리라. 놈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진소청이 말했다.

"잠시만! 다짜고짜 싸우는 건 해결방법이 아니오. 먼저 우리 얘기를 들어주시오."

"무슨 얘기?"

"당신들은 백련교 소교주의 괴질을 해결하기 위해 활동하는 것 아니오?"

"......!!"

그러자 동방무결이 흠칫 놀랐다. 의외로 원숭이가면들은 별로 동요하지 않는 기색이었다. 동방무결이 진소청을 노려보며 말했다.

"네놈은 그 사실을 어찌 알고 있나?"

"그건 중요한 게 아니오. 정말 중요한 건 우리가 서로를 도울 수도 있다는 거겠지."

"도운다? 어떻게? 내가 뭘 하는지 네놈들이 어떻게 알고? 그리고 네놈들이 누군지 내가 어떻게 알고?"

의심을 쏟아내던 동방무결이 살의를 돋우었다.

"웃기지 마라! 보나마나 내 연구성과에 욕심을 품은 강호의 무뢰배들이겠지. 붙잡아서 배후가 어딘지 실토하게 해 주마."

"알아서 벌주를 마시는구려."

"크흐흐, 벌주는 네놈들이 마시는 거다."

괴소를 흘리는 동방무결을 보자 극호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진소청에게 말했다.

"봐~라 이놈아. 저 꼬맹이가 안된다 했으면 이유가 있지. 저 할배는 좀 패줘야 말을 들을 거 같다."

"시건방진 새끼가!"

부웅

격노한 동방무결이 갑작스럽게 새하얗게 빛나는 손을 전방으로 휘둘렀다. 그와 동시에 우리는 빠르게 멸혼보를 시전해서 피했는데, 전방 십여 장의 공간이 순식간에 빛으로 물들었다.

콰과과광 - !!

"으음...!!"

놀라운 일이었다. 그저 일 장을 휘두른 것 뿐이었는데 부채꼴 모양의 대지가 모조리 소실되어 있었다. 동방무결의 장력에는 거의 나에 버금가는 거력이 숨겨져 있는 게 틀림없었다. 또한 잠재내력도 엄청나다.

하지만 뇌신류 제자들 중에 저 정도에 겁먹을 자는 아무도 없다는 게 문제였다. 극호가 호쾌하게 원숭이가면에게 달려들며 외쳤다.

"자자, 한 판 벌여볼까~!!"

카강

카앙

순식간에 각자가 상대를 골라서 전투를 벌이기 시작했다. 진소청은 동방무결에게 달려들고, 나는 오른쪽에 있던 원숭이가면에게 덤볐다. 극호는 왼쪽 원숭이가면에게 덤비며 창을 휘둘렀는데 그는 전투장소를 옮기려는 듯 했다. 왜냐하면 동방무결의 내력이 굉장히 높고 범위공격이었기에 말려들기 싫었기 때문이다.

' 진소청이 잘 해주겠지.'

나 또한 극호와 마찬가지 마음이었기에 힐끔 진소청을 쳐다보고는 원숭이가면에게 말했다.

"일대일로 붙지?"

"좋다, 꼬맹아."

나와 원숭이가면은 합의하에 장소를 옮겼다. 약 칠십 장 정도 떨어진 곳까지 와서 우리 둘은 삼 장 거리를 두고 각자의 무기를 손에 잡았다. 나는 요도 무라마사를 써볼까 생각했지만 도는 익숙치 않았기에 그저 잘 만들어진 철제 장검을 손에 쥐었다.

그리고 원숭이가면의 주무기 또한 검인 듯 했다. 원숭이가면은 검을 손에 든 채 고요히 말했다.

"어려보이는데 굉장한 실력같구나. 나는 너를 봐줄 수 없으니 죽어도 원망 말아라."

"후, 쥐가 고양이 걱정해 주는군. 웃기는 소리 말고 목이나 내놓으시오."

"흐흐... 곧죽어도 한마디도 안 지려 하는군."

왠지 껄껄 웃는 듯 하던 원숭이가면이 슬며시 기수식을 잡았다. 그리고 천천히 자신이 익힌 검법명을 공개했다.

"네 문파의 검법이 무엇인지 몰라도 월녀검(月女劍)을 감당할 수 있을까?"

파바밧

"윽!"

나는 그 순간 엄청난 검세가 내 전방을 휩쓰는 걸 느꼈다. 급히 멸혼보를 운용해서 피했지만, 등골이 서늘해질 정도의 공격이었다.

' 멸혼보를 익히지 않았다면 직격이었나...?!'

나는 잘못 생각했다는 걸 알았다. 동방무결 일행 중에서 동방무결이 가장 강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게 아니었다. 원숭이가면 개개인의 무공도 그에 못지 않은 것이다. 원숭이가면이 자신의 눈에서 투지를 뿜어내며 말했다.

"간다."

전투는 약 백 팔십 초 만에 끝났다.

츄콱!

"으윽.. 어억..."

원숭이가면은 잘려나간 왼팔 죽지를 부여잡으며 비명소리를 흘렸다. 나는 투기를 일렁이며 베어낸 자세 그대로 서 있었다. 그리고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하지만 여기서 시간낭비를 할 수는 없지. 계속할 거라면 명줄을 끊어 주겠소."

"......"

원숭이가면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가 엄청나게 당황하고 있다는 걸 대기의 진동으로 알 수 있었다. 그는 월녀검법을 시전해서 최선을 다했지만 나 또한 심후한 내공을 바탕으로 검술을 전개해서 그를 몰아붙인 것이다. 백팔십 초만에 거의 결론을 내 버리자 원숭이가면이 잠시 후 꺼지듯 한숨을 쉬었다.

"큭... 어쩔 수 없군. 내가 졌으니 물러나겠다."

"잘 생각했소."

"깔끔하게 잘라준 건 무사의 자비인가?"

원숭이가면이 자신의 왼팔을 주워들며 말하자 나는 피식 웃었다.

"돈을 내면 내가 접합수술을 해 주지."

"크흐흐... 정말 재수 더럽게 없는 날이군."

원숭이가면은 고개를 젓더니 말했다.

"백원쌍마(白猿雙魔)는 이만 물러나겠다. 동방무결을 가지고 지지든 볶든 네놈들 맘대로 해라."

"잠깐, 당신들은 대체 누구요?"

"동방무결에게 물어봐라."

그는 자신의 팔을 주워들고는 도망쳐 버렸다.

나는 그를 쫓을 수도 있었지만 그럴 필요까지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자의 팔을 잘랐지만 내가 완전히 이긴 게 아니었다. 원숭이가면이 목숨걸고 덤벼들면 나도 큰 부상을 각오해야했기에 일단 보내 준 것이다.

"후우, 이겼군."

나는 크게 한숨을 쉬었다.

' 지난번 전생이었다면 위험한 순간이 꽤 많았을테지만.'

이번 대결에서 내 검술의 역량이 좀 더 폭이 넓어지고 다양해졌다는 걸 느꼈다. 원숭이가면의 월녀검은 변화면 변화, 속도면 속도 모든 것에서 뒤떨어지지 않는 절정검법이었지만 내가 큰 열세를 보이지 않고 쉽게 격퇴한 것이다. 지난 시간동안 청룡무관에서 열심히 무학을 연마했던 성과라고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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