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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황오제(三皇五帝)
극호는 관중에서 가장 큰 기루(技樓)인 춘경관(春景館)에서 기둥서방 노릇을 하며 지내고 있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 누구도 그런 극호의 무위가 뇌신류의 면허개전을 취득하여 절정고수급이며 멸혼보라는 절세보법을 지니고 있다는 걸 알지 못했다. 나 또한 직접 이광이 찾아가기 전에는 그의 실체를 전혀 알지 못했으니, 그는 은거고수라고 할 만 했다.
나와 미호는 직접 춘경관에 찾아가지 않았다. 대신에 춘경관을 주의깊게 감시하다가 이따금 극호가 춘경관에서 나오는 때와, 그 행로를 분석했다. 그리고 극호가 하루나 이틀에 한 번 정도 하릴없이 관중을 돌아다닐 때가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미인계는 사흘째 되던 날에 시작되었다.
"으음..."
길을 가던 극호는 버드나무 밑에서 책을 읽고 있던 미호를 보자 발걸음을 멈춰섰다.
아름답다.
미호의 현재 외모는 색기만발한 미녀의 모습이 아니라, 고아하고 청초한 한 떨기 꽃과 같은 모습이었다. 명문세가의 아름다운 규수 그자체인 것이다. 나는 쭉쭉빵빵한 외모가 더 잘 통하지 않을까 싶었지만 미호의 의견은 달랐다.
[ 네 말을 듣고보면 극호란 놈은 색을 밝히는 척 하면서도 순정파인 면이 있느니라. 그런 놈은 겉으로는 쭉쭉빵빵을 좋아하는 척 할지는 모르지만, 실제로는 청순하고 지켜주고싶은 여인을 좋아할 가능성이 높다.]
[ 정말 그럴까?]
[ 저 커다란 기루에서 여인들의 기둥서방노릇을 하면서도 정기(精氣)를 지키고 있다는 게 보통 인간에게 가능한 일이라고 보느냐? 저 자의 의지력이나 절제력, 그리고 여자 보는 눈은 높은 편이다. 나 또한 그를 유혹하기 위해서는 제법 공을 들여야 할 것이다.]
극호의 눈이 높다니.
나는 잘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유혹이나 매혹에 있어서 미호 이상가는 전문가는 천하에 존재하지 않았다. 별 수 없이 나는 근처에 은신해서 미호가 극호를 유혹하는 과정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극호는 처음에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휙 지나가는 듯 했다. 그러나 잠시 후 쭈뼛거리며 태연한 척 되돌아와서는 미호 근처를 서성이더니, 쭈뼛거리며 미호에게 말을 거는 것이었다.
"소저(小姐)는 무슨 일로 예서 책을 읽고 있소?"
그러자 미호는 천천히 얼굴을 들더니, 은은한 미소를 흘리며 대답했다.
"산해경이라는 책을 읽고 있답니다. 그 쪽은 누구신지...?"
"흠... 나는 극호라고 하오. 지나가다가 소저께서 책을 읽는 모습이 무척 아름다워서 말을 걸게 되었소."
은근히 직구였다. 그리고 여자후리기를 좋아하는 놈 치고는 무척 서툴렀다. 지난번에도 극호가 미호를 꼬시려다 실패한 장면을 목격한 바 있었기에, 나는 기가 막혔다. 자칭 풍류남아면서 뭐 저렇게 어수룩하단 말인가?
평소의 미호라면 깔깔거렸을 테지만, 청순한 소녀로 밀고 나가기로 했는지 자못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머나... 감사해요."
"지금 날이 춥소. 감기에 걸릴 텐데, 가까운 곳에서 차를 마시며 이야기하는게 어떻소?"
"그렇군요. 추운 날씨군요."
"같이 갑시다."
극호가 조용히 손을 내밀자 미호가 생긋 웃으며 손을 잡았다.
"고마워요."
미호가 자리에서 일어나서 극호를 따라서 총총 걸어갔다.
' 윽...'
나는 그 광경을 보면서 알 수 없는 번민에 휩싸였다. 분명히 연극일 뿐이라는 걸 알고 있는데, 왠지 마음속이 찝찝했다. 그것은 극호가 진심을 다해서 미호에게 작업을 걸고있는 걸 보자 짜증이 솟구친다는 기분에 가까웠다.
그것도 극호가 평소에 촐랑거려서 그렇지 실제 외관을 따지면 상당한 미남이라는 사실때문에 더 기분이 나쁘다.
'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나는 고개를 휘휘 젓고는 은형술을 써서 기척을 숨기며 그들의 뒤를 밟았다.
미호와 극호는 근처의 객잔에 들어가서 한동안 조용히 대화를 이어나갔다. 대화의 내용은 시덥지 않은 신변잡기와 농담 정도였지만 꽤나 자연스럽게 이어져나가는 듯 했다. 극호는 한동안 그렇게 대화를 하다가 미호에게 진지하게 말했다.
"내 평생 보아왔던 여인 중 소저의 미모는 단연 제일이라 할 수 있구려. 관중에서 그대와 같은 사람을 본 적이 없는데 어느 명가의 여식이신지?"
그러자 미호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죄송합지만 저는 함부로 외인에게 저의 성명이나 가문을 밝힐 수가 없답니다. 양해해 주세요."
"윽..."
"소녀는 이만 가볼까 해요..."
미호가 슬며시 자리에서 일어나자, 극호가 급히 미호의 소맷자락을 잡았다. 미호가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자 극호가 당황하며 말했다.
"아! 미안하오. 단지... 다음에 또 만날 수 있을까 해서."
미호는 생긋 웃었다.
"저는 자주 책을 읽으러 나와요."
"......!!"
"다음에는 재밌는 책 이야기를 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는 멍하니 있는 극호를 두고 미호는 천천히 객잔을 빠져나왔다. 나는 한동안 극호를 감시했는데, 극호는 미호를 쫓아갈 생각인지 몰래 미호를 뒤따르기 시작했다. 나는 그런 극호의 모습을 보자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 좋아하는 여자의 신상명세를 캐려는 거냐? 못난 놈!'
다만 저게 당연한 남자의 반응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기까지도 예상한 바였기에, 나는 느긋하게 미호가 극호를 따돌리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미호가 둔갑술법을 이용해서 자취를 감추자, 극호는 허우적대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내게로 돌아온 미호가 깔깔 웃었다.
"아하하하!! 순진한 맛이 있는 녀석이구나. 재밌었노라."
"......"
"응? 왜 꽁한 표정이느냐?"
"그런 거 아냐."
미호는 묘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돌린 내 얼굴로 다가왔다. 그리고 시선을 피하는 내게 킬킬 웃으면서 손가락으로 뺨을 콕콕 찔렀다.
"우후후... 질투하는거냐."
"그런 거 아니라니까."
미호가 잠시 나를 쳐다보더니 웃으면서 내 등뒤에서 슬며시 껴안았다. 내가 움찔해서 가만히 있자 미호는 나를 달래듯이 말했다.
"걱정 말거라. 나는 극호보다는 네가 훨씬 좋으니라."
"그러던가 말던가."
"아하하... 목소리나 떨지 말거라."
나는 얼굴이 화끈해짐과 동시에 창피스러웠다. 내가 미호를 좋아하는 감정을 들킨 것 같아서 약간 속이 상했다. 이 감정을 드러내는 것 자체가 왠지 부끄러웠다. 나는 고개를 휘휘 털고는 미호에게 말했다.
"그래서 어때? 극호를 홀릴 수 있을 거 같아?"
미호가 꼬리를 살랑거리며 말했다.
"흐음... 생각보다 정신력이 충만한 인간이다. 어지간히 정신력에 빈틈이 생기지 않으면 힘들 것 같노라."
"장씨세가 가주 장봉같은 초절정고수나, 도왕 벽지상에게는 쉽게 걸었던 것 같은데."
미호는 손에 깍지를 끼며 설명했다.
"매혹술이라는 건 무공 그 자체와 큰 관계는 없느니라. 왜냐하면 무공이 강하다고 해서 그 사람이 본질적으로 지닌 의지력과 정기가 무조건 강해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물론 무공을 고강하게 단련한 자일수록 정신력도 뛰어날 가능성이 있지만, 그건 심성의 세부적인 갈래로 들어가게 되느니라."
"심성?"
"도왕 벽지상은 아주 뛰어난 도박실력과 냉철한 자기제어력이 있지 않느냐? 다만 그와는 별개로 그녀의 내면적인 심상은 아주 불안정하고 혼돈스럽다. 정기신이 안정을 이루지 못하니, 표면적인 정신력과는 별개로 매혹술에 걸리기에 아주 좋은 것이다."
"아, 그렇군..."
"무공이란 건 만능이 아니다. 특히 도가나 불가의 정종무공을 익히지 않았다면 매혹술에 걸리기 매우 쉽지."
나는 예전에 미호가 장봉에게 매혹술을 걸 수 있었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격전 중에 정신의 흐름이 격렬하고 단조로워진데다가 가솔 걱정 때문에 정신이 흐트러져있던 장봉은, 기습적으로 매혹술을 맞자 걸릴 수밖에 없었다.
나는 미호에게 말했다.
"극호에게 일일이 내 사정을 이야기하고 설득하기에는 너무 복잡하고 시간이 오래 걸려. 극호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그를 홀려서 멸혼보의 비결을 얻어내야겠어."
미호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우후후... 미안할 일이 뭐가 있느냐? 이런 미녀가 사귀어주는데."
"......"
나는 물끄러미 미호를 바라보다가 그녀의 뱃살을 두 손가락으로 집었다. 매끈한 배였지만 부드러운 살은 잡혔다. 미호의 시선이 황당하다는 듯 나를 향했다.
"살 좀 빼."
"이이익... 요 못된 놈!"
미호가 깔깔 웃으며 내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그렇게 잠시 놀던 나와 미호는 다시 객잔에서 쉬었다가 [계획]을 계속했다.
......
미호와 극호의 [밀고 당기기]는 그로부터 약 8주야 동안 계속되었다. 처음에는 많이 어색해하던 극호였지만 나중에는 미호를 간절히 원하는 얼굴이 되었고, 이윽고는 자기 입으로 이런 말을 하는 것이었다.
"... 나는, 그대가 없으면 살기 힘들 것 같소."
고백이다.
미호는 잘 모르겠다는 듯 능청떨면서 눈을 깜박거렸는데, 극호가 미호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
"좋아하오! 제발 나와 사귀어 주시오."
이렇게까지 직접적으로 고백을 하게 될 줄은 몰랐다. 내가 은형술로 기척을 숨긴 가운데에도 놀라서 그쪽을 바라보자, 미호는 잠시 생각하는 모습이었다. 그리고는 극호의 손을 슬며시 밀어내면서 말했다.
"저는 무사님의 이름 말고는 아무것도 모르고, 무사님도 제가 어떤 여인인지 몰라요. 어떻게 사귈 수가 있나요?"
"나, 나는 극호라고 하고, 뇌신류(雷神流)의 제자요."
극호는 다급해졌는지 자신의 비밀을 밝혔다. 미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뇌신류?"
"그렇소... 나는..."
그리고 극호는 자신의 과거사를 밝혔다. 스승에게 어린 나이에 주워져서 뇌신류를 전수받았고, 그 스승이 풍신류에게 피살당해서 그 원수를 갚기 위해서 이광에게 의존해서 관중에 숨어있다는 사실 전반이었다. 대부분은 알고 있는 사실이기도 했다. 거기까지 털어놓은 극호가 말했다.
"... 하지만, 나는 당신이 나와 함께 해 준다면, 그 복수를 포기할 수 있을 것 같소. 내 평생 당신처럼 내 반려가 되어줬으면 하는 이는 없었소..."
"......"
미호는 가만히 극호를 쳐다보고 있다가 말했다.
"사내대장부가 어찌 복수를 포기하시려 하시나요?"
"당신을 위험에 빠뜨리고 싶지 않아서요."
"마음대로 넘겨짚는군요. 그런 사람은 남자답지 못하고, 저 또한 그런 사람과 친하게 지내고 싶지 않아요."
미호가 차갑게 대꾸하자 극호가 순간 절망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말했다.
"저, 정녕 안 되는 것이오?"
"......"
미호는 침묵하다가 말했다.
"당신의 복수를 완료하고 다시 오세요. 그 때는 생각해 보겠어요."
"......!!"
"전 당분간 관중을 떠날 거예요. 찾지 말아주세요."
"기... 기다리시오! 당신의 이름이라도..."
극호가 미호를 붙잡자 미호가 대답했다.
"시호(施狐)라고 해요."
"시호... 내 반드시 그 복수를 끝내고 그대를 찾겠소! 기다려 주시오!"
미호는 그저 훗하고 웃고는 자리에서 떠나갔다.
극호는 그 자리에서 한동안 앉아서 무언가 고민을 거듭하다가 어디론가 뛰쳐나가 버렸다.
나는 미호와 본거지에서 만나서 황당해져서 물었다.
"미호. 완전히 홀리기로 했었잖아? 갑자기 왜 이야기를 틀어버린 거야."
그랬다.
나와 미호가 원래 계획했던 것은 극호를 완전히 빠져들게 만들어서, 빈틈을 노려서 매혹술로 그를 현혹시키고 모든 멸혼보의 비밀을 토해내게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미호가 난데없이 극호에게 복수를 종용하면서 헤어져버린 것이다. 미호의 변덕이라고밖에 볼 수 없었다.
미호가 원래 모습으로 돌아와서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대답했다.
"도저히 틈이 보이지 않았다."
"뭐?"
"저 극호라는 인간은 내게 매력을 느끼면서도 심지(心志)를 견명하게 지키고 있더구나. 오늘 복수를 포기하겠다는 말까지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지는 한층 강하게 불타오르더구나. 굉장히 강인한 정신력의 소유자다."
"......!!"
"섣불리 매혹술을 걸다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고 느꼈다."
미호가 이렇게 말하는 걸 보면, 극호는 헤실대는 모습과 달리 뇌신류의 전승자다운 뛰어난 역량을 지니고 있는 듯 했다. 내가 내심 놀라워하자 미호가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그를 부추겨서 개인적인 복수의 의지를 강하게 만드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었노라. 그에게 있어서 포기할 수 없는 전제조건이 있다면, 그걸 되려 이용해 줘야겠지."
"무슨 소리야?"
미호가 살포시 웃었다.
"자, 이제 네가 슬며시 뇌신류의 무공을 드러내면서 근처에서 소문을 내 보거라. 혹은 청룡무관에 들어가서 운을 띄워도 좋다. 어느 쪽이든간에 극호는 자기가 몸이 달아서 너를 찾아오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하루빨리 복수를 해야하기 때문에, 새로운 변수가 생기면 그에게 무공이든 뭐든 개방하기 쉬운 마음이 될 것이다."
"......!!"
나는 순간 소름이 돋았다. 미호는 그 짧은 순간에 여기까지 내다봤단 말인가? 확실히 극호는 멸혼보를 전수하는데 그리 미련은 없는 것 같았지만 타인에 대한 경계심이 강했다. 자기 편이라고 확신 되더라도 전수해 주는데는 굉장히 까탈스러웠다. 그러나 미호가 이렇게 쐐기를 박아넣은 이상 내가 극호에게서 멸혼보를 얻는 건 상당히 쉬워질 게 분명했다.
인간의 마음을 이렇게 자유자재로 이용할 수 있는 재간.
그것만으로도 미호는 굉장히 무서운 존재인 것이다.
"알았어."
나는 미호의 말대로 해 보기로 했다. 며칠의 간극을 두고 관중에 우연히 찾아온 척 하고는 관중의 작은 사파(邪派)와 시비를 벌였다. 주루나 도박장에서 활동하는 이삼류 흑도무림인들과 싸움이 붙는 도중에 뇌신류의 무공을 대놓고 사용했다.
콰광
"끄어억."
"소... 소협... 잘못했습니다..."
뇌운강권으로 몇 번 두들겨주고 뇌운유권으로 패대기를 치자 20여명이나 되던 흑도사파의 주먹패들이 나가떨어졌다. 나는 팔짱을 끼며 말했다.
"너희는 뭘 믿고 까부는 거냐?"
"아이구...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흥! 나는 백웅이다! 이 곳의 기루나 도박장을 관할하는 흑도놈들이 더 있겠지? 그 놈들도 족쳐버릴 생각이니 나를 안내해라."
"네이...!!"
나는 강호에 막 출도한 정의로운 소협으로 행세하기로 했다. 흑도 잔당들의 소소한 악행에 분노해서 나선 척이었다. 그러자 흑도사파 패거리는 더 맞기가 싫은 건지, 관중 일대에 존재하는 사파들에게 나를 안내하기 시작했다.
쿠콰쾅
콰쾅
나는 겨우 이틀 동안에 5개나 되는 사파를 뭉개버릴 수 있었다. 죽인 놈은 없었지만 어설프게 까불다가 나가떨어진 놈은 수십 수백명이나 되었다. 나는 검을 쓰지도 않고 대충 싸울 뿐이었는데 이렇게 쉽자 어이가 없었다.
' 힘든 척이라도 해보고 싶은데 너무 약하잖아...?'
나는 다소 힘이 빠지는 걸 느꼈다. 관중이 그리 넓은 지역이 아니었기에 이 정도면 뭉갤 사파는 다 뭉갠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밤거리를 헤매듯이 걷고 있을 때였다.
춘경관 앞을 지나고 있을 때 갑자기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어 백웅 소협! 요새 재미가 좋다며?"
기루 앞에 나와있던 한 기둥서방 청년이 낄낄대며 나를 불렀다. 물론 그건 극호였다. 나는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을 하며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당신은 누구요? 주루 기둥서방이면 괜히 시비걸지 마시오."
"으하하하... 역시 오만해. 하지만 그게 우리 유파의 특징이지."
"우리 유파? 뭔 개소리..."
파앗
극호는 히쭉 웃더니 난데없이 멸혼보를 전개해서 달려들었다. 나는 진작에 마음의 대비를 하고 있었지만, 극호가 멸혼보를 사용해서 덮쳐오자 눈 앞이 아찔해졌다. 엄청난 속도로 환영이 일어나는데다 전혀 간파를 할 수가 없었다.
퍼억!
나는 급히 팔을 들어서 극호의 일격을 막으려 했지만 내 헛점으로 그의 발차기가 뚫듯이 박혔다. 내가 땅을 한바퀴 구르며 튕기듯 일어서자 극호가 놀라운 듯 말했다.
"이야... 그걸 맞고도 일어서? 넌 누구한테서 배운 괴물딱지냐?"
"뇌신권(雷神拳)이라니... 설마 당신도."
그러자 극호가 카하핫 하며 웃더니 대답했다.
"으하하... 그래. 너같은 뇌신류 전승자다."
"으음."
"요새 네 무공을 믿고 많이 까불더군. 확실히 그 엄청난 내공에 뇌신류의 무공이면 그럴만도 해. 하지만 말이지, 그래서는 안 되는 거야."
나는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왜? 내 무공을 내가 쓰겠다는데."
극호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풍신류(風神流) 놈들의 이목은 중원 곳곳에 퍼져 있다. 너는 복수하기 위해서는 은인자중하고 자신을 감춰야 해."
"풍신류 따위 무섭지 않소. 나는 천년설삼을 먹어서 천하제일의 내공을 갖고 있소."
"흐흐... 풍신류 호법사자 앞에서도 그런 말이 나올까."
"......"
물론 아니다. 나는 뇌신류 애송이를 연기하고 있었지만, 풍신류 호법사자 이야기가 나오자 막막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지금의 나로써도 뇌명과 백웅결을 다 끌어올려도 호법사자의 상대가 될지 의문이었다. 대라멸진까지 쓰면 양패구상이 가능하겠지만 전혀 의미가 없는 일이었다.
내가 침묵하자 알아들은 걸로 여긴 듯 극호가 말했다.
"이런 데서 쓸데없이 힘빼지 말고 나를 따라와라."
"왜 내가 당신을 따라가야 하지?"
"네게 훌륭한 분을 소개해 주겠다. 그리고 네가 모르는 뇌신류의 비기(秘技)도 전수해 주지. 어떠냐?"
아마 청룡무관의 이광을 소개해 줄 것이다.
나는 고민하는 척 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나는 내심 기가 막혔다.
미호의 미인계 하나로 의심받지 않고 청룡무관에 입관할 상황을 만듬과 동시에, 비기를 전수받을 당위성까지 만들어내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