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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황오제(三皇五帝)
그 상황을 지켜보던 미호가 호기심어린 어조로 말했다.
"얼마나 도박이 강하길래 저런걸까? 뒤에 금괴가 수북히 쌓여 있구나."
미호의 말대로였다.
도왕 벽지상, 그녀의 등 뒤에는 무려 20개가 넘는 금괴가 있었으며 은괴나 은자도 산더미처럼 옆에 있었다. 아마도 은자를 최대한 금괴로 바꾸어주었지만 그래도 모자라서 은괴까지 동원하며 환전해 준 모양이었다.
' 저게 도대체 몇 냥이야?'
지금 모여있는 돈만 하더라도 사천제일거부를 자처해도 될 정도일지도 모른다. 촉한마장같은 거대한 마장을 2달씩이나 털어먹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그만큼이나 원한을 사게 되어서 6개문파의 합공을 받아 죽을 상황이 되었으니 부러워하기도 애매한 일이었다.
미호가 말했다.
"한번 시험삼아서 쳐보는 게 어떠냐?"
"진심이야? 저 녀석은 도박의 신이라고."
"그러니까 가볍게 해보자는 거 아니냐. 저 녀석의 실력정도는 봐 둬야 앞으로 쉬워지지 않겠느냐."
"흠..."
미호의 말이 일리가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은자를 내고 도왕 벽지상이 있는 판에 끼어들어갔다. 미호는 관전을 하겠다고 밖에서 여유작작하게 보는 중이었다.
마작판 앞에 앉자 무거운 분위기가 흘렀다. 마작이란 본래 넷이서 치는 것인데 도왕 벽지상을 제외한 두 명은 마치 죽은 생선같은 눈빛이었다. 아마도 이 자들은 지금 '잃는 중'일 것이고, 아직도 손해를 포기하지 못해서 끝끝내 판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리라. 도박의 망자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도왕 벽지상이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어린아이로군. 마작 좋아하나?"
그녀의 목소리는 차갑지만 청아한 맛이 있었다. 단발인데다 화용옥태인지라 가까이서 보니 그 나름대로의 매력이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럭저럭."
"애매한 대답이군."
"정말 좋아하면 이런 판에서 돈을 걸고 하진 않을거요."
내 대답에 도왕 벽지상이 눈에 이채를 띄었다. 그녀가 반문했다.
"왜지?"
"이기든 지든 누군가의 인생이 박살나지 않소? 자기가 파멸(破滅)하는 걸 즐기는 변태가 아니라면 마작에 돈을 걸고 하지 않을 것이오."
"돈을 걸지 않으면 재미가 없을 텐데."
"정말로 마작을 즐기는 거라면 거기에서도 재미를 찾을 수 있겠지."
내가 퉁명스럽게 대답하자 도왕이 왠지 유쾌한 듯 웃음을 지었다.
"... 하하! 그거 멋진 대답이야."
카라라락
잠시 후 판이 시작되었다.
마작은 일반적으로 친(親)을 뽑는 것에서 시작했다.
일반적으로 동남서북 패를 하나씩 네 패를 안 보이게 섞고 한 사람당 하나씩 뒤집는다. 그 후 동을 뽑은 사람이 원하는 자리에 앉고, 나머지 사람은 뽑은 패에 맞춰 동을 기준으로 반시계 방향으로 동남서북 순으로 앉는다.
이 때, 처음 동을 뽑은 사람을 좌동(座東)이라고 했다.
그 다음, 좌동이 주사위 두 개를 굴려서 해당하는 눈의 자리에 있는 사람이 가동(假東)이 된다. 마지막으로 가동이 다시 주사위를 굴려서 나온 눈의 자리에 있는 사람이 진동(眞東), 첫 친이 된다.
이렇게 시작해서 첫 개문위치를 주사위 2개로 정한 후 패를 섞어서 자신의 앞에 두 층의 패산을 쌓는다. 이후 배패를 해서 정리를 하고, 패산의 패를 가져오고 필요없는 패를 버리는 것을 반복하여 패를 완성시키는 사람이 그 역의 크기에 따른 점수를 받는다.
또한 동 1국에서부터 시작해서 동남서북의 순으로 북 4국까지 총 16국을 하면 마작이 끝나도록 되어 있었다. 16국이라고 하면 매우 길어보이지만, 실제로는 1국에 드는 시간이 그리 오래 걸리지 않기 때문에 적당히 빨리 끝나는 편이었다.
' 마작은 단순히 운으로만 되는 놀이가 아냐...'
뛰어난 두뇌회전과 배짱이 있어야 한다.
나도 표사시절에 마작을 배웠다. 그리고 그 때도 마작으로 잘 따는 인간이 있는가 하면 계속 잃기만 하는 인간이 있다는 것도 알았다. 어떤 배패가 나오는지는 자신의 운이었지만, 그걸 자신이 역으로 성립시키는 것에는 치밀한 심리전, 전술, 계산이 필요했다. 엄연히 두뇌회전과 전략을 필요로 하는 놀이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거의 초보자에서 중수 수준인 내가 도왕 벽지상에게 덤빈 것은 미친짓이라고 할 수 있었다. 내로라하는 도박꾼들이 줄줄이 쓰러진 상대를 내가 이길 수 있을 리는 없다. 그러나 어찌되었든 도왕의 실력이란 건 확인해봐야 했으므로 금전출혈을 감수하고 한번 도전해 본 것이다.
"... 화료."
첫 국에서는 수패를 이용해서 빠른 화료(和了)를 잡았다. 매우 패의 운이 좋았던 덕이었다. 물론 마작의 특성상 화료를 한다고 해서 단숨에 큰 돈을 따는 것은 아니었다. 사소한 승기를 잡은 후 이후로 이어나가는 게 중요했다. 나는 어쨌든 도왕에게서 가볍게 한판을 딴 셈이었으므로 슬며시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
나는 그 순간 흠칫했다.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다.
아무것도 읽히지 않는다.
강호고수의 기백과 심리조차도 무수한 단련끝에 어느정도 읽을 수 있게 되었는데, 눈 앞에 있는 도왕은 마치 무생물(無生物)처럼 보였다. 내가 잠시 그 모습에 오싹해있을 때 다음 국(局)이 시작되었다.
......
...
그로부터 한 시진 후.
"청일색(靑一色)."
또 났다.
나는 전신의 힘이 풀려서 앞으로 쓰러질 뻔 했다.
' 도대체... 얼마나 잃은 거지?'
이후로 내가 제대로 화료하거나 패를 완성시키는 일은 없었다. 모조리 한발 빠르게 도왕이 완성시키거나 내가 원하는 모양을 죄다 알아채듯 밀어내 버렸다. 그리고 마치 귀신같은 강운이 들러붙었는지 신기할 정도로 패가 빨리 났다. 나는 허둥대다가 반칙에 걸려서 충화(沖和)에 걸려서 추가로 돈을 더 내게 되었다.
나는 어느 새 처음에 생각했던 돈보다 몇 배나 되는 돈을 지불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나마 판에 건 돈이 그리 크지 않아서 망정이지, 만일에 조금만 더 넣었다면 지금쯤 손쓸 새도 없이 엄청난 금액을 지불해야 했을 것이다. 자칫하다가는 내 자본금을 모조리 털릴 위기였다.
그리고 조용히 패산을 정리하는 도왕의 섬섬옥수가 두렵기까지 했다. 도대체 무슨 수를 쓰면 저렇게 도박에 강할 수가 있단 말인가?!
예상은 했지만 마작실력이 하늘과 땅차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농락당한 기분이다.
내가 도박판에 머리를 박고 어떻게 돈을 내야할지 고민하자 도왕이 말했다.
"아주 정직하게 치는군. 이런 곳에서 보기는 드문 타패야."
"... 당신은 무척 강하군."
내가 힘없이 대답하자 도왕이 말했다.
"글쎄... 마작이 강하다고 인생이 강한 건 아니야. 백웅(白熊)."
나는 그 말에 정신이 번쩍 뜨여서 도왕을 쳐다보았다. 도왕 벽지상은 투명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의 단발을 약간 쓸어넘기더니 말을 이었다.
"놀랄 일은 아니야. 나는 처음부터 널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설마."
도왕은 표정변화없이 말했다.
"백웅. 나를 찾고있었다며? 그런데 영 미지근하길래 내 쪽에서 불러본 거야."
"......"
나는 그 말에서 전후사정을 짐작할 수 있었다.
도왕 벽지상은 동방무결과 하룻밤의 마작을 친 후 귀찮은 일을 피하려고 잠적했을 것이다. 그런데 잠적해 있던 중, 내가 개방을 이용해서 그녀를 찾으려 한다는 걸 알게 된 듯 했다. 그리고 무슨 이유에서인지 나를 불러들이기 위해서 일부러 수를 쓴 셈이다.
내 이름과 외모까지 알고 있는 걸 보면, 그녀 또한 나름대로 나에 대해서 조사했으리라. 나는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말했다.
"그래서 일부러 촉한마장을 털면서 사천무림세력의 원한을 산 건가?"
"내가 죽으면 너도 곤란하겠지? 올 거라고 생각했어."
"미쳤군."
나는 씹어뱉듯 말했다. 내 말투는 평대로 변해 있었다.
"내가 여기에 온 건 우연이었다. 우선순위의 차이였을 뿐 그냥 내팽개쳐도 부담없는 일이었어. 깜빡잊고 몇달 후에 찾았다면 넌 죽어있었을 텐데 이런 식으로 자기자신을 도박에 내몰았다고?"
내 말에는 협박이나 과장이 섞여있지 않았다. 말 그대로 내가 도왕을 구하러 온 것은 운의 작용이었다. 나는 언제가 되었든간에 느긋하게 도왕을 찾아서 정보를 알아낼 생각이었고, 그나마도 동방무결보다 우선순위는 아래였다. 그런데도 도왕이 자기 목숨을 걸고 극단적인 도박을 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다.
그러자 도왕 벽지상이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면 안 돼?"
"......"
"나는, 살아있다는 실감이 없어. 도박할 때를 제외하고는..."
그 순간이었다.
나는 딱히 그럴거라는 이유도 없었지만 눈 앞의 도왕 벽지상 또한 낭혼(浪魂)의 천품을 지니고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화염에 뛰어들어서 인생을 불살라버릴 수 있는 괴물같은 성정이었다. 일반인의 감성으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이해할 수가 없는 자들이었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
"하아, 아무래도 좋아. 그래서 어쩌라는 거지? 나더러 구해달라는 거냐?"
"구해줄 생각이니까 여기에 온 거겠지."
"근거없는 자신감이군."
도왕 벽지상은 그저 부드럽게 웃을 뿐이었다. 편하고 따뜻해보이는 웃음이었지만, 방금 전에 도왕의 무시무시한 자의식과 무정함을 경험한 나로써는 저 웃음이 무섭게까지 느껴졌다. '감정'이라는 게 도왕에게 있어서 얼마나 표변하기 쉽고 계측하기 힘든 것인지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백 년에 한번 나올까말까하는 도박의 천재!
"... 좋아. 나를 따라와."
"잘 생각했어."
교섭이 성립되었다. 도왕 벽지상은 기분이 좋은지 자신의 머리카락을 묶었는데, 그러자 저번에 무후사의 관리인이 그렸던 것 같은 미남상이 나타났다. 그녀 또한 '잘생긴 여자'에 속하는 듯 했다.
"이 돈 가져가겠어."
그리고 나는 도왕 벽지상에게 큰 돈을 지불하고, 연이어서 그녀가 엄청난 돈을 촉한마장에서 가지고 나가려는 광경을 목격했다. 촉한마장에서 두 달동안 땄던 20관의 금괴는 물론 엄청난 양의 은괴와 은자를 싸그리 가져가려는 것이다. 마차나 수레에 담아야 할 정도였다.
그러자 본격적인 제재가 시작되었다. 염소수염을 기른 촉한마장의 관리인이 난처한 듯 불길한 웃음을 지으며 벽지상에게 말했다.
"하하하... 도왕. 설마 정말로 따고 가시려고 생각한 겁니까?"
"무슨 뜻이지?"
"당신은 너무 까불었다는 말이지요."
파바바밧
그와 동시에 근처에서 검은 그림자가 튀어나와서 우리 주변을 포위했다. 그들은 하나같이 잘 훈련된 무인들로 보였다. 물끄러미 포위한 무인들을 쳐다보자, 촉한마장의 관리인이 키킥 웃었다.
"히히히... 혈염문과 쌍성도문의 고수들입지요."
"이런 놈들로는 나를 막을 수 없을텐데."
도왕 벽지상의 대답은 담담해보였지만 사실이었다. 어떻게 여자의 몸으로 젊은 나이에 이 정도 무공을 성취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녀는 분명히 절정고수였다. 옆을 둘러싼 자들은 잘 훈련되어 있지만 한계가 분명했기에 그녀가 본격적으로 뚫고가려 하면 막기가 힘들었다.
그러자 관리인이 히죽 웃었다.
"그럴 줄 알고 다른 고명하신 분들을 모셔왔습니다."
스으...
조용히 십여 명의 고수들이 장내에 끼어들었다. 숫자 자체는 혈염문이나 쌍성도문의 무림인들보다 훨씬 적었지만, 그들을 발견한 도왕이 가볍게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관리인이 소개를 했다.
"절룡방과 천심회에서 각 5인씩 귀중한 고수들을 보내주셨지요. 이 분들은 만만치 않을 겁니다."
죽음의 함정!
절룡방과 천심회에서 파견된 고수들은 좀 더 강해보였다. 보통 무림인은 이정도 되는 포위망에 갇히면 살아날 생각을 포기해야만 할 것이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 아직 제대로 문파간 연계도 이뤄지지 않았는데 이 정도라면... 아주 처음부터 벼르면서 병력을 매복시켰던 모양이구나.'
그런만큼 각 무림문파의 도왕에 대한 관심은 지대하다는 뜻이었다. 동방무결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음과 동시에 회유하면 막대한 도박실력도 자신들의 것으로 할 수 있다. 게다가 여인의 몸이라는 걸 생각하면, 제멋대로 능욕당할 가능성도 적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촉한마장의 관리인이 입맛을 다시며 천박한 말을 흘렸다.
"히히... 무공을 폐하고 육변기로 몇 년 쓰이다가 홍루(紅樓)에 팔려서 살아가다보면 지금 이순간이 많이 그리워지실 겁니다. 지금도 당신을 범하고 싶어서 억만금이라도 내겠다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르시겠지요... 히히..."
그의 시선이 도왕 벽지상의 몸매를 훑었다. 크게 굴곡지진 않았지만 균형잡힌 몸매였고 뛰어난 미모였기에, 남자들의 음란한 상상을 부추기는 듯 했다.
"......"
도왕은 별로 표정이 변하지 않았지만 되려 미호가 성이 났다. 미호는 짜증이 솟구치는 눈으로 그를 노려보다가 말했다.
"백웅. 저 놈의 혀를 뽑아버릴 생각인데 도와줄 거지?"
"왜 갑자기 네가 열받냐... 이런 싸움 받아줄 필요 없는데."
내가 황당해서 미호에게 말했다. 그냥 내가 도왕을 목갑 안에 넣어버리고 비등을 써서 미호와 함께 진랑곡으로 가버리면 끝나는 일이었다. 괜히 벼르고 있는 사천무림세력과 충돌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었다.
그러자 미호가 날카롭게 말했다.
"도. 와. 줄. 거. 지?!"
"... 어, 알았어."
미호는 주먹을 불끈 쥐고 분연히 부르짖었다.
"저런 인간쓰레기들은 살려둘 필요가 없는 것이다!"
도왕이 눈에 이채를 띄며 미호를 바라보았다.
"정이 많은 사람이군."
"너무 많아서 탈이지만."
내가 투덜대자 전면에서 우리의 만담같은 대화를 듣고 있던 촉한마장 관리인이 황당하다는 듯 말했다.
"누군지 모르지만 멍청하군. 같이 노예가 되고싶다면 그렇게 해 주마."
"노예노예 하는데 대명률에 노예를 취급한 자는 사형이라는 걸 모르는가?"
"... 쳐라!"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 공격명령이 떨어졌다. 나는 내심 한숨을 푸욱 쉬었다.
' 어이구, 힘들어지겠군.'
동시에 내 몸은 빛살처럼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무시무시한 속도로 검을 휘둘러서 전방에 있는 자들에게 천뢰인을 날렸다.
무려 크기가 오 장이나 되는 반월형의 검염이 빛을 머금고 전방으로 날아갔다. 최대한 속력을 줄이기는 했으나 그 크기는 상식을 훨씬 뛰어넘어 있었다. 그 기세에 달려들던 고수들은 모조리 기겁을 해서 뒤로 물러섰다.
쿠콰콰콰쾅!!
"으아아아아악."
"끼아아악."
"으아악?!"
천뢰인에 맞은 자들이 튕겨서 멀리로 날아갔다. 일부러 자르는 성질 대신 튕기는 성질을 넣었기에 직접적으로 몸에 해는 없을 것이다.
"히이익."
"뭐야?!"
보통 검염이라고 하면 검날 근처에 맺히게 해서 멀어도 일 장 내에서 무형의 기운을 떨쳐내는 정도였다. 나처럼 오 장 크기의 반월인을 날려대는 건 강호의 상식으로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일부러 사람을 안 죽이고 견제에 나선 후, 사자후를 내질렀다.
[ 나는 사천당문과 함께 도왕을 지키러 나섰다! 죽고싶으면 덤벼라!]
콰르릉
"허억..."
"흐아악..."
사자후가 몰아치는 순간이었다. 나는 적당히 기나 죽일 셈으로 외침을 내질렀는데, 장내를 포위하고 있던 고수들 거의 대부분이 무력화되어서 그 자리에 고꾸라지거나 기절해 버렸다.
멀쩡히 서 있는 것은 절룡방과 천심회에서 파견된 십여 명에 불과했다. 그들도 안색이 창백했고 다리가 후들거리는 듯 했다. 나는 그냥 견제용으로 질러본 사자후가 너무 세서 장내를 거의 정리해버리자 머리를 긁적였다.
' 음... 경지가 오르면서 가용내력이 높아졌기 때문인가?'
천뢰인의 위력도 사자후의 내력도 초기와는 비교할 수 없을정도로 강해졌다. 그 동안 죽어라 수련했던 게 헛되지 않았다는 소리였다. 나는 힐끔 미호를 쳐다보며 전음을 보냈다.
[ 미호. 나 혼자서 전부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아. 살수는 자제해 줘.]
미호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만일 미호가 본격적으로 나선다면 전귀와 후귀를 소환하며 온갖 술수를 부릴 것이고, 본체인 구미호로 변신해서 날뛸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 자리에서 살아남는 자는 없을 것이지만 뒷감당이 불가능에 가까워질 것이다. 일을 크게 벌이는 것은 결코 좋은 일이 아니었다.
공포에 질린 눈으로 나를 쳐다보던 절룡방의 한 고수가 외쳤다.
"다, 당신은 대체 누구요? 어떤 고인이 이 자리에 오신 것이오?"
나는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나는 백웅. 말했듯이 사천당문과 뜻을 함께 한다. 도왕을 건드리는 자는 나를 건드리는 걸로 간주하겠다."
"사... 사천당문...?"
"사천당문의 가주가 도왕을 보호하기로 했다. 잘 알아둬."
웅성
십여 명의 고수들은 놀라서 서로를 바라보는 기색이었다. 갑작스럽게 사천당문이 적이 되었다고 하니까 믿기지 않는 것이다.
그 때 한 늙은 목소리가 들려 왔다.
"허허... 젊은 용(龍)이 날뛰는구나."
내가 그 방향을 보자, 마장 입구에서 표표히 걸어들어오는 한 도인(道人)이 보였다. 그 도인은 등에 한 자루의 장검을 빗겨차고 있었고 청성파의 표식을 새긴 복장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를 발견하자 정체를 물었다.
"청성파의 장로이신 두검자 이십니까?"
"내 이야기를 들었나 보군."
"도왕에게 검을 뺏긴 원한이 있으시다고 하나, 이런 속세에 나오셔서 번뇌에 휩싸인 모습이 과히 보기 좋지는 않군요."
내가 슬며시 그를 비꼬자, 두검자는 눈썹을 꿈틀거리며 말했다.
"어째서 도왕을 보호하는 것인가? 그 자는 도박중독자이며 천애고아이며 수많은 작사들의 고혈을 빨아먹은 악당(惡黨)일세. 천하에 백해무익한 그런 사파년을 살려두어봤자 더 많은 자들이 고통받을 뿐일세."
나는 두검자의 비난에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뭐라 말하셔도 상관없습니다. 이 자리는 양보해 주십시오."
"하, 대답을 못하니 회피하는 건가?"
두검자가 나를 비웃자 나는 대꾸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럼 도왕이 도박장에서 도박꾼들의 돈을 빼먹는 백해무익한 삶을 사는 동안, 두검자 장로께서는 세상에 어떤 리(利)를 되돌려 주셨는지요?"
"사마외도의 마두(魔頭)를 척결하고 다녔네."
"마두의 생명도 귀중한 것일진데 함부로 살인(殺人)을 일삼고 다니셨군요. 백해무익보다 그리 나아보이진 않습니다만...?"
"궤변이군. 내가 마두를 해치움으로써 많은 선량한 사람들이 구원받았네."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도왕도 쓸데없이 사람들 등쳐먹는 작사들의 돈을 빼먹어서 선량한 사람들이 도박에 망가지는 일을 줄이지 않았습니까?"
"......"
"이런 이야기는 백날 해봤자 소용 없습니다. 어차피 서로가 강호의 손이득을 위해 이 자리에 서지 않았습니까? 남은 방법은 힘으로 자신의 주장을 밀어붙이는 것밖에 없지요."
스으으
내가 담담하게 이야기하며 검을 겨누자, 두검자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그는 무작정 나와 싸우기에는 많이 후달린다고 생각하는 듯 했다. 내 내공이 얼마나 가공한지를 보았으며, 무술경지도 우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뻘쭘한 기색으로 망설이다가 말했다.
"사천당문의 가주가 도왕의 편을 든다는 게 사실인가?"
"그게 궁금하시다면 하루 기다려 보시지요. 제 말이 사실이라는 것에 제 목을 걸 수도 있습니다."
"뭐... 궁금한 건 아닐세. 그냥 좀..."
말을 얼버무리던 두검자가 먼 하늘을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 하여튼! 도왕은 몰상식한 도박을 그만두고 건전하게 살게."
파앗
말이 끝나자마자 두검자는 어디론가 청성파의 경공을 펼쳐서 사라져 버렸다. 마지막에 그럴듯하게 짖기는 했지만 도주한 것이라는 사실을 의심할 여지는 없었다. 그 사실을 깨달은 절룡방과 천심회의 고수들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나는 씨익 웃으며 그들에게 협박하듯 말했다.
"맞고 꺼질래 그냥 꺼질래?"
"......!!"
그들은 재빨리 도망쳤다. 너무나 싱겁게 장내의 상황이 정리되자 나는 김이 빠질 정도였다.
' 뭐야 왜 이렇게 쉬워?'
지금까지 너무 빡세게만 싸워왔는지 적응이 되지 않았다. 6개나 되는 문파들이 합공을 한다기에 많이 긴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막상 붙어보니 도망칠 필요도 없을 정도로 약골들의 모임인 듯 했다.
아니, 아니다.
내가 강해진 것이다.
과거의 나였다면 이 자리가 그대로 죽음의 위험이었겠지만, 이제는 양민학살을 하는 장소에 불과한 것이다. 내가 자신의 힘을 실감하며 생각에 잠겨있을 때였다.
"히이이이익!! 사, 살려, 살려주십..."
미호의 눈이 새빨갛게 변했다. 요호(妖狐)가 살기를 머금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살려줄게. 혀만 뽑고."
푸콰아아악!!
미호가 맨손으로 촉한마장 관리인의 혀를 뿌리에서부터 뽑는 진기한 장면이 보였다. 나와 도왕은 표정변화 없이 그 광경을 쳐다보고 있었다.
"꺼억! 끆! 끄아아아아아악!!"
혀를 뽑힌 관리인은 자신의 턱을 잡고 꺽꺽거리며 제자리를 맴돌더니 잠시 후 그 자리에 모로 쓰러졌다.
' 와, 사람의 혀가 생각보다 길구나.'
나는 그 광경을 보면서도 쓰잘데기없는 생각이 들었다.
팔딱거리는 새빨간 혀를 한 손에 잡아든 미호가 손에 힘을 쥐어서 터뜨려버렸다.
퍼억!
"먹기 싫어."
"뭐 그거야..."
"흠... 그냥 다른 요리를 먹고 싶구나."
싫증이 난 듯한 미호였다. 방금 전에 사람의 혀를 생으로 뽑았다는 사실 따위는 기억에 남지 않은 듯 했다. 나는 미호를 다독거리며 도왕에게 말했다.
"이제 사천에서 살기는 힘들테니 우리를 따라와라. 우리 일을 돕는다면 다른 댓가는 받지 않겠다."
"좋아. 재밌겠어."
"......"
나는 표정변화 없이 당연한 듯 대답하는 도왕 벽지상을 보자 약간 기가 질렸다. 이런 철석간담의 여인은 생전 처음 보는 기분이었다. 상황변화에 대해 순응이 너무나 빨랐고 감정의 동요도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맨손으로 혀를 뽑은 미호를 봤을 텐데도 겁먹은 기색 하나 없었다.
' 잘된 거 아닐까?'
사람은 언제 어디가 되었든 자신의 재능을 쓸 일이 있다.
도왕 벽지상을 동료로 해두면 왠지 큰 도움이 될 것 같은 기분이 들고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