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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황오제(三皇五帝)
다음으로 내가 향한 곳은 개방 사천지부였다. 미호는 너무 눈에 띄는 존재라서 절세미녀의 모습이 아니라 평범한 소녀의 모습으로 나를 따라왔다.
대종개는 내게 크게 한번 데여서인지 크게 경계하는 기색이었다. 뿐만아니라 개방 제자들도 하나같이 매서운 기세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전혀 기죽지 않고 피식 웃었다.
"괜히 눈에 힘주지 마시오."
대종개가 슬며시 대꾸했다.
"자네가 너무 잘생겨서 쳐다봤을 뿐이네."
"하하, 그럴 리가."
나는 손을 내젓고는 말했다.
"정말 나를 피하려 했다면 진작에 본거지를 옮겼겠지. 나는 아직 개방과 거래를 틀 수 있는 모양이군."
"맘대로 생각하게. 우리는 자네가 충분한 댓가를 지불할 줄 아는 인물이라고 생각하고 있네."
"생각은 자유지."
나는 대충 말을 얼버무리며 용건을 꺼냈다.
"의뢰는 두 가지가 있소. 먼저, 도왕(賭王)을 찾아 주시오."
"은자 이백 냥!"
"엄청나게 후려치는군."
내게 이백 냥이 그리 큰 돈은 아니지만, 단순한 정보값으로는 굉장히 컸다. 사천당문의 가주에게 금괴를 넘기고 얻은 정보는 그만한 가치가 있는데다 신용을 얻기 위한 지출이었지만, 이건 그런 것도 아니었다. 이백 냥은 굉장히 거품가격이라고 느껴졌다.
"도왕은 현재 사천무림에서 가장 뜨거운 관심에 놓여있는 자일세. 그리고 본신의 무공도 결코 만만치 않지. 게다가 추종술에도 해박해서 쫓기가 매우 까다로워. 이걸 모두 감안하면 이백 냥도 싸다고 생각하는데."
"......"
도왕 벽지상!
그는 사천무림에서 일백 년 내 최고의 마작승부사이자 도박꾼이었으며 동시에 무림인이기도 했다. 그가 사천무림에 출현한지는 고작해야 4~5년밖에 되지 않았으나 그 동안에 무수한 도박에서 신적인 전설과 위업을 남겼다. 심지어 다른 지역의 도박꾼들조차도 모조리 깨부수며 잠정적인 천하제일의 도박사로 인정받고 있을 정도였다. 더 놀라운 것은 그의 나이가 고작해야 이삼십대의 청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내가 가만히 팔짱을 끼고 서 있자 대종개가 말을 이었다.
"도왕을 쫓는 세력은 많지만 우리 개방은 그동안 전면적으로 그 정보수집전에 뛰어들지 않았네. 직접적인 은원이 없을뿐만 아니라 얻을 수 있는 실익도 없기 때문이었지. 하지만 백웅 자네가 의뢰를 해 준다면 본격적으로 나서보겠네."
"정보수집전에 뒤늦게 뛰어들어도 따라잡을 수 있다고? 허황된 자신감 같소만."
돈만 떼먹으려는 게 아니냐는 말을 돌려서 하자, 대종개가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그동안 추적하지 않은 것이지 추적하지 못한 게 아니야. 개방이 마음먹고 나서도 알아낼 수 없는 정보는 존재하지 않는다네, 적어도 강호에는."
"그런가...?"
"어쩔 건가? 의뢰비를 낼 텐가?"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언제까지 찾을 수 있겠소?"
"장담할 수 없네만."
"나도 시간이 남아도는 게 아니오. 비싼 돈을 내는만큼 빠르게 도왕의 행적을 알고 싶소."
내 말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우선 절차상 도왕의 정보도 알아야 했기에 개방을 방문했을 뿐, 천년만년 도왕을 찾아다닐 수는 없다. 지금은 어떻게든 시간을 아끼고 싶으며 남는 시간에 망량을 도와주고 싶었다.
그러자 대종개가 한숨을 쉬었다.
"최대한 해 보지. 두 번째 의뢰는 뭔가?"
"동방무결이 운남성을 지나 남만쪽으로 향한다고 들었소. 그의 행적을 추적해 주시오."
"그건 이미 알고 있네. 정보료를 내면 즉시 알려주지."
"동방무결은 이미 조사하고 있었나보군."
"그렇다기보다는... 아닐세. 여하튼 그것도 은자 이백 냥을 받지."
대종개가 뜬금없이 말꼬리를 흐렸다. 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하려했는지 미심쩍었지만 굳이 캐낼만한 건 아닌 듯 싶었다. 그래서 고개를 끄덕이고는 목갑에서 은자 사백 냥을 꺼내서 그에게 건네주었다.
"여깄소."
대종개는 돈을 받아들자 즉시 내게 동방무결의 이동경로와 현재 위치로 짐작되는 곳을 말해 주었다. 그리고 운남성의 전체적인 지도를 건네줌과 동시에 운남의 지리를 약 한 식경 정도 설명해 주었다.
"현재 그는 경홍(景洪) 지방까지 내려갔네. 그를 현재 추적중이지."
"굉장히 남쪽이군."
곤명(昆明)보다 훨씬 남쪽에 있었다. 중원 최남단이라고 불러도 될 정도였다.
"남만으로 넘어가기 직전일세. 무슨 이유인지 몰라도 거기서 현재 멈춰있네만..."
"흠..."
나는 잠시 생각했다.
"내가 경홍까지 찾아간다면 거기서 개방의 정보를 또 들을 수 있겠소?"
"물론일세. 미리 전서구로 말해 두지."
"그럼..."
나는 대종개에게서 충분한 정보를 얻어내고 밖으로 나왔다. 그러자 옆에서 말없이 지켜보던 미호가 말했다.
"너무 서두르는 것 같구나. 잠시 생각을 정리해보는 게 어떠냐."
"어떤 점에서?"
"지금 너는 이상하리만치 동방무결의 행보에 집착하고 있느니라. 지금 당장 따라잡지 않으면 안된다는 강박관념이 있지. 허나 꼭 그렇게 할 필요가 있을까?"
나는 힐끔 미호를 쳐다보았다. 미호가 훗하고 웃으며 말했다.
"중요한 건 동방무결의 꽁무니를 죽어라 따라가는 게 아니라 놈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알아내는 것이다. 어차피 동방무결이 살았든 죽었든간에 지금 당장 네 목표인 복마전 타도에 직접적인 영향이 있는 건 아니지 않느냐?"
"지금 당장 추적할 필요가 없다는 소리인가?"
"그래. 동방무결은 꽁무니에 불이 붙은 것처럼 움직이고 있지만 목적은 하나다. 녀석이 다시 중원에 돌아올 때를 기다렸다가 잡아도 되겠지."
"......"
"뭐 곤명까지 비등의 활동범위를 넓히는 것도 좋긴 하겠지. 다만 그게 별로 효과적이진 않다는 소리다. 서두를 일인가 싶기도 하고."
나는 미호의 말 뜻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꽤나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결국 내가 원하는 것은 동방무결 본인이 지니고 있는 정보였다. 백련교의 괴질이 무엇인가를 알아보기 위해 찾는 것인데, 언젠가 동방무결이 중원에 돌아온다고 하면 그때가서 그를 만나봐도 늦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아직 동방무결을 상대할만한 고수도 물색해보지 않은 게 아닌가. 나는 일을 맥락없이 허둥대며 끌려가고 있었다는 걸 알아차렸다.
"고마워 미호."
"후후, 한번에 너무 많이 쥐려 하다가는 하나도 잡지 못하느니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망량에게 돌아가자. 앞으로 해야할 일을 상담해봐야 하니."
잠시 시간을 두고보다가 도왕의 행적을 물으러 다시 사천 성도에 오면 될 것 같았다. 그 전에 망량에게 조언을 구하면 앞으로 뭘 해야할지 알 수 있을 것이다.
"흠... 그건 아니다."
미호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나는 눈이 동그래져서 미호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미호가 살포시 웃으며 말했다.
"동영에 가자꾸나."
"뭐? 동영에는 왜?"
그러자 미호의 얼굴이 샘통맞은 표정으로 바뀌었다. 미호는 팔짱을 끼고는 나를 고요히 노려보았다.
"흥... 네 녀석은 비등을 가지고 있어서 천지를 제멋대로 왕복할 수 있겠지만 본녀는 아니다. 네 전생때마다 네가 나를 위해서 기원해주는 건 고맙다만, 나는 언제나 동영에서 고려를 거쳐서 중원땅까지 와서 너를 찾아서 헤매야한다는 말이다. 천하 이천리 길을 늘상 그렇게 헤매고 다니란 말이냐?"
"아..."
"그럴 바에야 그냥 동영 땅에 와서 비등의 행로를 저장해놓은 다음, 본녀를 데려가거라. 그렇게 하면 서로가 쉽지 않겠느냐."
나는 미호의 말이 맞다고 생각했다. 지금까지는 워낙 급한 일이나 정보가 몰려서 미호를 생각도 못하고 있었지만, 확실히 미호는 매번 천지를 날아다니는 고생을 하는 것이다.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사과했다.
"미호, 미안해."
미호가 깔깔 웃었다.
"아하하하 됐느니라. 그럼 하는김에 한가지 더 확인해보고 싶은데..."
"뭐가?"
"고려 강화도 마니산에 있는 월요(月曜)의 유적에 들어가서 칠요만 얻고 도망칠 수 있지 않겠느냐?"
"......"
확실히 그런 방법도 있을 것이다. 문짝을 열고 월요 근처까지 갔었으니, 지금 당장이라도 비등을 쓰면 월요만 획득한 후 도망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이내 망량이 내게 이 계책을 굳이 이야기하지 않았던 이유를 깨닫고는 말했다.
"월요의 수호자인 이자나기노미코토가 깨어나면 어떻게 하라는 거냐."
풍신류의 호법사자조차도 상대하다가 죽을뻔 했던 마물중의 마물, 별격의 마신(魔神)에 가까운 존재가 바로 이자나기노미코토였다. 현재 내 힘으로는 그런 걸 절대로 잡지 못한다.
"우리가 안 싸우는데 무슨 상관이냐."
"그럼 고려 사람들은 어쩌고?"
그러자 미호가 되려 희한하다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걸 우리가 왜 걱정하느냐? 알아서 잘 하겠지."
"......"
"중요한 건 칠요를 빨리 손에 넣는 것이다. 그래야 복마전인지 뭔지도 빨리 쓰러뜨릴 수 있을 거 아니냐?"
나는 순간적으로 미호의 가치판단이나 사고방식이 인간과 완전히 동떨어져있다는 걸 실감했다. 미호는 그게 나쁘다거나 무고한 자들이 희생당할 거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도 않았다. 알기는 알겠지만 인간이 죽건말건 아무 관심도 없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대요괴 구미호의 사고방식인 듯 했다.
' 하지만, 후환을 생각 안하면 가장 좋은 방법이기도 해...'
무엇보다도 월요의 비보인 천총운검에 어떤 위력이 있는지 확인해본 적도 없다. 이건 경험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손해이기도 했다. 천총운검에 만일 엄청난 힘이 깃들어있다면, 앞으로의 전생을 획기적으로 단축시킬 수도 있으리라.
미호가 살며시 내 턱에 손가락을 갖다대며 말했다.
"너는 매 전생마다 진지하게 임하고 있는 듯 하지만, 네가 전생자(轉生者)라고 하는 것 자체를 무기로 삼아서 살 수 있다는 말이니라. 고려 인간들을 굳이 네가 걱정해야할 이유는 없지 않느냐? 칠요부터 얻고 보자꾸나."
"......"
미호의 말이 매혹적으로 들려왔다.
' 끌리는데...'
하지만 나는 곧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확고하게 말했다.
"아니, 그렇게 하지 않겠다. 무책임하게 그런 마신을 세상에 풀어놓을 수는 없다."
미호가 어깨를 으쓱했다.
"내 말 제대로 알아들은 것이냐? [옛 지배자]인 해신(海神)도 물러나게 만든 게 고려땅 단(檀)의 일족이니라. 해신보다 격이 낮을 월요의 수호자 하나 감당 못하지는 않겠지."
"어떻게든 십이율이 물리칠 수는 있겠지. 하지만 그 와중에 보통 인간이 엄청나게 죽을 거야."
"아이고 답답해...!! 그러니까 그걸 왜 걱정하냐는 말이다?"
나는 미호가 가슴을 치자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그럼 내가 복마전 놈들하고 다를 게 대체 뭐지?"
"......."
미호가 할 말을 잊었다.
"똑같잖아. 태경촌에서 인신공양을 저질렀던 이족 주술사 놈과 다를게 하나도 없지. 내 목적을 이루려고 다른 사람을 아무렇지도 않게 희생시키는 거잖아."
"그건... 같지 않다. 네가 전생을 통해서 힘을 빠르게 쌓으면 쌓을수록 복마전을 쉽게 쓰러뜨릴 수 있는 거잖느냐. 망량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게 대의(大義)라는 것 아니겠느냐? 그건 대의를 위한 값진 희생이니라."
"절대 그렇지 않아."
나는 한숨짓듯이 미호에게 내 진심을 털어놓았다.
"내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힘을 모으려 했다면 십 년도 전에 지금보다 2배 이상의 힘을 얻었을 거다. 악랄하게 하려면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었어."
"흐음."
"하지만 그렇게 해서 복마전과 똑같은 놈이 되어버리면 대체 내게 남는 건 뭐지? 그리고 복마전을 쓰러뜨리는데 무슨 의미가 있지? 대체 그런 식으로 힘을 쌓아서 뭘 하고싶은 거지?"
미호는 내 이야기의 본질을 깨달은 듯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쐐기를 박듯 말했다.
"나는 망량과 너에게서 많은 걸 배웠다. 그리고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기 위해 무엇을 지켜야 하는지도 알게 되었어. 그래서 나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죽어나가겠지만 한 가지의 원칙만큼은 지키기로 마음속으로 맹세했다."
"그 맹세가 무엇이느냐?"
그 날의 풍경.
아직도 기억난다.
나는 심호흡을 하며 말했다.
"내 영혼보다 몸을 먼저 죽이겠다고."
미호가 희생하고, 내 무력함에 정신이 나가버릴것같았던 그 날.
나는 내 몸을 죽이면서 영혼을 지켰다.
침묵이 감돌았다.
미호가 기가 막힌 표정이 되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본녀가 괜한 말을 꺼냈구나."
"아냐. 가능성 하나를 생각해봐서 다행이지."
씁쓸하게 미호가 중얼거렸다.
"백웅. 너는 이미 인간도 요괴도 아닌 존재가 되었구나..."
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대꾸하지 못했다는 쪽이 좀 더 정확하다.
나는 이윽고 미호를 데리고 비등을 써서 고려 울주의 동래현으로 갔다. 정씨 가문의 호위무사를 하면서 와본 적이 있는 곳으로, 반도 땅의 가장 남동쪽에 붙어있으며 동영땅에 가까이 있는 지역이었다. 동래현의 항구로 와서 고려의 배들을 구경하고 있자 미호가 말했다.
"바로 배를 잡아타고 가면 두 시진 내에 동영에 도착할 것이니라."
"가깝네."
"그러고보니 너는 수상비(水上飛)의 경공을 시전할 줄 아느냐?"
미호의 질문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잘 못 해."
"희한한 일이구나. 네 무공은 중원에서도 보기 드문 초절정급이라고 알고 있는데 수상비나 초상비같은 신법을 제대로 쓰지 못한다는 말이냐?"
나는 미호의 의문에 입맛을 다시며 대답했다.
"수상비는 무술경지가 올라간다고 자동으로 익힐 수 있는 경공이 아냐. 정확히 말하자면 이날 이때까지 무기술 하나만 터득한다고 모든 신경을 집중하는 바람에 경공의 비결(秘決)을 체득할 틈도 없었지. 내 재능이 부족해서 그런거지만..."
내가 수상비를 제대로 쓰지 못하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가진 일신의 무공과 경공이 꼭 조화를 이루는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광은 나를 가르치는 동안에 뇌영보 천주살을 터득하게 했지만, 그걸 배우는것도 힘에 겨웠기에 수상비나 초상비같은 경공요결을 배우기에는 벅찼다. 그러자 미호가 깔깔 웃으며 말했다.
"아하하, 그러면 이번 생에는 이광에게 수상비를 좀 배워 보거라. 완전 이득 아니겠느냐?"
"뭐 그것도 좋겠지만, 사실 더 급한 게 있어서."
"무엇이냐?"
"멸혼보(滅魂步)라는 게 있는데 이걸 아직 터득 못했어."
나는 뇌신류의 제자 극호에게서 전수받은 멸혼보와 그 유래에 대해서 미호에게 말해 주었다. 그 말을 곰곰히 듣고 있던 미호가 말했다.
"내가 아는 쫄따구들을 부려먹어 보자꾸나."
"누군데?"
미호가 킥킥대며 웃었다.
"막부(幕府)에 충성하는 동영 최고의 검사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