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45 ----------------------------------------------
삼황오제(三皇五帝)
나는 미호와 함께 비등을 이용해서 다시 무후사로 향했다.
파앗
미호는 무후사에 도착하자 신기한지 여기저기를 둘러보는 모습이었다. 나는 미호에게 혹시나 싶어서 물었다.
"머리가 아프거나 괴롭지는 않아?"
"방금 봤던 그 환영 말이냐?"
"그래..."
그러자 미호가 피식 웃었다.
"조금 놀라긴 했지만 그냥 그랬다. 갑자기 누가 등을 손가락으로 찔러서 놀란 정도? 본녀는 그 정도에 충격을 받지는 않느니라."
"흐음..."
나는 [이족]과 [암천향]을 볼 때 인간과 요괴의 반응이 다르다는 걸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망량의 경우, 인간 중에서도 특출난 정신력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도 비등으로 함께 이동할 때는 상당한 어지럼증과 정신력의 혼란을 느꼈다. 그러나 미호의 경우, 그저 생소한 광경에 놀랐다는 수준에 불과했다.
' 요괴는 마(魔)에 상당한 저항력이 있나 보구나.'
내가 곰곰히 생각할 때 미호가 말했다.
"백웅. 너는 지금 목표가 무엇이느냐?"
"응?"
나는 뜬금없는 미호의 질문에 대답했다.
"그야 복마전을 쓰러뜨리는 거지."
"흐흠... 그러면 좀 이상한 게 있구나."
"뭐가?"
"네 첫 번째 전생 말이다."
미호는 현재 절세미녀의 모습으로 둔갑해 있었다. 그래서인지 멀리서 무후사의 낙엽을 청소하던 하인들이 힐끔거리며 미호의 모습을 구경하는 중이었다. 미호는 낙엽 하나를 집어들고 빙빙 돌리다가 말을 이었다.
"너는 나이 오륙십을 먹을 때까지 별다른 환란을 느끼지 못하고 평범하게 살지 않았느냐? 나인교가 발호했다고 하지만 그건 평범한 표사였던 너와 상관없는 일이 아니었느냐."
"음, 그건..."
"복마전을 가만히 놔둬도 세상에 별다른 이상이 없을 거라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느냔 말이다."
"......"
미호의 말은 핵심을 짚고 있었다. 그리고 나 또한 전생을 하면서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종종 고민하고 한탄하던 내용이었다.
그렇다.
내가 '아무 행동도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이미 평범한 표사로 살았을 때 천하에 별다른 일도 없이 진행된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 미호는 지금 내가 괜히 벌집을 들쑤셔서 몇 번이고 의미없이 죽고있지 않느냐고 찔러본 것이다. 나는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그건 아니라고 생각해."
"왜냐?"
"내가 도중에 우연히 발견했던 태경촌의 [인신공양]은 분명히 존재했던 사건이고, 황연 대장군이 대뢰옥에 갇힌 것도 분명히 존재했던 사건이야. 내가 그들을 도와주지 않았다면 틀림없이 그들은 그대로 끝장났을 거다. 그리고 복마전 세력들은 원하는대로 힘을 얻었겠지."
"즉 가만히 놔두었으면 암중에 복마전이 천하를 지배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냐?"
"아마 그렇다고 생각한다."
"후후, 그것 또한 알 수 없는 일이니라."
미호가 까르르 웃더니 말했다.
"결국 네가 [관측자]의 입장인 이상 그건 결코 객관적일 수가 없는 일이니라. 아무리 사소한 네 행동이라고 해도 미래에 영향을 주지 말라는 법이 있느냐?"
"그럴지도 모르지만, 그것까지 생각하는게 더 의미가 없는 거 아니냐?"
"왜?"
"그것까지 생각할 수 있다면 그게 신(神)이지."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쨌든 내가 구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고, 내게 그럴 능력이 있다면 굳이 외면할 필요는 없다. 끝까지 할 수 있는 것을 하다보면 길이 생기겠지."
미호가 묘한 눈이 되었다.
"희한하구나. 너는 그리 정의로운 인간은 아닌것같은데, 복마전을 타도한다는 신념만큼은 한치도 흐트러짐이 없구나?"
"......"
"그건 정의감과는 다른 감정으로 보이는구나."
나는 미호의 말에 침묵했다. 확실히 미호의 말마따나 내가 지금 복마전을 막기 위해 움직이는 건 강호정의를 지키기 위해서, 라는 이유는 아니다. 좀 더 내면적인 이유가 있지만 지금 털어놓기에는 좀 민망한 일이었다. '현재'의 미호가 완전히 신뢰할만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아무튼 일부터 하자고. 저 녀석이야."
내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방향, 약 오십 장 밖에 어슬렁거리며 무후사의 관리인이 걸어다니고 있었다.
"호오..."
미호는 샐쭉하게 웃더니 천천히 걸어서 관리인 쪽으로 다가갔다. 관리인은 절세미녀인 미호가 나타나자 헤벌쭉한 표정이 되어서 미호의 거대한 가슴을 보는데 여념이 없는 듯 했다. 무언가 담소를 주고받는 듯 하다가, 관리인은 완전히 빠져들었는지 미호의 비위를 맞추듯 웃으며 껄껄대었다.
그렇게 약 한 식경 동안의 대화가 끝난 후 무후사의 관리인이 미호와 함께 어디론가 건물로 향했다.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내게 미호가 영언을 보내 왔다.
[ 다 홀렸느니라. 무후관(武候館)이라는 건물 3층에 안들키고 오면 된다.]
나는 미호의 말대로 그 자리에서 일단 벗어나서, 무후관에 갔다. 무후관은 저번에 무후사를 들렀을 때 한번 가본 적이 있는 커다란 건물이었다. 무후관에 들어가자 경비는 따로 없고 시비들이 여기저기에 돌아다니고 있었기에, 나는 은형술(隱形術)을 시전해서 미호의 말대로 3층까지 올라갔다.
[ 이쪽이다.]
미호의 영언에 따라 가장 안쪽의 방문을 열고 들어가자, 그 곳에는 넋을 놓은 표정으로 헤벌레 하고 앉아있는 무후사의 관리인이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서는 미호가 사과를 아삭하고 베어물고 있었다.
"뭐든 물어보면 된다."
나는 신기해서 미호에게 물었다.
"전부터 궁금했는데 대체 어떤 단계에서 홀린 거야? 겉으로 볼 때는 그냥 대화하는 걸로 보였는데."
"우후후, 그건 비밀이다."
미호는 그저 묘한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아무래도 내가 전생자라는 걸 알고 있기에, 자신의 비밀을 왠만하면 숨길 생각인 듯 했다. 나는 입맛을 다시고는 무후사의 관리인에게 질문하기 시작했다.
"동방무결과 도왕이 어떤 도박을 했는지 알고 있는가?"
"알고있다..."
"내용을 말해라."
"동방무결은... 도왕과... 마작(麻雀)을 했다..."
마작!
그것은 간호(看湖), 혹은 투패라고 불리는 놀이의 일종이었다. 바둑과는 다르게 패산을 쌓아서 작패나 점봉으로 점수를 쌓고, 나아가서는 패를 완성시키는 것이다. 운에 맡기는 요소가 강하긴 했지만 어쨌든 나름대로 머리를 쓰고 전략을 쓰는 것이었기에 전문적인 작사도 존재했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도박(賭博)이며 노름이었다. 돈을 안 걸고 할 수도 있었으나 대개 세간의 마작은 돈이나 재산을 걸고 하는 것이다. 하물며 도왕이라고까지 불리는 도박판의 귀신이 끼어들었다면 아무것도 걸지 않았을 리가 없다.
나는 호기심이 생겨서 물었다.
"그냥 마장이나 암흑가의 도박판에서 하면 될텐데 어째서 그들은 무후사까지 와서 마작을 친 거지?"
"나도 모른다..."
"짐작가는 거라도 없나?"
내가 연속해서 질문하자, 관리인이 잠시 침묵하더니 말했다.
"... 그들과 함께 온 2명의 괴인(怪人)이 있었다... 그들이 넷이서 마작을 했는데... 아무래도 그들 사이에서 뭔가 밀약(密約)이 있었던 것 같다는 보고를 들었다..."
"들었다? 당신은 그들의 마작을 보지 못했나?"
"그렇다... 동방무결이 무후사 전체에 수면약을 뿌렸고... 겨우 수면약에서 깨어난 육선문의 고수 중 몇몇이 놈들의 마작을 보았다... 그들의 몸상태가 정상이 아니라 막지 못했다고 한다..."
"으음!!"
나는 이상함을 느꼈다.
' 무후사는 꽤 넓다. 여기 전체를 한순간에 마비시킬 정도의 수면마비산이라고?'
관리인이 마작의 동기를 모르는 건 사실같았다.
나는 골똘히 생각하다가 말했다.
"그래서 승부는 어떻게 됐지?"
"... 도왕(賭王)이 판을 다 쓸어서 1위가 되었다... 동방무결을 비롯해서 2명의 괴인도 다 털렸다 하며... 그들은 마작판을 정리하고 사라졌다..."
"어디로 갔지?"
"모른다..."
"괴인들의 인상착의나 성별은?"
"모른다... 놈들은 흑색 옷에 원숭이가면을 쓰고 있었다..."
원면(猿面).
나는 그 단어를 주의깊게 기억해 두고는 재차 물었다.
"도왕이라는 놈도 무공이 뛰어난가?"
"그렇다... 사천에서 다섯 손가락에 꼽히는 고수이다..."
"어떻게 생겼지?"
관리인은 자신이 알고 있는 도왕의 얼굴과 인상착의를 지필묵에 써서 보여주었다. 그는 그림실력이 썩 좋지 않았으나 이목구비의 특징을 잘 살릴 줄 알았다.
나는 개발새발 그린 그림의 실제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그 결과는 옆에서 같이 그림을 보고 있던 미호가 말해 주었다.
"미남(美男)이구나."
"......"
어찌 된 게 내가 강호에 나온 후로 만나는 주요인물들은 하나같이 잘생기거나 뛰어난 외모를 지니고 있단 말인가? 내가 크면 추남의 몰골이 되는 걸 알고 있는 나로써는 늘 찝찝할 수밖에 없었다. 살짝 기분이 나빠졌지만 이내 가라앉히고는 추가로 잡스러운 정보를 더욱 물었다.
정보를 다 캐내고 미호가 관리인의 기억을 지웠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비등을 이용해서 무후사에서 나와서 인적없는 산속의 계곡으로 왔다. 약간 생각을 정리할 겸 미호와 이야기를 나눠야 했기 때문이다.
나는 말했다.
"사천당문에 가야할 것 같아."
"역시 수면마비산이 그 자들과 관련있다고 봐야겠지."
무후사 전역을 한순간에 제압할 수 있을 정도의 수면마비산은 흔한 게 아니다. 더구나 무후사를 지키는 육선문의 고수들이 그리 만만한 자들도 아니라는 걸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동방무결이 어떤 수를 썼든간에, 그 수면마비산을 사천당문에서 사전에 받아왔을 가능성이 매우 높은 것이다.
나는 고민하며 말했다.
"관리인은 꽤 허술한 면이 있었지만 사천당문은 사천땅에서 알아주는 무림명문이다. 방금 전처럼 접근하다가는 위험할 수도 있겠어."
"흐흥... 본녀의 도전의욕을 부추기는구나."
"정 힘들면 말해. 납치도 한 방법이니까."
그러자 미호가 깔깔 웃었다.
"아하하, 나님을 무시하느냐? 본녀가 마음먹고 매혹술을 쓰면 뭐든 할 수 있느니라. 문제는 다른 곳에 있다."
"무슨 문제?"
"동방무결의 외모는 인피면구(人皮面具)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이다."
"으음..."
나는 침음성을 흘렸다. 확실히 관리인을 비롯해서 강호의 많은 사람들이 동방무결을 본 적이 있다 했지만, 그들은 대개 그게 동방무결의 진짜 외모라고 믿지 않는 듯 했다. 동방무결은 아마 특수한 역용술을 배웠거나 인피면구를 장비하고 다니는 게 틀림없었다. 그렇게 친다면 나는 길가에서 대놓고 동방무결이 내 옆을 지나가도 알아볼 수 없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미호가 자신의 꼬리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어쨌든 사천당문은 가야겠지만, 본녀는 다른 방향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떻게?"
"동방무결의 행적을 알고있을 가능성이 가장 높은 놈이 누구일까?"
"아....!!"
나는 그제서야 미호의 말뜻을 알아들었다. 미호가 입을 가리고 웃었다.
"도왕이라는 놈은 동방무결과 깊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얼굴도 알 수 없는 동방무결을 쫓아서 기약없이 쫓느니, 사천당문과 도왕을 거쳐서 정보를 모두 끌어내는 것이 옳다."
"그렇군!"
"교섭같은 건 너에게 맡기겠다, 백웅."
"맡겨 둬."
나는 직후 미호와 함께 성도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미리 개방을 통해서 알아두었던 사천당문의 위치로 향했다. 사천당문은 성도의 서쪽에 있었으며 문을 서너 번이나 넘어야 갈 수 있었다. 외성에 있는 듯 했고 정확하게는 성밖의 협곡 사이에 있는 마을에서 폐쇄적으로 살고 있는 모양이었다.
내가 사천당문의 앞에 오자 사천당문의 외곽을 수호하고 있던 당문의 고수들이 나를 가로막았다. 그들은 한결같이 수투를 끼고 있었는데 자신들이 사용하는 위험한 독공이나 암기에서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서인 듯 했다.
나는 대답도 하지 않고 그저 우두커니 서서 이쪽을 경계하는 당문의 고수들을 보자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뭔가 금제를 당하거나 술법에 걸린 것 같지는 않았지만 굉장한 예기(銳氣)가 느껴졌다. 그것은 저 무인들이 굉장한 훈련을 거쳐왔다는 증거였다.
개 중 심유한 눈을 하고 있던 한 당문 무인이 말했다.
"너는 누구냐?"
"나는 백웅이라 하오. 사천 땅에 가장 이름높은 사천당문을 방문하러 왔소."
"예절법식은 차릴 줄 아는군. 잔꾀는 부리지 말고 무슨 목적으로 왔는지를 말해라."
단칼에 단호하게 대답이 돌아오자, 나는 씩 웃으며 말했다.
"당신들은 문지기가 아니군. 당가의 정예고수들이오?"
문지기라고 보기에는 평균적인 무위가 너무 높았다. 그들은 하나같이 일류를 넘어선 절정급 고수들이었고 나이도 꽤 많았다. 적어도 40대 이하는 없어 보였다.
"그걸 대답해 줄 이유가 없는데."
"마찬가지로 나와 교섭할 권한도 없겠지."
스르릉
당문 고수 셋이 동시에 도(刀)를 뽑아들었다. 그들은 암기가 생명줄이라고 했는데 아마도 저 도를 이용한 무공이 따로 있거나, 혹은 도법을 펼치는 것 자체가 함정일 수도 있었다. 어느 쪽이든간에 독과 암기는 버거운 존재였기에 나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진정하시오. 나는 싸우러 온 게 아니오. 그저 당문에게서 정보를 사려고 왔소."
"이 사천당문이 타인에게 함부로 정보를 팔 거라고 생각하는가? 너는 여기를 저잣거리 시장바닥으로 생각하나?"
"말했듯이, 그걸 결정하는 건 당신이 아니오. 그러니 내 말을 반드시 안쪽에 전하시오."
그는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싫다면?"
"그때는 당신들이 원하는대로 온 힘을 다해서 실력행사에 나설 수밖에."
"......"
협박 아닌 협박에 그들은 고민하는 듯 했다. 그리고는 말했다.
"들어가서 보고 올려라, 방(訪)."
"넵."
방이라고 불린 당가 고수가 휙하고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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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비군 갔다가 허리가 아파서 꽤 드러누웠습니다... 체력고갈...
오늘부터 정상연재에 들어갑니다 걱정 끼쳐서 죄송합니다!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