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검신-141화 (141/1,615)

0141 ----------------------------------------------

삼황오제(三皇五帝)

14번째 삶이 시작되었다.

덥썩

나는 외양간에서 깨어나자 내 목을 붙잡았다. 그리고 아릿한 환통(幻痛)이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뇌가 현실을 인식하자 겨우 손을 뗐다. 이제 고통에 대해서는 상당한 내성이 생긴 것 같아서 좋았다.

나는 외양간 벽에 기대어서 생각했다.

' 흠... 마지막에 내게 빙의(憑依)하려 했던 놈은 대체 뭐지?'

지금도 생생히 기억난다. 그건 단순히 몸이 안좋다는 걸 넘어서서 저주에 가까운 빙의현상이었다. 무언가 [옛 지배자]같은 놈이 내게 힘을 빌려줘서 초상기인에 '동력'을 채워넣었고,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내 몸을 지배해서 자신의 거처로 불러들이려 했던 것이다.

웃기는 일이지만 내게 그에게서 느꼈던 감정이 '호의'라는 사실이 더욱 나를 소름돋게 했다. 내가 거기서 몸과 정신을 그에게 빼앗겼다면, 나는 곧이어 그의 인도에 따라서 비등을 사용해서 [옛 지배자]의 거처로 향했을 것이다.

그 이후에 일어날 일은 상상도 하기 싫다. 옛 지배자라는 건 대체 뭐하는 놈들인가? 신선들과 달리 옛 지배자들은 꽤나 마음내키는대로 행동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빙의의 기운이나 정신지배력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고 견명한 이성을 유지하고 있다. 나는 중얼거렸다.

"천암비서(天暗秘書)로 과거로 돌아오면 옛 지배자의 마력도 무효가 되는구나."

생각할수록 천암비서는 신기한 물건이었다. 과거로 되돌아오는 간단한 능력이었지만, 사실 지금까지 내가 모험하면서 얻었던 모든 기이한 신보(神寶)을 모조리 초월하고 있었다. 무한히 과거로 돌아올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굉장한 위력을 보인다. 나는 새삼 천암비서를 얻은게 얼마나 대단한 기연이었는지를 깨달았다.

당장이라도 천암비서를 품에 넣으러 달려가고 싶었지만, 나는 그에 앞서서 생각했다. 생각만 앞서서 움직이는 건 효율적이지 못하다는 걸 수십 년의 경험으로 깨달았기 때문이다. 나는 차분하게 지금 가장 효율적인 행동방식이 뭔지를 생각했다.

' 흠. 그렇군. 조금 다르게 움직여도 무방하겠어.'

타닷

나는 곧장 외양간을 뛰쳐나가서 빠르게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번에도 간간히 멸혼보(滅魂步)의 요결을 연습하는 건 잊지 않았다.

"가 볼까!"

먼저 천암비서를 얻는 건 동일했다. 그러나 나는 지난번처럼 황산으로 가지 않고, 바로 방향을 틀어서 산동(山東)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타다다다닷

완전히 행로가 뒤바뀌자 산동성에 도착하는 시간도 크게 바뀌었다. 나는 고향을 출발한지 며칠 되지 않아서 산동성 외벽을 넘어서 한밤중에 성내로 진입할 수 있었다. 그리고 기억을 더듬어서 대룡상회의 무역물자가 있는 창고로 향했다.

곧이어 나는 황금비등을 찾아내고는 곧장 사용했다.

파앗!

내가 다음 순간 나타난 곳은 대뢰옥의 무저갱이었다. 무저갱에 나타나자, 예전처럼 거대한 촉수 거대두꺼비가 떡하니 버티고 있었다. 놈은 밤낮도 없는건지 멀뚱거리며 깨어있는 모습이었다.

"오시오, 여동빈!"

동시에 여동빈이 내 몸에 강림했다.

[ 마를 척결하리라!!]

여동빈이 기합소리를 내며 내 몸을 이용해 검을 들었다. 그는 마를 대적하면 늘 전투의 쾌감에 휩싸이는 듯 기분이 좋아 보였다.

콰과과광!

끼에에에 -

곧이어 여동빈의 전투가 끝나고 산산조각난 촉수거대두꺼비의 사체가 남았다. 나는 두꺼비의 뒤에 있던 동굴에 가서 목갑과 쌍고일대검, 나인성본전을 손에 넣었다. 그리고 대뢰옥으로 올라가서 창살을 자르고 사람들을 꺼냈다.

"황연 대장군. 죄송합니다만 잠시만 들어가 주십시오."

"자네는 대체...?"

나는 사람들에게 목갑에 들어가 있으면 된다고 설득한 후, 황연대장군을 포함해서 모두를 목갑 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재차 이동해서 황산으로 갔다.

파앗!

"힘내자..."

황산으로 가서 천년설삼을 비롯해서 흑백련의 꽃과 뿌리를 여러개 캐서 목갑에 넣었다. 그리고 곧장 입수해서 수요의 유적으로 들어가서 금괴를 손에 넣고, 즉시 제단에 피를 흘린 후 거대거미와 싸웠다.

콰광!

거대거미는 더욱 진보한 내 실력에 별 저항도 하지 못하고 죽어버렸다. 나는 거대거미를 절벽에 처박아둔 채로 막야를 얻어서 목갑에 넣었다.

문득 나는 호기심이 생겼다.

' 거대거미가 살던 저 나락에는 뭐가 있을까?'

아마도 거미집이 있겠지만 궁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근처의 횃불을 하나 들어서 나락 밑으로 절벽을 타고 천천히 내려가 보았다. 절벽에 내공으로 발을 박으면서 내려가니 그럭저럭 할만 했다.

쿠구구...

"거미집이 아니잖아?"

뜻밖에도 땅바닥에는 거미집이 있는 게 아니라 평평한 돌바닥이 있었다. 거대거미는 평소에 땅바닥에서 먹고살고 있던 게 아니라, 동면 상태에 있다가 침입자가 감지되면 그제서야 잠에서 깨어서 튀어오르는 듯 했다. 나는 거미가 누워있었을 자리를 제외하고는 아무런 거미줄의 흔적도 없어서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 거대거미는 처음부터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생물이겠군.'

나는 돌바닥 주변을 잘 살펴 보았다. 그리고 절벽 한구석에 어딘가로 내려가는 동굴이 있는 걸 발견했다. 그리고 비명을 질렀다.

"엥 여기에 또 동굴이라고?!"

여기가 칠요 중 막야가 봉인된 수요의 유적이라서 엄청난 절지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14번째 전생인데 아직도 캐낼 게 남아있단 말인가? 나는 새삼 놀라면서 천천히 그 동굴의 층계참을 따라서 걸어내려가기 시작했다.

그곳에는 지금까지와는 달리 조그마한 방이 있었다. 희미한 빛이 떠도는 기묘한 분위기의 방이었다. 방의 중앙에는 하나의 동상(銅像)이 서 있었다. 그 동상은 왠 중년사내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갑골문인가."

동상에는 뜻밖에도 괴어가 아니라 갑골문이 적혀 있었다. 물론 갑골문 또한 고어였기에 나로써는 해석하기 힘든 것이다.

' 이건 망량에게...'

나는 동상을 잘라낼지 아니면 망량을 여기로 데려올지 고민했다. 그리고 후자 쪽이 부담이 덜하다는 걸 깨닫고는 우선 동상을 놔두기로 했다. 일단 괴어가 아니라 갑골문이니까 인간이 만든 것일테니, 망량이 어떻게든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조그마한 방을 더 둘러보았지만 역시 이 동상 외에는 딱히 얻을 게 없었다. 이 동상은 누가 보물을 가져가라고 만들었다기 보다는, 누군가를 기리는 기념과 존경의 의미로 세운 것 같았다.

다소 실망스러웠지만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된것만 해도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나는 그대로 비등으로 이동했다.

파앗!

나는 태경촌으로 이동해서 화씨가문의 서재에서 은빛 봉황조각을 얻었다. 은빛 봉황조각을 얻고 나서는 바로 해적섬으로 이동했다.

츠칵

"으아아악."

해적섬은 새벽이었다. 그리고 도착하자마자 나는 해적선장실로 이동해서 해적두목들을 모조리 쳐죽여버렸다. 해적두목들은 부하들을 부르려 했지만 내가 먼저 놈들이 잘 때 기습한 상태였으므로, 어렵지 않게 세 놈 다 쳐죽일 수 있었다. 세 놈 다 쳐죽인 후에 비밀장소에서 혈도단의 금은보화를 목갑에 다 넣었다.

촤악

".....!!"

나는 그대로 이동해서 잠을 자고 있는 해적놈들을 전부 소리소문없이 멱을 따기 시작했다. 해적놈들을 고통스럽게 죽게 하고 싶었지만 이미 여러번 해봤으므로 이번에는 조용하게 가기로 했다. 그리고 해적포로들의 분풀이 용으로 해적간부 십여 명을 장애인으로 만들고 포박해 두었다.

해적섬의 해적들을 모조리 제압한 후에는 해적섬 북쪽으로 이동해서 화약을 안에 넣었고, 해적섬 간부의 방에서 요도 무라마사도 손에 넣었다. 얼추 해적섬에서 얻을만한 걸 얻었다고 생각하자 서문혜를 금제에서 풀어주고 해적포로들에게 복수할 시간을 갖게 해 주었다.

다시 처참한 복수가 끝나자 나는 해적포로들 전부를 목갑에 넣어버린 후 재차 이동해서 고려 개경에 도착했다. 개경에 도착하자 아침이 밝아오고 있었고, 나는 잠시 쉴겸 객잔에서 밥을 먹고는 화서명을 찾아갔다.

이른 아침부터 내가 난데없이 그의 의약전 안에 순간이동하자 화서명은 벼락처럼 놀란 듯 했다.

"뭐, 뭐, 뭐냐?!"

"저는 백웅이라 하고 화씨 방계입니다..."

나는 그에게 전반적인 사정을 설명하고, 지난번처럼 금궤짝을 화서명에게 건네준 후 정철욱 가주를 끌어들여서 고려인 출신 포로들을 처리했다. 여기까지는 고작해야 두 시진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재차 떠나려고 하기 전에 이번에는 화서명에게 물어보았다. 추가적인 의문이 생겼기 때문이다.

"화서명 가주님. 혹여 천하오대신의 중 한 명인 하남제일의 강전길 의원을 알고 계십니까?"

그러자 화서명은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으음, 알고 말고. 실력도 없으면서 잘난체는 더럽게 하는 놈이지."

"... 사실은 그 분은 현재 무영문에 의탁하고 계시고, 제가 우연히 그 분을 만나뵐 일이 있었습니다."

"엉? 무영문?"

화서명이 황당하다는 듯 말했다.

"그놈이 거길 왜 가지? 소림사와 그렇게 친하게 지내던 놈이라 소림사에 갈 줄 알았는데."

"무영문이 더 편하다고 여기신 모양이더군요."

"하이고 거 참... 잘난척 하더니 자기보신할 때는 여념이 없군. 뭐 나도 남말할 처지는 아니지만."

화서명이 쓴웃음을 머금고는 말했다.

"그래서 그 놈이 어쨌다는 건가?"

"사실은 강전길은 소교주의 일이 [저주] 때문이 아닌지 의심하고 있었습니다."

"......!!"

화서명은 흠칫하고 놀랐다. 그리고 그의 눈이 예리해졌다.

"그 이야기, 좀 자세하게 해 주게."

나는 강전길의 추측을 고스란히 들려 주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내 말을 주의깊게 들은 화서명은 곰곰히 생각을 거듭하는 듯 했다. 무려 한 식경동안 침묵하며 생각하던 화서명이 말했다.

"자네는 정녕 백련교 소교주의 괴질에 얽힌 진실을 알고싶은 건가?"

"네, 그렇습니다."

"그러면 내 생각도 강전길과 같네. 자네는 동방무결(東方無潔) 늙은이를 찾아가봐야 해. 인정하기는 싫지만 나 또한 그를 천하제일로 인정하고 있으니."

동방무결!

그는 다른 천하오대의원과 달리 천상괴의(天上怪醫)라는 기묘한 별칭으로 불리는 자였다. 자기 멋대로 인간을 치료하고 다니며 댓가도 자기 멋대로 정했다. 때로는 그 댓가를 목숨으로 정할 때도 있었고, 그 때문에 어떤 자들은 그를 원수처럼 생각하기도 했다. 나는 그가 어떤 자인지 잘 몰랐으나 화서명과 강전길의 의견에 따르면 그가 실질적인 천하제일의 의술실력을 지니고 있는 듯 했다.

"동방무결은 어디에 있을까요?"

화서명이 입맛을 다셨다.

"글쎄... 우리와 달리 그 늙은이는 굉장히 고절한 무공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특이하게도 호법사자의 협박때문에 온 게 아니라, 자발적으로 찾아왔다더군. 호법사자도 그 사실에 동의했으니까 아마 사실일 것이다."

"고절한 무공? 의원이 무공이 뛰어나다는 말입니까?"

내 의문에 화서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 또한 화씨세가의 가주라서 무공을 일류 수준으로 익히고 있지만 동방 늙은이는 격이 다르다. 호법사자들 조차도 그를 쉽게 대할 수 없어하는 기색이었다. 아마 동방가(東方家)의 독문무공(獨門武功)인지 뭔지는 모르지만, 그는 틀림없는 초절정의 고수였다."

"......!!"

호법사자도 쉽게 대할 수 없는 무공!

그 정도라면 정말로 천하에서 손꼽을만한 절세고수인 것이다. 나는 의원이 의술을 단련하면서 절세의 무공을 얻는다는 걸 쉽게 상상할 수 없었기에 침음성을 흘렸다. 동방무결 또한 불가일세의 천재임이 틀림없었다.

잠시 생각하던 화서명이 말했다.

"그를 찾고 싶다면 사천(四川)에 있는 사천당문(四川唐門)을 찾아가 보게. 내가 마지막으로 들은 동방무결의 흔적은 거기였다네."

"감사합니다."

"그리고 그는 정말, 정말로 성격이 개씨발 미친놈... 아니 좀 괴팍하니까 대할 때 조심하게."

화서명은 급히 헛기침을 했다.

"험험."

"......"

나는 순간 화서명의 입에서 천박한 욕설이 흘러나온 걸 믿을 수가 없었다. 다시 말하자면 오랜 세월 수양하고 인내심을 단련한 화서명이 기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치를 떨고 욕설을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동방무결의 성격이 굉장하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 ... 만나기 싫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화서명에게 화씨세가 부흥용으로 마저 금괴 하나를 내어 주었다. 그리고는 그에게 작별인사를 하며, 이번에는 바로 진랑곡으로 이동했다.

파앗!

여태껏 몇 번이나 보았던 망량의 초가집이 있었다.

물끄러미 망량이 뭐하는지를 보니, 망량은 평상에 누워서 느긋하게 춘화집을 보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다가가서 피식 웃었다.

"재미 좋소?"

"허억!"

망량이 깜짝 놀라서 허둥지둥대었다.

"다, 당신 누구요?"

"지나가던 무림고수요."

"......"

나는 짧은 한숨을 쉬었다. 여기까지 생각한대로 진행하고 보니 시간을 굉장히 많이 아꼈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렇다.

이번에 나는 황산을 들르지 않고 비등부터 얻은 후 길어봤자 이틀 내에 모든 제반사항을 먼저 처리해버린 것이다. 그리고 망량을 방문하는 걸 제일 나중 차례로 미뤄버렸다.

이제 인질을 언제 해방하느냐 하는 사소한 문제가 있지만 이건 크게 걱정할 일이 아니었다. 일단 일부터 다 처리해놓고 망량을 만나는 게 편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이번 전생에서는 다르게 움직여 본 것이다.

나는 이윽고 시간을 들여서 망량에게 차례차례 13번의 전생동안 있었던 일을 차례대로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모든 설명이 끝나고 망량을 충분히 설득했다고 싶자, 가장 묻고싶었던 걸 질문했다.

"... 망량. 어떻게 해야 제갈부에게 이길 수 있겠소?"

"......"

망량은 한치의 의심도 없이 나를 믿는 모습이었다. 그래서인지 좀 뜬금없어보이는 질문에도 신중하게 생각하는 듯 했다.

잠시 생각하던 망량이 말했다.

"당신의 13번째 전생은 굉장히 운이 좋았던 편이오. 제갈부가 당신을 이용하려는 생각이 아니었다면, 당신은 그의 낙혼별부에 진작에 당해서 죽었을 거요."

"낙혼별부?"

"부적 하나하나가 닿기만 해도 인간의 혼백을 날아가 버리게 해서 즉사(卽死)시키는 가공할만한 술법이오. 게다가 제갈부가 보패 백우선까지 꺼냈다면 정말로 답이 없었던 상황이었겠군... 그건 선조 제갈량이 직접 썼던 거니까."

거기까지 말한 망량이 눈을 빛냈다.

"말해두지만 만일에 이번에 똑같이 진행을 한다고 하더라도, 결국 우리는 힘이 딸려서 패배하게 될 거요. 당신의 몸에 가호를 내렸던 옛 지배자의 우연한 축복이 아니었다면 당신은 황궁에서 10할 확률로 사망이었소. 그걸 분명히 알아 두시오."

"으음."

그건 나도 생각했던 부분이라서 침음성을 흘렸다. 정상적으로 싸워서는 황궁에 결계를 펼친 제갈부를 이길 수 없다는 것! 그게 현재 가장 큰 문제점인 것이다.

망량은 말했다.

"물론 제갈부를 쓰러뜨릴 몇 가지 계책은 지금 생각해 뒀소. 그러나 그 모든 것은 먼저 충분한 힘과 세력을 쌓고 난 후에 시도해 볼 수 있소."

"그 말은...?"

"태산의 칠살마을에 가서 황제를 암살하려는 방법은 쓰지 마시오. 그건 일단 아껴두고, 나는 반천맹을 만들고 당신이 그걸 돕는 방식으로 몇 년 동안 힘을 키워 봅시다. 너무 성급하게 거목(巨木)을 쓰러뜨리려 하다가는 도끼자루에 찍히게 마련이오."

"알겠소."

망량이 씨익 웃었다.

"우선은 막야의 수기부터 처리합시다."

나와 망량은 곧장 비등을 이용해서 천우진이 있는 마을로 향했다. 물론 이제 천암비서를 소나무숲에 묻는 건 버릇처럼 되어버렸다. 천우진이 띠껍게 나오는 걸 설득하는 것도 익히 보아왔던 일이었고, 공양의식을 치르는 것도 예상대로였다.

우우우우

천우진의 눈이 빛나더니 이내 태허천존이 강림했다. 그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말했다.

[ 정말 이상한 일이로고... 어찌 나의 기운이 느껴지는가?]

"차례 넘겨주십시오."

[ 응.]

태허천존의 차례가 넘어가서 서왕모의 차례가 되었다. 나는 서왕모에게 미호의 선처를 바란 다음, 서왕모에게 주문했다.

"남화노선만큼은 제외해 주셨으면 합니다."

[ 흐음. 알았노라.]

우우웅

이번에는 여동빈이 나올 줄 알았는데, 특이하게도 차례가 달랐다.

이번에 천우진에게 강림한 신령은 몸을 떨더니, 뭉툭한 목소리로 말했다.

[ 나는 팽조(彭祖)다.]

그러더니 말을 이었다.

[ 나는 아직 살아있으니 네게 축복을 내릴 수 없다... 차례를 넘기겠다.]

"네? 살아 있으시다고요?"

나는 경악해서 외쳤다.

"팽조 님은 요순시대 사람 아니십니까?!"

팽조가 귀찮은 듯 말했다.

[ 나 아직 살아있다. 어쩌라는 거냐...]

"......"

나는 기가 막혔다.

팽조는 요순시대 때부터 은나라 말기까지 살았고 이후로 등선하여 신선으로 추앙받는 인물이었고, 다시 말하자면 지금에서 까마득한 상고시대인 은나라 말기에도 수백년이나 살아 온 장수(長壽)의 대명사였다. 그런데 그때부터 수천 년이 지난 지금에도 아직까지 살아있다니, 도대체 얼마나 오래 살았다는 것인가!

' 족히 3천 살은 넘겠구나...'

내가 멍하니 있을 때 차례가 뒤바뀌었다.

파아앗...

[ 나는 예(?)이다.]

나는 그의 자기소개를 들었지만 딱히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런 신도 있었던가?

그저 멍하니 서 있자, 예 라고 자칭한 신은 훗하고 웃으며 내게 축복을 내렸다.

[ 네게 필중(必仲)의 능력을 주겠노라.]

"자, 잠깐! 그건 무슨 능력입니까?"

[ 무엇이든 쏘면 반드시 맞는 능력이다...]

나는 순간적으로 망량을 돌아보았다. 망량 또한 내가 왜 쳐다보았는지 짐작한듯, 재빨리 머리를 굴리는 기색이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러자 나는 예에게 서둘러 외쳤다.

"죄송합니다만 제게는 맞지 않는 축복같으니 다른 건 안되겠습니까?"

[ 흐음... 이 세상 모든 궁사들이 이 축복을 바라마지 않거늘...]

"저는 궁사가 아니라 검객(劍客)입니다."

예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약간 언짢은 기색으로 퉁명스럽게 말했다.

[ 좋다. 그렇게 칼싸움질이 좋다면 그에 어울리는 놈을 소개시켜 주마.]

파아앗!!

' 천우진 녀석 괜찮을까?'

나는 은근히 걱정되기 시작했다. 이걸로 4번째 강림을 넘겼고 5번째였다. 지난번에는 여기까지 하니 굉장히 지쳐서 탈진 직전이었는데, 만일에 이번 신령도 여의치 않다면 6번째로 넘길 각오를 해야 하는 것이다.

잠시 후 예가 불러온 신령이 강림했다.

[ 네가 그렇게 신령을 가려대는 건방진 놈인가?]

뭔가 시작부터 불길했다.

아무래도 4번씩이나 신령들의 축복이 걸러진게 이미 선인계에 소문이 쫙 나버린 모양이었다.

내가 머뭇거리며 신령의 말에 대답하지 못하자, 그 신령은 서서히 자신의 실체를 드러내었다. 고대의 검은 갑옷과 투구, 그리고 더없이 위맹하게 여겨지는 투기(鬪氣)를 내뿜는 미청년이었다. 선이 여려보았지만 그런 걸 따질수도 없을 정도로 엄청나게 위험한 살기를 진득하게 내뿜고 있었다.

' 이, 이게 신령이란 말인가?'

나는 내심 두려워졌다. 마치 이광이나 절세고수의 살기에 쏘였을 때, 아니 그 이상의 압박감이 눈 앞의 신령에게서 느껴졌다. 신선이나 신령들은 하나같이 뛰어난 수양을 쌓은 존재들일 텐데 이렇게 호전적이고 잔인하고 강렬한 기운은 생전 처음 느끼는 것이다. 차라리 마귀나 악귀에 가까운 패왕(覇王)의 기세가 느껴졌다.

나는 간신히 대답했다.

"죄, 죄송하지만 제게는 힘이 필요합니다!"

신령이 눈에 이채를 띄었다.

[ 힘이라? 어떤 힘이 필요한가?]

"더없이 강력한 적이 앞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그 자들을 때려부술 정도로 강한 축복이 필요하기에 천계에 무례를 저지르게 되었습니다."

나는 다소 변명하듯 말한 것이었지만, 신령은 왠지 흡족한 미소를 짓는 듯 했다.

그리고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 마음에 드는군... 나도 그걸 제일 좋아한다.]

"네?"

이어진 말에 나와 망량이 동시에 경악했다.

[ 너에게 나, 항적(項籍)의 축복을 내리겠다.]

"어어억!!"

"항우!!"

망량이 급히 내게 취소하라는 눈빛을 보냈지만, 내가 반응하려 할 때 이미 강신술은 끝나 있었다.

풀썩

천우진이 쓰러지듯 기절하고 나자 새하얀 빛이 맴돌았고, 축복이 내게 내려져 있었다.

' 으아아... 뭔가 아닌데...'

나는 망연자실해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서초패왕(西楚覇王) 항우(項羽)!

파괴신(破壞神)이며 무패(無敗)의 학살마(虐殺魔)!

전 중원 역사상 천하무쌍의 용맹을 자랑했으나, 그만큼의 악명을 떨쳤던 자가 내게 축복을 내린 것이다.

============================ 작품 후기 ============================

약간 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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