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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천향(暗天鄕)
나는 그를 쳐다보다가 말했다.
"거절한다."
"호오..."
제갈부가 의외라는 듯 대답했다. 다만 여전히 표정은 변하지 않은채로 내게 물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단 한 가지 이유다."
나는 검을 잡고 놈에게 겨누었다.
"나는 널 못 믿어."
제갈부와 손을 잡고 그동안 있었던 비밀을 들을 수 있다는 장점, 연금술사를 좀 더 제어하기 편하다는 장점, 그리고 중원지보라고까지 불린 자의 지혜와 술법으로 도움받을 수 있는 장점 등등이 있었다. 그것까지 전부 고려한다면 지금 내 선택은 어리석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놈을 믿지 못한다. 놈의 인성이 어떤 것인지 적나라하게 보았을 뿐만 아니라, 놈이 필요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등에 칼을 꽂을 수 있는 족속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물론 그런만큼 자신의 이득이 걸린 일은 확실하게 해 주겠지만, 그건 내가 죽거나 배신당할 위험을 감수할만한 가치가 없다.
게다가 제갈부에게 뒷통수를 맞을 경우, 자칫하다가는 전생도 못하고 목숨만 살아남은 채 고문당하거나 조종당할 가능성이 있었다. 제갈부의 성정이나 성향을 볼 때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그런 위험까지 생각하면 내가 섣불리 제갈부를 제어하겠다고 손을 잡는 것은 오만한 일이다.
제갈부가 말했다.
"믿으라는 게 아니라 네게 이득이 되는만큼 나를 이용하라는 말인데, 그것도 못 알아듣는 거였군."
"아니, 아주 잘 알아들었는데?"
나는 큭하고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난 내 능력을 알아. 아직 내 지혜와 그릇으로는 너같은 놈을 다룰 수 없다."
"......"
"그러니까, 너같은 놈은 죽인다!"
파앗!
내가 벼락같은 검광(劍光)을 토해내며 공격했다. 뇌명과 백웅결이 시전된 상태에서 공격했기에 아까와 달리 제갈부는 손쉽게 술법으로 피해내지 못했다. 그만큼 현재의 내 움직임은 굉장한 빠르기를 자랑하고 있었다. 순간순간 뇌영(雷影)이 히끗거릴 정도였다.
제갈부는 아까의 수라천광대법의 힘을 쌍장에 모으더니 내 검염을 흘려내었다. 하지만 미처 흘려내지 못했는지 팔과 다리에 한 칼씩 상처가 박혔다. 내 무공의 힘과 속도가 놈의 역량을 일순간 크게 상회한 것이다.
"윽."
제갈부가 고통에 잠시 미간을 찡그리더니 재차 술법을 발휘해서 멀리로 피했다.
슈욱
갑작스럽게 허공으로 떠오른 제갈부가 내게 말했다.
"너는 단순무식하군. 하지만... 그래서 더 상대하기 까다로운가."
자조적으로 말한 제갈부가 갑자기 자신의 품에서 왠 새하얀 우선(羽扇)을 꺼내들었다. 나는 이제부터가 진짜라는 걸 깨닫고 긴장했다. 제갈부는 그 우선을 펼치며 말했다.
"보패(寶佩) 백우선(白羽扇)이여, 그 힘을 발휘하라!"
보패?!
나는 난데없는 영창에 깜짝 놀랐다.
보패라고 함은 인간의 능력으로는 만들 수 없는, 오로지 신선(神仙)만이 만들고 사용할 수 있는 전용법보였다. 그런만큼 인간도사가 쓰는 법보와는 차원을 달리하는 위력을 지니고 있었고, 망량의 말에 따르면 이 세상에 풀려나와 있는 보패는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고 했다. 그런데 제갈부가 보패를 사용하다니?
위이이잉
갑자기 제갈부의 몸 주변에 수십가지의 진언이 황금빛을 내며 떠올랐다. 나는 술법에 대해 공부한 적이 있었으므로 그 기이한 진언 하나하나가 천축의 범어(梵語)라는 걸 알고 있었다. 범어와 관련된 주술은 하나같이 막강한 위력을 지니고 있었기에, 나는 이 자리에서 제갈부와 정면으로 부딪히는 게 자살행위라는 걸 깨달았다.
' 젠장, 피하자!'
나는 즉시 비등을 사용해서 황궁의 입구로 공간이동해서 피했다. 그리고 갑자기 등 뒤에서 새하얀 빛이 터져나오는 걸 느꼈다.
파아아앗 -
"......!!"
등 뒤에서 거대한 백열(白熱)이 쏟아져 나왔다. 나는 뒤돌아봤다가는 눈이 멀 것 같았기에 황급히 눈을 내공으로 보호하면서 빛을 피해서 기둥 뒤로 숨었다. 그리고 빛이 멎을 때 즈음에 슬며시 나왔다.
' 설마 저 무저갱을 가득 채울 정도의 술법공격이었던 건가?'
등골이 서늘하다. 비등이 없었다면 나는 저 자리에서 즉사했을 것이다.
나는 속으로 제갈부의 개사기성 때문에 욕지기가 흘러나왔다. 무공은 초절정인데다가 술법으로는 보패를 사용할 정도의 대술법사라니! 망량이 온갖 노력을 기울여가며 한정조건을 만족시켜서 오화칠금선을 사용했을 때와 비교해 보면 천지차이였다. 인정하기는 싫었지만 제갈부는 중원 최고의 기재인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제갈부를 꺾지 않으면 황궁제압이 수포로 돌아가는 것도 사실이다. 나는 황궁의 어둠 속에서 귀식대법을 펼치며 기척을 숨겼다. 놈이 다시 나타날 때까지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면서 대응할 방법을 생각해야 했다.
' 저 보패 백우선을 사용해서 아까같은 공격을 근처에서 퍼부으면 어쩔 도리가 없다.'
말도 안 될 정도의 수백 장짜리 범위공격이다. 섣불리 상대하다가는 그대로 목숨이 날아갈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황궁 바깥으로 나가게 되면 그건 또 즉시 팔진도에 걸려버리고 만다. 그건 제갈부의 손아귀에 그대로 사지를 내어줌을 의미했다.
어떻게 해야할까.
나는 고민하던 중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서 목갑에서 재빨리 연금술사를 꺼내고는, 출혈때문에 정신을 잃은 놈을 가볍게 깨웠다. 놈은 금제에 걸려있어서 정신을 못차리는 듯 했으나 순수한 인간이 아니라서인지 정신이 모두 제압당한 건 아닌 듯 했다.
"으윽... 네... 녀석..."
나는 놈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잘 들어라. 제갈부가 지금 보패 백우선으로 우리를 몰살시키려 한다."
"......!!"
"시간 없다. 타개할 방법이 없으면 빨리 말해. 일단 살고 봐야지."
모 아니면 도다.
지금 내게는 기껏해봐야 황궁이나 낙양을 벗어나서 본진 막사로 도망치는 수밖에 없는데, 그렇게 되면 제갈부는 거침없이 내 동료들을 인질로 잡거나 죽이게 될 것이다. 그건 절대로 피하고 싶었기에 어떻게든 지금 수를 내어야 했다.
그러자 연금술사가 거칠게 피를 토하더니 말했다.
"쿨럭... 아직 미완성인 초상기인(超上奇人)이... 천람(天藍)의 방에 있다... 그거라면 제갈부를 막을 수 있다."
"초상기인?"
"... 그렇다... 동서양의 술법을 합하여 완성시키는... 비밀병기... 그걸 깨우면 될거다."
그러고보니 제갈부도 초상기인을 언급한 적이 있었다. 나는 놈에게 초상기인이 어떤 위력을 가지고 있는지 듣고 싶었지만, 왠지 지금 그럴 시간이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빠르게 다그쳤다.
"천람의 방이 어디냐?"
"... 옥좌의 방에서 오른쪽으로 꺾어서 이십여 장을 가면 나오는 파란색 문의 방이다..."
"그래 알았으니까 이제 들어가!"
"으억..."
말이 끝나자마자 나는 다시 연금술사의 머리부터 목갑에 쑤셔넣었다. 연금술사는 팔다리를 버둥거리려 했으나 몸이 움직이지 않았으니 내 뜻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놈은 황당한 듯 했으나 나는 지체없이 천람의 방으로 뛰었다.
피이이잉 -
"윽!"
나는 새하얀 무언가가 뒤에서 날아오는 걸 느끼고는 빠르게 만승검결 반월참(半月斬)의 초식으로 베었다. 그러자 왠 부적이 허공에서 나풀거렸는데, 비슷한 게 무려 다섯개나 더 날아오자 짜증을 느꼈다.
' 자동추적술인가?'
정말로 성가시다. 술법이란 건 직접적 공격력이 약하고 그저 보조용도인 줄 알았는데 경지에 이른 술법사라는 건 이토록 무서운 존재인 것이다. 문제는 지금의 공격으로 내 위치가 들통났다는 뜻이었기에, 나는 더욱 빠르게 뇌명을 써서 내달렸다.
파파팟
내가 천람의 방의 문을 거칠게 열고 들어가서 안쪽의 문을 두세 개 더 열고 들어가자, 거기에는 거대한 석판 제단이 있었다. 그리고 석판 제단 위에는 왠 묘령의 소녀(少女)가 누워 있었다.
' 이 소녀가 초상기인인가?'
소녀의 외모는 굉장히 인공적인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자연적으로는 탄생하지 않을 듯한, 진정한 의미에서 인형스러운 미(美)였다. 정교하게 만들어진 인형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그러나 소녀는 분명히 살아 있었으며 숨을 쉬는 게 기감으로 느껴졌다.
소녀의 옆에는 여러 개의 석판 제단이 있었으며, 거기에는 아무도 누워있지 않았다. 아무래도 초상기인을 만드는 건 이제 막 시작한 듯 싶었다.
나는 재빨리 다시 연금술사를 목갑에서 꺼냈다.
"어억..."
연금술사는 연속으로 목갑을 들락거리자 정신이 없는 듯 했다. 나는 놈의 멱살을 잡고 말했다.
"자 왔다! 이제 어떻게 하면 되냐?"
"윽... 시동어를 말하고 마력(魔力)을 몸에 불어넣으면 된다..."
"엉?! 시동어? 마력?"
"그러니까 날 풀어줘라... 그건 나밖에 못 한다..."
연금술사는 희미하게 비웃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 상황에 내가 어쩔거냐는 웃음인 듯 했다. 하지만 내가 이 놈을 믿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기에, 나는 놈을 노려보면서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 에라이 젠장...'
나는 끝까지 내 생각을 관철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달려들어서 놈의 다리를 잘라버렸다.
"으아아악!!"
푸콰악
떨어져 나간 다리는 갑작스럽게 조그마한 촉수괴물로 변이해 버렸다. 나는 그걸 발로 짓눌러서 터뜨려버렸다. 연금술사가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서 꺽꺽대자 나는 놈의 목에 칼을 들이대며 말했다.
"그냥 네놈을 죽여버리는게 낫겠다!"
"미... 미친놈! 대체 네놈 무슨 생각을 하는거냐? 대체 왜이렇게 막나가는것이냐!"
나는 으르렁거렸다.
"알게 뭐야! 어차피 죽을 판인데 네 녀석 목이나 따고 죽으면 속은 시원하겠지."
반쯤 진심으로 검에서 우윳빛 검기를 쫙 내뿜자, 연금술사는 안색이 새하얘졌다. 그리고 갑작스럽게 태도가 변해서 황급히 말했다.
"알았다, 알았다! 네가 이겼다! 절대복종하겠다! 그러니까 제발, 죽이지만 마라!"
"뭐 어쩌라고..."
연금술사가 씹어뱉듯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나의 신께 맹세한다! 초상기인의 심장 위에 손을 올리고 [$&*@$%] 라고 하면 된다."
"......"
나의 신.
이족이 자기의 신에게 맹세한다는 것은 아마 사실일 가능성이 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가 언령으로 맹세하는 걸 듣자, 머릿속에서 묘한 기색이 흘렀다. 신에게의 맹세라는 것 자체가 거대한 거부감이 느껴졌다.
"인간인 너는 못 알아듣겠지. 날 풀어주면 제대로 하겠다."
이상한 일이었다.
' 어라...?'
분명히 놈의 말대로였다. 나는 놈이 말하는 초상기인의 시동어가 무슨 발음인지, 무슨 뜻인지도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아마도 암천향의 괴인들이 사용하는 괴어(怪語)이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이상하게도 나는 그걸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말]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나는 홀리듯이 초상기인 소녀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연금술사의 말대로 조용히 심장 위로 손을 올리며 말했다.
[ Ph'nglui Mglw'nafh...]
쿠구구구
시간이 멈춘다.
이해가 안 되지만, 정말로 그랬다.
내 주변의 시간이 멈췄다.
[ Cthulhu R'lyeh Wgah'nagl Fhtagn...]
나머지 [말]은 자연스럽게 입에서 흘러나온다. 인간 생명체로는 결코 발음할수도 이해할수도 없는 [말]이지만, 나는 이걸 어떻게 [말] 해야하는지 이해하고 있다. 그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하여간 그렇다.
우오오오
우오오오오오오오 -
가공할 흐름이 쏟아졌다.
별의 빛이 천지간을 관통하는 듯 했다.
거대한 '힘'이 말을 타고 눈 앞의 초상기인 소녀에게 스며들기 시작했다. 그 힘은 왠지 이 세상이 아닌 다른 곳에서 흘러들어오는 듯 했다. 알 수 없는 '거대한 존재'가 내게 힘을 빌려주고 있다는 사실이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 뭐지 이건?'
갑자기 옆에서 보고 있던 연금술사가 미쳐 날뛰듯이 흐느꼈다.
이족의 정신력으로도 버틸 수 없을 정도로 심대한 충격을 받은 모습이었다.
"아아아아아아!! 그 분께서, 그 분께서...!! 아무 의식도, 제물도, 댓가도 없이... 성좌(星座)의 가호를 내리시다니!!! 일개 인간 따위에게!!"
"......"
"믿기지 않는다! 너는 도대체 무엇이냐!!"
나는 반응하지 않았다. 신경쓰지도 않았다.
왠지 옆에서 흐느끼고 있는 연금술사가 벌레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내가 아랑곳하지 않고 초상기인의 각성에만 집중하고 있자 연금술사가 미친듯이 웃었다.
"으흐흐하하하...!! 아직 1할도 만들어지지 않은 초상기인의 동력이... 급속도로 채워지고 있다니... 현자의 돌로도 불가능한 일... 으하하하... 세상에..."
아니다.
이 놈은 이미 미쳐버렸다.
그리고 연금술사는 마지막 이성을 빌어서 유언을 토해내었다.
"나는 처음부터... 절망 속에 살아가고 있었구나...!!"
푸콰콰콱
다음 순간, 연금술사의 몸이 찢겨버리고 형태를 알 수 없는 촉수괴물이 되어서 폭주했다. 오래묵은 이족이기 때문에 본성을 가리고 인간형으로 변태할 수 있었지만, 이성의 고리를 잃는 순간 그저 불로불사할 뿐인 이족으로 변모한 것이다. 이제 저 놈은 죽었다고 봐도 무방한 상황이었다.
끼이이익
그러나 나는 저 촉수괴물이 나를 공격해 올 걱정따위는 눈꼽만큼도 들지 않았다. 왠지 몰라도 촉수괴물은 나에게서 기겁을 하며 도망치는 기색이었고 천람의 방에서 후다닥 달아나 버렸다.
그리고 왠지 모르겠지만 저런 벌레가 내게 공격을 할 리가 없다는 정체불명의 자신감조차 존재했다.
콰앙!
잠시 후 바깥에서 '연금술사'였던 촉수괴물이 제갈부의 술법에 터져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인간형일 때도 상대가 되지 않았는데 보패까지 꺼내든 제갈부를 당해낼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석판 제단에 누워 있던 소녀가 서서히 눈을 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녀는 한 줌의 감정도 없는 인형같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말했다.
"명령을 내려 주십시오, 주인님."
그러자 번뜩하고 정신이 차려졌다. 나는 갑작스럽게 이성이 돌아오면서 크게 숨을 몰아쉬었다.
"헉! 헉! 허억...?"
방금 전까지 뭔가에 홀린 것처럼 초상기인에게 힘을 불어넣는데만 집중하고 있었던 것 같다. 나는 머리를 휘휘 저으면서 호흡을 안정시켰다. 과정이 잘 이해되지 않지만 어쨌든간에 황궁의 비밀병기라는 초상기인을 손에 넣은 것이다. 나는 초상기인에게 재빨리 명령했다.
"바깥에서 날뛰는 제갈부를 죽여라!"
"알겠습니다."
초상기인 소녀는 갑자기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아마도 순간이동인 것 같았는데 술법으로 시전되는 것과는 느낌이 달랐다. 내가 천람의 방을 나서려고 하는 순간 거대한 폭발음이 들려왔다.
콰과과광!!
제갈부는 천람의 방으로 이어지는 복도에 서서 낭패스러운 눈으로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제갈부에 맞서고 있는 것은 초상기인 소녀였고 그녀는 허공에 둥둥 뜬 채로 제갈부에게 손을 뻗고 있었다.
제갈부가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명백히 감정히 흐트러진 모습이었다.
"대체 무슨 수로 초상기인을 발동시킨 거냐? 이건 이제야 초안을 잡았고 동력이 될만한 것도 하나도 없는데 대체 무슨 수로..."
"글쎄. 확실한 건 너를 죽이기에 충분하다는 거지."
"그래봤자 인형. 보패에는 당하지 못한다."
자신에게 암시를 걸듯 외친 제갈부가 보패 백우선을 크게 휘둘렀다. 그와 동시에 갑작스럽게 천지간에 빽빽하게 금광(金光)을 내뿜는 부적이 소환되었다. 부적의 갯수는 수십만 개나 되는 것 같아서 도저히 피할 도리가 없어보였다.
제갈부가 혼신의 힘을 다해 술법을 영창했다.
"낙혼별.."
퍼억!
그것이 끝이었다. 둥둥 떠 있던 초상기인 소녀는 어느 새 제갈부의 등 뒤로 가 있었고, 제갈부의 사지와 목이 분해되어 버렸다. 술법이 펼쳐지기도 전에 이미 끝장이 나 있었던 셈이다.
후두둑
오체분시된 제갈부의 시체가 힘없이 바닥에 떨어져 내렸다.
' 뭐야?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나는 이해불가한 승리에 놀랐다. 초상기인 소녀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눈에 보이지 않았다. 이건 '속도'라고 하기 보다는 정신을 차린 순간 이미 시간이 삭제된 것처럼 사라져 버렸다는 표현이 더욱 어울렸다. 심지어 호법사자급 고수가 엄청난 속도로 움직이는 것조차 대충 감지할 수 있었던 나였기에 지금 초상기인 소녀가 뭘 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동시에 오싹함을 느꼈다.
완성형 초상기인 1기가 보패를 사용하는 제갈부를 벌레처럼 죽여버릴 수 있다. 옆에 있던 석판 제단을 생각해 보면, 아마 칠요의 힘을 빌려서 현자의 돌이 완성되는 순간 초상기인이 떼거지로 눈을 뜨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절대 이길 수 없을 게 분명했다.
"후, 어쨌든 이겼으면 된 거 아닌가..."
내가 한숨을 쉬며 상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우선 나는 제갈부의 품 속에서 뭔가 챙길만한 게 있는지 뒤져보았고, 놈이 가지고 있던 백우선과 여러 개의 주술보조품을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곧장 비등으로 무저갱 지하의 수정 석비로 향했다. 수정 석비는 괴어로 이루어져 있었으나 칠요의 유적에 쓰여있던 것과 마찬가지로 대충이나마 읽는 게 가능했다. 나는 눈을 좁히며 침착하게 내용을 읽기 시작했다.
총 14개의 조항이 있었으며, 마치 시적인 내용과 은유가 섞여있는 듯 했다. 이 내용을 가지고 구체적인 현자의 돌을 제작할 수 있는지가 궁금할 정도였다.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이걸 어떻게 해야할지 고민했다.
"음... 일단 외워볼까."
완전히 해석은 되지 않지만 외우면 가치가 있을 듯 하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한참동안 그 자리에 서서 수정 석비의 내용을 외우고 또 외우기 시작했다. 이상하게도 지금은 일단 망량과 합류하는게 내게 도움이 될텐데도 수정석비의 마력에 빠진 것 같았다.
"......"
뭔가 이상하다...
몸이 좋지 않다.
' 뭐지?'
나는 이내 비틀거리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머리가 깨질듯이 아프고 괴롭다. 역한 구토감이 밀려오면서 무릎을 꿇었다. 몸을 뒤척이면서 괴로워하는 동안에 감기몸살같은 기운이 몸을 가득 감쌌다.
흐릿하게 무언가가 보인다.
무언가, 무언가가 나를 부르고 있다.
심연의 어둠.
가장 깊고 거대한 자.
나는 나도 모르게 손을 허우적대었다.
"허억... 허억..."
아까 내게 힘을 빌려준 존재가 내게 손짓을 하고 있다. 그는 댓가를 받지 않으나, 내가 그를 찾아오기를 원하고 있다. 그것이 그 나름대로의 호의라는 게 기가 막힌다.
강렬한 마력이 내 전신을 휘감으며 매혹하고 있다. 여태껏 느껴본 적이 없는 거대한 충동이 내 영혼을 옥죄기 시작했다.
나도 모르게 또다시 중얼거렸다.
[ R'lyeh Wgah'nagl Fhtagn...]
안 된다.
이건, 정말로 안 된다.
차라리 아까 제갈부에게 패배하는 게 낫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심연에서 무언가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내 영혼을 갈고리로 잡아채며, 빠르게 잡아당기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를 질끈 깨물었다. 그리고 눈에 독기를 품었다.
내 영혼을 내줄 줄 아느냐.
절대 너 따위에게 굴복하지는 않겠다.
인간의 긍지를 걸고!
푸콱!!
다음 순간, 나는 칼을 뽑아들어서 내 목을 찌르고 있었다.
내 눈빛이 흐릿해졌지만, 동시에 내 몸을 감싸고 있던 마력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며 지배력도 크게 풀리는 것을 깨달았다. 무언가 내게 씌어있던 거대한 화신(化神)이 철수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죽기 일보직전인 상태로 몸을 부들부들 떨며 씨익 웃었다. 엄청난 고통이 잊혀질 정도로 거대한 환희가 뇌를 물들였다.
자살함으로써 옛 지배자에게서 내 영혼을 지켜낸 것이다.
쿠웅
몸이 앞으로 쓰러지며 의식이 사라진다.
그것이 내 13번째 죽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