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검신-125화 (125/1,615)

0125 ======================================================

암천향(暗天鄕)

12번째 삶이 시작되었다.

"후, 이거 참."

나는 외양간에 앉아서 한참동안 멍하니 있었다.

여동빈의 강림폭주 끝에 추락사라니!

솔직히 말해서 오랫동안 살 수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지만, 너무 어처구니 없이 죽은 감이 있었다. 난데없이 금의위 총령이 마물으로 변하고, 그걸 퇴치하기 위해 여동빈이 강림했다가 내 기운을 모두 써서 죽는다는 건 예상도 하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여동빈의 입장에서는 당연할지도 몰랐다. 금의위 총령을 보낸 복마전의 세력들은 그를 이용해서 암천향으로 향하는 차원문을 열려고 했던 모양이었다. 그게 열리면 대재앙이 지상에 일어나므로 인간을 지키는 선인인 여동빈으로써는 내 목숨을 바쳐서라도 막아야하는 일이었던 것이다. 여동빈에게 목숨을 구함받은 적도 있었으므로 그냥 넘기기로 했다.

그것보다 문제는 실패한 이유였다.

나는 분명히 내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인연을 낙양에 끌어들여서 일대 세력을 결성하는데 성공했다. 원래라면 그것만으로도 금의위의 잔당을 쓸어버리는데는 큰 문제가 없을 터였다. 그러나 주변상황이 계속 안 좋게 돌아가는 탓에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낙양에서 떠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 11번째 삶에는 많은 일이 있었어. 그래서 패착(敗着)이 뭔지 감이 잘 안 잡혀.'

이런 일은 처음이다.

지금까지는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명확했기 때문에 쉽게 답을 낼 수 있었지만, 11번째 생에서는 워낙 겪은 일이 많았기에 그걸 알아내기가 힘들었다.

"끄응..."

나는 한참동안 고민했지만 내가 뭘 잘못한 건지 알 수 없었다. 굳이 하나 짚어보자면 황연 대장군의 구출시간이 늦었다는 것인데, 왠지 잘못한 게 그것 뿐만이 아니란 생각도 들었다. 그것은 전생자로써의 육감이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 우선은 시간을 아낄 수밖에 없겠군.'

나는 일단은 천암비서와 천년설삼부터 얻어놓고 생각하기로 했다.

일어나서 몸을 움직이려고 하자 전신이 뻐근하고 아파 왔다. 내공은 원래 상태로 완전충전되어 있으나, 대라멸진의 여파 때문에 마치 근육이 놀란 듯한 격통이 찾아오는 것이다. 나는 이를 악물고 그 고통을 약 한 식경 동안 가라앉힌 후 뛰어나가기 시작했다.

천암비서를 얻는 건 이제 이야깃거리도 되지 못했다. 나는 천암비서를 얻고 나서 다시 한 번 안쪽의 괴어를 읽어보려 했으나 역시 읽어지지 않았다. 천암비서 획득 후에는 바로 황산을 향해서 뛰기 시작했다.

타다닷

나는 황산을 향해 달리던 중, 극호에게 배운 멸혼보(滅魂步)를 시간 나는대로 써 보았다. 그러나 역시 멸혼보를 펼치면 마치 장애인같은 걸음걸이가 될 뿐, 극호가 펼쳤던 것 같은 신기어린 절세보법이 되지는 않았다. 극호가 내게 잘못된 구결을 가르쳐준 게 아닐까 의심될 정도였다. 하지만 극호가 먼저 이광에게 가르쳐줬다는 걸 보면 그럴 거 같지는 않았다.

황산에 도착해서 천년설삼을 얻고 흑백련의 꽃과 뿌리를 다 캔 후 수요의 유적으로 입수(入手)했다.

풍덩

그리고 금괴를 빼놓은 후, 거대 거미와 검을 들고 싸우기 시작했다. 지금까지도 너끈하게 상대했었지만 검술의 소양이 훨씬 진보한 지금은 쉬운 상대로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나는 거대거미가 무저갱에서 튀어올라오자마자 바로 검염을 시전하며 달려들었다.

슈콱!

[ 키에에엑!!]

나는 뇌명에다가 백웅결을 시전한 후 50초도 쓰지 않고 거대 거미를 작살낼 수 있었다. 이번에도 거대거미의 시체를 근처의 벽에 박아버렸다. 나는 저 놈의 내단을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그냥 검염을 날려서 마구 난도질을 해 보았다.

푸콰콰콱

산성체액이 여기저기에 요란하게 튀었다. 거대거미의 산성체액이 요란하게 빠지자, 한참 후 시꺼먼 무언가가 거미의 머리가슴 아랫부분에 있는 걸 발견했다. 나는 그게 거미의 내단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확실치가 않았고, 무엇보다 어떤 독성이 있을지 알 수가 없었다. 게다가 이번에는 시간을 아껴야 했기에 이런 곳에서 시간을 낭비할 수 없었다.

' 다음 번에는 위험을 감수하고 저 내단을 얻어 보자.'

그리고 나는 수요 막야를 회수하고 금괴와 함께 갖고 나왔다. 얻은 모든 것을 큰 봇짐 안에 쓸어넣고는 다시 길을 떠나기 시작했다.

나는 진랑곡으로 미친듯이 달렸는데, 이번에는 지금까지보다 더욱 필사적으로 달렸기 때문인지 굉장히 빠르게 도착할 수 있었다. 지난번의 최고기록보다 반나절 이상 단축된 것 같았다. 도중에 태경촌에 들러서 봉황조각도 얻고 왔는데도 단축되었으니 나는 말 그대로 최선을 다한 셈이었다.

찌르륵 찌르륵

"음냐... 음냐..."

망량은 야간중에 잠을 쿨쿨 자는 모습이었다. 나는 자고있는 망량의 집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가서 그를 흔들어 깨웠다.

"망량! 일어 나시오."

"어극... 헉... 다, 당신 누구야?!"

망량이 깜짝 놀라서 비명을 질렀다. 나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지나가던 무림고수요."

"아 그러십니까?!"

망량은 황당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으나 머리를 긁고는 말했다.

"쩝... 망운진 뚫고 예까지 왔는데 이렇게 깨우는 걸 보니 뭔가 할 말이 있는 거군. 추우니까 문이나 닫으시오."

내가 그를 해치러 온 게 아니라고 생각하는 듯 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문을 닫았고 장내에 촛불이 켜 졌다. 망량은 주섬주섬 옷을 입고는 정좌하고 앉아서 말했다.

"평범한 자는 아닌 듯 한데 야밤중에 무슨 일이오?"

"... 망량. 나는 백웅이라고 하는 전생자요."

"엉?"

"그리고 아마 천문을 보았겠지만, 아마 곧 막야의 수기(水氣)로 인한 재난이 닥칠 것이오."

나는 지난번보다 더욱 시간을 써서 상세하게 설명했다. 지난번에는 반 시진동안 비교적 간략하게 설명했지만, 이번에는 한 시진동안 그를 붙잡고 최선을 다해서 내가 겪은 일 전반을 설명했다.

"허어!"

망량은 막야와 천년설삼을 비롯한 영약과 기물들을 보여주자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전반적인 반응은 지난번과 비슷했지만 조금 달랐다. 특히 10번째와 11번째 생의 이야기를 듣고서는 완전히 신뢰하며 깊은 생각에 빠진 듯 했다.  내가 이야기를 마치고 그의 반응을 기다리고 있자, 그는 턱을 괸 상태로 말했다.

"그렇군. 전생자란 말을 믿겠소. 믿을 수밖에 없군."

"고맙소."

다른 사람들이라면 연막으로 대충 주워섬기는 말일지도 모르지만 망량은 달랐다. 그가 저렇게 말을 한다는 것은 절대명제로 상대방의 말을 믿어준다는 뜻이었다. 망량이 다시 생각에 빠져있다가 말했다.

"... 그럼 당신은 11번째 삶의 실패이유를 잘 모르겠다는 거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사실 망량 당신이야말로 나의 최대 조력자이므로 반드시 찾아와야 했지만, 그에 앞서서 이유를 잘 모르겠소. 크게 실패할 이유가 없었던 것 같은데 어째서 실패한 거라고 생각하오?"

"......"

망량이 침묵하다가 떫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생각하기도 싫지만, 11번째 삶에서 내가 낙양이라는 근거지를 버리고 장령곡의 숙부에게 의탁하러 간 거라면 그건 생각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이오. 그 인간말종 쓰레기에게 의탁할 정도였다면 정말로 위급한 상황이었다 할 수 있지."

"엥?!"

"아마 내가 백웅 당신을 걱정시키기 싫어서 말을 안했겠지만, 나와 숙부의 사이는 극도로 험악하오. 내가 장령곡에 가면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 수 있는데도 굳이 진랑곡에 은거한 것은 그 때문이지. 그 자는 뛰어난 지력을 가지고 저 좋을대로 하고 사는 인간쓰레기요."

그렇게 비난을 쏟아낸 망량이 말을 이었다.

"아무튼 내가 볼 때 가장 큰 실패요인은 구출제한시간이라고 할 수 있소."

"역시 그런가..."

"하지만 단순히 그것뿐만이 아닌 것도 사실이지. 더 큰 이유는 힘을 쌓을 시간이 모자랐다는 것이오."

힘을 쌓을 시간.

내가 그 말을 되뇌고 있을 때 망량이 섭선을 펼치며 말했다.

"잘 생각해 보시오. 이광의 행보는 얼핏 보면 거칠 것 없는 사나이다운 행로인 것 같지만, 실상은 갑작스러운 사태에 경험에서 우러난 임기응변으로 대처한 것에 지나지 않소. 그 상황에서 반천맹의 세력을 세운지 얼마 되지도 않는 나와 연수했으니 실상은 불안하기 짝이 없는 조직이었던 셈이오."

"그런 거요?"

"그렇소. 이광이든 나든간에 우선은 침착하게 대처했으나 마음속으로는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었겠지. 서로 너무 준비가 안 되어 있었으니까."

그럴지도 모른다.

뇌신류라고는 해도 그저 이광과 인연이 있는 뇌신류 제자들을 불러모은 것에 지나지 않았고, 그나마도 금의위의 압박 때문에 쫓기듯이 반천맹과 연합한 것이었다. 망량이 짚은 것은 그 동맹의 안정성이 희박했다는 약점이었다.

"그래서 무작정 시간을 아낀다고 될 일은 아니오. 즉, 금의위와의 대립과 황연 대장군의 구출은 다른 선상에 놓고 생각해야 할 것이오. 세력이 기반을 잡고 안정적으로 클 시간이 적어도 연 단위로 필요하니까."

"잘 이해가 안 되는데 설명해 주시오."

"간단하오."

이어진 망량의 말에 나는 눈을 부릅떴다.

"황연 대장군은 당신 혼자 구출하는 게 최선이라는 것이오."

"......!!"

"물론 이론상으로 그렇다는 말이오."

"왜 그렇게 되는 거요?"

망량이 한숨을 쉬었다.

"다 모여서 금의위의 이목을 끌만큼 끌어놓은 상태에서 황연대장군의 구출이 대명제가 되어버렸기 때문에, 반천맹과 뇌신류의 연합 전체가 손쉬운 표적이 될 수밖에 없었소. 시간낭비도 굉장했을 것 같군."

"으음."

"그걸 피하기 위해서는 제 3자가 원인모르게 끼어들어서 황연 대장군을 구출해 버리는 게 최선의 방법이오. 금의위가 혼란에 빠짐과 동시에 시간을 벌 수 있는 셈이지."

나는 그제서야 망량의 말을 이해했다. 과연 망량은 내가 생각지도 못했던 점을 짚어준 것이다. 망량은 그렇게 말하고 나서 섭선을 다시 접으며 말했다.

"다만 아쉬운 건 고려로 향하는 중에 해적을 토벌하는 일이 필수가 되어버렸다는 거군. 너무 큰 이득이 걸려있기에 당신은 왠만하면 그 과정을 뺄 수가 없다고 보여지오. 시간을 아끼기 힘들 거요."

"그렇겠군."

"하지만 걱정 마시오. 기책(奇策)이 있소."

"무슨?"

그리고 망량은 내게 한 식경동안 기책이란 걸 설명했다. 나는 듣던 중에 무릎을 탁 칠 수밖에 없었다.

"과연, 그렇게 하면 시간소모가 줄겠군!"

"하지만 잘 생각하시오. 당신의 지금 실력에 자신이 없다면 이 방법은 하지 않느니만 못하오. 귀찮더라도 고려 왕복행을 감수하고 중원에서 최대한 시간을 아끼는 게 나을지도 모르지."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나는 당신의 계획대로 하겠소."

나는 다음 날, 망량과 함께 길을 떠나서 천우진이 있는 마을에 도착했다. 이번에도 천암비서를 소나무 숲에 숨겨두고 마을에 들어가자 천우진이 띠꺼운 표정으로 맞이했다.

"당신들은 누구이며 이 마을에는 무슨 일이오?"

"사제, 나를 모르는 척 하지 말게. 자네의 사형인 망량 아닌가."

"누가 사형인 거 몰라서 이러오? 갑자기 뜬금없이 무림고수를 데려와서 어쩌자는 거요. 사부님이 요즘 힘드신 걸 모르시는 건가?"

천우진의 반응이 지금까지 중에서 유달리 격했다. 아무래도 야간중에 와서 잠을 방해받았기에 신경이 예민해져 있는 모양이었다. 망량이 침착하게 그를 설득했다.

"아주 중요한 일이니 부탁하네."

"... 알았소."

잠시 후 천우진이 이야기에 납득하고 제사 준비를 했다. 이번에도 천우진의 축문이 한차례 이어지고, 천우진에게 태허천존이 강령했다.

태허천존은 천우진에게 강신한 상태로 묘하다는 듯 나를 쳐다보았다.

[ 너는 대체 뭐지?]

"무슨 말입니까?"

[ 천운(天運)이 중첩되어 있다. 이것은 인간으로써는 죽었다 깨어도 있을 수 없는 일이거늘... 심지어 나의 힘마저 느껴지니, 이게 무슨 일이냐?]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내가 대꾸하자 태허천존이 말했다.

[ 아무튼 다른 자의 축복을 받아가라.]

"잠시 궁금한 게 있습니다만."

[ 무엇이냐?]

"제게 축복의 기운이 있다는 게 그리 중요한 것입니까? 여러 번의 축복은 왜 안 되는 것인지요?"

이건 예전부터 묻고싶었던 것이었다. 이상하게도 태허천존이든 서왕모든 내게 자신들의 축복의 기운이 있는 이상 더 이상 축복을 주기를 꺼려했다. 그러자 태허천존이 없는 수염을 쓰다듬는 듯한 자세를 취하더니 말했다.

[ 신의 축복을 한 존재에게 여러 번 주는 일은 물론 가능하다. 그러나 그렇게 될 경우 인간의 영혼이 축복의 용적을 버텨내지 못하고 부숴지기 마련이다. 축복이 중첩될 경우 막대한 용량이 필요하며, 신선이 아닌 자의 영혼은 빈약하고 작아서 버텨내질 못한다.]

"그렇습니까..."

[ 그래도 정 원한다면 불어넣어줄 수는 있다. 어떻게 하겠는가?]

"만일 태허천존님의 축복이 중복되면 어떻게 됩니까?"

[ 그야 물론 천지간에 무쌍한 대운(大運)이 연속될 것이다. 버텨낼 수 있을 때의 이야기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게 해 주십시오."

[ 좋다. 내 너에게 축복을 주겠노라.]

파아앗!

잠시 후 신령스러운 빛이 내 전신에 내려오는 듯 했다. 나는 그 빛 하나하나에서 강렬한 온기를 느꼈다. 옆에서 의식을 바라보고 있던 망량이 깜짝 놀라서 외쳤다.

"아, 아니, 백웅, 대체 무슨 짓이오?!"

"축복이 중첩되나 싶어서..."

안 해보면 모르는 일이었다. 나는 이걸 시험해 볼 필요성이 느껴졌다.

"그건...!!"

망량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러더니 그는 눈을 질끈감고 내게 외쳤다.

"지금 당장 혼자서 낙양의 황궁에 쳐들어 가시오!"

"무슨 소리요?"

"설명할 시간 없소. 일분 일초라도 아껴서 황궁에 쳐들어가서 금의위 복마전놈들과 싸우시오!"

"엥?"

"그리고 최대한 많은 걸 알아내고 얻어내시오! 그게 지금은 최선이오!"

이게 무슨 소리인가.

보통이라면 이게 개소리라고 생각해서 멍때릴 게 분명했다. 하다못해 캐물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천우진을 바라보며 말했다.

"부탁이 있는데 나를 낙양 황궁으로 좀 보내 주시오."

천우진도 이야기를 다 듣고 있었는지, 나를 어이없다는 눈으로 보고 있었다. 그러더니 한숨을 쉬었다.

"천지간에 당신같은 선택을 한 자는 달리 없었을 것이오. 당신의 바보스러움을 존경하오."

"......?"

"잘 가시게."

"아, 잠깐만."

나는 급히 나가서 소나무숲에서 천암비서를 챙겨왔다. 그리고 천우진이 전이술을 펼쳐 주었다.

파앗!

다음 순간, 내 몸뚱이는 황궁 내부의 어느 궁궐 안에 들어와 있었다. 환신(幻神)의 경지에 달한 천우진에게 장거리 전이술은 충분히 가능한 술법인 듯 했다. 나는 뭐가 뭔지 몰랐지만 일단 황궁 지도를 떠올리면서 안으로 쭉쭉 들어가 보았다.

' 에라 모르겠다. 어떻게든 되겠지.'

바로 그 때였다.

쿠구구구궁

콰아아아아아앙!!

하늘에서 난데없이 무언가가 떨어져서 거대한 파괴음과 섬광, 충격파가 울려퍼졌다. 나는 전방에서 덮쳐오는 폭발과 충격파에 급히 몸을 피하려 했지만, 희한하게도 그 폭발은 내게 티끌만큼도 타격을 주지 않는 듯 했다.

그 폭발이 끝나자 황궁 여기저기가 폭발 때문에 타들어가 있었고 거대한 먼지구름이 떠올랐다. 순식간에 황궁의 절반 이상이 초토화된 듯 했다.

"으아아아악."

"세상에 이럴수가."

"운석(隕石)이 떨어졌다."

그랬다.

난데없이 커다란 운석이 천공에서 떨어져서 황궁에 때려박힌 것이다. 나는 주변에서 사람들이 소리를 치며 아비규환이 된 꼴을 은형술로 숨어서 지켜봤는데, 내 앞을 지나가던 금의위 천호 하나가 외쳤다.

"큰일이다. 기문절진(奇門絶陣)이 부숴졌다. 모두 황족을 경호하러 가라!"

' 오호?'

나는 신기함을 느꼈다. 운석충돌 때문에 황궁에 쳐져 있던 사상최악의 절진이 파괴된 모양이었다. 그 증거로 아까 전부터 내 몸을 내리누르는 듯한 압력이 사라진 것이다. 나는 은형술과 경공으로 숨으면서 정신없는 틈을 타서 어떤 장소로 향했다.

' 갈 곳이라면 거기 뿐이지!'

황궁 내황각!

무명제사서가 보관되어 있다는 천하의 심처(深處)에서 무명제사서를 찾아봐야 하는 것이다. 나는 내황각의 위치를 지도에 근거해서 대충 찾아가다가, 내황각 앞에 금의위 한 명이 서성이는 것을 발견했다. 그래서 몰래 달려들어서 놈을 기절시켰다.

"어억..."

나는 금의위의 옷을 뺏아입은 후 대충 옷을 잘라서 크기를 맞추었다. 어린 금의위라고 하면 억지로나마 통할지도 몰랐다. 그리고 내황각 안으로 들어갔는데, 아마도 운석의 충격파 때문에 내황각의 결계도 함께 파괴된 모양이었다.

내황각은 총 5층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나는 1층에서부터 어마어마한 양의 장서가 존재하는 걸 볼 수 있었지만, 왠지 감으로 볼 때 여기에는 없을 거 같아서 대충대충 2층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3층까지 올라가서 왠지 감이 시키는대로 찍듯이 어느 위치로 갔는데, 놀랍게도 거기에는 무명제사서가 꽂혀 있었다.

무명제사서(無名祭祀書)

근처에는 무명제사서를 해석하고 연구하던 흔적이 있었다. 아마도 지금은 운 좋게 그들이 내황각에서 철수한 상태인 듯 했다. 나는 무명제사서를 꺼내서 읽어봤는데 역시 읽히지 않았기에 그냥 품 속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내황각의 5층으로 올라가 봤는데, 거기에는 왠 깡마르고 잘생긴 사내가 정좌하고 앉아 있었다. 그는 나를 감지했는지 나직이 말했다.

"엄청난 운기(運氣)로군... 운석이 떨어지고, 결계가 부숴지고, 불운하게 나 또한 술법의 여파로 못 움직이고, 금의위 총령도 마기가 폭주해서 날뛰고, 이계의 존재도 힘이 부족해서 끙끙거리고, 초상기인(超上奇人)도 점검중인 이럴 때 하필이면 나를 찾아온 것인가?"

"......"

"자, 내 목을 취하라. 이 세상은 정말 운 하나로 다 해먹을 수 있구나..."

나는 한탄하는 그 사내를 보자 어이가 없었다. 그래서 말했다.

"저기, 당신이 누군지는 모르겠는데 내가 왜 죽여야 하지?"

"침입자여. 내가 내황각주(內皇閣主)이자 대천문관(大天門官)이며 황궁결계를 수호하는 대술법사인 제갈부(諸葛賦)라는 걸 모르고 찾아왔단 말인가?"

"응..."

"......"

"......"

기묘한 침묵이 이어졌다. 그러자 제갈부가 뭔가 알아챈 듯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정말 무대포같은 사내로군."

"뭐 어쩌라는 거냐?"

"푸하하하하핫."

제갈부가 갑자기 미친듯이 낄낄 웃었다. 그리고는 말했다.

"한번 그대의 운이 어디까지 가나 시험해보고 싶군. 옆에 있는 대어전(大御殿)으로 가 보아라."

"거긴 왜 가라는 거냐?"

"거기에 황제(皇帝)가 있다."

"......!!"

제갈부가 씁쓸하게 웃었다.

"어디 그대의 운이 시대의 어둠을 관통할 수 있는지 해보게."

나는 자세한 사정은 잘 몰랐다. 그러나 가슴이 뛰었다.

' 황제?'

황제가 바로 이 지랄맞은 대사건의 중심에 있는 존재였다. 그가 만일 복마전의 수장이며 금의위에게 악독한 명령을 내린 당사자라면, 황제의 목을 치는 것만으로도 모든 사태가 끝나게 될 것이다. 물론 나는 황제시해범이 되겠지만 그딴 건 알 바 아니었다. 우선 만악의 근원을 만나서 정보를 들을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매력적으로 다가온 것이다.

나는 그를 힐끔 본 후 말했다.

"원한이 없으면 굳이 죽이진 않아. 정보 고맙다."

제갈부를 등지고 바로 옆에 있는 황제의 대어전으로 향했다. 확실히 이 곳도 결계가 파괴되어 있는지 아무런 저항없이 진입할 수 있었다. 곳곳에 금의위들이 있었으나, 그들은 현재 정신이 없어 보였다.

[ 크오오오. ]

"으아아악."

"총령님 정신 차리십시오."

촉수가 미친듯이 화염과 번개를 뻗어내었고, 금의위들이 공격에 맞아서 싸늘한 시체가 되어가고 있었다. 금의위 총령이 마기를 억제하지 못하고 폭주한 모습인 듯 했다. 그리고 금의위 총령이었던 마물에 맞서서 왠 새하얀 얼굴의 미남이 부들부들 떨며 분노해서 외쳤다.

"이 개자식! 내 부하까지 죽여?!"

"환야(幻夜)님 어떻게 할까요?"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해! 황실어림군이 올 때까지 이 자리를 사수해라! 여기가 뚫리면 폐하가 위험하다."

아마도 황궁사신위 현무인 동창제독 환야인 듯 했다. 그는 나머지 금의위와 동창을 통솔하며 폭주한 총령을 막느라 정신이 없어보였다. 그리고 나는 운 좋게도 그들의 시선을 돌파해서 대어전 내부로 들어올 수 있었다.

투두두둑...

대어전 내에는 이상하게도 시비나 후궁이 보이지 않았다. 후궁이나 황후가 머무는 별궁이 따로 있다지만, 크나큰 건물은 인기척이 하나도 없었고 조용했다. 다만 불길한 고동같은 진동이 가끔씩 느껴질 뿐이었다.

나는 좀 더 안쪽으로 걸어들어갔는데, 그러자 왠지 머리가 띵해질 정도의 마(魔)가 느껴졌다. 이것은 예전에 쓰러뜨렸던 이족 주술사한테서 받았던 느낌과 비슷했다. 내가 그 쪽으로 다가가자 문짝이 하나 있었고, 나는 거침없이 문을 열었다.

쿠구구...

장내에는 2인의 인영이 있었다.

가운데의 옥좌에는 황제(皇帝)로 보이는 중년인이 앉아 있었고 오른쪽에는 시꺼먼 옷으로 전신을 가리고 있는 신원불명의 괴인이 팔짱을 끼고 있었다.

황제가 내 모습을 발견하더니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연금술사(練金術師)여. 저 꼬마아이는 대체 뭔가?"

연금술사라고 불린 시꺼먼 괴인이 나직이 황제의 말에 대답했다.

"무척이나 거대한 운의 고리를 끌어안고 있군. 운석을 불러 온 건 저 아이의 운이다."

"운이라고?"

"후후후... 어쩔건가 황제. 나와 2차 계약을 하겠는가? 암천향(暗天鄕)에 영혼을 바치겠는가?"

느긋하게 웃는 연금술사라는 괴인은 황제에 대한 존경심이나 외경심이 전혀 없는 듯 했다. 하대에 가까운 평대를 하고 있는 것이다. 놀라운 건 황제 본인조차도 그 사실에 아무런 거부감이 없는 듯, 가만히 앉아서 생각하더니 말했다.

"그럴 생각은 없다. 불로불사의 계약만으로 충분하다."

"좋아... 그러면 여기는 피하도록 하지."

"네놈..."

"지켜줄 의리는 없다, 황제."

슈욱!

연금술사 괴인은 난데없이 순간이동으로 사라져 버렸다. 내가 황당해서 쳐다보고 있자 황제가 결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침입자여. 네 맘대로 해 보아라. 허나 짐의 생명을 끊는 건 한없이 힘들 것이다."

"아니 그러니까 내가 왜..."

"짐을 죽이러 온 것을 알고 있..."

쿠콰쾅

바로 그 때, 다시 하늘에서 운석이 떨어져서 충격파와 폭발을 내었다. 그 운석은 정확하게 황제가 앉아 있던 자리에 내리꽂혔고, 황제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전신이 폭발해 버렸다. 육편이 혈우처럼 떨어졌다.

후두둑

"......"

황제가 터져서 잔해가 된 걸 보자 할 말이 없어졌다.

나는 그냥 여기까지 숨어서 걸어온 것밖에 없는데, 단숨에 황궁이 초토화되고 황궁의 지배자인 황제의 죽음을 목격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나는 운이 중첩되었을 때의 효력이 어떤 것인지 여실히 알 수 있었다.

' 대운(大運)이 중첩되면 천하에 다시 없는 무쌍한 운이 연속되는구나.'

바로 그 때였다.

태허천존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려퍼졌다.

[ 운(運)이 끝났다. ]

콰콰콰쾅

"아아아아악."

다음 순간, 나는 황궁 전체에 소나기처럼 떨어져내린 운석의 폭풍과 폭발에 휩쓸리고 말았다. 너무나 전방위적으로 덮쳐왔기에 막을 방법도 피할 방법도 없었다. 폭발에 대어전 전체가 소멸되는 듯 했다.

나는 거대한 섬광을 눈 앞에서 보면서 알 수 있었다.

' ... 그리고 대운이 끝날 때는 대흉(大凶)이 반드시 죽음을 부르는구나...!!'

콰과광

그것이 나의 12번째 죽음이었다.

============================ 작품 후기 ============================

약간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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