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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천향(暗天鄕)
나는 이광과 진소청에게 다가갔다. 보물을 다 챙겼을 때쯤에는 그냥 꿈틀거리는 수준이었으나 지금은 비척거리며 일어서는 듯 했다. 진소청보다 이광이 훨씬 더 정신을 차리고 있는 상태였는데, 아마도 품 속에 있던 보패 오화칠금선 덕분인 듯 했다.
이광이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 놈은, 쓰러뜨렸, 느냐?"
역시 아직 정신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나는 이광과 진소청을 차례로 부축하며 대답했다.
"네. 잠시 쉬었다 나가면 될 것 같습니다."
"다행이군..."
무저갱에서 쉬려고 하다가는 사기에 기운이 빨릴 것 같았기에, 우리는 뇌옥까지 올라와서 벽에 몸을 기대고 쉬었다. 이광과 진소청은 약 한 식경 동안 죽은 듯이 쉬고 있다가, 이내 호흡이 정상으로 돌아오며 정신을 차렸다.
뻐근한 듯 목을 주무르던 진소청이 한숨을 쉬었다. 그의 까까머리는 땀투성이라서 얼마나 큰 고난을 겪었는지 보여주었다.
"정말 무서운 공격이군. 저런 마물이 살고 있었을 줄이야..."
"환각에 저항하실 수 없었습니까?"
"사실 희미한 의식은 있었어, 사제. 가까이 오면 반격 정도는 할 힘은 있었지. 하지만 지금까지 겪어본 적 없는 환각이 쉴새없이 덮쳐와서 제정신을 차리는 게 거의 불가능했어."
"으음..."
나는 침음성을 흘렸다. 나는 느끼지 못했지만 촉수두꺼비의 정신계 주살공격은 굉장히 강력한 게 틀림없었다. 대요괴인 미호는 그저 귀가 좀 아프다는 수준으로 끝났지만 보통 인간이라면 즉사하는 게 보통이리라.
이광이 자신의 몸을 풀더니 말했다.
"이제 그 황금비등을 써서 반천맹으로 돌아가자."
"스승님. 그 전에 한 가지 확실하게 해두고 싶습니다."
"무엇이냐?"
나는 이광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이번에 스승님이 하신 일은 지나치게 조력자를 깔아뭉개고 신뢰를 무시하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스승님께 배웠던 의(義)와 상이해서 괴롭습니다."
"......"
이광은 침묵했다. 그는 형형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더니, 천천히 대답했다.
"그래. 내가 못할 짓을 한 것은 사실이지. 반천맹주에게 사과를 하겠다."
다행히 이광은 자신의 잘못은 인정할 줄 아는 사내였다. 아랫사람의 진언을 받아들일 줄도 알았다. 나는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리며 포권했다.
"넵, 감사합니다."
"그리고 네 말에 대답해 주자면, 어깨에 짊어지고 있는 것의 [무게]가 너무 무겁기 때문이다."
이광이 창두를 들어서 곳곳의 잘린 한철창살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저기에 갇혀있던 자들과 우리의 차이가 무엇인가? 그건 금의위에게 당했느냐, 당하지 않았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뇌신류는 현재 강대한 적이 많고 한치 앞도 알 수 없는 상황이다. 너희를 이끄는 나로써는 언제나 최악의 상황에 대비할 수밖에 없다."
"그건..."
"나도 어떤 것이 의리있는 일인지 충분히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배신당하거나 죽게 되면 그게 도대체 무슨 쓸모란 말이냐? 죽고 나서 귀신이 되어서 원망할 건가?"
강변하던 이광은 단호하게 결론을 내렸다.
"다시 과거로 돌아간다 해도 내 결정은 달라지지 않는다. 나는 내가 지금 품고 있는 사람들이 가장 소중하며, 그들을 지키고 우리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악마라도 될 수 있다."
"......"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왠지 지금 이광이라는 인간의 진짜 본성을 보게 된 것 같았다.
지극히 현실적이고, 자신의 힘에 절대적인 신뢰를 지니고 있으며, 적에게는 아무런 용서가 없으며, 냉혈하면서도 오연하며, 필요하지 않은 대의나 감정을 모조리 쳐내는 자. 적이든 아군이든 질리게 만들지만 막상 아군이 되면 어쩔 수 없이 신뢰할 수 밖에 없는 인물이 이광이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정신적으로 대비를 해주셔야 합니다."
"알았다."
나는 이광과 진소청의 정신력이 본 궤도에 돌아왔다 생각하자 그들이 내 어깨에 손을 얹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황금비등을 문질렀다.
파아아앗
나는 이번에는 가능하면 천리안이 발동되기 전에 강하게 의지를 보냈다. 해신이 있는 곳을 비치기 직전에 목소리가 물어 왔다.
[ 어디에 가겠는가? ]
여기다.
[ 알았다...]
시야가 바뀐다. 그리고 어느 새 풍경이 달라져 있었고, 우리 모두는 반천맹과 뇌신류가 대치하고 있는 현장에 와 있었다. 이광은 정말로 크게 놀란 듯 눈을 부릅뜨고 주위를 돌아보고 있었다.
그리고 극호는 반천맹 무인들에게서 혈도를 제압당한 윤광과 지평을 지키는 형상을 하고 있었다. 극호의 몸에서는 무서운 투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어서 함부로 접근하지 못하는 형상이었다. 망량이 덤비지 말라는 명을 내리기도 했을 것이다.
이광은 망량을 발견하고는 뚜벅뚜벅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정말 미안하네. 내가 섣불리 그대들을 믿지 못한 것을 용서해 주게."
망량이 그의 사과를 받자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제가 이광 님이었다고 하더라도 같은 선택을 했겠지요."
"면목이 없군."
"지금 이 순간 그건 과거지사가 되었습니다."
망량이 빙긋 웃으며, 이광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광이 품 속에서 보패 오화칠금선을 돌려주자 망량은 섭선으로 자신의 머리를 톡톡 치며 말했다.
"앞으로의 일만 생각합시다."
"고맙네."
그 순간 장내의 긴장감이 싹하고 날아가는 것 같았다. 극호가 먼저 투기를 풀었고 반천맹 무인들도 살기를 거두었다. 이걸로써 수장끼리 앙금을 거두기로 했기에 부하들이 뭐라 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우선 변이자들을 수용해 놓았던 건물로 갔다. 변이자들은 목조건물의 벽에 기대어 앉아서 멍하니 있었는데, 그들의 몸은 어느 새 이족(異族) 특유의 사기나 촉수가 많이 사라져 있었다. 이미 크게 이계의 기운에 침식된 자는 아직 변화가 없었지만, 변화가 적었던 인간은 서서히 이성을 찾는 듯 꿈틀거리는 중이었다.
특히 몸뚱이가 이족 괴물로 변해버렸던 황연 대장군의 변화가 극적이었다. 목에서 명치까지의 상반신이 완전히 인간으로 되돌아와 있었고 어깨 부분까지 인간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러자 진소청은 기쁜 걸 감추지 못하고 외쳤다.
"되었다!"
"아직은 아니오. 이 분의 몸이 온전히 되돌아오고 인간의 이성을 찾기 위해서는 적어도 두 달의 시간이 필요하오. 그 때까지는 변이자들을 관리하며 지속적으로 도교의 신령의 힘을 빌어 축문(祝文)을 외우도록 하겠소."
그러자 이광이 말했다.
"그게 가능하겠나? 비등의 힘을 이용해서 탈출해 오는데는 성공했으나 이미 우리는 금의위에게 찍혔네. 낙양 내에서 숨어서 활동한다면 두 달을 버티는 건 무리야."
이광의 말대로였다. 지금 상황에 낙양에서 활동하는 것 자체가 자살행위였다. 적진 한가운데에 웅크리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기에, 앞으로 두 달을 버틴다는 건 꿈같은 소리였다. 그러자 망량이 훗하고 웃었다.
"지금까지 우리 반천맹이 금의위의 견제 없이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어떤 분의 호의 덕이었습니다. 우리는 이제 그 분을 완전히 아군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렇게 한다면 두 달 정도는 너끈히 버틸 겁니다."
이광이 짐작했다는 듯 대꾸했다.
"그럴 거 같았네. 누군가가 뒷배를 봐 주고 있을 것 같았지. 그 분이란 게 누구인가?"
"이미 아시는 분입니다."
"......?"
"쌍문사가 장서이한(長徐李韓), 그 중 한씨 세가의 가주(家主)십니다."
쾅!
이광이 그 순간 회의 탁자를 부서져라 내리쳤다. 물론 이성으로 자제했기에 탁자가 부서지지는 않았으나 그의 분노를 대변하기엔 충분했다. 그는 잡아먹을 듯 망량을 노려보다가 말했다.
"불가(不可)! 나는 그 할망구와 손을 잡기 싫네."
망량은 부채를 팔락거리다가 대답했다.
"저도 그 분께서 어떤 분이며, 이광 님과 어떤 관계인지 알고 있습니다."
그의 눈에 시퍼런 빛이 들어왔다. 망량 또한 이 일에 독기를 품고 있다는 증거였다.
"하지만 지금은 이것저것 가릴 때가 아닙니다. 그 분의 도움이 없다면 우리는 낙양에서 바로 본거지를 옮겨야 하며, 그 와중에 또 금의위와 어림군의 추격이 이어질 것이며, 몇년이고 몇십년이고 지속적으로 지명수배되어서 도주생활을 해야만 할 것입니다. 정말로 그런 수고를 하고도 세력을 모아서 금의위에 복수할 수 있다 생각하십니까?"
"......"
"다행히 황궁이나 금의위는 그 분의 진짜 정체를 모르고 있습니다. 잘 이용한다면 의외의 헛점을 찌를 계기도 될 것입니다."
이광은 턱을 괴고 고민했다. 그리고는 말했다.
"반천맹주. 자네가 말하는 뜻은 잘 알겠네. 허나 내가 정말로 걱정하는 건 다른 것이야."
"말씀하십시오."
"그 할망구는 결코 동정심같은 걸로 움직이지 않아. 그 행동에는 철저한 계산이 자리잡고 있지. 섣불리 손을 잡으려다가 그대들이 노예 신세로 전락할 가능성도 있다."
망량이 이광의 의견에 동감했다.
"그렇겠지요. 저희 반천맹은 세력도, 자금도, 무력도, 정보도 모두 딸립니다. 한씨 세가와 대등한 관계에서 손을 잡을 수는 없을 겁니다. 지금도 한백령 가주는 우리들을 금의위의 시선을 돌리기 위한 첨병 정도로 이용하고 있으니까요."
망량이 이광과 진소청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말했다.
"하지만 뇌신류라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그녀는 다른 차원에서 우리와의 동맹을 고려하게 될 것입니다."
"으음."
"일석이조(一石二鳥)라고 봅니다만."
이광이 눈을 감고 생각하다가 말했다.
"즉 내 의지에 달렸다는 거군."
"원치 않는다면 지금이라도 말해 주십시오. 차선책이라도 시간을 아껴서 실행해야 하니."
"그럴 필요는 없네."
이광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의 얼굴은 다시 냉랭하게 굳어있어서, 자신의 감정을 숨기기 시작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오랜 빚을 받으러 가야겠어."
나는 일련의 대화흐름을 들으며 침음성을 흘렸다.
"으음."
둘이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으나 이야기는 명백했다.
한씨세가 - 실제로는 아마도 백련교와 관련되어 있을 것이며, 화신류(火神流)의 달인인 한백령이 이끄는 중원 최대의 거부(巨富)와 교섭을 해야하는 셈이다. 그리고 이광은 화신류와 한백령 가주를 마뜩찮게 생각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에게 도움을 요청하러 가는 상황이 된 것이다.
' 그게 만일 가능하다면...'
뇌신류와 화신류의 동맹!
백련교의 거대한 축을 차지하던 호법문파가 힘을 합치게 되는 셈이었다. 나는 한백령 가주나 이광이 날뛸 경우 일어날 일이 상상도 되지 않아서 몸을 부르르 떨었다. 말 그대로 천지를 쪼개버릴 듯한 위력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광이 나를 쳐다보며 물었다.
"너는 어쩔테냐?"
장내의 시선이 내게로 쏠렸다. 개중에는 미호의 사나운 시선도 섞여 있어서, 나는 본의아니게 찔리는 기분이 들었다. 지금까지 미호는 내 행동을 곱지 않게 바라보고 있었기에 도저히 한씨세가같은 적지에 따라가겠다는 말을 하기가 힘든 것이다. 나는 별 수 없이 대답했다.
"여기서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그것도 좋겠지. 열심히 수련하고 있거라."
"네."
약 한 시진 후, 준비를 끝낸 망량과 이광 일행이 한씨세가로 향했다. 그들은 눈에 띄지 않기 위해서 한씨세가를 방문하는 표국에 섞여들어갈 작전인 듯 했다. 나는 그들이 다녀올 동안에 이 곳을 지키는 역할이 되었다.
나와 함께 남은 극호가 투덜거렸다.
"에이 제기럴, 할 게 없어서 화신류 놈들과 손을 잡게 되다니."
"극호 사형. 화신류의 도움을 받으면 안될 이유라도 있소?"
극호는 능글능글하고 제멋대로인 그 답지 않게 흥분했다.
"시벌! 너는 어려서 잘 모르겠지만, 화신류 놈들은 뇌신류가 쫓겨날 때 그냥 방관하고만 있었다. 가장 큰 동맹이라고 생각했는데 배신당했지. 어찌 그런 더러운 놈들한테 이쪽에서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하는 거냐?"
화신류를 싫어하는 건 이광뿐만이 아닌 듯 했다. 극호가 이렇게까지 질색하는 걸 보면, 아마 중원 곳곳에 흩어져 있을 뇌신류 전승자들 대부분이 화신류를 싫어할 듯 했다. 나는 궁금해서 연이어서 질문했다.
"그럼 수신류(水神流)도 싫습니까?"
"뭔 소리야, 놈들은 아예 논외야. 애초에 원한같은 걸 얘기할 대상이 아니라고. 넌 수신류가 어떤 곳인지도 못 들었냐."
손사래를 친 극호가 지긋이 앉아서 말을 이었다.
"그보다 굳이 나한테 붙어서 얘기를 거는 걸 보면, 그딴 거보다 더 묻고싶은 게 있는 것 같은데?"
"들켰군."
"애새끼가 괜한 수 쓰지 마라. 어차피 가르쳐주는 건 내 맘이니까."
으스대던 극호가 슬며시 물었다.
"그래, 묻고싶은 게 뭐냐."
"극호 사형이 보유하고 있는 뇌신류 비기(秘技)가 뭔지 궁금하오."
"그럴 줄 알았지. 어린 놈이 무공욕심 한번 개쩌네."
"뇌영보(雷影步) 같지는 않은데..."
극호가 킬킬 웃었다.
"큭큭... 뇌영보나 뇌영보 천주살보다 더욱 대단한 거지. 궁금하냐?"
"궁금하오."
"안 가르쳐 줘. 이건 내 밑천이니까."
"어차피 사부님께서도 알고있을 것 아니오? 밑천이라기엔..."
그러자 극호가 정색했다.
"전혀 그렇지 않다. 사부도 내 비기는 몰라."
"......!!"
"이유를 가르쳐 줄까?"
극호는 잠시 자리에서 일어나서 보법의 자세를 잡았다. 그것은 뇌영보의 초기 자세였는데, 극호는 천천히 삼 보(三步)를 밟았다. 나는 그 변화가 뇌영보 천주살로 이어진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무덤덤하게 보고 있었는데, 별안간 색다른 변화가 일어났다.
파지직!
마치 환영이 움직이는 것 같았다. 그 움직임은 뇌영보 천주살보다 더욱 빠르고 현란했으며, 마치 인간의 몸이 번갯불로 화(化)한 것 같았다. 극호의 신법에 비견할만한 것은 기껏해야 풍신류 호법사자의 비기 정도였다.
칠 보(七步)가 끝나자 휘리릭 하고 환영이 극호의 몸으로 빨려들어갔다. 하지만 나는 안력을 돋우고 있었는데도 언제 어떻게 진짜가 되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기경스러운 신법에 감탄하고 있자 극호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냥 못 배우더라고."
"무슨 말이오?"
"말 그대로지. 풍신류에게 복수해야 하는데 비기를 아낄 게 뭐가 있냐 싶어서 그냥 이광 사부에게 가르쳐 드렸는데 못 배웠어. 진소청도 마찬가지였고."
"있을 수 없는 일이오. 그들은 무학의 천재(天才)인데."
"뭐 그거야 나도 인정하는 거지만, 그래도 못 배우더라고. 참 이상하지? 이렇게 쉬운데."
휘리리릭
극호는 다시 한 번 그 보법을 시전했다. 이번에는 뇌영이 마치 내 몸을 관통하듯이 흘렀는데, 정작 나는 극호의 본신이 어딨는지 찾지도 못했다.
이렇게 신출귀몰한 신법은 무림의 상식을 파괴하는 수준이었기에 몸에 전율이 일어났다. 초절정의 초입에 이른 지금 이 보법이 얼마나 사기적인 것인지 알아챘기 때문이다.
' 무섭다...!!'
보이기는 커녕 지척에 올때까지 감지조차 되지 않는다!
실체와 다름없는 뇌영이 흘러나온다.
극호의 실력이 조금만 더 오른다면 자기보다 훨씬 위의 실력자를 상대로도 느긋하게 농락하거나 빈틈을 노려서 목을 따기 쉬울 정도였다. 너무나 빠르고 화려해서 진퇴가 자유롭기 때문이었다.
아까 극호가 신중해서 나와 생사결을 내려고 하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나는 이렇게 대단한 경공을 시전하는 극호를 상대로 치명적인 요혈을 보호할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얼떨결에 질문했다.
"그 비기의 이름이 뭐요?"
"뇌신류 비기 멸혼보(滅魂步)."
나는 비기의 이질성 때문에 고개를 갸웃했다. 보통 뇌신류의 기술이나 비기에는 뇌(雷)라는 명칭이 붙어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혼을 멸하는 보법이라니 이건 대체 무슨 의미인 걸까?
극호가 말했다.
"내 스승님의 말로는, 내가 유일하게 멸혼보를 익힐 재능이 있어서 나를 제자로 받아주셨다고 했지. 그리고 내가 극성(極成)에 이르면 멸혼보의 비밀과 터득하는 조건까지 가르쳐준다 하셨는데... 풍신류에게 살해당했다."
극호의 얼굴이 갑자기 울적해졌다. 그에게 있어서 큰 심적인 상처인 듯 했다.
"뭐 여튼 그런 고로 나도 멸혼보를 익히는 조건이 뭔지는 모른다~ 이 말씀. 윤광하고 지평에게도 가르쳐 주긴 했는데 걔들은 뇌신류의 기본무공 배우기도 바쁜지라 아예 못알아듣더라고."
"그럼 내게도 좀 가르쳐주시오."
"너한테?"
극호가 킥킥대었다.
"문제는 아닌데, 맨입으로는 안 되지~ 예쁜 여자를 바치라고 말했잖아."
"뭔 소리 하는거요?"
"모르는 체 하긴. 이광 사부한테는 어쩔 수 없이 가르쳐줬지만 진소청, 윤광, 지평은 모두 이걸 통과했다구. 나와 풍류를 즐길 수 있는 아름다운 미녀를 소개시켜줘야겠다."
억지나 장난같았지만 극호의 눈빛은 진지했다. 아마 이게 그 나름대로 멸혼보를 전수하기 위한 시련인 모양이었다. 지극히 사리사욕이 느껴지는 조건이었지만, 원체 그의 원래 성정이 여자와 노는 걸 좋아하기에 어쩔 수 없는 일로 보였다.
' ... 흐음.'
나는 그 자리를 벗어나서 곰곰히 생각하다가 미호에게 갔다. 그리고 전후사정을 말하자, 미호는 깔깔 웃으며 말했다.
"아하하! 재밌겠구나. 어디 놀아 볼까?"
펑
미호는 곧장 농염한 외모의 절세미녀로 변신했다. 그리고 내 손에 이끌려서 극호 앞으로 왔다. 나를 놀려먹으려고 이야기를 꺼낸 듯 했던 극호는 난데없이 절세미녀 미호가 나타나자 당황해서 입을 쩍 벌렸다.
"헉... 어억... 진짜 데려왔..."
"어머... 여긴 어딘가요? 여기 소협이 긴히 할 말이 있다고 하던데..."
"아! 그게 바로 접니다. 제가 아름다운 소저께 할 말이 있습니다."
미호의 이번 변신구도는 청순가련한 명문가 규수인 듯 했다. 미호는 불안한 듯 주변을 살펴보다가 조심스레 말했다.
"무엇인가요...?"
"차라도 한 잔 하시겠습니까?"
"......"
나는 지켜보다가 어이가 없었다. 난데없이 으슥한 곳으로 따라온 미녀에게 갑자기 차나 마시자니, 이런 게 보통 여인에게 통할 법한 작업이란 말인가? 그러나 미호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꼬셔지는 척 극호와 차를 마시러 갔다.
그리고 약 반 시진 후.
극호는 잔뜩 덴 듯한 표정으로, 뺨이 시뻘개져서 본거지로 돌아왔다. 여기저기에서 한가롭게 있던 반천맹 고수들이 그런 극호를 보고 킥킥 웃었다. 아마도 미호가 불쾌한 척 하면서 기회를 봐서 따귀를 인정사정없이 갈긴 듯 했다.
극호가 내게 말했다.
"예쁜 소저지만 인성이 덜됐군. 내 말빨과 격렬한 사랑으로 보듬어 주려고 했는데."
개소리 하고 있네, 라고 대꾸하고 싶었지만 일단 참기로 했다.
"여튼 난 할만큼 했소. 이젠 약속을 지키시오."
극호가 졌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알았다 알았어. 멸혼보를 가르쳐 주지. 어차피 익히지도 못하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