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검신-121화 (121/1,615)

0121 ----------------------------------------------

암천향(暗天鄕)

본거지로 돌아온 후 망량은 변이자들을 따로 모았다. 그리고 말했다.

"뇌신류 분들은 당분간 은신처에서 대기해 주시오. 변이의 치료방법을 알아 보겠소."

그러자 이광이 나를 힐끔 보더니 말했다.

"네가 따라가거라."

"네."

이광은 나와 망량이 친분이 있는 걸 알고 있었기에 정보를 얻을 겸 보내려는 듯 했다. 나는 망량 대신에 변이자를 넣은 큰 상자를 들고 야밤중에 다시 성벽을 넘었다. 경비들은 미리 혈도를 찍어서 빠르게 의식을 잃게 했기에 눈에 띄지는 않았다. 망량은 미리 나가서 기다리고 있다가 내가 상자를 들고 오자 놀랍다는 듯 말했다.

"안 무겁소?"

변이자라고는 해도 사람 7명이나 들어있는 커다란 목재상자였다. 망량의 의문은 지당한 거였지만 나는 솜털처럼 가볍게 느껴졌기에 별 생각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망량은 다시 한 번 내 내공에 감탄하고는 말했다.

"더 눈에 띄기 전에 빨리 움직입시다."

"어디 갈 생각이오?"

"그야 스승님께 가야지."

역시 그럴 생각이었군.

나는 망량을 따라서 상자를 들고 근처의 마을으로 향했다. 나는 천암비서를 소나무숲에 숨기고 온 후 천우진이 있는 마을 안으로 들어갔다. 이 곳이 바로 진짜 망량선사와 천우진이 살고 있는 은거지였다.

천우진은 이번에는 환무결계를 강하게 펼친 듯, 마을으로 한 걸음 옮기자마자 거대한 안개가 뭉글거리며 피어났다. 그리고 안개 너머에서 천우진이 걸어오며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또 왔소?"

"또 왔소."

"정말 사람 귀찮게 하는데 일가견이 있는 자들이군. 썩 꺼지시오."

망량이 천우진에게 말했다.

"사제. 우선 길을 열어주게. 이 일은 개인적인 일이 아니라 중대한 사안이라 스승님께 의견을 구해야 하네."

"진짜요?"

"그렇네."

천우진은 못마땅한 듯 나를 노려보았지만, 이내 결계를 거두고 우리를 망량선사의 사당 앞으로 순간이동시켜 주었다. 천우진은 이 마을 내에서라면 신이나 다름없는 힘을 사용할 수 있는 듯 싶었다.

"상자를 여시오."

망량은 사당 앞에서 내가 상자를 열자, 변이자들을 하나하나 늘어서 눕혀놓았다. 그리고는 보이지 않는 망량선사에게 강하게 말했다.

"스승님. 보시다시피 이 인간들은 독한 마기(魔氣)에 쏘여서 흉신(凶神)의 권속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들은 무고한 자들이며, 또한 이것은 옛 존재들이 직접 현세에 관여했다는 증거입니다. 부디 도와 주십시오."

대답은 한동안 들려오지 않았다.

' 어....?'

갑자기 망량이 비틀거리더니 쓰러졌다. 나도 갑작스럽게 크게 졸음이 밀려와서 비틀거리다가 그 자리에 쓰러졌다. 엄청난 수면욕구가 덮쳐왔기에 저항할 수가 없었다. 나는 황당했지만 그런 생각도 할 틈도 없이 그자리에서 의식을 잃고 말았다.

꿈의 세계다.

나는 이 공간에 한 번 온 적이 있었다.

그리고 이번에도 개울물 저편에서 까만 고양이 한 마리가 총총 걸어오고 있었다. 그 고양이는 나를 힐끔 보더니 말했다.

[ 내가 망량선사다.]

"......"

[ 놀라지 않는군. 뭐 그렇겠지만.]

망량선사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대답하고는 근처의 돌벽 위로 뛰어올랐다. 그리고 마치 동그란 공처럼 몸을 오므리고 앉은 채로 말했다.

[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저 자들의 변이를 되돌리기 위해서는 주법(呪法)의 근원이 되는 시전자를 해치워야 한다.]

"시전자를 죽여야 한다고?"

[ 그 방법이 아니라면, 오랜 시간 뛰어난 주술사가 제단을 만들어서 흉신의 축복을 몰아내야겠지. 적어도 10년 이상.]

나는 황당해서 말했다.

"아니 잠깐, 저게 축복(祝福)이란 말이냐? 말실수 한 거지?"

인간이 이족으로 변해서 촉수를 꿈틀거리고 앉아있는데 저걸 어떻게 축복이라고 말할 수 있단 말인가! 최악의 저주라고밖에 볼 수 없었다. 그러자 망량선사가 하품을 하더니 꼬리를 살랑거렸다.

[ 인간에게는 저주지만, 저 주술은 분명히 흉신의 축복이다. 흉신은 다른 [옛 존재]와는 달리 자신의 권속을 함부로 늘리지 않는다. 수가 적은 대신 하나하나가 필멸자 답지 않게 강력하지. 완전히 흉신의 후예로 변이하게 되면 영생불사가 보장되는데다가 뛰어난 술법능력까지 생기니, 이족들은 저 축복을 받지 못해서 안달일 정도다.]

"......"

나는 수상쩍은 눈으로 망량선사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그래서 어떡하겠다는 거야?"

[ 뭘 어떡해.]

"망량이 말했잖아. 이건 이족이 현세에 개입한 증거라고. 너는 나서지 않을 생각이냐?"

[ 그래서 말해줬잖나.]

망량선사가 돌계단을 천천히 걸어서 내려왔다.

[ 네가 알아서 구해라. 정보는 말할만큼 다 말한 것 같은데.]

"너는 안 나서는 거냐?"

[ 집요하군...]

"넌 엄청난 힘을 갖고 있잖아! 네가 마음만 먹으면 금의위든 뭐든 한방감일텐데 왜?"

내가 따져묻자 망량선사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더니 개울물가로 가서 물을 핥짝거리며 마시더니 말했다.

[ 그래서 내가 금의위를 없애고 복마전에 타격을 주면 뭐가 달라지나?]

"뭐?"

망량선사는 복마전이라는 지칭용어도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아마 망량이 말했을 것이다. 망량선사의 말이 이어졌다.

[ 복마전이라는 자들은 아주 역사가 깊은 사신의 교단이다. 그 자들은 은주시대 때부터 있었지. 그 동안 선계와 무수한 대립을 했고, 그 때마다 선계는 전면에 나온 복마전의 마인과 괴물들을 토벌했다. 네게 축복을 내린 검선 여동빈도 반선지경에 올랐을 때부터 미친듯이 이족괴물을 쳐죽이고 다닌 결과 투선의 좌를 손에 넣은 것이다.

하지만 이 싸움은 끝나지 않았고, 끝낼 수가 없고, 끝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복마전의 근원은 위대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옛 지배자가 복마전을 만들었다는 말이냐?"

[ 그게 아니다.]

망량선사가 하늘을 쳐다보았다.

[ 좀 더 거대한 존재...]

"......?"

[ 금의위같은 잔챙이에게 쓸 힘은 남아있지 않아. 나는 그를 억제하는 것만으로도 모든 힘을 다 쓰고 있으니.]

그렇게 말하는 망량선사는 왠지 지친 표정이었다. 그는 한숨을 쉬듯 풑밭에 데구르르 구르더니 말했다.

[ 그러니까 너희가 일을 해라. 조언 정도는 해 줄테니.]

"알았어. 그러면 질문 세 개 정도만 해도 되겠냐?"

망량선사가 고개를 저었다.

[ 싫어. 대답 안 해 줄 거다.]

"이런 미친... 조언 정도는 해 준다며!"

[ 조언이랑 질문이 같냐? 그건 내 맘이지 병신아.]

"......"

나는 고민끝에 입을 열려고 했으나 망량선사가 선수를 쳤다.

[ 질문 한 개도 안 받아준다. 수쓰지 마라.]

"씨발. 마음을 읽는 거냐?"

[ 네놈 생각하는 게 뻔하지.]

"그럼 대체 무슨 조언을 해준다는 건데!"

그러자 망량선사가 폴짝 하고 지붕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귀엽게 율동을 넣어서 걸었다.

[ 힘 내라 힘~ 힘내라 힘~ 젖먹던 힘까지~]

"......"

이새끼는 진짜 개새끼, 아니 고양이새끼다. 어떻게 이런 놈 밑에서 망량같은 자가 나왔을까. 내가 속으로 이를 박박 갈고 있을 때 망량선사가 말했다.

[ 정 그러면 조언 한 마디 해 주지. 그 황금비등을 잘 사용해라.]

"뭐?"

그리고 갑자기 망량선사가 멀어지는 기분이 들었고 몸이 붕 뜨는 것 같았다.

정신이 들어서 깨어나 보자, 망량도 옆에서 잠들어 있었다. 멀뚱히 앉아서 생각을 정리하고 있자 곧 망량도 깨어났다. 망량은 깨어나자 이상하다는 듯 투덜거렸다.

"스승님이 꿈으로 이야기를 전하신 적은 한번도 없는데 왜 이러시지?"

"......"

"아무튼 당신도 나도 조언을 받았구려. 그럼 가 봅시다."

"음 그래야겠소."

나는 망량과 함께 나온 후 천암비서를 찾았다. 그리고 낙양 앞에 도착해서 이야기를 했다.

"결론은 대뢰옥 심층에 있는 마를 쓰러뜨려야 변이된 자들이 원래대로 돌아온다는 거군."

"나도 그렇게 들었소."

"하지만 이제는 좀 힘들 것 같소."

"왜?"

"이광이 금의위 총령에게 큰 부상을 준 덕에 금의위의 통제체계가 흐트러져서 대뢰옥에 숨어들기 쉬웠던 거요. 우리가 퇴로를 확보하긴 했으나 정상적이라면 금의위 정도가 아니라 1만 대군이 근처에 포진해서 지켜도 이상하지 않았소. 그러나 이미 한 번 침입해버린 이상 거기는 세상에 더없는 철통방벽이 되어 있겠지."

"......"

난국이었다.

황연 대장군 및 다른 변이자들을 변이에서 구해내려면 대뇌옥 심층에 가서 술법의 근원을 쓰러뜨려야 하는데, 이제 정면돌파는 커녕 잠입조차 불가능한 방어벽이 쳐질 것이다. 달리 생각하면 이미 뚫린 곳을 지키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무섭게 난이도가 올라간 셈이었다.

나는 말했다.

"그래도 해야만 한다면 어떻게 해야겠소?"

"으음..."

그 때였다.

갑작스럽게 미호가 우리 옆으로 전이술을 써서 나타났다. 미호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하긴 뭘 해? 여기까지다."

"......!!"

"처음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더 이상은 백웅을 위험에 처하게 할 수 없다."

나는 급히 말했다.

"잠깐 미호! 아직 끝난게 아냐. 대뢰옥 심층의 마물만 쓰러뜨리면 상황을 호전시킬 수 있어."

"본녀가 느끼기에 그 마물의 힘은 본녀에게 전혀 뒤지지 않는다. 격이 상당히 높은 마물이며 인간 이상의 지능을 지니고 있을 것이다. 그런 존재와 싸우다가 백웅 네가 저주라도 맞아버리면 대체 어떻게 할 생각이냐?"

"네가 같이 가 주면 되잖아."

"제정신으로 하는 말이냐? 내 술법은 매혹술과 화염에 집중되어 있어서 그런 해주는 못 한다. 그리고 너를 이 이상의 위험에 노출시킬 수는 없다."

휘리리릭

미호가 갑자기 식신의 종이를 펼쳤다. 허공에 떠오른 식신의 종이는 분열되어 늘어나더니 나와 망량 주변을 감쌌다. 내가 급히 검염을 끌어올려서 식신을 찢어버리려고 하자 미호가 갑자기 나를 강하게 응시했다.

"윽."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미호가 감탄하듯 말했다.

"역시 백웅이구나. 내 매혹술을 버티다니."

"이러지 마! 지금 내가 빠지면 반천맹과 뇌신류는 다 죽어."

"알 게 뭐냐?"

미호가 내 앞으로 다가오더니 슬며시 내 턱선을 매만졌다. 그녀의 눈에는 갈망과 집착이 깃들어 있었다.

"이광과 진소청은 이미 투지가 꺾였다. 이 상황을 억지로 끌고가 봐야 앞날을 장담할 수 없어. 본녀는 너만이라도 살려서 피해야겠다."

"그러니까 마물만 쓰러뜨리면..."

"마물 마물 하는데 도대체 이 고난의 끝에 무엇을 얻고자 하는 것이냐? 그냥 네가 중원에서 떠나서 살면 그만인 게 아니냐?"

신경질적으로 중얼거리던 미호가 내 가슴을 쓰다듬었다. 그리고는 내게 얼굴을 기대며 말했다.

"그러지 말고 조용히 10년동안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서 둘이 살자꾸나. 조용히..."

"안돼 그건."

"안되면 되게 만들어야지."

구미호의 눈이 나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파앗

나는 본격적으로 미호의 매혹술이 내 심령을 파고드는 걸 느꼈다. 머릿속에 터질 것처럼 쿵쾅거렸고 미호를 만지고싶은 충동에 시달렸다. 지금까지 겪어오던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의 욕정이 치솟아 올랐고, 나는 시뻘건 피부 속에서 끓어오르는 정염 때문에 죽을 것만 같았다.

"헉... 허억..."

"그만 두시오!"

망량이 외쳤지만 그 또한 속박술법 때문에 움직이지 못하는 듯 했다. 미호는 망량을 싸늘한 눈으로 보더니 말했다.

"닥쳐라. 네가 죽으면 백웅이 슬퍼할 것 같아서 살려는 두겠지만 그 이상 나대면 진짜 죽여버리겠다."

"으윽..."

"그럼 잘 있거라. 싸움같은 건 너희끼리 해라, 우후후."

미호가 내 속살에 섬섬옥수를 흘려넣었다.

"앞으로 계속 함께야."

심장이 떨리면서 미호가 내게 입맞춤을 하는 게 느껴졌다. 이대로 미호를 눕혀서 범하고 싶은 충동 때문에 하초가 굵게 서서 떨렸다. 과거에 미호가 보여줬던 음몽이 머릿속에서 되살아났다.

하고 싶다.

' 안돼... 안돼... 안된다고...'

여자와 하고 싶다.

너무 정욕을 오래 참았다.

미호의 옷을 벗기고, 꿀단지에 삽입해서 아름다운 육체를 즐기고 싶다.

육욕의 연회 끝에 여인의 육체에 정(精)을 토해내는 순간의 기쁨을 누리고 싶다.

그게 본능이다.

' 안돼...!!'

나는 비명과 절규를 속에서 내질렀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가. 아직까지 이루지 못한게 너무 많다. 색(色)에 빠져서 인생을 모조리 날려버릴 수는 없다. 수십 년의 후회를 하고 싶지는 않다!

그래서 이를 악물고 마지막 의지로 외쳤다.

"그럼 이광과 진소청만 보내자!"

"뭐라고...?"

미호가 흠칫 놀랐다. 그 떨림 덕분에 매혹술의 기운이 줄어들었고 나는 간신히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나는 기침을 토해내고는 말했다.

"내 목숨이 걱정된다며? 그럼 나는 안 갈 거야! 진소청과 이광만 보내서 토벌시키고 결과를 보면 되잖아!!"

"호오..."

"미호, 너는 그냥 이번 일 자체가 마음에 안 드는 거야. 내 핑계 대지 마!"

내가 사납게 외치자 미호가 뻘쭘한 듯 했다.

옆에 있던 망량이 거들었다.

"그 결과가 안 좋다면 나도 반천맹을 해산하고 야인이 되겠소. 어차피 이번 일이 실패하면 미래가 없으니."

미호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 그래, 좋아. 정 원한다면 그렇게 하자고. 하지만 이광과 진소청이 실패하면 끝이다. 그 때야말로 나는 백웅을 데려갈 거야."

"그땐 맘대로 하시오."

우선 미호와의 교섭은 성공한 듯 했다.

나는 본거지로 돌아오면서 가슴을 쓸어내렸다.

' 하... 큰일날 뻔 했군...'

하마터면 미호에게 매혹당해서 어디 외딴 곳에서 몽롱한 상태로 한평생 떡이나 치고 살 뻔 했다. 그 시간낭비와 정신력 소모는 엄청난 것이었으리라. 하지만 나는 미호가 내게 강하게 집착한다는 걸 느끼자 사치를 누리는 기분과 함께 황당한 기분이 들었다. 미호의 감정은 단순히 천계로 귀환하는 시련으로 생겨날만한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본거지에 돌아와서는 뇌신류를 불러서 제안을 했다. 망량은 신중하게 이광을 설득했다.

"... 하여, 그 심층에 있는 그 마물을 쓰러뜨리면 황연 대장군이 원래대로 되돌아오실 가능성이 있소."

"정말인가?"

"그렇소. 내 스승께서 장담하신 내용이오."

"... 지금 그 곳은 천하에 다시 없는 철벽이건만."

휘익!

갑자기 이광이 창 끝을 들어서 망량의 목젖에 대었다. 나는 깜짝 놀라서 외쳤다.

"사부!"

이광은 한 치도 표정이 달라지지 않고 말했다.

"반천맹주. 자신의 목숨을 걸 수 있겠나?"

"물론이오."

"눈빛은 진실이군. 그러나 믿을 수가 없어."

그렇게 중얼거린 이광이 옆에 있던 극호를 불렀다.

"극호!"

"네, 사부."

"너는 지금부터 정확히 하루 후에 나와 진소청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반천맹주 망량의 목을 베어라."

채채챙!!

그 순간 둘러싸고 있던 반천맹의 고수들이 동시에 무기를 뽑았다. 무서운 투기가 이 자리를 내리눌렀다. 하지만 망량이 손짓을 해서 무기를 거두게 하고는 말했다.

"그 제안을 받아들이겠소."

"무례를 범해서 미안하군. 그러나 나는 아직 반천맹주 그대를 온전히 믿을 수가 없다."

"알고 있소. 그 철두철미함이 청룡의 본성이 아닌가."

씁쓸하게 말한 망량이 말했다.

"허나 도움을 드리고 싶으니, 이걸 가져가주실 수 있겠소?"

스윽

망량이 가지고 있던 보패 오화칠금선을 내밀었다. 이광이 오화칠금선을 힐끔 바라보자, 망량이 나직이 말했다.

"그 물건을 지니고 있는 것만으로도 한 번은 마물의 주술을 막아낼 수 있을 것이오."

"방금 내 말을 못 들었나? 그대를 신뢰하지 못한다 했는데 이런 수상쩍은 걸 받을 거라고 생각하는가."

"당신들만 목숨을 걸고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 또한 목숨을 걸고 있으니, 그 각오를 알아 주시오."

"......"

이광은 침묵하다가 오화칠금선을 받았다. 아무래도 망량의 기백이 이광을 움직인 모양이었다. 이광이 중얼거렸다.

"기백있는 자는 싫지 않지."

"스승님."

"따라오너라 진소청. 마물이라는 걸 쓰러뜨리고 오자."

"네."

"그리고 백웅. 너도 와라."

나는 고개를 저었다.

"역량이 부족할 것 같습니다. 여기서 함께 지키겠습니다."

"그렇단 말이지?"

파앗!

"큭...!!"

나는 갑작스럽게 이광이 덤벼들자 당황했다. 나는 만승검결을 전개해서 이광의 공격을 막아냈는데, 정확하게 30초까지는 내공의 힘으로 잘 버틸 수가 있었다. 이광의 눈에 살짝 이채가 흐르더니 이윽고 빠르게 찰(刹)로 공격했다.

퓨퓨퓽!

투웅

갑작스럽게 내 손목에 격렬한 고통이 흐르더니 내 검이 손에서 튕겨져 나갔다. 어떻게든 막기는 했지만 처음부터 이광을 내 무장을 해제하는 걸 노린 것이다. 나는 검을 잃고도 뒤로 뇌영보를 시전해서 피하며 뇌운강권으로 이광의 초수를 받았다. 그러자 이광이 감탄하듯 말했다.

"정말 꽤 늘었구나. 이 정도면 금의위 천호 셋 쯤은 혼자 이기겠군."

쉬익

하지만 실력차이는 어쩔 수 없었다. 이윽고 이광의 창날이 내 목젖에 닿았고 제압상태가 되었다. 그의 싸늘한 말이 떨어져 내렸다.

"너는 반천맹주와 친분이 있어서 쉽게 믿을 수가 없다."

"사부... 그건."

"내 신뢰를 얻고 싶다면 얌전히 전신혈을 제압당해라. 돌아올 때까지."

"... 알겠습니다."

나는 별 수 없이 이광이 내 전신에 뇌신류의 금제대법을 펼치는 걸 바라보아야 했다. 내 내공이 엄청나게 많아서 원한다면 힘으로라도 끊을 수 있겠지만, 그건 동시에 이광을 배신함을 의미했다.

나는 계속 여기에 가만히 앉아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반천맹의 절정고수 하나가 분통을 터뜨렸다.

"정말 오만방자하군! 우리도 모든 걸 걸고 싸우고 있는데 이리도 제멋대로 굴 수 있단 말인가?!"

그러자 이광이 차갑게 대꾸했다.

"모든 걸 건답시고 뒤통수친 놈이 워낙 많아서 말이지."

"......"

"반천맹주의 말을 믿어주는 것도 내 나름의 성의라는 걸 알아두게."

휘익

그리고 이광과 진소청은 다시 나가 버렸다. 윤광, 지평, 극호가 동시에 병기를 망량에게 들이댔다. 주변의 반천맹 무인들은 뇌신류 고수들이 망량의 목숨을 위협하자 함부로 달려들 수가 없었다.

나는 말은 할 수 있게 금제되었기에 극호에게 소리쳤다.

"사형, 서툰 짓 하지 마시오!"

"......"

극호는 내게 잠시 시선을 옮기더니 다시 무기를 겨눈 채로 말했다.

"난 말이지, 반천맹 사람들이 아주 멋있고 마음에 들어. 이 사람들은 마음에 협(俠)과 의(義)가 있다. 아까 생존자를 데려왔을 때도 현화신녀를 진심으로 동정하고 돌봐주려 했다. 나는 가능하면 이들과 친구가 되고 싶다."

그렇게 말한 극호가 창에 한층 더 힘을 주었다.

"하지만 그건 내 개인적인 생각이다. 뇌신류의 주장(主將)이자 풍신류에 복수해주실 유일한 인물인 이광 사부의 명은 절대적이다. 만일 내일까지 이광 사부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나는 그분의 명을 이행하겠다."

옆에서 둘러싸고 있던 반천맹 무인 하나가 노려보았다.

"웃기지 마라. 망량 맹주를 죽인다고? 그러면 너희 셋은 다 죽을 것이다."

"뭐 그렇겠지. 살아남을 수 있다는 생각은 안 드는군."

극호가 슬픈 목소리로 말했다.

"결국 그런 거야. 이게 무림에서 사는 자의 운명인 거지. 나도 윤광도 지평도 그 흐름을 거스를 수는 없다."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저 세 사람의 충성심과 집념은 보통의 문파에서 보이는 것을 훨씬 뛰어넘었기 때문이다. 당장 명문정파인 구파일방 제자들에게 저런 명령을 시킨다면, 그들 중에 타협하거나 배신하는 자가 매우 많을 것이다. 아무리 존장의 명령이 중요해도 의미없는 명령에 자신의 목숨까지 서슴없이 걸수 있다는 건 뇌신류의 사문관계가 엄청나게 강력한 고리에 얽혀있다는 증거였다.

' 이게... 백련교 사대무류(四大武流)를 차지하던 유파의 저력인가.'

나는 고민했다.

여기서 내가 어떻게 해야하는가?

가만히 지켜보는 게 답일까, 아니면 좀 더 다른 방법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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