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10 ----------------------------------------------
암천향(暗天鄕)
끼익... 끼익...
덜컹...
"......"
내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선실의 침상 위였다. 야밤중인지 바깥은 어두컴컴했고 천장이 가끔씩 배의 진동에 흔들렸다. 천천히 몸을 일으키자 갈비뼈와 엉치뼈가 지끈거리며 아파왔다. 상반신을 일으키자 눈 앞에 의자에 앉아서 자고 있는 서문혜의 모습이 보였다. 아마도 나를 계속 간호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 지금은 시간이 얼마나 흐른 거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지만 역시 잘 되지 않았다. 격심한 고통 때문에 뜻대로 되지 않았다. 내가 인상을 찡그린 채 고통을 참아내고 있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아하하. 아파죽겠나 보구나."
"미호."
휘리릭 하고 흰 빛이 퍼져나오더니 미호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미호는 깔깔 웃더니 말했다.
"나흘만에 깨어난 것이니 가만히 있어라. 내일 점심때 쯤에는 산동의 항구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벌써 그렇게 되었단 말인가?"
나는 황당한 기분이 들었다. 말 그대로 기력이 다되고 내상을 입어서 쓰러진 것인데 일어나 보니 사흘이나 지나 있다니! 나는 내 몸을 살펴보았는데 내상의 흔적은 없었다. 내가 몸을 들여다보자 미호가 말했다.
"걱정 말아라. 딱히 치료를 안 해도 네 몸은 영기(靈氣)가 응축되어 있어서 자연치유력이 엄청나더구나. 지금은 아마 대부분의 내공이 회복되었을 것이다."
"그렇군."
미호의 말대로였다. 내상이라고는 해도 무리하게 힘을 끌어올린 여파로 심맥이 살짝 당겨진 정도였다. 조용히 푹 쉬자 체력과 기력이 모두 회복된 듯, 내 내공은 예전만큼의 위용을 발휘하고 있었다. 나는 의자에 앉아 기대어 자고 있는 서문혜를 보며 말했다.
"일어나 보시오."
"......"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정말로 곤히 자는 것 같았다. 현재 강제로 천인봉혈법이 풀려있으니 내 기(氣)를 느끼고 깨어날 법도 한데, 그녀 정도의 절정고수 치고는 너무나 허술한 모습이었다. 내가 의아해하고 있을 때 미호가 말했다.
"저 여자는 내 환술에 걸렸다. 사흘동안 너를 간호하고 있다가 한 시진 전에 잠들었다. 너무 곤히 자는 것 같아서 일어나지 않게끔 푹 재워주었지."
"설마 해를 입힌 건 아니겠지?"
"나를 뭘로 보는 게냐? 말 그대로 푹 자고 있을 뿐이다."
미호는 그렇게 대답한 후 의자 하나를 당겨서 침상쪽으로 당겼다. 그녀는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더니 말했다.
"이제 이야기할 상황이 된 것 같구나. 너는 도대체 누구냐?"
"나는 백웅인데."
"그런 걸 묻는 게 아니다. 너는 어떤 일이 있길래 내 사정을 알고 있으며, 서왕모께 내 일을 이야기한 것이냐? 나는 반드시 그걸 알아야겠다."
미호는 서왕모의 시련을 위해서 모든 인간계에서의 유희를 중단하고 나를 찾아서 달려온 듯 했다. 나에 대해서 궁금하지 않을 리가 없는 것이다.
"흐음."
나는 잠시 생각했다.
' 미호에게 전생자라는 걸 밝혀도 될까?'
미호에 대한 미안한 감정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말해두고 싶다.
그러나 망량 때와는 상황이 다르다. 무엇보다도 문제가 되는 것은 상대방이 내가 [전생자]인 것을 믿어줄 수 있느냐였다.
망량은 내가 그의 당사자 일문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정보나 자신의 논리에 합치되는 이야기를 했기에, 언제든지 납득할 수 있었다. 게다가 그가 지니고 있는 뜨거운 의협심과 열정, 황궁에 대한 적개심이 있기에 쉽게 내 편이 되어줄 수 있었다.
미호는 약간 경우가 다르다. 전생의 미호는 그저 반쯤은 나에 대한 호기심과 필요에 의해서 다녔을 뿐이다. 나는 미호의 자세한 사정을 알지 못했고, 사실상 끌려다니는 입장이었다. 내가 미호에게 [전생자]라는 걸 즉시 믿게 할 만한 정보는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한 것이다.
게다가 설혹 미호가 반신반의한다고 쳐도, 그녀가 내 일을 진심으로 도울 수 있을지는 애매했다. 나는 미호를 믿지만, 미호에게 있어서 나는 완전히 첫대면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서왕모의 시련 때문에 나를 해하지 않고 도와주긴 할 것이다. 그러나 미호가 설렁설렁 도와주는 척 하면서 나를 불신한다고 해도 어쩔 수가 없는 일이었다.
"......"
"뭘 하느냐? 어서 이야기를 하거라."
"잠깐 생각 정리 좀..."
"흐응..."
미호가 꼬리를 살랑거리며 흔들었다.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미호. 나는 전생자(轉生者)다."
일단 말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다. 설혹 미호가 나를 불신한다고 하더라도, 해보지 않으면 이 다음번 전생에 더 나은 결과를 낼 수가 없는 것이다. 내 나름대로의 도박을 걸어보기로 했다.
"뭐?"
"너와는 과거에 만났었지."
그리고 나는 차분하게 첫 번째 전생에서부터 10번째 죽음까지를 이야기했다. 미호는 첫번째 전생에서 9번째 전생까지는 '무슨 개소리를 하느냐' 라는 황당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래도 어쨌든 듣고는 있던 미호는 나와 미호의 만남, 그리고 호법사자와의 사투와 월요의 행방 등등에 대해서 이야기가 나오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마지막으로 미호가 나를 위해서 목숨을 바쳤고, 내가 호법사자와 싸우다가 죽었다는 이야기를 듣자 미호는 기절할 것 같은 표정이 되었다.
"... 이렇게 된 거야."
이야기가 한 시진 가깝게 이어졌으나, 미호의 눈에는 지루한 기색이 없었다. 되려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이었다. 한참동안 머뭇거리던 미호가 앙칼지게 대답했다.
"흐, 흥! 내가 너같은 인간을 위해 아홉 개의 목숨을 다 사용했다고? 웃기는 소리를 하는구나!"
"하지만 사실이야. 네가 그렇게 나서주었기 때문에 나 또한 막야의 수기를 공양할 때 서왕모님께 네 이야기를 할 수 있었지. 네가 이렇게 찾아올 거라고는 전혀 예상도 못 했지만..."
"......"
미호는 손톱을 물어뜯고 우물쭈물거리며 뭔가 생각하는 기색이었다. 그녀의 엉덩이 뒤에 나 있는 탐스러운 은색 꼬리가 움찔거리는 듯 했다. 미호는 한동안 말이 없다가 나에게 말했다.
"백 번 양보해서 네 말이 사실이라고 치자. 네가 말한대로 내가 서경에 가서 악령을 흡수하려고 계획을 짜던 것도 사실이고, 산해경 소환의 술을 쓰려 했으며, 나아가서는 칠요를 찾으려 했다는 것도 사실이다. 네 말이 사실이라고 믿는다면..."
"응."
미호가 팔짱을 끼고는 사납게 질문했다.
"너는 대체 왜 내게 전생 이야기를 한 것이냐? 대충 어물쩡 넘겨도 될 것인데? 네가 전생을 할 수 있다는 비밀은 굉장히 큰 것인데 이용당할까봐 두렵지도 않으냐?"
나는 미호의 반문에 태연하게 대답했다.
"나는 미호 네 힘을 잘 알고 있어. 네가 마음먹고 매혹술을 사용할 경우 지금의 내가 감당할 수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지. 게다가 나는 네게 목숨을 구원받은 빚이 있으니, 네 손에 한 번 죽는다 하더라도 결코 원망할 생각이 없다."
"으으으윽..."
미호가 미간을 찌푸리더니 말했다.
"이 교활한 놈. 내가 서왕모께 받은 시련이 너를 돕는 것이라서 너를 해할 수 없다는 걸 알고 그런 소리를 하는 거겠지."
"구미호한테 교활하다는 소리를 듣다니 영광이네. 뭐 그런 것도 있지만..."
나는 씨익 웃었다.
"나는 너를 신뢰하고 싶다. 그러니 너도 나를 믿어줬으면 좋겠어. 그럼 결국에는 서로의 목적을 이룰 수 있을 거 아니냐."
"......"
미호가 말했다.
"알았다. 네가 그리 생각한다면, 본녀 또한 최대한 인간 백웅을 신뢰하도록 하지. 이걸로 되었느냐?"
"고마워."
"흐응..."
나는 미호가 콧방귀를 뀌는 반응에서, 이제 미호가 더 이상 내 과거사를 캐묻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잘은 모르지만 왠지 미호의 감정을 대충 읽을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야기가 어느정도 정리되자 미호가 본격적인 이야기를 꺼냈다.
"그럼 백웅. 네 목표는 황실의 뒤에 있다는 복마전을 상대하는 것이냐?"
"그래. 놈들이 칠요(七曜)를 얻게 되면 큰 일이 벌어진다."
"하지만, 너무 현실성이 없지 않느냐? 낙양에 존재한다는 마(魔)라는 것도 그렇고 황실과의 전력은 비교조차 되지 않는다. 백번 양보해서 칠요를 모으는 걸 방해한다고 쳐도 네가 그 자들을 멈출 수는 없지."
나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래도 어쩔 수가 없잖아. 나는 금의위 총령에 한방 먹여주고, 복마전을 박살내기 위해서 여태껏 버텨 왔다. 이제 와서 멈출 수는 없어."
"그렇구나... 흐응."
"뭔가 하고싶은 말이라도 있는 건가?"
"별로 그런건 없다. 네가 그 길을 선택한 이상, 본녀는 최선을 다해 너를 도와줄 뿐이니."
그렇게 대답한 미호가 손깍지를 끼고 다리를 꼬았다.
"그렇다면 너는 내일 산동 항에 내리고 나면 그 장경익이라는 인간의 심부름을 하겠구나. 그리고 심부름이 끝나면 청룡무관에서 무술수련을 하겠다는 것이고."
"그렇게 되겠지."
"너무 귀찮겠구나."
"뭐?"
미호는 태연하게 말했다.
"결국 장경익이란 인간이 나름대로 품고있는 꿍꿍이가 있을 것이고, 그 꿍꿍이를 알아보고 신뢰를 얻기 위해 심부름을 해 준다는 거 아니냐?"
"그렇지."
미호가 깔깔 웃었다.
"우후후, 너무 귀찮다. 그렇게 빙빙 돌아갈 필요도 없으니."
"뭐?"
"기다리고 있어라. 본녀가 너를 편하게 해 주마."
쉬리릭!!
갑작스럽게 미호가 흰색 잔영을 남기고 둔갑술로 사라져 버렸다. 정확히는 전이술과 둔갑술을 함께 구사한 것으로써, 굉장한 술법경지라고 할 수 있었다. 내가 서둘러 기감을 돋우어 미호의 흔적을 찾았지만 어디에도 느껴지지 않은 걸로 보아, 이미 이 배에는 미호의 존재가 없다고 볼 수 있었다.
"으음..."
그리고 미호가 사라지자 환술이 풀렸는지 서문혜가 눈을 부시시 뜨며 깨어났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선 나를 보더니 놀라서 말했다.
"일어나셨군요! 백웅 님."
"아, 그게..."
갑자기 서문혜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녀가 고개를 돌리며 조그맣게 말했다.
"... 저, 저기, 속곳과 옷이 둘째 칸 서랍에 있어요."
"......"
나는 그제서야 내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서문혜가 무엇을 보았는지 알아차리자 얼굴이 벌개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입을 다물고 재빨리 속옷과 옷을 모두 입었다. 내가 침상 위에 앉자 서문혜가 말했다.
"나흘 가까이 잠들어 있으셨어요."
"그렇군."
잠깐동안 불편한 침묵이 감돌았다. 서문혜가 허둥대며 다시 질문을 했다.
"저, 저기 백웅 님.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이제 괜찮소. 뻐근한 것도 없군."
격통도 많이 가라앉았고 나는 완전히 회복되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러자 서문혜가 살며시 내 손을 잡더니 말했다.
"다행이에요. 함 내의 모두가 백웅 님을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었어요."
"별로 다친 것도 없으니 괜찮소."
서문혜가 내 눈치를 살피더니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백웅 님이 발휘하신 그 가공할 무공은 무엇인가요? 정말 엄청났어요."
"그건... 내가 우연히 발휘하게 된 힘인 것 같소. 내가 알고 쓰는 무공은 아니니 평상시에 쓸 수 있는 건 아니오."
나는 적당히 이야기해 두기로 했다. 괜히 서문혜가 천둔검법을 내 힘으로 오해하면 더 큰 귀찮음이 생길 것 같았기 때문이다. 서문혜는 내 이야기를 듣더니 감격한 듯 말했다.
"그래도 정말 대단하세요. 저는 새삼 백웅 님께 감동했어요."
"고맙소..."
"백웅 님. 꼭 저와 함께 무영문으로 가요. 부탁드려요."
"말했듯이 지금은 먼저 해야할 일이 있소. 내게는 그 일이 먼저이니 나중에 무영문에 가도록 하겠소."
"네."
서문혜와 약 한 식경 정도 더 이야기를 하다가, 서문혜를 자기 방으로 돌려보냈다. 나는 이제야 혼자만의 시간이 생기자 한숨을 쉬었다.
"후우, 천둔검법이라..."
나는 지금도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이 천둔검법이란 걸 내 몸으로 펼칠 때의 기억과 경험은 똑똑히 남아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게 어떤 경위로 성립하는지를 도무지 추측할 수 없었다. 어쨌든 여동빈은 [나]라고 하는 육체를 기반으로 자신의 절학을 시전했을 텐데 그 과정이 굉장히 빠르고 복잡해서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물론 엄청나게 높은 검의 경지를 직접 시전한 덕에 말랑말랑하게 머릿속에 뭔가 가닥이 잡힌 것 같았다. 마치 화신류 비기를 구경한 후 검술이 상승했던 것처럼, 이번에도 내 머릿속에는 영감히 확하고 떠오르는 중이었다. 나는 이 느낌을 잊지 않기 위해 주변에 있던 검을 잡아서 천천히 휘두르기 시작했다.
' 분명히... 이 흐름이... 다시 흐르고...'
뇌영검법에서 만승검결로 이어가는 흐름 도중에 검선 여동빈이 사용했던 검술의 흐름이 섞였다. 나는 그 흐름을 녹여보려 했으나 잘 되지 않았다. 완전히 상이한 흐름이 섞이기 위해서는 굉장한 연구가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잘 이해가 되지 않던 변초나 허식들이 단번에 머릿속에서 이해가 되었기에, 나는 굉장히 빠르게 검의 이해가 쑥쑥 늘어나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밤새 천둔검법의 경지를 연습했다. 딱히 뭔가 초식이나 구결을 배운 건 아니지만 [펼쳤다] 라는 사실만으로도 내게 상당한 도움이 되는 것 같았다. 여태껏 창술이 훨씬 강하기에 검술을 놓고 있었는데 다시 검술에 대한 자신감이 붙었다.
쿠우우우...
다음 날 아침, 나는 대룡상회주와 서궁표국주에게 나가서 몸이 회복되었음을 알렸다. 그들은 면목이 없다는 듯 말했다.
"소협은 정말로 우리 생명의 은인이오. 그 안개에 갇혔을 때 절망적인 기분이 들어서 정말 죽는 줄 알았소..."
"무사하시니 다행입니다."
그리고 머지 않아서 산동 항에 배가 도착했다. 안현 부관이 탔던 배는 우리보다 반나절 앞서서 도착한 듯 이미 정박되어 있었다. 선원들이 분주하게 짐을 내렸고, 나는 안현 부관에게로 향했다.
안현 부관은 꽤 피로한 기색으로 관저에서 집무를 보고 있었다. 그는 나를 발견하더니 말했다.
"오, 백웅이군."
"별 일 없으셨습니까?"
"그렇소. 허나 정말... 이상한 일이오. 무풍지대에 접어들고 해무가 깔린 이후의 기억이 없어. 세상에 그런 이변이 있다니."
안현 부관을 포함한 군선 측도 다들 정신을 잃었던 모양이었다. 그도 그럴것이, 압도적인 마기가 몰려오면 인간은 자신의 정신을 보호하기 위해 미쳐버리거나 정신줄을 놓아버리기 때문이다. 군인들이라고 딱히 예외가 될 수는 없었다.
"이제 포로들을 인솔해야 할 텐데 장 장군님을 찾아갈 생각인가?"
"그게 절차상 맞지 않겠습니까?"
"그렇군. 그 일은 당신에게 일임했으니 장군님께 이야기를 잘 해 주시오. 보고는 선으로 올렸으니 걱정 말고."
"네. 정양 잘 하시길 바랍니다."
"정말 수고 많았소, 백웅 소협."
나는 곧 포로들을 인솔해서 인근의 대기소에서 기다리게 한 후 장경익 장군의 관저로 향했다. 포로들에게 누가 시비를 걸지 않도록 서문혜에게 호위역을 맡겼기에 안심할 수 있었다.
장군부에 도착하자 사전에 이야기를 들은 듯 보초병들이나 위관들이 별 말 없이 내 길을 터 주었다. 이윽고 장경익 장군을 기다리며 서 있을 때였다.
"아하하... 그런데 서 있지 말고 이쪽으로 오지 그러느냐?"
깔깔거리는 미호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쪽을 바라보자, 거기에는 텅 빈 눈을 하고 있는 장경익 장군이 서 있었고 미호가 그 옆에 절세미녀의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그게 미호라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건 미호의 요기가 이제 꽤 익숙하기 때문이었다.
나는 기가 막혀서 외쳤다.
"미호! 설마..."
"걱정 말거라. 이 장군부의 모두에게 매혹을 걸어뒀으니 알몸으로 벗고 돌아다녀도 아무도 신경쓰지 않을 거다, 아하하."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 왜 장군에게 매혹을..."
"우후후. 너는 곧 본녀에게 고마워하게 될 거다."
그렇게 말한 미호가 장경익 장군에게 명령했다.
"가서 의자에 앉아라. 그리고 네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성실하게 백웅에게 대답해라."
"네, 알겠습니다."
장경익 장군은 혼없는 얼굴로 척척 걸어오더니 의자에 앉았다. 내가 미호를 바라보자 그녀는 입을 가리고 웃었다.
"아하하, 간단하고 빠르지 않느냐? 뭐든 물어보면 대답해 줄 것이다."
"......"
"질문이 끝나면 모든 기억을 지우겠다. 마음껏 물어 보거라."
"하아..."
나는 이렇게 해도 되는걸까 싶었지만, 여튼 미호가 사람을 해치거나 괴롭힌 건 아니었다. 어쨌든간에 장경익 장군도 아직 별다른 해를 입은 건 아닌 것이다. 그저 시간을 아꼈다는 차원으로 이해하면 될 것 같았다.
그리고 나는 매혹술에 홀린 장경익 장군에게 질문을 시작했다. 기억이 없어질테니 딱히 존대를 하지도 않았다.
"장경익. 어떤 심부름을 내게 시키려고 한 거지?"
"청룡무관에... 편지를... 전달하게 하려 했다..."
나는 깜짝 놀랐다.
"뭐? 편지? 청룡무관에?"
"그렇다..."
"대체 무엇때문에?"
이어진 장경익의 대답은 충격적이었다.
"청룡위 이광 님께... 황연(黃然) 대장군(大將軍)님의 구출을 부탁드리기 위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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