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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천향(暗天鄕)
비강장과 대치한 상태에서 먼저 움직인 것은 서문혜였다. 그녀는 날카로운 눈으로 비강장을 노려보더니 자신의 검을 들어서 검기(劍氣)를 쏘아 내었다.
퓨퓨퓻!
비강장은 가만히 있다가 세 줄의 검기를 맞자, 자신의 투명한 몸체에 손상을 입은 듯 푸른 피를 쫙 뿜어내었다. 그리고 깜짝 놀랐는지 다시 갈매기처럼 끼루룩거리는 소리를 내더니 후다닥 뒤로 피해 버렸다.
' 역시 검기가 잘 통하는군.'
나는 예전에 비강장과 죽어라 싸웠을 때의 일을 기억해 냈다. 그 때 비강장들은 거의 투명한 상태로 주변을 맴돌다가 나를 습격해 왔는데, 골치아프게도 이놈들은 순수한 기(氣)나 자연력 외에는 전혀 타격을 입지 않았다. 즉 칼이나 창으로 베거나 찌르는게 아예 먹히지 않고 투과되어버리는 괴물인 것이다.
다행히도 서문혜는 괴물의 모습을 보는것만으로 미칠 정도의 무인은 아니었다. 게다가 검기마저 사용할 수 있으니 충분히 도움이 되는 것이다. 서문혜가 말했다.
"소협. 저 괴물을 쓰러뜨리면 되는 건가요?"
"그렇소. 참고로 저 괴물은 비강장이라고 하고, 순수한 기와 자연력에만 해를 입소."
"뭐라고요? 그럼 검기만 써서 물리쳐야 하는 건가요?"
"그렇소. 그리고 문제는 그 뿐만이 아니오."
뀨르르륵
뀨륵....
비강장이 몸을 꿈틀거리며 기이한 소리를 내었다. 나는 놈이 드디어 제 2의 방식을 택했다고 생각하자 절로 몸이 아찔해졌다. 나는 서문혜에게 경고할 수밖에 없었다.
"놈은 순간이동을 할 줄 알고, 재생력도 무척 높소!"
까가강!!
다음 순간, 우리 두 사람은 번개처럼 무기를 휘둘러서 암격(暗擊)을 튕겨내었다. 난데없이 튀어나온 무형(無形)의 물리공격 때문이었다. 단순히 비강장이 뒤쪽으로 순간이동해서 꼬리같은 부분을 휘두른 것 뿐이지만 막지 않으면 그대로 인간의 몸이 박살날 정도의 위력이었다.
서문혜가 황당해했다.
"이, 이건 대체 뭔가요? 세상에 무슨 이런 괴물이..."
서문혜의 검기에 베여나간 비강장의 상처는 이미 반쯤 아물고 있었다. 나는 비강장의 투명한 상처에서 연기같은 게 재생력의 증거로 피어오르는 걸 보자 이를 악물었다.
' 씨발... 이럴 줄 알았어...'
내가 그 당시에 비강장을 비롯한 마물대군과 싸우다가 죽었을 때, 나는 잡소한 마물들은 대개 처리를 했으나 비강장만큼은 거의 죽이지 못했다.
그도 그럴것이 왠만한 공격은 먹히지도 않는데다가 순간이동을 해서 번쩍번쩍 나타나는데다 그나마 입은 상처도 대단한 속도로 재생해 버린다. 도무지 상대할 엄두가 나지 않는 강력한 마물이었고, 망량이 비강장과 정면대결을 하는 게 자살행위라고 했던 말은 사실이었던 것이다.
"이 놈을 없애려면 강한 기력을 소모하는 기술로 한방에 처리해야 하오."
"그럼 제가..."
"하지만 조금 두고 보시오."
"왜죠?"
"이 놈들이..."
끼루루루룩
끼루룩
끼루루룩
"... 단체행동을 할 수도 있으니까."
나는 대답하면서도 탈력하는 기분이 들었다.
이 배의 여기저기에 비강장이 서서히 기어오르고 있었다. 무려 3마리가 더 올라온 것이다. 투명한 살인촉수괴물이 사방에서 또아리를 틀고 있다고 생각하니 살아있는 기분이 아니었다. 서문혜도 일의 심각성을 깨달았는지 안색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소협... 이건..."
나는 사방에서 포위하고 있는 비강장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불행 중 다행인 건 이 놈들이 인육을 산채로 먹고싶어하는 것 같군. 배를 진작에 침몰시킬 수도 있었는데 안 그런 걸 보면."
하지만 이건 어느정도 예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비강장이 인육을 좋아하는 마물이라는 건 예전에 고려에 찾아온 망량에게 들은 이야기였다. 비강장 같은 괴물이라면 안개환혹의 술법으로 인간들이 정신을 잃은 사이에 투명한 몸을 이용해서 차례차례 인간을 먹어치우는 [만찬]을 즐길 것이다.
슈콱!
나는 빠르게 움직여서 선실로 날아들어가려던 비강장의 몸을 쳐 내었다. 놈은 뒤로 물러나면서 산성체액을 뱉었는데, 나는 나무판자떼기를 들어서 쳐내버렸다. 나는 숨을 몰아쉬며 생각했다.
' 4마리라... 버겁지만 어떻게든 될지도.'
그 때였다.
찌릿
"......"
나는 머릿속에 격통이 쏟아지는 걸 느꼈다. 강한 편두통과 함께 몸의 축이 흐트러지는 느낌이었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는데, 이계의 존재들이 하는 괴어(怪語)가 머릿속에 직접 쑤셔박히는 기분이었다.
' 말?'
비강장의 몸이 꿈틀거린다. 놈의 선홍색 눈빛이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왠지 모르겠지만 그게 눈 앞의 [비강장]이 내게 보내는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일 내 생각이 사실이라면, 눈 앞의 비강장은 단순히 이성이 없는 마물이 아니라 말을 구사할 줄 아는 고등생물이라는 뜻이었다. 또한 타 존재에게 자신의 의사를 영언으로 전달할 줄 아는 것이다.
' 빌어먹을... 알아들어서 뭐 하게!'
나는 이를 악물고는 검을 다잡았다. 동시에 옆에 있던 서문혜가 비강장 한 놈에게 뛰어들며 자신의 절학(絶學)을 시전했다.
"하앗!"
콰칭
검염(劍炎)!
절정고수 중에서도 일부만이 구사할 수 있는 결전기가 서문혜의 칼날에 흘렀다. 마치 은빛 광염(光炎)처럼 피어오르던 검염은 이윽고 허공에서 하나의 칼날으로 흡수되었고, 서문혜의 몸뚱이는 신검합일(身劍合一)의 기세로 비강장을 찔러들어갔다.
콰콰콱!!
[ 끼르르르륵...!!]
비강장 한 놈의 몸통이 크게 잘리고 찢겨 나갔다. 아무리 재생력이 뛰어난 비강장이라고 해도 큰 피해를 입었는지 쩔뚝거리면서 물러나는 기색이었다. 나는 서문혜의 움직임을 순간적으로 놓쳤기에 깜짝 놀랐다.
' 대단한 실력이군!'
검술 실력 하나만이라면 현천도인에게도 그리 뒤지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뭔가 아직 남겨둔 실력이 많은 것 같으니, 그녀는 나이답지 않은 가공할 무공을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었다. 괜히 암경무투회의 4회전까지 출전한 게 아닌 것이다.
나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천뢰무극창(天雷無極槍)을 시전했다. 출중하게 단련된 란, 나, 찰의 기본기와 함께 창격(槍擊)이 한 호흡에 일곱 번이나 뿜어져 나왔다. 회전을 두세 번 반복하며 이어진 찌르기는 내 앞에 있던 비강장의 몸뚱이에 구멍이 뻥뻥 뚫리게끔 만들었다.
콰르릉
놈들은 각개격파당할 생각이 없는지, 내 창격에 한 놈이 죽을 위기가 되자 다른 두 놈이 이쪽으로 날아왔다. 그리고는 격렬하게 산성액을 뿜어내며 몸통박치기를 해 왔는데 기세가 너무 맹렬해서 뇌영보 천주살로 피하는 것 외에는 도리가 없었다.
파앗
나는 서문혜와 등을 맞대고 섰다. 서문혜가 암담한 듯 말했다.
"또 재생하고 있군요..."
그랬다. 서문혜는 한 놈에게 큰 상처를 줬지만 놈의 움직임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는지 섣불리 덤벼들지 못했다. 왜냐하면 놈의 몸뚱이는 투명한데다가 대부분의 물리공격을 투과할 수 있었기에, 만일에 공격이 실패라도 하면 역공을 맞을 위험이 컸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서문혜같은 실력자도 한방에 끝장내기가 힘들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쉬쉭
천뢰무극창으로 간격을 벌리며 상대하고 있었지만 비강장의 움직임은 굉장히 영활하고 예측할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 무술같은 걸 쓰는 건 아니었으나 야생의 본능 그 자체가 무공과 맞먹었다. 본디 타고난 신체적 능력의 차이가 워낙 크기 때문에 인간인 우리로써는 무공으로 그 간극을 줄이는 셈이었다.
' 절대 금의위가 칠요를 얻게 해선 안돼.'
동시에 나는 내가 과거에 맞이했던 [금의위가 칠요를 얻는 사건]이 얼마나 중대한 것인지를 다시금 절감했다. 그 때 내가 보았던 비강장 및 마물의 숫자는 수십 수백마리나 되었다. 겨우 4마리를 상대하기도 이렇게 힘든데, 수백 마리 단위면 도대체 어떻게 될 것인가? 게다가 검기 외의 공격을 투과한다는 특징을 생각하면 일반 병사의 숫자로 해결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나 혼자인데다 육지라면 그냥 내공을 미친듯이 뿜어내면서 놈들을 없앨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이 곳은 바다 위라서 배가 부숴지면 어쩔 도리가 없는데다 선실 안에는 지켜야 할 사람들이 있었다. 지형적으로 너무 불리한 것이다.
"어떻게 하지..."
아직 미호가 주술사를 물리친 기색은 없었다. 내가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 믿어라.]
두근
무언가 신령스러운 기운이 내 몸 안으로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정수리에서부터 단전까지 쫙 이어지는 길이 생긴 것 같았고 거대한 청량감이 목젖에서 올라왔다. 이렇게 영험스러운 기운을 가까이에서 느낀 적은 거의 처음이었기에 나는 깜짝 놀랐다.
여동빈의 검령이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 잡념을 버리고 몸을 맡겨라. 그리고 믿어라.]
믿는다(信) -
나는 그 말뜻을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정말 망설여지고 어려운 일이었지만, 이것이 유일한 타개책이라면 어쩔 수 없을지도 모른다.
' 이대로라면 죽을 거야. 그런 예감이 들어.'
10번 넘게 죽어봤기에 알 수 있다.
여기서 제대로 선택하지 않으면 죽는다.
잠시 후 나는 검령의 말대로 잡념을 버리고 그 신령스러운 기운에 몸을 맡겼다. 내 의식이 무의식의 어딘가로 침잠해 들어갔고, 내 몸을 외부의 시점에서 쳐다보는 기분이 들었다. 몸의 감각이 여전히 존재했지만 그걸 느끼는 내 영혼 자체가 빠져나온 것이다.
번뜩!
갑자기 내 눈에서 새하얀 기운이 감돌았다. 그리고 내 것이 아닌 듯한 목소리가 카랑카랑하게 내 목에서 울려퍼졌다.
[ 이족(異族)이 인간을 해치려 하다니! 마도(魔道)의 무리는 결코 용납할 수 없다.]
키르르륵!!
비강장들도 내가 '다른 존재'가 되었다는 걸 알아차렸는지 동요하는 기색이었다. [나]는 창(槍)을 던져서 그대로 비강장 한 마리를 꿰뚫어 버렸다. 실제로 내가 내공을 담아서 전력을 다했다고 해도 저 정도 힘과 속도가 나올지 의문이었다.
푸콱
[ 끼이이익!!]
놀라운 일이었다. 비강장의 투명한 몸뚱이에 박힌 창은 그대로 거대한 상흔을 터뜨리며 뒤쪽으로 날아가 버렸다. 그것도 지금까지 비강장에게 줬던 상처와는 달리 비강장은 쉽사리 재생하지 못하고 뒤로 나자빠져서 꿈틀거렸다. 재생력을 방해하는 힘이 창에 담겨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 명도(名刀) 촌정(村正)을 서서히 뽑아들었다. [나]는 잠시 촌정의 예리함과 아름다움을 감상하더니 중얼거렸다.
[ 악령이 잠든 요도(妖刀)로구나. 상서롭지 못한 칼이지만 이걸 쓰는 수밖에.]
키잉 -
동시에 명도 촌정에 자연스럽게 별무리가 응축되어서 뭉게뭉게 빛을 발했다. 찬연한 무지개빛이 모여드는 모습에 주변의 비강장들이 위축되어서 슬며시 뒤로 물러섰다. 그만큼 검극에서 뿜어져나오는 힘은 압도적이라고밖에 할 수 없었다. 특히 바로 옆에 서 있던 서문혜는 넋을 잃고 별무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서기(瑞氣)는 하나의 형태로 뭉치더니 완전히 담백한 회색빛으로 변했다. 그 정제된 칼날의 모양은 내가 듣던 것과 일치했다.
강기(?氣)!
강기가 서린 명도를 정면으로 겨누던 [나]는 분노하며 외쳤다.
[ 옛 존재의 시대는 끝난지 오래! 나는 천계의 의지로 그대들을 토벌하겠노라.]
그랬다.
현재 내 몸에 강신(降神)한 존재는 바로 팔선(八仙) 중 최강이라고 불리는 투선(鬪仙)이자, 대부분의 우도사들이 신적인 존재로 모시는 검선(劍仙) 여동빈(呂洞賓)! 믿으라고 한 것은 강령에 필요한 조건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내 이성을 닫고 영이 들어오기 쉬운 상태를 만들라고 한 것이었다.
검선 여동빈의 손이 움직였다.
카카카카카캉
기쾌한 소리와 함께 허공에 갑작스럽게 명도의 환영이 나타났다. 그것들 하나하나가 강기를 머금고 있었는데, 위맹한 강기가 천상에 소용돌이를 만들어 내었다.
무시무시한 위풍!
뇌전을 머금은 소용돌이는 잠시 후 지상으로 꿰뚫듯이 내리쳤다.
쓔쾅!
[ 키에에에엑!!]
순식간에 비강장 한 놈의 몸뚱이가 수백 조각으로 갈려서 터져나갔다. 그것은 강기를 실은 명도가 어검술(御劍術)의 수법으로 무시무시한 속도로 날아들어서 기운을 폭발시켰기 때문이었다. 아까처럼 비강장은 꿈틀대면서 재생하지 못했고, 이윽고 몰아친 뇌전때문에 흔적도 없이 증발되어 버리고 말았다.
동시에 환영처럼 떠오른 절세(絶世)의 검영(劍影)이 수백 가닥으로 늘어나서 나머지 비강장들을 몰아쳤다. 비강장들은 살아남으려고 바다에 뛰어드는 듯 했으나, 여동빈의 검세(劍勢)는 순식간에 천상천하를 뒤덮었다. 무려 수천 수만 개의 검영이 신령스러운 빛을 번득이며 소나기처럼 몰아치는 모습은 차라리 예술적이었다.
피피피핑
콰과광
해무(海霧)가 사라지면서 폭발이 마치 액체구름처럼 끓어올랐다. 검폭(劍爆)의 소용돌이 속에서 검선 여동빈은 오연하게 서 있었다. 지금의 나로써는 불가능한 능공허도의 경지였다.
나머지 한 마리가 살아남아서 멀리로 도망치는 모습이 보이자, 손을 까딱했다.
[ 연자여, 보이는가?]
검(劍) 하나하나에 의지가 박혀 있다. 여동빈의 의지에 따라서 의(意)와 념(念)을 극도로 응축한 보랏빛의 기검(氣劍)이 공간을 한 순간 도약했다. 여동빈이 손가락을 까닥하는 순간 그 기검은 천공에 거대한 빛을 만들어내며 비강장을 순식간에 공격했다.
꽈과광
비강장은 비명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산산히 흩어졌다. 오연하게 허공에 떠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여동빈이 손을 늘어뜨렸다.
[ 이것이 천둔검법(天遁劍法)이다.]
순식간에 비강장을 전멸시킨 그 위용은 감히 의심할 수조차 없었다.
지금 내 몸을 빌어서 지상에 현계해 있는 존재 -
그것이 바로 역사 이래로 가장 숭앙받는 검(劍)의 신선(仙), 여동빈인 것이다. 역사 이래로 수많은 신선과 선도들이 있었으나 오직 검술의 소양과 마의 토벌만으로 신선의 좌를 쟁취한 존재는 오직 여동빈밖에 없었다.
여동빈이 갑자기 눈썹을 모았다.
[ 흉신(凶神)의 거대한 후예가 다가오는구나. 이 시대에는 이다지도 마(魔)가 창궐해 있단 말인가? 그 자들은 은주시대의 대멸망(大滅亡)을 겪고도 느낀 것이 없었다는 말인가? 참으로 한탄스럽구나!]
쿠구구구...
그 말대로였다. 해무는 대부분 걷혀 있었으나, 수평선 너머에서 무언가 불길하고 거대한 것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것은 보랏빛 안개를 머금은 형태의 재앙이었다. 그렇게밖에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하고 무서운 존재였다. 보랏빛 안개의 구름 사이로 거대한 촉수가 꿈틀거리며 융기하고 있었고, 쉴 새 없이 더럽고 두려운 저주의 언(言)을 토해내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의 비강장은 애교로 느껴질 정도의 진정한 마(魔)가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크오오오
뇌운(雷雲)을 집어삼키며 천지간을 자신의 존재감으로 채울 정도의 괴물이었다. 월요의 수호자보다는 격이 낮아 보였지만, 인간인 내가 저런 걸 상대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흉신이란 것은 무엇인가?
내가 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자 여동빈이 내 속내를 읽었는지 독백으로 대답해 주었다.
[ 연자여. 이 세계에는 해신보다 더욱 흉험하고 두려운 존재가 있으니, 사신(邪神)들을 별의 운행에 도달할 때까지 수저(水底)에서 수호하는 존재일지어다. 그 존재를 일컬어 흉신(凶神)이라 할지니, 저 보랏빛 존재는 흉신의 후예라 할 수 있다.]
그런 게 있었단 말인가.
내가 속으로 경악하고 있자 여동빈이 명도 촌정을 들어서 전방을 노려보았다.
[ 그러나 그대의 내력은 매우 출중하니 나의 힘을 10할 완벽히 쓸 수 있음이다. 그대는 걱정 말거라.]
흉신의 후예와 거리가 좁혀졌다.
거리가 약 오십여 장까지 좁혀지자, 여동빈은 명도 촌정을 허공으로 띄웠다. 그와 동시에, 아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거대한 오색 빛무리가 강대한 광채를 내뿜으며 모여들었다. 얼마나 힘을 모을 생각인지 주변의 자연지기가 고갈되는 느낌마저 들었다. 그 자체로 자연을 조종하는 경지였다.
콰칭!
[ 울어라, 화룡(火龍)의 신검(神劍)이여!]
거대한 옥염이 명도 촌정에서 일어났다. 종래에는 칼날이 물질의 형태를 잃고 불꽃처럼 변해 버렸는데, 말 그대로 화룡의 기운이 검에서 들끓는 듯 했다. 용의 기운이 내 몸을 감싸자 뜨거운 기운이 내면에서 활활 솟구쳤고 내 몸뚱이가 용 그 자체로 변한 것 같았다.
천둔검법(天遁劍法)
화룡신검(火龍神劍)
멸광(滅光)
[ 사특한 자 근원으로 되돌아갈지니!]
화룡신검과 함께 거대한 빛덩어리가 된 내 몸이 검선 여동빈의 의지를 안고 정면으로 돌격해 들어갔다. 그 속도는 내가 대라멸진과 뇌명을 동시에 일으킨 것보다 훨씬 빨라보였다. 검선 여동빈이 내 잠재력을 남김없이 사용하기 때문에 더욱 강한 것이었다.
쿠오오오
흉신의 후예는 촉수를 뿜어내며 마기를 광탄처럼 발사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화룡신검은 촉수를 모조리 태워버리며 쉴새없이 전진했고, 이윽고 보랏빛 구름같은 몸뚱이 내부로 진입했다. 나는 마물의 근원에서 내뿜어지는 농도짙은 마기에 질식할 것 같았으나 이내 화룡신검이 마기마저도 태워버렸기에 편안해졌다.
[ 오오오오오!]
핵(核)으로 보이는 흉신의 후예의 심장이 느껴졌다. 그 심장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눈이 달려 있었으며 또한 촉수를 지니고 있었다. 심장이 자기를 지키기 위해 주술의 비어(秘語)와 언령(言靈)을 외쳤으나, 여동빈의 검은 그 모든 것을 무시하고는 정확하게 심장의 한가운데에 꽂혔다.
[ 끼에에에에에엑!!]
심장이 비명을 내질렀다. 다음 순간 심장이 폭발하며 검푸른 피를 사방팔방으로 쏟아내었고, 주변의 보랏빛 구름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놈의 본체는 영(靈)과 결합해서 자연을 끌어모은 혼합체였던 것이다. 여동빈은 즉시 능공허도로 빠져나오며 배 위로 되돌아왔다.
콰과광
등 뒤에서 흉신의 후예가 폭발해서 소멸하는 소리가 들렸다.
찰캉
여동빈은 명도 촌정을 검집에 집어넣으며 말했다.
[ 연자여, 과하게 그대의 몸을 써서 미안하다. 크게 기가 소모되었으니 정양하거라.]
휘이이익
동시에 신령스러운 기운이 내 몸에서 나가버리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잠재되어 있던 내 의식이 서서히 돌아오더니, 종래에는 다시 육체의 통제권을 되찾았다. 나는 방금 전에 있던 일이 백일몽처럼 느껴졌지만, 등 뒤에서 부숴지는 보랏빛 마(魔)의 잔해를 지켜보고 있으니 현실이라는 걸 실감할 수 있었다.
나는 그제서야 알 수 있었다.
천둔검법의 축복 -
그것은 여동빈이 내게 천둔검법을 전수함과 동시에, 마(魔)를 감지할 경우 강신해서 대신 싸워주는 축복이었던 것이다.
"쿨럭, 쿨럭...?!"
나는 갑작스럽게 기침을 토했다. 의아해서 손을 살펴보자, 거기에는 선혈이 묻어 있었다. 동시에 전신이 나른하고 힘이 빠지는 기분이 들었다. 마치 수십 일동안 잠도 안자고 쉬지 않고 일을 한 듯한 피로감이 전신을 덮쳐왔다. 바로 기절할 뻔 했으나 간신히 의지력으로 버티고 있자 옆에서 서문혜가 달려와서 나를 부축했다.
"괜찮으신가요?!"
"쿨럭... 쿨럭... 허억..."
나는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 내 몸 상태를 잠시 점검해 본 결과, 그 엄청나던 내 내공이 모조리 소모되고 1할도 되지 않는 기운이 남아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여동빈이 내 몸뚱이의 잠재력을 한계까지 끌어내어서 천둔검법을 쓰는 바람에 내상이 생겨버린 것이다.
내상은 정말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부상이었으므로 나는 황당하기까지 했다. 도대체 그 짧은 전투동안에 얼마나 되는 내공을 소모했다는 말인가? 내가 억지로 정신을 차려서 서 있자 하늘너머에서 무언가가 다가왔다.
슈욱
하늘에서 날틀을 타고 날아온 것은 미호였다. 미호의 한쪽 손에는 퉁방울만한 눈을 하고 있는 어인족의 머리통이 들려 있었다. 아마도 저게 해신의 일족이며 해무를 만들어낸 주술사일 것이다.
"투선을 자기 몸에 강림시키다니 도대체 너는 뭐하는 놈이냐?"
기가 질린 듯 이야기한 미호가 주술사의 머리통을 여우불꽃으로 태워버렸다. 여우불꽃은 머리통을 활활 태우더니 맛있는 물고기구이 냄새를 냈다. 내가 희미하게 눈을 떠서 미호를 바라보자, 미호는 옆에 있던 서문혜에게 말했다.
"너는 이놈을 좀 돌봐 주거라. 이제 해무와 무풍지대는 해제되었다."
"당신은?"
미호는 대답을 하지 않고 쓱하고 서문혜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서문혜의 몸이 부들부들 떨리더니, 눈이 몽롱한 빛을 띄게 되었다. 순식간에 매혹술을 걸어버린 미호가 다시 말했다.
"알겠느냐? 이 놈을 돌봐 주어라."
"알았어요..."
서문혜가 나를 안고 병실로 가는 것까지가 내 기억의 끝이었다.
나는 기절하듯이 잠들어버렸다.
============================ 작품 후기 ============================
탈혼경인은 본 작과 완전히 무관합니다. 탈혼경인의 설정을 언급하거나 비교하는 일을 자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열심히 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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