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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검신-107화 (107/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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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천향(暗天鄕)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개경에 들어갈 수 있었다. 우선 대부분의 포로 인솔이 내 일이 되어 있었기에, 나는 미리 추려낸 고려인 포로들을 고려의 고위 담당관에게 데려가게 되었다. 다소 깐깐한 인상의 담당 관리는 내가 준 인명록을 보더니 말했다.

"이게 뭐지? 그래서 날더러 어쩌라는 거요?"

"이 자들을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게끔 도와 주시오."

"고려 말이 유창하군."

쓸데없는 소리를 하던 그 관리가 빙빙 말을 돌렸다.

"뭐 그렇게 해주고 싶지만, 내가 뭐 한가한 몸도 아니고, 이 목록 중에서 서너 명을 빼고는 다들 평민이나 천민이지 않은가..."

"......"

"성의가 필요해. 안 그런가? 성의가 없으면 움직일 수 없지."

내가 기가 막힌 눈으로 그 관리를 바라보자, 내 옆에 서 있던 대룡상회주가 내게 속삭이며 옆으로 끌었다.

"잠깐 와 보게."

잠시 인적없는 곳으로 자리를 옮긴 대룡상회주가 말했다.

"이렇게 될 줄 알았어. 저 자는 뇌물을 원하는 거야."

"뇌물이라고요? 해적들한테 인생을 통째로 빼앗긴 불쌍한 사람들을 돕는데 무슨 뇌물을 달라는 겁니까?"

"물론 백웅 자네 말이 옳네. 허나 이게 세상이 움직이는 이치지. 충분한 돈이 없으면 저 자는 결코 움직이지 않을 걸세."

"으음."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이런 곳에서 막힐 줄은 생각도 하지 못한 것이다.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대룡상회주에게 말했다.

"정철욱 가주와 이야기를 해 보고 싶은데 연결이 되겠습니까?"

"으응? 물론 내게는 그와 끈이 닿아있지만 어쩔 셈인가?"

"한 번만 이야기할 수 있으면 됩니다. 부탁드립니다."

"알았네."

대룡상회주는 내 부탁을 들어주기로 했다. 물론 지금까지의 대룡상회주의 호의에는 철저한 계산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나는 언젠가 그에게 보답을 돌려주어야 후환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나는 해적에게서 빼앗은 금은보화는 물론 금괴도 가지고 있었으나, 저 타락한 고위관리에게 그걸 내주는 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뿐만 아니라 그걸 이 땅에 풀어놓고 나면 왠지 뒷감당이 안 될 것 같았다.

대룡상회주가 주선해 준 자리는 약 이틀 뒤에 나갈 수 있었다. 정철욱 가주는 내빈실에서 나를 맞이하며 말했다.

"어서 오시게. 이번에 큰 전공을 세운 소년영웅을 내 눈으로 보게 되어 영광일세."

"저야말로 정 가주님을 뵙게 되어 큰 영광입니다."

내가 공손하게 고려 예법에 따라서 이야기하자, 정철욱 가주가 눈에 이채를 띄었다.

"자네 혹시 고려 출신인가? 굉장히 고려말이 유창하고 예법도 익숙하군. 마치 명가에서 오랜 세월 교육받은 것 같아."

"그렇지는 않습니다. 단지 고려에 잠시 살았던 일이 있습니다."

"그렇군..."

정철욱 가주는 왠지 껄껄 웃는 기색이었다. 차를 자신의 잔에 따르던 정철욱 가주가 말했다.

"그래서, 백웅. 무슨 일로 나를 보고자 한 것인가?"

"다름이 아니라 정 가주님의 주치의이신 화서명 노인과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니? 자네는 그를 알고 있단 말인가?"

정철욱 가주는 다소 당혹해하는 듯 했다. 그도 그럴것이 화씨 가문의 귀화는 그가 은밀히 돕는 일이었고, 화서명이 중원에서 광명신의로 불린 중원오대의원이라는 사실도 고려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공손히 포권하며 말을 이었다.

"제 스승님이 화서명 노인의 친우(親友)였습니다. 저 또한 사실상 화서명 노인을 뵙기 위해 고려땅까지 온 것입니다. 부디 제 부탁을 들어 주십시오."

"흐음... 하긴 중원 땅이 넓으니 그런 일도 있겠군... 그렇다면 자네도 혹여 의술(醫術)을 시전할 줄 아는가?"

"조금이지만 할 줄 압니다."

"호오."

잠시 생각하던 정철욱 가주가 말했다.

"좋네. 내 호위무사단을 따라가게. 즉시 화 노인에게 이야기를 해 두지."

나는 그들의 인도에 따라서 화 노인의 거처로 향했다. 내가 그의 거처로 도착하자 호위무사대장이 안으로 들어가서 뭐라고 이야기하는 듯 했다. 잠시 후 나는 화 노인이 사는 별채 안으로 들어갈 수가 있었다.

익숙한 의약전 냄새가 풍겼다. 나는 이 냄새를 맡으며 약 10여년간 의술을 연마한 적이 있었던 것이다. 다소 감개무량한 기분이 들어서 별채 한가운데에 서 있자,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 친구의 제자라고? 네놈은 대체 누구란 말이냐?"

거기에는 화 노인이 곱지 못한 눈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는 낯선 중원에서의 방문자를 그리 반기지 않는 눈치였다. 하긴 중원에서 괄시당해서 화씨가문을 통째로 옮겨오고 있으니 그럴만도 할 것이다. 나는 씨익 웃으며 한어로 말했다.

"진정하십시오. 그건 거짓말이었습니다만, 이제부터 저와 당신은 서로를 도울 수 있을 테니까요."

"뭐?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당신의 화씨 가문이 놓인 처지를 알고 있습니다. 저라면 당신을 도와서 몇 년 내에 모든 화씨가문의 의술을 고려 땅으로 옮겨오는 게 가능합니다."

"......!!"

화 노인이 눈을 부릅떴다. 그는 나를 노려보는 게 아니라 침착한 눈으로 살펴보기 시작했다.

"믿을 수 없다."

"우선 이것부터 받으시지요."

스윽

내가 궤짝의 금괴를 내놓았다. 찬연한 빛을 발하는 금괴를 확인한 화서명은 넋을 잃은 듯 그 금괴를 한동안 지켜보았다. 난데없이 내가 금괴를 준다고 하니 믿을 수 없어하는 기색이었다.

"그 정도면 식솔 대부분을 옮겨올 수 있을 겁니다."

"자... 자네는 대체 누구인가? 누구길래 내 사정을 그리 잘 알고 있는 거지?"

"저는 백웅이라고 합니다. 화씨 일문의 방계(傍系)에서 수련했고, 본가가 위험에 처했다는 소리를 듣고 돕기 위해서 고려까지 왔습니다."

"방계라고! 그럼 자네도 의술을 배웠단 말인가?"

"직접 확인해 보십시오."

나는 근처에 있던 인체모형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천천히 침을 들어서 화씨백팔침을 시전하기 시작했다. 화씨백팔침에서 가르치는 기본 형(形)과 혈도의 구사가 끝나자 이어서 화타오금희를 보여주었다. 그 모든 시전을 보던 화서명이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럴수가... 정말인가? 정말 방계에서 이 정도의 화씨의술을 구사할 수 있는 게야? 나는 어째서 자네같은 인물을 몰랐던 거지?"

"......"

"이건 분명히 진짜 화씨백팔침과 화타오금희야...!!"

그러더니 화서명은 눈물을 터뜨리더니 내 어깨를 얼싸안았다.

"크흐흑... 정말 고맙네. 내 이 은혜를 결코 잊지 않을 걸세...!! 이걸로 시간이 십 년은 단축이 되었어..."

"이제는 화 가주께서 저를 도와주셔야지요."

나는 마지막 금괴를 꺼내며 그에게 내밀었다.

"이 금괴까지 받으시면 아마 모든 의가를 옮겨오실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저도 현재 곤란한 상황에 처해있기 때문에, 화 가주의 도움이 크게 필요합니다. 저를 도와주실 수 있다면 이 금괴를 드리겠습니다."

"말해보게! 내 어떤 일이든 반드시 도와주지."

나는 현재 해적섬을 토벌하고 데려온 포로들의 거취문제를 설명했고, 현재 그걸 담당하는 고려의 고위담당관이 뇌물을 원하면서 밍기적거리고 있다는 걸 이야기했다. 앉아서 그걸 차분히 듣고 있던 화서명이 자신의 수염을 쓸어내리더니 말했다.

"아주 몹쓸 놈이군."

"저를 도와주실 수 있겠습니까?"

"물론일세. 나는 현재 정 가주의 신뢰를 얻고 있으니, 내가 정 가주에게 직접 이야기를 해 두겠네. 그는 왠만하면 내 말을 들어주니 자네에게 도움이 될 게야."

"고맙습니다."

"고맙기는 내가 더 고맙지..."

화서명은 눈시울을 붉히며 자신의 눈가를 닦았다.

"이 이역만리에서 설마 방계 사람이 본가를 돕겠다 올 줄이야... 그리고 이리도 의술이 출중할 줄이야. 자네의 스승은 도대체 누구인가? 내 꼭 그를 만나보고 싶군."

나는 뜨끔했지만 한숨을 쉬었다.

"이미 돌아가셨습니다..."

"아 그런가..."

나는 이후로도 화서명과 이야기를 한 시진 정도 했다. 그 대부분의 내용은 시시콜콜한 의술 이야기였고, 간혹 그가 내 의술진경을 확인하고 놀라기도 했다. 그리고 내가 평소에 애매했던 부분을 질문하자 그는 친절하게 대답해 주었다.

"그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살펴 가게."

내가 숙소에 들어와서 딱 하루가 지났을 때였다. 왠 고려의 호위무사단이 내 숙소로 찾아왔고, 호위무사대장이 내게 말했다.

"정 가주께서 뵙고싶어 하시오. 따라와 주시오."

"알았소."

내가 그들을 따라가서 다시 정철욱을 만나러 가자, 그 귀빈실에는 피떡이 된 누군가가 오랏줄에 묶여서 꿇려앉혀져 있었다. 이 자리에는 화서명도 서 있었다. 의자에 앉아있던 정철욱이 나를 반기며 말했다.

"어서 오시게, 백웅."

"이 자는..."

"자네에게 뇌물을 강요했던 자일세. 중원의 의인(義人)에게 그런 무례를 범하다니 내 얼굴이 다 화끈거리는군."

아닌 게 아니라 그 자는 내가 만났던 고위담당관이었다. 이미 한차례 국문과 구타를 당한 듯 그의 얼굴은 퉁퉁 부어 있었고 녹초가 되어 있었다. 그는 나를 보더니 필사적으로 외쳤다.

"그, 그게 아니야! 나는 최대한 편의를 봐주려 했는데... 그러니까 이야기가 꼬인 것 뿐이었네! 이 오해를 풀어 주시게!"

오해는 무슨 오해냐.

나는 싸늘하게 그를 일별하고는 정 가주에게 포권했다.

"정 가주의 의협심에 이 백웅, 감동했습니다."

"이제야 내 낯이 사는구먼. 허허."

정철욱은 씁쓸하게 웃더니 말했다.

"자네가 데려온 고려인 포로의 거취문제는 내 적극적으로 해결해 줌세. 그들이 해적의 포로였다는 사실을 숨길 것이고, 지원금과 정착금도 내어주지. 그리고 신세가 좋지 않은 여인들도 최대한 돌봐주겠네."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정철욱이 저렇게 말했다면 이제 더는 걱정할 게 없었다. 왕과 권력을 나눌 정도인 고려의 양대세도가의 가주가 마음먹고 나섰는데 해결이 안될 리가 없는 것이다. 정철욱이 마무리 명령을 내렸다.

"여봐라. 이 자를 참수하고 이 자의 일가를 모두 천민으로 강등시켜라."

"으아아아아아!!"

아주 좋다.

나는 타락한 관리의 찢어질 듯한 비명소리를 즐겁게 들으며 정철욱의 저택을 나왔다.

내가 숙소로 돌아오니 무영문주의 딸, 서문혜가 내 방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나를 보더니 반갑게 말했다.

"아, 오셨어요?"

"무슨 일이오?"

"가신 일은 잘 되었는지 싶어서..."

"물론 잘 해결되었소. 상단의 움직임에 맞춰서 내일 출발이 가능할 거요."

"그렇군요."

"뭔가 할 말이라도 있소?"

그러자 서문혜가 우물쭈물하더니 말했다.

"긴히 단 둘이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알았소."

나는 서문혜와 방에 들어갔다. 서문혜는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더니 말했다.

"백 의원님은 의술뿐만이 아니라 무공도 뛰어나신 것 같군요."

"그리 자부할만한 실력은 아니오."

"사실 오시기 전에 언니들과 이야기를 했었어요. 의원님께 어찌 보답을 드려야 할지 생각하다가 제 나름대로 결론을 내렸습니다."

"... 이미 해적들의 금은보화를 받아서 그 이야기는 마무리가 되었소만."

"아닙니다. 그런 걸로는 구명지은을 갚을 수가 없어요."

서문혜가 고개를 도리도리 젓더니 내 손을 꼭 붙잡았다. 섬섬옥수가 느껴졌다.

"백웅 님, 저의 반려가 되어 주세요. 부탁드립니다."

".......!!"

나는 깜짝 놀랐다. 이 여자가 진심이란 말인가?

하지만 눈빛은 절대로 장난하는 게 아니었다. 아름다운 백발의 절세미녀가 내 손을 붙잡고는 숨결이 닿을 거리까지 얼굴이 다가와 있었다. 그녀가 말했다.

"제 마음을 받아주실 수 없으신가요?"

"너무 갑작스러운 이야기라서... 갑자기 그렇게 생각하게 된 이유가 뭐요?"

그녀는 한숨을 쉬더니 말했다.

"저는 태어나서 백웅 님같은 분을 본 적이 없습니다. 나이는 어리지만 출중한 의술에 뛰어난 의협심을 지니고 있으시고, 무공도 굉장하시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내공을 숨기고 있으시지만 저는 백웅 님이 엄청난 내공을 숨기고 계시다는 걸 알 수 있어요."

"흠."

"그런데도 여인을 함부로 탐하지 않으시고 의를 행하시는 모습에 감명받았습니다. 백웅 님은 제가 생각해 오던 이상적인 반려예요."

나는 그제서야 서문혜가 내게 콩깍지가 씌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서문혜도 눈이 있다면 이 모습이 장차 성장하면 평균 이하의 못생긴 외모가 된다는 걸 모를 리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자기 쪽에서 먼저 반려가 되어주길 청할 줄이야!

나는 부담스러워서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보다시피 나는 매우 못생긴 외모요. 당신같은 미녀와는 어울리지 않소."

그녀의 새하얀 손이 한층 더 강하게 내 손을 잡았다.

"남자의 외모가 무엇이 중요합니까? 저는 무영문의 금지옥엽으로 자라면서 송옥 반안에 버금가는 잘생긴 사내를 많이 보아왔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가진 건 외모 뿐이었습니다. 저는 백웅 님의 모든 것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

정말 진심이군.

나는 어떻게 해야할지 고민되었다. 여기서 내가 서문혜의 청을 받아들인다면, 앞으로 무영문의 후계자가 될 수 있을 것이며 마도팔마 최강의 고수가 내 편이 되어줄 것이다. 게다가 천하절색의 미녀까지 손에 얻을 수 있으니 이건 엄청나게 좋은 선택이라고밖에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섣불리 고를 수가 없다.

내가 그녀와 부부의 연을 맺는 것은 전생(轉生)에서 피할 수 없는 필연의 고리가 하나 더 생기는 것이다. 아직까지 내 목적을 달성하지도 못한 상황에서 그것은 정신력에 큰 타격을 줄 가능성이 있었다. 오죽하면 화련, 한씨세가의 낙양사화 한지화나 미호의 유혹까지도 뿌리쳤겠는가.

나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당신은 지금 성급하게 결정을 내리고 있소. 아직 나라는 인간이 어떤 인간인지 제대로 알아보았다고는 할 수 없소."

"제 청을... 거절하시는 건가요?"

"그런 게 아니오. 나 또한 당신이 마음에 드오. 그러나 좀 더 서로를 알아볼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지."

나는 팔짱을 꼈다.

"정 그렇다면 무영문까지 동행하도록 합시다. 그 때까지도 생각이 변하지 않는다면 나도 당신을 내 반려로 받아들이겠소."

그러자 그녀는 활짝 웃었다.

"네!"

나는 뭔가 복잡한 감정에 휩싸였다.

그리고 왠지 매우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 나, 태어나서 처음으로 여자한테 고백받았는데...'

마음같아서는 그녀와 즐겁게 살고 싶은데 목표 하나때문에 다 포기한다는 게 억울하게 느껴졌다. 세상에 서문혜같은 절세미녀를 얻기 위해서 천금같은 노력을 기울이는 사람은 수도 없이 많을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내 생각을 고쳐먹었다. 다시 한 번 망량과 미호가 떠올랐다. 내가 그들에게 마음의 빚이 존재하는 한, 나는 결코 목표에서 한 눈을 팔 수가 없다. 이것이 바로 내가 과거에 범했던 어리석음에 대한 속죄인 것이다.

' 복마전, 반드시 쓰러뜨린다.'

내 각오가 한층 강해졌다.

수월한 인생계획을 위해서는 한시라도 바삐 그 개자식들을 없애버리고, 황궁에서 소환했을 이계의 존재를 돌려보내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다음 날 배가 출항했다.

그리고 서문혜가 그날 밤 내 선실로 찾아오더니 문을 열고 들어왔다.

"백웅 님."

그러더니 어둠 속에서 사르르륵 하고 뭔가 벗겨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가 내가 누워있던 이불 안으로 파고 들자, 나는 기겁을 했다. 느껴지는 것은 서문혜의 알몸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간만에 기분좋게 잠을 잘 생각이었는데 날벼락을 맞은 느낌이었다.

"뭐하는 거요?"

"좀 더 백웅 님을 알아보고 싶습니다."

그녀의 나신이 나를 꼭 끌어안았다. 기분 좋은 향기가 났고 보드라운 살결이 팔에 뭉클하고 닿였다. 화련 때와 비슷했지만 그때와 다른 것은, 그녀가 색(色)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처녀라는 사실이었다.

잘 보니 그녀는 나를 끌어안은 채 눈을 꼭 감고 있었다. 마치 아무렇게나 해도 좋다는 듯한 태도였다. 나는 색다른 매력에 침을 꿀꺽 삼킬 수밖에 없었다. 남자라면 이런 상황에서 차려진 밥상을 안 먹는 일이 드물 것이다.

그러나 나는 말했다.

"불을 켜시오."

"백웅 님..."

"그리고 옷을 입으시오."

서문혜가 말했다.

"부부의 가약을 맺지 않아도, 백웅 님이라면 저를 드릴 수 있어요. 제가 그렇게 싫으신 건가요?"

"그런 말을 하는 게 아니잖소..."

"흐흑..."

서문혜가 울먹거리는 기색이었다. 나는 어떻게 해야할지 고민스러웠지만, 이내 바닥에 떨어진 서문혜의 옷을 주워서 그녀에게 갖다주었다. 그녀가 훌쩍거리며 자신의 옷을 입기 시작하자, 나는 선실 밖으로 나갔다.

' 하아... 누군 안 괴로운줄 아냐.'

그저 한숨만 나올 뿐이었다.

그 때였다.

"바아 - 보!! 색골! 멍청이!"

"......?"

선실 복도의 어둠 속에 왠 어린 여자아이가 서 있었다. 그 여자아이는 뭔가 단단히 화난 듯 토라진 얼굴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더니 앙칼지게 외쳤다.

"도와주러 왔는데 인간끼리 교미나 하고 있냐?! 아오 짜증나!!"

"어?"

"백년천년 떡이나 쳐라! 멍청이! 흥! 바보말미잘!!"

유치한 욕설을 거듭하던 여자아이는 다음 순간 홱 하고 사라져 버렸다.

' 뭐지?'

나는 고개를 갸웃했지만, 그 여자아이가 시전한 것이 고도의 술법이며, 왠지 그 여자아이를 어디선가 본 것 같다는 기시감밖에 느낄 수가 없었다. 나는 잠시 후 함내를 들여다 봤으나 그 누구도 여자아이를 발견한 적이 없었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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