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검신-106화 (106/1,615)

0106 ----------------------------------------------

암천향(暗天鄕)

나는 혈도단의 토벌이 끝난 후 안현과 독대하여 이야기를 했다. 주된 이야기는 앞으로 사후처리를 어떻게 할 것인가, 그리고 해적들에게 잡힌 사람들을 어떻게 돌려보낼까 같은 것이었다. 나는 굳이 능지형의 잔인함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았는데, 아무리 강철같은 성격의 안현이라고 해도 그걸 굳이 언급하는 건 싫어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하던 중 안현 부관이 말했다.

"이 곳에 오래 머무를 수는 없소. 혈도단을 토벌하긴 했으나 상단이 군소해적에 위협받을수도 있으니 서둘러 따라가서 호위해 줘야 하오."

"그러면 포로들은 고려에 데려가실 생각이십니까?"

여기서 '포로'라고 함은 모두 해적에게 노예로 잡혔던 사람을 의미했다. 실제로는 아주 극소수를 제외한 해적들을 몰살시킨 것이다. 노예들의 숫자는 약 70여 명이라서 이들의 사후처리 또한 중요한 문제였다.

안현 부관이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우선 그렇게 되겠지. 고려인도 있는 것 같으니 그들을 먼저 고국에 데려다주고, 나머지를 중원에 데려갈 생각이오."

"제가 고려말을 좀 할 줄 압니다. 도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오, 정말이오?"

안현 부관이 얼굴에 화색을 띄더니 말했다.

"그럼 정비를 마치고 세 시진 후에 출발하겠소. 그때까지 좀 도와주시게."

나는 지금까지도 포로로 잡혔던 사람들의 상세를 돌보고 있었다. 그리고 굳이 지금 이런 말을 꺼낸 것은, 그들에게 직접 접근해서 정보를 캐내는 것을 수상하게 여겨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수군의 입장에서는 알 수 없는, 노예들만이 알고 있을 정보가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는 다시 해적노예들이 모여있던 장소로 갔다. 내가 도착하자 몇몇이 눈물을 흘리며 기뻐했다.

"아아... 백 의원님."

"또 와주셨군요."

"어디 좀 봅시다."

나는 그들에게 다가가서 상태를 봐 주었다. 당장 큰 부상이 있던 자들의 응급처치는 끝낸 상태였고, 특히 팔다리가 썩어가던 자들은 환부를 잘라내서 더 이상의 악화를 막았다.

또한 척추나 골반, 다리 등에 큰 상처를 입어서 반장애이던 사람들도 화타오금희와 침술을 이용해서 몸을 어느정도 움직일 수 있게 만들었다. 또한 오랜 시간동안 윤간을 당해서 몸의 내부가 상해있던 여인들의 장기를 기공으로 치유했으며 임신중인 여인들이 산독에 고통받지 않게끔 처치했다.

내 옆에서 함께 치료를 하고 있던 군의(軍醫)가 감탄했다.

"대단하군. 틀림없는 명문가의 의술이야. 어려보이는데 어찌 그 정도 의술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오?"

"별 것 아닌 재주입니다. 그보다 약(藥)을 쓰지 않으면 치료가 안 되는 자들이 있군요."

"그런 자들도 당신이 임시로 상세를 치유하지 않았소? 여기 있는 자들 중 절반 이상은 당신 덕에 구원받은 셈이군."

나는 군의가 내 얼굴에 금칠을 하자 쑥쓰러웠다. 사실 천하 오대의원 중 한 명이자 화타의 의술을 잇는 가문의 가주인 광명신의 화서명 밑에서 10여년 가까이 열정적으로 가르침을 받으면 이 정도는 당연한 것이다. 나는 열이 나는 자의 목 근처에 화씨백팔침을 시전한 후 말했다.

"우선 이걸로 급한 치료는 끝났소. 그럼 지금부터 국적을 분류하겠소."

"네."

내 요구에 따라 포로들은 각자의 출신을 밝혔다. 70여명 중에서 중원인이 50여명이었고 고려인이 20여명이었다. 그들을 분류한 후 대략적인 이름과 출신지를 적었고 개개인의 특징을 간략하게 기록했다. 일단의 작업이 끝나자 나는 그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고려인들은 우선 개경에서 내려줄 것이오. 중원인들은 개경에 들른 후 중원으로 돌아갈 것이오. 또한 만일에 해적들에 관련된 비밀을 알고 있다는 자들은 떠나기 전에 나를 먼저 찾아오시오. 정보에 따라서 충분한 포상을 하겠소."

그 때였다. 포로들 중 한 명이 번쩍 손을 들었다.

"제, 제가 알고 있습니다!"

"저도요!"

그 외에도 약 12 명 정도가 손을 들었다. 나머지는 말해주고 싶어도 아는게 없는 눈치였다.

"좋소."

남녀가 섞여있는 걸 보자,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그들 모두를 따로 불러들였다. 외딴 건물로 가서 한 명 한 명 불러들여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정보를 듣던 중 쓰잘데기없는 정보가 대부분이었기에 나는 이야기를 듣던 중 실망했다. 역시 이들 중 대부분은 고향에 돌아갔을 때 돈이 필요하기 때문에 급한대로 손을 든 것이었다. 하지만 5명의 정보는 꽤 유용했다.

"해적두목의 거처 지하에 비밀공간이 있어요. 거기에 해적두목이 몰래 들어가는 걸 본 적이 있어요."

임신한 여인의 정보였다. 그녀는 지상에 있을 때는 아름다운 규수였을 것 같으나 오랜 난행에 외모가 많이 망가져 있었다. 그렇다해도 귀티와 아름다움이 남아있었으니, 아마도 해적두목들이 불러들여서 즐기는 자리에 간 모양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포상을 해 주기로 약속했다.

"섬 북쪽의 바위 사이 틈새에 놈들이 화약을 모아두었습니다요."

"혈도단 간부가 자기 개인공간에서 명도(名刀)를 자랑하는 걸 봤습니다요. 벽 뒤쪽에 숨겨놨습니다요."

"놈들이 노예를 파는 곳이 하남(河南)의 경구 지역이라고 알고 있습니다요. 그 곳에서 노예상인을 만납니다요."

그리고 마지막 정보가 특히 귀에 들어왔다.

"이따금씩 이 섬에 중원인들이 들어와서 해적들과 뭔가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습니다요. 약 한 달포에 한번씩 찾아왔고, 고귀한 옷을 입은 것 같았는데 해적단 두목들도 쩔쩔 매는 기색이었습니다요."

해적단 두목도 쩔쩔매는 귀한 옷의 중원인.

나는 혹시나 해서 그에게 반문했다.

"혹시 그들이 금빛 자수가 새겨진 옷을 입고 있지 않았소?"

"네? 그, 그렇습니다요."

"......"

나는 침음성을 흘렸다.

' 금의위(錦衣衛)가 이 섬을 방문했던 거군.'

이걸로써 해신족과 금의위가 손을 잡았을지도 모른다는 망량의 추측은 거의 들어맞은 셈이 되었다. 해적단 두목이 쩔쩔 매었다는 걸 보면 금의위가 손을 내민 것은 일개 해적단 따위가 아니라, 그 배후에 있는 해신의 일족이 분명한 것이다.

그렇다면 수군이 이 해적섬을 토벌했다는 사실도 머지않아서 귀에 들어갈 것이다. 그리고 그 와중에 내 행적도 그들에게 알려질 가능성이 높았다. 나는 또다시 금의위와 얽히게 되자 짜증나면서도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 장경익 장군의 부탁은 꼭 들어줘야겠군.'

아직 금의위가 나를 정면으로 찍고갈 정도의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장경익 장군의 영향력을 방패로 아무것도 모르는 척 다닌다면 놈들에게서 내 몸을 지킬 수 있을 것이다. 그걸 위해서는 그의 부탁을 들어주고, 그를 연줄로 만드는 작업이 꼭 필요했다.

얼추 정보를 들은 후에는 행동에 나섰다. 첫 번째 정보에 따라서 임신한 여인을 데리고 해적두목들의 거처로 들어갔고, 그녀가 지적하는 비밀장소의 문을 열었다. 그러자 그 곳에는 바위를 깎아서 만들어 낸 휘황찬란한 금은보화가 쌓여 있었다. 나는 그녀와 단둘이 찾아왔기에 다른 자들에게 굳이 알릴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말했다.

"저는 이미 더럽혀지고 욕보여져서 중원으로 돌아가도 살아가기 힘들어요. 다른 여인들도 사정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저희를 위해서 이 보물을 나누어주시지 않으시렵니까?"

역시 수군에게 넘기기보다는 나 개인에게 넘겨서 거래를 하려는 모습인 듯 했다.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물론 주는 건 어렵지 않소. 그러나 금은보화는 지킬 능력이 없거나 매각할 능력이 없으면 큰 화(禍)가 되어버리지."

"그래서 부탁 하나를 더 드리고 싶어요."

"무엇이오?"

"여인들 중에 멍하니 백치가 되어있는 백발의 여인을 보셨을 거예요."

"아."

그러고보니 봤었다. 단순한 외모로 치면 대단한 미녀였을 것 같지만, 눈이 죽은 물고기처럼 되어 있었고 전신에 아무런 힘도 없었다. 완전한 백치인 듯 했다. 그녀는 나를 바라보더니 말했다.

"해적두목도 간부들도 그 누구도 그녀에게 손을 대지 못했어요. 그녀는 이 곳을 잠시 거쳐가는 몸인 듯 했고 본디 무림인이었다고 해요. 그것도 굉장한 고수였다고 해요. 그녀의 무공을 되살려주실 수 있다면, 저희는 그녀의 보호를 받아서 살 수 있습니다."

"확실하오?"

"네. 그녀가 백치이긴 하지만 저희와는 친분이 있어요."

여인들끼리는 이미 모임을 만들어서 결속을 다지고 있는 듯 했다. 그리고 무공을 지닌 여인을 아군으로 만들어서 자신들의 호위로 쓰려는 듯 했다. 나는 나쁘지 않은 생각이라고 생각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소. 그럼 봅시다."

나는 포로들이 모인 곳으로 가서 백발의 백치여인을 따로 빼내었다. 그리고 그녀와 방에서 면담을 하며 우선 전신을 진맥해 보았다.

' 으음. 역시 건강에 이상이 없어. 강간을 당한 흔적도 없군. 그리고 내공이 봉인(封印)되어 있다라... 그 말이 사실이구나.'

가볍게 진맥했을 때는 몰랐지만 기를 불어넣어서 세심하게 살피자 확실히 그녀는 금제(禁制)를 당한 흔적이 있었다. 나는 그녀의 눈을 보았는데 죽은 물고기눈이었고 뭔 말을 해도 어린애처럼 대답할 뿐이었다.

나는 근맥과 단전을 자세히 살폈다. 잘 보니 근맥이 끊기지도 않았고 단전도 그자체로 멀쩡했다. 이런걸로 봐서는 아마 그녀에게 금제를 가한 자는 그녀를 성노(性奴)로 쓰기보다는 무언가의 계획에 쓰려고 놔둔 듯 했다. 필요할 때는 언제든 무공과 이지(理知)를 되살리려고 한 것이다.

다행히도 금제는 내가 알고 있는 것이었다.

금천제령대법(禁天制靈大法)이란 것으로 인간의 이지와 내공을 봉인할 수 있는 뛰어난 금제였지만, 화타의문에는 그 해혈법이 전수되는 것이다.

' 뭐, 근맥이 끊어지고 단전이 뭉개져도 화타의 비술이 있으면 치유가 가능하니까.'

나는 속으로 생각하며 그녀의 단전 쪽에 손을 갖다대었다. 그리고 봉인이 되어있는 혈(穴)을 차례대로 되짚으며 해혈(解穴)을 하기 시작했다. 천천히 그녀의 단전에 새겨져있던 금제를 풀기 시작하자, 백발의 여인이 몸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악... 으악... 악..."

내가 금제의 팔 할을 풀어가는 시점에서는 갑작스럽게 심후한 내공이 터져나오더니 그녀의 몸 주위에 기세가 일렁거렸다. 예상 외의 내공이었으므로 나는 흠칫하고 놀랐다. 왠만한 절정고수를 뛰어넘었기 때문이다.

' 뭐야? 이 정도라니...'

마지막으로 침을 꽂아서 모든 금제를 풀자, 그녀는 손발을 부들부들 떨면서 축 늘어졌다.

......

한참동안 침묵이 감돌았다. 그리고 반 식경 후, 백발의 여인은 서서히 고개를 들어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의자에 앉은 채로 자신의 몸을 살피더니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당신이 나를 구해준 건가요?"

맑은 목소리였다. 나는 해혈침을 뽑아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여긴 어딘가요? 저는 어디에 있는 거죠?"

"여기는 황해(黃海)에 있는 혈도단의 본거지요. 그리고 당신은 노예로 팔려온 채 몇 달째 지하뇌옥에서 기거하고 있었소."

"아아..."

그러더니 그녀는 한스러운 듯 고개를 돌리고는 눈물을 흘렸다. 자신의 슬픔을 주체하지 못하는지 어깨를 들썩이며 울었다. 그야말로 통한의 눈물이었기에 나는 소리없이 울고있는 그녀를 말릴수도 없었다.

한동안 격하게 울던 그녀는 평정을 되찾고는 말했다.

"저는 무영문(無影門)의 서문혜(西門慧)라고 합니다. 구해주셔서 감사해요, 소협."

"......!!"

나는 깜짝 놀라서 반문했다.

"무영문이라면 마도팔문(魔道八門) 아니오?"

"네, 세간에서는 그리 불립니다."

서문혜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으나 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무영문!

그것은 중원 사파의 정점에 있는 마도팔문 중에서도 무력(武力)으로써 정점에 있다고 알려져있는 문파였다. 무영문의 문주인 검마(劍魔) 서문대룡(西門大龍)은 명백히 마도팔마 최고의 무력을 지닌 초절정고수였으며 명실공히 천하제일인을 논할 때 먼저 언급되는 자였다.

심지어 이광조차도 검마는 기회가 되면 꼭 붙어보고싶은 고수라고 언급할 정도였다. 또한 마도팔문에서도 가장 소수정예로 운영되기로 유명했다. 그러나 무영문의 고수와 시비를 붙으려는 자는 중원천지에 그 누구도 없었다. 무영문은 한번 적수가 된 자들은 지옥 끝까지 따라가서 멸절시킨다는 악명으로 유명했기 때문이다.

"당신은 설마 무영문주 검마의 딸이오?"

서문혜는 눈물을 훔치고는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이런 곳에..."

"......"

그녀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것까지는 나를 아직 신뢰해서 털어놓을 상황이 아니라고 판단한 듯 했다. 하긴 저게 정상적인 태도인 것이다. 나는 그녀가 좀 더 진정될 때까지 기다린 후 말했다.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당신에게 금천제령대법을 가해서 팔아넘긴 자들은 모종의 이유로 당신을 써먹으려 했다는 것이오. 그 증거로 당신은 아직도 처녀지신(處女之身)이며 해적두목도 당신에게 손대지 못했소."

처녀지신이란 말에 서문혜의 얼굴이 화끈하고 붉어졌다.

"설마 보신 건가요?"

"나는 의원이오. 기혈의 흐름으로 보지 않아도 진맥으로 알 수 있소."

"아 그, 그렇군요."

나는 무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백치일 때의 일이 기억나오?"

"저를 도와주려고 했던 언니들이 기억나요. 그 동안의 일이 어렴풋한 꿈처럼 떠오르긴 해요."

"그렇소. 당신을 구해주라고 한 것은 다름아닌 그 여인들이오. 나는 그녀들이 이야기하지 않았다면 당신을 그냥 내버려뒀을지도 모르오."

"아..."

"당신은 하루라도 빨리 무영문으로 돌아가고 싶겠지만, 그녀들은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처지에 놓인 사람들이오. 심지어 당신은 그녀들에게 도움을 받았지."

내 말뜻을 알아들은 서문혜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에요.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그녀들을 돕겠어요."

"어떻게 도울 생각이오?"

"무영문에 데려가고 싶어요."

아마도 본가에 돌아가도 좋지 않은 대접을 받을 여인들을 모아서 무영문에서 제 2의 삶을 살게 해 줄 생각인 듯 했다. 나는 의외라서 반문했다.

"그래도 괜찮겠소?"

"물론이에요."

나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우리는 해적을 토벌했고 이제 곧 개경으로 떠날 것이오. 당신은 개경에 들른 후 중원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니, 그 때는 초심을 잃지 않고 결심한 바를 행하기 바라겠소."

"자, 잠시만요. 소협의 이름은 무엇인가요?"

"나는 백웅이라고 하오."

그녀는 우물쭈물하다가 말했다.

"소협은 제가 어찌하여 이런 처지가 되었는지 궁금하지 않으신지요?"

"물론 궁금하오."

나는 근처에 놓아두었던 침구와 도구를 챙기며 말을 이었다.

"허나 본인이 말하지 않는 이상 캐어묻는 건 도리가 아니지 않소?"

"......"

"그럼 가 보겠소."

나는 함내에 서문혜를 남겨두고, 해야할 일을 빠르게 진행하기 시작했다.

먼저 섬 북쪽에 있다는 화약의 정보를 안현 부관에게 말했다. 안현 부관은 그 곳으로 병사들을 옮겨서 화약을 옮겨싣기 시작했고, 그걸로써 사람들의 이목은 내게서 잠시 벗어났다. 그 후 나는 해적두목의 비밀공간으로 가서 최대한 값진 보물과 귀금속류를 상자에 옮겨담았고, 그걸 배의 가장 은밀한 공간으로 옮겨 놓았다.

그리고는 정보 중에서 들었던 해적간부 비장의 명도를 찾으러 갔다. 돌벽 사이에 숨겨진 공간을 밀고 들어가자, 그 곳에는 과연 찬연한 빛을 내뿜는 도(刀)가 한 자루 있었다. 명도라는 말은 진짜인지 나는 늠름한 도신을 한동안 넋을 잃고 살펴보았다.

"이건 왜도(倭刀)로군."

칼집을 보자 촌정(村正)이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동영 땅에서 만들어진 명도인 듯 했다. 내가 넋을 잃을 정도로 굉장한 솜씨로 만들어진 물건이라, 여태껏 보았던 그 어떤 무기보다도 일품이라고 할 수 있었다. 내 전공이 도법이 아니라는 게 아쉬울 정도였다. 물론 내 실력이면 이걸 잘 쓸 수 있으나, 제대로 된 도객이 쓸 경우에는 몇 배나 되는 위력을 발휘할 것이다.

나는 명도를 챙긴 후 함선으로 돌아왔다. 함선에서는 서문혜가 그 위치에 조용히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다.

"하시는 일은 다 되셨나요?"

"물론이오. 아마 곧 출발할 터이니 당신도 가서 기다리시오."

"저기...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뭐요?"

내 반문에 서문혜가 말했다.

"제가 여기에 오게 된 경위입니다."

"흐음."

나는 속으로 잘 되었다고 생각했다. 사실 아까 억지로 들으려 했으면 서문혜는 절대 이야기를 해주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자신을 구해줬다지만 낯선 자에 대한 경계심이 강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일을 처리하고 돌아오는 동안 서문혜는 생각을 정리한 듯 했으며, 이 자리에서 나를 유일하게 믿을만한 존재로 판단하고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다.

서문혜가 말했다.

"사실 저는 무명(武名)을 드날릴 생각으로 한 무술대회에 참여한 적이 있습니다."

"무술대회?"

"네. 소협께선 잘 모르시겠지만 암경무투회(暗境武鬪會)라고 하는 것입니다."

"......!!"

나는 놀랐다.

설마 이런 곳에서 그 이름을 들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잘 알고 있소."

"네?"

"엄청난 영약, 보물, 비급을 얻을 수 있는 낙양의 무투회..."

모를 리가 없다.

나는 거기에 참여했다가 죽을 뻔 했던 것이다. 겨우 한씨세가의 도움을 빌려서 살아났으나 여전히 내게는 버거운 장소로 각인되어 있었다.

"알고계셨군요..."

"설마 소저는 거기에 참여한 것이오?"

서문혜는 민망한지 얼굴을 돌렸다.

"네. 그리고 4회전에서 패배했습니다. 이후에는 금제를 당해서 여기까지 온 것 같군요..."

자업자득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하지만 마도팔문 최강인 무영문의 영애가 그런 어둠의 대회에 참여하는데는 그만한 개인적인 사정이 있었을 것이다. 나는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생각이 정리되자 말을 했다.

"원래 근맥을 자르고 단전을 폐한다고 알고 있었는데, 대회주최측에서는 금천제령대법을 어지간히도 신뢰했던 모양이군. 또한 당신의 무공을 살려두어야 할 이유가 있었을지도 모르고."

몸까지 건드리지 않은 걸 보면 분명히 특수한 목적이 있다.

물론 당사자가 그걸 알 리는 없으니 앞으로 유추해야 하는 일이다.

"다시 한 번 소협께 감사드립니다."

구우우

배가 크게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자세한 이야기는 천천히 듣도록 합시다."

"네."

나는 내 선실로 돌아가면서 생각했다.

' 해신족의 도시는 위치를 알았으니 다음에 오자.'

해신족이라는 건 십이율조차도 경계하고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마(魔)의 일족이었다. 하물며 해저에 있다면 나 혼자서 헤엄쳐서 들어갈 수밖에 없는데, 혼자서 해신족과 싸우는 건 무모하기 그지없는 짓이었다. 게다가 이번 생에는 청룡무관에 들어가겠다는 목적이 있으므로 더더욱 섣불리 죽을 수 없는 것이다.

개경으로 향하는 상단 배와 재합류한 것은 개경에서 하루 거리의 근해(近海)에서였다. 대룡상회주와 서궁표국주는 안현 부관에게 그 동안 있었던 일을 전해듣고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리고 전과로 가져온 해적들의 목을 보자 감탄했다.

"과연 명장이십니다!"

"이로써 한결 상행이 안전해지겠군요."

"껄껄..."

그들의 이야기가 끝난 후 나는 서궁표국주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슬며시 물었다.

"국주님."

"아, 자네는 정말 대단한 소영웅일세. 우리 표국의 대표두가 되어주지 않겠나?"

"하하..."

나는 쓴웃음을 짓고는 말했다.

"그 전에 하나 여쭙고 싶은게 있는데, 혹시 이런 그릇을 보시지 못했습니까?"

"어떤 그릇?"

"이렇게 생긴..."

나는 그림을 그려서 서궁표국주에게 보여주었다. 눈을 게슴츠레 뜨던 서궁표국주가 고개를 저었다.

"못본 것 같네. 그게 뭔데 그러나?"

"제 고려의 지인이 간절하게 찾는 물건이라 꼭 가져다주고 싶어서요. 서역에서 들어온 귀한 물건이라고 해서."

내가 어물쩡 넘겨버리자 서궁표국주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나는 정말 모르네. 적어도 우리 표행의 표물에서는 서역 물건을 취급하지 않아. 그런 게 있다면 아마 대룡상회주가 알고 있을 것일세."

나는 다음으로 대룡상회주를 찾아갔다. 대룡상회주 또한 만면에 웃음을 띄우며 나를 반갑게 맞이했다.

"오오! 자네의 활약은 잘 전해들었네. 우리 상회에 오지 않겠나? 2인자의 대우를 약속하지."

"하하하... 그 전에 하나 여쭙고 싶은게."

"뭐지?"

"이런 그릇을 보신 적 있습니까?"

내가 그릇의 그림을 보여주자 대룡상회주는 궁금한 듯 반문했다.

"그건 그릇이 아니라 천축보다 머나먼 서역이방에서 온 물건일세. 비등(肥燈)이라고 하는 것이고, 길쭉한 입을 가지고 있지. 불을 붙여 향을 피우거나 외부를 밝힐 때 쓰는 물건이지. 연기가 잘 나와."

"비등이라고요."

"그건 왜 찾나?"

"고려의 지인이 꼭 가지고 싶다고 해서요."

"뭐 그다지 귀중품은 아니니 원하면 줄 수도 있네. 같이 가 봅세."

나는 대룡상회주와 함께 상행의 교역물을 실은 창고로 내려갔다. 그리고 창고열쇠로 문을 연 상회주는 구석 한켠에 있던 왠 상자를 꺼냈는데, 거기에는 비등이라고 하는 등이 무려 열 개 이상 들어가 있었다. 대룡상회주가 껄껄 웃었다.

"가지고 싶으면 가져 가게. 이 정도야 뭐..."

"서역에서 온 물건인데 귀중품이 아니란 말입니까?"

"그야 고려 개경에는 직접 서역의 상인들이 와서 이런 걸 거래할 때가 많기 때문일세. 하물며 귀중품도 아니고 그냥 일용품이지 않은가? 별 수 없는 거지."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나는 대룡상회주에게서 비등 상자를 받아들고 내 방으로 돌아왔다. 방으로 돌아와서 비등을 바닥에 늘어놓고는 골똘히 고민을 거듭했다.

' 뭐지? 이 중에 해신족이 간절하게 노리는 물건이 있단 말인가?'

여기서 막혀버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대룡상회주의 말대로 이 비등은 그냥 일용품으로 쓰이는 물건일텐데 어떻게 분간해야할지 모르겠다. 나는 한참을 노려보던 중, 비등 중 하나가 유독 황금빛을 번득인다는 걸 알아챘다.

"설마 이게..."

잘 보니 뭔가 수상쩍은 언어가 황금비등의 옆면에 적혀 있다. 다른 비등에는 글자가 적혀있지 않았다. 나는 그 황금 비등을 집어들고 이리저리 살폈다. 그리고 비등의 본래 쓰임새에 맞게 한번 불을 붙여 보았다.

스아아아 - !!

"......!!!"

이것은 무엇인가?!

나는 그 순간 정체를 알 수 없는 풍경이 내 머릿속에 들어오는 걸 알아차렸다.

내 시점은 엄청난 속도로 이동하더니, 갑자기 엄청나게 높은 천공(天空)에 떠올라 있었다. 그 시점은 갑작스럽게 해면(海面) 어딘가로 돌진하더니 깊은 심해(深海)로 향하기 시작했다. 어둠의 바다 속을 뚫어 가다보니 빛과 함께 왠 도시가 보였다. 그 도시의 모습은 해적두목에게 들었던 어인들의 해저도시의 묘사와 거의 일치했다.

시선은 도시 안쪽을 훑기 시작했다. 곳곳에는 괴이쩍은 양식을 한 건물들이 서 있었고 삼지창이나 칼을 들고 있는 어인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어인들은 꿰륵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퉁방울같은 눈을 가끔씩 떨고 있었다.

좀 더 안쪽으로 들어가자, 그곳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거대한 심연이 펼쳐져 있었고,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거대한 '무언가'가 해저도시보다 더욱 깊은 장소에 앉아 있었다. 인간형을 하고 있으나 당연히 어인이었다. 나는 그 존재감에 압도되었고 순간적으로 외경심과 공포심을 동시에 느꼈다.

저것이 해신(海神)인가?

시점은 거기서 더욱 벗어났고 다시 엄청난 속도로 이동했다. 한참동안 이동하던 시점은 어딘가에서 멈춰섰다.

그 곳 또한 도시였다.

그러나 어인들의 도시 이상으로, 역사상 그 어떤 인간이나 문명도 비슷한 걸 찾을 수조차 없을 정도의 괴이쩍은 도시였다. 거대한 바다에 가라앉아있는 그 도시에는 말도 안되는 흉흉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으며, 나는 간접적으로 보고있는 것 뿐인데도 그 흉흉함에 심장이 떨리는 것 같았다.

무엇인가.

저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어인같은 건 돌아다니지 않는다. 그러나 시선이 그 입구에까지 도달하고, 그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 나는 [거대한 존재]들이 이 도시의 심연에 잠들어 있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마치 이자나기노미코토를 마주했을 때 느꼈던 것같은 어마어마한 마(魔)의 기척이 10개체도 넘게 느껴지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인지(人知)를 훨씬 뛰어넘는 강대한 마력이었다.

울부짖는다.

심연속에서 마신(魔神)들이 잠들어 있는 게 느껴졌다. 나는 도저히 맨정신으로는 저 도시에 들어갈 수 없을 것 같았다.

시점은 또 다시 이동되었다. 잠시 동안 정적의 어둠이 이어지더니, 나는 알 수 없는 곳에 이르러 있었다. 몽천(夢天)을 떠도는 것처럼 이상한 곳이다. 꿈과 악몽이 뒤섞인 것 같은 곳이었다.

거대한 대륙이 있고, 대륙 한가운데에는 거대한 호수인지 바다인지 모를 지형이 보였다. 그리고 달이 매우 가깝게 느껴졌다. 여기저기에는 내가 보았었던 이계(異界)의 이족(異族)들이 살아가는 게 보였다. 생전 처음 보는 놈들도 있었는데 거대벌레, 산양, 개머리 두상을 한 인간 등등이었다.

거기까지 보았을 때 알 수 없는 속삭임이 들려 왔다.

[ 가겠는가?]

아냐!

지금은 아냐!

나는 필사적으로 거부했다. 그러자 속삭임이 다시 말했다.

[ 알겠다...]

".......!!"

나는 다시 현실의 시점으로 돌아왔다. 내 몸은 땀에 젖어서 축축해져 있었다. 형언할 수 없는 심해의 도시와 이계(異界)를 보고 오자 정신력이 고갈될 것만 같았다. 이 세상에 그런 곳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믿을 수 없었다. 원래라면 미쳐버려야 정상이겠으나 나는 그저 헛기침을 한 번 하고 끝냈다.

나는 황금 비등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렇군. 이건 그런 물건이었어."

이족(異族)이나 사신(邪神)의 영토를 천리안으로 보여 주고, 나아가서는 그 곳으로 순간이동 할 수도 있는 것! 이계와 관련된 엄청난 마도구(魔道具)였기에 해신족이 손에 넣으려고 했던 것이고 지금 내가 손에 얻게 된 것이다.

============================ 작품 후기 ============================

선작 추천 코멘트 부탁드려요!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