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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천향(暗天鄕)
해적들의 뜻은 한마음인 것 같았다. 그들 입장에서는 승산도 없는 수군과의 싸움에 부딪히느니 대장들의 목을 바쳐서 살아남는 게 훨씬 유리한 것이다. 한 순간에 배신이 일어나자 나는 낄낄댔다.
"으하하. 외통수인가."
"으으... 웃기지 마라!!"
푸콰악
갑자기 해적두목들의 옷이 크게 뜯겨져 나갔고, 안에 있던 몸이 팽창했다. 그리고 예전에 보았던 물고기 괴물의 모습이 배 위에 나타났다. 몸뚱이가 일 장은 될 정도로 거대해졌는데 이미 인간이라고 볼 수가 없었다.
[ 끄륵... 끄르륵...]
콰앙!
"으아아악."
해적두목들이 칼을 내려치자 폭음과 함께 옆에 있던 해적 몇 놈의 몸뚱이가 갈기갈기 찢겨나갔다. 아무래도 저 상태는 강력한 힘을 주는 대신에 이성을 잃어버리는 효과가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정보를 캐낼 놈들이 다 죽어서는 곤란했으므로 앞으로 뛰어들었다.
"저리 비켜!!"
뇌명(雷鳴)
내 몸에 번개가 끓어올랐다. 그리고 비할 수 없이 빨라진 몸뚱이가 환상처럼 해적두목의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한 놈의 몸에는 만승검결(萬乘劍決)의 참결(斬決)이, 다른 한 놈의 몸에는 천뢰무극창(天雷無極槍)의 초식이 내려꽂혔다. 잠시 후 폭음과 함께 놈들의 몸뚱이가 조각조각나서 터졌다.
푸콰콰콱
푸슈 -
어인 특유의 비린내나는 피가 잘려나간 몸뚱이에서 거세게 뿜어져 나왔다. 살아남은 해적들은 기겁을 하며 뒤로 물러섰다. 나머지 한 놈이 내게 덤벼들며 기음을 내질렀다.
[ 끼이이 - !!]
뇌영보(雷影步) 천주살이 펼쳐졌다. 나는 어인이 된 해적두목의 공격을 능란하게 피해내고는 먼저 왼쪽 팔을 잘라 버렸다. 팔 하나가 잘려서 치솟자 놈은 고통 때문에 꿈틀거렸고, 나는 그대로 내공을 담은 발차기로 오른쪽 다리를 부숴 버렸다.
바로 죽일 수도 있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럴 생각이었으면 처음부터 무차별학살을 했을 것이다.
[ 크아아아!]
해적두목이 주저앉았다. 그리고 폭주상태의 효과가 다 떨어졌는지 몸뚱이가 서서히 쪼그라들어서 인간 크기로 돌아왔고, 놈은 불안한 듯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고통을 추스렸다. 그리고 내가 일부러 목숨을 살려뒀다는 걸 알아차린 듯 말했다.
"워... 원하는 게 뭐냐?"
"네가 알고 있는 거 전부!"
"그러면 살려줄 거냐?"
"살려주지. 내가 처음부터 말했을 텐데 뭘 듣고 있었던 거냐?"
해적두목은 불안한 눈으로 내 뒤편에 서 있는 혈도단 해적들을 바라보았다.
"저 놈들에게서도 살려다오."
"그렇게 하지. 그러니까 당장 말해."
나는 시퍼런 살기를 눈에 띄웠다.
"네놈들의 본거지와, 그 모습이 된 경위 전부를."
"알았다... 전부 말하겠다."
해적두목은 우물쭈물하면서 한 식경동안 내가 궁금해하던 걸 말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 있다가 어이가 없어서 반문했다.
"뭐라고?"
"정말이다."
나는 황당해서 머리를 긁었다.
"정말로 해저(海低)에 어인들의 도시가 있다는 말이냐?"
해적두목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옆에서 같이 듣고 있던 해적들도 웅성거렸다.
해적두목 왈, 그들 셋이 노략질을 하고 있다가 어느 날 어인족의 방문을 받았다. 자신들을 해신의 일족이라고 밝힌 그 어인족들은 강한 힘을 줄 것을 약속하는 대신 자신들을 위해 일해줄 것을 요구했다. 해적두목들은 이후 어인족의 육체를 받아서 온갖 노략질에서 불패신화를 쌓아왔고, 뿐만 아니라 간간히 어인족들의 도움을 받아서 항해를 매우 수월하게 할 수 있었으며, 심지어는 해상의 천재지변도 미리 피해갈 수 있었다.
그리고 후천적으로 어인이 된 해적두목들은 해저에 있는 어인의 도시에 가서 간간히 근황을 보고하거나 지식을 전수받는다는 이야기였다.
"해저도시는 어디쯤 있지?"
"우리 본거지 옆에 있는 정무(精貿) 지역의 섬 아래에 있다..."
"바로 밑인가?"
"북서쪽을 찾아보면 있다..."
나는 재차 물었다.
"좋다. 그러면 네놈들이 이번에 수군이 있는데도 습격을 한 이유는 뭐지?"
"그건... 해신의 일족이 명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놈들이 직접 명령을 내렸다고?"
"그렇다... 이번 상행에 포함된 것들 중에는 해신족에게 꼭 필요한 물건이 있다고 했다."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이건 정말로 중요한 정보일 것 같았기 때문이다.
"꼭 필요한 물건? 그게 뭐지?"
"서역(西域)에서 우연히 수입된 것... 기묘한 모양을 하고있는 그릇이었다."
"그릇이 어떻게 생겼지? 이봐, 쓸 것을 가져 와."
내가 옆에 있던 해적에게 명령을 내리자 한 놈이 안으로 뛰어들어가서 종이와 붓 먹을 가지고 왔다. 해적두목이 붓을 쥐고 움직이는 동안 나는 놈의 상태를 살펴보았다. 신기하게도 팔이 잘리고 다리가 부숴지면 원래라면 출혈과다로 죽어야 정상일텐데, 놈의 상처는 벌써 아물고 있었다.
이윽고 그림이 완성되자 나는 형태를 기억했다. 확실히 내가 태어나서 처음보는 기묘한 그릇이었다. 나는 그릇의 그림을 자세히 보다가 물었다.
"이 그릇을 왜 필요로 하는거지?"
"나도 모른다..."
"흐음. 잘 알았다."
퍼벅
나는 그대로 창을 휘둘러서 해적두목의 목을 베어 버렸다. 워낙 빠르고 깔끔하게 베어서 고통도 못 느꼈을 것이다. 어차피 이 놈은 이러든저러든 죽을 운명이었으므로 그냥 편하게 죽여주기로 한 것이다.
이게 내 정보의 댓가였다.
나는 나머지 해적들에게 말했다.
"백기를 올려라."
"네."
쏴아
나는 잠시 후 해적선에 백기를 올리고 아군 측으로 되돌아갔다. 개선한 나를 본 안현 부관이 놀라워했다.
"정말로 혼자서 대장선을 제압한 건가? 대단한 무공이야!"
"별 말씀을... 그보다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만."
"무엇이오?"
"단 둘이 얘기하고 싶습니다."
"알았소."
안현 부관은 밑의 부하들에게 전후처리를 맡긴 후 자신의 집무실로 갔다. 그리고 내가 둘만 있는 자리에서 해적두목 셋의 수급을 보자기에서 꺼내서 보여주자, 안현 부관이 인상을 찌푸렸다.
"이게 뭔가? 이 무슨 괴물이지?"
"해적 두목들입니다."
"뭐라고...!!"
"투항해 온 혈도단 간부들에게 대질시켜보면 제 말이 맞다는 걸 확신하실 수 있을 겁니다. 이 놈들이 바로 혈도단을 이끈 두목들입니다."
"허허..."
이윽고 확인을 위해 해적 한 놈이 끌려와서 맞다고 증언하고 밖으로 나갔다. 내 말이 사실이라는 걸 알게 된 안현 부관이 탈력한 듯 의자에 몸을 뉘이며 말했다.
"알았으니 일단 그 목을 넣어두시오. 비린내가 심하군."
"네."
선실의 창문을 열어서 환기를 시키던 안현 부관이 말했다.
"세상에 어찌 이런 괴물이 있을 수 있단 말이지?"
"안 부관님. 놈들의 본거지를 토벌해야 합니다.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있습니다."
"......"
그는 망설이는 기색이었다. 피해 하나없이 승리를 거두는데는 성공했지만, 갑자기 해적의 본거지까지 토벌하는 건 그의 예상에 없었기 때문이리라. 나는 그를 연속으로 설득하기로 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놈들의 본거지를 치지 않으면 혈도단은 계속 부활할 겁니다. 상단들의 피해도 이어질 거고요. 그런 귀찮은 일이 생기기 전에 큰 전공을 세우는 편이 좋지 않겠습니까?"
안현 부관은 '전공'이라는 단어에 귀가 트인 듯 했다.
"그렇겠군... 좋소, 토벌하러 갑시다."
나는 안현 부관에게 해적두목에게 들었던 본거지 위치를 상세하게 알려줬다. 안현 부관은 해도를 펼치고는 그 위치가 어딘지 곧바로 알아낸 듯 했다. 그리고 해적 본거지가 되는 해적섬으로 토벌을 하러 나아갔다.
해적섬에 도착한 것은 채 한나절이 되지 않아서였다. 수군은 해적섬 근처에 오자마자 홍이포를 쏘아서 개전(開戰)을 알렸다.
콰과과광!!
해적섬에 있던 해적들이 우왕좌왕댔으나, 이윽고 나를 포함한 수군들이 상륙해서 해적들을 쓸어버리기 시작했다. 남아있던 해적들은 약 100여명이었으나 전부 제압되는데는 반 시진도 걸리지 않았다.
해적섬의 제압이 싱겁게 끝나버리자 안현 부관이 해안가로 걸어나와서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준엄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전원 참수(斬首)하라."
퍼억
퍼억
모래사장에서 차례로 해적들의 모가지가 떨어져 나갔다. 모래사장은 참수를 하기 좋은 장소였으므로 일부러 여기를 고른 듯 했다. 연속 참수가 끝나자 안현 부관은 부하들을 통솔해서 해적섬을 추가로 탐색했는데, 여기저기에 건물이 숨겨져 있었고 거기에는 잡아온 노예와 여자들이 있었다.
노예와 여자들의 상태는 참혹했다. 남자노예들은 극심하게 혹사당했는지 다들 죽기 직전이었고 몇몇은 해적들의 화풀이때문에 장애인이 되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여자들은 해적들에게 윤간당한 게 여실했으며 임신한 여인들도 많았다.
더 참혹한 것은 해적들의 방 곳곳에 노예를 심심풀이로 죽인 '전리품'이 보인다는 것이었다. 고문을 해서 죽인 흔적도 대단히 많았다. 해적들이 인간을 잔인하게 대한다는 이야기는 사실이었던 것이다.
그 참상을 자기 눈으로 확인하던 안현 부관이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소협 말대로 하기를 잘 했군. 이 놈들은 살아있을 가치가 없구려."
"으음..."
"여봐라! 포로로 잡은 혈도단 간부들을 끌고 와라."
안현 부관의 명령이 떨어지자 수군 병사들이 혈도단 간부들을 꽁꽁 묶어서 데려왔다. 놈들은 목숨만은 건질 줄 알았는데 어찌된 일인지 모르는 기색이었다. 그들을 차가운 눈으로 내려다보던 안현 부관이 명령했다.
"본인은 오호도독부 좌군도독부의 책임자이신 장경익 장군의 전권을 위임받은 몸이다. 그러므로 전시(戰時)에 나는 좌군도독부의 허가를 받지 않고 형(刑)을 집행할 수 있다. 판관의 허(許) 또한 필요 없다. 이 끔찍한 참극에 대하여 내 개인의 양심에 따라 행동하겠다."
해적 간부들이 불안에 떨며 외쳤다.
"나으리! 무슨 말씀이십니까요?"
"여봐라."
이어진 안현 부관의 말에 해적들이 공포에 미쳐날뛰었다.
"이 놈들에게 능지형(凌遲刑)을 집행하라."
"으아아아아아!!"
"안돼!!"
몇몇은 혀를 깨물고 그 자리에서 고꾸라져서 자진했다. 혀를 깨무는 건 보통 각오로는 안되는 일이었으나 그들이 서슴없이 결단할 정도로 능지형은 잔인한 처형방법이었다.
먼저 수군 병사들이 배 안에 있던 십자가 모양의 형틀을 가지고 왔다. 그리고 숫자가 부족하자, 임시로 나무를 베어와서 형틀을 만들어서 혈도단 간부들을 거기에 묶었다.
그리고는 왠 흰 가루를 들고 와서 놈들의 입에 털어넣었다. 나는 의아해서 안현 부관에게 물었다.
"저게 뭡니까?"
"아편이오."
"......!!"
"능지형의 핵심은 최대한 오래 살아있어야 한다는 것이니까."
무덤덤하게 안현 부관이 대답하는 동안에도 능지형 준비는 계속되었다. 이윽고 혈도단 간부들이 더 이상 혀를 깨물지 못하도록 입에 재갈을 단단히 물렸다. 놈들의 눈이 아편때문에 점차 맛이 가기 시작하자 능지형이 시작되었다.
스각
스가각...
면도칼처럼 생긴 얇은 도검을 든 수군 병사들이 표정변화 없이 천천히 살을 발라내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회를 뜨는 듯한 형상이었으며, 혈도단 간부들은 다량의 아편덕에 당장 큰 고통을 느끼지 못하면서도 자신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아챈 듯 했다. 놈들이 두눈을 부릅뜨며 바둥바둥대는 동안에도 형은 계속 되었다.
안현 부관이 말했다.
"손가락이나 발가락같은 덜 치명적인 말단에서 시작하는 게 기본이지."
푸슈슈슉
더러 피가 흘러나왔으나 그 때마다 무언가 약물을 써서 지혈을 했다. 그리고 피가 한땀한땀 맺히는 동안에 살덩이가 마치 머리카락 떨어지듯 발려서 땅에 떨어졌다. 손가락과 발가락이 서서히 깎여나가는 동안에 혈도단 간부들의 표정은 미치기 일보직전이 되어 있었다.
움직일수도 없는데 서서히 물고기처럼 회쳐져서 죽는다는 것.
상상도 할 수 없는 공포감을 가져다 줄 것이다.
"온몸의 근육을 발라낸 다음, 관절 등을 부수는 것이오."
"그 전에 죽지 않습니까?"
"그래서 아편을 먹여서 최대한 살려두는 거지."
나는 곧 안현 부관에게서 능지형에 대한 자세한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능지형이란 죄인의 살을 산 채로 회뜨는 형벌로, 말 그대로 뼈와 살을 분리시키는 것이었다. 송 때는 살을 뼈에서 발라낸다는 의미의 과형(?刑)이라는 이름으로 불렸으며, 명의 형법의 기준이 된 법전인 대명률에서는 능지처사(凌遲處死)라고 적혀 있었다. 원래 자의적으로 시행할 수는 없을 정도로 잔인한 형벌이지만 안현 부관은 장군의 전권을 위임받았으므로 충분히 가능했다.
별칭으로 백각형(百刻刑), 또는 살천도(殺千刀)라고 하는데, 이는 백 번, 천 번 칼질하여 죽이는 형벌이란 뜻이다. 과거 유근(劉瑾)이라는 환관이 매관매직과 부정축재를 일삼으며 권력을 휘두르다가 능지형에 처해졌는데 무려 6천 번이나 되는 칼질이 가해졌다고 한다.
다음 날 찾아와 보니 혈도단 간부 중 반수 이상이 사망해 있었다. 그러나 죽었든 말았든간에 무덤덤하게 생살과 근육을 발라내는 수군병사들의 모습은 공포스럽기까지 했다. 개중 한두 명은 흉곽을 발라서 가슴뼈를 드러내고 있었는데, 수군병사 중 한 명이 낄낄대며 그 뼈를 사망한 혈도단 간부의 눈두덩이에 쑤셨다.
그 병사가 나를 발견하더니 말했다.
"아! 죄송합니다. 이르지 말아 주십시오."
"근데 아편을 먹여서 죽이면 별로 고통을 안 느끼지 않나?"
수군병사가 씨익 웃었다.
"그렇지도 않다고 합니다. 능지형에 걸려서 200번의 칼질을 당했지만 도중에 풀려난 사람이 있었다던데, 아편의 효과가 간헐적으로 끊기면서 전신을 벌레가 파먹는 고통이 찾아온다더군요. 이 놈들도 뒈지기 전에는 너무 아파서 가끔 심장같은 걸 토하더라고요."
"......"
나는 태연하게 얘기하는 수군병사의 모습에 기가 질렸다. 그가 이런 일을 많이 해 보았음을 짐작했기 때문이다.
능지형은 3일째 아침에 모두 완료되었다. 능지형이 끝난 후 혈도단 간부들의 몸은 말 그대로 뼈만 남아 있었다. 뼈만 남은 토막난 몸통은 처형 직전에 입고 있었던 옷을 놓은 대바구니에 담겨 장대끝에 내장과 머리와 함께 걸렸다.
혈도단 토벌이 끝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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