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검신-104화 (104/1,615)

0104 ----------------------------------------------

암천향(暗天鄕)

출발 당일에 나는 상선이 아니라 군선에 타기로 했다. 왜냐하면 예전처럼 해적들이 화시나 화살을 쏘며 접근할 경우 손쉽게 적과 맞서싸울 수 있었기 때문이며, 배 자체의 속도도 빨랐기 때문이다. 서궁표국주의 허락을 미리 받아놓아서 가능한 일이었다.

"반갑소. 나는 장군 밑에서 일하고 있는 부관 안현(鞍玄)이라고 하오."

그가 나이어린 내게 애취급을 하지 않고 적당히 평대를 하는 이유는 아마 장경익 장군이 보였던 수상쩍은 태도와 연관이 있는듯 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백웅이라고 합니다."

안현은 장경익 장군 밑에서 천인대를 통솔하는 수군의 부관인 듯 했다. 그는 긴 장검을 빗겨찬 강직한 인상의 무관이었다. 낮아보였으나 3척이나 되는 수군호위함의 통솔을 맡고 있을 정도이므로 상당히 높은 무관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는 나를 묘한 눈으로 바라보더니 말했다.

"백웅 당신이 강호의 기인이라 이번에 해적이 습격할거라 생각한다 들었는데."

"그럴지도 모릅니다."

"하하, 걱정도 많군. 군선이 세 척이나 따라가는데 별 일이야 생기겠소? 상선과 군선은 차원이 다르오. 이 일대에서 가장 위세가 흉흉한 혈도단이라도 해도 제정신이라면 덤비지 못하겠지."

껄껄 웃는 안현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세 척의 수군 군선에 타는 병사의 숫자만 해도 수백 명이었다. 해적들도 눈이 있을 텐데 이런 호위를 보고도 덤벼오는 게 미친 이야기였다.

물론 덤벼들지 않는다면 또 그것대로 좋은 일이다. 나는 안현의 말에 굳이 토를 달지 않고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믿고 있습니다."

"편히 쉬고 계시오. 아무 일 없이 고려 개경에 도착할 테니."

나는 나를 위해 마련된 군선의 방에서 조용히 휴식을 취했다. 배에 타기 전에 이미 대장장이에게 부탁해서 창과 검을 숫돌로 한 차례 갈아둔 상태였다. 조용해 보였으나 내 전투상태는 이미 만전이었다.

상식적이라면 군선이 호위하는데도 해적이 덤빌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해적 혈도단의 배후에 해신의 일족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되려 자신들의 전투력을 증명하려고 정규 수군에게 덤벼들 가능성도 있었다. 나는 그걸 알고 있기에 긴장의 끈을 놓지 않으며 대기했다.

그렇게 약 나흘이 지났다. 갑자기 위에서 수군 병사 하나가 급히 뛰어내려와서 내 방문을 열고는 말했다.

"죄송합니다. 서둘러 와 주십시오. 급합니다."

"안현 부관께서 부르십니까?"

"그렇습니다. 절 따라 오십시오."

나는 병사를 따라서 갑판 근처로 나아갔다. 갑판에는 이미 안현 부관을 비롯해 여러 명의 무장(武將)들이 나와 있었다. 안현 부관은 팔짱을 낀채 저너머를 바라보다가 내가 온 걸 알아채고는 말했다.

"오, 왔소? 정말 당신 말대로 되었구려."

"해적입니까?"

"그렇소. 혈도단 놈들, 그것도 여덟 척이나 되는군."

여덟 척!!

예전에 내가 마주쳤던 규모보다 훨씬 컸다. 나는 혹시나 해서 물었다.

"놈들이 정말로 정규수군에 덤비려 한다는 겁니까?"

안현 부관이 어이가 없는지 툴툴 웃었다.

"그렇게 되겠군. 얼마나 우리가 얕보였으면..."

내가 수평선 쪽을 보자, 여기저기에서 혈도단의 해적선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쪽의 상단 배는 3척이었고 군선이 3척이라서 숫자에서는 꽤 뒤져보였다. 게다가 상단의 배에 자체적인 전투력이 거의 없다는 걸 생각하면 더 딸릴수도 있는 것이다.

"배의 숫자가 적어서 불리하지 않을까요?"

"흐흐. 보기나 하시오."

안현 부관이 불길한 웃음을 흘렸다.

"일개 해적과 수군의 힘 차이가 얼마나 큰지를."

그렇게 말한 안현 부관이 무장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홍이포(紅夷砲) 개문(開門) 허가한다. 즉시 적선(敵船)에 발포하라."

"네!!"

철컹!!

잠시 후 세 척의 수군 배가 우현으로 꺾으며 배 아래쪽에서 서서히 철로 된 것이 아가리를 내었다. 나는 그게 뭔가 싶었는데, 해적들의 배가 칠십 장 이내까지 접근하자 거대한 폭음이 울렸다.

무장들이 깃발을 휘두르며 외쳤다.

"발사!"

꽈과과광!!

장중한 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뿜어져 나갔다. 그리고 혈도단의 배는 갑자기 큰 구멍이 나며 충격파와 함께 터져 나갔다. 해적들이 비명을 지르며 바다로 튕겨져 나갔고, 몇몇은 이쪽으로 헤엄쳐 왔다. 안현 부관은 그것까지 확인한 후 싸늘하게 말했다.

"화살을 쏴라. 한 놈도 놓치지 마라."

쐐쇄쇄쇄

푸욱 푸욱

배가 침몰하며 해적들이 물에 뛰어들자 수군선에서 발사된 강전(剛箭)이 인간의 육체를 꿰뚫었다. 해적들은 살려달라고 아우성쳤으나 자비따위는 없었다. 몇몇은 살려주거나 망망대해에 내버려둘 법도 했건만 유독 잔인한 모습이었다.

' 화가 났군.'

숫자를 믿고 해적이 덤벼왔다는 사실에 안현 부관이 분노한 모양이었다. 이런 일은 해상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었는데, 수군선에서 홍이포라는 게 격발될 때마다 해적선은 손도 발도 쓰지 못하고 그대로 침몰당하고 말았다. 게다가 마무리로 강전이 발사되어서 적들을 해치우니 그보다 압도적일 수 없었다.

꽈과광

꽈광

해전(海戰)이 시작된지는 고작해야 한 식경에 불과했으나 이미 전세는 확연히 기울어 있었다. 수군선 세 척은 물론 상단 배에도 피해가 전무했고 해적선은 이미 4척이나 침몰한 상황이었다. 이토록 압도적인 전황이 가능한 이유는 전적으로 수군에서 발사하는 홍이포의 사거리가 화살의 사거리보다 훨씬 긴 데다가, 해적선이 홍이포에 격중될 경우 한두 발만으로 침몰해버렸기 때문이다.

나는 그 학살(虐殺)을 보며 안현 부관에게 질문했다.

"홍이포란 게 무엇입니까?"

"당신같은 강호인은 잘 모르겠지만, 이것은 몇 년 전에 수입된 신병기요. 홍모이(紅毛夷)라는 서양 족속들이 쓰던 신무기를 수군에서 적극적으로 도입했지. 아마 육상의 군에도 상당수가 실전배치되어 있을 것이오."

"홍모이?"

"화란(和蘭)이라는 서양오랑캐의 나라가 있다고 하오. 거기에 사는 눈이 파랗고 머리가 금발이거나 적발인 오랑캐들을 일컫는 말이지."

"흐음..."

나는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 저 철구(鐵口)에서 엄청난 속도로 철탄이 발사되는군. 그 충격량 때문에 해적선이 맞으면 침몰할 수밖에 없는 거야.'

나는 내공을 집중한 동체시력으로 홍이포의 원리를 대충 알 것 같았다. 그리고 소름이 돋았다. 홍이포 하나하나가 지닌 파괴력이 굉장했기 때문이다. 저런 걸 인간이 정면에서 맞을 경우 손쓸 방법이 없었다.

공격사거리, 이동속도, 내구력, 전술 모두가 뒤쳐지는 해적 혈도단이 이길 방법은 없었다. 그 사실을 깨달았는지 남은 혈도단의 배 4척은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서는 기색이었다. 안현 부관은 이쪽에서 치고 들어갈지말지를 고민하는 듯 했다.

"흐음. 귀찮은데..."

"왜 그러십니까?"

"놈들이 산개해서 싸우면 홍이포의 명중률이 낮아지지. 이쪽에서 포문을 고정시킨 상황이 이상적이오. 섣불리 움직이면 충선을 허용할 가능성이 있소."

그 말을 들은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 완벽주의자군.'

굉장한 고민인 것처럼 이야기했지만 실제로는 더욱 압도적인 승리를 위해 망설이는 모습에 불과했다. 어차피 승리가 확정되었기에 가능하면 피해를 줄이고 항복을 받아내고 싶은 것이다. 물론 저런 모습은 뛰어난 장수의 모습이었기에 나는 속으로 안현 부관이 능력있는 사내라는 걸 인정했다.

나는 말했다.

"놈들이 물러설 때까지 기다리실 생각이십니까?"

"물론 그런 건 아니오. 조금 상황을 지켜볼 뿐."

아마 틈을 노리다가 해적선의 움직임이 우왕좌왕할 때 한꺼번에 치고 들어가서 섬멸할 생각인 듯 했다. 나는 먹이를 노리는 듯한 안현 부관의 호전적인 얼굴을 쳐다보다가 말했다.

"정 그러시다면 제게 상황을 움직일 기회를 주시겠습니까?"

"그건 또 무슨 말이지?"

"제게 조그마한 배를 한 척 내어 주신다면 저쪽의 대장을 베어 오겠습니다."

안현 부관이 눈에 이채를 띄었다.

"물론 백웅 당신이 무림의 절정고수라는 사실은 알고 있소. 허나 장군은 그대를 극진하게 모시라 했으므로, 위험에 노출시키는 일은 안될 일. 가만히 있으면 우리가 저 자들을 끝장내 버리겠소."

"그래서 위험한 겁니다. 저 놈들의 대장이라는 자들은 바다로 풀어주면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무슨 말이오?"

"모든 목숨의 책임은 제가 지겠습니다. 각서를 쓰고 갈 테니 놈들에게 덤비는 걸 허용해 주십시오."

내가 종이를 들고서는 엄지손가락을 물어뜯어서 피가 나오게 했다. 그리고 피로 혈서(血書)를 쓰기 시작하자 안현 부관이 놀랐다.

"아니..."

이윽고 목숨을 잃어도 원망하지 않겠다는 각서가 완성되었다.

"제가 돌아올 때까지 해적에게 전면공격을 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내가 그걸 안현 부관에게 내밀자,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좋소. 배 하나와 병사 셋을 내어 드리지. 다시 말하지만 이건 당신 책임이오."

"걱정 마십시오."

쏴아 -

잠시 후 조그마한 배를 타고 병사 셋과 함께 대해에 오를 수 있었다. 병사들은 많은 실전을 겪은 자들인지, 자살하러 가는거나 다름없는 상황에서도 상당히 침착해 보였다. 그들이 빠르게 노를 저어서 해적선에 접근하기 시작하자, 나는 지시를 했다.

"저 새까만 닻을 달고 있는 배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이윽고 해적선까지 약 삼십 장 거리로 접근하자 화살이 날아오기 시작했다. 나는 창으로 화살을 걷어내며 잘 주시하다가 갑자기 해상으로 뛰어들었다.

퍼엉

발이 해면을 한 차례 박차더니 물기둥이 솟아올랐다. 나는 단 한 번의 도약으로 삼십 장의 거리를 압축시켜서 해적 대장선 위로 뛰어올랐다. 해적 대장선에 있던 해적들의 시선이 일제히 나를 바라보았다.

예전같았으면 불문곡직하고 학살을 시작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살기를 내뿜은 채 나직이 외쳤다.

"죽고 싶지 않은 놈은 무기를 버리고 무릎을 꿇어라."

쒸익

헛소리라고 생각한 듯 여기저기서 무기가 날아들었다. 궁사들은 물론이고 해적들이 칼과 창을 뽑아서 덤벼들었다. 나는 덤벼든 놈 하나하나를 눈으로 확인한 후 즉시 참살하러 움직이기 시작했다.

촤좌좌좍

핏줄기가 솟구쳐 올랐다. 창섬(槍殲)이 허공을 가르는 순간 인간의 몸뚱이가 조각나서 날아갔다. 순식간에 열두 명이나 되는 해적들이 고혼(孤魂)이 되자, 그제서야 덤벼들던 해적들이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와아아아."

그리고 문이 열리더니 예전처럼 안쪽에서 도를 든 정예해적들이 내 쪽으로 쏟아져 나왔다. 삼십여 명이나 되는 숫자는 예전에 봤던 그대로였다.

까가강

나는 적당히 놈들의 공격을 쳐내며 뱃머리 끝까지 갔다. 도중에 내공이 실린 창섬의 충격파에 스치자, 몇몇은 비명을 지르며 훨훨 바다로 날아가서 빠졌다. 놈들은 수십 명이 덤볐는데도 나를 어찌할 수 없자 당황해했다.

"허억..."

"무슨 어린 놈의 무공이."

타닷

이 정도면 실력을 충분히 보여줬다고 생각한 나는 뱃머리 끝에 올라선 채 놈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원래라면 네놈들을 모조리 죽였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기회를 주겠다."

눈 앞에서 혈도(血刀)를 들고 나를 포위하고 있는 해적들은 어중이떠중이가 아니라 그럭저럭 무공을 배운 놈들이었다. 당연히 지금 나와의 실력차를 느끼고 있을 것이므로, 웅성거리는 기색이 들려 왔다. 제일 전면에 있던 해적이 말했다.

"무슨 기회?"

나는 날카로운 눈으로 안쪽의 문을 바라보며 말했다.

"네놈들의 대장이 인간이 아니라 해신(海神)의 일족이란 걸 알고 있다. 우리는 놈들을 토벌하러 여기까지 따라온 것이다."

웅성...

해적 정예들 사이에서 명백한 동요가 일어났다. 그건 생전 처음듣는 소리를 들어서 나오는 반응이 아니었다. 나는 놈들 모두가 혈도단 단장들이 어인(漁人)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부대장쯤 되어보이는 놈이 앞으로 걸어나왔다.

"정말로 수군이 그 사실을 알고 있다고?"

"그렇다. 그렇지 않으면 일개 상행에 세 척이나 따라오겠나?"

"......"

"그리고 나같은 고수도 열 명이나 더 따라왔다. 네놈들에게 승산은 없다."

마지막은 거짓말에 허세를 좀 부렸으나, 놈들은 그걸 사실로 믿는 분위기였다. 이미 자신들의 배 8척 중에 절반이 침몰했으니 믿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놈은 조심스럽게 내 쪽을 바라보더니 말했다.

"우리도 수군에 덤빌 생각은 없었다. 그냥 보내주자고 했으나 단장이 억지를 부렸을 뿐이다."

"그래서?"

"우리 목숨을 보장해준다면 바로 투항하겠다."

나는 씩 웃었다.

"물론. 해적은 재판도 없이 사형이지만 내가 특별히 말을 해 두겠다. 그러니 당장 칼을 버려라."

"그럼..."

그 놈이 뭐라고 말을 하려고 할 때였다.

쐐액!

퍼억

"크어어억..."

놈이 천천히 앞으로 쓰러졌다. 등 뒤에서 날아든 비도에 심장을 꿰뚫렸으니 즉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대장해적선 내부에서는 전신을 감싼 혈도단 해적두목 3명이 천천히 걸어나오고 있었다.

해적두목 중 하나가 굵은 목소리로 말했다.

"뭘 현혹되고 있나? 당장 놈을 해치워라."

나를 둘러싼 해적들은 주춤거리며 망설이는 기색이었다. 이러나 저러나 죽을 가능성이 높았기에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나는 해적두목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봐. 왜 수군에 덤빈 거지? 홍이포에 정예병을 보유한 수군 함선에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나? 정말 착각이 대단하군."

해적두목 중 하나가 대답했다.

"너는 대체 누구냐? 설마 백련교 사람이냐?"

"글쎄. 그보다 나로써는 궁금할 뿐이야. 아무리 힘이 좋아도 인간의 모습을 버리면서까지 해신에게 종속될 필요가 있는지."

내가 이죽거리자 해적두목들이 흠칫 놀랐다. 내가 그들의 본모습을 이미 알고있기 때문이었다. 내가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한 모양인지 해적두목들이 일제히 말했다.

"너는 누구냐! 어찌 그걸 알고 있나!"

"하하. 그것보다 확실한 건 이대로라면 너희는 반드시 죽는다는 거지. 떼몰살이 확정된다고. 그 전에 자기 목숨 정도는 구해야 하지 않겠냐?"

내가 은근히 하는 말은 해적두목들에게 하는 게 아니었다.

"......"

스스스

내 눈빛을 받은 혈도단 정예들은 서로 시선교환을 하더니, 서서히 움직여서 해적두목들을 포위했다. 거진 서른 명이나 되는 부하들이 한꺼번에 배신을 하자 해적두목들이 기가 막힌 듯 외쳤다.

"미친 놈들! 어디 칼을 겨누는 거냐?"

그러자 혈도를 든 해적 중 한 명이 앞으로 나와 칼을 겨누며 외쳤다.

"미친 건 네놈들이야! 정체를 알 수 없는 물고기괴물이 된 건 그렇다쳐도 대체 왜 수군함선에 덤벼?! 씨발 개새끼들아 멱을 따 주마."

============================ 작품 후기 ============================

선작 추천 코멘트 부탁드려요!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