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검신-103화 (103/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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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천향(暗天鄕)

나는 망량과 마을을 나와서 객잔에서 잠시 머물기로 했다. 다른 일을 하려고 성급하게 행동하기 보다는 현재 상황을 파악하고 움직이기로 한 것이다.

망량은 객잔의 작은 방 안에서 닭고기 요리를 시켜서 먹으며 우물댔다.

"흐음... 천둔검법이라... 그래서 당신은 얻은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거요?"

"그렇소."

"나는 술수를 부릴 수 있는 영통이 뚫렸는데 신기한 일이군."

닭다리를 뜯은 망량이 말했다.

"잘 들으시오. 지금 당신은 예전과 달리 '선택'을 해야하오."

"선택이라니?"

"내 생각이지만 당신에게는 지금부터 세 가지의 선택지가 있소."

망량이 손가락을 차례로 펼쳤다.

"그 첫째. 나와 함께 지금부터 노력해서 반천맹을 결성하는 것이오. 당신의 무력과 지력은 이미 단체의 수장으로써 충분한 경지에 이르렀다고 보이기에, 우리가 힘을 합치면 3년 내에 큰 조직을 만드는 게 가능하리라고 보오."

"으음."

검지손가락이 펴졌다.

"두 번째. 금의위에 잠입하는 것이오. 그들의 곁에서 금의위 위사로 활동하면서 보고들은 것은 고스란히 우리의 정보가 될 수 있을것이오. 또한 당신은 필요하다면 중대한 순간에 그들을 훼방놓을 수도 있소."

망량이 뼈만 남은 닭다리를 내려놓으며 마지막 복안을 말했다.

"그리고 세 번째. 청룡무관에 가서 무공을 배우는 것이오."

"... 농담하시오?"

내가 어이가 없어서 반문했다. 그러자 망량이 단호하게 말했다.

"농담이 아니오. 당신은 세 번째 길도 진지하게 고려해 볼 필요가 있소."

"그건..."

"당신의 마음이 크게 원망을 토하고 있기에 지금 그 길을 선택하지 못하겠지. 하지만 당신이 내게 말한대로라면, 당신이 초절정의 경지에 진입하는 가장 빠른 방법은 이광에게 가르침을 받는 것이오. 당신의 무공이 초절정에 이르게 되고 뇌신류의 달인급이 된다면 앞으로의 일은 굉장히 쉬워질 것이오."

나는 이를 악물었다.

"말은 쉽지만, 난 도저히 그럴수가 없소. 또한 이광이 나를 순순히 가르쳐줄 것 같지도 않소."

"잘 생각해 보시오."

"무엇을 말이오?"

"당신은 이광이 자신을 죽일거라는 생각을 하고 있으나, 실제로 이광이 당신을 직접 살해한 적은 한 번도 없소. 그렇지 않소?"

"......"

"그 말은 이광이란 자는 아무리 화가 나고 폭주하더라도 인간의 도리를 잃지 않는 철혈한이라는 소리요. 그런 자가 문파의 비밀이 유출된 것이 화가나서 타 뇌신류의 전승자를 쉽사리 때려죽이겠소? 물론 그럴 수도 있지만, 나는 아닐 거라고 생각하오."

"왜 그렇게 생각하오."

"잘 생각해 보시오..."

망량이 손깍지를 끼고 턱을 손등 위에 괴었다. 그리고는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애시당초 이광이 당신에게 분노했던 두 번의 경우를 잘 생각해 보란 말이오."

"화신류의 추천장을 들고왔을 때와, 내 재능이 그의 기대에 못미쳤을 때군."

"전자의 경우는 당신 본인에게 화가 난 게 아니오. 화신류라는 배후에 뇌신류의 입장에서 짜증을 낸 것이지. 하지만 후자의 경우는 다르오. 그건 당신에게 '기대'를 했기에 분노했던 것이오."

"그건 그렇지."

"즉 - 그렇소. 내 생각대로라면 이광은 무언가 복수를 하기 위해 칼을 갈고 있었고, 그 칼로써 당신을 키워내기로 했던 거요."

나는 눈을 부릅떴다. 여태 그런 생각은 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냥 멋대로 기대를 하다가 나를 족친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을 뿐이다. '복수를 위한 칼'이라고 하는 동기는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복수? 너무 넘겨짚는 거 아니오?"

"그렇지 않소. 상황으로 볼 때 이광이 화신류의 껄끄러움을 감수하고라도 그때의 당신을 열정적으로 키울 이유는 그것밖에 없소. 이광의 손이 닿지 않는 가공할만한 힘을 지닌 자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천하제일의 내공과 재능을 지니고 있다고 보이는 당신을 키우기로 했던 거요."

"......"

나는 손을 떨었다. 망량의 말을 듣자 그 '복수'의 대상이 어떤 자들인지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백련교군. 백련교에게 복수하기 위해 내게 비기와 결전오의를 전수한 거야."

그렇지 않고서야 아무리 같은 뇌신류라도 직계가 아닌 자에게 그런걸 전수할 리는 없었다.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쏟아부어서 가르쳐도 모자랄 정도로 강대한 숙적이 존재한다는 것이고, 이광의 실력을 감안하면 그럴만한 존재는 백련교밖에 없었다. 그것도 호법사자 이상의 존재일 확률이 높았다.

망량이 쓴웃음을 지었다.

"생각하기도 싫지만, 만일 그의 복수대상이 백련교주였다면 이광의 분노는 당연한 거였겠군. 그 나름대로 인생 최대의 도박을 했으나 기회와 시간을 동시에 잃어버린 셈이었을테니."

"빌어먹을..."

나는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대체 내가 백련교주를 상대한다니,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가 어딨는가? 사실상 대라멸진과 뇌명을 동시에 일으켜도 호법사자 하나를 죽일 수 있다는 보장이 없었다. 그가 나를 그정도의 초기재로 보고 있었다는 건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망량의 이야기는 크게 근거가 없었지만 상당한 설득력을 지니고 내 귀에 꽂히는 중이었다.

망량이 말했다.

"여하튼, 당신이 자신의 근원을 밝히고 다시 청룡무관에 들어가려 해도 이광이 당신을 살해할 것 같진 않소. 매사에 무심무정한 인물이라 하지 않았소? 그저 당신을 타 뇌신류 제자 취급밖에 하지 않을 거요. 과거 겪었던 것 같은 괄시는 없겠지. 애초에 기대도 하지 않을테니까."

"정말 그렇게 되겠소?"

"당신이 뇌명만 숨긴다면 충분히 가능하겠지. 이광에게서 그 이상의 비기를 배울 생각은 하지 말고, 초절정고수 근처에서 자신을 갈고닦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것이오. 이미 수많은 실전경험을 쌓은 당신은 이광이나 진소청의 밑에서 빠르게 실력이 늘 수 있을 것이오."

나는 곰곰히 생각했다.

내가 생각에 잠기자 망량이 물었다.

"자, 3개의 인생 중 어떤 걸 택하겠소? 첫째든 둘째든 셋째든 모두 나쁠 건 없는 선택이오."

달그락

나는 그릇에 장저를 놓았다. 그리고 팔짱을 끼며 말했다.

"청룡무관에 다시 가겠소. 어떻게든 더 높은 경지에 오르겠소."

"어려운 결정 잘 했소."

나는 망량의 말을 듣지 않아서 손해본 적이 너무 많았다. 이번에도 망량은 은근히 내게 세 번째 복안을 강력하게 추천하는 모습이었다. 그 이외의 선택을 할 경우 왠지 손해를 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망량은 아직까지 대사를 추진해서 복마전을 쓰러뜨리기에는 내 힘이 부족하다고 여기는 모양이었다.

게다가 어려운 선택을 할수록 결과적으로 찾아오는 보상은 더욱 달콤하다는 걸 나는 인생의 경험으로 알고 있다. 이를 악물고 고민하던 나는 말했다.

"하지만 그 전에 마음을 좀 정리하고 싶소. 뭔가 좋은 방법이 없겠소?"

이성적으로는 그 방법을 택하겠다고 생각했지만 심적으로 도무지 내키질 않았다. 조금이라도 기분전환을 한 후 마음을 다잡고 싶었다. 내 마음을 눈치챘는지 망량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뭐 고민할 거 있겠소? 바로 산동으로 가서 시간맞춰서 예전처럼 대룡상회의 선단에 타시오. 지금의 당신이라면 그 때보다 더욱 수월하게 해적 혈도단을 잡을 수 있을 것이 아니오."

"아..."

혈도단이나 쳐죽이면서 짜증을 풀라는 소리였다. 정파의 의협들이 할만한 발상이 아니었지만, 망량 또한 사마외도에게는 가차없는 인간이었다.

"어차피 금의위에 잠입할 생각이 아니라면 칠요를 얻는 인과는 막아야 하오. 그 과정이나 원인을 파악하지 못하는 건 아쉽지만, 되려 필수적으로 가야만 하는 것이지. 뱃길 여행이나 하고 온다고 생각하면 될 것이오. 그리고 돌아와서 계획대로 행동하면 될 거요."

"알았소."

나는 향후계획을 잡자 마음이 약간은 홀가분해진 기분이 들었다. 이번 전생을 시작하고 약간은 갑갑했던 게 날아간 기분이었다.

나는 문득 생각이 난 걸 질문했다.

"내가 술법을 더욱 연마해서 술법사의 경지에 오르는 건 안되겠소?"

"안될 건 없소. 당신은 이미 초급 술사이니 좋은 스승 밑에서 대략 십여 년만 용맹정진하면 나름대로 한사람몫을 할 수 있을 것이오."

그렇게 대답한 망량이 소면을 후룩 먹었다.

"그러나 잘 알아두시오. 당신이 여태 전생하면서 워낙 엄청난 술법사들만 봐 와서 잘 모르겠으나, 술법이란 건 뛰어난 경지에 오르지 못하면 대개 잡술(雜術)에 불과하오. 단순전투력에서는 무공에 비할바가 못 되지. 막말로 당신이 10년 20년동안 죽어라 수련해서 술법을 익히더라도 싸울때 응용하기가 버거울 것이오. 술법은 무공과 달리 싸우려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게 아니니까."

"그렇군..."

술법을 익혀봤자 상급 경지에 오르지 못한다면 효율이 떨어진다는 소리였다.

"그리고 막야에 대한 정보는 흥미롭군."

망량이 천보자기에 싸여있는 막야의 검신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봉인(封印)이 되어있다라... 정말로 내가 그렇게 말했었단 말이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틀림없소."

10번째 전생에서 망량이 고려까지 나를 찾아와서 술법을 가르쳐주던 반 년 사이에, 그는 자신이 반천맹주로써 활동하며 얻었던 지식과 정보를 내게 알려 주었다. 사실 술법보다는 그게 훨씬 도움이 되는 내용이었다.

그 중에서 가장 경악스러운 것은 바로 칠요(七曜) 중 수요를 담당하는 신검 막야가 현재 봉인상태라는 것이었다. 망량은 줄곧 막야를 연구하며 때때로 스승인 망량선사에게도 물어보았는데, 그 결과 막야가 본래의 힘을 내지 못하고 누군가에 의해 봉인된 상태라는 사실을 알아낼 수 있었다.

망량이 말했다.

"제대로 쓰면 대라신선조차 멸할 수 있다는 막야를 가지고도 내가 반천맹을 만드는걸로 만족했던 건, 그 이유 때문이었군."

"봉인을 풀지 못하면 막야를 전력으로 쓸 수 없을 것 같소."

"그렇다면 그 봉인은 비석의 내용과 연관이 있겠군. 수요에 있던 비석의 내용을 내게 알려 주시오."

"다음과 같소.

나는 망량에게 비석에 적혀있던 내용을 읊어주었다. 그것을 왠 서책에 옮겨적은 망량은 한참동안 들여다보다 말했다. 뭔가 감이 잡힌 듯한 목소리였다.

"... 이거 골치아프겠는데. 정말 이런 곳에서 막야의 봉인을 풀 수 있단 말인가? 이런 미친... 먼 것도 정도가 있지."

뭐가 골치가 아프다는 걸까.

하지만 망량은 진심으로 골때린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한숨을 푸욱 쉬더니 말했다.

"하아아... 이건 내가 알아 보겠소. 헌데 별로 좋은 결과가 나오지는 않을 거요."

"믿겠소."

"내 생각대로라면, 칠요를 모으는 건 정말로 엄청난 대모험이라고밖에..."

꿍얼꿍얼대는 망량이었지만 일단 해야하는 일은 확실하게 하는 사람이었기에 나는 큰 걱정을 하지 않았다. 나는 여기서 모든 이야기를 정리할 셈으로, 주변의 이목을 잠시 살피다가 망량에게 전음을 보냈다.

[ 천년설삼을 당신이 먹는 게 좋겠소.]

위에서 했던 얘기는 그냥 호사가들의 농담 정도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천년설삼은 조심해도 지나치지 않았기에 전음을 쓴 것이다. 만에 하나를 대비하는 자세였다.

"쿠억! 컥! 컥컥..."

망량은 맛있게 닭을 먹다가 난데없이 놀랐는지 기침을 토했다. 입을 서둘러 닦은 망량은 당황해서 말했다.

"뭔 소리요?! 당신 미쳤소?! 설마 황산에서 그걸 취하지 않고 예까지 가져왔다고?"

"그렇소."

"헛, 허허... 허허..."

망량은 헛웃음을 흘렸다. 그도 그럴것이 천하제일급 영약인 천년설삼을 안 먹고 가져온다는 발상은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망량은 아마 방금 전까지도 내가 이미 황산에서 먹고 왔으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내가 더 먹어봤자 효력이 없기 때문이지."

나는 망량에게 쓱 천년설삼을 내밀었다.

"이걸 흑백련과 함께 복용하면 더 빨리 무공을 성취할 수 있을 것이오."

"그... 그야 그렇겠지. 하, 하지만..."

망량은 너무 놀라서 토끼눈을 하고 있었다. 그러더니 곧 냉정을 되찾고 가라앉은 눈으로 말했다.

"아니, 그게 아냐. 흐음... 그렇게 하면 재밌어지겠어."

섭선으로 자신의 머리를 툭툭 치던 망량이 손을 내밀더니, 천년설삼을 내 쪽으로 밀어버렸다. 나는 망량이 거절할 줄은 생각도 못했기에 놀란 표정을 지었다. 설마 천년설삼을 마다할 줄이야?

망량이 말했다.

"당신이 가져가시오. 나는 당신이 주기로 약속했던 걸로 족하오."

"아니 어째서..."

"내 생각이지만 그건 나보다 당신이 써야할 것 같소. 아니, 당신이 써야 하오."

"무슨 소리요?"

"당신은 지금 내게 너무 의존하고 있다는 소리요. 물론 미래를 위한 투자라고 하면 할 말은 없지만 그래서는 당신 본인이 발전할 수 없소. 자기 머리로 생각하고, 자신이 쓸 장소를 찾는 게 가장 좋소."

그가 확신에 차서 말했다.

"이걸 당신이 잘 투자한다면 수십 배의 성과를 이끌어낼 수 있을 것만 같소. 이건 내 직감이오."

"......"

"이번 생 내내 생각했는데도 쓸만한 곳이 떠오르지 않는다면, 그때는 내게 주시오. 하지만 내 생각인데 아마 투자할 곳이 분명히 있을 것이오."

"알았소."

망량은 내게 과제를 내준 셈이었다. 망량은 방금 머리를 굴려서 '쓸만한 투자처'가 어딘지를 즉시 알아낸 모양이었다. 그리고 거기에 투자하는 건 본인보다 내가 알맞다고 여기고 있을 것이다. 답이 존재하는 문제였으니 이제 내가 푸는 것만 남은 것이다.

답을 직접 알려주지 않는 것은 내 머리로 생각하라는 뜻이다.

' 잘 생각해 봐야겠군. 답은 이미 나와있을 거야.'

나는 이번 생에서 망량이 내준 과제를 풀기로 마음먹었다. 망량이 마지막으로 닭튀김을 장저로 집어먹으며 말했다.

"그리고 성련과 흑백련의 관계라는 것도 내가 나름대로 알아보겠소. 그건 아주 중대한 비밀일 것 같군."

"고맙소."

"고맙긴 내가 고맙지. 여하튼 잘 해 봅시다."

나는 망량과 인사를 나누고는 그날 저녁에 헤어졌다. 내가 망량에게 준 것은 흑백련의 꽃과 뿌리 전부, 그리고 금궤짝에 있던 금괴의 절반이었다. 나는 이제 망량이 충분한 성과를 낼 때까지 무공만 수련하면 되는 일이었다.

"가자!"

나는 천년설삼을 봇짐 깊숙한 곳에 넣은 채 곧장 산동으로 향했다. 예전과 달리 천인봉혈법으로 기를 봉하고 있었기에, 난데없이 개방방주 천룡개가 나를 의심해서 쫓아온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나는 순조롭게 산동까지 도착할 수 있었으나 그 다음부터가 문제였다.

"어린아이가 아무런 신분증명도 없이 들어오겠다고? 거지새끼는 썩 꺼져!"

"......"

성의 입구를 지키는 경비대들은 화를 내며 나를 내쫓아 버렸다. 이 곳은 대항(大港)이었기에 거지와 암흑가가 많은 곳이었고, 수상쩍은 자를 더욱 배척하는 곳이었다. 나는 지난번에 정천맹주의 신패를 받아서 손쉽게 왔기에 아차하는 생각이 들었다.

' 이런 제길. 뇌물이라도 먹여야 하나?'

뇌물이라 함은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기본여비로는 택도 없다. 금괴를 쓰면 직빵일 것이다.

하지만 금괴를 이런 곳에서 쓰는 건 너무 아까운 일이었고, 더욱이 금괴같은 걸 함부로 꺼내서 매매했다가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는 과거 낙양에서의 일로 충분히 경험한 적이 있었다.

나는 한참을 고민하며 성 근처에 있는 빈민가에 주저앉아 있었는데, 그 때 누군가가 내게 다가왔다.

"어허이... 소년형제. 먹고살 길이 막막한가?"

거지였다. 나는 그가 개방방도라는 걸 기의 크기로 확인하고는 말했다.

"딱히 그런건 아니오."

"흐흐... 그래보이는군. 새 옷을 입고 있는데다 왠지 심상치 않아. 뭐 그래도 지금 고민하는게 뭔지는 알 것 같군."

"뭐요?"

"성으로 몰래 들어가는 방법을 알고 있네. 나와 거래하겠나?"

아마도 이 개방방도는 내가 성 문전에서 쫓겨나는 걸 목격한 모양이었다. 나는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곤 말했다.

"딱히 그럴 생각도 없소만..."

"헛허... 정말인가? 후회할텐데."

"엄한 사람 건드리지 말고 그냥 가시오."

나는 밤이 깊어지면 경공술을 이용해서 벽을 넘어 돌파할 생각이었다. 괜히 다른 일에 눈길을 줬다가는 귀찮아지기만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자 개방방도가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이런 제길, 어린 새끼가 뭐이리 말이 많아?"

부웅

갑자기 그가 내게 타구봉을 휘둘러 왔다. 둔중하게 날아오는 걸 보니 갓 일류로 넘어가는 수준이었다. 나는 그가 나를 공격한다는 사실이 내심 기가 막혔는데, 여태껏 나를 만났던 자들은 절정고수라도 긴장하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천인봉혈법 덕분에 외부에 쓸데없는 기가 유출되지 않는 지금은 개나소나 덤비는 상황이 된 것 같았다.

나는 슬쩍 그 공격을 자연스럽게 피했다. 그리고는 살기를 내뿜으며 말했다.

"한번만 더 공격하면 당신 무사하지 못할 거요."

사앗 -

"어, 어엇."

개방도는 갑작스럽게 살기때문에 자신의 몸이 굳자 당황한 듯 했다. 그리고 내가 실력을 숨기고 있었다는 걸 알아채자 입술과 손을 파들파들 떨었다. 마음만 먹으면 내가 이 자리에서 개방도를 패죽일 수도 있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이, 이 놈. 감히 개방을 건드릴 생각이냐."

"개방은 무서운데 당신이 무서운 건 아니오. 그리고 정말 죽어봐야 정신을 차리겠소?"

"헉!"

내가 죽인다는 얘기를 꺼내자 그는 뒷걸음질을 쳤다. 내 경고에서, 내가 마음만 먹으면 그딴 걸 무시할수도 있는 인간이란 걸 알아챘기 때문이었다.

"으아아아."

이내 그가 등을 돌려서 정신없이 도망쳤고 나는 한숨을 쉬었다.

' 내공을 숨긴다는 게 불편할 때도 있군. 어중이떠중이에게 시비가 잘 걸리는거 같아.'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나는 야밤이 되어서 뇌명을 발동한 후, 성문을 몇 번의 도약으로 바로 넘어버렸다. 경비들은 너무 빨라서인지 내가 지나간 것도 모르는 모양이었다. 성내에 내려선 나는 객잔에 가서 방을 잡았다.

다음 날 나는 대룡상회 대신에 서궁표국을 찾아갔다. 그리고는 나를 표사로 받아달라고 신청했다. 예상대로 표사와 표위들은 무슨 개풀뜯어먹는 소리냐고 무시하는 반응이었다.

"잘 보십쇼."

"뭘?"

번쩍

"허억."

"으어어어어어...!!"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놀랐다. 내가 서궁표국 앞에 놓여있던 거대한 배의 용골(龍骨) 재료가 될 목대(木臺)를 들었기 때문이다. 단순한 무게로는 성인장정 서른 명이 달려도 제대로 들까말까한 물건을 내가 한 손으로 들어올리니 서궁표국에 있던 모든 자들이 경악해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씩 웃으며 말했다.

"제가 나이는 어려도 힘을 좀 씁니다."

잠시 후에 서궁표국주가 급히 뛰어나왔다. 그는 내가 한 손으로 용골 목대를 들고 있는 걸 기가 막힌 눈으로 바라보더니 외쳤다.

"자, 자네 이름이 뭐지?"

"백웅이라고 합니다."

"강호의 절정무사같은데 어찌 표사가 되려는 것인가?"

"서궁표국주께서는 저를 받기 싫은 것입니까?"

그러자 서궁표국주가 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 그럴 리가!! 환영하네 백웅 표위!"

그렇게 나는 하루아침에 서궁표국의 표위가 되어서 고려로 향하는 상단에 참여하게 되었다. 짜잘한 계책을 쓰거나 머리굴릴 것도 없이, 내 내공을 이용해서 무위를 과시하기만 해도 그들이 나를 호위역으로 받아들일 거라는 계산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서궁표국주에게 말했다.

"국주님. 혈도단이라는 도적들이 근처에 횡행한다는데 수군 함선을 지원받으면 안되겠습니까?"

정신없이 화물을 나르는 일을 감독하고 있던 서궁표국주가 말했다.

"안돼 안돼! 무슨 돈이 있어서 그런단 말인가? 관에 뇌물을 먹이지 않는 한 결코 내주지 않을 게야."

"으음."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물론 나 혼자만 있어도 혈도단을 어느정도 상대할 수 있겠지만, 지난번에 혈도단의 배로 건너갔던 일은 상당히 운도 작용한 것이었다.

' 안 좋아 이거. 운에 맡기고 일을 진행할 수는 없어.'

나는 수상비를 쓸 수 없었기 때문에 잘못해서 배끼리의 원거리 싸움으로 결판이 나버리는 경우 감당하기 힘들었다. 배가 부숴져서 침몰하면 나로써도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잘못하면 상단 사람들은 다 전멸해있는데 나혼자서 해적들이랑 죽을때까지 싸우는 각이 연출될지도 몰랐다.

' 대비를 해 두려면 군선을 한 척 지원받는게 제일일텐데.'

나는 고민했다. 이번 일이 '칠요'의 행방과 중대한 연관성이 있다고 생각하니 더 허투루 다룰 수가 없었고, 조그마한 실패확률도 용납할 수 없었다. 이번 일에서 군선을 지원받는 건 필수조건이었다.

' 어쩔 수 없군. 이럴 때 아니면 언제 쓰겠어.'

나는 고려로 향하는 상행을 총감독한다는 정 6품 관리, 정기태를 찾아갔다. 물론 표위가 보고싶다고 하는데 바로 나올 정도로 그가 한가한 사람은 아니었기에 나는 하루종일 관아 문 앞에 서서 기다려야 했다.

그리고 해가 질 때쯤이나 되어서야 내가 정기태를 보는 게 허락이 되었다. 그는 심드렁한 얼굴로 말했다.

"서궁표국의 표위가 내게 무슨 볼일인고?"

"제가 나으리께 아주 좋은 선물을 가져왔기에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그러자 그의 눈에 반짝 하고 호기심이 맴돌았다.

"선물이라? 어떤 것이냐?"

"사람을 좀 물려주시면..."

"흐음... 이 방으로 와 보거라."

나는 정기태와 같은 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슬며시 금괴를 꺼내서 그의 눈 앞에 들이밀었다.

"아~주 좋은 선물입니다."

"히이이익!! 순 - 금 !!"

정기태는 너무나 놀라서는 주저앉았다. 그리고는 재빨리 금괴에 손을 뻗었는데 나는 슬며시 그 손을 피해버렸다. 정기태가 눈치를 챘는지 급히 내게 말했다.

"뭐, 뭐 부탁하고 싶은 거라도 있느냐? 내 뭐든간에 할 수 있는 한에서 도와주마."

"이번에 고려로 향하는 상행에 말입니다... 군선을 한 대 호위함으로 넣었으면 합니다."

그러자 정기태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군선을? ...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좀 어렵다. 그걸 움직이려면 장경익(長慶翼) 장군(將軍)의 허락을 맡아야 한다."

"장경익 장군은 어떤 사람입니까?"

내 질문에 정기태가 대답했다.

"이 산동성의 성주와 대등한 권력을 지니고 있으며 5만의 대군을 통솔할 수 있는 장군이다. 그 분께 이야기가 되지 않으면 불가능해."

"그럼 어쩔 수 없군요. 이 이야기는 없었던 걸로..."

내가 슬며시 금괴를 집어넣고 돌아서려고 하자 급히 정기태가 말했다.

"알았다 알았다! 어떻게든 해 보겠다. 그 금괴를 내게 주면, 그걸로 자금을 써서 어떻게든 이야기를 드려보겠다. 그걸로 되겠느냐?"

"어르신께서 제 부탁을 들어주시리라는 보장이 없군요..."

"어떻게 하기를 원하는 게냐?"

"제가 장군을 일대일로 뵐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네가 직접 장경익 장군을 설득하겠다는 거냐?"

정기태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긴 장경익 장군 정도면 산동성의 군권과 실권을 쥐고 있는 강력한 권력자였다. 그를 일개 어린아이가 설득한다고 하니 기가 막힐 것이다.

하지만 정기태는 결국 내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금괴에 대한 욕심이 그만큼 컸기 때문이었다. 다음 날 나는 정기태를 따라서 산동성의 장군부(長軍府)로 갈 수 있었고 내전까지 문제없이 통과할 수 있었다.

"왔는가, 정 통판(通判)."

"네이, 장군."

장경익 장군은 애꾸눈에 부리부리한 인상을 지닌 거한의 사내였다. 화려한 군복을 입은 채 태사의에 팔짱을 끼고 앉아있는 모습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전형적인 장군의 모습이었다. 정기태가 머리를 조아린 채 말했다.

"이쪽이 뵙기를 요청한 서궁표국의 표위, 백웅입니다."

장경익 장군이 실망한 듯 말했다.

"어린아이가 아닌가?"

"허나... 이미 세간에는 이 자가 엄청난 용력을 지니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하여... 외견과 달리 평범한 자가 아니옵니다."

"호오..."

장경익 장군이 흥미로운 듯 나를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물었다.

"백웅 표위라 했나. 자네는 어째서 군선을 지원받았으면 하는 게지?"

나는 망설임없이 대답했다.

"저는 꼭 고려로 가야 합니다. 그리고 가는 중에 생명의 위협을 받고싶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고 있을 뿐입니다."

장경익 장군이 유쾌하게 웃었다.

"으하하하... 그러면 육로로 가면 될거 아닌가. 무슨 나타날지도 아닐지도 모르는 해적 때문에, 갓 들어간 서궁표국을 위해서, 금괴를 쓰고 난리인가? 자넨 정말 대단한 기인(奇人)이구만."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저는 장군께 도움이 되고, 장군께서도 제게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금괴 하나 정도는 전혀 아까운 게 아니죠."

"호오... 후후. 그러니까 나와 연줄을 튼 것만으로도 이득이라 생각하는 겐가?"

나는 슬며시 가지고 온 금괴 2개를 옆으로 밀었다.

장경익 장군의 눈이 약간 커졌다.

"그리 생각해 주셨으면 합니다."

"......"

너무 눈에 띄는 행위이지만 나는 이 모든 게 이득이 된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내가 아무리 행적을 숨긴다고 해봤자, 결국 나중에 내 행적은 금의위에 의해 조사될 가능성이 있었다. 그럴 바에야 해적 토벌 성공율을 높이면서, 요란하게 잔망을 떨어대는 편이 나았다.

우선 눈에 띄어야 한다. 금괴를 이용해서 최대한 '높으신 분'과 연결된다면 나중에 그가 내 방어막이 되어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나는 장경익 장군을 내 연줄로 만들 생각이었다.

그 동안 전생을 하면서 사람사이의 인연과 연줄이 얼마나 클 수 있는지를 실감한 상황이었다. 금괴를 이용해서 권력자를 내 편으로 만들 수 있다면 그것보다 좋은 일은 없었다. 장경익 장군이 흥미로운 눈으로 나를 쳐다보더니 말했다.

"재밌군. 재밌어... 내 살아생전 진천휘 장군만큼 독특한 자는 처음 봤네."

"......"

"아마 젊은 무림인일 거라고 생각되지만, 자네 무공을 익힌 게 맞지?"

"그렇습니다."

"사문은?"

"청룡무관입니다."

그 순간이었다.

장경익 장군이 깜짝 놀라서 눈을 부릅떴다. 그러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서... 설마 네가 청룡위 님의 제자였다고?"

나는 모르는 척 반문했다.

"청룡위가 누굽니까?"

"... 흐음. 그, 그러니까 음... 삼절 이광이라고 하는 자 말이다."

"제 직계스승께 들은 적이 있습니다. 제 유파는 다인전승이기에, 그분 또한 방계의 제 스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그렇구나. 허험."

헛기침을 하던 장경익 장군이 말했다.

"알았다! 군선 3대의 출병을 허가한다. 이번 고려상행에 동행하여 호위할 것이다."

"감사합니다."

"더 부탁할 게 있느냐?"

"딱히 없습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읍하고 정기태와 함께 떠나려고 했다. 목적이 달성되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장경익 장군이 급히 나를 붙잡았다.

"그, 그럼 이야기 좀 하자."

"이야기 말입니까? 상관 없지만..."

장경익 장군이 정기태에게 가라는 손짓을 했다.

"정 통판은 가도 좋다."

"네이."

정기태가 떠나자 한동안 장군부에 정적이 감돌았다. 일대일 대면이었기에 딱히 호위무사도 보이지 않았다. 한참동안 침묵하고 있던 장경익 장군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고려로 가서 아주 돌아오지 않을 셈인가?"

"그렇진 않습니다. 잠시 고려를 보고 바로 상행을 따라 되돌아올 겁니다."

장경익 장군이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군. 좋아, 그럼 내 부탁 좀 들어주지 않겠나?"

"어떤 부탁이든간에 제 힘 닿는대로 들어드리겠습니다."

장경익 장군이 힘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 알겠네. 그럼 고려에서 다녀오는대로 바로 나를 찾아오게. 자네가 해야할 일을 말해 줄 테니."

"어떤 일입니까?"

"가벼운 심부름이니 걱정하지 않아도 되네. 내 반드시 자네의 노고에 보답할 것일세."

심부름?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확실하게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나는 그렇게 장경익 장군과 심부름 약속을 하고 사흘 후, 군선에 호위받는 상단 배를 탄 채 고려로 향했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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