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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천향(暗天鄕)
서산대사가 말했다.
"빈승은 수호자를 깨우는데 동의할 수 없소. 그 말대로라면 수호자의 힘은 한낱 인간으로써는 상대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러있을 것이오. 여기 있는 네 명의 힘만으로 잡는게 어찌 가능하겠소? 게다가 곧이어 호법사자가 결계를 깨고 온다는 것도 문제요."
서산대사의 말은 논리정연했다. 하지만 그 말을 듣고 있던 미호가 팔짱을 끼며 툭하고 말했다.
"흥... 그럼 여기 앉아서 죽기만 기다리자는 말이냐? 설마 저 호법사자놈이 지상에서 유적을 못 찾으면 얌전히 돌아갈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그건..."
"성질이 나면 산이라도 부수려 할 놈이다. 우리는 결코 안전한 상태가 아니야. 지금 생각해야 하는 건 안된다고 포기할 게 아니라 어떻게 살아남을지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구려."
그 말대로였다.
상식적이라면 인간이 무려 150여장에 이르는 야산을 홀로 부수는게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호법사자가 자연지기를 다루면 불가능할 것도 없었다. 게다가 내부가 유적이 되어있는 마니산의 특성상 위에서 거대한 충격이 오면 유적째로 붕괴될 가능성도 생각해야 했다. 자칫하면 아무것도 못하고 이 유적에서 생매장될 수도 있었다.
그때까지 가만히 듣고 있던 젊은 승려 유정이 말했다.
"이렇게 하는 건 어떻겠습니까?"
"복안이 있느냐?"
"이이제이(以夷制夷)입니다."
미호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 방법밖에 없긴 하다. 허나 우리 생각대로 되리라는 보장이 하나도 없구나. 계획을 잘 짜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듣고 있다가 유정에게 물었다.
"그 말은, 호법사자와 수호자를 싸우게 하자는 것이오?"
"네. 그렇게 하면 공멸(共滅)을 노릴 수 있고, 살아남은 쪽이 약해져 있을테니 그쪽을 치면 됩니다."
"미호의 말대로군. 어려울 거 같소."
나는 침음성을 흘렸다.
호법사자와 유적수호자를 싸우게 한다!
그건 우리에게 있어서는 더할나위 없는 최상의 상황이었으나, 거기까지 상황을 만드는 게 문제였다. 호법사자를 여기까지 끌어들여서 제단에 피를 뿌리면 대면시키는 것까지는 가능하겠지만, 호법사자는 수호자와 싸우지 않고 여유작작하게 지상으로 돌아가버릴 가능성도 있다. 뿐만 아니라 수호자를 무시하고 그냥 우리만 골라서 쳐죽일수도 있다. 어느쪽이든간에 호법사자가 우리 생각대로 얌전히 수호자와 싸워준다는 보장이 없는 것이다.
가만히 염불을 외고 있던 서산대사가 말했다.
"... 한 가지 확인하고싶은게 있소, 구미호여."
"무어냐?"
"그대는 만일 월요를 얻게 되면 무엇을 할 생각이오?"
"흥, 그걸 네놈이 알아서 어쩔 생각이지?"
"중요한 일이니 대답해 주시오."
서산대사는 괜한 질문을 하는 게 아닌 듯 했다. 그 낌새를 미호도 눈치챘는지 곰곰히 생각하다가 말했다.
"본녀는 본디 서왕모를 모시던 자리에 있었다. 월요의 힘을 이용하여 승천(昇天)하여 천계로 갈 생각이다. 그 외의 욕심은 없느니라."
"과연... 그러하다면 방법이 있소."
"뭐라?"
"이렇게 해 봅시다."
그렇게 작전이 시작되었다.
나는 어둠 속에서 가만히 모공에 침을 꼽은 채 정좌하고 있었다. 이 공간은 앉아있기 불편하지 않았기에 나는 얌전히 앉아서 힘만 모으는데 집중할 수 있었다. 내 시선은 뚫어져라 전방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침묵이 흐른다.
뚜벅. 뚜벅.
유적 내부로 걸음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그 걸음소리는 명백히 의도적인 것으로, 듣는 자들에게 공포를 새겨주기 위한 것이었다. 실제로는 백여장을 뛰어도 깃털이 떨어지는 소리조차 내지 않을 수 있는 경공술의 소유자였다.
한참동안 걸어오던 그 걸음소리의 주인은 주변을 살펴보는 듯 했다. 그리고는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숨은 건가? 하잘것없는 놈들."
그는 이미 우리가 숨어있다는 사실을 파악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암습당해도 버틸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 이번에는 유적의 제단을 흥미롭게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에게 있어서도 이 유적은 굉장히 특이해 보이는지 꼼꼼하게 보는 듯 했다.
"호오... 재밌어."
화륵
"재밌다 뿐일까. 느긋하게 즐기고 가라구."
그 때 어둠속에서 미호의 환영(幻影)이 나타났다. 호법사자는 그게 환영이라는 걸 보자마자 알아챘는지 공격하지 않고 노려 보았다.
"숨어있으면 괜찮을 줄 아는가? 너희는 이미 외통수에 걸렸다."
"우후후. 그럴지도. 그 전에 한가지 듣고싶은 게 있는데."
"뭐냐?"
"네놈은 칠요의 전설을 알고 있느냐?"
미호의 말에 호법사자는 침묵했다. 그리고 뭔가 감을 잡았는지 놀란 표정이 되었다. 그는 제단을 힐끔 보며 말했다.
"과연, 그렇군. 여기에 있는 게 칠요란 말이냐."
"그래. 그것도 신대(神代)부터 봉인되어있는 지보(至寶)이다."
"너희를 모두 쳐죽이고 칠요도 얻도록 하지."
"그리 생각처럼 될지 의문이지만, 아하하."
깔깔 웃던 미호가 말했다.
"신나게 즐겨보려무나."
촤륵
그 순간이었다. 미호가 전이술로 이동시킨 통이 허공에서 쏟아졌다. 잠시 후 땡그랑 하는 소리와 함께 질척한 피가 제단을 흘렀다. 마침 제단 바로 앞에 서 있던 호법사자는 발 밑에서 거대한 진동을 느끼고는 당황했다.
쿠구구구구
"아니..."
쿠콰콰콰콰쾅!!
어둠이 지하에서 쏟아져 올랐다. 한도 끝도 없이 광대하게 치솟던 어둠은 갑자기 수백 수천의 령(靈)을 내뿜었으며, 허공을 휘돌던 영혼들은 가까이에 있던 호법사자에게 날아들었다. 호법사자가 무공을 써서 영혼들을 가볍게 격퇴했지만 그 또한 이 자리에 소환되는 엄청난 존재가 무엇인지 대충 느낀 모양이었다.
콰아아아앙!!
지하유적을 거의 다 삼킬 정도로 넓게 치솟아오르던 어둠은 이윽고 유적의 천장을 뚫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유적을 뚫고 천공에 치솟아 올라, 마치 살아있는 듯한 어둠의 안개가 휘릭거리며 하나의 형체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고고한 어둠이 달빛을 받아서 살아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호법사자는 천공에 뛰어올라서 유적을 탈출하려 했으나, 그 때는 이미 어둠 그 자체가 호법사자를 적으로 인식한 모양이었다. 어둠의 안개에서 촉수(觸手)같은 게 날아와서 호법사자를 공격했다.
퍼엉
"으으... 이 놈이!!"
호법사자는 어둠의 존재가 자신을 공격하는 걸 알자 화를 냈다. 하지만 이내 냉정을 되찾더니 마니산이 떠나가라 쩌렁쩌렁 외쳤다.
"속이 빤히 보인다 멍청한 놈들!! 내가 이런 놈과 싸워줄 줄 아느냐? 그 전에 네놈들부터 쳐 죽이고 이 섬을 나가겠다!"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호법사자는 어둠의 존재와 충돌을 피하려는듯 경공을 돋우어서 재차 능공허도의 신법으로 하늘을 날았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피하다 말고 공중제비를 돌아서 지상에 내려앉았다.
그는 극심한 혼란을 느끼는 기색이었다.
"뭐...? 누구냐, 어째서 내게 말을 거는 것이냐?"
그러더니 발광하듯 외쳤다.
"닥쳐! 나를 지배하려 들지 마! 너 따위에게 잡아먹히지는 않는다!!"
콰과과과광
다음 순간, 호법사자의 전신에서 엄청난 소용돌이와 돌개바람이 일어나더니 용권풍(龍圈風)을 일으켰다. 그러더니 정면에서 크기가 수백 장은 될법한 어둠의 존재, 수호자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은 마치 괴물들의 격돌인 듯 해서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나도 숨을 죽일 수밖에 없었다.
천지가 붕괴하는 듯한 굉음과 함께 어둠의 존재가 안개를 거두고 서서히 형태를 띄우기 시작했다. 그것은 생전 처음보는 이계(異界)의 마물이었는데 내가 태어나서 봤던 괴물 중에 가장 이질적인 느낌이 들었다. 차라리 과거 금의위가 소환했던 마물은 양반으로 보일 정도로 기괴하고 흉한 외모였다.
쿠오오오오
검은 색의 나무가 땅에 뿌리를 박은 듯 하지만, 나무의 줄기와 잎은 하나하나가 눈이 돋혀 있었다. 무엇보다도 나무 중앙에 있는 거대한 눈동자는 소름이 끼칠 정도였으며 어둠의 촉수와 함께 불길한 음성이 떠돌았다.
달빛이 어둠에 삼켜져서 번득인다.
오오오오 -
호법사자의 공격에 반응한 수호자는 마주 대응하기 시작했다.
아움 -
공간이 일그러진다. 마(魔)가 천지에 쏟아진다.
천공 여기저기에서 알 수 없는 비신(秘神)의 힘이 모이더니 갑자기 지상으로 광선(光線)을 내뿜기 시작했다. 폭음과 폭열이 난무하며 쉴새없이 충격파가 터져나왔다. 호법사자는 수호자와 정면에서 공격을 마주하며 싸우는 듯 했다.
거기까지 관찰하고 있던 미호가 자신의 꼬리를 불러들였다. 그녀는 공포를 느끼는지 덜덜 떨고 있었다.
"무... 무슨 저런 존재가 있단 말이냐?"
"호법사자는 정말 엄청난 놈이군. 자연지기를 저토록..."
내가 감평을 하자 미호가 새파랗게 질려서 말했다.
"무슨 소리냐?! 호법사자가 아니라 저 이자나기노미코토를 말하는 거다!! 세, 세상에 저런 마물이 존재하다니... 너는 저 존재의 마력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냐?!"
"......?"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렇게 생각하는 건 미호만이 아닌지 서산대사와 유정의 얼굴도 파리하게 질려 있었다. 그들 또한 호법사자의 신위보다는 수호자 이자나기노미코토의 힘에 기가 질린 듯 했다. 아무래도 술법사들만이 느낄 수 있는 힘이 존재하는 모양이었다.
우리의 작전은 다음과 같았다.
일부러 유적의 문을 열어서 호법사자를 끌어들이고, 호법사자가 확실히 유적 안에 들어온 것까지 확인한 후 세 술법사의 힘을 합쳐서 전이술을 써서 유적 바깥으로 나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미호가 자신의 꼬리로 분신을 만들어서, 미리 내 피를 담아둔 통을 제단에 떨어뜨린다는 작전이었다.
물론 호법사자가 수호자와 싸워줄지가 관건이었으나 설령 그렇지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는 현재 근처에 있던 서산대사의 거처에서 은신결계를 펼치고 숨어있는 중이었다. 호법사자라고 해도 단시일내에 발견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천리안의 술법을 연결해서 흥미진진하게 호법사자와 수호자의 혈투를 지켜보는 중이었다.
그래서 의문이었다. 나는 재미있게 보고 있었는데, 정작 미호나 다른 자들은 보는 것만으로도 공포에 휩싸인 것이다.
' 왜 저러지?'
나는 저런 이계의 마물을 보는게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지만 그렇지 않은 자들에게는 충분히 공포와 악몽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게 아닌지 유정이 파리한 안색으로 내게 말했다.
"시주는 정말 이상한 분이구려. 이토록 강렬한 마(魔)를 느끼면서도 아무렇지도 않다니..."
"으음..."
뭔가 이상했다.
그들의 반응을 보니 일반인이라면 이 자리에서 미치거나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것이다. 나는 공포는 커녕 그저 어떻게 하면 저 [달에서 온 자], 이자나기노미코토를 쓰러뜨릴지 생각하는 중이었다. 내심 호법사자가 엿먹는 것 같아서 낄낄대는 감정마저 있는 것이다. 하지만 구미호는 물론이고 강대한 법력을 지닌 고승들조차 공포를 느끼는 상황에서 이렇게 평온해하는 나는 뭔가 이상한게 확실하다.
나는 이 상황에서 제일 이성적인 게 나라는 걸 확신했다. 그래서 입을 열었다.
"진정들 해. 우선 이 자리에서 끝까지 지켜보면 되는 거겠지?"
"그 방법 외엔 없겠구려. 이 결계를 나갈 엄두가 들지 않소."
"흠... 호법사자가 저 괴물을 이길 수 있을까?"
시선이 하늘으로 옮겨졌다. 이자나기노미코토의 크기는 너무나 거대해서 딱히 천리안을 안 써도 한눈에 들어올 정도였다. 그 옆에서 호법사자가 풍령지기를 뿜어내며 가공할만한 싸움을 하고 있는 것도 눈에 보였다. 그 싸움을 관전하던 미호가 말했다.
"정말 모르겠다. 둘 다 괴물이라서 모르겠어. 하지만 우리가 호법사자를 도와야할지도 모른다."
"뭐라고? 진심이야?"
"... 지금 월요의 수호자를 내버려두면 모든 게 파멸할 듯한 기분이 든다. 저건... 가만히 놔둬서는 안 돼."
미호의 말을 들은 서산대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상황을 지켜봅시다."
나는 곤혹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정말로 저 이자나기노미코토가 그리도 무서운 존재인가? 이건 내 담력이 크고 작고와 상관이 없는 문제였다. 내가 아닌 다른 자들이 느끼는 이자나기노미코토의 마력과 압박감은 굉장히 큰 듯 했다.
콰과과광
그리고 하늘에 불꽃과 함께 거대한 파괴의 충격파가 연신 터져나왔다. 호법사자는 말 그대로 젖먹던 힘까지 다 쓰는지, 하늘을 나는 상태로 수십 개의 소용돌이를 한꺼번에 이자나기노미코토에게 충돌시켰다. 그러자 천공에 이르던 어둠의 괴목(怪木)은 기음을 터뜨리더니, 이내 줄기부분에서 시꺼먼 흑혈(黑血)을 꿀렁거리며 토해냈다.
크오오오오
호법사자의 사자후가 울려퍼졌다.
[ 으아아아아아!! 풍신류 풍왕천도(風王天刀)!!]
쫘아아악
그 순간이었다. 호법사자가 기합을 내지르며 천공에 거대한 도(刀)를 소환했다. 바람의 기운이 극대로 뭉쳐서 광채를 발하는 그 도는 내가 아는 중에 단 하나의 경지를 상징했다. 나는 경악해서 외쳤다.
"강기경(罡氣境)!"
극한의 무예자만이 이를수 있다는 지고의 성취! 더욱이 순수한 강기만으로 뭉친 게 아니라 바람의 힘을 섞어서 형태를 만들 수 있다는 건 생각도 해보지 못했다. 풍왕천도를 거머쥔 호법사자가 엄청난 기세로 이자나기노미코토를 내리쳤다.
꽈과광
"으으윽..."
"허억..."
이번의 폭발은 지금까지 중에서 가장 큰 것이었는지 땅 밑이 흔들리고 가벼운 지진이 일어나는 게 느껴졌다. 풍왕천도가 정면으로 이자나기노미코토의 거대눈동자를 가격한 것이다. 눈동자가 터지면서 대지에 검붉은 피를 흩뿌렸는데, 그와 동시에 이자나기노미코토는 분노한 듯 촉수를 모아서 허공에 둥그런 무언가를 만들어 내었다.
뀨르륵
뀨르르륵
잠시 후 열매가 터지면서 어둠속에서 무언가가 잔뜩 튀어나오는게 보였다. 그것 또한 생전 처음보는 기이한 생물로써 마치 개와 벌을 합친 듯한 형상이었다. 그 생물체들은 호법사자에게 떼거지로 달려들었는데 호법사자가 발악하듯이 재차 기운을 내뿜었다.
콰광
"......"
나는 지켜보던 중에 기가 질렸다. 저게 인간이란 말인가? 그리고 다음의 전생에서 이자나기노미코토를 쓰러뜨리기 위해서는 보통 수단으로는 안 될거라는 사실을 직감했다. 호법사자조차도 죽을 힘을 다하는 저 신급 마물을 상대하려면 다른 방법이 필요할 것이다.
그렇게 약 반 시진이 지났다. 천공의 격돌은 갈수록 격해졌는데, 이자나기노미코토는 점차 약해져서 검은 피를 대지에 흘리고 있었다. 호법사자는 지치지도 않는지 끊임없이 풍신류의 비기를 쓰며 공격했다. 천령단의 힘으로 반영구적인 내공을 지속적으로 전해받으므로 능공허도를 써서 계속 떠있을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끝이 다가왔다.
[ 풍신류 결전오의 신풍(神風)!!]
호법사자가 끝장을 보려는지 결전오의를 사용했다. 풍신류의 결전오의는 뇌신류와 달리 실체화된 분신을 소환해서 동일한 전력을 몇 배나 내뿜는 듯 했다. 실체이자 환상인 신풍의 결전오의가 동시에 강기경의 공격을 내리쳤다.
[ 받아라, 최종오의 천도풍신(天到風神)!]
콰지직
어둠이 터져나갔다. 이번 공격은 확실히 치명상인 듯 했다.
[ 크아... 아... 아아...!!]
이자나기노미코토가 처절한 비명을 내질렀다. 그러더니 몸 주변에 새하얀 광채가 기포처럼 떠올랐는데, 이윽고 [달에서 온 자]의 몸뚱이 전체가 기포와 함께 터져나가기 시작했다. 지켜보던 자들은 모두 눈을 돌려서 섬광에서 눈을 보호했다.
쿠콰콰콰쾅
흰 섬광의 폭발이 수백 장 내에 몰아쳤다. 우리는 자리를 멀리 옮긴 것도 무색하게 폭발의 반경에 들어갈 뻔 했기에, 급히 내가 유정과 서산대사 미호를 잡아채서 멀리 도망쳤다. 등 뒤에서 느껴지는 폭발이 무시무시했다.
쿠구구구구...
후두둑
폭발의 잔향이 가라앉자, 나는 끌어안고 있던 미호에게 말했다.
"괜찮아?"
"으으... 설마설마 했는데 저 인간이 이자나기노미코토를 홀로 토벌할 줄이야."
미호는 폐허가 된 마니산보다 그게 더 신경쓰이는 모양이었다. 그건 유정이나 서산대사도 마찬가지인 듯 했다. 서산대사가 한숨을 쉬었다.
"허어... 인간이 저토록 강할 수 있다니 개안(開眼)한 느낌이구려."
"폭발로 죽었을까?"
"알 수가 없소. 알아봐야 하오."
잠시 후 미호와 서산대사가 식신과 법수를 소환해서 정찰을 보냈다. 그리고 반 시진동안 찾아본 결과, 놈의 모습이 이 일대에서 사라졌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우리는 가만히 있어도 별 수 없었기에 다시 유적으로 가기로 했다.
폐허가 된 유적에서 우리는 이자나기노미코토가 뚫고 나온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지금도 마기(魔氣)가 흐르는 게 무시무시했다. 잔해를 건너서 더욱 안쪽으로 들어갔는데, 희한하게도 제단이 있던 곳은 피해가 없이 멀쩡했다.
' 이자나기노미코토가 일부러 제단의 방은 공격하지 않은 건가?'
벽은 이미 뚫려 있었다. 뚫렸다기보다 수호자를 쓰러뜨리자 열린 듯 했다. 우리는 다같이 벽 너머의 다리를 건너려 했다. 이 곳 또한 외나무다리가 존재하는 식이었다.
나는 문득 불길한 느낌이 들어서 다리 바로 앞에서 멈추어섰다.
"잠깐만!"
"왜?"
"기다려 봐."
콰콰쾅
잠시 후, 나락의 심연에서 거대거미가 솟구쳐 올랐다. 익숙한 놈이었기에 나는 황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 뭐? 뭐야? 저 놈은 그냥 시련 막바지에 등장하는 깜짝 졸개였단 말인가?'
그 말대로라면, 수요의 유적에도 원래 [수호자]가 존재했다는 뜻이다. 그러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나는 침입자를 놀래켜줄 겸 마련된 깜짝 졸개인 거대거미와 그동안 드잡이질을 한 셈이다.
내가 허탈해할 때 미호가 자신있게 말했다.
"저 정도는 잡을 수 있느니라."
"서둘러 퇴치합시다."
하지만 나 혼자서도 거대거미를 잡을 수 있으니, 이 인원으로 못 잡을 리가 없었다. 미호가 술법을 쓰고 서산대사와 유정이 불문의 술법으로 거미를 붙잡았다. 마지막으로 내가 달려들어서 뇌명을 전개한 상태로 거미를 회쳐버리고 말았다.
키이이이
"기다려."
거대거미가 허공에 거미줄을 남긴 채 심연으로 떨어져 죽자, 미호가 전이술을 이용해서 맞은편으로 건너갔다가 돌아왔다. 미호의 손에는 찬연한 빛을 내는 고대의 검(劍)이 한 자루 들려 있었고, 다른 손에는 거울과 옥(玉)이 들려 있었다. 나는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했다.
"그건 뭐야? 천총운검만 있는 게 아니었나?"
"아무래도 이거 3개가 통째로 월요(月曜)인 것 같구나."
"흐음."
즉 고대의 동영 삼신기 전체를 월요라고 칭했다는 뜻이었다. 월요 천총운검이라고 칭한 것은 그 중에서 천총운검이 가장 강력한 신보이기 때문이리라. 미호가 자신의 품 속으로 월요의 비보를 집어넣으며 생글생글 웃었다.
"아하하, 그럼 나가자꾸나."
나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좋겠네. 천계로 올라가서."
"후후 그러면 좋지 않겠느냐?"
미호는 유적의 방을 나가면서 말했다.
"다시 천계로 돌아가면, 이번에는 아무런 악덕도 저지르지 않고 서왕모 님을 모실 것이다. 그리고 그동안 있었던 일을 모두 반성하고 착하게 지낼 것..."
그 때였다.
쿠웅
미호의 가슴에 갑작스러운 풍탄(風彈)이 날아와서 꽂혔다. 미호는 믿을 수 없다는 기색으로 자신의 가슴을 바라보더니 서서히 옆으로 쓰러졌다. 서산대사와 유정은 즉시 술법을 펼쳐서 풍탄을 막아냈으나 나는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안돼!!"
나는 미호에게 달려가서 끌어안았다. 미호의 가슴에는 큰 구멍이 뚫려 있어서, 대라신선이 와도 미호를 살려낼 수 없었다. 미호는 피를 토해내며 말했다.
"하아, 하아... 거, 걱정 마라... 내 목숨은 아홉... 이 정도로 죽지는 않아..."
"빌어먹을...!!"
나는 이를 악물고 유적의 잔해 위를 바라보았다.
그 곳에는 풍신류의 호법사자가 서 있었다. 놈은 얼굴을 제외한 전신에 화상을 입어서 처참한 몰골이었고 한쪽 팔이 사라져 있었다. 게다가 쓰고 있던 흑호가면이 사라져서 맨얼굴이 드러났는데, 화상을 입지 않은 맨얼굴은 잊을 수가 없이 내게 각인되었다. 십자흉터가 얼굴 가운데에 나 있는 미남상의 중년이었다.
호법사자는 일그러진 얼굴로 말했다.
"귀찮은 일 대신 해줘서 고맙다. 이제 모두 죽어라."
나는 눈에서 불꽃을 튀겼다. 척 봐도 저 놈은 정상이 아니었다.
"웃기지 마라. 네놈은 반송장이야. 이쪽이야말로 네놈을 죽여버리겠다!"
"크흐흐... 반송장이라... 그래, 그럴지도 모르지만."
쿠구구구
"......!!"
"너희는 지금 모두 송장이 되겠구나."
나는 호법사자의 손 위에 떠오른 직경 십 장 짜리 거대한 풍탄을 보자 숨을 헛들이켰다. 아직도 저런 힘이 남아 있었단 말인가?! 전투준비를 하던 서산대사와 유정도 아연해졌는지 안색이 새하얗게 변했다. 저렇게 거대한 자연지기를 맞게 되면 도무지 살아날 방법이 없었다.
뇌명을 써도 늦는다.
곧 풍탄이 이쪽으로 쇄도해 왔다. 이제는 더 이상 방법이 없었기에 모두가 눈을 질끈 감았다.
파아앗
[ 아아... 아아아...!!]
나는 내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은빛 여우의 본체가 나타나더니 그 풍탄을 정면으로 막아내고 있었다. 하지만 술법이나 방어막이 모조리 찢겨나가는 형세가 처참했다. 이윽고 미호는 피투성이가 되어서 그 자리에 쓰러졌다.
"안돼!!!"
제발.
제발 안돼!!
풍탄을 막아낸 미호였으나 이미 목숨이 다해가는 상황이었다. 나머지 8개의 목숨을 모조리 써서 신체의 형태를 온전하게 남겼으나, 이제는 죽음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내가 미호의 몸을 급히 안아들자 미호가 꺼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 백웅...]
"미호!!"
미호가 웃는 것 같았다.
[ 그간... 재밌었어...]
그리고 은빛 구미호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미호가 쓰러진 자리에는 월요가 떨어져서 적막감을 만들어 내었다.
"......"
모르겠다.
미호는 어째서 우리를 구한 걸까?
혼자서라도 전이술로 도망치면, 어떻게든 월요의 힘으로 살 수 있었을텐데 왜?
' 아냐...'
나 때문에 죽은 건 아닐 것이다.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어도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러면 안 된다. 나는... 이미 짊어진 게 많은데. 그 빚도 다 갚지 못했는데 또 새로운 빚이 생겨서는.
안돼.
어떻게 생각해도 안돼.
"아아..."
텅빈 눈에서 눈물이 비직 새어나오고 있었다. 인간이 수백 명이나 눈 앞에서 죽어도 나오지 않던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나왔다. 내가 꿇어앉아서 멍하니 미호의 시신을 안고 있자, 호법사자가 인상을 찡그렸다.
"요괴 따위가 내 일을 끝까지 방해하는군. 기력도 별로 없으니 네놈들은 직접 쳐죽여주마."
"쳐죽인다고...?"
호법사자가 하는 말에 정신이 나갈 것 같다.
머릿속이 터질 것 같다.
저 개새끼가.
나는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눈물을 닦고는 말했다.
"날 죽인다? 좋아.. 좋다고. 나같은 놈, 죽여도 뭐 어쩌겠냐고..."
자조적인 웃음이 새어나왔다.
"으흐흐흐... 하하하...."
이게 문제다.
나만 죽으면 되는데, 내가 죽으면 그저 다시 시작할 뿐인데 - 나같은 걸 지키겠다고 목숨을 거는 자들이 있었다. 그럴만한 가치는 없을텐데, 그렇게 해 버리는 자들이 있었다. 망량의 목이 생각나고, 미호의 시신이 생각난다.
나만 영겁토록 혼자만의 기억에서 고통스러워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의 감정은 어떻게 해도 다른 언어로 설명할 수가 없다.
살아남는 것도 좋다.
이번 생은 오래 살기로 했다.
그렇게 오래 살면서 힘을 쌓아서 목표를 이루기로 했다.
하지만... 그런 게 지금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나를 지키려다 죽어간 자가 눈 앞에 있다.
이성이 아니라 자신의 감정으로 미호가 죽어갔다.
"그러니 지금부터라도 죽겠다."
이 원수를 목숨을 바쳐서라도 갚지 않으면...
나는 사내가 아닌 것이다.
침 하나를 뽑는다.
그리고, 미리 준비되어 있던 대법에, 하나의 별침(別針)을 놓는다.
광명신의 화서명이 지니고 있던 화씨백팔침 비법 최후의 비침(秘針).
가주와 직계에게만 전승되는, 화씨일문 최악(最惡)의 비기.
"대라멸진(大羅滅盡)을 시행한다."
동시에 뇌명이 내가 여태껏 본 적이 없을 정도로 격렬하게 소모된다.
일문(一門)이 열렸다.
내 몸은 빛살처럼 변했다.
콰드득
음속을 몇 배나 초월한 내 주먹이 호법사자의 가슴팍을 후려갈겼다. 피를 화살처럼 뿌리며 날아간 호법사자의 모습은 분신 따위가 아니었다. 순식간에 그의 호신강기를 박살내고 전신의 육공에서 피를 흘리게 만든 것이다.
무기는 쓸 생각이 없다.
저 놈을 개처럼 때려죽이고 싶다.
어차피 죽을 목숨이라면, 저 놈에게 모욕을 주고 싶다.
쿠콰쾅
"커헉....!! 이 놈....!!"
대라멸진의 비기는 필멸일광(必滅一光)이라고도 불린다. 그것은 자신의 목숨을 제물로 바치는 대신, 반 각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에 단 하나의 빛을 만들어내기 때문이었다. 그 빛은 전신의 팔문둔갑(八門遁甲)을 열어냄으로써 시작된다.
이문(二門)과 삼문(三門)이 동시에 열렸다.
기(氣)가 고양되고 진기의 이동속도가 몇 배나 빨라진다.
부우우웅
호법사자가 떨쳐낸 분신 수십 마리가 몰려들어서 저번처럼 구극혈풍신권을 시전한다. 그러나 내게는 그 모든 것이 느리게 보였다. 그리고 기(氣)를 뛰어넘어서 더욱 섬세한 자질을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
' 보인다.'
허실은 통하지 않는다. 나는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뇌운유권(雷雲柔拳)으로 분신들의 목줄기를 하나하나 터뜨렸다. 뱀같은 권로가 순식간에 공기를 박살낸다.
"아니!"
사문(四門)과 오문(五門)과 육문(六門)이 한꺼번에 열렸다.
코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입에서 각혈이 올라왔다.
살아남을 생각 따위는 없기에, 내 기는 이전에 없을 정도로 솟구쳐 올랐다. 황금빛 기운이 전광(電光)을 머금더니 오른손에 맺혔다. 뇌광을 토해내며 앞으로 뻗어나간 기운은 용(龍)처럼 변해서 천지를 빛으로 물들였다.
꽈릉!!
"끄으..."
호법사자는 전신이 새까맣게 변해서 잠시 기절한 모양이었다. 충천한 뇌광이 내리쳤으니 당연한 일이다. 이것이 칠문(七門)을 연 상태로, 천지간의 기와 감응을 하는 상태였다. 나는 두 눈에서 피눈물을 흘리며 주먹을 꽉 쥐었다.
좀 더 버텨야 된다.
내공이 쉴새없이 날아가서 무진장에 가깝던 양이 바닥을 보인다. 대라멸진과 뇌명이 합쳐지자 절세무적의 힘을 부여하는 대신, 무시무시하게 기를 먹어치우기 때문이다.
손톱과 발톱이 저절로 뽑히는 게 느껴진다.
몸이 생명력을 담은 그릇을 유지하지 못하고 너무나 강대한 팔문의 기에 박살나고 있다. 하지만 전신을 벌레가 갉아먹는 듯한 이 고통 속에서도 나는 되려 안도감을 느꼈다. 이걸로 조금은 미호에게 속죄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각혈을 뱉어내었다.
"으아앗..."
호법사자가 깨어나서 뒷걸음질쳤지만 나는 더 빠르게 앞으로 다가가서 최후의 일격을 날렸다.
팔문(八門)
개방(開放)
뇌신류(雷神流) 정권(正拳)
......
피덩어리가 터져 나갔다. 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그리고 확실하게 호법사자를 말살한 것이다. 호법사자의 몸뚱이는 수백 개의 잔해를 남기고 핏방울을 날리며 공중에 흩어졌다. 그는 죽을 때까지도 믿을 수 없어하는 기색인지 입을 벌리고 있었던것 같다.
꽈과광
뒤늦게 소리가 진폭을 울렸다. 뒤쪽에 있던 거대한 구릉이 통째로 날아가 버렸다. 나는 정권 자세를 취한 채 더 이상 움직일 수가 없었다.
"......"
나는 혈우(血雨)를 맞으며 생각했다.
' 나는 정말 바보인가...'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다. 그저 아까까지 준비했던 침술대법과 뇌명을 합쳐서 끈질기게 싸우며 풍신류의 기술을 알아보는게 더 나았다. 하지만 미호의 죽음 때문에 머리가 확 돌아가서, 사용하면 죽을 수밖에 없는 대라멸진을 써버리고 만 것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영혼이 죽어버릴 것 같았기에, 몸을 먼저 죽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이 나같은 전생자(轉生者)가 살아가는 방법일지도 모른다.
나는 희미하게 눈을 떠서 서산대사와 유정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다음에는 좀 더... 좋은 인연으로..."
서산대사와 유정은 굳은 얼굴로 내 혈투를 지켜보고 있다가, 내 말을 듣자 동시에 합장했다. 그들은 합장한 상태로 염을 외웠다.
"아미타불."
나는 눈을 감았다.
이제 생명력이 다 떨어진다.
그것이 내 10번째 죽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