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검신-99화 (99/1,615)

0099 ----------------------------------------------

암천향(暗天鄕)

호법사자의 분신은 흑호(黑虎)가면을 씰룩이며 내 쪽으로 걸어왔다. 그 걸음은 표홀하기 그지 없었는데, 내가 보았던 그 어떤 보법과도 다른 것이었다.

' 분신은 한 번만 강한 타격을 입히면 사라진다.'

인간에게 부상을 입히는 수준이 아니라, 그저 스치는 수준의 유효타라도 좋다. 기(氣)로 만들어진 분신이라는 건 매우 불안정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나는 이 자리에서 그저 상대에게 한 방만 스쳐도 이기는 셈이다.

하지만 호법사자의 분신이 멈춰섰다. 그리고는 딱딱한 목소리로 변했다.

"뇌신류(雷神流)인가? 뇌령팔식(雷靈八式)이라니."

"뇌신류를 아는가?"

"하하, 시치미를 떼는구나. 풍신류와 뇌신류는 가장 오랜 세월동안 겨뤄왔으니 당연히 서로의 수법을 잘 알고 있지."

간단한 기수식만 보고도 알아챌 정도면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게다가 풍신류의 수장이라는 걸 고려하면, 그는 도리어 나보다 뇌신류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쿠구구구

호법사자의 분신이 왼쪽 손을 들었다. 거기에는 이미 응축된 풍탄(風彈)이 고여있었는데, 풍탄의 잠재력은 나로써도 가늠할 수가 없었다. 얼마나 강력하면 풍탄 주변으로 공간이 일그러지는게 육안으로 보일 정도였다. 호법사자가 싸늘하게 웃었다.

"뇌신류의 애송이. 실력 좀 볼까?"

투웅!

그가 손가락을 차례대로 튕기자 무시무시한 속도로 흉탄(凶彈)이 쏘아졌다. 나는 급히 창을 움직여서 그 공격을 걷어내었는데, 총 다섯 번의 공격 중에서 네 발을 걷어낼 수 있었다. 한 발은 막지 못해서 허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내가 자세를 정비하고 반격하려 할 때였다. 마치 유령처럼 내 눈 앞으로 흘러들어온 호법사자의 분신이 난데없이 일 권(一拳)을 내질렀다.

콰광!!

"으윽!"

나는 정면에서 내공을 솟구쳐서 받아냈으나 묵직한 게 뼛속까지 파고들었다. 고작해야 2할의 힘일 뿐인데도 살짝 숨이 멈추는 기분마저 들었다. 이 일격의 무게에서 나는 호법사자와의 전력차를 절감했다.

숨이 확 막히더니 발이 땅에 끌려서 일 장을 밀려났다.

' 빌어먹을. 너무 강해...!!'

스치기만 하면 된다. 스치기만 하면 풍신류 호법사자의 분신을 소멸시킬 수 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는 란(欄)의 공격을 흩뿌렸다. 가공할 창섬(槍殲)이 순식간에 수십가닥이나 허공을 스쳤으나, 내 지근거리 일 장(一掌)에 들어온 호법사자의 분신은 갑작스럽게 분열했다.

쉬쉬쉭

"헉..."

환상적인 신법이었다. 내 창섬에 전혀 스치지도 않은 채 유영하듯이 바람이 되어서 흐르는 호법사자의 신법은 감히 현재의 내 경지로는 넘볼 수 없는 수준이었다. 차라리 춤을 추는 듯한 그 흐름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때 호법사자의 분신이 휘파람소리와 함께 뒤로 물러섰다.

그러더니 키득거렸다.

"뭘 놀라고 그러나? 풍백보(風魄步)를 처음보나 보군."

나는 얼굴이 확 붉어졌다.

그는 장난을 하듯 다시 풍신류의 기수식을 잡더니 말했다.

"애송아. 잘 봐라."

위이잉

마치 벌떼 우는 듯한 소리가 호법사자의 분신 주변에서 울려퍼졌다. 내가 긴장한 채 대비하고 있자 호법사자가 말했다.

"이것이 풍신류 비기 풍마멸진(風魔滅盡)이다."

솨사사삭 -

"......!!"

그 순간, 호법사자의 분신이 마치 복제하듯이 늘어나서 내 전방으로 뚜벅뚜벅 걸어왔다. 놀랍게도 분신이 사라지는 게 아니라 걸음걸음마다 새로운 분신이 또 생기는 듯 했다. 그 분신이 내 주변을 원형으로 돌듯이 둘러쌌지만 나는 감히 공격할 생각도 하지 못했다. 분신 하나하나에 담긴 기가 전부 진짜같았기에 진체를 간파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 세상에 이런 무공이 존재한다는 말인가?!'

이윽고 20여체 가까이 늘어난 후에야 분신이 차례로 공격해 들어오기 시작했다. 나는 창을 휘두르며 맨손공격을 막아내며 분신을 쳐 냈으나, 그 분신은 사라지지 않았다. 사라지기는 커녕 되려 더 강한 기운을 머금으며 나를 정면으로 공격해 오니, 급히 뇌영보 천주살을 사용해서 뒤로 피할 수밖에 없었다.

콰과곽

나는 천뢰무극창(天雷無極槍)의 절초를 시전하기 시작했다. 창두에 맺힌 기운이 한층 강렬해지더니 뇌령지기가 한층 강하게 분신들을 지졌다. 뇌령팔식으로 처리가 되지 않던 분신들이 천뢰무극창의 1초에서 3초까지를 연환하자 반수 이상 격퇴되었다. 그러자 나를 빙빙 둘러싸고 있던 분신 중 하나가 껄껄 웃었다.

"으하하, 천뢰무극창이라! 배울 건 다 배웠나보지?"

"잘난체 마라!"

나는 이를 악물고는 천뢰무극창의 힘을 하나로 모았다. 정신이 집중되면서 란(欄), 나(拏), 찰(刹)의 기본기 요결이 머릿속에 새겨졌다. 집중력을 발휘하자 초식은 더욱 정밀하고 빨라졌으며, 종래에는 창섬(槍閃)의 폭풍이 반경 이 장을 죽음의 공간으로 만들었다. 풍차처럼 휘도는 창날에 분신이 걸릴 때마다 찢겨 나갔다.

퍼억!

"헉...!!"

나는 갑작스러운 공격에 헛숨을 들이켰다. 갑작스럽게 낮도깨비처럼 나타난 분신 하나가 내 얼굴을 쳤기 때문이다. 호신기를 이용해서 버텨내긴 했으나 머리가 아찔해졌다. 만일 조금만 더 힘이 강했다면 그대로 목뼈가 돌아갈 정도로 강력한 공격이었기 때문이다.

동시에 사방을 돌던 분신들이 합창하듯 외쳤다.

[ 풍마멸진 구극혈풍신권(求極血風神拳)!]

그리고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소나기처럼 수도(手刀), 발차기, 권, 슬격(膝擊)이 쏟아졌다. 사방팔방에서 분신들이 덤벼들었다.

[ 영권(影拳)!]

"큭."

퍼버버버벅

[ 박경(搏經).]

한 쪽의 공격을 막자, 다른 쪽에서 발차기가 날아와서 내 배를 찼다. 창을 휘둘러 보았으나 이미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 호수(鎬洙).]

"어억."

창을 휘두르면 또 이번에는 밑에서 위로 무릎차기가 날아온다.

퍼억

[ 장괘(裝掛).]

뒤로 물러서자 인중치기와 동시에 단전밟기가 날아왔다.

콰직

[ 필보(泌寶).]

허리를 숙이자 기다렸다는 듯 팔꿈치가 등을 찍었다.

분신들은 차례대로 친절하게 권술 이름을 읊으며 나를 패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에서 도깨비처럼 불쑥불쑥 나타나면 내 팔다리를 잡아채더니 부러뜨리려는 놈도 있었다. 기가 막힌 것은 하나같이 명인(名人)급의 숙련도를 지니고 있어서 지근거리를 허용하자 도무지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내가 무식한 내공으로 호신기를 극대로 돋우어서 버티지 않았다면 이미 맞아죽었을 것이다.

[ 벽사(璧私).]

뻐억

장저(掌低)의 타격이 내 턱을 아래에서 위로 갈겼다. 잠깐동안 기절해 버렸다.

퍼버버벅

"으아아악."

나는 비명을 지르며 정신없이 쏟아지는 구타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거대한 내공을 이용해서 호신기를 끌어올려서 버티고 있었으나 눈 앞에 별이 보일 정도였다. 나는 내가 정신없이 당하는 이유를 겨우 알아챘다.

' 비, 빌어먹을... 분신과 본체의 기를 전혀 구분할 수 없어! 그리고 내 공격을 투과해버리는 성질에 위치까지 맘대로 바꿀 수가 있으니...'

내가 태어나서 보아왔던 분신술 중에서 비교를 불허할 정도의 극치(極致)! 이광 또한 분신술을 시전할 수 있었으나 이런 정밀도와 숫자, 기교와 허실을 동원할 수는 없었다. 나는 한동안 처맞던 중 내공을 크게 발(發)의 요결을 이용해서 터뜨렸다.

콰과과광

[ 우오오오!!]

나는 동시에 사자후를 터뜨렸다. 섬광이 내 몸을 중심으로 뻗어나오더니 분신들을 없앴다. 일단의 과정이 끝나자 나는 다시금 분신과 마주설 수 있었고, 호법사자의 분신은 여유작작하게 팔짱을 낀 채 나무에 기대어 있었다.

잔뜩 얻어터진 나를 보던 호법사자는 흥미로운 듯 말했다.

"뇌신류 면허개전을 받을 수준은 되는군. 그리고 그 엄청난 내공, 흥미로워. 하하하..."

나는 여유작작하게 웃음을 터뜨리는 호법사자를 보고 이를 악물었다. 설마설마 했지만 호법사자라는 존재는 정말 차원을 달리하는 존재였다. 괜히 미호가 싸울 생각도 못하고 피하려고 한 게 아니었던 것이다.

고작 2할의 힘이었으나 기(技)의 수준이 어른과 어린아이 수준의 차이가 나서 건드릴 수조차 없었다. 약한 힘으로 오랫동안 때리고 있으니 되려 더욱 괴로운 것이다.

"큭... 왜냐."

"뭐가 왜냐는 거지?"

호법사자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나는 으르렁거렸다.

"왜 고려까지 와서 우리를 뒤쫓는 거지? 나는 백련교와 상관하고싶지 않아."

"하하... 뭐 그렇겠지만 말이다."

풍신류 호법사자의 분신은 약간 옅어져 있었다. 아무리 그라도 오랫동안 분신과 비기를 오랫동안 쓰고 있으니 밀도가 옅어지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불리하다고는 눈꼽만큼도 생각하지 않는지 말했다.

"네가 발견한 성련은 원형(原形)을 간직하고 있는 순수한 성련이다. 그게 있어야만 대업을 이룰 수 있으니 우리로써도 어쩔 수 없다."

"원형이라고?"

"그렇다. 그러니 순순히 따라와라. 따라오면 죽이지는 않으마."

"세상에는 죽는 것보다 더 비참한 일이 많이 있지."

"하하하... 뭐 마찬가지일텐데 왜이리 용을 쓰는가?"

웃음을 터뜨리는 호법사자의 분신이 다시 덤벼올 자세를 취했다. 나는 이제는 정말 안되겠다고 생각하고는 크게 한숨을 쉬었다.

"후우. 안되겠군."

"뭐가 안된다는 말이지?"

"내가 너무 건방졌어. 이 상황에 수를 아끼려고 하다니."

"뭐...?"

나는 대답하지 않은 채 호흡을 다듬었다. 눈에서 뇌광이 일어났다.

뇌명(雷鳴)!

푸콱!

말이 끝나는 순간 내 몸은 엄청난 속도로 이동해서 분신의 목과 사지에 선(線)을 그어버렸다. 아마 분신의 힘으로써는 반응할 수 없는 속도였으리라. 호법사자의 분신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자신의 육체에 생겨난 상흔을 보더니, 이윽고 나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네놈... 설마... 결전오의를..."

"닥치고 사라져."

퍼엉

그리고 호법사자의 분신은 사라졌다. 나는 전신의 타박상을 화타오금희의 호흡으로 가라앉히며 한숨을 쉬었다.

"제길... 빌어먹게 강하군. 관찰할 여유를 안 줘."

나는 나타난게 호법사자의 2할급 힘을 지닌 분신이란 걸 알게 되자, 전력으로 없애기보다는 놈의 기술을 이끌어내려고 했다. 어차피 분신을 쓰러뜨려봤자 본체는 멀쩡하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기술의 정보를 알아내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풍마멸진에 너무 많이 맞아서 죽을 것 같았기 때문에 2대 비기 중 하나인 뇌명을 사용해서 재빨리 쓰러뜨릴 수밖에 없었다.

' 이제부터가 큰일이군.'

호법사자는 내가 결전오의 뇌명을 쓸 줄 안다는 걸 알아채고 말았다. 이광이 말하길, 뇌명은 굉장히 특수한 기술로써 중원에 흩어진 뇌신류 전승자들 중에서도 일부만 전수받은 것이라고 했다. 또한 뇌명이 있기에 뇌신류가 풍신류를 앞지른다는 말도 언제나 덧붙였다. 그런만큼 풍신류의 '뇌명'에 대한 적개심은 보통의 경우를 초월할 것이다.

쿠구구궁!!

아니나 다를까, 외곽의 결계에서 거대한 파괴음이 들렸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엄청난 기가 뿜어져 나오며 쇠망치처럼 결계를 내리치고 있었다. 그 공격에는 명백한 노(怒)의 감정이 담겨 있었기에, 호법사자가 분노의 감정을 가지게 되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2할 힘을 지닌 분신이 사라졌다는 건, 현재 놈은 8할의 힘밖에 쓰지 못한다는 뜻이다. 분신은 굉장히 편리한 기술임에도 실제전투에서 잘 안 쓰는 이유였다. 기를 얻은 분신이 파괴될만큼 그만큼의 기력을 고스란히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분신으로 잃어버린 기력을 회복하는 건 단시일 내에는 불가능했다.

우우우우 - !!

잠시 후 참성단의 의식이 끝나고 결계가 더욱 강화되었다. 나는 한숨 돌리게 되었다는 생각에 나무에 기대었다. 의식제단에서 내려온 미호가 말했다.

"잘 했어. 우리 목숨이 위험한 순간이었는데 잘 막아냈구나."

나는 나무에 기댄 채로 힘이 빠져서 말했다.

"저 놈은 괴물이야. 8할 힘을 가진 분신을 이 안에 들여놓으면 어떡하지?"

내 걱정에 미호가 생긋 웃었다.

"걱정 마라. 이번에 친 결계는 분신도 완벽하게 막을 수 있다. 대술법사 3명이 법보를 제물로 바친 대결계니까 적어도 우리는 하루를 버틸 수 있을 것이다."

"결계의 효과가 하루인가?"

"그래. 그 안에 수를 내어야겠지."

그렇게 말한 미호가 서산대사를 휙하고 돌아보았다.

"중놈아, 뭐 좋은 생각 없냐? 호법사자의 실력은 방금 너도 보았을텐데, 저 괴물같은 인간을 어찌할 방법이 없냐는 말이다."

"으음. 확실히 호법사자는 초인(超人)이오. 그가 공격해오면 이 자리의 누구도 50초 이상 버틸 수 없소."

서산대사 또한 의식을 치르면서 호법사자의 실력을 두 눈으로 보아서인지 심각한 기색이었다. 그는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참성대 밑의 유적(遺跡)에 가야만 할 것 같구려."

"유적이라고?"

"빈승을 따라오시오."

우리는 서산대사를 따라서 참성단 뒤편의 돌무더기 건물로 향했다. 굉장히 오래 전에 만들어진 듯한 돌무더기가 여기저기에 있었다. 돌무더기 사이의 풀밭을 지나던 서산대사가 왠 자리에서 멈춰섰다. 그리고는 외쳤다.

"갈(喝)!"

쿠르르릉

그러자 그 앞의 땅이 갈라지더니, 이윽고 지하로 향하는 거대한 층계참이 나타났다. 나는 물론이고 미호도 입을 벌렸다. 전혀 생각지도 못했는데 이 산에 이런 게 숨겨져 있었단 말인가? 미호가 날카로운 눈으로 서산대사를 바라보더니 말했다.

"나를 속였군. 아니, 이 마니산 전체가 유적이었어."

높이가 150여 장에 이르는 야산, 마니산.

이 산의 내부에는 거대한 비밀공간과 유적이 존재했던 것이다.

"미안하오. 허나 이 비밀은 너무나 중대하기에 함부로 알려줄 수 없었소."

미호가 이죽거렸다.

"그래 네놈도 죽기는 싫다 이 말이렷다? 호법사자 놈에게 감사해야겠는걸."

"따라오시오."

"흥!"

저벅 저벅

우리 네 사람은 천천히 밑으로 내려갔다. 불빛은 유정이 화염을 소환했고, 미호도 도깨비불을 소환해서 밝히자 전혀 보는데 문제가 없었다. 선두에 서서 걷고 있던 서산대사가 말했다.

"말해두지만 이 곳에 칠요가 있는지 없는지는 빈승도 알 수 없소. 단지 이 곳이 아주 고대적의 유적이라는 것밖에 모르오. 그리고 사악한 광기(狂氣)마저 존재하고 있소."

"광기라고?"

"참성대가 만들어지기 훨씬 이전에 만들어진 유적이라고 생각하오. 세월이 지나서 우연히 위에 참성대가 들어섰을 뿐, 이 유적의 형태나 양식은 우리가 알고있는 것과 굉장히 다른 것이오."

"잔말 말고 빨리 가라. 저 괴물놈이라면 언제 결계를 깰지 몰라."

저벅...

나는 기이한 기시감에 휩싸였다. 분명히 여기에는 처음 오는건데, 마치 예전에 와본 듯한 기분이 드는 것이다. 한참동안 층계참을 걷던 나는 그 이유를 깨닫고 깜짝 놀랐다.

"......!!"

"왜 그래?"

"아, 아무것도 아냐."

나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켰다.

그러고보니 이 층계참이라던가, 주변에 조각된 것들은 모두 수요(水曜)의 유적에서 보았던 것과 대동소이한 것이다! 장소나 습도가 전혀 달라서 깨닫지 못했지만, 이건 분명히 수요의 유적을 만든 자와 같은 자가 설계한 유적인 게 분명했다.

내 생각은 이윽고 확신이 되었다. 잠시 후 거대한 공동이 나오고, 여기저기에 고대양식의 방이 만들어져 있었다. 수요의 유적보다 훨씬 크고 거대한 곳이었다. 하지만 곳곳에 보이는 조각이나 항아리는 모두 내가 보았던 것과 비슷했다.

그리고 서산대사는 왠 제단(祭檀) 위에 올라갔다. 그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여기까지가 이 유적의 끝이오. 보다시피 별다른 것은 발견되지 않았소. 책이나 그럴듯한 유물도 딱히 발견되지 않은 것이오. 굳이 있다면 저 비석(碑石)이지."

제단 앞에는 비석이 세워져 있었다.

거기에는 괴어(怪語)가 새겨져 있었다.

"으음."

순간 나는 수요의 유적 앞에 서 있었을 때보다 더욱 선명하게 무언가가 밀려들어오는 걸 느꼈다. 그것은 마치 거대한 손이 억지로 내 뇌를 헤집는듯한 기분이었다. 인간으로써의 무언가가 잠식당하는 기분도 들었다.

잠시 띵함을 느낀 후 비석을 살펴보았다.

' 읽힌다.'

놀랍게도 예전에 수요의 유적에서 떠듬떠듬 단어 몇 개만 해석했을 때와 달리, 이번에는 두 줄 이상을 읽을 수 있었다. 나는 침착하게 관찰하다가 한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 이 앞에는... 수호자... 얻는 자의... 시련... 제단에 피를... 뿌려서... 제물의 방... 수호자는... 달에서 온 자... 저승에서 더러움을 접하여... 물로 씻음으로써... 태양... 폭풍... 달이 태어나... 거대한... 맹세의... 인연... 위대한 피의... 언약....  ]

피를 제단에 뿌린다는 게 확실해 진 듯 했다.

그리고 '제물의 방'이라는 게 존재하며, 칠요를 얻기 위한 시련일 가능성이 높다.

동시에 나는 고민했다.

과연 이 시련을 통과할 수 있을까?

물론 수요의 시련은 지금의 나라면 손쉽게 통과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거미의 출현방식이나 강대함, 공격방법을 몇 번이나 죽으면서 알아냈기 때문이다. 아무런 정보도 없는 상태에서 수호자와 싸우게 될 경우 내 사망확률은 급격히 올라갈 게 뻔했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바로 이 장소에 미호를 비롯해서 대술법사들이 여러 명 있다는 점이었다. 나는 마음을 정리한 후 일행을 불렀다.

"잠시 내 말 좀 들어 보시오."

나는 내가 비석의 내용을 해석했으며, 제단에 피를 뿌리면 수호자가 출현하며, 수호자가 지키는 것은 칠요일 확률이 높다는 설명을 했다. 설명을 끝까지 들은 셋은 모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특히 서산대사는 경악해서 그 자리에 엉덩방아를 찧을 정도였다.

"이... 이 유적은 내가 알기로 고조선 때부터 있었으며, 그 때부터 이 땅의 대현(大賢)과 학자들이 무수히 연구했던 것이오. 그런데 그 누구도 비석의 괴어를 해석하지 못했소. 그런데 백웅 당신이 해석했다고 말하는 것이오?"

"잘은 모르겠지만 그렇소. 제단에 피를 뿌려보면 알 수 있을 것이오."

"으으음. 그 수호자라는 괴물은 얼마나 강력하오?"

"내가 상대했던 수호자는 내 실력으로 충분히 쳐죽일 수 있을 정도였소. 그러나 다른 곳의 수호자가 얼마나 강할지 모르겠소. 확실한 것은 평범한 절정고수 수준에서는 50초도 버티지 못하고 잡혀먹힐 정도의 괴물인 게 확실하오."

내 말을 듣고 있던 미호가 제단 너머를 바라보며 말했다.

"네 말이 맞는 것 같구나. 벽 너머에 심상치 않은 마기(魔氣)가 느껴진다. 어떤 마(魔)가 존재하는 게 분명해."

"... 흐음. 하지만, 그게 만일에 칠요의 수호자라면, 그 수호자를 쓰러뜨리고 얻을 수 있는 칠요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이오?"

"무슨 말을 하고싶은 것이지?"

"빈승도 십이율주에게 밀명을 들은 몸이라서 칠요에 대해서는 얼추 알고 있소. 칠요 해인이 이 고려 땅에 존재하며, 다른 칠요 천총운검이 동영 땅에 있소. 헌데 그럼 여기에 있는 칠요는 무엇이오?"

"......"

그건 확실히 이상한 일이었다. 설마 이 참성단 밑에 알려지지 않은 칠요가 또 하나 있었단 말인가? 하지만 그런 것치고는 천 년 넘는 세월동안 그 누구도 발견하거나 낌새조차 채지 못했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 일에 가장 관심이 많은 건 미호인지, 그녀는 곰곰히 머리를 굴리는 기색이었다. 잠시 후 뭔가 깨달은 표정을 짓던 미호가 말했다.

"백웅. 그 비석의 내용을 전부 말해 보아라. 어쩌면 단서가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미호의 요구대로 내가 해석할 수 있는 비석의 내용을 모두 말해 주었다. 그것을 끝까지 듣고 있던 미호가 알았다는 듯 말했다.

"그래 알았어. 이 곳에 있는게 바로 진짜 월요(月曜)다."

"그게 무슨 소리요?"

미호가 훗하고 웃었다.

"너는 동영 창세신화의 삼귀자(三貴子)를 알고 있느냐?"

"잘 모르오."

"그것은 아마테라스 오오카미(天照大神)와 스사노오(素?嗚), 츠쿠요미노미코토(月?命)를 일컫는 것이다. 그리고 비석에서 설명하는 것은 삼귀자의 탄생과 확실히 연관이 있지."

"......!!"

미호가 깔깔 웃었다.

"아하하! 이상하다고 생각했지. 어째서 고려땅의 천부인과 동영의 삼신기가 대동소이한 거지? 결국 같은 존재가 매우 먼 옛날에 존재했고, 그 전설이 차례로 건너간 것 뿐이다. 주축이 되는 신보인 칠요만 남긴 채."

"그건..."

"월요 천총운검은 처음부터 동영이 아니라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떨쳐내는 영향력만으로도 동영땅을 수호하고 있었던 것이야."

"겐페이합전 때 사라졌다고 하지 않았나?"

"그런거 처음부터 동영에 없었던 거다. 아마 팔지경이나 팔척경곡옥은 적당히 천총운검에 갖다붙여서 천부인과 비슷하게 만들어낸 가상의 존재겠지. 그렇지 않고서야 본녀가 수십년간 천황의 곁에서 군림하고 있는데 칠요의 흔적조차 발견하지 못할 리가 없지."

미호의 가설은 황당한 수준이었지만, 지금 상태에서는 가장 그럴듯한 이야기였다. 무엇보다도 천황을 홀려서 동영땅 신화의 비밀에 가장 근접해있는 미호 외에는 그 누구도 이 사실을 추측해내기가 힘든 것이다.

미호의 말이 이어졌다.

"또한 그런 점에서 비춰본다면, 수호자가 [달에서 온 자]라고 설명되는 것은 아마도 수호자가 고대에는 창세신 이자나기노미코토(伊?諾尊)라고 불린 옛 존재였다는 뜻이겠지. 이걸로 모든 게 설명되었어!"

미호는 기뻐서 팔짝팔짝 뛰었다. 하긴 이제 칠요를 얻어서 천계로 되돌아가려는 자신의 꿈이 눈 앞에 다가왔으니 기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나는 마냥 기뻐할 수 없었기에 조심스럽게 미호에게 말했다.

"미, 미호."

"왜?"

나는 침을 꿀꺽 삼킨 후 말했다.

"삼귀자나 이자나기 같은 건 모르겠지만... 네 말대로라면 이 제단에 피를 떨어뜨리면 그 순간 [옛 존재]이자 창세신인 이자나기가 수호자로써 소환되어서 우리를 공격한다는 뜻이냐?"

"......"

장내가 침묵에 잠겼다.

나는 황당해서 입술을 떨었다.

' 그래서 이 유적이 막야의 유적보다 몇십 배나 넓은 거구나.'

출현하게 될 수호자의 규모나 위력이 거대거미 따위와는 비교가 안될 정도이기 때문일 것이다. 고대에 창세신이라고까지 불리며 숭앙받았던 [옛 존재]의 힘을 어떻게 측정해야 할까.

이제 나는 선택을 해야한다는 걸 깨달았다.

어떻게든 월요 천총운검의 봉인을 풀고 수호자와 싸워서 이길 것인가,

그렇지 않다면 또 다른 방법을 찾을 것인가.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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