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검신-97화 (97/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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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천향(暗天鄕)

"이걸로 개경은 벗어난 건가?"

그로부터 약 한 식경 후, 나와 미호는 인적없는 소로에 들어서서 쉬었다. 미호는 신통력을 이용한 법술로 나에 못지 않은 빠르기로 이동할 수 있었으며, 우리는 무려 그 시간동안 140리가 넘는 거리를 이동할 수 있었다. 이 정도면 아예 개경을 벗어나서 다른 지역으로 왔다고 무방했다. 고려에 온 이후로 이 정도 속도로 움직여본 일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미호가 말했다.

"바보야. 아직 안심할 수 없다. 가능하다면 물가를 따라서 이동하는 편이 낫다."

"그건 왜 그렇지?"

"물가를 따라서 이동하면 기(氣)의 흔적이 덜 남는다. 추적술의 기본이거늘."

"족적이 남잖아."

"낙엽이나 바위 위를 최소한의 경공으로 이동해라. 그정도도 못 하느냐?"

"그건 할 수 있어."

나는 미호의 말대로 개천이나 강가를 따라서 이동하기 시작했다. 우선 미호가 시키는대로 따라가고는 있지만 그녀가 어디로 가는지는 몰랐다. 하지만 달리 방법도 없기 때문에 따라가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다시 한 시진을 뱅뱅 돌면서 이동한 후에야, 미호는 쉬자고 했다. 왠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산 중턱이었다. 내가 걸터앉아 있자 미호가 말했다.

"이제 네가 남은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아주 국외(國外)로 도망치던가 아니면 이대로 고려 어딘가에 잠적해서 숨어지내는 것이다."

"... 중원에 돌아가는 건 안되겠지."

"백련교의 이목이 중원천지에 뻗어있을 텐데 당연한 소리를 하는구나."

"동영은 어떨까?"

이 고려 땅에서 더욱 동쪽에 있다는 나라, 동영. 그곳에는 키가 작은 왜(矮)라는 족속이 많이 살고 있으며 선천적으로 해적질을 많이 한다고 알려져 있었다. 인간들이 천성적으로 잔인하며 칼싸움을 즐긴다는 소문도 있는 나라였다. 그러자 미호가 말했다.

"그것도 괜찮겠지만 우선 문제의 본질부터 파악해야겠지."

"문제의 본질?"

"잘 생각해봐라. 백련교에서 너를 쫓아온 이유, 그리고 그 집착을. 당사자인 너밖에 알 수 없는 뭔가가 있을 것이다. 시간은 벌어 뒀으니 내가 돌아올 때까지 생각 좀 해 봐."

휘리릭!

그렇게 외치고는 미호는 둔갑술을 이용해서 산 밑 마을로 갔다. 아마도 뭔가 수를 쓰려는 모양이었다. 지금의 상황이 그녀로써도 너무 갑작스러웠기 때문에 내게 생각할 것을 요구하는 듯 하다.

' 흠... 백련교에서 나를 쫓는 이유...'

나는 곰곰히 생각을 했다. 우선 백련교에서 나를 쫓는 이유는, 내가 화서명에게 준 흑백성련의 뿌리가 소교주를 고쳤기 때문이다. 놈들은 그 은혜를 갚기 위해 나를 쫓아왔다. 하지만 나는 생각을 하던 중에 고개를 흔들었다.

' 아냐. 이건 아냐. 은혜를 갚으려고 저렇게 몰려올 리가 없잖아. 좀 더 잘 생각해 보자...'

놈들의 목적은 은혜를 갚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 저런 거대한 병력을 동원해서, 십이율과의 충돌까지 감수하면서 몰려온 이유가 무엇일까? 나는 곰곰히 생각하던 중 하나의 결론에 이를 수 있었다.

놈들은 내가 알고 있는 흑백성련의 소재를 알고 싶은 것이다!

그 소재를 알고 있는 것은 천지간에 오직 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 아마 호법사자가 어제 화서명과 이야기하면서 그 사실을 파악했겠지.'

놈들이 흑백성련을 얻으려는 이유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왠지 굉장히 중요한 비밀을 품고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백련교 최강무력의 상징인 호법사자가 풍신대까지 이끌고 천리길 고려땅까지 배를 타고 왔을 리가 없다.

동시에 그 말은 백련교에서 무슨 수를 써서든간에, 아무리 시간이 걸려도 나를 붙잡고 말겠다는 의지를 뜻하기도 했다. 아까 미호가 국외를 언급한 것은 그 집착을 눈치챘기 때문이다. 고려 내에서 어설프게 잠적하는 것만으로는 언제고 놈들에게 따라잡힐 게 뻔했다. 이 고려라는 땅은 중원에 비하면 좁기 그지 없기 때문이다.

풍신대와 함께 온 흑호 가면의 호법사자.

그는 과거 화서명에게 찾아왔던 은빛 여우가면의 호법사자와 다른 인물이었다.

나는 이 사실도 유념하며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 뭔가 걸려.'

지금까지 생각한 건 제 3자인 미호로써도 조금만 보고들었으면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미호가 내게 '당사자만이' 알 수 있는 무언가를 감지하라고 한 건 이런 뜻이 아니다. 곰곰히 깊게 생각해보면 알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

그러던 중 뭔가가 번뜩이며 스쳐 지나갔다.

' 그래 맞아... 그래!!'

과거의 전생(轉生)에서 금의위 총령과 맞서다가 죽었을 때의 일이 생각났다.

그 때 나는 상대가 안되는 걸 알면서도 끝까지 덤벼들었는데, 그 때의 금의위 총령이 하던 말이 생각났다.

[ 그것 참 조사할수록 재밌더군. 황산파에서 백련교 호법사자로 사칭이라? 하하하.]

[ 하하, 사칭이라고! 내가 백련교 호법사자인지 아닌지 네가 어떻게 아느냐?]

[ 아무것도 모르는 모양이군. 백련교 호법사자 3인 중에서 우리와 손을 잡은 자가 있다. 백련교에 대한 상당한 정보가 확보되어 있지. 네 인상착의는 어떻게 보아도 호법사자 중 누구와도 닮지 않았다.]

"......!!"

나는 기억을 떠올리며 전율했다. 하도 오래 전의 일이라서 퍼뜩 떠오르지 않았는데, 이제서야 기억난 것이다. 금의위 총령은 백련교에 대한 정보를 상세히 파악하고 있는 편이었으며, 호법사자 중 한 명과 손을 잡고 있었다. 즉 백련교 호법사자 3인 중 하나는 배신자로써 금의위와 손을 잡고 있다는 뜻이다.

그 당시 금의위 총령의 말에 따르면 그 배신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게 아니라 최소한 몇 년 전에 이루어진 듯 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 시점에 백련교의 정보를 파악했다고 자신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나는 그 점을 생각하자 손바닥이 축축해졌다.

' 그래 맞아... 백련교 호법사자가 이번 삶에서도 금의위와 손을 잡지 않았다는 보장은 없어. 어쩌면 나를 쫓아오는 놈이 금의위와 결탁한 놈일 수도 있는거야!!'

나는 현재 중원에서 백련교가 중원을 제패하고 말고가 문제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 겉으로 보이는 금의위와 달리, 중원 황실을 배후에서 조종하는 흑막인 복마전(伏魔殿)의 존재가 걸림돌이 되는 것이다. 호법사자 또한 그 존재를 파악하고 있다면 백련교가 중원을 제패한 이번 전생에서도 금의위와 손을 잡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왠지 나만이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 것 같았다. 나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마음을 정리하고 편안하게 미호를 기다렸다.

미호가 돌아온 것은 그로부터 한식경 후였다. 그녀는 나무 위를 깡총깡총 뛰어오더니 말했다.

"저 마을에 은신처를 만들어 두었다. 쉬었다 가자꾸나."

"미호, 물어볼 게 있는데."

"뭐냐?"

"너는 왜 나를 이렇게 도와주는 거지? 저번에 내 친구를 데려온 일 때문에 화가 났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흥... 알긴 아는군."

코웃음을 친 미호가 내 턱에 손가락을 갖다댔다. 그리고는 순식간에 매혹적인 절세미녀의 모습으로 변하더니 지근거리까지 얼굴을 접근시켰다. 그녀는 영롱한 눈으로 뚫어져라 나를 쳐다보더니 말했다.

"나님은 아주 마음이 넓어서 그런 사소한 일은 넘겨줄 수 있다. 중요한 건 네가 내게 도움이 된다는 사실이다."

"도움이 된다고?"

"이런 산중에서 할 이야기가 아니다. 나를 따라 와라."

나는 미호를 따라서 산밑마을로 내려갔다. 이상하게도 산골마을 사람들은 지극히 폐쇄적이고 외부인을 경계하기 마련인데, 나와 미호를 보아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렇기는 커녕 아예 공기취급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자 눈치를 챘다.

' 마을 전체에 매혹술을 걸어두었군.'

아마 우리의 모습을 아예 눈치채지 못하게끔 인식체계를 바꾸고 세뇌시켰을 것이다. 확실히 이런 방법을 쓰면 은신처를 만드는 건 식은죽먹기였다. 미호는 대놓고 왠 커다란 부잣집에 들어가더니 당당하게 하인들에게 명령했다.

"밥을 짓고 아궁이에 불을 때라."

"네, 나으리..."

웃기게도 본래 이 부잣집의 주인일 자도 하인들과 함께 열심히 아궁이에 불을 땐다는 것이었다. 그들 전체가 매혹술에 걸린 것이다. 나는 이 기막힌 광경을 바라보면서 확실히 미호의 매혹술이 인간으로써는 흉내조차 불가능한 경지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고작해야 한 식경만에 마을 전체를 세뇌시켜버린 것이다.

미호는 안방으로 들어가서 턱하니 걸터앉았다. 그리고 비싸보이는 곰방대를 집어들며 말했다.

"본녀도 댓가없이 네놈을 구해준 건 아니다. 네놈은 본녀를 위해 하나 일을 해 줘야겠다."

"어떤 일?"

"마니산(摩利山)의 참성단(塹星壇)까지 같이 가서, 거기서 수호자(守護者)를 상대해 줘야지."

"......?"

이건 무슨 뜬금없는 소리라는 말인가? 하지만 수호자라는 단어에서 감을 잡은 나는 핫하고 대답했다.

"설마 거기에 칠요(七曜)가 있는 거냐?"

"어디까지나 본녀의 추측일 뿐이다. 만일 거기에 없다면 동영으로 돌아가려 하느니라."

"말도 안 되는 소리. 칠요 해인은 장백산 고미에 있어."

"......"

미호는 대답하지 않고 곰방대에 불을 붙였다. 나는 그 모습이 중대한 비밀을 감출때 나오는 거라는 사실을 직감했다. 해인이 마리산이라는 곳에 존재할 리가 없을텐데도 왜 저렇게 확신하는 걸까?

나는 이윽고 한 가지 가정을 깨달았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해인이 아닌 다른 칠요가 있는 건가...?"

"이런 데서는 눈치가 빠르군. 다른 방면에서도 그 머리를 좀 굴려보아라."

가볍게 내게 핀잔을 준 미호가 곰방대를 입에 물었다. 연기가 천천히 새어나왔고, 그녀는 어느 새 유녀의 모습이 아니라 육감적인 절세미녀의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아무래도 어린아이 모습보다는 저게 마음에 드는 것 같았다.

"그렇다. 아마 마니산의 참성단은 칠요의 봉인지일 가능성이 높다. 네가 십이율과 비무를 한답시고 고려 강산을 뺑뺑 돌고있을 동안 본녀가 모아낸 정보이지. 십이율의 고수들을 몰래 홀려서 알아낸다고 고생했느니라."

"월요(月曜) 천총운검(天叢雲?)은 동영 땅에 있을텐데."

"그건 십이율주에게서 들은 정보냐? 꺄하하하."

깔깔거리던 미호가 말했다.

"그런게 있었다면 내가 인간계에 남아 있었겠느냐? 그건 복제품에 불과하기 때문에 본녀가 고려까지 넘어온 것이다."

"복제품...!!"

"그렇다. 현재 동영 천황가에 존재하는 모든 삼신기는 가짜이며 복제품이다. 네게 준 팔지경도 정밀하게 만들어진 법보(法寶)에 불과할 뿐 삼신기가 아니야."

연초를 느긋하게 태우던 미호가 손을 저었다. 그러자 문이 저절로 열렸고 연초향이 바깥으로 새어나갔다. 미호의 말이 이어졌다.

"삼종신기 미쿠사노카무다카라(みくさのかむだから)의 진본은 겐페이전쟁(源平合?) 당시에 타이라씨 일족이 패배하면서 해전에서 소실되었다고 하더구나. 천황을 홀려서 직접 알아본 일이니 틀림없는 사실이다. 즉 동영땅은 500여년 가까운 세월동안 가짜 삼신기를 전승해 왔다는 셈이겠지."

"월요 천총운검이 불타서 사라졌단 말이냐?"

"설마 그럴 리가. 불에 타서 소실될 정도면 칠요신기라고 불리겠느냐? 그건 단지 실종되었을 뿐이며 그 행방은 멀지 않은 곳에서 찾을 수 있었다."

나는 미호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미호가 피식 웃었다.

"감을 잡은 모양이구나."

"마니산 참성단에 월요 천총운검이 봉인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거군."

"아마 그럴거라고 생각한다."

나는 미호의 확신에 찬 말투를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거지? 500년 전 동영의 대전쟁에서 실종된 칠요가 왜 하필 고려땅에 와 있다는 거지?"

"후후... 그게 참 재미있는 부분이다."

톡톡

미호는 연초를 거의 다 태운 모양이었다. 그래서 곰방대를 치우며 느긋하게 안방에 모로 누웠다. 마치 몸매를 과시하는 듯한 모습이라서 나를 놀려먹으려는 의도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내가 못본 척 하자 미호가 큭큭대었다.

"너도 서경 땅에 나타났다는 봉황의 이야기를 알고 있을 것이다."

"벌써 10년이나 된 이야기지."

"본녀는 뒤늦게 그 이야기에 관심을 가지고 고려 땅에 찾아왔다가 서경의 악령이나 먹어치울 생각을 했는데, 뒷이야기가 있더구나."

"뒷이야기?"

미호가 말했다.

"사실 그 때 해신(海神)의 본체(本體)가 해신의 일족을 이끌고 서경에 상륙하려 했었다고 한다."

"......!!"

나는 깜짝 놀랐다. [옛 지배자]의 한 명이며 단의 일족이 목숨을 걸고 저지하는 강력한 마신이 자신의 일족을 이끌고 직접 서경을 공격했다는 말인가? 전혀 들은 적이 없는 이야기였다.

"십이율과 단의 일족은 해신의 공습을 막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다가 최후의 수단으로 봉황을 소환하여 놈들을 막았다고 한다. 단군 이래로 고려땅을 수호하는 수호신인 봉황의 진체(眞體)가 해신을 쫓아낸 셈이었지."

"그런 거였군."

봉황을 보았다는 건 비유같은 게 아니었다. 천계에서도 최상의 위치를 차지하는 대영수 봉황이 현실세계에 직접소환된 것이다.

"하지만 이게 참 이상한 일이지 않느냐? 봉황소환은 단순한 술법이 아니라 신화시대에도 손꼽히던 강력한 대신격을 지상에 불러내는 일이다. 치우소환(蚩尤召還)에 버금가는 일이었지. 아무리 고려땅에 뛰어난 술법사가 많아도 그런 엄청난 술수는 부릴 수가 없다. 그건 본녀에게도 엄두가 안 나는 일이다."

"그 정도인가."

"대술법사의 목숨을 몇십 명이나 바쳐야 가능할 것이다. 시간적으로 볼 때도 신단수에 묻혀있는 해인의 힘을 빌리는 건 무리였다."

미호가 드러누운 채 나직이 말했다.

"그래서 본녀는 생각했다. 어쩌면 십이율은 '다른' 칠요의 힘을 빌려서 그 대란을 막아낸 게 아닐까 싶었지."

나는 반문했다.

"십이율이 두 개의 칠요를 보유하고 있다는 소리냐?"

"아마 그렇게 되겠지. 그리고 그 위치는 서경에서 크게 멀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십이율의 핵심인물들을 매혹시켜서 알아본 결과, 마니산 참성대라는 곳이 의심스러웠다."

"의심인가..."

"확실하지가 않아. 그래서 본녀도 좀 더 천천히 알아볼 생각이었는데, 뭐 됐다."

미호는 잠시 후 하인들이 화려한 진수성찬을 가져오자 안방에 차렸다. 그리고 느긋하게 고기를 뜯으며 말했다.

"기왕 이렇게 된거 나와 함께 마니산 참성대를 찾아보고 나서 동영 땅에 가자꾸나. 동영에서라면 너는 추적을 쉽게 피할 수 있을 것이다."

"동영에 가자고?"

"왜 싫으냐? 너는 더 이상 갈 곳이 없을 텐데?"

"......"

나는 미호가 너무 호의적으로 나오자 불안감이 들 정도였다. 천지를 홀려대는 대요괴이자 천호인 구미호가 이렇게까지 잘 해주는 인간이 있을까? 게다가 동영땅에 들어가면 미호가 나를 홀려서 제멋대로 해도 대항할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상황에 십이율에 의존할 수도 없다. 무엇보다도 미호의 말이 사실이라면 십이율주는 뻔히 동영에 있는 월요 천총운검이 가짜란 걸 알면서도 그저 한 마디 툭 던져줬을 뿐이다. 십이율주 또한 나를 그리 믿고있지 않다는 뜻이었다.

' 그 인형탈... 망량선사와 똑같은 소리를 했어.'

십이율주가 말하기를, 내게는 불길한 기운이 느껴지므로 자신의 본모습을 노출시키고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비무첩을 보내왔기에 어쩔수없이 만나준 셈이었다. 여러모로 비무첩이 아니었다면 망량선사와 마찬가지로 평생 십이율주를 만나지 못했을 확률이 컸다.

그런 십이율주가 강대한 백련교와 부딪히면서까지 나를 보호해줄 지는 의심스럽다. 나는 고민하다가 꺼지듯 한숨을 쉬었다.

"하아 - 방법이 없군."

"잘 생각했다. 내일 하루는 죽은듯이 숨어 있다가 마니산으로 가자꾸나. 돌아다니면서 기척을 혼란시켰고, 그 기척대로 유도된다면 다시 하루의 시간을 벌 수 있을 것이다."

"잠깐 물어볼 게 있어."

"뭐냐?"

나는 신중하게 질문했다.

"만일 네가 전력을 다해서 호법사자와 싸우면 어떻게 될까?"

"흥... 남자들의 특징이지. 누가 이기느냐 더 쎄냐에 목숨을 걸어. 본녀는 참 그런게 보기 싫구나."

인상을 찌푸린 미호가 밥을 한 숟갈 먹더니 대답했다.

"그럴 일은 없다. 호법사자라는 자는 반선(半仙)이나 다름없는 경지에 이르러 있더구나. 정면으로 싸우면 본녀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그 자는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으나 실질적으로는 인간을 초월한 존재에 가깝다."

"으음..."

"너는 생각을 좀 바꾸어라. 힘이 부족할 때는 물러서서 키우는 게 순리이다. 이 상황에서 호법사자를 피하는 것은 절대명제란 말이다."

"알았어."

나는 차마 '왜 이렇게 내게 잘해주느냐' 라는 질문을 다시 하지 못했다. 그 질문을 하는 건 너무 눈치없는 짓이었고 이득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마 미호는 마니산 참성대를 탐색하는 김에 나를 몸종 겸 사역식신처럼 다룰 생각인 듯 했다.

그 날 나는 누워서 미호 옆에서 잤다. 미호는 요염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풍만한 가슴에 내 머리를 끌어안았다. 나는 미호를 밀어내며 말했다.

"이러지 마."

"우후후, 동정이라서 겁나느냐?"

미호의 말에서, 그녀가 방사(房事)를 치르고싶어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워낙 자유분방한 요괴인데다가 내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그녀의 요염한 눈빛에는 먹이를 앞에 둔 기세가 느껴졌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게 아냐."

"그럼 무어냐? 나같은 요괴와는 정을 나누고 싶지 않다는 게냐?"

약간 표독스러운 미호의 말에, 나는 왠지 대답을 잘 해야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헛기침을 하며 앉아서 말했다.

"반대로 내가 묻고싶군. 너는 정말로 나를 좋아하는 거냐?"

"뭐, 뭣..."

"서왕모의 축복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내게 집착하는 건 서로에게 좋지 않아. 너는 그저 나를 통해 서왕모의 온기를 끌어안고 싶을 뿐 아니냐. 그게 정말로 네게 도움이 되는 일일까."

나는 이 자리에서 구미호를 안는다고 능사가 아니란 걸 알고 있다. 그녀의 집착이 갈수록 강해질 거라는 사실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단순히 강한 호의 수준이지만, 이게 가면 갈수록 얼마나 강렬해질지 짐작도 되지 않았다.

"으음."

다소 거칠게 나갔지만, 옳은 이야기를 한 듯 싶었다. 내 말을 듣자 미호는 벼락맞은 듯한 표정을 지었는데 상처를 받았다기보다는 머리가 차가워진 표정이었다. 그녀는 곰곰히 생각하다가 말했다.

"자랑은 아니지만 이 몸뚱이는 동영 최고 절세미녀의 모습이다. 남자라면 천금을 주고서라도 안고싶어할 텐데, 너는 어찌 그리도 여자와 정을 통하려 하지 않느냐?"

"그건..."

"화영영도 네가 말만 잘했으면 자빠뜨릴 수 있었을 것이고, 개경 내의 미녀도 네 명성과 인지도로 얼마든지 사귈 수 있었을 것이다. 너는 설마 동자공이라도 익혔느냐?"

미호의 말은 정곡을 찌르고 있었다. 내 얼굴이 흉한 편이긴 하지만 사실 내 명성이면 여인을 취하는 것 정도는 별것 아닌 일이었다. 심지어 화서명이 자신의 예쁜 손녀딸을 내주겠다는 것도 그동안 외모를 핑계로 거절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게는 해야할 일이 있어. 그리고 여인과 정을 통하는 건 하등의 도움이 되지 않지. 왜냐하면 내 적은 너무나 강대하고 강대해서, 약점이 될만한 존재가 주변에 있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내가 죽을 각오로 노력해도 안될 판에 한눈을 팔 수가 없다."

아직도 망량의 죽음이 눈에 선했다. 금의위 총령에게 당한 죽음이 기억났다. 그걸 갚아줄 때까지는 다른 일에 한눈을 파는 게 불가능했다. 십만 번 베기를 버텨낸 근성은 오로지 그 독기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지금은 이 독기를 잃기 싫다. 나는 내 근성의 한계를 알고 있으므로, 여자를 안고 현실에 안주하는 순간 감당할 수 없는 혼란이 닥쳐올거라고 생각했다.

"하아... 네 실력이면 중원 구파일방의 장문인이라도 죽일 수 있을 것이다. 도대체 어떤 적이냐?"

"중원 황실을 움직이는 자들..."

미호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그러더니 한숨을 쉬었다.

"미쳤구나... 그 자들에게 대적하다니."

"알고 있나?"

"그런 건 그만둬라. 목숨이 열 개라도 아까울 것이다."

미호는 관용구로 한 말이겠지만, 나는 되려 씨익 웃으며 말했다.

"열 번 정도는 아깝지 않아."

이미 열 번 죽었기 때문이다. 미호가 어이없어하며 반문했다.

"뭐?"

"골백번 고쳐죽어서라도 해낼 거다."

"......"

미호가 망치로 맞은 듯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금침에 몸을 뉘였다. 내게서 고개를 돌린 채로 퉁명스럽게 말했다.

"흥! 멍청이."

"잘 자라."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나는 그렇게 구미호와의 하룻밤을 지샜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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