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검신-96화 (96/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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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천향(暗天鄕)

내가 신단에서 떠난 것은 그로부터 한 달이 지나서였다.

저벅

내가 신단에서 걸어나와서 약 삼십 장을 걷고 나서 뒤를 돌아보자, 신단 마을의 흔적은 커녕 그 자리에 있던 거대한 신단수조차 눈에 보이지 않았다. 신단수를 보호하는 결계가 존재(存在) 자체를 감추어주는 것이다. 이 결계를 뚫기 위해서는 강력한 대술법사가 와야만 할 것이다.

산새 소리가 들린다. 깊은 숲 특유의 적막감이 내 몸을 감쌌다.

"......"

나는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개경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거듭하면서 생각했다.

' 한 달 동안, 십이율주에게서 무공의 미진함을 가르침 받았고, 술수도 몇 개 더 배웠다...'

십이율주는 시험삼아 몇 차례 나와 대련해 주고는 했다. 대련이라고는 해도 일방적으로 내 쪽이 당했을 뿐이지만, 그는 신법(身法)에 있어서 그 누구보다도 독보적인 경지에 올라있는 듯 했다. 오죽했으면 그의 신법을 관찰하는 것만으로도 내가 펼치던 뇌영보에 존재하는 헛점을 깨달을 수 있을 정도였다.

대련이 끝난 후 내가 궁금한 점을 이따금씩 질문하면 그가 대답해 주었다.

십이율주와의 대화가 지금도 생각났다.

[ 내가 월요를 왜 얻으려 하지 않았냐고?]

[ 네. 십이율의 힘이면 충분히 가능할 텐데요.]

[ 흐음...]

십이율주는 나와 만나는 동안에 단 한 번도 인형탈을 벗지 않았다. 이주희가 말했던 절세미남자의 얼굴을 확인할 길이 없는 것이다. 그는 강아지 인형탈을 쓴 채로 팔짱을 끼곤 대답했다.

[ 동영에 있는 월요를 이쪽으로 가지고 오면 당연히 우리쪽은 편해질 거야. 하지만 동영땅은 사신(邪神)의 권속이 미친듯이 날뛰게 되겠지.]

[ 월요 천총운검도 해인처럼 사신을 억제하는 역할을 하고 있단 말입니까?]

[ 물론 신단수처럼 강력한 결계는 아니지만 천총운검도 비슷한 결계를 쳐주고 있지. 동영 땅에 인간이 살 수 있는 이유는 그 검 때문이야.]

[ ......]

[ 자기역할 잘 하고 있는 걸 굳이 어찌할 필요는 없잖아?]

나는 회상을 끝냈다.

' 그 말대로라면, 월요 또한 당장 얻으려 할 필요는 없는 거군.'

월요를 어설프게 옮겼다가 복마전같은 세력이 동영에 또 생길수도 있는 것이었다. 아마도 내가 해야할 일은 월요를 얻는 것보다는 그 위치만 파악해두는 일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십이율주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고민을 중얼거렸다.

"이상해... 미호는 분명히 동영땅의 천황이란 자를 홀렸을 텐데, 그 월요 천총운검이 진짜 칠요라면 어째서 승천하지 못한 거지?"

미호는 굉장히 천계로 돌아가고 싶어했다. 그리고 칠요에는 그럴만한 힘이 있었기에, 칠요 해인을 얻으려고 부단히도 노력하는 모습이었다. 만일에 동영 삼신기 중 하나가 천총운검이라면 굳이 고려땅까지 와서 단의 일족과 척질 각오까지 할 필요는 없는 것이었다. 월요의 소재에는 무언가 비밀이 있는 게 분명했다.

월요에 대해서 알기 위해서는 미호를 다시 만나서 물어볼 필요가 있다.

그러나 나는 적지 않게 고민이 되었다.

미호와 다시 만났을 때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

마지막에 헤어졌을 때도 미호는 망량이 나를 도우러 온 걸 눈치챈 듯 했다. 그리고 그걸 반쯤은 배신이라고 간주했을지도 모른다. 변덕때문에 나를 살려주긴 했지만 변덕이 죽끓는듯하는 미호의 성격으로 볼 때 나는 언제 미호에게 살해당할지 모르는 것이다. 지금처럼 미호와 얼굴 안 보고 사는 상황이 제일 안정적이었다.

"에라... 어떻게든 되겠지."

나는 고민을 하면서 머나먼 수백 리 길을 가기 시작했다. 어차피 이제 고려에서 해야할 일은 거의 다 끝난 것 같았으므로, 이제는 의술을 좀 더 본격적으로 갈고닦으면 된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타다닷

장백산에서 개경까지 오는데는 약 사흘이 걸렸다. 도보로는 적어도 한 달 이상이 걸리는 거리였으나 내가 이동하는 속도는 보통인간의 열 배를 뛰어넘기에 생기는 일이었다. 이것도 느긋하게 뛰어온 거였으니, 마음만 먹으면 하루나절만에 올 수 있을지도 몰랐다.

개경 성 내로 들어와서 화씨가문이 있는 곳으로 갔을 때였다.

"......!!"

나는 깜짝 놀랐다. 왠 하얀 옷을 입은 자들이 화씨가문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대기하고 있지 않은가? 그들의 숫자는 약 10여명 정도였고 모두 무림인으로 보였다. 화씨가문의 건물은 멀쩡했으나,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백의의 괴인들을 피하듯 시선도 마주치지 않았다.

' 뭐야?!'

나는 선두에 있던 백의인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나이가 딱 내 또래로 보였는데 기골이 헌앙하고 잘생긴 청년이었다. 그는 내 인상착의와 용모를 확인하더니 말했다.

"당신이 백웅인가?"

뭔가 불길하다. 나는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대답했다.

"그렇소만 당신들은 누구시오?"

내가 그렇다고 대답하자, 백의 청년은 갑자기 고려말이 아니라 한어(漢語)로 이야기하며 포권을 했다.

"슬슬 돌아오실 것 같아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백웅 님. 만나뵙게 되어서 반갑습니다."

정중하고 예의바른 태도였다. 나는 긴장을 늦추지 않고 마주 한어로 이야기했다.

"당신들은 중원인이오?"

"정확히는 백련인(白蓮人)입니다."

백련인!

나는 예상이 맞았기에 침음성을 흘렸다. 어쩐지 저 10여명의 내공이 굉장히 높아서 절정고수가 드글거리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백의인이 남녀를 가리지 않고 나이가 10~20대로 보였고 아주 어렸으니 떠올릴 수 있는 가능성이 하나밖에 없었다.

백련교에서 성련을 이용해서 키워냈다는 젊은 고수층, 백련인! 그들은 현재 중원무림의 4할을 집어삼킨 백련교의 선두에서 수많은 중원의 고수들을 연파하고 있다고 들은 바가 있었다. 엄청난 내공에 백련교의 비전무공을 연마해서 대문파 장로와 손쉽게 싸울 수 있다는 자들이 수십 명씩이나 쏟아져나온 것이다.

나는 화씨세가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설마 화씨 가문 사람들에게 해를 입힌 건 아니겠지?"

청년이 훗하고 웃었다.

"그런 일은 하지 않았습니다. 모두 무사무탈하게 계십니다."

"다행이군."

"저희는 백웅 님과 좋은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멀리 중원에서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좋은 이야기라니?"

"아, 자기소개가 늦었군요. 저는 백련교 풍신대(風神隊)를 이끌고 있는 이여송(李如松)이라고 합니다."

다시 한 번 포권을 하던 이여송이 말했다.

"사실 어제쯤 화씨세가의 가주이신 광명신의(光明神醫) 화서명 님과 호법사자께서 따로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흑백성련(黑白聖蓮)의 행방을 알고 계신 게 백웅 님이라는 걸 알게 되었죠. 그래서 백웅 님을 호법사자께 모시기 위해서 대기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

나는 이를 악물었다.

백련교 호법사자!

천하에서 가장 강력한 무공을 지닌 자들 중 한 명이 이 자리에 와 있는 것이다. 혹시 한백령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머지 2명의 호법사자 중 하나일 수도 있다. 확실한 것은 호법사자가 현재 나와 이야기를 하고 싶어한다는 것이고, 거기에는 심상치 않은 음모(陰謨)가 존재할 것이다.

내가 침묵하자 이여송이 말했다.

"저희와 함께 가시지요. 정중하게 모시겠습니다."

"잠깐 기다려 주시오. 화씨세가 사람들이 무사한 걸 내 눈으로 확인해야겠소."

"그럼 들어가십시오. 언제든 나오시길 기다리겠습니다."

백의인들이 길을 비켜주었다. 나는 십여 명의 풍신대를 하나하나 훑어보면서 역시 엄청난 내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내가 이 놈들과 정면승부하면 거의 9할 확률로 죽겠군...'

무시무시한 놈들이다.

종남파의 장로들보다 도리어 훨씬 높은 내공을 지닌 듯 한데다, 자신의 기를 고요히 다스릴 줄 알고 있었다. 이 자리에 절정고수들이 모여있는 셈이다. 하물며 이들이 단체싸움이나 합격진까지 익혔다면, 지금의 나로써는 도저히 풍신대를 맨몸으로 감당할 수 없었다. 하긴 이 정도가 아니면 중원무림을 지배하겠다고 나설 수 없을 것이다.

나는 화씨세가 안으로 들어가서 사람들이 무사한지 확인했다. 다행히도 다치거나 죽은 사람들은 없었으며, 다들 무사했다. 단지 그들도 백의인들의 무력시위를 알고 있는건지 불안해하는 기색이었다. 내가 안쪽으로 들어가자 거기에는 화서명의 직계일족들이 모여 앉아 있었다.

화서명, 그리고 화서명의 아들내외, 그리고 손녀딸인 화영영.

방계 사람들은 여기에 안 온 모양이었다.

그들 4명의 시선을 받자 나는 부담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일단은 의자에 앉아있는 화서명에게 인사를 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제자 백웅이 돌아왔습니다."

"그래... 잘 왔구나. 거기 앉거라."

"네."

의자에 앉자 무거운 공기가 흘렀다. 화서명은 크게 건강이 나빠보이지는 않았으나, 상황을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는건지 초췌한 안색이었다. 그는 나를 지켜보더니 말했다.

"백웅아. 너도 집 앞에 백련교인들이 와있는 걸 알고 있을 것이다."

"백련교 풍신대라고 하더군요."

"뿐만 아니라 어제는 흑호(黑虎) 가면을 쓴 호법사자가 나를 방문했다. 과거 소교주 때문에 나를 데려가려고 왔던 자와는 다른 자 같더구나."

"... 대체 백련교가 이제 무슨 볼일이 있어서 우리를 찾아왔단 말입니까?"

나는 어이가 없어서 울화통을 터뜨렸다.

이번 생에는 정말로 중원무림과 얽히기 싫어서 전생을 시작하자마자 바로 산동을 통해서 고려로 와 버렸다. 백련교와 얽힐 일 따위는 내 기억에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백련교의 정예부대와 호법사자가 찾아왔다니 이해가 안 되는 것이다.

화서명이 말했다.

"그게... 말이다. 네가 줬던 성련 때문이었던 것 같다."

"네?"

"호법사자가 전후사정을 내게 설명해 줬다. 내가 너에게서 흑백 성련의 뿌리를 받아서, 나만이 알고 있는 방법으로 중원무림에 판매를 했는데... 그걸 백련교의 상단(商團)에서 상회입찰해서 사버린 모양이다. 그리고 그 뿌리는 흘러들어가서 백련교로 들어간 모양이더구나."

"......"

나는 어이가 없어서 입을 쩍 벌렸다.

"백련교의 소교주(小敎主)가 그 뿌리로 구원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소교주가 기운을 차리자, 백련교주는 그 즉시 망설이지 않고 중원진출을 결심한 모양이더구나."

"그, 그런 일이."

나는 당황해서 말했다.

"애초에 성련이라는 건 백련교 내에도 썩을 정도로 많이 있는 게 아닙니까? 왜 하필 그걸 먹고 소교주가 나은 거죠?"

화서명이 한숨을 쉬었다.

"그것까지는 설명해주지 않더구나. 다만 그 호법사자가 말하기를, 우리 화씨세가가 백련교에 큰 도움을 주었으니 꼭 보답하고 싶다고 하더구나."

"보답이요?"

"그는 우선 너와 이야기를 하기를 원했다. 그리고 그 이후에는 우리 화씨세가가 중원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와준다고 했다. 백련교의 대은인으로 대접하며 백 년의 부귀를 약속하더군."

"으음..."

그 때까지 가만히 듣고 있던 화서명의 아들, 화태보(華泰補)가 나를 바라보았다. 그 또한 화씨백팔침과 화타오금희를 전수받은 의원으로써 뛰어난 실력을 지닌 의원이었다. 화태보가 간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버님으로부터 자네 덕에 우리 가문이 구원받았다는 이야기는 들었네. 제발 이번에도 옳은 선택을 해서 우리를 구해주게. 자네 손에 화씨 세가의 운명이 달려 있어."

"백웅 님... 부탁드려요."

화서명의 아들 내외의 부탁은 간절했다. 그 말 속에는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호법사자와 원만한 이야기를 진행하라' 라는 강제성이 들어 있었다. 하지만 화씨세가 수십 명 식솔의 운명이 내 손에 달려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나는 무거운 눈으로 화서명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스승님. 잠시 둘만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나와 화서명은 가족내외를 두고 더욱 안쪽으로 들어갔다. 이 곳은 화씨세가의 건물에서도 가장 은밀하고 깊은 밀실으로써, 화서명의 개인공간이었다. 깜깜한 밀실에서 촛불 하나만 밝힌 화서명이 입을 열었다.

"나는... 백련교를 믿지 않는다."

"......"

"그들은 사악한 존재는 아니지만, 자신들보다 약한 존재에게 쉽사리 인정을 주지 않는다. 철저한 계산으로 다루는 무림세력 그 자체이지. 이번에 호법사자가 그럴듯하게 우리를 꼬드겼으나, 그건 아마 함정일 것이다."

"함정이라고요?"

"겨우 화씨세가를 부르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호법사자와 백련교 4대 무력단체 중 하나라는 풍신대가 왔겠느냐? 그들은 여차할 경우 개경에 있는 십이율 무인들과 충돌할 생각까지 하고 온 셈이다."

"... 그 말은."

"눈치를 챈 모양이구나. 그들의 이야기를 거절할 경우 화씨세가를 몰살시킬 생각을 하고 온 셈이겠지."

나는 침음성을 흘렸다. 화서명의 이야기가 옳았기 때문이다.

확실히 저정도 백련교의 세력이라면 십이율과 싸워도 별로 밀리지 않을 것이다. 풍신대도 어이가 없을 정도로 막강한 자들이지만 호법사자의 실력은 격외(格外)일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화씨세가를 하루아침에 몰살시키고 빠져나가는 것쯤은 일도 아닐 것이다.

나는 말했다.

"그럼 어째서 제가 귀환할 때까지 얌전히 두고 본 것일까요?"

"가능하면 편하게 일을 진행하고 싶어서겠지. 놈들로써도 괜히 십이율과 부딪히느니 우리가 달콤한 미끼에 꼬여서 외딴 배 위에서 죽는 편이 낫지 않겠느냐? 그리고 네가 어떤 정보를 가지고 있는지도 파악하고 싶을 것이다."

"이러나 저러나 죽는 거군요."

"그래... 내 아들놈도 그 사실을 대충 눈치채고 있다. 태보 녀석도 머리가 좋으니까."

화서명의 표정은 음울함이 가득 차 있었다.

나는 문득 그가 가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멀쩡하게 중원에서 잘 살아가던 화서명의 인생은 전적으로 백련교때문에 꼬이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백련교에 의해 몰살당할 위협에 놓였으니 기가 막힌 일이었다.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십이율과 연락해서 저자들을 몰아내는 게 제일 현실적인 방법입니다."

"나도 그걸 생각했다. 하지만 저 놈들이 우리를 직접 공격한다는 증거도 없는데, 십이율의 고수들이 중원최강의 무림세력인 백련교와 목숨걸고 싸워주겠느냐? 적어도 놈들이 직접공격을 하기 전까지는 허상에 가까운 일이다."

"정철욱에게 이야기를 하고 오겠습니다."

"섣불리 행동하지 마라. 놈들은 수틀리면 우리 일가를 모두 몰살시킬 것이다."

"그럼 대체 어떻게 해야한다는 말입니까?"

화서명이 갑자기 탈력한 모습으로 벽에 기대었다.

"나도 모르겠구나... 외통수를 맞아버린 기분이다. 어찌 일이 이렇게 된 것인지..."

내가 무어라고 말을 하려고 할 때였다.

드르륵

갑자기 문을 열고 한 사람의 인영이 나타났다. 빛을 등지고 어두운 방의 문을 연 것은 화서명의 손녀, 화영영이었다. 그녀는 곱지 못한 눈으로 나를 노려보더니 말했다.

"너는 정말 미련퉁이구나?"

"영영아, 이 무슨 짓이냐! 얼른 나가지 못할..."

쿠웅

화영영에게 호통을 치려던 화서명은 갑자기 혼절해서 앞으로 쓰러졌다. 나는 급히 그를 살펴봤는데 몸에 이상이 생긴 게 아니라 그저 매혹술에 걸려서 잠든 것 뿐이었다. 나는 화영영이 이런 고급술수를 쓸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었다.

나는 화영영을 노려보며 말했다.

"미호(美狐)냐?"

휘리리릭!!

다음 순간, 화영영이 허공에 제비를 넘더니 귀여운 소녀의 모습으로 변했다. 그 모습은 내가 과거에 봤었던 미호의 인간모습 그 자체였다. 그녀는 화영영으로 변신해서 화씨세가의 일원인 척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미련퉁이! 왜 백련교와 휘말려버린 것이냐?"

미호가 질책하듯 내게 물었으나 나는 지지 않고 말했다.

"화영영은 어떻게 한 거야?!"

"걱정 마라. 그 애는 창고에서 자고 있다. 그것보다 대체 무슨 일이냐?"

미호는 신경질을 내며 말을 이었다. 수백 년을 살아온 구미호의 입장에서도 날벼락이 떨어진 듯 했다.

"뭘 어떻게 하면 백련교 호법사자같은 놈이 찾아와서 죽이려 들 수 있느냐? 참 팔자 한번 억센 놈이구나."

"팔자가 억세다는 말은 동의한다만... 너는 왜 화영영으로 변신해 있었던 거냐."

내가 추궁하자 미호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그야 내 맘이지. 사실 네놈을 쓸 일이 있어서 데려가려 했다."

"쓸 일이라고?"

"그건 나중에 이야기 해 주마. 여하튼 지금은 이 난국을 해결해야 하겠구나."

그렇게 말한 미호가 홱 하고 돌아섰다.

"따라와라!"

"따라오라니 어딜?"

미호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야 튀어야지. 뭘 묻고 앉아있느냐? 그럼 백련인들과 싸우고 싶은게냐?"

"미친 소리...!! 나만 도망쳤다가는 화씨세가 사람들은 다 죽을 텐데!"

내가 주먹을 불끈쥐고 말하자 미호가 답답한 듯 가슴을 쳤다.

"으이구 아둔한 자식! 남들 말만 듣지 말고 자기 머리로 생각해 보는 게 어떠냐? 이 병신같은 화씨세가 의원 놈 말이 전부 옳은 줄 아느냐? 정말로 백련교 놈들이 화씨세가 사람들을 몰살시키는 무리수를 둘 것 같아?"

"......"

"이 판국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네놈이다. 흑백성련을 중원으로 유출시킨 것은 바로 네놈이란 말이다. 백련교 놈들 입장에서는 너를 잡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내 말이 틀리느냐?"

"마, 맞아."

"즉 화씨세가 놈들은 나중에 인질로 써야할테니 너 혼자 도망쳐도 당분간은 죽지 않을 거란 말이지. 그러나 이 늙어빠진 의원놈 입장에서는 자기 일족의 안전을 확신할 수 없을테니 그 방법을 생각해놓고도 네게 말하지 않은 것이다. 이제 이해가 가느냐?"

미호의 말은 논리정연했다. 나는 멍해져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확실히 미호의 말대로, 이 자리에서 그냥 풍신대를 따라서 호법사자를 만나는 게 최악의 형태였다. 호법사자가 마음만 먹으면 나를 죽일 수도 있고 고문할 수도 있었다. 어떻게든 나만큼은 탈출해서 시간을 벌고, 백련교의 다음 수를 봉쇄할 방법을 생각해야만 했다. 이 상황은 화서명에게는 외통수이지만 내게는 그렇지 않은 것이다.

' 사제의 정 때문에 판단이 흐려졌던 건가...'

나는 미호를 따라서 건물의 뒤쪽으로 갔다.

"나와라!"

그리고 미호가 뭔가 술법을 외우더니,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전에 보았던 전귀와 후귀가 나타났다. 미호는 술법으로 만들어진 식신을 좀 더 소환하더니 말했다.

"이 놈들을 보내서 시간을 끌어 보자. 나를 잘 따라와라."

"알았어."

쐐애액

전귀와 후귀, 그리고 종이식신들이 쿵쿵거리면서 밖으로 걸어나갔다. 잠시 후 폭음과 함께 검음이 울려퍼졌고, 미호의 소환식신들이 풍신대와 싸우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미호가 담장 밖으로 몸을 날리자 나도 미호의 뒤를 따라갔다.

파아앗

"어딜 가시려 하십니까!"

갑자기 미호와 내 앞에 한 명의 신형이 나타났다. 그의 검에는 강렬한 검염이 맺혀 있었다. 아까 풍신대의 대주라고 자신을 밝혔던 이여송이었다. 미호는 훗하고 웃더니 이여송을 비웃었다.

"하룻강아지가 까부는구나. 지옥으로 가 볼테냐?"

"그럴 리가... 하지만 당신들은 더 이상 도망치지 못할 거요."

이여송은 미호에게 검을 겨누더니 쐐액하고 앞으로 쇄도했다. 그러자 미호는 차가운 웃음을 지으며 자신의 몸 주변에 여우불꽃을 아홉 가닥 소환해서 내뿜었다. 이여송은 전혀 예상치 못한 공격이었던 듯 급히 검염으로 불꽃을 치며 뒤로 물러섰다.

"꽤 하는 놈이구나. 하지만 죽어라!"

콰과광

"크악!"

미호가 손을 휘두르자 거대한 압력이 흘러나오더니 이여송의 몸이 튕겨져서 크게 날아갔다. 무언가 거대한 무형의 형체를 소환해서 공격한 것 같았다. 이여송은 몇 번 튕겨져 나가더니 민가에 떨어져서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미호는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흥! 개떡같은 놈이 까불기는."

"......"

나는 기가 질려서 미호를 바라보았다.

방금 전 이여송의 검술 실력은 나와 비교해도 그리 처지지 않았다. 아니, 검이라는 방면만 놓고 본다면 저 자는 초절정급에 갓 진입한 고수로써 백련교의 무력단체를 이끌만 했다. 그런 고수를 순식간에 해치워버린 미호의 힘은 과연 대요괴라고 부를 수 있었다.

' 우선은 집중하자.'

나는 미호의 뒤를 따라가면서 은둔술(隱遁術)을 시전했다. 자신의 존재감과 기척을 낮추는 술법이었다. 내가 술법을 사용하는 걸 본 미호가 키득거렸다.

"아하하, 그동안 쥐꼬리만큼 늘긴 했구나? 역시 십이율주가 좀 가르쳐줬나 보구나."

"그래. 너는 해인을 노린다던데 장백산에는 안 가는 거냐?"

"흥... 신단을 정면으로 침입하는 건 무리다. 본녀는 다른 방법을 쓰기로 했느니라."

"무슨 방법인데?"

미호가 말했다.

"우선 개경을 벗어나고 나서 이야기하자꾸나. 아까부터 거대한 기운이 신경쓰여서 참을 수가 없구나."

나는 힐끔 뒤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떨떠름하게 말했다.

"동감이다."

나와 미호가 동시에 느끼고 있는 거대한 기운 -

그것은 수십 리 밖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는데, 여기서까지 소름이 돋을 정도의 강력함이 느껴졌다. 그것은 아마 호법사자라는 자의 기(氣)일 것이다. 대요괴인 구미호조차도 경계하게끔 하는 힘을 일개 인간이 지니고 있는 셈이었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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