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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검신-92화 (92/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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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천향(暗天鄕)

백련교 출범!!

그것은 내가 아는 중에 가장 이례적인 이변이었다. 분명히 내 첫번째 생에서 나인교가 출현할 때까지도 백련교는 별다른 일 없이 조용히 은거하고 있었던 것이다. 천하 사람들 중에서 백련교가 사상최강의 무림세력이라는데 이의를 제기하는 자는 없었으나, 현재까지의 강호질서가 유지되는 것은 그들이 강호의 일에 나서지 않기 때문이었다.

"무, 무슨? 설마 그들이 명(明)의 조정과 대립하기로 했단 말이오?"

내가 더듬거리며 묻자 망량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오. 아직도 강호에는 긴장의 끈이 팽팽하지."

"그럼?"

"약 석 달 전, 처음으로 청해(靑海)에 백련교의 고수들이 모습을 드러냈소. 그때까지는 신강에 있다고 추측되던 자들이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광주(廣州)와 복건(福建)에도 나타났소."

"광주나 복건은 신강과 전혀 상관없는 지역이 아니오?"

"그렇소. 그리고 스스로를 백련인(白蓮人)이라고 칭한 그 자들은 즉시 거대한 건물을 매입해서 백련교 중원지부를 만들었소. 아직까지 그들이 딱히 대외활동이나 무력시위를 한 일은 없으나, 백련교에서 이토록 공공연히 중원진출을 선포한 일은 딱히 없었기에 강호가 초긴장상태에 휩싸여 있소."

"......"

즉, 요약하자면 백련교에서 건물을 사들여서 중원지부를 지었다는 것 뿐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중원무림은 수천 개 방파가 초긴장상태에 놓일수밖에 없을 정도로, 백련교의 위상과 강대함은 엄청난 것이었다. 특히 백련인의 내공수위가 엄청나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니 함부로 그들에게 껄떡대는 자들조차 없을 게 분명했다.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명 조정이 백련교를 싫어할텐데 조정에서는 나서지 않소?"

"그게 더 이상한 점이오. 지금까지 백련교에는 중원을 제패하고도 남을 힘이 있다고 평가되고 있었으나, 홍무제와 백련교주의 악연(惡然)때문에 중원에 나오지 않았소. 그런데 이번 백련교 진출에서 관(官)은 철저히 침묵하고 있으며, 무림인들이 상소를 올려도 [무림의 일은 무림에서 해결하라] 는 논조를 반복하고 있을 뿐이오."

"그럴 리가..."

내가 떨떠름하게 대답하자 망량이 말했다.

"당신의 생각대로 이번 일은 명 조정에서 백만대군으로 백련교를 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요. 그러나 황실은 물론이고 조정 전체가 백련교의 행동에 침묵하고 있소."

"폭풍 전의 고요가 아니겠소?"

망량이 헛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자도 있으나 나는 아니라고 보오. 적의 힘이 조금이라도 약할 때 치는 게 최상의 병법인 것이오. 백련교에서 중원무림의 방파를 굴복시키고 흡수해서 무림의 지존(至尊)이 되면 그 때는 관부에서도 제어불가능한 전대미문의 세력이 되는 것이지. 관부의 이번 행동은 계략이 아니라 이상현상이라고 보고 있소."

"이상현상?"

"백련교에서 무언가 수를 썼기 때문에 금의위와 동창을 비롯한 세력들이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는 거라고 생각하오. 실제로 우리 반천맹은 백련교가 활동에 나선 후 굉장히 움직이기가 수월해졌는데, 금의위의 행동이 많이 굼떠졌기 때문이오."

"으음... 당신도 여유가 나서 고려까지 올 수 있었던 거군."

"그렇기도 하고, 현재의 무림은 화약고나 다름없소. 불이 붙으면 적아를 불문한 살육전이 펼쳐질 게 분명하기에 위험을 피하고자 잠시 온 것도 있소."

나는 망량의 설명으로 전반적인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곰곰히 생각하다가 망량에게 물었다.

"그럼 이제부터 어떻게 할 생각이오?"

"별다른 일이 없다면, 당신과 함께 중원에 돌아가서 반천맹 활동을 할 생각이오. 지금은 절호의 기회이니 백웅 당신이 도와준다면 크게 성공할 수 있을 것이오."

"... 조금 곤란한 일이 있소."

"무엇이오?"

나는 망량에게 현재 의술을 배우는 중이며, 덤으로 구미호와 약속했던 10년지약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말했다. 망량은 끝까지 이야기를 듣고 난 후 한탄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진작 당신에게 해인에 관한 정보를 말해둘 걸 그랬군."

"구미호의 역량은 엄청나게 높소. 십이율의 정예들이 쓸려나갈 정도의 대요괴요."

"아마 그럴 것이오. 그녀가 천호(天狐)이며 서왕모의 곁에 있던 구미호라면 원래는 천계의 상선(上仙)에 못지 않은 고귀한 존재요. 그런 자가 타락하여 지상으로 추방되었다면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겠지."

"뭔가 방법이 없겠소?"

"흐음..."

망량이 생각하다가 질문했다.

"당신은 그 구미호에게 팔지경이라는 거울을 받아서 연마하라는 말을 들었다던데, 혹시 그 말대로 하고 있소?"

"물론이오. 손해 볼 게 없기에 매일 한 시진씩 조석으로 거울을 보며 명상을 하고 있소."

"어디 한 번 봅시다."

망량의 손이 기묘한 수인(手印)을 맺자 옅은 주황식의 원이 허공에 만들어졌다. 그 원은 내 심장 근처에 도달하더니 천천히 흡수되었다. 눈을 감고 무언가를 생각하던 망량이 말했다.

"내 생각대로군. 당신은 현재 술법(術法)의 잠재력이 매우 높아져 있소."

"무슨 말이오?"

"말했던 그대로요. 동영에 존재하는 삼신기의 법력을 지난 9년간 꾸준히 흡수해 온 덕분에, 당신의 상단전(上丹田)이 감응해서 조금 열려있는 상태요. 당신은 후천적으로 영통력(靈通力)을 단련한 셈이지."

"영통력?"

"구미호가 아주 귀중한 보물을 주었구려. 당신은 이제 초급 술수를 배울 수 있을 것이오."

"......!!"

나는 경악의 연속일 수밖에 없었다. 그냥 별 생각 없이 팔지경을 이용해서 수련하고 있었는데, 설마 그게 무공이 아니라 술법(術法)을 익히게 해 주는 단련이었단 말인가? 내가 품속에서 팔지경을 꺼내서 그에게 보여주자, 망량이 감탄했다.

"과연 삼신기의 진본이군. 구미호가 동영의 천황(天皇)을 홀렸다는 소문은 사실이었던 모양이오."

"내가 정말로 술법을 쓸 수 있다는 말이오?"

망량이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오. 무림인만 수련을 하는 게 아니라 술법사도 꾸준하게 수련해서 자신의 역량을 높일 수 있소. 당신은 동영땅에서도 최상의 법보를 늘 품에 지니고 매일 한 시진씩 연마함으로써, 전무(全無)하던 술법재능을 높이는 좌도방문(左道傍門)의 수행을 행한 것이지. 이는 내가 막야를 얻어서 술법수련을 한 것과 진배없는 최상의 상태요."

"오오...!!"

"기왕 이렇게 된거 내가 술수를 좀 가르쳐 주겠소. 아마 빠르게 배울 수 있겠지."

"고맙소."

나는 뜻밖의 횡재를 얻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술법에 있어서 신급이나 다름없는 망량선사가 [재능이 없다]라고 단언하는 바람에 아예 술법쪽은 포기하고 있었는데, 뜻밖에 길이 생긴 게 아닌가! 이제는 술법도 사용할 수 있다는 생각에 내심 기뻐서 날뛰었다.

망량이 신기한 듯 말했다.

"그렇다 해도 구미호는 당신에게 대단한 호감을 가지고 있는 모양이오. 원래 타락하여 지상으로 내려온 신선급 존재들은 대개 사악하고 악독한 편이며, 구미호는 그 대표격 존재요. 그런데도 당신을 살려두고 끝까지 대화를 했으며, 나아가서는 자신의 보물까지 내어준다라... 이건 통상적으로 생각할 수 없는 엄청난 호의라고 할 수 있소."

"그 정도요?"

나는 미호가 그렇게 나쁜 놈 같지 않았다. 대화하면서도 그렇게 사악한 존재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망량은 단호하게 말했다.

"단언할 수 있소. 당신은 이번 생에 서왕모(西王母)의 축복 덕분에 살아남은 것이오. 구미호가 천계 서왕모에 대한 죄책감과 그리움을 가지고 있기에, 그 감정이 당신에게 호감으로 연결된 것이지. 만일 다음 전생(轉生)때 당신이 구미호를 마주친다면 이번같은 행운은 기대하지 않는 게 좋을 것이오."

"서왕모의 축복 때문이었군..."

"들리는 소문으로는 구미호가 동영땅에서 잡아죽인 인간이 무려 수천 명에 이른다고 하오. 그녀는 틀림없는 사악한 대요괴요."

그렇게 말한 망량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하아, 당신은 당분간 중원으로 올 수 없겠군."

"구미호 때문에 가기가 껄끄럽소. 미호는 반드시 중원까지 찾아올 수 있을테니."

"내 생각으로는, 당신이 차분하게 그녀를 설득해야 할 것 같소. 그렇게 한다면 구미호는 결코 당신을 죽이지는 않을 것이오. 서왕모의 축복이 감싸고 있는 당신을 죽인다는 것은 자기자신을 부정하는 일과 다름이 없기 때문이오."

"그렇게 해야겠군."

"허나 명심하시오. 그녀는 [배신]을 결코 용서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소. 그 점을 유의해서 대화해야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오."

그리고 나는 망량에게서 그로부터 반 년 동안 초급 술수를 전수받았다. 망량에게 중원으로 돌아가지 않느냐고 하니, 백련교가 강호를 한바탕 휘저은 후에 돌아가도 늦지 않다는 대답이었다. 실제로도 백련교의 등장이 알아서 금의위를 견제해주는 셈이므로 반천맹은 물만난 고기처럼 움직일 수 있는 듯 했다.

초급이라고 하지만 내가 술법을 전수받는 속도는 매우 빨랐다. 고작해야 반 년 동안에 술법을 5개나 배울 수가 있었던 것이다. 망량이 깜짝 놀랄 정도였다.

"과연 팔지경의 신통력을 전해받았군. 이 정도면 중급술수에도 머지 않아 입문할 수 있을 것이오."

"나도 이제 결계를 쓸 수 있겠소?"

"간단한 거라면..."

"축지법(縮地法)은?"

"그런 상급 술수는 아직 무리요. 그런 건 고명한 술법사에게 수십년간 배워도 쓸까말까한 대단한 술수요."

나는 팔짱을 낀 채 망량에게 담담히 말했다.

"망량. 이제 곧 구미호가 찾아올 때가 되었소. 그래서 말인데, 만일 내가 죽게 된다면 다음 전생부터는 누구를 술법스승으로 모시는 게 제일 좋겠소?"

"으음..."

망량이 인상을 찌푸리더니 말했다.

"내 사제 천우진의 경지는 너무 높아서 당신이 참고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닐 것이오. 굳이 술수를 배우고 싶다면 모산파(茅山派) 혹은 밀교(密敎)를 찾아가는 것을 권하겠소. 당신의 잠재력이라면 그들도 흔쾌히 받아줄 테지."

"조언 고맙소."

"허나 죽는다는 소리는 함부로 하지 마시오. 내 어찌 붕우(朋友)가 죽는 걸 옆에서 지켜볼 수 있겠소?"

"설마..."

"나도 함께 구미호를 만나겠소."

나는 깜짝 놀라서 외쳤다.

"너무 위험하오! 구미호는 정말 강하오."

"걱정 마시오. 방법이 있으니."

"으음."

나는 별 수 없이 망량을 믿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구미호가 올 때까지 기다리면서 하루하루 화씨가문의 의술과 망량의 술법을 배우는 과정이 반복되었다. 그렇게 다시 반 년의 시간이 흘러갈 때쯤, 달이 휘영청 밝은 어느 밤이었다.

[ 백웅! 사립문(四立門) 앞으로 나오너라.]

어디선가 거대한 영언(靈言)이 들려왔다. 영언이란 전음과 달리 술법사가 사용하는 술수로써, 먼 곳에서도 자신의 의지를 원하는 상대방에게 전달할 수 있었다. 나는 이제 구미호가 왔다는 사실을 짐작하고는 망량을 불렀다.

그리고 준비를 한 후 사립문으로 갔다. 사립문이란 개경을 둘러싼 네 개의 거대한 관문이었다. 또한 이 위치에서 사립문이라 하면 동대문(東大門)이라고도 부르는 장소일 수밖에 없었다.

타앗

내가 보초의 경계를 경공술로 피해서 동대문 밖의 한적한 소로(小路)까지 도착했을 때였다.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10년 만이구나. 잘 지냈느냐?"

"읏."

뒤를 돌아보자, 거기에는 요염한 여인의 모습을 하고 있는 미호가 있었다. 그녀는 서경에서 보았던 절세가인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여전히 엄청난 크기의 가슴이 출렁거리는 모습이라서 잠시 시선을 빼앗겼다. 그녀는 나를 놀려먹는 게 재밌는 듯 깔깔 거렸다.

"아하하. 아직도 네 녀석은 동정(童貞)이느냐?"

나는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상관하지 마. 그것보다 동정이라는 걸 보면 알 수 있는 건가?"

"물론이지! 나님을 무시하지 말아라. 냄새가 다르니까."

"......"

동정냄새라는 게 실제로 있었단 말인가...

내가 뭔가 확 깨는 기분이 들어서 멍하니 서 있자, 그녀가 갑자기 공중제비를 넘어서 아름답고 귀여운 유녀(幼女)의 모습으로 변신했다. 그리고는 방긋 웃으며 말했다.

"너는 이 모습이 더 좋으려나?"

"그만 좀 놀려. 하여간 이야기나 하자."

"아하하하..."

뭐가 그리 재밌는지 한참동안 깔깔 웃던 미호가 말했다.

"그 동안 충실히 힘을 쌓았느냐?"

"솔직히 말하자면 무공은 별로 진보하지 못했어. 하지만 그 동안 의술을 배웠고 팔지경 덕분에 술법도 배울 수 있었다."

"호오... 술법이라... 스승이라도 있었던 모양이지?"

"중원에 있던 내 친구에게 배웠다."

미호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리고는 말했다.

"좋아. 그리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네가 익힌 술법을 보고 판단하지. 한 번 익힌 걸 펼쳐보려무나."

"그 전에 묻고싶은 게 있는데."

"뭐냐?"

"네가 칠요 해인을 얻으려는 이유가 뭐냐? 천계로 돌아가려고 하는 거야?"

내 질문에 미호는 뜻밖에 한방 먹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까지 여유작작하던 것과 달리 명백히 동요하는 상태였다. 그래서인지 미호답지 않게 말을 더듬거렸다.

"그, 그, 그걸 네가 왜 알아야 하지?"

나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그냥 궁금한 거야. 지상에서 천자(天子) 못지않은 권세를 누리고 있는 네가, 천계에 다시 올라가려는 이유가 궁금해. 지상에 있으면 뭐든 누릴 수 있을텐데 왜 천계에 가려는 거지?"

"흐음... 백웅이여. 너는 천계가 어떤 장소인지 잘 모르는가 보구나."

"응. 잘 모르니까 물어보는 거지."

미호는 그리 불쾌한 기색은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내 질문에 선선히 대답했다.

"천계는 인간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물질적인 세계가 아니니라. 반쯤은 정신체가 유영하는 정령(精靈)의 세계라고 할 수 있지. 그러므로 천계에 존재하는 자들은 그 자체로 물질계의 온갖 쾌락따위는 비할 수 없을 정도의 충만감을 얻게 되느니라."

거기까지 말한 미호가 쓴웃음을 지었다.

"본디 요괴였던 내가 인간과 쾌락을 얻어봤자 얼마나 얻겠느냐? 호화스러운 부귀영화, 맛있는 음식, 육체적 쾌락은 부차적인 것이니라. 천계에서 얻는 정신적 충족감은 그런 것과는 비교할 수가 없다."

"흠. 그럼 천계로 가서 하고싶은 게 뭔데?"

"서왕모 님께 다시 용서를 빌고 그 분을 다시 모시고 싶다. 나는 그 동안 간절하게 원하고 있었지."

"그렇구나."

"자, 잡설이 길었고 어서 술법을 펼쳐보아라."

"알겠다."

나는 차례대로 접지술(摺地術), 화염부(火炎符), 은둔술(隱遁術), 우보법(牛步法), 환영술(幻影術)을 펼쳐내었다. 내가 알고 있는 초급술수 다섯 개를 모두 펼쳐 내자, 미호가 감탄한 듯 말했다.

"호오... 과연. 꽤 열심히 배웠구나."

"이 정도면 합격인가?"

"아니 전혀."

"......"

"흥... 초급술수를 익혀서 십이율의 본단에 쳐들어갈 생각이냐?"

툴툴거리는 미호는 그리 화난 기색은 아닌 듯 했다. 내가 멀뚱하게 서 있자, 그녀는 신경질이 난 듯 손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

"됐다. 너는 그냥 네 인생 살거라."

"정말이냐?"

"어차피 십이율에 있는 해인은 무력으로 얻어낼 생각이 없다. 너는 방해만 되니 가 버려라."

내게 있어서는 최상의 상황이었지만 묘하게 기분이 나쁜 것도 사실이었다. 마치 전력 외니까 너는 필요가 없다고 하는 말이 아닌가! 하지만 구미호같은 대요괴 입장에서 볼 때 내 힘이 미약해보이는 것도 사실일 것이다.

"팔지경은 어떻게 할까?"

"그건 그냥 네가 가져라. 어차피 그딴거 필요도 없다."

"고맙군."

미호의 눈이 약간 매섭게 변했다. 무언가 살기같은 게 느껴졌다.

"흥... 네 놈은 여기서... 엇?!"

나는 미호를 갑자기 끌어안았다. 미호는 어린 소녀의 모습이었으므로 덥썩 안기자 당황하는 소리를 내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꼭 끌어안은 채 함박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고마워."

인간이고 요괴고 간에 상관없다. 미호에게 고마움을 표하고 싶었다.

"......"

잠시 후 미호가 작은 손으로 낑낑대며 내 어깨를 밀어 내었다. 그녀의 얼굴은 마치 홍당무처럼 붉어져 있었다. 우물쭈물대며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는 모습은 천지를 홀려대는 요호같지가 않았다. 그녀가 새침하게 말했다.

"흥... 너한테 서왕모의 기운이 있어서일 뿐이다. 딱히 너같은 걸 좋아하는 게 아니니까 착각하지 마라."

"알았어."

고개를 돌린 미호가 말했다.

"참고로 십이율의 본단은 장백산(長白山)의 고미(高彌) 유역에 있다. 알아둬라."

"알았어. 근데 갑자기 그걸 왜..."

"그냥 말해봤다, 멍청아."

신경질을 내던 미호가 등을 돌려서 걸어갔다. 그리고는 말했다.

"네 친구는 운이 좋구나. 앞으로는 쓸데없는 일에 끼어들지 말라고 해라, 백웅."

"잘 가."

"흥..."

쉬이익!

미호가 사라졌다. 아마도 가 버린 듯 했다. 나는 그와 동시에, 허공 어딘가에서 사람의 신형이 떨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쿠당탕 하고 지면에 떨어지는 소리에 십 장 밖으로 달려가 보니, 그 곳에는 기절한 망량이 나무 밑에 쓰러져 있었다.

나는 기겁해서 그를 흔들어 깨웠다.

"정신 차리시오!"

"으음..."

잘 보니 이 근처에는 망량의 호위무사들도 쓰러져 있었다. 그들도 하나같이 기절한 상태로 보였다. 잠시 후 정신을 차린 망량이 머리를 긁적였다.

"면목이 없군. 여차하면 도우려고 했는데 구미호에게 제압당해 버렸소."

"무슨 소리요? 구미호는 가만히 서 있었는데 그 사이에 당신들을 눈치채고 제압해버렸다는 소리요?"

"그런 것 같군. 어찌 당하는지도 몰랐으니, 과연 저 구미호는 대요괴인 듯 하오."

나는 그 순간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 설마 방금 전 그 살기가?'

전혀 그런 기색은 느끼지 못했는데, 눈이 매서워지며 살기를 드러내던 그 순간에 나는 생사의 고비를 넘겼다는 말인가? 구미호가 살려준다는 듯이 말을 했어도, 사실 그 순간에 내 목숨을 결단내버릴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갑자기 태도를 바꾼 것은 내가 고마워서 끌어안았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았다.

망량이 흙먼지를 털고 일어나서 말했다.

"이제 돌아갑시다, 중원으로."

"... 안 되오."

"무슨 소리요?"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그냥 여기 남아서 의술을 더 공부해야겠소."

망량이 황당한 듯 말했다.

"무슨 소리요? 백련교의 움직임이 갈수록 격해지고 있소. 더 늦으면 백련교가 반 년 이내에 강호를 제패해버릴텐데 그걸 두고볼 생각이오?"

"내 입장에서는 그것도 상관없소. 어차피 백련교가 내게 해를 입히는 것도 아니잖소? 그리고 백련교가 강성해질 수록 금의위가 쪼그라들 테니, 내가 당장 중원에 가서 할만한 일은 그리 많지 않지."

"그건 그렇소만."

"나는 이번 생이 아니면 더 이상 의술을 배울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이 드오.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 의술을 배우고 싶소."

망량이 어쩔 수 없다는 듯 대답했다.

"할 수 없군. 당신의 의지를 존중하겠소. 만에 하나 큰일이 생기면 연락하겠소."

"알겠소."

그리고 망량과 호위무사들은 다음 날 고려를 떠났다.

배가 멀어지는 모습이 보였다.

쏴아 -

나와 함께 망량을 송별하러 개경 인근의 항구로 나온 화서명이 말했다.

"정말 각오가 된 건가? 자네는 분명 중원무림에 가면 큰 일을 할 수 있을 터인데, 그 모든 걸 포기하고 의술의 길에 정진할 수 있겠는가?"

화서명도 내게서 그동안의 경과와 망량에 대한 걸 전해들은 상태였다. 나는 화서명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습니다. 저는 이제 배우다 마는 건 질색입니다. 제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서 의술을 배워서 길을 뚫고 싶습니다."

화서명은 그 말에 감격한 듯 잠시 울먹거렸다. 그리고는 주먹을 꽉 쥐고 말했다.

"좋아...!! 우리는 할 수 있어!"

"이제 슬슬 정씨 가문에서 독립해도 좋지 않을까요?"

"안 그래도 나도 그 생각을 하고 있었네. 일족의 귀화도 끝난데다가 돈도 왠만큼 모았으니 더 이상 정씨의 신세를 질 필요는 없겠지. 그리고 자네가 독립적인 의원이 되어야 하니, 정 가주에게 말해 봅세."

나와 화서명은 정철욱에게 찾아가서 이제 빈객과 호위무사를 그만두겠다는 말을 했다. 정철욱은 우리의 사정을 모두 들은 후 한숨을 쉬었다.

"화 노인. 그리고 백웅 무사. 당신들은 우리 정씨 가문의 모든 빈객 중에서도 가장 우수한 존재였소. 나로써는 결코 놓치고 싶지 않건만, 그래도 나가야 하겠는가?"

"죄송하지만... 의원으로써의 길을 추구하고 싶습니다."

정철욱이 간절하게 말했다.

"화 노인. 당신에게는 왕속(王屬) 의원의 자리를 주겠소. 그리고 백웅 무사에게는 장군(將軍)의 직위를 주지. 그래도 안 되겠소?"

왕속의원은 왕족을 전문적으로 진찰하는 전속의원을 뜻했으며, 어의(御醫)라고도 불렸다. 실질적으로 이 고려땅에서 의원으로써 최고의 위치를 의미했다. 또한 장군이라는 직위는 말 그대로 고려 군부(軍部)의 일각을 차지하는 실력자가 된다는 뜻이었다. 어느 쪽이든간에 일개 빈객에게 주기에는 파격적인 위치였고, 정철욱은 그걸 줄 수 있는 세도가였다.

하지만 화 노인은 고개를 저었다.

"죄송합니다. 정 가주의 은혜에는 다른 걸로 보답드리겠습니다."

"흐음... 그렇게까지 의지가 굳다면 어쩔 수 없겠군."

그리고는 정철욱이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백웅 무사에게는 내 그동안 충분한 보답을 못한 것 같아서 미안하군. 떠나기 전에 내가 소원을 하나 들어주고 싶은데, 뭔가 말할 게 없는가?"

"음 그건..."

나는 뜻밖의 제안에 고민에 잠겼다. 잠시 후 생각을 정리하고 대답했다.

"십이율의 문주(門主)들을 만나보고 한번씩 대련을 해보고 싶습니다."

"문주들과 대련이라고? 그건 그냥 신청해도 되는게 아닌가?"

"야인(野人)의 신분으로 하는 것과, 정 가주님의 공증이 있는 대련은 다르니까요."

정철욱이 빙긋 웃었다.

"아! 무슨 말인지 알겠네. 내 대련을 주선해 주지."

"감사합니다."

"그들은 내 낯을 보아서라도 섣부른 짓을 하지 못할 걸세."

나는 이미 대련이나 비무라는 게 얼마나 혹독하고 어려운 것인지 익히 알고 있었다. 명예를 중요시하는 건 중원이나 고려나 다를 바가 없었기에, 섣불리 대련을 신청하면 목숨의 위협을 크게 받을 것이다.

하지만 정철욱의 이름으로 하는 것이라면 나는 최대한 안전하게 무(武)를 겨룰 수가 있다. 나는 내심 생각했다.

' 그 동안 너무 무공수련을 소홀히 했다. 좀 더 높은 무학을 느껴볼 필요가 있어.'

단순한 점수(漸修)로는 초절정에 이르기까지의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릴 것 같았다. 나는 실전에서 많은 경험을 얻는 편이었기에, 기왕 고려에 온 김에 십이율의 문주급 초절정고수들과 대련을 하면서 무예경험을 쌓고 싶었다. 열두 명이나 되는 초절정고수들과 안정적으로 무를 겨루어 볼 기회는 달리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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