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검신-91화 (91/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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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천향(暗天鄕)

약 1년 정도 의술과 침술을 공부하는 나날이 지나갔다. 나는 전반적인 암기력은 매우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기에 벌써 단순암기지식은 뇌정경까지 응용해서 왠만큼 습득한 상태였다. 하지만 의술은 배운 것을 응용해서 의원 나름대로 냉철하고 직관적인 판단력을 발휘하는게 더욱 중요한 분야였기에, 나는 왠지 벽을 느끼고 있는 상황이었다.

화서명은 아까운 듯 늘 입을 다셨다.

"흠... 머리가 좋은데 멍청한 게 흠이군."

이건 대체 무슨 평가란 말인가?

내가 화를 낼 수도 없어서 멍하니 쳐다보고 있자 화서명이 말했다.

"걱정 말게. 그래도 자네는 통상적인 의원들보다는 훨씬 빨리 배우는 편일세. 다만 자네 오성(悟性)이 조금만 좋았다면 희대의 천재가 될 수 있었을텐데 아쉽구나."

"그거 다행이군요."

"특히 자네의 침술(針術) 습득속도는 매우 좋아."

나는 그가 유일하게 칭찬하는 분야인 침술에 대해서 듣자 기분이 좋아졌다. 그 말대로, 의약의 많은 분야 중에서도 침술 하나에 있어서는 내가 재능을 발휘할 수가 있었다.

침술이라는 건 아주 미세한 차이로 혈(穴)의 운용이나 기의 흐름이 달라지는데, 나는 기감이 매우 발달해서 인체의 흐름을 모두 읽어낼 수 있었고 높은 무공 덕분에 손이 흔들리거나 흐트러질 일도 없었으며, 체력적으로도 보통 의원보다 압도적으로 좋았기 때문이다. 약(藥)이나 초(草), 의(醫), 건위(建位), 외과수술(外科手術)과 같은 의술의 다른 분야에서는 그리 성과가 좋지 않았으나 침술 하나는 자신이 있었다.

' 나도 잘하는 게 있었구나.'

그동안 줄곧 재능이 없어서 자신을 한탄하며 살아왔기에 왠지 기쁜 마음이 들었다. 그런 나를 보며 망설이던 화서명이 말했다.

"... 한가지 물어볼 게 있다만."

"무엇입니까?"

"자네는 의원(醫員)이 될 생각은 없는가? 이런 호위무사 일같은 건 관두고 사람을 고치는 의원이 되보지 않겠냐는 말일세."

"흐음..."

나는 고민하다가 말했다.

"나중에 여유가 있으면 꼭 되고 싶습니다."

지금 당장은 해야할 일이 있어서 의술의 길을 추구할 수 없겠지만, 금의위의 음모를 막고 내 삶을 살 수 있게 된다면 그것도 좋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침술을 익히는데 재미를 느끼고 있기에 할 수 있는 발상이었다. 화서명은 고민하다가 뜬금없이 말했다.

"1년 내내, 내가 있던 화씨세가가 하북에서 손꼽히는 가문이었는데.. 어째서 쇠락했는지 자네에게 말해준 적이 없었지."

나는 약재를 정리하다말고 그를 힐끔 바라보았다. 화서명은 의자에 앉은 채 화로의 불을 쬐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건 전적으로 나 때문이었다. 백련교의 제안을 받아들인 나 때문이었어."

"무슨 말입니까?"

타다닥

화서명은 물끄러미 화로의 불꽃을 바라보다가 불쏘시개를 하나 던졌다. 불꽃이 더 세게 치솟아올랐다.

"나는 약 10년 전에 하북의 의약명문 화씨세가의 가주(家主)로써 천하 오대의원의 하나로 꼽혔네."

과거형이다.

"......"

" 지금도 내 의술은 천하에서 동방무결(東方無潔), 강전길(姜專吉)을 제외하고는 견줄 자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네. 그런 나였기에 내 의술에 대한 자부심은 더할 나위없이 높았지. 그런 내게 백련교의 사자가 찾아온 건 필연이었을지도 모르지."

나는 약재를 내려놓고 그의 맞은 편에 가서 앉았다. 내가 집중해서 들을 자세를 취하자 화서명의 말이 이어졌다.

"백련교의 소교주(小敎主)가 있었지. 그에게는 아주 큰 병이 하나 있었어. 나는 소교주의 병을 고쳐줄 것을 백련교의 사자에게 부탁받았네."

"어떤 병입니까?"

"후... 그 시점에서는 알려주지 않았네. 하지만 그 자는 내게 선금으로 무려 황금 이백 관이나 되는 금은보화를 내놓았고, 향후 화씨세가의 행보에 백련교가 전폭적인 지원을 해줄 것을 약속했다. 그리고 나도 고치기 힘들 거라는 도발을 하길래 걸려들고 말았지."

화서명이 씹어뱉듯 말했다.

"하긴 호법사자가 직접 본가를 찾아왔으니 거절해도 별 수 없었지만."

"호법사자가?"

"그렇네. 회색의 여우가면을 쓰고 있는 자였지."

회색의 여우가면.

내가 그 단어를 중얼거리고 있자 화서명이 말했다.

"나는 호법사자를 따라서 백련교로 갔다. 그 곳에서 백련교주를 직접 만나볼 수는 없었지만, 그 자리에는 이미 나를 포함한 천하 오대의원이 모두 와 있었네. 그 자들도 백련교의 초청을 받은 모양이었네."

"소교주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 천하의 모든 명의를 불러온 거군요."

"그래. 그만큼 백련교에서 절박했다는 소리였겠지."

나는 정말 뜻밖의 정보를 듣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부터 10년 전이면, 내 전생시점을 고려해보아도 그리 멀지 않은 과거였다. 그 때 소교주의 병을 치료하려고 천하 오대의원이 백련교에 모이는 일이 있었다니!

내가 주의깊게 듣고 있자 화서명이 고개를 숙이며 말을 이었다.

"헌데... 그 날 나의 자존심은 산산히 부숴졌네. 나를 포함해서 천하오대의원 중 그 누구도 소교주의 병을 고치지 못했어. 동방무결이 병의 정체를 알아내고 내가 침술로 병세를 호전시켰으며 강전길이 안정을 시켰고, 나머지 두 명도 도와주긴 했지만... 그래도 무리였다. 우리가 백련교의 도움을 받아서 천하의 모든 귀한 약재를 쓸 수 있었지만 그래도 고치는 건 불가능했어."

나는 깜짝 놀랐다.

"......!! 세상에 그런 병이 있습니까?"

"있었네. 그리고 우리는 일년 내내 백련교에 머물면서도 그 병을 고치지 못해서 암담해졌네. 소교주의 병을 고치지 못했으니 이제 죽은 신세이고, 가문도 몰살당할 거라고 생각한 거였지."

하지만 그는 여기에 살아 있다. 내가 화서명을 물끄러미 바라보자 그가 쓴웃음을 지었다.

"마지막 날에 백련교주를 먼 발치에서 만날 수 있었네. 그는 모습을 보이기 싫었는지 큰 발 뒤에서 이야기를 했는데, [그럴 수밖에 없겠지] 라고 하면서 우리를 그냥 보내 주었네. 어찌된 일인지는 모르지만 백련교주는 처음부터 우리가 소교주를 고칠 수 없으리라는 걸 알고 있었던 것 같았네."

고칠 수 없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나 불러왔다.

어째서인가?

' 뭔가... 단순한 절박함 때문은 아닌 거 같은데...'

내가 머리를 굴리고 있었는데 화서명이 말했다.

"일은 그 다음에 터졌지. 나를 포함한 천하 오대의원들이 백련교의 소교주를 고치러 갔었다는 사실이 강호에 알려져버린 것일세. 강호 무인들은 우리가 마교(魔敎)와 손을 잡았다고 비난했고, 화씨세가에는 한순간에 손님이 끊겼네. 아무리 대단한 명의라고 해도 치료받으러 오는 자가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었지...."

"그 사실이 알려졌다고요? 그건 설마 백련교에서 흘린 겁니까?"

"그건 모르겠네. 하지만 너무 적절한 때 정보가 흘러나와서 아마 백련교일 거라고 짐작하고 있네. 아마 그 자들 나름대로의 징벌이었겠지."

백련교주는 천하 오대의원을 자신들이 직접 죽이거나 주살하면 천하에 좋게 보이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듯 싶었다. 그래서 일부러 중원무림에 그 사실을 흘려서 천하오대의원이 '배신자'로 몰리게끔 만든 것이다. 이럴 경우 화살은 천하오대의원에게만 쏠릴 것이 분명했다.

나는 이해가 되지 않아서 말했다.

"처음부터 그럴 가능성을 생각지 않으신 겁니까? 왜 백련교에..."

"어쩔 수 없었다고 하지 않았는가. 천하의 백련교 호법사자가 직접 찾아와서 부탁을 했다. 내가 거절했으면 그 자리에서 호법사자에게 가문이 몰살당할 위험도 있었다. 나로써는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네."

"으음..."

벌컥

화서명은 옆에 있던 물을 들이켰다. 자세히 보니 물이 아니라 죽엽청을 미리 잔에 부어놓은 듯 했다. 죽엽청을 마시고 잠시 한숨을 내쉬던 화서명이 말을 이었다.

"나는 더 이상 중원에서는 살 수 없겠다 싶어서 다른 곳에서 살 방법을 모색했네. 그리고 고려에 본가를 옮기려 했지. 중원무림과 관련이 없는 고려에서라면 괄시를 받지 않고 살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것일세."

"그래서 정씨 가문의 빈객으로 들어오신 거군요."

"그렇네. 정 가주의 주치의로 있는 대신 그는 화씨세가의 자손들을 고려 땅에 귀화시켜주기로 했네. 그래서 나는 정 가주의 은혜를 결코 잊을 수가 없고, 그가 청하는 것은 결코 거절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게 말한 화서명은 곱지 못한 눈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하긴 그의 입장에서는 그냥 주치의 일을 하기도 바쁠 텐데, 갑작스럽게 나라고 하는 제자를 받아야 했으니 마음에 들지 않을 것이다. 무공보다 더욱 폐쇄적인 사승관계를 지니고 있는 의술의 특성상 비전(秘傳)을 유출하기 꺼려졌으리라.

"하지만 화씨세가의 내 혈육들은 아직 전부 고려에 오지 못했네. 아직도 절반은 중원에 남아서 괄시를 받으며 살고 있지."

"어째서입니까?"

"돈 때문이다. 돈이 없어서 그렇네."

한탄하듯 중얼거린 화서명이 다시 죽엽청을 한 잔 벌컥 들이켰다.

"정철욱이 아무리 마음이 좋아도 중원의 대세가 전체를 개경에 옮겨올 돈을 지원해 줄 정도의 호인(好人)은 아닐세. 나는 그의 주치의로써 벌어둔 돈을 현재 모두 화씨세가의 귀화에 쓰고 있는 중일세. 그래도 많이 모자라서 암담했지."

"무슨 말입니까? 사람이 하북에서 산동을 통해서 여기까지 배를 타고 오는데 돈이 그렇게 많이 든다는 말입니까?"

"바보같은 소리. 의가(醫家)의 생명은 의서(醫書)이며, 본가에는 보물같은 자료와 약재며 지식들이 가득 쌓여 있네. 그걸 고려까지 고스란히 옮겨오려고 한다면 표국 두세 개를 세울 정도의 돈이 필요할 것일세. 설마 화씨세가가 수백 수천년간 쌓아온 모든 걸 포기하라는 말인가?"

"으음..."

화서명이 눈을 게슴츠레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던 중 자네가 나타나서 내게 성련 한 뿌리를 준 것일세. 나는 1년 동안에 그 성련 뿌리를 내 나름대로 판매해서, 그 돈으로 일족 스무 명과 의가 자료를 고려땅으로 들여올 수가 있었네. 자네 덕에 꽤 도움을 받았네."

"그 성련 뿌리가 있으면 단숨에 내공이 급증할 텐데..."

"후후, 내 무공 하나 늘자고 내 혈족들이 중원에서 천년만년 괴롭게 괄시당하는 걸 보고 있으란 말인가? 나는 무림인이라기보다는 의원이다. 그래서 내게 중요한 건 무공이 아닌 것일세."

벌컥...

화서명이 이번에는 죽엽청 병을 통째로 들이켰다. 술을 마시지 않고서는 하기 힘든 얘기 같았다. 그가 말했다.

"난 솔직히 자네에게 화씨백팔침이나 화타오금희를 전수해 줄 생각 따위는 없었네. 솔직히 뭘 믿고 자네에게 가문의 비전을 전수한다는 말인가? 게다가 보통 사람은 그 전의 기본만 배워도 10년이 걸리고 그 전에 나가떨어지니까 적당히 할 생각이었네. 헌데 1년 동안 지내면서 마음이 바뀌었어."

역시 먹튀할 생각이었군.

나는 얼추 예상했던 바였기에 놀라지 않았다. 그에게 흑백의 성련을 준 것은, 그 손해를 감수하고라도 의술의 명인에게 의약을 배운다는 게 큰 이득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무덤덤하게 반문했다.

"어떻게 바뀌었단 겁니까?"

"자네는 재능이 별로 없어. 물론 의술에 필요한 고도의 암기력과 체력, 정밀성이 있어서 평균 이상은 갈 수 있지만 그렇다 해도 이해력이 좀 부족한게 사실이야. 고급의 의술로 갈수록 힘들어지겠지."

"......"

"그러나 자네에게는 성(誠)과 실(實)이 있어. 나는 그 점이 마음에 든다네."

거기까지 말한 화서명이 헛기침을 했다.

"자네가 원한다면, 나는 자네를 정식 제자로 받아들이고 의술을 전수하고 싶네.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자네에게 알려주고 싶군."

"그것은 화씨세가에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까?"

"아니라고 하면 거짓말이겠지. 하지만 자네는 자신의 가치를 좀 더 파악할 필요가 있네. 천하에 무수한 기인이사가 있다지만, 자네를 보고 군침흘리지 않는 자는 없을 게야. 재능은 둘째치고 그 엄청난 내공만으로도 천고의 기재라 할 수 있으니."

"마음에 들지않아 하는 자도 많을 것 같습니다만."

나는 삼절 이광을 떠올렸다. 그러자 화서명이 고개를 저었다.

"자네가 어떤 스승 밑에서 수행했는지 몰라도 그는 기대치가 너무 높았던 것이라 생각되네. 허나 진짜 스승과 제자의 관계라는 건 그런 게 아니야. 서로를 신뢰하며 가르침을 통하며, 나아가서는 그가 나아갈 인생의 길을 살펴봐 주는 존재일세. 나는 자네가 그저 한 사람 몫을 하는 의원이 되었으면 하는 것이네."

기대치라.

나는 이광의 눈빛을 떠올랐다. 확실히 나를 진지하게 가르칠 때의 이광은 뭔가 절박하고 매서운 기색이 있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는 엄청나게 높은 목표를 가지고 나를 가르치고 있었던 것이리라. 그리고 기대가 큰 만큼 배신감도 컸을 것이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 그래. 처음부터 기대치 따위를 주지 않으면 되는게 아닌가?'

거기까지 생각한 나는 화서명에게 말했다.

"혹시 저의 기(氣)를 숨길 수 있는 방법이 있겠습니까?"

"물론 있고 말고. 역시 자네는 그걸 고민하고 있었군."

화서명이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반박귀진의 경지를 줄 수는 없네만, 화씨백팔침을 응용해서 천인봉혈법(天印封穴法)을 시행하면 자네의 외부에 흘러나오는 기를 최소한으로 억제할 수 있을 게야. 그럼 자네는 쓸데없는 시비에 휘말리지 않겠지."

나는 그 말을 듣자 두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자가 되겠습니다."

"그럼 구배지례를 하게."

"네."

나는 구배지례를 하고 화서명과 정식으로 사제의 연을 맺었다.

지금까지 서로 호시탐탐 노리면서 심리전을 벌이던 것과 달리, 이제는 제대로 그에게서 비전을 전수받는 관계가 된 것이다.

그렇게 8년이라는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그 동안 나는 정씨세가 호위무사의 일을 하고, 남는 시간에는 화서명에게 찾아가서 의술을 배웠다. 호위일을 한다고 하더라도 매일 나가는 게 아니었기에 7주야에 사흘 정도는 시간이 났다. 그렇게 약 8년 동안 나는 화서명에게 의술을 배웠는데, 어느덧 상당한 경지에 이르게 되어서 화서명에게 '한 사람 몫'을 한다는 이야기를 들을 정도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가을의 하늘을 바라보며 책을 읽던 나는 중얼거렸다.

"여태까지 중 제일 오래 살았군."

현재 내 몸은 완전히 장성했고, 20대 중반의 청년이 되어 있었다. 과거 기록보다 훨씬 오래 생존한 것이다. 동시에 내가 그동안 얼마나 잘 죽어댔는지 실감할 수 있었다. 일상의 평화가 이어지다보니 정신없던 세월이 그리워질 정도였다.

다만 무공은 그리 늘지 않았다. 그 동안에 화씨백팔침과 화타오금희를 배우는데 모든 정신력을 다 쏟는 바람에, 그저 매일같이 기본초식을 연습하며 잊어버리지 않게끔 하는 정도였다. 그 점이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구미호 때문에 죽는 한이 있어도, 화서명의 의술은 진짜배기였고 이렇게 배우고 있다는 자체가 기연이었기 때문이다.

' 씨발... 뭐 죽으면 죽는 거지.'

이런 의술은 나중에 배울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리고 화서명은 8년 전에 이미 내게서 성련 한 뿌리를 더 받아서 일족을 완전히 고려에 옮겨오는데 성공한 상태였다. 별달리 거칠 것도 없으니 나는 평범하게 의술을 공부하는 나날을 이어온 것이다.

그 때였다.

화서명이 문을 열고 들어와서 말했다.

"백웅. 화씨백팔침의 대해혈 쪽은 잘 이해가 되느냐?"

"조금 어렵습니다만."

"그동안 화씨백팔침의 7할을 이해한 것만 해도 대단한 것이다. 좀 더 노력해라."

"네."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화서명이 영락없이 내 등골을 빼먹고 내칠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8년 전의 그 고백에는 진심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는 진심으로 나를 직전제자로 받아들이고 있었으며 나도 그를 스승으로 받들고 있었다.

그리고 슬며시 화서명이 내게 말을 꺼냈다.

"내 손녀와 결혼할 생각은 없느냐? 전부터 말했는데..."

"음... 손녀분께서 제 얼굴을 많이 싫어하시는 듯 해서."

"끄응. 남자는 용모가 전부가 아닌데 괘씸한 년."

화서명이 신경질을 냈다. 확실히 장성하게 된 내 얼굴의 상태는 별로 좋지 않았다. 그나마 내공이 엄청나게 심후했기에 크게 외모의 모양이 망가지지는 않았지만 선천적인 추남상이었다. 그래서 화서명이 자신의 십오 세 손녀딸인 화영영을 내게 소개했을 때, 화영영이 내 못생김에 놀라서 기절할 것 같은 표정을 지었었다.

화서명은 말했다.

"내가 직접 자네 얼굴을 성형해 주고 싶네만, 정말 얼굴을 안 고쳐도 괜찮나?"

"네. 말씀하신대로 외모가 중요한 건 아니니까요."

"하아... 나중에라도 생각이 바뀌면 말하게. 하긴 지금 자네 수준이라면 혼자서도 되겠지만."

한숨을 쉰 화서명이 본론을 꺼냈다.

"잠깐 나가 보게. 바깥에 자네를 찾아온 손님이 있다고 하는군."

"손님이요?"

나는 고개를 어리둥절했다. 나는 정씨가문의 호위무사 일 외에는 하지 않았고, 그 동안 이 가문의 정씨가문 인사들과 호위무사, 화씨세가 사람들 외에는 교분을 쌓지 않았다. 이제와서 찾아올 손님같은 건 없는 것이다.

그러나 바깥으로 나가자 방립을 쓴 사내가 검은 깃옷을 입고 있었다. 나는 그 옷이 학창의라고 불리며, 내게 아주 익숙한 옷임을 알았다. 그렇다기 보다는 잊을 수 없는 옷이었다.

잠시 후 사내가 방립을 벗고 웃으며 말했다.

"오랜만이오 백웅."

"망량...!!"

거기에는 망량이 서 있었다. 그는 예전과 달리 기도가 매우 출중해졌으며 얼굴에 자신감이 넘쳤다. 뿐만 아니라 망량의 등 뒤에는 네 명의 부하들이 시립해 있었는데 그들 또한 상당한 자들 같았다. 나는 그들을 흘끔 보고는 말했다.

"반천맹(反天盟)을 만든 거요?"

"하하핫, 저번에 말했던 그 이름이 너무 마음에 들었소. 그래서 다른 걸로 할 수가 없더군."

망량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여러모로 달라보이는 모습이었다. 과거에는 거칠 것 없이 나태하고 방탕한 자유인이었다면, 지금은 하나의 단체를 이끄는 수장으로써의 위엄이 느껴졌다. 내가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자 망량이 말했다.

"정철욱 가주에게는 허락을 얻었소. 잠시 얘기나 하러 나갑시다."

"그러지."

나는 망량을 따라 근처의 객잔으로 가서 방을 잡았다. 방문 앞에서 망량이 호위들에게 명령했다.

"사방을 경계하게."

"존명!"

쉬쉭

그들은 일사불란하게 일류의 경공술으로 자리에서 사라졌다.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저 자들도 반천맹의 일원이겠군."

"그렇소. 의(義)를 위해서 모인 자들이지."

방 안으로 들어가자 잠시 침묵이 흘렀다. 먼저 이야기를 꺼낸 건 나였다.

"그동안 뭘 하고 지낸 거요? 나는 해인의 소재를 알아내려고 그동안 고려에서 지냈소."

"그건 알고 있소. 나는 당신에게서 받은 흑백련과 막야를 이용해서 성장했고, 반천맹을 만들어서 황실에 대항하고 있는 중이오."

"혹시 금의위가 칠요(七曜)를 모아서 강해지지 않았소?"

그러자 망량이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당신이 말하는 원래의 역사대로라면 지금쯤은 그렇게 되어야 했겠지. 그러나 아직까지 그런 낌새는 보이지 않고, 그 자들은 아직 대량의 마물이나 소환사를 만들어내지 못한 상태요. 아마 칠요를 얻지 못했겠지."

"사실이오?"

"그렇소."

어째서인가?

나는 망량의 말을 듣고 의문에 잠겼다. 사실 이번 생에는 죽든살든간에 칠요의 소재나 파악하려고 마음먹고 있었기에 중원의 변란을 반쯤 포기하고 있었다. 지금쯤은 금의위가 칠요를 얻어서 날뛰고 있어도 이상하지 않은데, 희한하게도 망량은 그런 일은 없다는 것이다.

' 이번 생에 내가 한 일 중에 금의위에게 영향을 끼칠만한 게 있었던 건가?'

곰곰히 생각해 봤지만 딱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내가 고민하고 있을 때 망량이 씩 웃으며 말했다.

"사실 내가 몇 년 전에 스승님께 물어봤소. 해인이 칠요가 맞냐고."

"......?!"

"그러자 스승님이 말씀하시길, 해인이 칠요인 건 확실하지만, 그걸 얻는 건 칠요 중 가장 난이도가 높다고 하셨소. 그래서 당신이 더 이상 고생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기에 다시 이야기를 하려 온 것이오."

나는 어이가 없었다.

설마 그런 방법이 있었다니!

망량선사가 나를 만나기를 싫어하니 나로써는 확인할 방법이 없지만, 망량이 애지중지하는 제자인 망량은 그냥 스승을 찾아가서 묻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나는 한숨을 푹하고 쉬고는 말했다.

"하아... 삽질한 느낌이군. 당신은 그걸 알았다면 진작에 말을 할 것이지 왜 놔둔 것이오?"

"사실 그 동안 고려에 있는 반천맹원을 통해서 백웅 당신의 소식은 전해듣고 있었소. 정씨 가문에도 한 명 있지."

"헛?!"

"나는 그 동안 백웅 당신이 너무 빠르게 자주 죽었다고 생각했기에, 차분하게 힘을 기를 시간을 주고 싶었소. 중원의 일에 섣불리 말려들 경우 죽을 확률이 높으니까."

나는 망량의 배려에 기가 막혔다. 동시에 망량이 그 동안 반천맹을 얼마나 키워놓았는지를 깨닫자 소름이 돋았다.

멀리 천리길 타국인 고려에서 연락을 들을 정도로 광대한 조직망에, 일류급 이상의 고수들을 호위로 대동해서 손쉽게 고려 최대의 세도가인 정씨 가문과 교섭할 위치에 오른 것이다. 10년도 안되서 이 정도의 거물로 성장할 거라고는 전혀 생각도 하지 못했다.

나는 망량에게 말했다.

"그럼 나보고 만나러 오라고 했으면 되었을 텐데 왜 굳이 여기까지...?"

망량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예의가 아니지. 당신은 내게 그토록 거대한 기연을 선물해주고 목적을 위해서 천리길 고려까지 와서 고생하고 있는데, 지조 한 마리를 보내서 중원까지 오라고 할 수가 있겠소? 친구라면 직접 찾아오는 게 당연하지 않겠소."

"......"

뭔가 울컥해서 잠시 딴 곳을 쳐다보았다.

' 망량을 만났던 게 내 인생 최대의 운이구나.'

나태해 보이지만 내면에는 뜨거운 열정과 재능, 협심(俠心)을 지닌 천재가 망량이었다. 망량선사가 그를 애제자로 아끼고, 난세였다면 제갈량이나 소하같은 존재가 되어있었을 거란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던 것이다.

내가 말을 잇지 못하자 망량이 말했다.

"사실 그것도 있고, 중원의 상태가 심상치 않아서 잠시 고려로 와볼 필요성이 있었기도 하오. 지금 괜히 중원에 있으면 휩쓸릴 거 같더군."

"무슨 일이 생겼소?"

"놀라지 말고 잘 들으시오."

망량이 심호흡을 한 후 말했다.

"백련교가 중원무림에 출범을 선언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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