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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검신-90화 (90/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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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천향(暗天鄕)

내가 화서명에게 의술의 공부를 위한 기본적인 혈도(穴道) 및 기초지식을 전수받는 시간은 약 한 달 정도였다. 그 동안 화서명은 두터운 의서책과 도해를 가져와서 내게 암기하도록 시켰고, 나는 이런 일이 익숙했기에 틈틈히 망량에게서 배운 뇌정경을 운용하면서 암기를 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나자 화서명이 놀라운 듯 말했다.

"굉장한 암기력이군. 보통 사람은 이렇게 빨리 못 외워!"

"하하..."

"공부요령도 좋아서 단순한 무부(武夫) 수준이 아닌데 어디서 따로 공부를 한 적이 있었나?"

나는 망량과 공부할 때를 떠올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 때 몇 년 동안 빡세게 공부했던 게 이런데서 도움이 되는 것이다.

"조금..."

"하여간 자네가 원래 무림인인 덕에 기경팔맥이나 혈도의 기본을 알고 있어서 다행이야. 그럼 이제 슬슬 본론(本論)으로 들어가도록 하지."

그의 말에 따르면, 무림인들이 점혈이나 진기운행에 관해서 알고 있는 건 매우 한정적이고 단순하다고 했다. 무림인들도 수십 수백개나 되는 혈도를 다 외우곤 했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자신의 무공수법에 필요한 수준에서 멈추었다. 무당파같은 도문정종(道門正宗)이 아닌 이상, 무림인과 의원의 혈도지식은 상당히 큰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한 달동안 다시 외운 것은 지금까지 알고 있던 '기본'을 포함하는 혈도의 거대하고 방대한 운용과 역할이었기에 최소한 열 배 이상의 암기를 해야했던 것이다.

화서명이 말했다.

"그 전에 자네는 유불선(儒佛仙)이 각자의 고유한 호흡법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불가와 도가는 알고 있으나 유가는 처음 들어보는군요."

"가르침의 종지는 대동소이하다네. 유교는 솔성(率性)을 목표로 해서 자기수양을 하는데 '순수한 원리'라는 것을 대전제로 내세우지. 말하는 건 어렵지만 결국 양신(陽神)을 이루고자 호흡을 수행하는 것이야."

"유가의 선비들도 무림인처럼 단전에 관련된 호흡을 수련한다는 말입니까?"

"그렇네. 극히 은밀히 내려오는 비전이지만, 분명히 존재하지. 그 비맥(秘脈)이 존재하기에 이 고려땅에 유불선의 총화를 합쳤다는 풍류도(風流道)라는 유파가 이름을 떨칠 수 있는 것이다."

놀라운 일이었다. 유가라고 함은 공자왈 맹자왈하는 선비나 유생들을 의미했는데, 설마 그 자들에게만 존재하는 독문무공(獨門武功)이 있다니! 게다가 불가나 도가의 정종무공과 비교될 정도면 그 심후함도 상당한 것이다.

화서명이 차를 한 잔 마시고는 말했다.

"그럼 양신이란 무엇인지 알고 있는가?"

"제가 책에서 본 바에 따르면 원신(元神)이라고 들었습니다. 음신과 양신의 궁극적인 위치에 있는 경지가 존재하니 그것이 원신입니다."

"제대로 공부했군. 맞아. 유불도 3계통의 수련자들의 출발도 과정도 다르지만 목적지는 결국 원신으로 귀결된다네. 그럼 원신이라는 건 무림인(武林人)인 자네의 입장에서는 어떤 경지일거라고 보는가?"

"흐음..."

어려운 질문이었기에 나는 고민했다. 사실 나는 요 한 달 동안에 두꺼운 의서의 기본지식을 무려 세 권이나 암기했으나, 그건 전부 단순암기였을 뿐 그런 걸 생각할 시간이 없었던 것이다. 나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천령단(天靈丹)이라고 생각합니다."

천령단!

아마도 백련교의 호법사자 3인이 이루었을 궁극의 내공경지이자, 반영구적인 초강력한 내공이 쉴새없이 흘러나오는 상태! 중단전(中丹田)을 열어서 얻을 수 있다는 경지였으나 사실 천령단을 제대로 언급하고 이해하는 듯한 인물은 삼절 이광 뿐이었다. 그 외의 무림인들은 천령단이라는 개념을 아예 모르거나 중단전이라고 어렴풋이만 알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자 화서명이 놀라며 말했다.

"뭐라고? 천령단은 자네에게 가르친 의서 어디에도 적혀있지 않았을텐데 어찌 그걸 알고 있는가?"

"제가 익힌 유파의 명인(名人)이 그 경지를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제 내공이 천령단에 근접해 있으나 천령단은 아니라고 했었죠."

"으음... 그 자는 분명히 백련교(白蓮敎)와 관련이 있는 자일 걸세. 무림천하에 수많은 내공수련자가 있으나, 천령단이란 단어로 그 경지를 정의하는 것은 백련교 뿐일세. 자네 유파는 아마 백련교와 큰 관련이 있는 듯 하군."

"......"

당연히 큰 관련이 있었다. 뇌신류(雷神流)는 원래 백련교의 호법문파였으나 수십년 전에 강호에 쫓겨나온 비운의 문파였기 때문이다. 이광이 백련교에서 비롯된 천령단이라는 개념을 이해하고 사용하는 건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거기까지 말할 생각은 없었으므로 고개를 끄덕였다.

"음 그렇군요..."

"하여간 알고 있다면 설명하기가 더 편하겠군. 자네의 말대로 천령단은 원신(元神)에 이르는 길일세. 하지만 원신 그 자체가 아니라 중간과정에 불과하지."

"중간과정이라고요?"

"그렇네. 종래에는 상단전, 중단전, 하단전이 모두 열린 마음의 경지에 도달해서 무한(無限)한 힘을 얻고 인간을 초월하는 것이 원신일세. 세상에서 신선(神仙)이라고 불리는 경지를 훨씬 초월해버린 인간 - 그것이 바로 원신인 것이야."

".......!!"

나는 그 동안 생각지도 못했던 개념에 깜짝 놀랐다.

' 신선을 초월한다고?'

망량의 말에 따르자면 도가에서는 신선과 신을 그리 다르지 않게 여겼다. 실제로도 대부분의 도학수련자들은 도를 닦다가 신선이 되는 것을 최종목표로 여길 정도였다. 그런데 원신이 신선을 초월한다고 말할 정도면, 인간의 몸으로 왠만한 신을 초월하는 무시무시한 힘을 지니고 있다는 소리가 아닌가!

나는 곰곰히 생각하다가 정리했다.

"하단전의 내공을 쌓아서 궁극에 이르면, 중단전인 천령단으로 넘어가고, 천령단을 한층 뛰어넘으면 원신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군요."

"그렇지. 바로 그것이 백련교주(白蓮敎主)의 무공이론일세."

"... 설마!!"

"자네 생각대로야. 백련교주 본인이 원신(元神)에 도달해 있기에 호법사자를 비롯한 백련교인들에게 그 무공이론을 전파할 수 있었던 것이네."

나는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설마 천령단을 거쳐 원신에 이른다는 게, 실제로 존재했던 경험과정이었다니! 이야기로 몇 번이나 들었던 백련교주의 괴물같은 힘을 새삼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곧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그 정도의 힘이 아니라면 대명제국의 황제가 그를 두려워하고 수백만 대군도 의미없는 힘을 보유하고 있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의 군사력이 무의미해지는 절대적인 억지력(抑止力)이었다.

나는 궁금한 점을 물었다.

"잠시만요. 저는 이래봬도 영약을 이용해서 인간 내공의 한계에 가까워졌다고 생각합니다. 자랑은 아니지만 천지간에 저보다 내공이 많은 인간은 거의 없을 겁니다."

화서명이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자랑 맞구만 뭘... 뭐 자네의 내공이 절대적인 경지에 올라와 있다는 사실에는 동감하네. 아마 동방, 서방, 중원, 백련교까지 싸그리 통틀어도 천상천하에 자네와 견줄만한 건 열 명도 되지 않을테지."

"헌데 저는 천령단이 아니라고 합니다. 어째서 제 내공은 천령단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 것이죠?"

"흐음... 자네는 지당한 의문을 품고 있군. 그리고 오늘 아주 사람을 잘 찾아왔어. 내가 아니면 그 대답을 해줄만한 존재가 그리 많지 않을 걸세."

씨익 웃던 화서명이 말을 이었다.

"짐작하고 있겠지만 천령단이라는 건 단순히 내공의 절대치를 높인다고 이룰 수 있는 경지가 아니야. 모르긴 몰라도 천령단의 실제소유자도 순수한 내공의 절대치만으로는 자네보다 딸릴 걸세.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령단과 자네의 내공이 부딪히게 되면, 자네는 백전백패(百戰百敗)할 수밖에 없어. 왜 그렇겠나?"

나는 문득 한백령과 낙양에서 부딪혔을 때가 떠올랐다. 화서명의 말은 그 때의 겨루기를 떠오르게끔 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자네의 내공은 무진장(無盡藏)이지만 무한(無限)이 아니며, 또한 혈도의 한계를 넘어서 자유자재로 응축과 왜곡을 할 수가 없어. 같은 양이라도 순간적으로 발휘할 수 있는 힘에서 큰 차이가 나기 때문이며, 지속력도 무한한 천령단에 딸려. 천령단 그 자체가 실질적으로 다른 차원의 무학인 것이야."

"......!!"

응축과 왜곡!

나는 한백령이 잠시 내 공력에 딸리는 듯 하다가 되려 몇 배나 되는 힘으로 덮어버렸을 때를 떠올렸다. 확실히 그것은 인간의 내공혈도대로는 절대로 끌어올릴 수 없는 힘이었다. 내가 침음성을 흘리고 있자 화서명이 말했다.

"내가 호법사자에게 전해들은 바로는, 중단전은 마음의 밭이라는 개념일세. 선천적인 태아의 호흡을 되찾고 음양의 기운을 홀로 포식해서 천문(天門)을 연다고 했네. 그건 단순한 내공경지로 도달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보네."

"그럼 어떻게 해야하겠습니까?"

화서명이 껄껄 웃었다.

"허허... 그걸 나에게 묻는들, 뭐라 하기가 난해하군. 자네가 지금 무슨 질문을 했는지 알고 있는가? 어떻게 하면 인간이 신선(神仙)이 될 수 있는지 물어본 게야."

"으음."

"유일한 방법이라면 이미 천령단을 이룬 절대자에게 그 비결을 묻는 수밖에 없을 듯 하네. 물론 유불도에도 천령단에 준하는 경지를 이룬 존재는 있겠지만, 그런 자들은 대개 등선(登仙)하였거나 세속의 일에 관심이 없을 터이니."

화서명의 말을 듣자 나는 앞으로 해야할 일을 단정지을 수 있었다.

' 백련교 호법사자를 만나야겠군.'

사실 이광에게서 천령단에 대해서 들었을 때도 어렴풋이 생각하고 있었던 일이지만, 지금의 문답으로 확실해졌다. 내가 한층 내공경지를 높여서 천령단에 이르기 위해서는 결국 백련교 호법사자를 만나야하는 것이다. 천령단에 도달하는 방법을 알고 있는 것은 천령단에 도달한 사람 뿐이니까.

하지만 단순히 만나서 정보를 캐는 것만으로는 안될 가능성이 높았다. 실질적으로 세간의 무공경지로는 신선이나 다름없는 경지에 발을 걸치는 건데, 그런걸 외인에게 알려줄 수 있을 리가 없는 것이다. 급작스럽게 난이도가 올라가서 내가 속으로 당황하고 있을 때 화서명이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흠 자꾸 이야기가 옆으로 빠졌군. 아무튼 궁극의 경지는 원신이며 거기까지 도달하기 위해서는 수행이 필요해. 그리고 의술을 추구하다보면 거기에 도움을 줄 수가 있어."

"어떻게 말입니까?"

"자네는 인간의 뇌(腦)가 시간이 지날수록 노화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뜬금없는 물음에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잘 모르겠습니다. 뇌가 늙습니까?"

"그렇네. 아주 머나먼 신화시대 때부터 인간은 인간을 살육하며 전쟁을 해 왔지. 내가 맥을 잇고 있는 화타의 일맥은 그때부터 전장을 돌아다니며 죽은 인간의 시체를 관찰하고, 때로는 인간의 과감없는 생리적인 면을 모두 의학지식에 담았어. 그 결과 인간의 육체가 늙을 때 인간의 뇌도 함께 늙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

뇌라면 나도 알고 있다. 인간을 쳐죽였을 때 뇌수가 터져나오곤 했고, 참극의 현장에서 뇌가 흘러나와 있는 광경을 여러번 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손에 뇌수가 묻어서 손을 씻었던 기억도 있었다.

' 회색이었고, 쭈글쭈글하고, 푸르딩딩했던 것 같다.'

내가 뇌의 생김새를 곰곰히 다시 생각해보고 있을 때 화서명이 말했다.

"헌데 말이지, 무림인의 뇌는 잘 늙지를 않네. 50대가 되든 60대가 되든 인간 육체의 주름과 상관없이 매우 천천히 늙어. 신기하지 않은가?"

"신기합니다만... 그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아무리 뛰어난 서생이나 현자라고 해도 뇌는 늙게 되어있지. 두뇌운동으로 뇌의 노화를 조금 늦출 수는 있으나 그것뿐이야. 무공을 익히지 않는다면 뇌라는 건 50대 이후에 급격히 기능이 퇴행되고 말아. 무공을 포함해서 뇌를 활성시키는 특수한 법문(法文)을 익히지 않으면 말일세."

거기까지 이야기한 화서명이 숨을 돌리더니 말했다.

"즉 무공이라는 것으로 기경팔맥을 자극하고 기로 소주천과 대주천을 뚫는 행위 그 자체가 상단전(上丹田)의 잠재력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일세. 왜냐하면 인간의 영혼이 가장 오랫동안 머물다 가는 장소가 뇌(腦)이기 때문이지."

"......!!"

"인간이 죽어서 인간의 혼(魂)과 백(魄)이 빠져나올때 어디서 나오는지 아는가? 뇌에 뭉쳐있던 기운이 육공(六孔)으로 빠져나오는 게야. 물론 인간의 영혼이 뇌 그자체라고는 볼 수 없지만, 적어도 가장 오래 머무는 장소인 건 틀림없지."

"흐음."

화서명이 속한 화타의 일족은 수백 수천년 동안이나 인간의 시체를 해부하고 생과 사의 최전선(最戰線)에서 싸워왔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화서명은 세간의 의술과 궤를 달리하는 독자적인 이론을 갖추고있다고 볼 수 있었다.

"자. 여기서 생각해 봅세. 그렇다면 왜 무림인들은 동시에 뛰어난 술법사가 될 수 없는 것일까? 분명히 무공이라는 건 술법사의 잠재력에도 영향을 미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술법사가 될 수 있는 자들은 오로지 그 자신의 재능에만 영향을 받는다네."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습니다."

화서명이 씨익 웃고는 말했다.

"그건 말이지, 통로를 열 수 있는가 아닌가일세."

"통로라구요?"

"술법사들은 술(術)을 깨우칠 때 기경팔맥과는 전혀 다른 영통(靈通)의 문을 연다네. 천축보다 머나먼 곳에서는 그것을 신(神)의 나무(木)라고 칭하던데, 천상에 존재하는 생명의 나무라고 하더군. 동방이든 서방이든 그 도형(圖形)은 거의 비슷하기에 차례대로 순서를 밟아가는 모양이야."

"으음."

"무림인들이 기경팔맥을 아무리 연구하고 지랄을 해도 술법사가 될 수 없을 수밖에. 아예 체계가 다른 '문'을 여는 건 원래 불가능하다네."

화서명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하지만 화씨백팔침(華氏百八針)과 화타오금희(華?五禽戱)를 궁극까지 익히게 되면 분명히 그 문도 열 수가 있네! 뿐만 아니라 인간의 육체에 선천적으로 주어진 한계를 해방할 수도 있고, 특히 의술에 있어서는 인간의 생사를 마음대로 쥐락펴락 할 수 있을 것이다!"

"......!!"

내가 경악에 빠져서 허우적대고 있을 때 화서명이 내 어깨를 탁하고 쳤다.

"자네는 재능이 있어. 내 최대한 가르쳐서 그 경지에 도달할 수 있게 도와주겠네."

"고맙습니다."

화서명이 흐뭇하게 말했다.

"헌데 그걸 위해서는 내가 좀 더 밑천이 필요한데... 성련 한 뿌리 더 줄 수 있겠나?"

나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더 없습니다."

"쳇..."

화서명은 혀를 차더니, 침술(針術)과 약재에 대해서 가르쳐주기 시작했다. 나는 방금 전까지의 들뜬 분위기가 무색하게 갑자기 굳어진 분위기에서 공부해야만 했다. 그리고 앞으로도 화서명하고 대화할 때는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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