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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천향(暗天鄕)
그로부터 1년이 지났다. 나는 그 동안 임무를 몇 개씩 처리하기도 했으며, 정씨 가문의 호위무사 역을 완벽하게 해냈다. 또한 이제 완전히 고려말에 익숙해졌으며, 토박이 수준은 아니지만 상당히 유창하게 고려말을 구사하는 게 가능했다. 내게 말과 글을 가르치던 이주희가 책을 덮으며 말했다.
"오늘로 끝이네. 그동안 재밌었어."
"갑자기 왠 이별선언이오?"
이주희가 물끄러미 나를 보더니 갑자기 손을 들어서 내 볼을 꼬집었다. 뭔지 몰라서 멀뚱하니 앉아있자 그녀가 깔깔 웃었다.
"너 바보같아~ 근데 귀여워."
"......"
"농담이구, 나도 이젠 본가(本家)에 돌아가야겠어. 그 동안 내 고집을 부려서 정씨 가문에 와 있었으니까."
"본가라면 이씨 가문을 말하는 거요?"
"응."
나는 이주희에게 정씨가문과 이씨가문에 얽힌 비사(秘事)를 들은 적이 있었다.
원래 이성계(李成桂)라고 불리는 이씨 가문의 선조는 고려역사상 손에 꼽힐 정도의 맹장(猛將)이었으며 신궁(神弓)이었다고 한다. 그는 그당시 권문세족의 횡포때문에 많은 불만을 응축하고 있던 신진사대부와 힘을 합쳐서 고려의 혁파에 나섰다고 한다. 일설로는 그 당시에 이성계가 반역(反逆)을 일으키려 했었다는 설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성계는 어찌된 일인지 반역을 일으키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의 의견을 접고 최영 장군과 함께 요동으로 진공하여, 그 당시 북원(北元)의 본거지를 치려고 하고 있던 명나라에 큰 충격을 주었다. 그 당시에 북원 토벌에 나선 남옥 대장군의 15만 대군 중 일부가 고려를 치려 했다고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그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 결과 요동정벌은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고 홍무제는 철령위(鐵嶺圍)의 설치를 취소했다. 그리고 고려의 땅은 무려 금산(金山) 근처까지 넓혀져서 실질적으로 요동의 절반 이상을 지배하게 된 것이다.
당시 명의 태조(太祖)로써 강대한 실력과 야망을 지니고 있던 홍무제가 어째서 고려에의 간섭을 취소했는지는 의문이었으나, 아마도 그 당시에 백련교주(白蓮敎主)의 압박이 거세어서 국외의 일에 더 이상 신경을 쓸 수 없었다는 의견이 대세였다.
그 이후의 전개는 더욱 충격적이었다. 뛰어난 전공을 세운 이성계는 몇 년 후 고려 내의 권력을 잡아서 권문세족의 대부분을 숙청했다. 그 과정에서 최영 장군과 그의 일족은 실각해서 낙향했으며, 이성계와 정도전(鄭道傳)은 권력을 분담해서 고려를 지배하는 양대 가문으로 일어섰다. 공민왕은 이리를 몰아내자 호랑이 두 마리가 들어왔다는 사실에 한탄했으며 결국 고려는 왕권을 포함해서 3대세력이 균형을 이루는 체제가 되어버린 셈이었다.
그 이야기를 해줄 당시 이주희는 팔깍지를 낀 채 말했다.
[ 가문의 어른들은 정도전(鄭道傳)이 자신의 이상을 꺾고 현실과 타협한 결과 지금의 위치를 얻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어. 뭐, 결과적으로 타락한 권문세족을 모두 숙청하고 고려가 다시 태평성대를 얻었으니까 나쁜 건 아니잖아?]
[ 그 말은...]
[ 어쩌면 고려가 그때 멸(滅)하고 새로운 나라가 지금쯤 이 땅에 서 있을지도 모르는 거겠지.]
태연스럽게 엄청난 소리를 하던 이주희가 깔깔댔다.
[ 꺄하하, 하지만 그딴 건 그냥 가정에 불과한거 아냐? 역사에 가정이란 건 의미가 없어. 지금 고려는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고, 그런 현재가 중요한 거니까.]
[ ......]
나는 회상을 끝내고 말했다.
"이번에 돌아가시면 다시 뵙기 힘들겠구려. 주희 님은 고려 최대가문 이씨가문의 규수이니."
그러자 이주희가 볼을 불퉁하게 부풀렸다.
"흥, 너는 왜 그렇게 말을 섭섭하게 하니? 보는 것쯤이야 언제든 할 수 있어. 그 동안 많이 친해졌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내 착각이었나 보구나?"
"......"
"꺄하하 농담이야~ 너는 너무 정색을 하네~"
이주희가 깔깔대는 걸 보자 나는 진심과 농담을 분간할 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 저렇게 경박하게 보여도 이주희는 고려땅에서 가장 뛰어난 학식과 지혜를 보유한 세도가의 영애였다. 사서삼경을 4세에 다 떼버리고 10세 무렵에는 대현(大賢)과 지식을 겨룰 정도의 천재(天才)인 것이다. 비록 여인이라는 한계는 있지만 그녀는 이 고려 땅에서 가장 고귀한 존재 중 하나라고 봐도 무방했다.
나도 내심 이주희와 헤어지는 게 섭섭했다. 그녀는 현재 완연한 성인여성의 기품을 흘리고 있었는데 그녀의 용모를 볼 때마다 남녀(男女)의 정(情)이 생각날 때가 많았다. 그 동안 이주희에게 꽤 반해있었던 모양이었다.
' 결혼하고 싶다.'
하지만 나는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이주희는 현재 내게 '어린 친구' 이상의 호감은 갖고 있지 않다. 게다가 현실적으로도 신분이 너무나 걸맞지 않은 것이다. 내게 해야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것도 한몫 했다. 나는 그래도 아쉬워서 속으로 한탄했다.
' 빌어먹을... 한 번 정도면, 전생하는 동안 천하의 여인들과 마음껏 연애를 해 보고 싶다.'
아마도 그 구미호가 내게 보여줬던 음몽(淫夢)이 꽤나 강렬했던 모양인지 나는 그동안 억지로 누르고 있었던 욕정이 끓어오르고 있었다. 요즘은 그 생각을 가라앉히는 것도 꽤 힘들 정도였다. 그도 그럴것이 내 육체도 청소년기를 지나면서 성적인 욕구를 강하게 품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런 감정을 꾹 참으며 말했다.
"혹시 이주희님은 십이율주(十二律主)를 만나뵌 적이 있습니까?"
"흐응? 십이율의 지존(至尊)을 말하는 거야? 물론 십이율은 우리 가문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니, 십이율주는 매년 정초에 인사를 하기 위해 우리 가문에 찾아와."
"......!!"
"내 기억으로는 굉장히 잘생긴 사람이었어. 송옥(宋玉)이나 반안같다는 느낌? 그리고 나이는 한 20대쯤으로 젊어 보이더라. 이름은 나도 몰라. 전혀 밝히지를 않고 그냥 십이율주라고만 하더라."
그렇게 빠르게 말한 이주희가 싱글싱글 웃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은 그녀의 나이답지 않게 노회하고 노련한 기색이라서, 나도 모르게 움찔했다.
"십이율에 관심이 있는 거야? 알고 있었어. 그래서 최대한 아는 걸 말해줬어~"
아마도 그녀는 내가 심문하듯이 정보를 캐내는 말투가 왜 그런지 알고있는 모양이었다. 하긴 근 이삼 년을 가까이에서 지냈는데 모를 리가 없었다. 십이율주에 대해 내가 질문한 것도, 마지막이니 어려운 질문을 하려는 의도라는 걸 간파한 것이다.
나는 민망해서 고개를 돌렸다.
"미안하오."
이주희가 방긋 웃었다.
"에헤헤, 뭐가 미안해? 네가 단순히 고려에 귀화하려고 찾아온 게 아니라는 건 철욱 아저씨도 알고 있을걸. 단지 네가 나쁜 놈이 아니고 가문에 도움이 되니까 같이 무난하게 살자는 거 뿐이야~"
"으음."
"그래도 약간 섭섭한걸. 그 정도 질문은 언제든 해도 좋았다구."
이주희의 얼굴에는 정말로 슬픈 기색이 어려 있었다. 내가 어쩔줄 몰라서 당황하자 그녀가 꺄륵 웃었다.
"꺄하하하! 농담이지만!"
"......"
"그럼 잘 지내. 심심하면 또 놀러 올게~"
"잘 가시오. 그간 즐거웠소."
이주희는 다음 날부터 찾아오지 않았다. 그녀는 가문 내에 있는 게 답답해서 도피할 겸 정씨 가문의 빈객으로 머물고 있었는데, 그 와중에 내가 정씨 가문에 들어오자 심심풀이 겸 내게 말과 글을 가르친 것이다. 이제는 개경 최대의 세도가인 이씨 가문의 영애로써 살아가게 될 테니 찾아오기는 힘드리라.
' 그녀는 무공에도 뛰어난 재능이 있었지.'
내가 그녀에게 무공을 가르친 건 2년 남짓한 시간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고작 그 기간동안에 이류무인 정도는 혼자 때려눕힐 정도의 실력을 길렀다. 뇌영검법의 초식은 물론 숨겨진 뜻까지 모조리 다 터득해 버려서, 내가 익힐 때와는 천지차이였다. 나중에는 가르쳐줄 게 없어서 만승검결(萬乘劍決)을 가르쳐줘야 하나 고민해야할 정도였던 것이다. 그녀가 만일 무림인이었다면 세상에 몇 없는 뛰어난 여류고수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갑자기 우울해졌다. 나는 왜 여기 있는 걸까?
' 해인을 십이율주같은 강력한 존재가 지킨다면 굳이 파고들 필요가 없지 않을까?'
물론 이건 잡생각일 뿐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나는 해인이 칠요인지 아닌지 확인해야 하고, 소재도 파악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중에 금의위에 대항할 때 힘이 부족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생각에도 불구하고, 이국(異國)의 땅에서 호위무사를 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생각 때문에 많이 괴로워졌다.
내가 우울해하는 건 정철욱의 눈에 비친 모양이었다. 약 사흘 정도가 지나서 정철욱이 나를 따로 불러서 말했다.
"주희와 이제 만나지 못해서 아쉬워하는 건 알겠네. 허나 자네가 쳐져 있으면 나 또한 마음이 언짢아. 마음을 좀 추스리게."
"그런 일이 아닙니다. 그저 현재 이루는 게 없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답답했을 뿐입니다."
"이루는 게 없다라... 무공(武功)이라도 수련하면 되지 않는가?"
나는 고개를 저었다.
"제 무공은 상승(上昇)의 경지에 접어들었으며 현재 점수(漸修)의 단계입니다. 벽을 느끼고 있어서 개인수련에서 큰 성과를 얻기 힘듭니다."
이게 가장 큰 문제였다.
나는 청룡무관에서 대부분의 상급무공을 배웠으나, 그 상급무공은 전부 절정의 단계를 전제로 하므로 매우 뛰어난 오성(悟性)을 필요로 했다. 단적으로 말해서 만승검결이나 천뢰무극창은 초식만 이해하고 있을 뿐 아직 특유의 비기(秘技)의 단계까지 이르지 못했다.
이광이 내 재능에 좌절하고 분노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만승검결이나 천뢰무극창을 다시 대성(大成)단계까지 익히려면 수십 년이나 되는 수련시간이 필요할 게 뻔한데, 그는 애초에 나를 천재라고 생각해서 제자로 받아들인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광같은 절세고수가 나를 수십 년씩이나 붙들고 키워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몇 년씩이나 그에게 살기어린 갈굼을 받아서 죽고싶어질 정도가 된 것이다.
물론 지금이라도 청룡무관에 되돌아가서 내 성취를 보여주면, 죽을 고비를 몇 단계 넘겨서 어떻게든 입관은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설령 들어간다 하더라도 또 똑같은 재능의 한계가 보일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광은 도대체 내가 어떻게 상급비기를 터득했는지 의심을 하다가 나를 살해할지도 모른다.
내가 답답해하는 걸 물끄러미 보던 정철욱이 말했다.
"일전에 휴가를 줬을 때 해인사(海印寺)에 갔었지. 그 일은 잘 되었나?"
"네. 마음의 휴양이 되었습니다."
거짓말이다.
나는 구미호 사건 이후 석 달간의 휴가를 받았는데, 그 틈을 타서 휴양을 핑계대고 합천의 해인사로 갔다. 구미호가 해인사는 별 관련이 없다고 했으나 그래도 알아보아야 했기 때문이다. 해인사의 주지는 만날 수 없었지만 해인사 자체는 구석구석 들여다볼 수 있었는데, 확실히 그 곳은 그냥 평범한 절일 뿐 신령스러운 물건이나 뛰어난 무인 술법사 따위는 어디에도 없었다.
정철욱이 고민하다가 말했다.
"그래, 이래보는 건 어떨까? 자네 의술(醫術)이나 침술(針術)을 한 번 배워 보게."
"네?"
생뚱맞은 소리였다. 내가 반문하자 정철욱이 말했다.
"사실 자네에겐 말을 안 했지만 별채에 묵고 있는 빈객 중에서 화(華) 노인은 중원의 의약사 출신이라고 하더군. 내가 그에게 건강상의 도움을 얻을 때가 많아. 그의 의술과 침술은 매우 고명한 경지이니, 자네가 그의 제자가 되어서 배워보는 게 어떤가?"
"화 노인 말입니까?"
"그렇네."
나도 화 노인을 그 동안 별채에서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정씨 가문의 별채는 무려 20개나 되는 건물로 이루어져 있었고 거기에는 호위무사의 단체숙소는 물론 정씨가문에서 모시는 빈객의 숙소도 있었다. 화 노인은 정철욱이 특별히 우대하는 60대의 흰수염이 성성한 늙은이였는데 알고 보니 의원이었던 것이다.
정철욱이 껄껄 웃었다.
"혹시 아는가? 사람 살리는 기술을 배우다 보면 무공이 늘지."
그 말은 일리가 있었다. 중원의 뛰어난 의술을 가진 의원들 중에는 본신의 무공이 절정지경인 자들이 많다고 들은 바가 있었다. 의술은 기혈과 혈도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것이므로 비전무공이 강력한 경우가 있었다. 나는 의술이나 침술을 배워서 나쁠 것 없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가 저를 제자로 받아줄지 의문이군요."
"걱정 말게. 그에게 나의 은혜를 말하면 받아 줄 게야."
정철욱의 말 대로였다.
내가 다음날 아침 화 노인을 찾아가자, 그는 잠시 못마땅한 눈으로 나를 노려보다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백웅 무사. 정 가주께 빚이 있어서 네게 의술과 침술을 좀 가르쳐 주겠다. 너는 차후에 쓸데없는 이야기를 가주께 꺼내지 말아라."
그의 말은 한어(漢語)였다. 그 또한 중원출신이었기에 쓸데없이 고려말을 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나는 묘한 친근감을 느끼며 대답했다.
"네."
그는 내 몸을 훑어보더니 침음성을 흘렸다.
"흐흥... 다시 봐도 정말 무시무시한 내공이군. 절세의 영약을 몇 번씩이나 먹지 않으면 결코 인간의 수명으로 이런 내공을 이룰 수는 없거늘 너는 도대체 무슨 기연을 얻은 것이냐?"
"꼭 말해야 합니까?"
"싫으면 말아라. 네 놈에게 치명적인 결점이 있어서 알려주려 했는데, 그 종류를 알 수가 없으면 조언도 해줄 수 없다. 내가 니가 처먹은 영약의 똥이라도 핥아먹을 거 같으냐?"
"......"
벌컥 화를 내는 화 노인의 말투는 굉장히 거칠고 공격적이었다. 하지만 조언을 해주겠다는 건 사실 같았으므로 어쩔수없이 대답했다.
"천년설삼과 흑백련을 먹었습니다."
"천년설삼...!! 흑백련은 또 뭐냐?"
"천년설삼 옆에 있던 연못에 흑색과 백색의 연꽃이 피어 있었습니다. 그 연꽃에 극양(極陽)의 기운이 있길래 극음의 기운을 지닌 천년설삼과 중화시켜서 복용했습니다."
"헛... 그건 설마..."
화 노인의 안색이 갑자기 창백해졌다. 그러더니 급히 말했다.
"천년설삼은 이미 처먹었겠지만, 혹시 흑백련의 뿌리나 줄기를 갖고 있느냐?"
"왜 그러십니까?"
"어서 대답해라. 갖고 있느냐?"
나는 구미호가 말했던 게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다.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이 다짜고짜 정보를 캐어내려고 이렇게 심문하듯이 물어대면 결코 좋은 감정이 생길 수가 없는 것이다. 나는 앞으로 내 말버릇을 고치자고 생각하며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없습니다만. 대체 그걸 왜 필요로 하십니까?"
화 노인은 내 대답에 정신이 번쩍 든 모양이었다. 그러자 헛기침을 하더니 말했다.
"내가 말을 잘못 한 것 같군. 자네 나와 거래를 하지 않겠나?"
"거래라고요? 어떤 거래를 말하시는지."
"나는 백웅 자네에게 기경팔맥의 위치와 기본적인 의술과 점혈법만 가르쳐 줄 생각이었어. 허나 만일에 내게 그 흑백련 뿌리를 주거나 그 위치를 알려준다면, 나는 자네에게 특별히 내가 가진 지식 전반과 화씨백팔침(華氏百八針)의 요결(要決)을 가르쳐 주지."
"화씨백팔침은 뭡니까?"
"자네는 화씨세가(華氏世家)를 모르는가?"
' 모르는데요."
"......"
화 노인은 내 대답에 기가 막힌 표정을 짓더니, 이내 슬픈 표정을 지었다.
"한때 하북(河北)에서 제일 가는 명문가였건만, 가문의 세력이 쇠하니 비참하구나!"
"미안하지만 나는 나이가 어리고 무림경험이 적어서 잘 알지 못합니다. 무례였다면 사과하겠습니다."
"아니다. 그게 정상이겠지. 흐으..."
탄식성을 흘리던 화 노인이 의자에 걸터앉으며 말했다.
"아무튼 너는 선택을 해라. 어찌하고 싶으냐?"
나는 속으로 고민했다.
' 흑백련은 봇짐에 몰래 숨겨둔 게 2뿌리가 있다. 이걸 여기서 써도 되는걸까?'
물론 전생을 한다고 치면 그냥 흑백련의 뿌리를 내어주는 게 옳다. 한번 터득한 지식이 어디 가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되려 이건 흑백련을 이용해서 얻을 수 있는 기회라고까지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내가 망설이는 이유는 화 노인이 말만 그럴듯하게 해놓고 흑백련 뿌리만 날름한 채 비기(秘技)를 전수하지 않고 세월아 네월아 제자노예를 만들 확률 때문이었다.
나는 이미 이광의 밑에 들어가면서 '스승'이 지식을 숨기려고 하면 얼마나 철저하게 할 수 있는지 실감한 적이 있었다. 함부로 간이라도 꺼낼 것처럼 굴었다가는 큰코 다치는 게 바로 무림의 무문(武門)이었다.
하지만 나는 결국 선택을 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그리고 내 봇짐의 비밀공간에 몇 년 동안이나 꽁꽁 숨겨두었던 흑백련의 뿌리를 가지고 왔다. 화 노인은 뿌리를 받아들고 한참을 살피다가 경탄성을 내었다.
"과연...!! 이것이 바로 성련(聖蓮)이구나. 과연...!!"
"뭐라고요?!"
나는 그의 말에 깜짝 놀랐다.
성련!
그것은 백련교에서 특수한 방법으로 재배하는 영약으로써, 성련을 복용한 자는 어린 나이라고 할지라도 가공할 내공을 얻을 수가 있었다. 국가에서 함부로 백련교를 건드리지 못하는 것은 백련교주의 무력 탓도 있으나, 성련을 복용해서 성장한 절정고수가 얼마나 많을지 짐작이 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 흑백련이 성련일 거라고는 생각도 해본 적이 없었다. 내가 당황하고 있을 때 화 노인이 말했다.
"성련이 뭔지 알고있나 보군."
"대답을 해 주십시오. 이 흑백련이 백련교의 성련입니까?"
"바로 그렇네. 나는 백련교 내에서 직접 본 적이 있어서 알고 있지."
"백련교에서 본 적이 있다고요? 어르신은 설마 백련교도입니까?"
내 질문은 예의따위 쌈싸먹은 것이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이 문제가 너무 중대해서 천천히 물을 수가 없는 것이다. 화 노인은 내 마음을 이해하는 듯 별반 화를 내지 않고 대답했다.
"그렇지 않네. 허나 본가가 쇠한 이유는 백련교 때문이고, 나 때문이기도 하지..."
"......?"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우선 이게 성련이라고 하는 건 나 화서명(華徐冥)의 이름을 걸고 보증할 수 있네. 이 향내와 형태, 그리고 흑색과 백색이 함께 자란다는 생태... 어느 걸로 보나 백련교의 성련이야."
화서명의 이름값 따위 알 바가 아니었기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백련교의 고수들을 직접 대면했던 정천맹주는 제게서 성련의 향이 나지 않는다 했습니다. 제가 성련을 복용했는데 어찌 그럴 수가 있습니까?"
"천년설삼 때문일세. 성련 하나만 복용한다면 모를까, 천년설삼과 함께 기운을 태극(太極)의 형태로 받아들였으니, 편중된 극양기(極陽氣)로 인해 뿜어져 나오는 성련의 향이 나지 않을 수밖에. 자네는 백련교에서 성련으로 키워내는 백련인(白蓮人)을 훨씬 초월한 내공을 가진 것이야."
"으음..."
"더 중요한 것은, 자네는 성련을 잘못 캐 왔다는 것이야."
"네?"
"성련의 뿌리도 물론 강한 힘을 지니고 있으나 진정한 정수는 꽃(花)에 있어. 꽃과 뿌리를 한꺼번에 다 먹을 수가 있다면 뿌리만 먹는 것보다 훨씬 높은 내공을 얻을 수 있을 게야."
이럴 수가!
가지고 다니기 편할 거 같아서, 그리고 꽃은 금새 시들거같아서 연꽃은 내버려뒀는데 설마 연꽃이 정수(精髓)였단 말인가?! 내가 경악하고 있을 때 화서명이 말했다.
"나는 자네에게서 받은 이 뿌리로 본가의 재기를 노릴 생각이야. 자네가 만일 내 제자가 된 후, 나를 차후 도와주겠다고 약속한다면 앞서 말한대로 모든 지식과 침술을 전수해 주도록 하겠네."
그는 당장 무림으로 흑백련을 들고가기 보다는, 나를 아군으로 만들고 싶은 모양이었다. 하긴 내공이 엄청난 절정고수를 제자로 데려가는 쪽이 훨씬 마음든든하리라.
"믿어도 되겠습니까?"
"끄으응... 나 화서명은 한때 무림 오대의원이었거늘 감히 나를 의심하다니."
화서명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해졌다. 나는 그의 심처에 있는 자존심을 건드렸다는 걸 깨닫고 급히 수습에 나섰다.
"아닙니다! 그럴 리가요. 화 의원이 최고입니다. 그냥 한번 물어본 겁니다."
"그래? 좋아!"
화서명은 급격히 방긋한 미소를 지었다. 노인이 될수록 단순해진다는 말마따나 그도 꽤나 단순하고 열혈한인 것 같았다. 그리고 화서명이 말했다.
"그럼 오늘부터 시작해 봅세. 화타 사조에게서 시작된 화씨가문의 의술을 전수해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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