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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천향(暗天鄕)
이후 미호는 나생문의 결계를 풀어서 십이율의 토벌대를 내보내 주었다. 미호가 4층 전각 위에서 토벌대의 뒷모습을 보며 깔깔대는 소리가 섬뜩했다.
"아하하. 저것들을 잡아와서 여기서 떡치며 나뒹굴게 했으면 재밌었겠다."
나는 지금도 지율 스님에게 배신당한 게 속이 쓰렸으므로 손을 내저었다.
"그런 소리는 됐고 이제 어쩔 생각이지?"
"음... 백웅 너는 어디에 살고 있느냐?"
"나는 현재 정씨 가문의 호위무사다."
내 대답에 미호는 고개를 갸웃했다.
"정씨 가문? 이상한 데 들어가 있구나."
"소개를 받아서 들어가 있다."
"호오... 이런저런 일이 많았나 보구나."
"뭐 그렇지."
내가 대답을 얼버무리자 미호가 훗하고 웃었다. 그리고는 말했다.
"이렇게 온 것도 인연인데 묘청이 어떤 놈인지 보고 갈 테냐?"
묘청!
서경의 악령!
대요괴조차도 그 강력함을 꺼려해서 흡수를 망설일 정도라는 존재였다. 나는 그런 놈을 보다가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를 것 같아서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싫다. 나는 술법을 익히지 않아서 그런 악령에 저항력이 없다."
"우후후. 백웅 너는 도가의 공력을 익힌 거 같지만 묘청정도 되는 악령이 빙의하려 들면 어쩔 수 없겠지."
"잘 알면서 왜 묻는 거냐?"
"꺄하하, 재밌잖느냐."
"......"
미호는 정말로 제멋대로 사는 요괴 같았다. 그녀는 손가락을 딱하고 튀겼는데, 그 순간 아까 보았던 전귀와 후귀가 재차 소환되었다.
"마당이 어지러우니 식신의 잔해를 치워라."
쿠웅 쿠웅
전귀와 후귀가 이윽고 아래층으로 사라졌다. 나는 방금 전에 죽도록 싸웠던 전귀 후귀가 순식간에 소환되는 모습에 할 말을 잃었다. 저 놈들을 쓰러뜨린다고 토벌대는 죽을 고생을 했는데, 저렇게 쉽게 재소환이 가능하다는 말인가?
내 눈빛을 깨달은 건지 미호가 말했다.
"우후후. 나보다 강한 술사는 얼마 되지 않는다. 특히 환술에 있어서는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무너뜨릴 정도의 존재가 아니라면, 나에 대적할 수 없지!"
"응?"
"응이라니?"
나도 모르게 반문한 것은 미호의 설명에 딱 들어맞는 존재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전생을 거듭하면서 늘 필수적으로 찾아가곤 하는 존재였다. 구미호의 얼굴에 호기심이 가득 어리자, 나는 어쩔 수 없이 말해 주었다.
"망량선사의 제자인 천우진이라는 자가 네가 말한 경지인 것 같다."
나는 구미호가 크게 놀랄 줄 알았다. 하지만 구미호는 망량선사라는 단어를 듣고 납득한 건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하아, 과연 망량선사군. 인간제자가 환신(幻神)의 경지에 이르게끔 하다니."
"환신?"
"환술의 최고 경지다. '너'와 '나'의 경계가 사라져서, 그 누구도 그 자의 환술을 막을 수 없다. 칠백여 년을 살아온 본녀조차도 아직 환신에는 이르지 못했느니라."
"......"
나는 새삼 천우진의 사기성을 실감했다. 구미호같은 대요괴조차 천우진의 경지에 이르지 못했다니! 같은 사제인 망량이 기초술법도 제대로 못 쓰는 걸 생각하면 술법 하나만은 정말 독보적인 존재인 것이다.
' 하긴 그러니까 금의위 총령이 이끄는 금의위 전 부대와 대군을 환술결계 하나로 막아낸 거겠지...'
나는 갑자기 그 때의 일이 떠올라서 우울해졌다.
그래서 고개를 내젓고는 말했다.
"어쨌든 알겠어. 해신을 찾는 걸 도와주면 정말 고맙게 생각하겠다."
"우후후, 걱정 마라. 정확한 위치를 알고 있으니까."
"정말이냐?"
"그래."
"어떻게 그걸 알고 있는 거지?"
내가 연속으로 묻자 미호의 얼굴이 불쾌한 기색을 띄었다. 그리고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너는 왜 자꾸 심문하듯이 공격적으로 캐묻는 거냐? 너는 늘 동료에게 그딴 말버릇을 유지하는 거냐?"
"아, 아니."
"흥! 나는 서경의 백화객잔에 가 있을테니 찾아 와라."
쉬리릭!
미호는 갑작스럽게 전이술로 사라져 버렸다. 그녀의 성격은 지금까지 내가 보아왔던 그 어떤 자와도 달랐기에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확실한 것은 무척이나 까탈스럽고 변덕스러운 성격이라는 사실이었다. 나는 예전에 소똥이로 일할 때처럼 그녀의 심기를 세세하게 읽어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아채고 골치아파졌다.
' 으 귀찮겠군... 뭐 할 수 없나.'
저런 대요괴가 나를 도와준다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도움이 될 것이다. 게다가 해인의 위치까지 알려준다니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물론 변덕스러워서 언제 배신할지 모른다는 것도 염두에 둬야했지만 일단 해인의 위치만 알아내면 내가 훨씬 이득인 것이다.
나는 폐허가 된 동녕부에서 빠져나가서 서경 시내로 들어갔다. 방금 전까지 죽어라 싸운게 거짓말처럼 서경은 평안한 풍경이었다. 나는 길가의 행인에게 백화객잔이 어디있는지 물어물어서 찾아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3층짜리 전각이 차려져 있는 백화객잔으로 도착할 수 있었다.
미호는 1층의 탁자에 앉아서 소채를 먹고 있었다. 아까처럼 소녀의 모습이었는데, 그 모습도 어른일 때와는 다른 청초한 매력이 있었다. 기본적으로 예쁘기 때문인지 고려 여인의 복장을 해도 잘 어울렸다. 그래서인지 유녀(幼女)에 가까운 외견에도 불구하고 여기저기서 사내들이 미호의 밥먹는 모습을 힐끔거리고 있었다.
내가 탁자에 앉자 미호가 말했다.
"흥. 반성 좀 했느냐?"
"미안하다. 앞으로는 말할 때 조심하겠다."
"알면 됐다."
후훗 하고 밝게 웃은 미호가 말을 건넸다.
"너도 뭐 시켜먹을 테냐?"
"나도 소채나 먹지."
미호가 손을 번쩍 들고 명랑한 목소리로 주문했다.
"여기 소채 하나~"
"네이~"
나는 잠시 후 소채를 시켜서 먹으면서 물끄러미 미호를 보았다. 이렇게 보면 정말 평범한 인간소녀인데, 방금 전까지 강대한 식신을 부리면서 음란한 색기를 내뿜던 요괴와 동일인같지가 않았다. 당장 내가 미호가 구미호라고 동네방네 소리지르고 다녀도 나만 미친놈 취급 당할 것이다.
미호가 소채를 다 먹고는 말했다.
"해인(海印)은 십이율주(十二律主)가 가지고 있다."
"십이율주...!!"
"그 자가 단(檀)의 일족이므로 당연한 일이지."
나는 미호의 정보에 침음성을 흘렸다.
십이율주!
그것은 해동문(海東門) 십이율(十二律)을 통솔하는 수장(首長)을 의미했다. 열두 개나 되는 단체가 있으면 의견조율이 필요한 건 당연했으며 우두머리도 필요했다. 마치 중원의 정천맹주처럼 거대문파의 연맹을 이끄는 존재가 십이율주인 것이다.
하지만 십이율주의 외모나 무공, 별호는 외부에 알려진 바가 없었다. 정천맹주의 명성이나 외견, 무공이 중원무림에 떵떵 알려진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아마 고려라고 하는 좁은 땅에서 연맹체의 맹주를 하게 된다면 정체를 숨기는 쪽이 효율적이기 때문이리라.
나는 처음 들은 정보에 대해 질문했다.
"단의 일족이 뭐지?"
"아까도 말했듯이, 고려... 아니, 이 반도(半島)라는 땅 자체를 수호하는 지킴이 일족이다. 그들은 세상의 전면에 나오지 않지만 사신이나 이족에게서 인간을 보호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중원의 망량선사같은 존재군."
"대동소이하다. 거의 같은 역할이라고 봐도 좋지."
이 세상에는 숨겨진 지킴이가 많은 것 같았다. 내가 곰곰히 생각을 하고 있자 미호가 말했다.
"그런데 백웅 너도 본녀에게 말해줘야 할 게 있구나."
"뭘 말이냐?"
"네가 해인을 찾아다니는 이유!"
"으음."
미호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턱을 괴고 나를 쳐다보았다.
"너는 술법이라고는 한 줄도 모르는 무지렁이인데 어찌 술법사들 사이에서 비전(秘傳) 중의 비전인 해인(海印)을 찾아다니는 것이냐? 하물며 멀리 중원땅에서 이 고려까지 오다니."
나는 어쩔까 생각하다가 그냥 솔직히 말해주기로 했다. 딱히 감출만한 일도 아닌 탓이었다.
"사실 해인이 뭔지는 잘 모른다. 다만 내 동료의 말로는 그 해인이야말로 칠요(七曜)의 비보(秘寶)일 가능성이 높다고 해서 찾아다니는 중이다."
"칠요의 비보? 넌 설마 칠요의 비보를 모으는 여행을 하고 있는 것이냐?"
"그렇다."
내 대답에 미호가 처음으로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차라리 당혹감마저 느껴졌다.
"미... 미쳤구나. 신대(神代)의 신보(神寶)을 모으겠다니. 신선들조차 엄두를 못낼 일을, 인간의 수명으로 하겠다는 것이냐?"
"다행히 서왕모의 축복을 받아서 내 수명은 아주 길어졌다. 일단 하는 데까지는 해 봐야겠지."
"서왕모?!"
내 말을 듣자 미호는 마치 벼락 맞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왠지 통쾌해졌는데, 시종일관 여유작작 나를 놀려대던 미호가 당황해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미호는 그런 내 변화에 신경쓸 겨를도 없는지 혼잣말을 하기 시작했다.
"그렇구나... 왜 내가 이 인간에게 호의를 느끼나 했더니... 서왕모님의 축복을 받은 거였구나... 하지만 난 이제..."
그러더니 미호가 갑자기 진지해진 표정으로 말했다.
"넌 어떻게 서왕모님의 축복을 받은 거냐? 똑바로 대답해 다오."
"그게 중요한 일인가?"
"적어도 본녀에게는 매우 중요한 일이다. 어서 말해 다오!"
미호의 표정은 간절했기에, 이 말에 섣불리 장난을 걸거나 헛소리를 하면 내가 변을 당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동안 워낙 많이 죽었기 때문에 이런 감각이 생겨버린 모양이었다. 나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나는 이미 칠요의 하나를 모았다. 그 와중에 얻게 된 기운을 서왕모께 공양함으로써 축복을 얻었지. 내가 의식을 행한 것은 아니고 천우진이 도와주었다."
"칠요를... 얻었다고...!!"
내 대답에 미호는 완전히 평정상태를 잃은 듯 했다. 그러더니 허겁지겁 달려들듯 내 옆으로 다가와서 앉았다. 그리고는 몸을 기대며 말했다.
"그 얘기를 좀 더 자세히 해 줘! 듣고 싶구나."
"잠깐, 잠깐만!"
나는 미호를 살살 밀어 내었다. 그리고는 말했다.
"미호! 방금 전부터 나만 얘기하고 있잖아? 네가 내 동행이라면 너도 정보를 좀 얘기해 줘."
미호는 자신이 성급했다는 걸 깨달았는지 살짝 물러섰다.
"어떤 정보 말이냐?"
"이제부터 내가 어떻게 해야 십이율주가 가진 해인을 얻을 수 있을지 말이야."
"흐음..."
미호는 고민하는 기색이었다.
그녀는 차 한 잔을 시키고는 장고 끝에 대답했다.
"두 가지 방법이 있구나."
"어떤 방법?"
"첫 번째는 십이율주에게서 힘으로 뺏는 것이고, 두 번째는 십이율주에게서 양도받는 것이다."
"... 그건 애라도 생각할 법한 대답같은데."
내가 핀잔을 주자 미호가 새침하게 고개를 돌렸다.
"흥! 그걸 생각하는 건 네 일이지. 달리 말하면 십이율주의 소재만 찾으면 나머지는 계획짜기 나름인 게 아니냐?"
"그러니까 그 십이율주의 소재란 걸 어떻게 찾냐고."
"나도 모르겠지만, 십이율의 문주들을 하나하나 족치다 보면 알 수 있겠지. 그들은 분명히 십이율주와 대면한 적이 있을 테니까."
"그렇군."
"자 그럼 이제 칠요 이야기를 해 보거라."
나는 칠요인 수요 막야를 어떻게 얻었는지, 어떻게 수기를 공양했는지를 말했다. 하지만 막야의 행방에 대해서는 적당히 지어냈다.
"... 그렇게 된 후, 막야는 천우진이 망량선사를 모시는 사당에 봉납했어."
"으그극, 그렇겠지. 망량선사가 관리하겠지. 으으윽..."
미호는 뭐가 그리 아쉬운지 자신의 옷소매를 물어뜯으며 안타까워했다. 나는 그 모습에서 미호가 칠요를 차지하고자 하는 욕심이 매우 강력한 것을 알아챘다. 나는 되려 어리둥절해서 미호에게 물었다.
"그 막야라는 건 전투용으로 쓰기도 아쉽던데 그렇게 대단한 보물인가? 물론 상단전을 일깨워서 술법의 재능을 부여해준다지만 그것만으로 신대의 비보라기엔 좀..."
"흥, 멍청한 녀석! 다른 데 가서 그런 소리 하지 말아라."
표독스럽게 말한 미호가 말을 이었다.
"어차피 망량선사가 차지했다면 얻을 수도 없을테니 말해 주마. 막야의 진짜 힘은 천빙(天氷)이며, 대라신선조차 멸할 수 있다. 또한 막야의 신통력을 얻게 되면 일개 지선(地仙)이 순식간에 천계로 올라가서 상급 신선이 될 수 있지. 그 존재를 알게 된다면 천지간의 모든 요괴와 선인들이 앞다투어 얻으려 욕심낼 것이다."
"......"
천빙, 대라신선조차 멸하는 힘!
나는 뜻밖의 소리를 듣자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놀라서 물었다.
"잠깐. 막야는 신화시대의 보물이 아닌가? 너는 어떻게 막야의 힘을 알고 있지?"
"본녀는 천계(天界)에서 서왕모 님을 모시다가 지상에 내려왔다. 천계에 있는 상선(上仙)이나 대존(大尊)들은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니, 나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럼 너는 서왕모의..."
그러자 갑자기 미호가 나를 노려보며 말을 끊었다.
"그만! 너는 정말로 타인의 심기를 긁는데 재주가 뛰어나구나."
반어법이었다.
"음..."
"하아, 너는 화술(話術)이란 걸 배우지 못했느냐? 어찌 말을 하는데 자기가 원하는 정보만 긁어내려고 하고, 상대방과의 대화 흐름을 고려해서 배려하질 못하느냐? 정녕 본녀의 삶에서 이렇게 답답한 대화는 또 처음이구나."
"......."
미호가 면박을 줬지만 나는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사실 나는 여러번 전생을 거듭하면서 감성이 삭막해지기도 했고, 원하는 정보를 제때 얻지 못하면 언제 죽을지 모르는 인생이었다. 이런 말버릇이 생긴 건 어떤 점에서 당연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미호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아무튼 칠요의 이야기는 고맙다. 이렇게 된 이상 본녀도 최선을 다해서 너를 도와주마."
"해인을 얻을 생각인가?"
"그렇지 않다면 거짓이겠지."
나는 미호에게 제안했다.
"정 그렇다면 이렇게 하는건 어떨까?"
"어떻게 말이냐?"
"해인이 만일에 칠요라서 그걸 얻게 된다면, 우선 네가 가지고 필요한 만큼 써라. 나는 그 소재만 알면 되니까, 나중에 내가 필요할 때 칠요를 빌려주기만 하면 돼."
미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워낙 내 제안이 의외였기 때문이리라. 그러더니 방긋 웃으며 내 손을 잡았다.
"그렇게 하자꾸나. 아주 좋은 제안이다."
이걸로 미호는 내가 해인을 얻으려는 행동에 큰 의심없이 도와주게 될 것이다. 내가 해인을 얻으려고 그녀를 뒤통수치는 행동이 껄끄러웠을 텐데 내 쪽에서 이런 제안을 했기 때문이다. 내 제안은 완전히 호구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이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어차피 미호를 무력으로 억제할 방법은 없는데다가, 내가 딱히 도와주지 않아도 미호는 이제부터 칠요로 짐작되는 해인을 얻으려고 행동에 나설 것이다.
' 난... 위치와 획득방법만 알면 돼.'
그것만 알게 되면, 나중에는 전생(轉生)을 이용해서 미호의 도움 없이 자력으로 획득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게 미호와의 동맹이 성사되자 미호가 말했다.
"하아암... 그런데 네 실력이 좀 별로구나. 이대로는 해인을 얻는 건 역부족이다."
아까는 실력이 괜찮다고 칭찬했으면서 말을 바꾸는 건 또 뭐냐! 하지만 일의 성사기준이 다르니 평가가 달라지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퉁명스럽게 반문했다.
"네가 강하니까 괜찮지 않아?"
"그렇지 않다. 단의 일족은 인간같지 않을 정도로 강력한 존재들이다. 아무리 본녀라고 해도 그들과 정면충돌한다면 봉인당하고 말 것이다."
그렇게 말한 미호가 나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10년 주마. 그 안에 충분히 본녀를 도울 수 있을 정도로 강해져라."
"강해지라고 해도 잘 짐작이 안 되는데. 그냥 무공이나 닦고 있으란 말이냐?"
"후후,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 본녀가 도움을 주마."
스윽
미호가 왠 조그마한 동거울을 내게 내밀었다.
"이것을 받아라."
"이게 뭐지?"
"이것은 나고야의 아츠타 신궁(熱田神宮)에 있던 삼종신기 중 하나인 팔지경(八咫鏡, やたのかがみ)이다."
팔지경이라고 불리는 거울은 내 손 위에서 심상치 않은 빛을 흘리고 있었다. 내가 팔지경을 물끄러미 바라보자 미호가 설명했다.
"이것은 시즈이시(?石)의 일종으로 혼과 생명력을 활성화하는 힘을 지니고 있다. 술법사가 쓰면 더 강한 위력을 보이겠지만, 네가 강해지는데 도움이 되겠지. 조석(朝夕)으로 하루 1시진씩 거울을 보고 명상을 하면 효험이 있을 것이니라."
"효험이라..."
"우후후, 10년이 지나도 실망스럽다면 너를 홀려버릴 것이다."
장난스럽게 말하는 미호였지만 전혀 장난스럽게 느껴지지 않았다. 이 팔지경은 동영 땅에서 보물인 게 분명할텐데 그런 걸 내게 넘겨주면서 무상일 리가 없다. 내가 10년 후에 만족스러운 수준에 이르지 못하면 날 죽여버릴지도 모른다.
미호가 방긋 웃었다.
"때가 되면 본녀가 너를 찾아가겠다. 그럼 오늘 좋은 꿈 꾸거라."
쉬익!
미호의 몸이 그 자리에서 전이술로 사라졌다. 나는 사람들이 위화감을 느낄까봐 주변을 급히 둘러보았지만, 뜻밖에도 사람이 사라졌는데도 의아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없었다. 아마도 미리 인식을 조종하는 결계를 쳐둔 모양이었다. 나는 가슴을 쓸어내리면서도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 아무리 대요괴라지만 술법의 힘이 굉장히 강하군. 무공으로 저런 존재에게 대항하는 게 가능하단 말인가?'
하지만 무공의 끝을 보지도 못한 입장에서 이런 소리를 하는 것도 건방진 일일 것이다. 나는 서경에서의 토벌을 구미호와의 동맹이라는 결과로 끝낸 채 정씨 가문으로 터덜터덜 돌아가야만 했다. 십이율이 어찌되었든간에 나는 그냥 구미호한테 홀려서 그동안의 일을 모른다는 식으로 둘러댈 생각이었다.
그 날 야숙을 해서 잠을 청했다.
허억... 허억...
몽환(夢幻)속을 헤매이고 있다. 그 꿈 속에서 나는 알몸이 되어서, 그럭저럭 단련된 근육질의 몸에 땀을 흘리고 있었다. 나는 비단금침 위에서 격렬하게 하체를 움직이며 끝없는 쾌락을 느끼고 있었다.
퍽 퍽 퍽
부드럽고 풍만한 여체가 느껴진다. 엉덩이 뒤쪽에서 부드러운 꼬리털이 느껴졌다. 눈에 생기를 잃은 채 정신없이 방사(房事)에 몰두하는 내 얼굴을 새하얀 손이 만지작거렸다. 교성이 들려왔다.
하앙... 아아...
나는 마치 내 행동을 먼 곳에서 바라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정신만이 봉인된 채 육체가 본능만으로 움직이는 꼴을 지켜보고 있는 것이다.
하초가 터질 것만 같았다. 격렬하게 움직이던 내 몸은 다음 순간 갑작스럽게 정욕을 쏟아내었고 합쳐진 남녀의 몸뚱이가 크게 부들거렸다.
하앗... 아응...
한 번의 행위로는 만족하지 못하는지 내 몸은 거칠게 여체를 만지며 눈 앞의 아름다운 미녀에게 입을 맞추고 있었다. 그녀 또한 내 행위를 적극적으로 받아주면서 내 탄탄한 가슴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녀의 몸을 뒤집어서 후배위의 자세를 잡은 후, 내 꺼떡거리는 물건을 서서히 밀어넣었다. 다시 한 번 격렬한 정사가 이루어지면서 여인의 교성이 내 귀를 간지럽혔다. 나는 있는 힘껏 열정적인 쾌락을 즐기다가 결국 파정(破精)하고 말았다.
"으으으읏!!"
나는 신음소리를 내며 잠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아랫도리가 축축하게 젖어있는 걸 깨닫고 말았다. 그리고 머리를 쥐어뜯으며 욕지기를 흘렸다.
"망할 여우..."
좋은 꿈 꾸라는 게 이런 뜻이었나?
나는 심후한 내공으로 억제하고 있던 상황에서 뜻밖에 몇십 년 만에 몽정(夢精)을 해 버린 것이다.
정씨 가문에 되돌아가자 정철욱이 나를 불렀다.
나는 그동안 자리를 비운 일을 문책당할 거라고 생각하고 그를 대면하러 갔다.
"백웅 무사. 서경에서 큰 일이 있었다지."
"네."
그는 호랑이 쫓아다닌 일 대신 대뜸 서경 토벌 건부터 꺼냈다. 역시 정철욱정도 되는 권력자에게는 왠만한 소식이 다 귀에 들어가는 듯 했다. 정철욱은 심각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다가 말했다.
"어떤 일이 있었는지 말해 보게."
나는 미호와 교섭한 이야기를 쏙 빼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구미호에게 홀려서 정신을 잃었는데, 정처없이 찾아오다보니 정씨 가문 앞이었다는 식으로 이야기했다. 내가 환술에 당했다고 주장하자 정철욱은 의자를 고쳐앉았다.
드륵
"사실 그 일 때문에 큰일이 났네. 구미호의 힘을 토벌대가 당해내지 못했다는 소문 때문에, 서경의 치안이 흉흉해지고 각지의 호족들이 불안해하고 있어. 이 일을 서둘러 해결하지 못하면 내 위치가 위태로워질 게야."
"......"
"백웅 무사. 다시 한 번 토벌대에 참여할 수 없겠나? 자네가 구미호의 환술에 당했다지만, 십이율 측에서 되려 자네를 내어주길 원하고 있네. 이번에는 아주 뛰어난 술법사와 십이율 문주가 동행한다고 하니 꼭 가주었으면 하네."
정철욱의 말에도 나는 고개를 저었다.
"죄송합니다. 저는 두 번 다시 그 요괴와 마주하고 싶지 않습니다. 다시 마주칠 바에는 차라리 죽고 말겠습니다."
"으음...."
"너무나 괴롭습니다. 양해해 주십시오."
내가 진심으로 괴로운 표정을 짓자, 정철욱은 어쩔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흠 어쩔 수 없군. 그러면 휴가를 줄 테니 앞으로 석 달 동안 별채에서 정양하고 있게. 원한다면 여자도 붙여 주지."
"배려는 감사합니다만 혼자 있고 싶습니다."
"그런가? 그럼 편히 쉬게."
"가주께서도 편히 쉬십시오."
드르륵...
나는 문을 닫고 나오면서 한숨을 쉬었다.
"하아."
이제부터가 문제였다. 앞으로 10년동안 충분한 힘을 쌓아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구미호에게 정기를 다 빨려서 죽고 말 것이다. 음몽(淫夢)이 현실로 나타나면, 아무리 내 내공과 정력이라고 해도 버틸 수 있을 리가 없다. 하룻밤에 방사를 수십 번이나 하다가 머리털이 다 빠져서 말라죽고 말 것이다.
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살아남자!"
앞으로 10년간 죽어라 수련하는 수밖에 없었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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