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검신-86화 (86/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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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천향(暗天鄕)

서경.

이 도시는 원래 공민왕 때 평양부(平壤府)라고 개칭된 적이 있었다. 원(元)나라에게 빼앗겼을 때는 동녕부라는 이름이었지만 되돌려받은 것이다. 하지만 그 이후 원명교체기에 고려가 수성(守城) 및 개혁에 성공하고, 이어서 우왕과 창왕이 집권해서 국운(國運)을 되살리자 이곳은 서경이라는 이름을 되찾았다.

원래 우왕은 정치에 관심이 없는 자였으나 갑작스레 역량을 늘리고 이어서 반골(反骨)들을 숙청할 정도로 강단있는 왕이 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된 배경에는 십이율(十二律)이 크게 관여했다고 하는 소문이 있으나 확실치는 않았다. 어쨌든 고려가 국운을 다시 성하게 하여 강성한 나라가 되자 쇠퇴했던 옛 도시도 함께 부흥한 것이다.

지율 스님이 뚫어져라 옛 동녕부의 폐건물을 바라보았다.

"바로 저 곳에서 음양사의 기운이 느껴지오."

그 곳은 백수십년이 지나도록 재건은 커녕 잔해를 치울 생각도 안 하는 곳이었다. 풍수사들이 일컫길 과거 원나라 지배시절 이곳에서 죽은 자들의 원한이 너무 강해 음기(陰氣)가 강렬한 곳이라서, 인간이 들어가는 것은 너무 위험한 흉지(凶地)이기 때문이었다. 모여있던 고려의 술법사와 도승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강력한 술법이 느껴지오."

"결계를 해제합시다."

우웅

술법을 익힌 자들이 앞으로 나와서 폐건물에 둘러쳐져 있는 결계를 해제하기 시작했다. 물리적인 간섭력은 없으나, 결계 안에 들어간 자들은 환상에 걸려서 홀리게끔 되어있었으며, 강력한 저주 또한 걸려 있었다. 이런 결계에 맨몸으로 들어가는 것은 너무나 무모한 짓이기에 결계부터 해제해야 하는 것이다.

파앙!

갑자기 허공에서 빛이 나더니 투명한 막이 벗겨졌다. 그것이 결계가 해제되었다는 신호였다. 음양사 토벌대는 한층 안으로 들어갔는데, 폐건물의 대문 안으로 모두가 들어오자 갑자기 쾅 하고 뒤에서 뭔가가 떨어졌다.

콰과광

먼지구름에 지율 스님이 인상을 찌푸렸다.

"나생문(羅生門)!"

우리의 퇴로를 막아놓은 것은 높이가 무려 사 장이나 되고 너비도 넓은 거대한 문짝이었다. 마귀의 형상이 문의 입구에 새겨져 있어서 흉험함을 느끼게 했다. 내가 지율스님에게 물었다.

"저게 뭡니까?"

"음양도의 결계술법이오. 아무래도 음양사는 우리를 독안에 든 쥐로 만들고싶은 모양이군."

"저거 무시하고 그냥 다른 담장을 뛰어넘어서 나가면 안됩니까?"

"저 나생문 자체로 결계의 힘을 지니고 있소. 저걸 부수려면 술자를 죽이거나 파해식을 넣어야 하오."

"그렇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적이 마중나왔구려."

쉬쉬쉬쉭

쉬쉭

넓은 옛 동녕부 폐건물의 앞에 서서히 기괴한 형체가 나타났다. 그것은 괴물이라기엔 너무나 인공적인, 종이(紙)로 만들어진 듯한 껑충이 인형이었다. 나풀거리는 듯 비척대며 걸어오는 그 인형을 보자 지율 스님이 선장(禪丈)을 붙잡았다.

"모두들 조심하시오! 저것은 음양도의 술법인 식신(式神)이오! 저래봬도 힘과 속도가 뛰어나고 잘 죽지 않으니 자신의 몸을 잘 지키시오."

식신?

나는 난생 처음 보는 것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술법이라는 건 종이를 이용해서 싸우는 인형을 만들 수도 있단 말인가? 식신의 숫자는 약 50여 마리로 보였는데 명백히 이 자리에 모인 토벌대 무인보다 많은 숫자였다.

철컹

"십이율 호국동맹 자륜, 간다!!"

나와 비무에서 겨뤘던 호국동맹의 후기지수, 자륜이 거세게 외치며 검을 뽑아 앞으로 돌격했다. 그의 검에는 강력한 검초(劍招)가 실려있어서 위력이 거셌다. 자륜은 달려들자마자 식신 두 놈의 사지를 열 조각으로 쪼개버리고 말았다.

쿠웅

식신은 종이인데도 마치 실재하는 무게를 가진 것처럼 땅에 둔중한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아마 저 놈의 공격에는 강한 물리력이 있을 것이다.

"우오오오오!!"

"왜놈을 물리치자!!"

채챙

까아아앙

그것을 신호로 십이율 토벌대는 약속이라도 한 듯이 저마다 무기를 들고 앞으로 달려들었다. 그들은 저마다 자신의 문파에서 한가락 하는 고수들이었기에 일류 이하인 자가 한 명도 없었다. 순식간에 검기나 창술, 화살, 술법이 난무하면서 식신과 격전(激戰)이 벌어졌다.

화르르륵!!

화염(火炎)의 술법을 써서 식신을 태우던 십이율의 서생이 인상을 찌푸렸다.

"또 소환되는군. 정말 대단한 술력(術力)이다."

지이이잉

고작 반 각동안 식신의 절반을 쓰러뜨렸지만, 건물 뒤편에서 다시 기묘한 소리와 함께 식신들이 걸어나오고 있었다. 아마 하급식신을 떼거지로 소환해서 이쪽의 체력과 정신력을 낭비시키려는 속셈인 것 같았다.

그러자 지율스님 옆에 있던 왠 도사가 앞으로 크게 박차고 나오더니 외쳤다.

"이런데서 시간을 낭비해선 안 돼! 여기는 해동밀천(海東密天)의 술법사인 내게 맡기시오!!"

슈슉 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신형이 엄청난 속도로 움직였다. 일반적인 신법으로는 발휘할 수 없는 속도이니 저것 또한 술법의 일종일 듯 했다. 그러자 환상과도 같이 그의 그림자가 늘어나더니, 순식간에 바닥에 총 72의 보법이 빛을 내면서 아로새겨졌다. 도사는 수인(手印)을 맺으며 광장 중앙에서 외쳤다.

"급급여율령(急急如律令) 우보(右步) 대결(大決)!"

쩌정

놀라운 일이었다. 도사가 마지막 보법을 밟는 순간, 장내에 떼거지로 몰려오던 식신들이 동시에 멈춰버리고 말았다. 그것은 아마 도사의 우보법이 거대한 범위에 펼쳐지면서, 식신들의 움직임만 멈춰진 효과를 발휘한 것이다. 장내의 무인과 술사들은 그에게 크게 감사를 표했다.

"고맙소!"

"얼른 부숴버립시다!"

콰과과광

콰광

"......"

나는 옆에서 같이 칼질을 해서 식신을 쓰러뜨리는 와중에도 감탄하며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그들 하나하나가 상당한 실력자이기도 했으나, 호흡을 맞춰서 역할을 분담하면서 많은 적을 효율적으로 쓰러뜨리고 있었다.

' 이게, 단체의 힘...!!'

술법 자체가 강력한 직접공격력을 지닌 경우는 드물었으나, 술법은 보조용으로 쓰일 때 전황을 크게 바꿔버리는 위력이 있었다. 토벌대의 구성도 무인과 술법사가 적절하게 섞여 있어서, 십이율이 강력한 개인과 싸워본 경험이 많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게다가 중원의 문파들처럼 쓸데없는 알력이 적고 동영의 왜적과 싸운다는 명분이 그들을 굳게 결속하게 만드는 것이다.

마지막 폭음을 끝으로 장내에 있던 식신은 모두 쓰러지고 말았다. 그러자 동녕부 폐허건물 안쪽에서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 아하하, 십이율 너희가 작정을 하고 찾아왔구나! 너희는 왜 나를 귀찮게 하느냐?]

선장을 움켜쥔 지율 스님이 앞으로 나오더니 합장을 하고 말했다.

"그대는 산해경의 괴물을 소환해서 이 땅을 어지럽혔소. 그에 상응하는 벌을 받으시오."

[ 후후, 산해경의 괴물이라 해봤자 대개 얼뜨기라는 걸 모르느냐? 육식을 즐겨서 인간에게 피해를 준 일은 거의 없을 텐데.]

"그렇긴 하오만, 애시당초 왜 고려 땅에서 이런 분탕질을 저지른 것이오? 변명이라도 해 보시오."

[ 변명이라... 아하하.]

쉬이익!!

"허억."

"저럴 수가."

장내의 토벌대가 모두 깜짝 놀랐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갑작스럽게 목소리의 주인공으로 보이는 음양사 여인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처음에 봤던 대로 그녀의 외모는 매우 아름다웠고 가슴의 크기가 풍만했다. 하지만 정말로 놀라야 하는 건 그런 게 아닌지, 지율 스님이 미간을 모으며 말했다.

"전이술(傳移術)이라니. 그대만한 술법사가 어찌 분별없이 이런 짓을 하시오?"

[ 후후... 이 땅에는 거대한 원한을 품은 악령(惡靈)이 갇혀 있다. 나는 그 자의 힘을 흡수하기 위해 결계를 펼쳤는데, 때마침 좋은 것이 산해경의 술법이었을 뿐이다.]

"산해경의 괴물이 봉인당할 때 흘러나온 기운으로 술법을 펼친 것이군."

음양사 여인이 깔깔 웃었다.

[ 호오... 중대가리 네놈은 꽤나 술법에 정통한 모양이구나. 그 말대로다. 너희는 나를 위해 꽤 수고를 해 주었구나.]

"십이율이 퇴치에 나설 것을 알아서 일부러 그런 짓을 한 것이오? 정녕 못된 자로다!!"

지율 스님이 분노했다.

하지만 나는 그들의 대화를 잘 알아듣지 못해서 질문했다.

"이 땅에 악령이 있다니? 대체 어디에 있다는 것이오?"

지율 스님이 내 말에 대답해 주었다.

"아마 있을 것이오. 이 곳 서경에서 악령이 되어있을만한 자는 하나 뿐이니."

"그게 누구요?"

"......"

지율 스님이 입을 꾹 다물자, 음양사 여인이 부채로 자신의 입을 가리며 키득 웃었다.

[ 내가 수고를 해서 서경의 악령을 처리해주겠다는데 너희가 무슨 상관이지? 본녀가 일을 마칠 때까지 기다려주는게 네놈들에게도 좋은 일이 아니겠나?]

"웃기지 마시오. 당신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요기(妖氣)를 보면, 당신은 결코 선한 존재가 아니오. 그 악령을 흡수하고 나서 당신이 강대한 힘을 어찌 휘두를지 짐작이 안 되오. 우리는 이 자리에서 당신과 악령을 동시에 봉인해 버리겠소."

[ 아하하하... 할 수 있으면 해 봐라!]

쉬익

음양사는 다시 전이술을 써서 사라져 버렸다. 아마도 저 음침한 4층짜리 폐건물 안에 들어가서 대기하는 것이리라. 나는 건물을 흘끔 보다가 말했다.

"그냥 궁사들을 불러와서 화시(火矢)로 건물을 가라앉히면 안되겠소?"

"저 요녀의 술법때문에 안 될 것이오. 화살을 막는 술법 정도는 되어있겠지."

"악령 악령 하던데 대체 무슨 말이오? 나도 좀 알아듣게 설명해 보시오."

궁금한 건 나 뿐만이 아닌지, 주변에 둘러서 있던 십이율 문인들이 모두 지율 스님을 주시하고 있었다. 아마도 이 자리에서 가장 식견이 뛰어난 술법사는 지율 스님인 것 같았다. 지율 스님은 한참 고민하다가 꺼져라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이 동녕부 건물은 정심(淨心) 대사가 조광(趙匡)에게 살해당한 곳이오."

"정심?"

나는 그게 무슨 말인지 몰라서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나 아까 강력한 우보법을 전개하던 해동밀천의 도사가 안색이 새하얘져서 외쳤다.

"서... 설마 이 곳이 묘청(妙淸)이 죽은 곳이란 말이오?"

"그렇소. 이 곳을 서경의 금지(禁地)로 지정하고 폐허도 치우지 않은 것은, 생전에 강력한 법력(法力)을 지니고 있던 그가 강대한 악령으로 변해있을 확률이 커서였소. 오랜 세월동안 결계로 그의 힘을 약하게 해서 소멸시킬 생각이었는데..."

지율 스님이 다시 한숨을 쉬었다.

"하아... 저 요녀가 악령의 힘을 흡수할 작정으로 이런 일을 벌이고 말았소. 정말 큰일이군..."

나는 그들이 무엇때문에 놀라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계속해서 질문했다.

"묘청이 누군데 그러오?"

"묘청이라는 중이 난(亂)을 일으켜서 고려의 수도를 이 서경으로 바꾸려 했던 일이오. 그는 조광에게 배신당해서 죽었지. 그 땅이 이곳이오."

"음... 뭐 그렇다 칩시다. 헌데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오?"

"뭘 어떻게 하오."

나는 손가락으로 폐건물을 가리켰다.

"저 안쪽은 명백히 함정인데 그래도 들어갈 생각이오? 지금이라도 나생문부터 부수고 지원군을 더 불러오는게 낫지 않겠소?"

웅성

내 제안이 그럴듯하다고 생각하는지 십이율의 토벌대가 수군거렸다. 확실히 전이술을 사용할 정도의 술법사가 함정을 쳐둔 곳으로 들어가는 건 미련한 짓인 것이다. 그러나 지율 스님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안 되오! 너무 시간을 낭비하면 저 음양사 요녀가 묘청의 힘을 흡수해버리고 말 것이오. 그러면 정말로 감당이 되지 않는 거악(巨惡)이 탄생하게 될 것이고, 일이 몇 배나 힘들어지게 되오."

"으음..."

"용기를 냅시다! 아무리 저 요녀의 술력이 대단해도 한계는 분명히 있소. 이미 식신을 대량으로 소환해서 힘을 꽤 소모했을테니, 우리가 침착하게 대처하면 분명히 요녀를 토벌할 수 있을 것이오."

"오오오오!!"

십이율 무인들이 다시 사기를 되찾았다. 나는 지율 스님이 내 생각보다 십이율에서 신망(信望)이 높은 중진(重陣)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하긴 그러니까 다짜고짜 음양사를 토벌해야한다는 격문을 돌려도 이렇게 많은 십이율 무인들이 참여한 것이리라. 나는 별 수 없음을 깨닫고 속으로 입맛을 다셨다.

' 씁 어쩔 수 없지.'

이번 생에는 가능하면 위험을 피해서 안전하게 가고싶었지만, 이렇게 되면 내가 몸을 뒤로 빼는게 더 위험해질 것이다. 이번에 십이율과 힘을 합쳐서 토벌하지 않으면 지율스님 말마따나 일이 훨씬 어려워지는 셈이다. 그리고 십이율에게서 신뢰를 잃은 내가 해인에 대해 조사하는 일도 난항을 겪을 게 뻔했다.

투두둑

먼지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토벌대가 건물 1층에 진입했다. 그러자 건물의 어둠 속에는 한 줄기의 빛이 광선처럼 내려쬐고 있었는데, 거기에는 한 무사(武士)가 장도(長刀)를 들고 대기하고 있었다. 특이하게도 그 무사는 큰 방립을 쓰고 있어서 얼굴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지율 스님이 그 무사에게 말했다.

"복장으로 보아서 동영의 무사같은데 길을 비켜주시오. 당신 혼자서는 우리를 당해낼 수 없소."

그러자 그 동영무사가 어눌한 목소리로 고려말을 떠듬떠듬 말했다.

"그럴. 순. 업. 다. 나. 는. 천호(天狐)에게. 힘. 을. 받아야. 한. 다."

"귀찮게 하는군. 어차피 너도 같은 놈이니 손속이 맵다고 원망하지 마라!"

앞으로 나선 것은 자륜이었다. 그는 곱상하게 생긴 외견과는 달리 상당히 다혈질인 듯 했다. 자륜이 검에서 검기를 일으키자 동영무사는 움찔하며 장도를 마주 들었고, 잠시 후 그들이 격렬하게 병기를 부딪히기 시작했다.

까강! 까앙!

' 음 뭐야... 저 놈 약하잖아?'

나는 관전을 하다가 동영무사의 실력에 실망했다. 저 놈도 싸움을 못하는 편은 아니고, 일류에 근접한 실력이었다. 하지만 자륜의 실력은 대문파 장로급이었기에 칼을 부딪힐 때마다 여실히 딸리는 모습이었다. 혼자서 우리를 막아서길래 얼마나 쎈놈인가 했는데 이 자리에 모인 토벌대 중 한 명도 이기기 힘든 잡졸이었던 것이다.

슈욱!

자륜의 검극이 동영무사의 목젖 바로 앞에서 멈췄다. 고작해야 50초만에 동영무사를 제압한 자륜이 싸늘하게 말했다.

"다시 묻겠다. 비킬 생각이 없나?"

동영무사가 침을 꿀꺽 삼켰다.

"... 비. 비키겟. 소."

"잘 생각했다."

자륜이 검을 검집에 집어넣었다. 동영무사는 명백한 실력차를 느꼈는지 고개를 푹 숙이며 좌절하는 모습이었다. 토벌대 무인들은 그의 심지가 꺾인 것을 느끼고 그의 앞을 지나쳐서 2층으로 향했는데, 그 무사를 거들떠보는 자가 한 명도 없었다.

저벅 저벅

나는 이상함을 느꼈다. 분명히 음양사 여인은 굉장한 술법사였는데 왜 저렇게 약한 놈을 홀로 문지기로 세웠을까? 마치 죽어도 상관없다는 배치가 아닌가? 나는 왠지 동정심을 느껴서 그 동영무사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힘 내라."

그 때였다. 갑자기 동영무사가 어둠 속에서 고개를 번쩍 들더니 외쳤다.

"네, 네놈이, 네놈이 여기에에에!!"

쐐액

놈은 원독을 가득 품은 목소리로 갑자기 칼을 휘둘러 왔다. 나는 반사신경으로 검격을 받아냈는데, 너무 갑작스러운 공격이라서 놀랄 수밖에 없었다. 방금 전까지 힘빠져서 죽을 상이던 놈이 왜 갑자기 이런다는 말인가?

하지만 그건 그거였고 이건 이거였기에 나는 빠르게 검을 휘둘렀다.

"네가 자초한 거다!"

슈칵

동영무사의 목이 베여서 방립과 함께 떨어져 나갔다. 어둠 속에 굴러떨어져서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나는 갑자기 놈이 왜 공격했는지 몰랐지만 일단 고개를 갸웃하면서 앞으로 걸어나갔다.

' 희한하네. 내가 동영 놈에게 원한을 살 일이 있었나? 아니면 그냥 내가 만만해보여서 공격한건가?'

알 수가 없다. 얼굴을 끝까지 못 봐서 더 찝찝했다.

토벌대는 2층으로 올라갔고, 그 곳에는 왠 도깨비처럼 생긴 괴물이 2마리 서 있었다. 한 마리는 말라깽이 인간처럼 생긴 귀신이었고 다른 하나는 덩치가 넙적하게 생긴 귀신이었다. 그렇게 강해보이지 않아서 이번에도 쉬울까 했는데, 지율 스님이 긴장하며 말했다.

"저 놈들은 음양사 최대의 호위인 전귀(前鬼)와 후귀(後鬼)! 매우 강력할 테니 조심하시오!"

콰과광

"으아아아악!!"

지율 스님의 말은 사실이었다. 말라깽이 전귀란 놈이 갑자기 입에서 광선을 토해내자 폭음이 터져나오면서 토벌대 두세 명이 뒤로 날아가 버렸다. 동시에 후귀라는 넙적한 괴물이 철퇴를 꺼내들며 이쪽으로 휘둘러오는데 굉장한 힘과 속도였다.

콰앙

"으아아아아!!"

"정신 차려! 대열을 유지해!!"

"힘을 합쳐!"

무인들과 술법사들이 혼란의 와중에 대열을 갖추며 대여덟명씩 모여서 전귀와 후귀를 각각 포위했다. 나는 후귀 쪽으로 갔는데 덩치가 커서 쉽게 맞출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 이 놈들이 진짜로군.'

동시에 토벌대를 모아서 같이 오기를 잘 했다고 생각했다. 나 혼자서 전귀나 후귀를 이길 자신이 없는데 만일 혼자서 여기에 왔다면? 전귀와 후귀의 합공을 받고 죽어있었을 것이다. 사람들과 함께 온 덕에 그럭저럭 공략할만한 여지가 갖춰진 것이다.

[ 크워어어.]

쿠웅

후귀가 괴음을 내지르며 사방팔방으로 철퇴를 휘둘렀다. 무인들과 술법사들은 급히 그 공격을 피하면서 놈에게 공격을 가했다. 하지만 놈의 피부는 마치 철갑처럼 단단해서 쉽게 먹혀들지 않았다. 나는 뇌영보 천주살로 후귀의 철퇴공격을 피하다가 뒤로 돌아가서 검을 휘둘렀다.

천뢰인(天雷刃)!

파쾅!

거대한 번개의 칼날이 나타나더니 후귀의 등짝을 갈랐다. 하지만 후귀는 검기와 내공을 가득 실은 그 공격을 당하고도 잠시 비틀거리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큰 참상이 생기긴 했지만 치명상이 아닌 듯 했다. 나는 후귀의 맷집을 보자 어이가 없었다.

' 뭐 저런 놈이 다 있어?'

방금의 천뢰인은 삼 장 크기로 뻗어나갈 수 있는 걸 오 척 크기로 압축해서 휘두른 것이었다. 그래서 파괴력만큼은 종남파에서 전력을 다해서 휘둘렀던 것의 3할은 되는 상태였다. 인간이 이 공격을 맞으면 형태도 없이 분쇄될 것이다. 그런데도 경상으로 끝났으니 후귀의 맷집은 가히 상상을 초월했다.

"힘내시오! 할만해!"

"그렇군."

하지만 효과는 있었는지 후귀의 움직임이 크게 둔해졌다. 나는 십이율의 토벌대와 연계해서 반 각 동안 쉴새없이 후귀를 몰아붙였는데, 유효타가 다섯 번 이상 쌓이게 되자 마침내 후귀가 쓰러져 버렸다.

쿠궁...

[ 구워어어...]

후귀가 비명을 내지르더니,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종잇조각을 날리며 사라져 버렸다. 저렇게 강력하고 거대한 괴물이 고작해야 종잇조각으로 소환된 술법이었던 것이다. 나는 이마의 땀을 닦으며 전귀 쪽을 보았다.

"으, 상황이 별로군."

전귀는 체구가 작은 도깨비였으나 입과 손에서 왠 광선을 쏘아대면서 토벌대를 곤경에 빠뜨리고 있었다. 쓍쓍 거리면서 날아다니는 시퍼런 도깨비불 또한 위협적이었다. 후귀가 강력한 맷집과 힘을 가진 도깨비라면 전귀는 기상천외한 술법을 써서 적을 농락하는 놈인 듯 했다.

"하아아아!!"

나를 비롯한 토벌대들이 전귀에게 달려들어서 검을 휘둘렀다. 전귀는 갑자기 적이 늘어나자 당황한 듯 하더니, 지금까지보다 더욱 많은 광선을 실처럼 뿜어내었다. 토벌대들은 전귀의 범위공격력이 막강하다는 걸 깨닫자 저마다 흩어져서 폭발을 피하기 시작했다.

콰과과광

콰광!!

' 으 건물이 무너지겠어...!!'

나는 조급한 마음이 되었다. 이대로라면 전귀의 공격 때문에 폐건물이 통째로 무너져서 다같이 죽을 위기였기 때문이다. 어차피 저 식신은 술법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되면 토벌대만 망하는 것이었다.

나는 이판사판이다 싶어서 빠르게 달려들면서 몰래 뇌명의 호흡을 몸에 흘렸다. 순식간에 내 몸이 시퍼런 번개로 파직거렸고, 나는 순간적으로 빨라진 속도를 이용해서 전귀에게 접근했다. 어찌나 빨랐는지 전귀는 내가 놈의 목을 반쯤 벨 때까지도 반응하지 못한 듯 했다.

슈칵!

[ 키아악.]

전귀의 목이 떨어지자 놈이 내뿜던 광선도 사라졌다. 토벌대들은 곳곳에 숨어있다가 겨우 밖으로 나오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휴우, 살았다."

"소협 고맙소!!"

"소협이 아니었다면 우린 다 죽었을 것이오."

"아닙니다."

나는 손을 내저으며 떫은 표정을 지었다.

"다음 3층에 있을 놈이 얼마나 괴물일지가 더 걱정되는군요."

"......"

토벌대 중에서 이미 사망자가 1명, 부상자가 4명 나온 상황이었다. 이미 전력이 꽤 손실된 상태에서 3층의 문지기를 상대한다는 게 부담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러자 지율 스님이 내게 말했다.

"소협이 먼저 올라가 주실 수 있겠소?"

"네?"

"지금 뭔가 낌새가 이상하오. 음양사의 전귀와 후귀는 말 그대로 음양사의 목숨을 지키는 최종호위인데 2층에 있었소. 어쩌면 저 요녀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전혀 다른 존재일지도..."

"그럼 어쩌시겠단 말이오?"

"부상자들을 추스리고 잠시 나갔다 오겠소. 확인할 게 있소."

나는 난이도가 급증하는 걸 느꼈다. 그리고 약간 앞뒤가 안맞았다. 이 상황에서는 그냥 밀어붙여서 끝내야 하는 게 아닌가?

' 일단 정찰을 하라는 소리겠지? 차분하게 가야겠군.'

하지만 여기서 지율 스님의 말을 거절하기도 좀 그랬다. 설마 혼자서 주술사를 결딴내라는 소리는 아닐 것이다. 나는 별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안 되면 도망가시오."

"말 안 해도 그럴거요."

설마 2층의 전귀 후귀보다 더 쎈 놈이 나올까 싶지만, 그럴 경우 나는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칠 생각이었다. 어디까지나 내 힘이 닿는 한에서 최선을 다하기로 했기에 목숨까지 걸 일은 아닌 것이다.

토벌대가 폐건물에서 일시철퇴하고 나 혼자서 3층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침묵으로 가득한 3층을 한참동안 주시하다가 다시 4층으로 올라갔다.

"딱히 아무것도 없었군..."

괜히 쫄았던 셈이었다.

저벅 저벅

다소 허탈한 심정으로 내가 4층으로 올라가는 순간 4층의 전경이 보였다. 그 곳에는 아까 보았던 음양사 여인이 술잔을 기울이며 우아하게 탁자에 앉아 있었다. 보통 여인의 것보다 두 배는 커 보이는 거대한 가슴이 신경쓰였지만 나는 억지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나를 바라보며 훗하고 웃었다.

"그 자가 말했던 게 바로 너였구나. 과연 흥미롭다."

"무슨 말이지? 그 자라니?"

"1층에서 네가 죽인 무사 말이다."

"아."

나는 뭔가 어리둥절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놈이 대체 나에 대해서 뭘 말했단 말인가? 하지만 음양사는 더 이상 설명하지 않고 깔깔 웃었다.

"아하하, 인간은 재밌어! 오랜 세월을 살아왔건만 이런 은원은 처음 보는구나."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

"아아, 됐다. 아무튼 이 자리까지 오다니 너는 보통 실력은 아니다. 그래서 한 가지 제안하고 싶은 게 있는데."

"제안?"

음양사가 부드럽게 웃었다.

파아앗

그리고 다음 순간, 그녀의 아름다운 외모가 갑자기 털이 돋아나며 빠르게 바뀌기 시작했다. 이목구비는 동물의 그것으로 바뀌었고 몸 또한 마찬가지였다. 곧이어 새하얀 빛이 흘러나오더니, 그녀의 음양사 옷이 바닥에 떨어졌다.

변화가 끝나자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은 몸 크기가 1장은 될 법한 거대한 여우였다. 그 여우의 털은 한없이 새하얀 은빛으로 빛나고 있었고, 여우의 눈에서는 강렬한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내게 압박을 주는 것은 여우의 꼬리였다.

여우의 꼬리는 무려 9개나 되었다. 나는 저런 여우가 있다는 말을 듣지 못했고, 전설에서나 딱 한 번 들어보았을 뿐이었다.

나는 경악해서 외쳤다.

"천호(天狐) 구미호(九尾狐)...!!"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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