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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천향(暗天鄕)
내가 고려의 말에 어느정도 익숙해졌다고 느낀 것은 그로부터 1년 반이 지나서였다. 나는 그때쯤 정씨가문의 호위 일을 본격적으로 하기 시작했으며, 아주 어려운 말이 아니라면 왠만한 어휘를 알아들을 수 있었다. 이주희와만 대화하는 게 아니라 주변의 다른 사람들과도 상당한 대화가 가능했다.
이제 고려 말을 거의 다 터득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때쯤 되자 정철욱은 내게도 임무를 여러가지 맡기기 시작했다.
하루는 정씨 가문의 외숙(外叔)을 호위하는 역으로 도성 밖으로 나가는 일이 있었다. 그 또한 세도귀족이었는데 중원출신에 어려보이는 나를 마뜩찮은 눈으로 보는 기색이었다. 하지만 도중에 대호(大虎) 두 마리가 산길에서 튀어나오자 기겁을 했다.
크르르릉!!
"우와아앗."
"호랑이다."
귀족은 물론 같이 오던 호위무사 네 명도 놀라서 오금이 지려오는 기색이었다. 그들 또한 무공을 익힌 자들이지만, 무공을 익힌다고 해서 단시일 내에 초인이 되는 건 아니다. 저렇게 몸뚱이 크기가 1장은 될법한 호랑이라면, 일류고수라고 해도 목숨을 걸고 상대해야하는 존재였다. 하물며 두 마리나 된다면 굉장한 위협이었다.
하지만 나는 호랑이를 보자마자 그들의 눈을 노려보며 제압했다. 기세가 장중하게 퍼져나갔다.
우웅
크르르르...
호랑이들은 주춤거리더니 이내 산 너머로 도망쳐버리고 말았다. 나는 저 녀석들이 암수호랑이일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내 기(氣)를 느꼈을텐데도 달려들려고 한 걸 보면 어지간히 배가 고팠던 모양이었다. 그 정씨 가문의 외숙은 내가 눈빛만으로 호랑이를 물리쳐버리자 놀라서 외쳤다.
"대... 대단하군!"
거기까진 뭐 그러려니 했다. 하지만 이어진 말에 나는 어이를 상실했다.
"자, 어서 가서 저 호랑이를 잡아 오게!"
"......"
"뭘 하나? 가라!"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가? 내가 왜 호랑이를 잡아야 한다는 말인가?
나는 하도 황당해서 고려말로 따져물었다.
"왜 호랑이를 잡습니까? 지금 일이 바빠서 수원(水原)까지 가시는 게 아니었습니까."
"일개 산적들은 자네를 제외한 호위로 충분해. 얼른 호랑이를 잡아 와."
"그러니까 호랑이를 왜 잡습니까? 쫓아냈으면 된거 아닙니까?"
"가죽을 벗겨야 하지 않는가!"
"......"
이제 보니까 방금 전에 목숨을 위협받은 것도 까맣게 잊고 귀한 호랑이가죽을 얻고싶은 모양이었다. 호랑이 가죽은 매우 비싼 고가품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호위역에게 뜬금없이 호랑이를 잡아오라는 건 도의상으로나 뭘로 보나 문제가 있었다. 무엇보다도 나는 저 외숙의 직계하인이나 몸종도 아닌 것이다.
내가 불쾌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살기를 흘리자, 옆에 있던 호위무사들의 대장격인 자가 알아챈 듯 했다. 그는 급히 나를 옆으로 끌고가서는 이야기를 했다.
"백웅 무사. 화난 건 알겠는데 부탁을 좀 들어줄 수 없겠소? 백웅 무사의 무공으로 어려운 일도 아니잖소."
"내가 왜 저런 말도 안되는 개소리를 들어줘야 하오? 현재 내 주인은 정철욱 님이지 저 자가 아니오."
"그... 그건 사실이지만, 저 분은 왕숙(王叔)이기도 하오. 왕실과도 피가 섞여있는 외척이니 그 위세가 대단하지. 함부로 저 말을 무시하면 백웅 무사의 앞길에도 그리 좋지 않을 것이오."
나는 인상을 찡그렸다.
"그런건 둘째치고, 호랑이들은 너무 배가 고파서 내 기를 느꼈는데도 앞에 나온 것이었소. 그렇게 불쌍한 놈들을 굳이 잡으러 가야 하오? 그리고 잡는다고 하더라도 막다른 궁지에 몰린 맹호 두 마리와 싸우는 게 쉬운 일로 보이시오? 병사 백 명을 동원해도 쉽지 않은 일을 나보고 시키다니."
그는 거의 울상이 되어서 무릎을 꿇고 빌었다.
"으으... 할 말이 없군. 그래도 제발 내 입장도 좀 헤아려 주시오. 그리고 굶주린 호랑이라면 나중에 또 어떤 인간을 습격해서 해칠지 모르는거 아닌가? 이건 결국 선행(善行)이라고 할 수 있는거요."
"으음."
뜬금없이 귀찮은 일이 생긴 느낌이었다. 나는 별 수 없이 씹어뱉듯 말했다.
"할 수 없군. 일단 해 보겠지만 결과는 기대하지 마시오. 내가 호랑이 가죽을 벗겨오든말든, 그걸 정철욱 님의 명예와 관련짓는다면, 그 쪽이야말로 각오해야 할 거요."
내 대답에 호위무사 대장의 얼굴이 환해졌다.
"아, 물론이오!"
그의 입장에서는 내가 이 자리에서 즉시 항명(抗命)하는 일부터가 겁이 나는 것이리라. 내가 호랑이사냥을 성공하든 실패하든 일단 명령을 들어주기만 하면 아무래도 좋은 일이리라.
나는 일단 호랑이의 흔적을 쫓아서 야산으로 향했다. 하지만 야산을 통해서 호랑이의 흔적을 찾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고, 나는 호랑이의 발걸음을 좇다가 도중에 깊은 수풀이 나오자 멈췄다.
내게는 전문적인 사냥추적술이 없으므로, 이제부터는 그냥 기감을 돋우어서 감으로 일대 산악을 싹 다 뒤져야 호랑이를 만날까말까 하는 것이다. 너무나 귀찮은 일이라서 한숨이 나왔다.
"하아..."
나는 호랑이에게 동정심이 갔다. 오랜 세월동안 황산에서 산야생활을 했던 나로써는 야생의 동물들이 매일 생존을 위해서 사투를 벌이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호랑이도 예외가 아니었다. 아무도 도와줄 데 없는 산야에서 홀로 배고픔과 공포와 싸우면서 먹을거리를 찾는 괴로움은 도회생활을 하는 인간이 이해할 만한 게 아니었다. 그렇기에 내 거대한 기를 느꼈는데도 억지로 나타난 호랑이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차라리 그 외숙이란 놈이 호랑이먹이가 되도록 내버려두는 게 좋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마저 들었다.
이런 생각마저 들자 내가 왜 여기 서있나 싶은 회의감이 들었다. 엄한 산을 기약없이 뒤져서 배고픈 호랑이를 때려죽이고 가죽까지 벗겨오는 처참한 짓을 굳이 해야하는 것인가? 하지만 호위무사 대장의 말마따나, 배고픈 호랑이가 행인들에게 위협이 되는 건 사실이었다. 나는 별 수 없이 수풀 속으로 들어갔다.
약 두 시진 정도 수풀을 헤매면서 범위를 기감으로 탐지하다보니 커다란 동물이 어슬렁거리는 게 보였다. 나는 그게 호랑이라고 생각해서 달려갔다.
휘리릭
"......!!"
하지만 아니었다. 나는 그 놈의 형체를 보자마자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육(?)?!"
너무나 책에서 보던 그대로였다. 생김새가 소 같은데 높은 언덕에 살고 있다. 뱀꼬리에 날개가 있으며 그 깃은 겨드랑이 밑에 있는데 소리는 유우(留牛)와 같다. 이름을 육(?)이라고 하며 겨울이면 죽었다가 여름이면 살아나고 이것을 먹으면 종기가 없어진다.
내가 산해경(山海經)에서 보았던 그대로의 괴물(怪物)이 눈 앞에 있는 것이다. 산해경의 삽화와 대동소이해서 착각할 수가 없었다.
쿠우우
말 그대로 소의 형태를 한 채 뱀꼬리에 날개를 가진 그 놈은 나를 발견하자 긴 울음소리를 내었다. 하지만 공격의지는 없는지 앞발을 들어서 나무에 몸을 고정시킨 후, 옆에 있던 나무껍질을 뜯어서 먹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저 놈은 이 곳에서 얌전히 나무껍질을 뜯으러 온 모양이었다.
나는 산해경의 괴물을 현실에서 볼 것이라고는 믿은 적이 없었다. 산해경은 말 그대로 상상력을 발휘한 가공의 소설책같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직접 산해경의 괴물인 육을 보자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왜 하필 고려의 인적없는 야산에서 이런 놈을 볼 수 있단 말인가?
' 어쩌면 호랑이 놈들은 이 육 때문에 사냥을 못하고 지낸 게 아닐까?'
육은 육식을 하지 않는 듯 했으나 덩치가 매우 컸다. 몸 크기가 이 장에 가까운 괴물 수준이었다. 몸뚱이를 세로로 세우니 산을 크게 내려다볼 정도였다. 이런 괴물이 주변에 산다면 호랑이가 신경쓰여서 사냥이고 뭐고 제대로 못하는게 당연하다. 나는 어리벙벙해서 육을 쳐다보고 있었는데 왠 목소리가 들려 왔다.
"시주께선 산해경을 알고 계신가 보구려."
사람의 목소리였다. 내가 등 뒤를 돌아보자 거기에는 가사를 걸친 스님이 한 명 서 있었다. 나는 그를 응시했는데, 과연 그는 상당한 내공을 보유하고 있는 고수였다. 호랑이같은 걸 두려워할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나는 그에게 말했다.
"나는 고려 정씨가문의 호위무사인 백웅이라 하오. 굶은 호랑이들이 인간에게 해가 될까 염려해서 토벌하러 왔소."
"음 그랬구려. 나는 십이율 천태종(天台宗)의 지율(志栗)이라 하오."
"지율 스님은 저 육을 알고 계십니까?"
"물론이오. 이 땅에 저놈 때문에 찾아왔으니."
휘리릭
그렇게 말한 지율 스님은 손에 들고 있는 염주를 육에게로 던졌다. 육은 나무껍질을 뜯고 있다가, 갑자기 염주에서 퍼져나온 환한 기운을 맞자 고통스럽게 몸을 뒤틀었다. 육은 잠시 후 어마어마한 덩치가 무색하게 오그라들더니, 잠시 후 조그마한 옥(玉)만 남기고 소멸되고 말았다.
갑자기 눈 앞에서 벌어진 기사(奇事)에 나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런 건 무공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술법(術法)이오?"
지율 스님은 옥을 주우며 말했다.
"도가에서는 술법이라 칭하지만 불가에서는 법력(法力)이라 하오. 나는 천지의 균형이 뒤틀어져서 곳곳에 산해경의 괴물이 들끓는다는 일을 전해듣고, 천태종의 명을 받아서 수습하고 있는 중이외다."
지율 스님은 아무래도 무공과 술법에 함께 능통한 자 같았다. 지율 스님은 옥을 내게 보여주더니 말했다.
"보시오. 이 흑옥(黑玉)에서는 심상치 않은 사기(邪氣)가 들끓고 있소. 이것은 명백히 누군가가 인위적으로 산해경의 괴물을 고려 곳곳에 소환했다는 증거요."
"뭐라고? 누가 그런 짓을 한다는 말이오?"
"그건 아직 나도 알 수 없소. 허나 내가 본사(本寺)에서 여기까지 3백리 길을 오는 동안에 괴물을 7마리나 퇴치했소. 아마 곧 고려에 난리가 날 것이오."
"으음..."
나는 침음성을 흘렸다. 방금 봤던 육도 육식괴물은 아니었으나, 산해경의 괴물들은 하나같이 야생동물 따위는 가볍게 밟아죽일만한 힘을 보유하고 있었다. 만에 하나 이런것들이 민가에서 날뛰게 되면 피해가 걷잡을 수 없게 되리라. 그리고 지율 스님을 비롯한 십이율 측에서 이 난(亂)을 수습하려는 모양이었다.
지율 스님이 내게 말했다.
"빈승도 십이율의 문인으로써 시주의 명성을 익히 들어본 적이 있소. 십이율 문주에 준하는 무공을 지닌 중원의 기린아(麒麟兒)가 정씨 가문에 있다더니, 과연 명성에는 이유가 있구려. 도리어 빈승이 시주의 기력에 감탄했소이다."
"과찬이십니다."
"그래서 시주께 도움을 청하고 싶소. 나 혼자는 아무래도 산해경의 괴물을 제압하는 게 힘들 듯 한데, 좀 도와주지 않겠소?"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 싶지만 나는 정씨 가문에 매여 있어서 임무 외적인 일로 함부로 움직일 수가 없소."
"으음... 아쉽구려."
"지율 스님의 무공이라면 충분히 괴물을 제압할 터인데 상관없지 않습니까?"
"아니오. 이 괴물들이 문제가 아니라, 이 괴물을 소환한 흉수(凶首)의 실력이 짐작되지 않아서 그렇소. 이렇게 괴물 수십 수백을 소환할 정도의 술사(術師)라면 빈승 혼자서는 감당이 안 될 가능성이 높소."
그렇구나.
확실히 지율이 옥을 모으고 흉수의 기운을 찾아다니다보면 언젠가 실체에 도달할 것이다. 그러나 그 자의 술법실력은 굉장히 높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율은 한 명이라도 많은 아군을 모집하려는 중이었다.
나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말했다.
"혹시 지율 스님은 해인사(海印寺) 출신이십니까?"
"아쉽게도 해인사는 조계종(曹溪宗)의 절이라 빈승과 인연이 없소."
"나는 꼭 해인사에 들러서 알아봐야 할 일이 있는데 어찌 안 되겠습니까?"
내 말투에서 뭔가 눈치챈 듯한 지율 스님이 생각하는 기색이었다. 그러더니 말했다.
"해인사의 주지이신 대정법사(大正法師)께서 스승님의 친우이시니 이야기가 통할지도 모르오. 허나 계파가 다른 입장에서 좀 부담이긴 하겠군."
나는 본론을 꺼냈다.
"나는 대정법사님과 독대를 하고 알아봐야 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 분과 다리를 놔 주신다면, 나는 최선을 다해서 지율 스님을 도와드리겠소."
"음... 알겠소. 나와 시주는 서로를 도울 수 있을 것 같군."
일단의 거래가 끝나자, 나는 근처의 호랑이 동굴을 찾아가서 호랑이를 제압했다. 하지만 죽이는 건 왠지 껄끄러워서, 근처의 멧돼지를 두어 마리 잡아서 호랑이들에게 던져주었다. 멧돼지를 맛있게 먹는 호랑이를 보자 옆에 서 있던 지율 스님이 인상을 찡그렸다.
"시주는 어찌 호랑이를 살려주는 것이오?"
"내 맘이오. 그리고 저 놈들도 배가 부르면 당분간 사람을 안 노릴게 아닌가?"
"......"
호랑이들 입장에서 보면 나는 난데없이 끼어든 외계의 괴물이다. 인간에게 이득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압도적인 힘으로 때려잡는 건 왠지 맞지 않는 일이었다. 그리고 외척 놈 좋은일 시켜주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인 것이다.
또한 이 정도로 혼쭐을 내 주었으니 호랑이는 당분간 인간을 노리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냥 외척에게로 복귀하지 않고 지율 스님을 따라다니기로 했다. 호랑이를 잡으려는데 한세월 걸렸다는 식으로 변명 한번 해주면 될 일이었다. 그것보다는 산해경의 괴물로 인한 이변, 그리고 해인사 주지와의 독대가 훨씬 중요했다.
어차피 나는 정씨 가문에서 출세할 생각이 아니다. 정철욱이 현재 나를 매우 좋게 봐주고 있기에 출세가 충분히 가능하겠지만, 내 궁극적인 목표는 이 고려땅 어딘가에 있을 칠요(七曜)의 단서를 찾는 것이었다. 외척이나 정철욱이 내 무능을 토로해서 괄시하더라도 크게 중요한 일이 아닌 것이다.
타다닷
그렇게 약 10일이 흘렀다. 나와 지율 스님은 어느덧 송악(松岳) 근처까지 와서 산해경 괴물들을 사냥하고 있었다. 지율 스님은 법력으로 결계를 펼쳐서 괴물의 기운을 감지할 수 있었고, 감지하고 나면 괴물을 찾아서 때려잡는 식이었다.
[ 키이이익...]
성성(??)이라고 불리던 괴물이 연기를 내며 녹더니 흑옥으로 변했다. 다소 잔인해보이는 광경이었으나 어차피 인공적인 괴물이었으므로 원래대로 돌아가는 셈이었다. 큰 주머니에 흑옥을 집어넣은 지율 스님이 말했다.
"벌써 17마리째 사냥하고 있구려..."
"흉수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소?"
"안 그래도 흑옥이 모이면서 술법의 근원지를 알 수 있었소."
"거기가 어디요?"
"서경(西京)으로 가야겠소."
나는 그 말에 흠칫 놀랐다.
' 서경!'
그 곳은 서궁표국주의 말대로라면 봉황이 나타났다는 소문이 있는 곳이었다. 내 표정을 보자 지율 스님이 짐작했는지 말했다.
"시주께서도 2년 전에 봉황의 소문을 들으셨나 보구려."
"지인에게서 들었소."
"예전 일이라서 잘 모르겠지만, 그 당시 서경이 떠들썩했다고 알고 있소. 어쩌면 우리가 찾아가는 술법의 흉수와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겠군."
"흐음."
나는 약간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서경도 시간이 나면 찾아가려는 생각이었는데, 왜 하필 이렇게 딱 관련지어진다는 말인가? 지율 스님의 말대로 상관관계가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자 생각이 들었다.
' 이건 운(運)인가 명(命)인가?'
나는 현재 정해진 길을 벗어나서 내 의지대로 행동하고 있다. 이것은 운에 맡긴 행동이었다. 하지만 내가 가야하는 목적지를 위한 행동이므로 또한 명(命)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미래의 일이라는 건 한치 앞도 알 수 없는 것이다.
나와 지율 스님이 서경에 도착한 건 그로부터 약 20일 후였다. 나 혼자였다면 사나흘 내에 도착했겠지만 적당히 말을 타고 속도를 조정하다보니 시간이 걸린 셈이었다. 도중에 괴물도 좀 때려잡아야 했으므로 경공으로 산만 타고다닐 수는 없었다.
촤르륵
서경의 숙소에 도착한 지율 스님이 큰 탁자에 흑옥을 풀어놓았다. 그러더니 왠 주문(呪文)을 외우기 시작했다.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 불래불거 불일불이 불상부단 비유비무..."
파앗
잠시 후 여러개의 흑옥이 꿈틀거리며 액체처럼 뭉치더니, 거대한 하나의 흑옥으로 변했다. 그 흑옥에서는 강렬한 사기가 뻗쳐나오고 있었다. 지율 스님은 그 흑옥을 지켜보더니 염주로 전면을 때리며 외쳤다.
"갈(喝)! 사악한 자는 모습을 드러내라!"
스으으
그러자 거대흑옥의 전면에 왠 기이한 옷을 입은 여자가 나타났다. 기이한 옷이라고 표현한 것은 내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복색인데, 음양(陰陽)과 팔괘(八掛)를 상징하는 듯한 백의(白衣)를 치렁치렁 두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 자는 뛰어난 미모를 지닌 여성이었는데 가슴이 매우 컸다.
그 영상은 잠시 후 꺼졌다. 흉수의 모습을 확인한 지율 스님이 침음성을 흘렸다.
"동영의 음양사(陰陽師)로군..."
"음양사?"
"저 여자는 음양사라는 술법사로써, 동쪽 동영 땅에서 활동하는 주술사의 계파요. 그 자들은 음양도(陰陽道)라는 자기들만의 고유술법을 사용하지. 허나 여자 음양사가 존재한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건만."
나는 처음 듣는 지식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팔짱을 낀 채 반문했다.
"강합니까?"
지율 스님이 침중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매우 강할 것이오. 흑옥을 통해 느껴지는 술력(術力)이 매우 막강했소. 저 여자 정도면 동영 땅에서도 몇 손가락에 꼽히는 대술법사일 것이오."
"우리 둘이서 해결이 되겠소?"
"힘들지도 모르겠군..."
나는 원래대로라면 그냥 닥치고 쳐들어가서 싸웠을 것이다. 그래봤자 주술사인데 술법을 시전하기 전에 멱을 따면 된다는 생각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도 많이 죽어본 데다가, 이번에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기에 신중해졌다. 나는 고민하다가 말했다.
"위치를 알아내셨습니까?"
"그렇소."
나는 당연한 소리를 했다.
"그러면 십이율 고수와 술법사들을 불러서 같이 갑시다."
"그래야겠지."
지율 스님은 이윽고 서경에 있는 십이율의 문파와 지부에 격문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 내용은 동영 땅의 술법사가 산해경의 괴물을 소환해서 고려 땅을 어지럽히고 있다는 것이었고, 토벌대가 결성되는데는 약 5일이 걸렸다.
토벌대의 인원은 십이율의 무인과 주술사과 나를 합쳐서 총 23명이었다. 토벌대의 대장격이 된 지율 스님이 염주를 높이 치켜들고 외쳤다.
"왜놈을 물리칩시다!!"
"우오오오오!!"
나는 그 모습을 옆에서 바라보며 훗하고 웃었다.
' 나도 가끔은 다구리를 쳐 보고 싶다.'
그래서인지 기분이 좋았다. 맨날 나만 다구리 맞다가 남이 맞는 걸 보면 통쾌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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