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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천향(暗天鄕)
다음 날 나는 새벽부터 나가서 왕실의 제사호위 준비를 했다. 복식도 지급받은 특별한 예복을 입었으며 정갈하게 움직이는 법을 배웠다. 다행히도 제사호위라고는 하지만 그냥 깃발을 들고 정해진 길을 따라 걸어다니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뿌우 -
강한 관악기 소리와 함께 이호(二胡)와 알쟁(軋箏) 소리가 울렸다. 왕실의 종묘를 두고 빙빙 돌다가 정해진 자리에 가서 섰다. 공민왕을 기리는 종묘 제사는 약 한 시진동안 계속되었고, 나는 계속해서 그 자리에 꼼짝도 하지 않고 서 있어야 했다.
"이로써 제(祭)가 완결되었소."
어떤 자가 금관을 두르고 나와서 크게 선언했다.
그리고 행사가 끝나자 모든 왕족과 귀족들이 어디론가 향했다. 제사호위들은 저마다 흩어져서 자신들이 모실 귀족을 따라나서는 모습이었다. 나는 이후에 어떻게 해야할지 들은 바가 있었기에, 일단의 행렬을 따라서 큰 행사장으로 향했다.
그곳은 호화롭게 마련되어 있는 연회장이었다. 서늘하고 맑은 햇빛이 내려쬐는 가운데 온갖 진수성찬이 차려져 있고, 악사(樂士)들이 배치되어서 연주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커다란 식탁이 둘러져 있는 여기저기에서는 귀족들이 도란도란 이야기를 하는 중이었다.
내가 찾아간 것은 정철욱 밑에서 일하는 호위무사 대장이었다. 한창 대오를 정리하던 그는 나를 발견하자 말했다.
"너는 저쪽에 보이는 흰 막사에 들어가서 대기하고 있어라."
"알았소."
완전히는 알아듣지 못했으나 손가락으로 막사를 가리키기에 거의 다 알 수 있는 말이었다. 나는 막사 안에 들어갔는데, 그 곳에는 간단하게 앉아서 쉴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아마 대련이 시작되기 전까지 여기서 쉬고 있으라는 뜻인 듯 했다.
막사 내에는 시비가 한 명 서 있었다. 그녀는 고려말로 뭐라고 말을 하는 듯 했다.
"......?"
내가 그 말을 못 알아듣자, 그 시비는 답답한 듯 여기저기를 둘러보다가 옆에 있던 찻잔을 내게 건네주었다. 아마 차를 마실 것인지 물어본 듯 했다. 나는 고개를 저었고 그제서야 시비는 찻잔을 받아들고 바깥으로 나갔다.
' 이거 정말 불편하군...'
간단한 대화는 몰라도, 조금만 어휘가 어려워지거나 문법이 꼬이면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지난 반 년 동안 열심히 공부했는데도 어려웠다. 아마 몇 년은 고려에서 살아야 제대로 의사소통이 가능할 것이다.
한참 후 호위무사 대장이 막사 안으로 들어왔다.
"대련 시작이다."
"알겠소."
나는 그를 따라서 막사 밖으로 걸어나왔다. 탁 트인 경연장에는 비무대가 따로 설치되어 있었고, 그 크기는 약 이십여 장이었다. 내가 비무대 위에 올라가자, 아래쪽에서 고려말로 뭐라뭐라 하는 게 들렸다. 아마도 이번 비무가 이루어지게 된 배경을 설명하는 듯 했다.
그리고 잠시 후 내 상대자가 앞으로 걸어나왔다.
나는 전날 이주희에게 들었던 내용을 떠올렸다.
' 총 세 판을 겨루는 것이고, 내가 한 판이라도 지면 패배라고 했지.'
어이없을 정도로 불리한 조건이지만 어쩔 수가 없다. 십이율에서 내 실력을 시험하는 상황이라면 불리한 건 당연한 일이다. 내가 상대자를 뚫어져라 관찰하자 상대방은 불쾌한 듯 인상을 찡그렸다.
"*@*@...!!"
그러더니 고려말로 뭐라고 하며 포권을 했다.
상대방은 약 20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외모의 검객(劍客)이었다. 나는 그의 내공력을 유추하고는 속으로 생각했다.
' 상당한 실력자군.'
내가 멀뚱하니 서 있자, 비무대 밑에 있던 통역자가 말했다.
"그는 십이율 호국동맹(護國同盟)의 자륜(磁倫)이라고 합니다. 당신도 자신의 소개를 하시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마주 포권했다.
"나는 정씨 가문의 호위무사인 백웅이라고 합니다."
어눌하긴 하지만 확실한 고려말이었다. 자륜은 내 말을 알아들었는지 고개를 끄덕이고는 검을 뽑아서 내게 겨누었다. 아마 곧 비무가 시작되는 모양이었다.
꽤앵 -
큰 징소리가 울리고, 비무의 시작을 알렸다. 나는 그와 동시에 자륜의 신형이 쏜살같이 앞으로 날아와서 검기(劍氣)를 흩뿌리는 걸 알아챘다. 그 속도는 매우 빠르고 초식도 정확해서 나는 마주 검을 들어서 방어할 수밖에 없었다.
까강!
"으음."
나는 자륜의 검법이 뭔지 잘 몰랐으나 상당히 놀랐다. 일전에 상대했던 해적 두목들과는 천지차이로, 말 그대로 명문의 절정검법을 뛰어난 경지로 연마한 자였다. 내공도 저 나이라고 보기에는 굉장히 높았고 검기를 자연스럽게 발출하는 걸로 봐서는 어지간한 구파일방의 장로급 실력자였다.
카강! 캉!
나는 우선 탐색전이라는 생각으로 가볍게 뇌영검법을 전개해서 자륜의 공격을 막았다. 그러자 내 검에 실려있는 가공할 내공 때문인지, 몇 합 지나지 않아서 자륜은 공격을 멈추고 뒤로 물러났다. 자칫 잘못했다가는 검과 동시에 베여나갈 거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 흠. 저 자는 무공의 수재군.'
나는 속으로 침음성을 흘렸다. 날고기는 자들이 모여있던 한씨세가의 빈객 중에서도 자륜 정도의 검객은 거의 없었다. 기껏해야 기룡신군 정도였다. 외견이 저렇게 젊어보이는데 구파일방의 장로급 실력을 보유한다는 건 어지간한 재능과 실력으로는 힘든 일이었다.
아마 자륜은 절정고수!
고려무림에서 손꼽히는 최고수준의 후기지수이리라.
잠시 기세를 정비한 자륜이 빠르게 움직이며 견제하듯 검기를 날려왔다. 나는 차분하게 다시 방어하기 시작했다.
카가강
하지만 자륜은 내 내공이 생각보다 더 엄청난지 잔뜩 긴장한채 이마에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그럴수밖에 없는 것이 내가 자륜과 검초를 부딪히면서 내공을 잔뜩 불어넣어서 치는 것만으로도 그의 몸은 튕겨서 몇 장이나 날아가게 되어 있었다. 힘에서 압도적으로 우세였으므로 내가 극도로 유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물며 현재의 나는 종남파의 진수 장로와 겨뤘을 때보다 몇 단계는 실력이 진보해있는 상태였다. 자륜의 검 실력으로는 정면충돌을 피하면서 내 헛점을 찔러올 정도가 되지 못했다.
자륜은 결국 더 버티지 못하고 뒤로 날아서 오 장을 피했다.
......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소강상태를 유지하는 이유는 내가 딱히 공격해들어가지 않고, 자륜도 방어적인 태세를 유지하기 때문이었다. 한참을 그렇게 대치하고 있다가 자륜이 별안간 입을 열어서 뭐라고 말했다.
그리고 밑에 있던 통역사가 내게 큰 소리로 그 말을 통역해 주었다.
"자륜이 자신의 최대절기를 펼치겠다고 하오! 이 절기를 받아낼 수 있다면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겠다고 하오."
나는 지체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안 그래도 내공빨로 밀어붙여서 이기는게 모양새가 안 좋을거 같아서 고민하고 있었는데, 저런 제안이면 되려 이쪽에서 고마운 것이다. 내가 검법의 기수식을 잡고 자륜의 공격에 대비하자, 자륜의 전신에서 은빛 기운이 흘러나왔다.
고오오...
은빛 기운은 기의 유형화였다. 원래 자륜의 경지로는 펼칠 수 없는 기술을, 특수한 내공심법으로 강화시켜서 단시간동안 펼쳐내려는 모양이었다. 이윽고 자륜의 검에 맺혀있던 검기가 더욱 강렬해져서 검염(劍炎)을 토해내고, 기세가 폭풍처럼 강렬해졌다.
자륜의 기합이 울려퍼졌다.
"하아아압!"
콰과광
동시에 엄청난 속도로 자륜의 검과 몸뚱이가 일체(一體)가 되어서 돌격해 왔다. 중원무림에서도 시전하는 자가 몇 없다는 신검합일(身劍合一)의 경지였다. 그것도 검염을 휘감고 공격해오는 것이니, 본래라면 어지간한 무인들을 결단낼 수 있는 회심의 필살기이리라. 나는 자륜의 기술을 보자마자 그가 나를 죽여서라도 이길 생각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 안되지 그건!'
여기까지 무슨 고생을 하며 찾아왔던가. 아직 해인을 제대로 찾아보지도 못한 상황에서 죽을 수는 없다. 나는 최대의 집중력을 발휘하다가 자륜의 기술이 발출되는 순간 뇌영보의 비기, 천주살(天柱殺)을 시전했다.
파밧
내 신형이 순식간에 세 개로 분열되었다. 그리고 천주살을 펼침과 동시에 내 몸뚱이가 능란하게 움직이며 자륜의 공격을 흘려내었고, 옷소매가 크게 찢어졌다. 완전히 흘려내지는 못해서 손목에 자상(刺傷)이 남았지만 어쨌든 나는 자륜의 공격을 버티는 데 성공한 것이다.
퍼엉
동시에 내 왼쪽 손이 뇌운장(雷雲掌)을 발출했고, 자륜은 뇌운장에 격중당해서 멀리 날아갔다.
"크아악."
굉장히 힘과 내공을 빼서 쳤는데도 자륜은 입에서 피를 토해냈다. 필살기를 펼친 직후의 빈틈때문에 더 방어가 약해져있었던 탓이었다. 나는 땅바닥을 구르며 괴로워하는 자륜을 보면서 새삼 뇌신류의 사기성을 실감했다.
' 뇌명도 그렇지만 뇌영보 천주살은 정말 대단한 무공이구나. 이것도 호살(豪殺)급 비기가 아닐까?'
심력을 기울인 일류고수나 절정고수의 비기조차도 피해 흘려버릴 수 있는 신법!
뇌신류의 무공이 지닌 극한의 공격력을 보조해주는 필수적인 보법이기도 했다.
"백웅, 승!"
진행자의 외침이 울려퍼졌다.
웅성...
주변에서 보고 있던 고려 귀족들은 웅성거리며 저마다 감탄하는 기색이었다. 나는 그들의 반응이 나쁘지 않은 걸 보고, 경연이라고 하는 의도에 그럭저럭 맞추고 있다는 생각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잠시 후 진행자가 내게 다가와서 말했다. 그는 한어를 구사할 줄 아는 인물이었다.
"미안하지만 당신은 한 식경동안 휴식해 주시오. 다음 대표자를 내보내는데 시간이 걸릴 것 같소."
"알았소."
"저기 흰 막사에 들어가서 대기하시오."
나는 다시 막사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뜻밖의 인물이 기다리고 있었다.
"주희 님?"
"그렇게 부르지 마~ 그냥 주희라고 불러."
"여긴 왠 일이오."
내게 지난 반 년동안 고려말을 가르쳐준 이주희가 생글생글 웃으며 앉아 있었다. 그녀는 키득 웃더니 말했다.
"너 정말 대단하구나. 자륜은 호국동맹 최고의 후기지수인데 그를 꺾다니..."
"이제 겨우 첫번째 대표자를 쓰러뜨렸을 뿐이오."
"아냐. 십이율에서는 자륜으로 끝내버리려는 생각을 한 거였는데? 지금 너한테 휴식시간이 주어진 이유는 당황해서 그런 거야. 설마 네가 자륜을 이길 거라는 생각은 못 한 거지."
"......?"
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 자륜은 저 나이 치고는 대단한 실력자이지만 그렇게 엄청난 자부심을 가질 정도인가?
' 아, 그렇군. 하긴 내 외견이 10대 소년이니까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어.'
하지만 나는 곧 내 인식이 이상한 거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지금껏 줄곧 초절정고수들을 올려다보며 괴물같은 고수들과 싸워오다 보니, 자륜의 실력이 대단치 않게 보이는 것이다. 자륜도 보통 무림인 입장에서 볼 때는 평생 한 번 마주치기도 힘든 대단한 고수였다. 이주희가 말했다.
"음... 누가 나오든 이길 수 있지?"
이주희가 걱정스럽게 질문했다. 나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이길 놈은 이기고 아닌 건 아니오. 그냥 최선을 다 하겠소."
"최선을 다하겠다는 말이 얼마나 비겁한줄 알아? 최선을 다해서 지면 거기서 만족할 수 있는거야?"
투덜거리던 이주희가 내 손을 꽉 잡으며 나를 쳐다보았다.
"기왕 할거면 꼭 이겨! 알겠지?"
"알았소."
이주희 나름대로 나를 격려해주려는 듯 했다. 나는 타국 땅에서 누군가가 나를 걱정해준다는 건 생각도 못해봤기에 묘한 기분이 들었다. 이주희의 얼굴을 볼수록 왠지 정이 드는 기분이었다.
잠시 후 나는 다시 호출을 받고 막사에서 나와서 비무대 위에 올랐다. 내가 비무대 위에 오르자 상대방도 같이 올라왔는데, 이번에는 자륜같은 청년이 아니라 상당히 나이들어보이는 노고수(老高手)였다.
흰 수염이 성성한 60대 외견의 늙은 고수. 그는 창(槍)을 장기로 하는지 한 자루의 창을 거머쥐고 있었다. 그가 자기소개를 하자 밑의 통역자가 말했다.
"두 번째 상대자는 십이율 비류문(沸流門)의 최을용(崔乙鏞)이오."
나는 힐끔 통역자를 보고는 말했다.
"부탁이 있는데."
"응? 뭐요."
"무기를 창으로 바꾸고 싶소. 한번 최을용에게 물어봐 주시오."
통역자는 내가 부탁을 할줄은 몰랐는지 당황한 기색이었다. 그는 최을용에게 가서 말을 전달했는데, 최을용은 거침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그는 내가 어떤 무기를 쓰던간에 상대할 자신을 가지고 나온 듯 했다.
"된다고 하오. 그럼 창을 가져다 주겠소."
타앗
나는 창을 전해받은 후 자세를 잡고 최을용과 마주섰다. 그리고 비무시작을 알리는 징 소리를 기다리며 생각했다.
' 십이율이 이기려고 단단히 작정했나 보군. 이 자는 강하다...'
나는 최을용을 보는 순간부터 알 수 있었다.
명백히 절정을 넘어서는 고수!
하지만 그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아직 짐작이 가지 않는다. 만일 최을용이 초절정급 고수라면 이 자리에서 이기는 건 매우 힘든 일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비교적 약한 검(劍)을 쓰는 것보다는 실전에서 더욱 강력한 창(槍)을 쓰는 게 이치에 맞는 일인 것이다.
최을용 또한 내가 무기를 바꾼 이유를 어느 정도 짐작하는 듯 했다. 그의 눈에는 흥미로워하는 기색이 가득했다.
꽤앵 -
큰 징소리가 2차전의 시작을 알렸다. 그러나 자륜 때와는 달리 최을용은 바로 공격해 들어오지 않았다. 그 대신 뜻밖에도 한어(漢語)를 써서 내게 말을 걸어 왔다.
"중원은 과연 넓은 곳이구나. 너같이 출중한 소년은 내가 태어나서 처음 본다."
"한어를 할 줄 아시오?"
"후후... 젊었을 적에는 중원을 조금 돌아다녔지."
최을용은 빙긋이 웃었다.
"창(槍)을 쓰려는 걸 보니 몹시 자세가 되어있는 아이로군. 그러면 나도 비류문의 문주로써 최선을 다하겠다."
"문주...!! 당신은 십이율의 문주요?"
"그래. 한 판 겨뤄보자꾸나."
우웅 -
최을용이 전투를 시작하려는지 기세를 돋우었다. 아까 자륜이 끌어올렸던 요란한 은색 기운만큼은 아니었지만 잔잔하고 대하(大河)같은 기운이 그의 몸에 감돌았다.
나는 그의 자세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이 몹시 안정되어있는 걸 보자 절로 긴장되어서 침을 꿀꺽 삼켰다. 기세만 요란한 것보다 저렇게 심기체(心技體)가 하나가 되어있는 고수는 엄청나게 무섭다는 걸 경험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 빌어먹을... 진짜 작정을 했군.'
나는 최을용의 무위(武威)가 초절정급이라는 걸 직감하자 속으로 욕지기가 나왔다.
설마 일개 경연의 흥을 돋우는 비무에, 십이율의 문주가 참여하다니!
놈들은 내게 기필코 승리를 거둘 생각인 것이다.
퍼버벙
"크읏."
나는 허공에 몇 차례 폭음이 터지는 걸 급히 피해냈다. 최을용의 창두가 느긋하게 움직이는 것 같았는데 갑작스럽게 내가 서 있던 머리통 부분의 공기가 터져나간 것이다. 나는 그것이 창술의 고급수법인 사(射)와 발(發)을 응용한 것이란 걸 알아챘다. 저 수법을 쓰면 무형의 기운을 쏘아내서 원거리에서 적을 요격할 수 있었다.
위잉
동시에 나는 뇌령팔식의 자세를 잡으며 창날에 란(欄)의 기운을 집중시켰다. 낮은 포복절도세였다. 내 창이 빙빙 돌면서 경계태세를 취하자 최을용은 놀라워했다.
"놀랍군! 설마 그 나이에 창술의 묘(妙)를 깨달았단 말인가?"
마치 뱀이 머리를 들고 적을 경계하듯, 짧은 침묵이 감돌았다.
서로의 약점을 살피는 단계였다.
다음 순간, 나와 최을용의 창극(槍戟)이 교차하며 격돌했다. 내 창은 외전(外轉)의 회전을 뿜어내며 일대의 공기를 통째로 찢어버렸고, 최을용은 빠르게 내 공격을 피하면서 되려 찰(刹)으로 내 전신요혈을 공격해 왔다. 나는 그가 내공싸움을 피하면서도 적절하게 내 약점을 공략해오는 기술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콰앙
내가 창을 흔들면서 최을용의 공격을 거두어냈지만 최을용의 공격은 면면부절 끊기지 않았다. 갑작스럽게 회천(回天)의 묘(妙)가 발동하면서 허공에서 몇 번이나 꺾어져서 나를 공격하는 무형의 기세가 쏟아졌다. 나는 내공싸움으로 끌고 갈 엄두도 내지 못하고 창을 풍차처럼 휘두르며 뒤로 물러났다.
까강! 깡! 까강!
최을용은 내가 원형으로 간격을 만들고 헛점을 유도하는 시도에 말려들지 않았다. 그는 차분하게 찰(刹)의 자세를 잡으며 연속으로 열 번이나 찌르기를 반복했다. 백광(白光)을 뿜어내는 연속찌르기는 모골이 송연해질 정도로 무서웠다. 나는 숨이 턱턱 막히는 걸 느끼면서 연속해서 뒤로 물러났다.
타닷
나는 결국 견디지 못하고 뇌영보를 시전해서 휘돌듯 연무장을 뛰었다. 환영이 스쳐지나가며 최을용의 눈을 현혹했으나, 그는 마치 심안(心眼)이 달린 듯 피식 웃고는 내 진짜 위치로 소나기같은 공격을 감행했다.
카앙!
나는 순간적으로 그의 창에 응축된 기운 때문에 튕겨져서 일 장을 날아갔다. 놀라운 일이지만 그 또한 기술을 응축해서 내공차이를 무시하는 무공의 초고급수법을 알고 있는 것이다. 나는 땅에 착지하면서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 역시 초절정... 정상적으로 싸우면 이기지 못해.'
최을용이 이형환위나 강기를 쓸 수 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아마 못 쓰리라고 생각한다. 이광과 겨룰 때 늘 생각했던 거지만, 강기가 나오기 시작하면 내가 이길 방법이 없었다.
아마 최을용은 초절정의 초입 단계의 고수일 것이다. 다만 그것만으로도 기술이나 온갖 전체적인 실력에서 큰 차이가 나기 때문에, 내공으로는 버티기밖에 할 수 없는 것이었다. 나는 뜻밖에 이런 고수를 마주칠 줄 몰랐기 때문에 잔뜩 쪼들리는 심정이었는데, 뜻밖인 건 상대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최을용은 창극을 늘어뜨리며 침중한 안색으로 말했다.
"우리는 우물 안 개구리였구나... 중원에 너같은 후기지수가 있다면, 우리 십이율은 머지않아 중원무림에 밟히고 말 것이다. 오늘 정말 큰 공부를 하는구나."
"......"
물론 그런 건 아니다. 나같은 놈이 중원무림에 그렇게 많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일부러 그의 착각을 바로잡아줄 필요도 느끼지 못한다.
대신에 나는 창을 꽉 움켜잡고 말했다.
"어쨌든 끝까지 해 봅시다! 그게 무인의 자세가 아니오?"
"좋지!"
그리고 격돌이 이어졌다.
나는 이후 약 사백 초 남짓 버티면서 온갖 재간을 다 썼다. 이광에게 배운 창술을 오늘 다 써먹어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나 본질적인 실력차이는 어쩔 수 없었기에, 결국 그의 공격을 막지 못하고 헛점을 노출해서 쓰러지고 말았다.
싸늘한 창극이 목젖에 느껴졌다.
진행자의 외침이 들려왔다.
"최을용, 승!"
나는 내심 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일 뇌명을 썼다면 승기(勝機)를 잡을 수도 있었을텐데, 뇌명은 결전오의라서 함부로 노출하지 말라는 이광의 명이 아직도 뇌에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뇌영보 천주살이나 창술 정도는 노출해도 별 상관이 없으나 뇌명은 이야기가 달랐다.
이광이 펼치면 반드시 목격자를 다 죽이라고 한 것은, 뇌명의 호흡이 독특해서 잘못하면 흐름을 읽히고 파해식이 나타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적진이나 다름없는 이 고려에서, 하물며 다 보고 있는 경연장의 비무대에서 뇌명을 쓸 수는 없었다.
' 후... 내일부터는 정씨 가문에서 괄시를 받으며 살겠군.'
내가 씁쓸해하며 자리에서 일어설때 최을용이 내게 말했다.
"정말 훌륭한 실력이야. 자네 스승이 누군가?"
"밝힐 수 없습니다."
"흐흠... 자네의 스승은 창술에 있어서 제일가는 명인(名人)일 거 같군. 나중에라도 알려주길 기대하겠네."
"......"
"이번에 우리 십이율이 시비를 건 것은 사과하겠네. 두 번 다시 자네를 귀찮게 할 일은 없을 것일세."
최을용이 한 마디를 남기고 비무대에서 내려갔다. 나는 그의 사과를 받자 내심 한 고비를 넘겼다는 생각이 들었다. 삼회전을 다 이기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앞으로 십이율에게서 함부로 시비털릴 일은 적어질 것 같았다.
그 날의 잔치가 끝난 후 나는 정씨 가문으로 돌아와서 정철욱의 호출에 응했다.
아쉬운 소리나 호통을 칠 거라는 내 예상과는 달리 정철욱은 놀라워하며 의자에서 일어나서 내 손을 맞잡았다.
"자네의 신위(神威)를 직접 보니 놀랍군!"
"... 네?"
"십이율 문주를 상대로 그런 접전을 펼치다니, 이미 개경에는 화제가 되었다네. 하하... 정말 만족스러운 비무였어."
"저는 져 버렸습니다만..."
그러자 정철욱이 껄껄 웃었다.
"으하하, 십이율 문주들이 하나같이 초절정에 들어간 괴물들이란 걸 누가 모르는가? 되려 귀족들 중에는 자네같은 소년을 상대로 문주가 나오는 걸 치졸하다고 한 사람도 많았네. 자네는 충분히 자네 역할을 다한 게야."
"음."
"앞으로도 잘 부탁하겠네! 내 자네를 중히 쓰지."
정철욱의 말은 사실이었다.
이후로도 정씨가문에서 나를 괄시하기는 커녕 융숭한 대접을 하기 시작한데다, 나를 대하는 호위무사들의 대우도 틀려졌다. 지금까지 그저 외국인 취급을 하던 호위무사 대장도 내게 간간히 어설픈 한어로 인삿말을 걸어오고 농담을 하는 것이었다. 그건 나를 인정하고 친해지려고 하는 태도였다.
그들의 태도변화를 보면, 이 고려에 있어서 십이율이라는 무문(武門)은 굉장한 의미를 갖고있는 듯 했다.
' 역시 피할 수 없는 일이라면 최선을 다하다보면 좋은 결과가 나오는구나.'
나는 계속해서 이주희에게 말과 글을 배우며 생각했다.
이 기세를 살려서, 조만간 휴가를 얻게 되면 꼭 해인사에 가 봐야한다. 그리고 거기서 해인의 단서를 찾게 되면 반드시 앞으로의 행보도 수월해질 거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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