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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검신-83화 (83/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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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천향(暗天鄕)

개경 최대의 세도가인 정씨 가문의 유력자를 보게 된 것은 사흘 후였다. 나는 정씨 가문의 별채로 안내되어서 가만히 앉아 있었다. 고려의 건물양식은 중원과 많이 달랐고 사람들의 복색이나 행동도 많이 달라보여서 그 동안 신기하게 이것저것 구경하고 다녔다. 내가 가만히 앉아있자 한 장년인이 실내로 들어왔다.

"손님을 기다리게 했군."

나는 일어서서 포권했다.

"저는 백웅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만나뵙게 되어서 반갑습니다."

중원말을 알아들었을까?

조심스러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자, 강인한 인상의 장년인이 말했다.

"편하게 앉으시오. 나는 정철욱(鄭鐵旭)이라는 사람이오."

"네."

그가 하는 것은 유창한 한어(漢語)였다. 따로 통역관이 들어올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그는 한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줄 아는 듯 했다. 정철욱은 의자에 앉으면서 말했다.

"소협은 이 개경에 귀화하고 싶다는 말이오?"

"그렇습니다. 고려인이 되어서 살고싶습니다."

"흐음 별일이군... 중원인들은 자부심이 강해서 왠만하면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데."

정철욱은 진심으로 놀라는 듯 했다. 그도 그럴것이 중화(中華)는 세계의 중심이라는 인식이 보통이었고 이런 변방의 소국까지 와서 굳이 살겠다는 게 이해가 안될 수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외의 별다른 소리는 하지 않은 채 정철욱이 말을 이었다.

"소협은 뛰어난 무공을 지닌 무림인(武林人)이라고 들었는데 어느 정도의 무예를 지니고 있소?"

"호신(護身)을 할 정도는 됩니다."

나는 이런 자리에서 일류니 절정이니 하면서 무공내력을 시시콜콜 밝히는게 바보짓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런 태도는 무림인이 아닌 상대에게는 감점요인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정철욱이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하하, 겸양하지 않아도 되오. 사실 대룡상회주에게 얼추 들었으니까."

껄껄 웃던 정철욱이 말했다.

"혈도단을 혼자 힘으로 물리쳤다는 이야기도 들었소. 그 말이 사실이라면 소협의 실력은 개경의 내로라하는 뛰어난 무인들에 못지 않다는 말이구려. 나는 그 일화에 감명을 받아서 굳이 소협을 만나보기로 한 것이오."

"부족함이 많습니다."

"흐음... 귀화는 아무 문제가 없소. 정착비나 수고비는 대룡상회주가 모두 내어주기로 했으니. 헌데 나는 소협에게 하나 제안하고 싶군."

"어떤 제안입니까?"

정철욱이 따뜻한 차를 따랐다. 잠시 차의 향을 음미하던 정철욱이 말했다.

"우리 정씨 가문의 호위무사가 되는 것이오. 덤으로 별좌(瞥座)라고 하는 무관직(武官職)도 백웅 소협에게 줄 수 있지. 앞으로 고려에서 살 생각이라면 이건 나쁘지 않은 제안이라고 생각하오."

"......"

나는 예상했던 제안이 나오자 침묵했다.

' 역시 이런 속셈이었군.'

대룡상회주가 괜히 개경의 유력귀족에게 연결해줄 리가 없었다. 나를 정씨가문의 수하에 꽂아넣고, 필요할 때 자신의 인맥이나 연줄으로 쓰려는 행위인 것이다. 그리고 정씨가문 입장에서도 혈도단을 단신으로 물리쳤다는 소년무인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이미 그들 사이에서는 이야기가 다 되어있는 것이다.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혹시 그 별좌라는 무관직이 되면, 제가 원할 때 고려 땅을 돌아다니는 게 가능합니까?"

"하하... 물론이오. 소협이 이 고려땅 유람에 관심이 많다는 이야기도 들었소. 정 그렇다면 내가 특별히 소협에게 유람을 떠날 기회를 많이 제공하도록 하겠소. 원한다면 저 멀리 탐라도(耽羅島)도 느긋하게 여행할 시간이 생길 거요."

이렇게까지 나온다면 거절할 이유가 없다. 아니, 거절하면 되려 앞으로의 탐색이 더 힘들 것이다. 그래서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승낙했다.

"받아들이겠습니다."

"잘 됐군! 그럼 소협은 오늘부터 우리 가문의 무인인 것이오. 나중에 별좌의 호패도 따로 지급해줄 테니 걱정 마시오."

"헌데 저는 고려말을 잘 하지 못합니다. 이곳의 말과 글을 배울 방법이 없겠습니까?"

"내가 소협에게 스승을 따로 붙여 드리리다. 석 달포 정도면 간단한 의사소통은 문제가 없을 것이오."

나는 일이 너무 잘 풀리자 되려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 이상하다. 이번 생에는 서왕모의 축복을 받았을 뿐 태허천존의 대운(大運)을 얻지 못했는데 어째서 이렇게 잘 풀리지?'

내가 불안한 표정을 짓자 정철욱이 고개를 갸웃했다.

"소협 왜 그러시오?"

"아, 너무 일이 잘 풀린다고 생각해서 그렇습니다."

"잘 풀린다라, 하하! 하긴 십이율 무인들도 우리 가문의 호위로 들어오고 싶어서 애를 쓰는데 소협의 운이 트이긴 했군."

나는 넌지시 지나가듯 이야기를 꼬아서 털어놓았다.

"사실 어떤 점쟁이가 말했습니다. 요 근래 십 년간 제 운은 딱히 좋지도 나쁘지도 않다고. 길흉화복에서 길(吉)이 따로 강하다는 소리도 못 들었는데 일이 너무 순탄하게 풀려서 불안할 정도군요."

"흐음..."

정철욱은 재밌는 얘기라고 생각했는지 차를 마시며 생각하는 모습이었다. 잠시 후 그가 말했다.

"그러면 그것은 운(運)이 아니라 명(命)인 것이오."

"그게 무엇입니까?"

"나도 사주학을 왠만큼 공부해서 알고있는 바가 있지."

정철욱이 의자를 고쳐앉으며 말을 이었다.

"운이라고 하는 건 인간의 의지와는 관계없는 부분에서도 행불행(幸不幸)을 좌우하는 초자연적인 요소라고 볼 수 있소. 그래서 인간의 사주팔자를 보는 사주학에서는 운(運)과 명(命)을 구분하곤 하오. 운이라고 하는 건 거스를 수 없는 것이지만 명이란 인간의 선택에 의해 도달하게 되는 '과정'인 것이오."

"과정이라고요?"

"업(業)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 원인에서 행위로, 행위에서 결과로, 그리고 그 결과가 원인이 되어 행위를 이끈다. 우리의 선택은 연속되어 있는 것이고, 사람의 업에는 회피할 수 없는 책임이 항상 행위에 따르는 것이오."

"......"

"하하, 너무 어렵게 말했나? 요약하자면 이런 거요."

정철욱은 찻잔을 비우고는 말했다.

"소협이 그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제멋대로 행불행이 튀어나오는 것이 운이라고 하면, 명이라는 건 소협이 '올바른 선택'을 했기에 '올바른 결과'가 나타난다는 의미인 것이오. 거대한 필연(必然)이 사소한 우연을 인간의 의지로 벗어나게끔 하는 것이지."

"......!!"

"소협이 그간 어떤 일을 겪어왔는지는 모르지만, 크게 판단을 그르치지 않았다면 왠만큼 나쁜 일은 생기지 않았을 것이오. 그것이 소협에게는 커다란 행운으로 느껴지는 것이고."

"그, 그렇군요."

나는 그런 식으로 생각해본 적은 없었지만 알 것 같았다.

올바른 선택에 올바른 결과가 나타난다!

' 그렇구나. 태허천존의 대운(大運)은 내 선택에 상관없이 강렬한 행운을 이끌어주는 복(福)이었지만, 이번 생(生)에서는 틀린 선택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옳은 결과를 얻었을 뿐인 거야!'

태허천존의 대운을 받았을 때 나는 열 번 죽고도 모자랄만큼 어리석은 판단을 연발했다. 그럼에도 살아남고 덤으로 이득을 얻었으니, 이걸 대운이라고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번 생에서는 단순히 판단을 옳게 했기 때문에 그에 맞는 댓가를 얻었을 뿐이었다. 이건 운이라고 하기보다는 원인과 결과에 가까웠다.

동시에 내가 아직까지 안정적인 삶에 들어오지 못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그 말대로라면 내가 한 순간이라도 판단을 그르치는 순간, 난데없이 돌연사(突然死)하게 되리라는 걸 알게 된 것이다.

나는 정철욱과 이후 호위무사의 일, 근무시간, 행해야 할 예절이나 의무등을 교육받고 숙소로 돌아왔다. 아마 내일 아침부터는 정씨가문 내의 별채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지낼 듯 했다.

그리고 대룡상회주와 마지막 인사를 했다.

"좋은 자리를 주셔서 감사하오."

"하하, 소협에게 받은 도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요. 소협이 아니었다면 나는 지금쯤 해적들에게 살해당하거나 노예가 되어있었을 텐데."

대룡상회주가 웃더니 말했다.

"우리의 귀환길은 걱정 마시오. 고려 측에서 선단을 내주어서, 군선 두 척이 호위하고 십이율의 고수들이 함께 타기로 했소. 지난번처럼 습격해 와도 섣불리 지지는 않을테니."

"그거 다행이군."

나는 문득 생각난 게 있어서 그에게 질문했다.

"혹시 동방의 해인(海印)이라는 걸 들어보신 적이 있소?"

"해인...?"

"사실 나는 그걸 찾으러 고려 땅까지 왔소."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어차피 내일이면 헤어지는데다가 대룡상회주와는 상당한 신뢰가 쌓였다고 느끼기 때문이었다. 산동에서도 손꼽히는 거대상회를 운영하는 자라면 남다른 정보를 갖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그러자 대룡상회주가 뭔가 떠오른 듯 손가락을 마주치며 말했다.

"그런 이름의 절이 고려에 있다고 알고 있소."

"절(寺)?"

"내 기억으로는 합천(陜川)이라는 땅에 있다고 알고 있는데, 거기는 매우 큰 절이라고 알고 있소. 해인사(海印寺)라고 하던 것 같군."

"......!! 고맙소!"

나는 굉장히 좋은 단서를 얻었다는 걸 알아차렸다. 이 정보를 고려 내에서 알아내려 했다면 또 한세월 고생해야 했을 것이다. 나는 정씨 가문의 호위무사로 일하면서, 고려를 돌아다니는 동안에 해인사에 반드시 들러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다음으로는 서궁표국주와 인사를 했다. 그 또한 내게 감사인사를 하더니 말했다.

"소협이 언젠가 중원에 돌아온다면 내 반드시 소협에게 보답을 하겠소."

"고맙소."

"음, 그리고 정보라고 하긴 뭣한데 내가 얼마 전에 재밌는 얘기를 들었소."

"어떤 얘기 말이오?"

서궁표국주가 다른 곳에서 듣고있지 않나 눈치를 보다가 속닥였다.

"얼마 전, 고려의 서경(西京)이라고 하는 곳에 봉황(鳳凰)이 나타났다는 소문이었소. 나랑 친한 십이율의 고수가 말해준 거였지."

"봉황?"

"그냥 뜬소문이오. 하지만 소협의 목적이 고려 유람이라면 한번 알아볼만 하겠지."

나는 서궁표국주를 송별하고서는 생각에 잠겼다.

' 서경의 봉황?'

이건 정말 생각지도 못했던 이야기였다.

봉황!

그것은 용(龍)에 버금가는 전설상의 생물로써 벼슬과 긴 꼬리깃을 달고 있는 아름다운 새였다. 단순히 새라기 보다는 신수(神獸)로써 황후(皇候)의 상징으로 쓰이기도 했다. 특히 도교의 신전에서는 왠만한 신선을 능가하는 영통력을 지니고 있다고 알려져 있는 것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냥 허구라고 일축하겠지만, 온갖 신(神)이나 마물의 힘을 직접 보고 느껴왔던 나로써는 가볍게 지나칠 수 없는 일이었다. 만에 하나 봉황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엄청난 일인 것이다.

나는 해인사를 방문한 후 서경에 가기로 마음먹은 후 잠들었다.

다음 날부터 내 정씨가문에서의 호위무사 생활이 시작되었다. 호위무사 생활이라고 해도 지금 당장은 내가 고려말을 전혀 몰랐으므로, 왠 흰 옷의 소녀(少女)가 별채로 찾아와서 내게 말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소녀의 외모는 약 10대 후반으로써 내 외견보다 많아 보였다. 외모는 단아하다는 평이 어울리며 키가 꽤 큰 소녀였는데, 확실히 주변에서 미녀라고 부를 정도의 외관이었다. 절세미녀라고 부를 정도는 아니었으나 많은 남정네들의 방심을 흔들 것 같았다. 그녀는 나와 첫 대면한 자리에서 까르르 웃었다.

"안녕! 나는 이주희(李周姬)라고 해. 앞으로 고려말과 글을 가르쳐 줄게!"

유창한 한어였다. 아마 어린나이와 달리 통역의 재능이 뛰어난 소녀인 듯 했다. 나는 대번에 반말을 쓰는 게 어이없었지만, 내 외견이 그녀보다 훨씬 어린데다가 별로 나쁜 기분도 아니었기에 침묵했다. 그녀는 왠지 나를 귀여워하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얘 너 무술도 잘한다면서? 정말이니?"

"그렇소."

"그럼 가끔 나도 무술 가르쳐줘~ 응?"

"아, 알겠소."

"자자 그럼 열심히 말과 글을 배워보자~ 꺄하하."

이주희는 발랄하게 웃더니, 이내 집중해서 내게 말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시작할 때의 광기발랄한 태도와는 달리 가르칠 때는 진지하고 열성적으로 가르치는 모습이었다. 나는 발음부터 시작해서 고려의 말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의외로 크게 어렵지는 않았다. 척박한 내 재능 중에서도 어학재능은 그리 나쁘지 않은 듯 했다.

"자자 집중해!"

"알았소."

"아 그리고 하는 김에 무술 가르쳐 줘, 꼭."

"......"

농담이 아니었단 말인가?

이주희는 매일같이 찾아오면서 때때로 남는 시간에 내게 무술을 전수받기를 원했다.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었기에, 나는 현천신공(玄天神功)의 진기도인법과 간단한 검술의 기초를 가르쳐 주었다. 어차피 현천신공은 정종신공이라서 다른 내공심법과 굉장히 잘 융화되어서 부담도 없는데다, 이주희에게 빚을 지는 느낌이라서 갚아주고 싶었던 것이다.

일단 내게 말부터 제대로 가르쳐놓을 생각인지 정철욱을 비롯해서 나머지 정씨 가문 사람들이나 무인들은 내게 따로 호위무사 일을 나오라고 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 덕에 나는 약 5달동안 계속 틀어박혀서 이주희에게서 고려 말과 글을 배울 수 있었고, 반 년이 지날 때쯤에는 어눌하게나마 고려 사람들과 간단한 의사소통이 가능한 수준이 되었다.

그리고 이주희는 의외로 무술재능이 뛰어난지, 이 반 년 동안에 틈틈히 검술을 전수받으면서 굉장히 빠르게 진보했다. 처음에는 그저 뇌영검법의 몇 초식을 가르쳐준 것 뿐이었는데 순식간에 모든 초식을 다 가르쳐주게 된 것이다. 아마 제대로 된 검술스승이 붙는다면 십 년 내에 상당한 무술실력을 자랑하게 될 것이다.

그 때가 되자 왠 중년 무인이 내게 찾아와서 말했다.

"이제 말을 좀 할 줄 안다면서? 그러면 내일 아침에 평치전(平致殿)으로 와라."

대충 알아들을 수 있었다.

반 년동안 말과 글을 맹훈련한 결과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반문했다.

"무슨, 일을, 하는 것이오?"

"와보면 안다. 주희 님이 따라오실테니 넌 얌전히 듣고 있어라."

"알겠소."

주희 님?

나는 그가 존대를 하는 게 의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중년 무인에게서 흐르는 기도(氣道)는 왠만한 절정고수 수준이었고, 그 실력에 걸맞게 정씨 가문 호위무인들의 대장 노릇을 하고 있었다. 아마 십이율 출신의 무인일텐데 저정도 실력자가 이주희같은 어린 여자애에게 존대를 하는 게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다음 날 이주희와 함께 가면서 놀라게 되었다. 이주희는 지금까지의 평범한 흰색 옷이 아니라 고운 명주비단옷을 입고 따라나섰다. 그것은 그녀 또한 이 고려에서 상당한 지위를 차지하는 귀족(貴族)이라는 사실을 의미했다.

"헤헤, 놀랐어?"

이주희가 귀엽게 웃자 내가 반문했다.

"귀족이셨소?"

"응. 이씨 가문은 정씨 가문과 동업자(同業者) 역할이거든. 두 가문의 가주가 의형제를 맺고 있어서, 나도 철욱 아저씨네 집에서 지내고 있어."

"이씨 가문이라..."

"그냥 하던대로 해~ 꺄하하."

나는 이주희와 함께 곧 평치전으로 들어갔다. 평치전에 들어가자 정철욱이 태사의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고, 좌우에는 정씨 가문의 호위무인들이 도열해 있었다.

"@&&*#&*@@...."

그 분위기에서 정철욱이 고려말로 내게 뭐라고 말했다. 물론 나는 고려말을 잘 하지 못했으므로 그 말을 거의 알아듣지 못했다.

' 응? 한어를 잘 할 텐데 왜 굳이 고려말을...'

내가 의아해하고 있을 때 옆에 서 있던 이주희가 통역해 주었다.

"내일 공민왕(恭愍王)을 기리는 왕실(王實)의 제사가 있을 텐데 네가 그 제사의 호위로 참석할 거라고 하셨어."

내가 힐끔 정철욱을 쳐다보자 그가 또다시 뭐라고 말했고, 이주희가 통역했다.

"그 자리에서 네가 고려의 무인(武人)들과 무술을 겨루게 될테니 품위있는 경연을 부탁한다고 하시네."

"......?!"

이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

내가 당황했지만 이 자리에서 뭐라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우르르

그리고 자리가 파하고, 호위무사들이 평치전 밖으로 나가자 그제서야 정철욱이 안색을 풀며 내게 말했다. 이번에는 내가 알아들을 수 있게 한어를 구사했다.

"백웅 미안하군. 아랫것들 앞에서 내가 한어를 써서는 위엄이 서지 않았네."

"아닙니다 편히 얘기하십시오."

"앞서 설명한 대로일세. 내일 공민왕을 기리는 왕실의 제사가 있고, 자네는 그 호위대열에 참여하게 될 것이야. 그리고 제사가 끝난 후 왕족과 귀족들이 모여서 뒤풀이 잔치를 벌이는데, 자네는 그 자리에서 고려의 무인과 겨루어서 흥을 돋우어 줘야겠어."

"......"

즉 내가 고려 귀족들의 술안주거리로 무술을 보여줘야 한다는 건가?

내가 기가 막혀서 입을 벌리고 있자 정철욱이 씁쓸하게 말했다.

"미안하지만 어쩔 수가 없어. 이번 일은 십이율(十二律)의 문주들이 내게 강력하게 주청한 일이라서."

"십이율이요?"

"그들은 중원에서 온 절정고수인 자네를 그리 좋게 보고 있지 않아. 자네를 첩자라고 의심하는 자들도 있지. 그래서 자네의 실력을 부득불 확인해야겠다면서 제사 후의 축연을 빌미로 자네와 겨루고자 하네."

"정철욱 님은 고려의 최대권력자 반열로 알고 있는데 무림의 힘이 그리 강합니까?"

정철욱이 껄껄 웃었다.

"하하! 당연히 아니지. 나는 자네의 실력을 믿기 때문에 그들의 청에 응한 것이야. 십이율의 고수가 나서더라도 내 호위무사에 당해내지 못한다면, 실로 유쾌한 일이 아닌가? 자네가 충분히 해내리라고 믿네."

"......"

나는 일이 어떻게 된 것인지 깨달았다.

' 말은 저렇게 하지만 정철욱도 내 실력을 검증하고 싶어하는군.'

나를 믿는다고 하지만 실상은 전혀 믿지 못하기 때문에 십이율의 대련신청을 받아들인 것이다. 그로써는 손해될 게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내가 이기면 좋고, 진다면 내 실력이 별것 아닌 것이니 앞으로 정씨 가문에서 천대될 것이다. 나는 곰곰히 생각하다가 별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래야지."

정철욱의 말에 따르면 이것도 운(運)이 아니라 명(命)이다.

내가 옳은 결과를 낼 수 있는 힘이 있다면, 결국 좋은 결과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 마침 잘 됐어.'

모의대련이라면 죽을 일은 없을 것이다.

나는 내 눈으로 고려의 무림단체라는 십이율의 실력을 확인할 기회가 생긴 셈이었다.

============================ 작품 후기 ============================

공양왕 -> 공민왕 으로 수정했습니다

그 외 성조항목 수정... 제가 지식이 얕았습니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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