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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검신-82화 (82/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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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천향(暗天鄕)

쓔칵

나는 정신없이 검을 휘두르면서 해적들을 베어넘겼다. 잡졸들의 무공은 변변치 않은지 대개 한 합에 목숨을 끊을 수 있었다. 그렇게 약 20여명을 베어버리자 안되겠다고 생각했는지, 배로 넘어오던 해적들이 다시 도망가기 시작했다. 해적들의 배는 충선을 하고도 매우 빠르게 뒤로 가버리는 듯 했다.

배 위의 교전은 은근히 싱겁게 끝났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이 나를 보며 환호하는 소리가 들렸다.

"오오오!!"

"고맙습니다 소협!!"

다들 악전고투를 하는 동안에 나 혼자만 양떼속을 누비듯이 학살을 했기 때문이리라. 실질적으로 나 혼자서 물리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나는 배 위의 사상자를 살폈다. 한두 명이 죽고 부상당한 자가 10여명이었다. 짧은 교전이었는데 이 정도의 피해가 난 걸로 보아 해적들의 칼부림 솜씨가 상당해 보였다. 나야 해적과 비교될 무공이 아니니 학살을 했으나 일반적인 표사나 표위 수준에서는 감당하기 힘들어보였다.

옆에 있던 서궁표국주가 다가와서 말했다.

"소협. 저 자들이 화시(火矢)를 날릴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안 되겠소?"

서궁표국주의 말대로 해적선단은 빙빙 이 근처를 돌면서 공격할 틈을 노리는 것 같았다. 서궁표국주는 경험으로 해적들이 화살을 날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는 듯 했다.

"저 놈들이 노리는 건 교역품이 아닙니까? 배에 불을 붙이는 무리수를 둘까요?"

내가 반문하자 대룡상회주가 고개를 저었다.

"소협의 무공이 고강해서 육박전으로 점거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면, 우선 침몰시켜놓고 사람만 주워서 노예로 팔려는 생각을 할 수도 있소. 혹은 이대로 우리를 따라다니면서 공격할 기회를 엿볼지도 모르오."

"으음."

"화시만 봉쇄할 수 있으면 나머지는 어떻게든 될 것 같은데, 소협의 무공으로 어떻게 방법이 없겠소?"

대룡상회주와 서궁표국주는 몸이 달아있는 듯 했다. 그도 그럴것이 저 혈도단의 해적규모는 당초 그들이 생각하던 수준을 넘어선 듯 했다. 큰 해적선이 세 척이나 있는 경우는 보기드물기 때문이다. 더욱이 혈도단은 20여명이나 죽었는데도 아직 여력이 많이 남은 듯 했다.

나는 해적선을 노려보며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는 말했다.

"거리가 너무 멀어서 당장은 무리요. 다시 놈들 쪽에서 화살을 날릴 거리로 근접해 온다면 놈들의 배로 건너가서 화시를 막아 보겠소."

"화살을 날린다고 해도 오십 장은 될텐데 그게 되겠소?"

"작은 배를 준비해 주시오. 조금만 거리를 줄이면 될지도."

"알았소!"

나는 이윽고 비상용으로 준비된 통통배에 끈을 묶어서 대기했다. 옆에 노를 저을 표위가 두 명 붙었다. 그들은 숙련된 표위 같았지만 바싹 긴장해있는 상태였다. 표위들이 말했다.

"소협만 믿습니다."

"저 혈도단은 황해에서 가장 크고 악랄한 놈들입니다. 부디 이 자리만 벗어날 수 있기를...."

나는 씩하고 웃었다.

"걱정 마시오. 이런 일은 아무것도 아니니까."

"오오..."

표위들은 기가 질린 표정을 지었다. 하긴 외견상 10대의 소년이 해적들과 피칠갑을 하면서 싸우면서 안색하나 안 바뀌고 있으니 괴물을 보는 표정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마물이나 괴물들과도 숱하게 싸워온 나로써는 인간해적같은 건 그냥 지나가는 잡스러운 적에 불과했다.

"온다!"

그 때였다. 혈도단의 배 중에서 가장 큰 배가 이쪽으로 쑥하고 다가왔다. 배의 전면 갑판에 활을 들고 있는 궁사 해적들이 배치되어 있는걸로 봐서는, 아마 표국주의 예상대로 화살을 쏘려는 모양이었다. 나는 안력을 돋우어서 놈들의 모습을 자세히 살폈는데, 화살은 그냥 철화살이었고 따로 기름을 먹인 화시를 장비한 것 같지는 않았다.

' 화시가 아니군.'

나는 그 모습에서, 해적들이 상단 배 옆을 빙빙 돌면서 화살으로 갑판 위의 적을 정리하는 작전이라는 걸 알아챘다. 역시 놈들도 교역품에 욕심이 강하기에 우선은 사람 수를 줄여놓고 나를 다구리쳐서 제압할 생각인 것이다.

"갑니다!"

쏴아아

칼로 밧줄을 끊은 표위들이 부지런히 노를 저어서 파도를 헤치고 앞으로 가기 시작했다. 나는 검 대신 창으로 바꿔들어서 전면을 응시했다. 앞서 오던 해적선이 통통배를 발견하자 이 쪽으로도 화살이 쌩하고 날아들기 시작했다.

타타탕

나는 길이가 긴 창이 훨씬 수월하게 원거리 무기를 걷어낸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빠르게 뇌령팔식의 방어식을 운용해서 나와 표사들에게 향하는 화살을 쳐 냈다. 표위들은 노를 젓는 와중에도 화살이 하나도 닿지 않자 놀라워하는 기색이었다.

나는 힐끔 물의 빛깔을 살폈다. 수면의 색을 이용하면 해상에서 상대방과의 거리를 쉽게 잴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대략 삼십 장을 넘어서 이십 장 거리까지 접근하자 나는 해면 위로 뛰어들었다.

뇌명(雷鳴)의 호흡을 발동하자 순식간에 내공이 극단적으로 활성화되었다. 나는 한 번에 이십 장 씩이나 뛰어서 배 위에 오를 정도의 경공술은 가지고 있지 않았으나, 약 십여 장쯤 뛴 시점에서 해면(海面)에 다리를 박찼다.

투웅!

내 몸은 바다에 빠지지 않고 큰 물보라를 일으키며 허공으로 치솟아 올랐다. 나는 아직 등평도수의 경공을 발휘할 수 없지만, 발에 뇌령지기를 모아서 반탄력을 끌어올리자 해면을 튀어오르는 일은 가능한 것이다. 내 몸이 해적선 갑판 위로 오르자 한순간에 시선이 이쪽으로 향했다.

나는 지체없이 창을 휘둘러서 삼 장 내에 있던 해적 궁사들을 도륙냈다. 창날의 회전이 스치고 지나가자 인간의 육체가 찢겨나갔다.

"아아악!"

"으악!"

나는 격전을 치르기 직전에 표위들의 모습을 살폈다. 그들은 이미 통통배를 돌려서 바쁘게 돌아가는 듯 했다. 내가 배 위를 빠르게 정리하면 그들의 목숨도 안전해진다는 생각이 들어서 나는 사자후를 내질렀다.

[ 네놈들은 죽은 목숨이다!!]

"으아아악..."

쩌렁쩌렁하고 거대한 사자후가 터지자, 갑판에 있던 해적들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하나도 봐주지 않고 내공을 전력으로 실어버린 바람에, 해적들의 고막이 터져서 귀에서 피가 줄줄 새어흘렀다. 다소 무자비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해적들이 얼마나 잔인한 존재인지 들었기에 그런 생각을 일단 접어두었다.

해적궁사들이 순식간에 무력화되고 갑판이 제압되자, 나머지 해적들은 당황하는 듯 했다. 그리고 선두의 해적선의 소요가 영향을 미쳤는지 다른 해적선도 주춤하는 모습이었다. 나는 더 죽일 놈이 없는지 갑판 위를 둘러보았는데, 배 안쪽에서 왠 붉은 도(刀)를 든 해적들이 달려나왔다.

"죽엿!"

그들은 다짜고짜 쏟아져 나오면서 칼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쉴새없이 안에서 나오는 혈도(血刀)의 해적들은 무려 서른 명이 넘었는데 저런 인원이 배에 숨어있었다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이 해적선이 해적선 치고는 매우 큰 편이라서 가능한 일일 것이다.

카앙

카강

나는 사방팔방에서 날아오는 해적들의 도를 쳐내며 대응했다. 해적들은 이 많은 인원이 에워싸서 덤비는데도 나를 어찌하지 못하자 황당해하는 기색이었다.

"미친!"

"저런 꼬맹이의 무공이 어떻게..."

나는 대충 해적놈들의 실력을 파악할 수 있었다. 확실히 해적놈들 답지 않게 평균 무공이 높은 편이었고 어지간한 표위급 실력자도 간간히 섞여 있었다. 왠만한 일류고수라도 이 합공에 갇히면 죽음을 각오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탐색전은 이만 됐다고 생각하며 눈에 살기를 띄었다.

"슬슬 뒈져라!"

부우우웅

란(欄)과 나(拿)의 기(技)가 동시에 창 끝에서 맴돌자 마치 벌떼우는 듯한 소리가 울렸다. 이것은 삼절 이광이 가르쳐 준 기본기의 응용이었는데, 서로 다른 기운과 기술을 충돌시키면 회전력이 섞여서 무서운 파괴력을 내뿜는 것이었다. 특별한 기술이름은 존재하지 않았으나 이 수법을 잘 응용하면 왠만한 절기에 못지않은 위력을 낼 수 있었다.

투쾅

내가 풍차처럼 창을 휘두르자 반경 일 장 내에서 덤벼들던 해적 다섯 놈의 몸뚱이가 갈가리 찢겨나갔다. 그것도 피륙이 찢기는 소리가 아니라 마치 거인의 팔이 내려치는 듯한 둔탁한 소리와 함께 큰 풍압(風壓)이 생겨났다. 해적들이 그 참상에 놀라서 멈칫거리고 있을 때 나는 달려들어서 연속으로 창을 다섯 번 휘둘렀다.

퍼버버벅

"끄아아아악!!"

인간의 육체가 박살나며 큰 혈선(血線)이 허공을 갈랐다. 순식간에 갑판 위는 피바다가 되었고 뇌수와 내장이 튀어서 바닥에 흘렀다. 해적들은 손도 쓰지 못하고 갑작스럽게 열다섯 명이 황천길로 떠나버리자 저도 모르게 혈도를 손에서 놓았다.

땡그랑

"히... 히이익..."

"괴물이다...!!"

나는 놈들을 살려줄까 하는 생각은 눈곱만치도 하지 않았다. 어차피 배를 습격해서 사람을 노예로 팔고 여자는 강간하거나 갖고놀다 죽이는 악당들이다. 이렇게 쉽사리 명줄을 끊어주는 게 더 자비로운 일이다. 나는 한 줌의 표정도 변하지 않고 그대로 창을 찔러서 세 명의 몸뚱이를 꼬챙이처럼 꿰어버렸다.

푸콱

"흐끄아악!!"

"아아아아아아!!"

그리고는 씩하고 웃음을 지으며 란(欄)의 수법으로 창을 회전시켰다. 그러자 부부북하는 소리와 함께 해적들이 내장에서부터 털려서 산산조각이 나 버렸다. 그렇게 얼추 해적들을 정리하고나자 피바다 위에는 나밖에 남지 않았다.

나는 이마의 땀을 닦으며 말했다.

"슬슬 구경은 그만 하고 직접 나서지 그러냐?"

"......"

세 명의 혈의인(血衣人)들이 도(刀)를 거머쥔 채 내 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놈들은 특이하게도 옷색깔과 같은 피빛 복면을 쓰고 있어서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아마 저 놈들이 이 해적 혈도단의 두령일 거라는 생각이 든 나는 여유작작하게 도발했다.

"너희들이 두목 맞지?"

"그렇다."

"빨리 덤벼. 그러면 안 아프게 죽여주지."

"네놈은 누구냐? 누구길래 우리를 방해하는 것이냐."

"곧 뒈질 놈이 알아봤자 뭐해?"

"으윽..."

나는 더 이상 대화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며 그대로 달려들었다. 그러자 혈도단의 세 두목은 혈도에서 도기(刀氣)를 뿜어내며 내게 대항하기 시작했다.

"어?!"

나는 갑자기 도기가 나타나자 황당했다.

까아앙!

' 뭐야? 해적단 두목 따위가 도기를 쓴다고?'

도기는 개나소나 쓰는 게 아니다. 오랜 세월 무공을 전문적으로 수련해 온 뛰어난 일류무인 중에서도 출중한 기량을 가진 자가, 피나는 연마 끝에 사용하는 것이었다. 절정수준에 오르지 않아도 내공수법을 잘 시전해서 도기를 쓸 수 있는 경우가 있긴 했지만 그래도 놀라움은 어쩔 수가 없었다.

"커헉!"

하지만 놈들은 내 창에 실려있는 내공을 감당할 수 없는지 피를 토하면서 일 장을 날아가서 엉덩방아를 찧었다. 내가 당황해서 약간 힘을 빼지 않았다면 이번 일격에 한 놈 정도는 회칠 수 있었을 것이다.

나는 부들거리며 억지로 일어서는 해적단 두목들을 날카롭게 노려보았다.

"네놈들 뭐냐? 그 무공은 누가 가르쳐 준 거지?"

한 번의 충돌로 알 수 있었다. 졸개들은 몰라도 이 두목놈들의 무공은 분명한 체계를 가지고 있는 일류의 상승무공이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일개 해적단 두목 따위가 그런걸 익히는 일은 언어도단이었다. 당장 강호에 나가서 일류절정고수로 행세해도 될만한 놈들이 해적질이나 한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끄에에엑!"

"끼아아악!!"

놈들은 대답하지 않고 기괴한 소리를 터뜨리며 덤벼들었다. 나는 한 순간에 놈들의 힘과 속도가 급증한 걸 느끼자 놀랐다. 바로 방금 전까지 이 정도의 실력은 아니었는데 갑작스럽게 세진 것이다. 명백한 신체능력의 상승이었다.

' 천하장사가 따로없군.'

까강! 깡!

나는 놀라기도 했고 놈들이 갑자기 강해져서 침착하게 약 이십 여 초를 겨루었다. 창의 화경(化經)으로 받아내지 않으면 강철창이 대번에 부러질 정도의 용력(勇力)이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무공도 결국은 근력이 좋을수록 세지는 것이었기에 나는 정신을 집중해서 초수를 겨룰 수밖에 없었다.

퍼억

그러던 중, 놈들의 움직임에 헛점이 보이자 급격히 찔러들어가서 한 놈의 가슴을 터뜨렸다. 가슴 한가운데에 주먹만한 구멍이 뚫리자 그 놈은 어이없는 듯 내려다보았다. 나는 놈이 서서히 쓰러지는 장면을 기대했다.

"끼에에에에엑!!"

"어?!"

쐐액

하지만 놈은 쓰러지는 대신에 더 힘이 세져서 되려 달려드는 게 아닌가? 너무 생각지도 못한 일이라서 나는 뒤로 막아내며 물러섰다. 어느덧 갑판의 끝에서 포위당한 형태가 되자 황당했다. 분명히 보통 인간이라면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치명상이었는데 저렇게 멀쩡하게 서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나는 말했다.

"어이... 너희 대체 뭐야? 왜 안 죽어?"

"끄르르륵... 꿰륵..."

"......"

자세히 보니, 놈들은 무인 특유의 기합을 내지르는 게 아니라 비명소리를 꽥꽥 내지르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사람의 말을 알아듣는건지 못 알아듣는건지 희번득한 눈을 뜨고 있을 뿐이었다. 마치 죽은 물고기 눈 같아서 꺼림칙했다.

나는 이 놈들에게 정보를 얻어낼 수 없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그리고 이제 슬슬 제대로 해볼 생각으로 창을 굳게 붙잡았다.

"이 기술에 뒈지는 걸 영광으로 알아라."

뇌명(雷鳴)의 호흡이 흘렀다. 지금까지 해적들과 싸우면서 한 번도 쓰지 않았던 뇌류가 몸에 흘렀다. 놈들은 갑작스러운 변화에 주춤하고 있다가, 한 놈의 머리통과 팔뚝이 원형으로 터져나가자 그제서야 반응했다.

퍼엉

단순히 뇌명을 발동하고 찰(刹)의 찌르기를 행한 것 뿐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필살기의 위력이 되어 있었다.

후두둑

핏방울이 후두둑 떨어지며 두목 한 놈이 바닥에 쓰러졌다. 나는 그 놈이 쓰러지면서 매캐한 생선 비린내가 나며 비늘이 사방에 튀자 인상을 찌푸렸다.

' 뭐야?'

두목 놈들은 죽은 놈을 신경쓰지 않고 달려들었다.

"끼에에에엑!!"

"흥."

하지만 이미 뇌명의 호흡을 발동한 내게는 전혀 적수가 되지 못했다. 놈들이 억센 힘으로 공격해 오는 것을 뇌영보 천주살로 유려하게 비껴가면서 창을 두세 번 휘두르며 스쳐지나갔다. 그러자 다음 순간 놈들의 몸에는 수십 개나 되는 구멍이 뚫려 있었다.

"끼이이익..!!"

하지만 놀랍게도, 전신에 구멍이 뚫린 상태로 두목 한 놈이 끝까지 내 등뒤로 날듯이 달려들었다. 정말 기가 질릴 정도의 정신력이었으므로, 나는 짜증이 끝까지 치솟아 있었다. 그래서 뇌운유권(雷雲柔拳)의 나한각(羅漢脚)으로 그 놈의 대가리를 차 올렸다.

퍼걱

발차기에 목줄기가 끊기고 머리통이 하늘높이 치솟았다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나는 홧김에 너무 잔인한 짓을 했나 싶어서 땅에 떨어진 두목의 머리통을 살펴 보았다. 그리고 그 머리통의 형태를 확인하자 깜짝 놀라서 입을 벌렸다.

"......!!"

큰 개구리를 닮은 얼굴에, 전체적인 외형은 말 그대로 지느러미가 보이는 어류(魚流)! 말 그대로 물고기인간이라고 할 수 있는 모습이었다. 급히 쓰러진 두목놈들의 시체를 살펴보자, 이 놈들의 몸뚱이는 마치 물고기와 개구리와 인간을 적절히 섞어놓은 듯 했다. 목에는 아가미가 달려 있고 배 부분은 하얗고 몸전체는 초록색으로 보였다.

나는 살아생전 이런 인간을 처음 보았으므로 벌어진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방금 전까지 사람말을 하고 무공을 써서 달려들길래 인간인 줄 알았는데, 설마 이 놈들도 이족(異族)이었다는 말인가?

지끈

"으윽."

나는 아까 느꼈던 불쾌한 기분이 더 강해지는 걸 느꼈다. 그리고 나는 이 기분이 이 놈들과 가까이 있기 때문이라는 걸 알아챘다. 정확히는 이 놈들이 품고 있는 마(魔)가 내 내공을 자극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마의 본체를 죽여서인지 한결 기분이 나아졌다. 이족이 내뿜는 독기(毒氣)가 주변을 오염시킨다는 말을 이번에 다시 한 번 실감한 듯 했다. 나는 이게 뭐 어떻게 된 일인가를 곰곰히 생각해 보았지만 결론이 나지 않았다.

나는 배 안쪽으로 내려갔다. 그 곳에는 물고기인간이 아니라 평범한 인간들이 분주하게 배를 젓고 있었다. 나는 그 놈들 중 하나에게 창을 들이밀며 말했다.

"네놈들 대장은 죽었다. 항복해!"

그러자 해적선원 중 한 놈이 깜짝 놀랐다.

"헉... 죽었다고? 진짜냐?"

"그렇다."

"알겠소. 항복하겠소. 목숨만 살려주시오."

항복 선언이 거침없이 나왔다. 나머지 선원들도 즉시 노 젓는 걸 관두고 손을 들고 단도따위의 무기를 버렸다. 나는 그 모습에서 이 놈들도 반강제로 참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나머지 해적선의 제압은 손쉽게 이루어졌다. 해적선에 항복을 표시하는 기를 올리자 다른 해적선이 다가왔고, 나는 나머지 해적들을 추가로 20명 정도 도륙해버린 것이다. 그러자 기가 질린 혈도단 해적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항복했다.

해적들이 항복하자 나는 본선으로 되돌아왔다. 그리고 대룡상회주가 반가워했다.

"소협은 영웅이오! 설마 혈도단을 홀로 괴멸시키다니...!!"

동시에 그는 약간 꺼려지는 안색을 감추지 않았다. 그도 그럴것이 내가 오늘 죽인 숫자가 상당했기 때문에 전신이 피칠갑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얼굴에 말라붙은 피를 닦으며 말했다.

"대룡상회주. 잠깐 할 얘기가 있는데 괜찮겠소?"

"하하... 물론이오."

"가능하면 서궁표국주도 와 주시오."

"나도? 알겠소."

웅성웅성

나는 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이는 사이로 대룡상회주와 함께 개인실에 들어갔다. 나는 그리고 큰 보자기에 싸서 갖고 온 혈도단 두목들의 목을 탁자 위에 올렸다. 이윽고 보자기를 풀자 매캐한 생선비린내가 장내에 가득 찼고, 대룡상회주와 서궁표국주는 놀란 안색을 감추지 못했다.

"우욱!"

"이... 이 괴물은 뭐요?"

나는 담담하게 말했다.

"이 세 놈은 내가 벤 혈도단 두목들이오. 이 놈들이 다른 선원들의 눈에 띄면 좋지 않을 것 같아서 목을 이리로 갖고 왔소."

"으으, 다시 보자기에 싸 주시오. 보기 좋지 않소."

"알았소."

내가 다시 보자기를 싸자 대룡상회주가 코를 막은 채 말했다.

"소협 거짓말하는 게 아니오? 진짜로 혈도단의 두목이 저 괴물들이란 말이오?"

"몸뚱이까지 봐야 알겠소? 일단 해적놈들한테 숨겨두라고 해 놨지만 직접 보고싶다면 어쩔 수 없지."

"아... 아니오. 소협의 말을 믿겠소."

대룡상회주가 질린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옆에 앉아서 곰곰히 생각하던 서궁표국주가 말했다.

"왠지 이런 놈들의 얘기를 들어본 것 같소."

"어떤 얘기 말이오?"

서궁표국주가 안색이 창백해져서 말했다.

"혈도단은 해신(海神)의 일족과 관계가 있다는 소문이었소. 급작스럽게 요 몇 년 사이에 힘을 키우고 정식 교역단까지 두려워할만한 해적이 된 것은, 그 자들이 요상스러운 힘을 손에 얻어서였다는데... 어쩌면 이 일과 관계가 있을지도 모르겠군."

"혈도단은 이 놈들이 죽었으면 끝이오?"

"그렇지 않소. 아마도 이 놈들의 본거지인 해적섬이 있을 것이오. 그리고 그 해적섬을 통해서 이 놈들이 육지에서 보급을 받고 있을 게 분명하오."

"이런 놈들이 또 있다는 소리군."

"아마도..."

장내가 침묵에 잠겼다. 갑작스러운 싸늘함이 맴돌았다.

침묵을 먼저 깬 것은 대룡상회주였다. 그는 불쾌한 얼굴로 손을 휘휘 젓더니 말했다.

"그만! 상관하고 싶지 않소. 내 일은 고려에 교역품을 가져가서 거래를 하는 것이고, 그 외의 일은 내 소관이 아니오. 해적섬의 일도 우리같은 상단이 어찌할 게 아니라 해군(海軍)에 토벌을 맡겨야 하오. 그렇지 않소?"

서궁표국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 생각도 그렇소. 이 일은 일단 이대로 묻어두고, 해적들을 족쳐서 본거지 정보만 알아 냅시다. 이 흉측스러운 대가리와 몸뚱이는 바다에 던져버리고."

"......"

"소협. 다시 한번 감사하오. 이 보답은 반드시 하겠소."

나는 일이 대충 일단락 난 걸 느꼈지만 왠지 찝찝한 기분을 털어버릴 수 없었다.

' 해신의 일족?'

내 경험에 의하면 이 놈들은 명백히 이계(異界)에서 비롯된 이족이었다. 아마 내가 상대했을 때 놀라운 힘과 생명력을 지니고 있었던 것은 이족이 지닌 선천적인 특성이리라. 이런 놈들을 해신의 일족이라고 부른다면, 이 놈들은 설마 바닷속에 살기라도 한다는 말인가?

어찌되었든 일은 물흐르듯 진행되었다. 투항한 해적들은 상단 배에 나포되어서 구석에 처박혔고, 해적들의 두목의 시체는 몰래 밤에 바다에 던져 버렸다.

내가 고려의 대항(大港)인 개경(開京)에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약 나흘 후였다. 개경에 내린 상단 일행은 마중나온 개경상인들과 항구에서 바쁘게 움직이며 거래를 하기 시작했고, 나는 몰래 내려서 상인 일행과 섞여서 개경 안으로 들어갔다.

"으하하! 한잔 합시다."

그 날의 일이 끝나고 초저녁이 되어서 대룡상회주가 외국상인 숙소로 들어왔다. 대룡상회주는 나와 서궁표국주를 불러서 술자리를 같이 하려고 했기에 거절하지 않았다. 맛있는 고려의 음식과 안주가 잔뜩 차려진 술상에서 대룡상회주가 말했다.

"소협. 이제 어찌하실 생각이오?"

"나는 이제 고려에 눌러앉아서 몇 년간 이곳의 말을 배워볼 생각이오. 고려가 흥미로운 땅이라서 몇 년간 여행을 하고 싶소."

"흠... 말리지는 않겠소만..."

은근슬쩍 말을 흐리던 대룡상회주가 본론을 꺼냈다.

"소협. 우리 상회의 대숙(大叔)으로 와주지 않겠소? 소협에게라면 상회 내에서 둘째가는 권한과 부(富)를 드릴 수 있소이다."

"응?"

옆에 있던 서궁표국주가 그의 말을 거들었다.

"나도 찬성이오. 소협이 있다면 앞으로의 교역행도 안전할 것이외다. 대룡상회주와 내가 소협을 도와준다면, 소협은 몇 년 지나지 않아서 산동에서 손꼽히는 부자가 될 수 있소."

"......"

"소협 부탁이오. 제발 우리 상회에 와 주시오."

나는 씁쓸하게 웃으며 그들의 제안을 거절했다.

"미안하오."

"으음..."

"난 해야할 일이 있다오."

산동에 눌러앉아서 거부가 되면, 부와 명예를 얻고 나아가서는 미녀도 원하는대로 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게 중요한게 아니다. 내게 장생불사의 시간이 있다고 하지만 허비해서는 안 된다. 고려땅을 뒤적거리며 해인을 찾는 여행도 한세월 걸릴게 뻔했으므로 나로써는 거절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쩔 수 없다는 듯 대룡상회주가 말했다.

"그럼 소협의 무운을 빌겠소. 그리고 개경에 살고 싶다면 내가 특별히 고려의 귀족들에게 말해두지."

"고려의 귀족들과 친하오?"

"물론이오. 참고로 고려의 귀족들은 한 차례 왕에 의해 혁파되어서 현재는 최씨(崔氏)가 물러나고 정씨(鄭氏)가 득세하고 있다고 알고 있소. 나는 정씨 가문과 꽤 친한 편이므로 며칠 내로 자리를 만들어 주겠소."

그의 말은 허언이 아니었다. 그는 이번 일의 보수로 상당한 돈을 챙겨준 데다가 개경 내에 집을 따로 마련해 주었고, 덤으로 고려 개경 제일의 세도가라는 정씨 가문의 대귀족과 만나게 된 것이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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