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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마전(伏魔殿)
10번째 삶이 시작되었다.
나는 외양간 벽에 기대어앉아 멍하니 있었다.
마지막에 왠 괴물의 촉수공격을 막지 못해서 머리가 터진 것 같았지만, 고통은 의외로 없었다. 잔혹해보이는 죽음과 달리 그런 식으로 죽게 되면 고통을 느낄 새도 없이 죽게 되어버리는 탓이다. 물론 목이 뻐근하고 눈이 충혈되는 느낌은 있었지만, 어찌보면 고통없이 죽었다고 봐도 좋았다.
지금 내가 생각하는 건 '내가 왜 그랬을까' 라는 점이었다.
나는 왜 그런 짓을 했을까?
망량에게도 한 소리 듣고, 한진성에게도 한 소리 들었으면서 왜 미련하게 마물떼거리와 싸우게 되었을까? 나는 정말로 구제불능의 바보인 걸까? 그동안 잘 해 놓고 왜 이제 와서 이렇게 치명적인 실수를 해버린 걸까?
한참 후 나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나는, 죽고 싶었던 거군..."
그렇다.
나는 삶이 너무 괴로워서 도피하고 싶었다.
그토록 염원하던 비기를 익히고 무공을 수련하고 있었지만, 이광의 눈치를 보면서 지낸 지난 몇 년 간은 너무나 마음이 괴로웠다. 이광은 자신의 기대를 배신한 나를 숫제 배신자 취급하고 있었고 하루하루를 보내는 게 보통 일이 아니었다. 그동안 어떻게든 강해져야 한다는 일념으로 버티고 있었지만 더는 한계였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망량을 만난 자리에서 괴물들을 베어넘기면서 내 힘에 자신감을 되찾았고, 좀 더 망량에게 내 강함을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에 판단을 그르치고 말았다.
생각해보면 너무나 어리석인 판단이었는데, 그 동안의 심리적 압박감 때문에 맛이 간 선택을 해버리고 만 것이리라. 그것은 내 내면속에 [죽어도 좋다] 라고 하는 마음가짐이 숨어있었기 때문이다.
막상 죽어서 10번째 전생을 시작하게 되자 극렬한 후회감이 몰려 왔다.
거기서 망량의 말을 들어서 피했다면, 망량에게서 그 동안 있었던 일을 좀 더 자세히 들을 수 있었을 텐데! 그리고 봉황조각에 숨겨진 비밀이나, 망량에 그동안 쌓아왔던 시간 속에서 새로운 단서를 찾을 수 있었을 텐데!
한 순간의 혈기를 참지 못해서 너무 많은 기회를 날려버린 셈이었다.
그리고 지금껏 많은 사람들이 내게 조언을 했는데도 이렇게 어리석은 짓을 하는 나 자신에 대한 자괴감이 들었다.
나는 그로부터 두 시진동안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새벽을 보냈다. 원래라면 한시가 아까워서 암천비서를 얻으러 가고 영약을 먹으러 가야하지만 나 자신에 대한 자책감과 자괴감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머릿속이 텅 비었다.
"......"
날이 밝았다. 나는 외양간 벽에 기댄 채로 아침 해가 떠오르는 것을 보았다. 흐릿한 눈으로 햇빛을 보다가 생각했다.
' 난 이제 뭘 해야 하지?'
암천비서를 얻고 황산에 가서 천년설삼을 먹고 유적에서 막야를 꺼낸 후 제사를 지내는 것까지는 고정이다. 막야를 꺼낸 후에 조금 바쁘게 움직여야겠지만 그것도 뭐 그러려니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이후에는?
나는 이미 뇌명의 호흡을 비롯해서 청룡무관의 절기 대부분을 습득했다. 물론 그걸 달인의 경지로 사용할 수는 없지만 여하튼 고급기술을 다 익힌 건 사실이다. 이제 내가 청룡무관에 입관해서 수련하려 하면 엄청난 위화감이 발생해 버린다.
' 내가 뇌명의 호흡을 알고 있다는 걸 알게 되면... 이광은 틀림없이 날 살해할 것이다.'
내 경지를 숨길 수 있다고 해도 문제다. 나는 이미 이광에게서 수 년에 걸친 살기어린 괄시를 받아왔고 죽고싶은 기분마저 들었다. 지금 기분상태로 청룡무관에 다시 돌아가고싶지 않았다. 힘만 빠질 게 분명했다.
나는 고개를 저은 후 중얼거렸다.
"모르겠어. 하나도 모르겠다고."
불행 중 다행으로 내가 알아내야 할 '단서'는 많이 있다.
금의위의 뒤에 존재하는 [복마전]이라고 하는 단체의 존재, 그리고 복마전이 어떻게 해서 칠요를 얻게 되었는지, 그리고 복마전에서 소환했다는 [새로운 이계의 존재]가 무엇인지. 나는 이런저런 일을 생각해 보다가 결론을 내렸다.
"이번에는 어떻게 되든간에 최대한 오래 살겠다. 신중하게 행동하며, 망량의 말을 무조건 신뢰하겠다."
나는 일부러 입을 열어서 내 마음속의 방침을 잡았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정신이 버틸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시 마음을 다잡은 채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번에는 최소한 이십 년은 생존해 보이겠다는 각오를 세운 상태였다.
' 그리고 청룡무관에는 다시 가지 않겠어.'
적어도 이번 생에는 가기가 싫었다. 더 간절한 힘이 필요하게 되면 몰라도 지금으로서는 이광의 얼굴도 보기 싫었다. 나는 제멋대로인 방침을 정하고는 외양간에서 나서서 달리기 시작했다.
천암비서를 얻고 나서는 바로 황산으로 달렸다. 지난번과 경공의 속도를 비교해 봤는데, 천주살을 익히고 뇌명까지 간간히 쓰게 되니 속도가 훨씬 빨라지는 듯 했다. 그래서 예전의 황산 도착시간보다 다시 이틀을 줄였다.
끼이익
나는 산 위의 바위에 멈춰서서 황산을 내려다보았다. 벌써 이 짓을 하는 게 열 번이 다 되어간다고 생각하니 약간 질리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억지로 마음을 다잡고는 다시 준비를 해서 황산의 비경으로 향했다.
황산의 비경에 들어와서 다시 천년설삼과 흑백련을 먹었다. 이번에는 세맥이 뚫리는 기분이 들지 않고 그냥 축하고 기운이 단전 아래에 쌓이는 기분이었다. 아마도 내 몸의 세맥이 거의 다 관통되면서, 기운이 축적단계로 접어든 모양이었다. 딱히 진보가 느껴지지 않으니 허탈했다.
' 아마 이제부터는 천년설삼을 먹어도 별로 진보가 없겠구나.'
이렇게 생각하니 또 암담해진다. 지금까지 천년설삼을 먹는 재미로 살아온 것도 있었는데, 천년설삼이 별다른 효용이 없다면 이제 뭘 보고 살아야 하는가? 내심 투덜거리면서 이번에는 연못 아래로 입수했다.
풍덩
수요의 유적 아래로 들어가서 다시 제단 앞에 섰다.
나는 우선 금괴가 든 목갑부터 바깥으로 옮긴 후 다시 자리로 되돌아와서 생각했다.
' 나는 왜 이 글을 읽을 수 있을까?'
지금까지 수요신검 막야를 얻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해서인지 그 점은 한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다. 이 글은 명백히 이계의 글인 괴어(怪語)처럼 보이는데, 나는 어떻게 해서 이 수요유적의 글을 읽을 수 있는 걸까? 만일 내가 이 글을 읽지 못했다면 제단에 피를 흘리는 방법을 생각하지 못해서 천년만년 맴돌기만 했을 것이다.
배운적도 없는 글을 읽을 수가 있다는 것. 이건 명백히 이상한 일이었다.
쿠구구구
나는 고민하다가 다시 제단에 피를 흘리고 돌벽이 열리는 것을 보았다. 이번에는 나는 검 대신 창(槍)을 든 상태로 준비를 했다. 여기에 오는 상상을 몇십 번이나 했기 때문에, 이번에는 다른 방식으로 거미 수호자를 돌파하려고 생각한 것이다.
"간다..."
나는 창극에 뇌령지기를 집중한 채 가만히 외나무 다리 입구에 서서 기다렸다. 그러자 잠시 후, 거대한 폭음과 함께 검은 무엇인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천정에 뛰어오른 거대거미 수호자는 나를 발견하더니 시뻘건 눈알을 데굴데굴 굴렸다.
취이이익 - !!
나는 이를 으득 악물었다. 신기하게도 저 수호자가 그렇게 무섭지 않았다. 바로 며칠 전까지 이계의 괴물 수백마리에 둘러싸여서 정신없이 싸웠기 때문이리라. 나는 눈에서 독기를 피어올리며 창을 휘둘렀다.
란(?)!
창술의 기초수법 중 하나인 란이 뻗어나왔다. 나를 향해 거세게 날아오던 거미의 앞다리가 자전(自轉)하는 창날에 휘말리자, 찌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찢겨 날아갔다. 거미의 앞다리는 굉장히 튼튼해서 통짜 강철이나 다름없는 경도였는데 란을 응용한 뇌령팔식 한번에 튕겨져 버린 것이다.
동시에 나는 공격거리를 걱정할 필요도 없이 수월하게 간격을 내면서 연이어 날아오는 수호자의 실뭉치를 나(拿)의 수법으로 교묘하게 흘려내고, 반 보(半步)를 앞세우며 진각을 밟았다.
"합!"
꾸웅!
찰(刹)의 찌르기가 뻗어나가며 수호자 거대거미의 큰 다리마디를 일격에 꿰뚫었다. 창의 회전은 순식간에 몇 배나 되는 크기로 불어나더니 거미의 8개의 큰 다리 중 하나를 순식간에 날려버리는 데 성공했다.
취이이이익 - !!!!
꺄아아아아악 -
거미의 입에서 여러 개의 음성이 중첩된 비명소리가 울렸다. 나는 거미에게 처음으로 내 힘으로 유효타를 준 것을 확인하고는 히죽 웃었다.
"하아... 진짜 얼굴은 그거였어?"
우드드드득
수호자 거대거미의 눈 부분에서 갑자기 붉은 기포같은 게 돋아나더니, 그 기포 사이에서 거대한 인면(人面)이 나타났다. 명백히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는 그 인면은 심상치 않은 사악한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
촤촤촥
촤촤촤촤촥!!
거미는 진정으로 분노했는지 거미집을 만들 생각도 하지 않고는 전신에서 새하얀 실을 수백 수천 가닥씩 뿜어내기 시작했다. 이건 내가 수호자 거대 거미를 처음에 맞닥뜨렸을 때 도저히 상대할 수 없다고 생각하게끔 했던 기술이었다. 저 실의 폭포를 뚫고 거대 거미를 죽일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달랐다. 거미가 실을 다 뿜어낼 시간을 줄 이유가 없었다. 나는 그대로 필살기를 발동했다.
뇌명(雷鳴)!
세계가 느려진다. 전신에 뇌령지기가 솟구치더니, 신경 전체가 번개가 되어버린 것 같다. 흑백으로 아득하게 변해버린 세계 속에서 나는 망설임없이 뛰어들어서 창을 내던졌다. 뇌신류에 존재하는 유일한 투창(投槍) 기술이었다.
퍼걱
살짝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 창은 거미의 머리통을 직선으로 꿰뚫었다. 창두는 물론 창 손잡이까지 절반 이상이 박혀버리는 그 찰나의 순간, 나는 더욱 접근해서 어느새 검을 뽑아들고 있었다.
번개가 손잡이를 타고 흐른다. 나는 모든 내공을 담아서 검을 내리쳤다. 그것은 만승검결의 검로(劍路)이기도 했으며 극상의 천뢰인을 담은 참격(斬擊)이기도 했다. 내가 쌓았던 모든 내공이 한 점에 집중되더니 그대로 거미의 머리통을 재차 갈라버렸다.
푸콰콰콱!!
한 번의 참격으로 끝나는 게 아니었다. 나는 뇌명의 시간 속에서 튀어오르는 거미의 체액을 모두 피해내고는, 경(經)을 실어서 더욱 세게 검을 박았다. 천뢰인이 삐죽 하고 체내의 저항을 뚫고 거미의 몸 속을 휘저었다. 그걸로도 모자라서 나는 검을 빼어내면서 한 번 더 베었다.
이것이 만승검결 만자결(卍字決)이다.
그렇게 중얼거린 나는 뇌명의 호흡을 끊지 않으며 거미의 몸 위를 딛고 반대편으로 뛰었다. 원래라면 거미의 습격을 걱정해야겠지만, 나는 이미 찰나의 시간 동안에 거미에게 생명을 파괴하는 연격(連擊)을 몇 번이나 가해버린 상황이었다. 피가 천천히 솟아오르는 찰나의 시간 속에서 걱정할 것은 없었다.
나는 그대로 막야를 집어들고는 다시 고개를 돌려서 거대한 천뢰인을 만들어서 검파(劍波)로 날렸다. 보통 무림인의 내공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일 장 크기의 천뢰인이 연속으로 다섯 개나 날아가자 수호자 거대거미의 몸이 둥실하고 떠올랐다. 나는 놈에게 접근하며 다시 한 번 베어버리며 공중제비를 돌아서 입구에 착지했다.
여기까지가 바로 뇌명의 한 호흡이었다. 내가 입구를 뛰어나가는 순간 거미의 전신에서 보랏빛 체액이 격렬하게 튀어오르는 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끼 - 에에에엑 - !!!
쿠구구궁
"정말 질긴 놈이군!"
거미의 생명력은 엄청난지, 그렇게 많이 얻어맞고도 발광해서 유적 전체를 쿵쿵 울리고 있었다. 나는 인상을 쓰며 품 속에 있던 단도를 꺼내서 던졌다.
꽈앙
단도가 거미의 거대한 몸뚱이를 다시금 밀어 냈다. 청룡무관에서 수련하면서 나는 내 내공을 온전히 쓰는 법을 한단계 낫게 터득하게 되었고, 조그마한 단도에 엄청난 역도를 실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나는 거미의 발광이 점차 잦아드는 걸 느끼면서 조용히 수요의 유적을 빠져 나왔다.
연못을 나와서는 흑백련의 뿌리를 세 뿌리 채취해서 봇짐에 담았다. 그리고 봇짐을 들어서 챙기며 중얼거렸다.
"다음에는 천년설삼도 갖고 가야겠다."
이번에는 관성처럼 먹어버렸지만, 왠지 천년설삼을 더 먹을 의미가 느껴지지 않았다. 이제는 내가 먹는 게 아니라 다른 일에도 한 번 써보고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바로 진랑곡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역시나 뇌영보를 비롯해서 청룡무관의 기술을 정밀하게 익혀서인지 경공속도는 더욱 빨랐다. 질풍같은 속도로 평원을 가로지르면 뒤늦게 바람소리가 울릴 정도였다. 험한 지형이고 절벽이고 상관없이 모조리 뛰어넘어서 달리니 전혀 느릴 수가 없었다.
물론 도중에 태경촌에 들러서 서재에 숨겨진 봉황조각을 빼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타다다닷
진랑곡에 도착해서는 대낮에 망량을 만나러 올라갔다. 망량은 혼자서 춘화집(春花集)을 감상하고 있었는데 난데없이 내가 나타나자 깜짝 놀라는 기색이었다.
"헉... 당신은 누구..."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당신 말을 안 들었다가 죽은 멍청이요."
"......?"
나는 매우 빨리 뛰어왔기 때문에 이번에는 시간이 남았다. 그래서 적어도 하루의 여유를 남겼기 때문에 망량의 맞은편에 앉아서, 차분하게 지금까지의 일을 설명했다. 망량은 내 이야기를 들으면서 처음에는 미친놈을 보는 표정이다가, 종래에는 흥미가 만발한 표정을 지었고, 나중에는 진지하게 듣기 시작했다.
"... 하여, 나는 당신 말을 듣지 않고 죽었다가 이렇게 10번째 전생을 시작하게 된 것이오."
"음... 백웅이라 했던가? 당신 소설(小說) 한번 써보는 게 어떻겠소? 그 정도 이야기 실력이면 얼마 안있어서 낙양 최고의 이야기꾼이 탄생하겠군."
"못 믿는 거 같군."
"당신같으면 대뜸 나타나서 생면부지의 소년이 그런 말을 하는 걸 믿겠소? 당신이 반로환동한 고수인 거 같아서 일단 얘기는 들어주고 있는데 솔직히 너무 허무맹랑해서."
"이걸 보면 조금 생각이 달라지겠군."
나는 막야, 봉황조각, 흑백련 뿌리를 차례대로 꺼냈다. 그는 막야에 떠오르는 황금빛 갑골문을 보더니 제정신을 놓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확실한 물증이 있으니 내 말을 믿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는 막야를 들더니 손을 덜덜 떨었다.
"무... 무슨 이런. 그 이야기가 전부 사실이란 말인가?"
"그렇소. 그리고 당신은 복마전이라는 단체에 맞서서 반천맹을 결성해서 싸우고 있었던 것 같은데, 복마전 측이 칠요를 얻어버리는 바람에 이계의 괴물이 대거 소환되어서 죽음의 위기였던 걸로 기억하오."
"반천맹이라... 하하."
망량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그건 내가 소싯적에 끄적이던 의협소설에 나오는 단체인데..."
"당신이 만든 단체라는 증거요."
"뭐... 아무튼 그 말은 믿겠소. 허참 원... 내가 참 별별 일을 다 겪는구나."
잠시 생각하던 망량이 말했다.
"헌데 말이오? 그럼 당신은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오."
"우선은 당신과 함께 천우진에게 가서 막야의 재앙을 막을 생각이오."
"아니 그런 걸 말하는게 아니라, 당신이 어떻게 해서 복마전을 쓰러뜨릴지를 묻고 있는 것이오."
"......?"
망량은 골치아프다는 표정을 지으며 탁자에 턱을 괴었다. 이어서 그가 하는 말은 생각지도 못한 점을 짚고 있었다.
"복마전에서 금의위를 조종해서 칠요를 모으고 음모를 꾸밀 수 있는 원동력은 무명제사서에 있지 않소이까? 그리고 무명제사서는 이계의 존재를 소환해서 해석시킨 거고. 그렇다면 당신이 운좋게 이번에 계획이 잘 들어맞아서 복마전의 음모를 막았다고 한들, 다음번의 전생(轉生)에서는 또다시 그 복마전과 이계의 존재들과 싸워야 하는 거 아니오?"
"......"
"결론은 그거요. 금의위를 쓰러뜨리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복마전 측에서 주술사를 대신해서 소환했다는 [이계의 존재]를 어떻게 이 세상의 시공간에서 쫓아내느냐가 중요한 것이오."
그렇구나!
나는 어쩐지 이번 전생을 시작하고 목적없는 싸움을 하고 있다는 허무감 때문에 조금 방황하고 있었다. 그러나 망량의 말을 듣고 보니, 내 진짜 적은 [이계의 존재]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예전의 그 괴이한 주술사 때처럼 그놈을 이 세상에서 쫓아내지 않는 한 이 싸움을 승리로 만들 수는 없는 일이었다.
망량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 천암비서란 물건을 그 놈에게 보여주는 방법이 또다시 통하리라는 보장은 없지. 무엇보다도 우리는 그 이계의 존재란 게 뭐하는 놈인지 전혀 알고 있지 못하고 있지 않소?"
"어떻게 해야 하겠소?"
"우선은 막야의 재앙을 막고 나서 생각합시다. 나도 당장은 대책이 떠오르지 않으니 당신과 함께 낙양으로 가면서 생각하겠소."
나는 망량과 함께 말을 타고 낙양 인근으로 향했다. 천우진이 사는 마을에 도착하자 지난번과 같이 천우진을 한바탕 설득하는 일이 벌어졌고, 망량과 천우진이 한바탕 막야의 수기를 공양하는 광경까지 목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가 생겼다.
한바탕 축문을 외우고 의식을 진행하던 천우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러더니 나를 매섭게 내려보며 말했다.
"으음... 강신(降神)이 내려오고 있군."
"뭐라고?"
"태허천존(太虛天尊)께서 당신에게 직접 할 말이 있는 것 같소. 그럼..."
파아앗
그러더니 천우진의 몸이 빛났다. 그리고 얼굴이 시뻘겋게 변하고, 눈에서 선연한 광채가 흘러나왔다. 그것은 흔히 영기라고 부르는 힘이었다. 명백히 다른 무언가가 천우진의 몸을 차지하고 있는 형상이었기에 나는 긴장해서 천우진을 바라보았다.
[ 수기는 잘 먹었다. 인간들이여.]
천우진의 입에서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한 준엄한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 그러나 이상하군. 너와 제의를 주관한 자들에게 축복을 내리고자 하거늘, 너희에게는 이미 내 힘의 흔적이 남아 있다. 너희는 삼황오제(三皇五帝)의 혈족과 관련이 있는 자들인가?]
내가 뜻밖의 일 때문에 뻣뻣이 굳어 있자, 옆에서 우보법을 밟고 있던 망량이 급히 외쳤다.
"그렇지 않습니다 태허천존! 우리는 맹세코 처음으로 이 의식을 진행하는 것입니다."
[ 그 말이 맞다. 나는 너희가 거짓을 고해도 알 수 있는 권능이 있다. 그러나 분명히... 내 힘의 흔적이 느껴진다...]
뭔가 혼란스러워 하던 태허천존이 말을 이었다.
[ 그렇다면 너희에게 힘을 내리는 자를 다른 존재로 교체하겠다.]
"그리 해도 되는 것입니까?"
[ 물론이다. 물론 나와 다른 영역을 다루는 자이기에, 너희가 받는 보답은 다소 다른 것이 되리라.]
듣고 있던 내가 태허천존에게 질문했다.
"그냥 태허천존님의 축복을 받을 순 없는 겁니까?"
[ 닥쳐라. 어쩐지 껄끄럽다.]
"네..."
스스스스
[ 오시게, 서왕모(西王母).]
파아앗
오색 구름이 흐르더니 천우진의 몸에, 한 순간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이 환영처럼 아로새겨졌다. 이번에는 서왕모라는 존재가 천우진에게 빙의한 것 같았다.
그 때 천우진에게 빙의한 서왕모가 내 쪽을 휙하고 바라보았다. '그녀'는 나를 찬찬히 뜯어보더니 말했다.
[ 너희에게 반도(蟠桃)를 내리겠다.]
그 말이 끝이었다.
의식이 모두 끝나고, 천우진이 정신을 차리게 되자 우리는 무엇을 얻게 되었는지 확인했다. 그리고 천우진과 망량은 원래처럼 술수의 축복을 받게 되어서 사제가 좋아서 날뛰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 이게 뭐야?'
그러나 나는 대체 뭘 받은건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그래서 천우진에게 물었다.
"이보시오. 서왕모가 반도를 주었다는 게 무슨 뜻이오?"
"축하하오."
천우진은 평소에 독랄하고 사납던 놈의 성격답지 않게 싱글싱글 웃고 있었다. 그러더니 말했다.
"당신은 이제 장생불사(長生不死)하게 되었소. 그것이 바로 서왕모의 축복이오."
"장생... 불사?"
"적어도 100세까지는 무병건강하게 지낼 것이며, 200세까지도 무난히 살 것이오. 300세에 약간 노화가 느껴질 수는 있겠으나, 선도의 수련을 한다면 이후에 반선(半仙)의 경지를 노릴 수 있게 될 거요. 이렇게 큰 축복을 주다니 서왕모는 과연 대단한 신이오!"
"......"
나는 할 말을 잃었다.
' 그게 무슨 축복이냐고!!'
죽으면 다시 회귀하게 될 텐데 대체 왜 장생불사의 축복을 준다는 말인가!!
나는 억울해서 따지고 싶었지만 뭐라 할 말이 없어져서 관두고 말았다.
"젠장..."
이렇게 된 이상, 초기의 결심대로 열심히 오래 사는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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