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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마전(伏魔殿)
무공의 깨달음을 얻고 며칠 후, 나는 한진성의 인도에 따라 다시 한백령을 만나게 되었다. 특이하게도 이번에는 한백령은 야회복(夜會服)을 입고 있었는데 어딘가를 다녀온 모양이었다. 그녀는 나를 보자 말했다.
"그간 알아 보았는데, 네가 청룡의 제자가 아니라는 건 사실 같더구나. 그에게는 진소청이라는 제자가 있으며 그 또한 진성이에 못지 않은 천재(天才)이다. 솔직히 약간 샘이 날 정도더군."
나는 그 동안 한백령이 잠잠했던 게 내 뒷조사를 하기 위해서였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이렇게 불러서 당당하게 말할 정도면, 아마 왠만큼 정보를 수집했기 때문이리라.
"너와 이야기를 하기 전에 먼저 물어볼 것이 있다."
한백령은 한 줌의 감정도 없는 투명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너는 우리 한씨세가의 빈객이 아니라 일족(一族)이 될 생각이 없느냐?"
"갑자기 무슨 소리요?"
"네가 그토록 간절히 원하는 힘을 주겠다는 소리다. 네 복수대상이 누구인지 모르지만 원하는 범위 내에서는 복수를 도와줄 수도 있고. 그 대신에 너는 한씨세가를 위해 모든 충성을 바쳐야 하며 때로는 네 목숨을 걸어야 할 것이다."
"......"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일족이란 건 피가 섞인다는 의미인데 그 말은..."
"지화(知花)를 네 짝으로 줄 생각이다. 그 아이는 낙양사화(落陽四花)의 한 명으로 외모와 재색이 특히 뛰어난 우리 일족의 자랑이다. 솔직히 네 짝으로 하기에는 과분할 정도라고 생각한다."
"......!!"
나는 깜짝 놀랐다. 한씨세가에 오랫동안 빈객으로 머물면서 그녀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낙양사화!
그녀들은 낙양 내에서 가장 고귀하며 아름다운 무림세가의 영애(英愛)들을 일컫는 말이었다. 나도 얼핏 먼 발치에서 낙양사화인 한지화의 모습을 본 적이 있었는데, 육감적인 몸매와 동시에 마치 조각을 한 듯한 섬세하고 아름다운 외모였다. 꽃에 비유하자면 양귀비꽃같은 아름다움이었는데, 젊은 사내의 마음을 두근거리게 하기에 족한 미녀인 것이다.
솔직히 내 외모는 어린나이라서 티가 잘 나지 않을 뿐 상당히 추한 편이었다. 몇 년만 지나면 외모의 태가 나올 건데 평범한 양갓집 처녀가 질색을 해서 고개를 돌릴 정도다. 그런 내 외모로 낙양사화를 배필로 맞이한다는 건 확실히 균형이 맞지 않는 일이었다. 나는 말을 더듬으며 말했다.
"자... 잠깐. 거기에 본인의 의사는 없는 거요?"
"지화는 일족을 위해서 어떤 일이든 할 각오가 되어 있다. 그것은 한씨 일족으로 태어나서 충분한 혜택을 받은 자로써의 의무인 셈이지. 물론 지화는 참하고 고운 아이니, 두말하지 않고 너를 지아비로 섬기며 보필할 것이다."
미모의 영애가 나만을 바라보고 순종한다는 것.
남자에게는 거역하기 힘든 유혹이었다.
"......"
나는 힐끔 한진성의 얼굴을 보았다. 한지화와 한진성은 사촌지간이라서 이렇게 중대한 일을 들으면 뭔가 반응이 있을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한씨세가의 소가주인 한진성은 안색 하나 변하지 않은 채 묵묵히 이야기를 듣고 있어서 감정을 유추하기 어려웠다.
나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
"너무 갑작스런 얘기군. 나는 당신이 이렇게 호의를 베푸는 이유를 모르겠소. 나는 내 유파의 무예를 연마하는것밖에 관심이 없는데 진정 당신의 일족과 섞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요?"
"물론 나도 무상으로 너를 도우려는 건 아니다. 너를 우리 편으로 만들어서 얻을 수 있는 이득은 분명히 있지. 그러나 지화를 주면서까지 일족으로 만들고자 하는건, 너라는 인간이 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으음?"
"잡소리는 집어치우고 대답해라. 내 제안을 들을테냐 말 테냐?"
나는 한참을 생각했다. 한백령이나 한진성도 이게 중대한 문제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재촉하지 않고 차분하게 기다려주는 모습이었다. 나는 한참을 생각하다가 결국 입을 열게 되었다.
"거절하겠소."
그러자 한백령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다시 낯빛을 원래대로 되돌렸다.
"그래? 그럼 됐다. 이 이야기는 없었던 걸로 하자."
"고맙소."
"헌데 한가지 물어보자. 너는 지화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거절한 것이냐? 거절한 이유 정도는 듣고 싶은데."
나는 잠시 숨을 들이키고는 차분하게 말했다.
"내가 가는 길은 현재 수라(修羅)의 길이오. 이 모든 일이 해결되기 전까지 옆을 돌아볼 여유는 없소. 하물며 내게 진심이 아니라 강요당해서 시집을 온다면 나와 그녀 모두가 불행해질 것이오. 또한 복수도 내 힘으로 할 수 있어야 의미가 있는 것이니, 당신들의 힘만을 빌리자고 함부로 중대한 결정을 내릴 수 없소."
그렇다.
물론 나도 낙양사화라고 불리는 한지화와 결혼해서, 그녀의 육체를 탐하고, 원하는만큼 여인을 즐기고 행복한 삶을 살고 싶다. 그러나 나는 현재 금의위 총령에게 복수하고 나아가서 황궁의 음모를 밝혀내는 목표를 지니고 있으며, 그걸 해내기 전에는 쉬지 않기로 스스로 맹세했다. 그렇기에 강요당하는 결혼같은 걸로 어설프게 족쇄를 차여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
게다가 내가 만일에 그녀와 결혼해서 수 년간 행복한 삶을 보내다가 운나쁘게 죽어서 전생(轉生)을 하게 된다면?
나는 10번째나 11번째 인생에서 한씨세가를 대할 때 냉정해질 자신이 없었다. 어떻게든간에 나와 몸을 섞고 정을 통했던 연인인 한지화를 지켜주기 위해 노력하게 될 것이다. 만일에 그녀와의 관계에서 친자식이라도 생겼었다면 답이 없다. 내 정신력은 피폐하다못해 망가지고 말 것이다.
그것은 내 전생과정 전체가 애욕(愛慾)에 삼켜진다는 것이니 그보다 괴로울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내가 정을 주고 편안한 여생을 보낼 수 있는 여인 정도는 내 의지로 택하고 싶었다. 그걸 위해서는 우선 눈 앞에 놓인 과제와 복수부터 충실히 이뤄내야 하는 것이다. 내 대답을 들은 한백령은 진심으로 감탄한 듯 말했다.
"대단하군. 너는 사파(邪派)의 기질이 강하지만 굳센 독기와 의지력이 있구나. 너같은 자는 어디를 가더라도 대성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이야기는 그만 합시다. 그 외에는 할 이야기가 없소?"
"네가 내 제안을 거절했으나 나는 네게 도움을 주고 싶다. 왜냐하면 네 유파와 나는 관련이 있기 때문에 한 줌이라도 도와주고 싶은 것이다."
"관련이 있다고?"
그러자 한백령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유파의 스승에게 들었다면 짐작하고 있겠지만, 우리 한씨세가는 화신류(火神流)를 전승하는 집안이다."
"설마 당신은...!!"
"그래."
한백령의 대답에 나는 눈을 부릅떴다.
"내가 바로 화신류의 전승자인 한백령이다. 뇌신류와 마찬가지로 백련교의 후예이다."
"......!!"
백련교 !
나는 짐작하고 있었던 사실이긴 했지만 침음성을 흘렸다. 이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면 당장 천지가 뒤집히게 될 것이다. 어쩐지 말도 안되는 무공의 소유자이긴 했다. 내공만 해도 천년설삼을 몇 번이나 처먹은 나와 큰 차이가 안 나고, 가히 인간을 초월한 듯한 절세적인 무공을 시전하다니!
그러나 그녀가 그 '괴물' 이광과 동급의 전승자라면 납득은 갔다. 반로환동의 고수인데다가 저토록 강한 존재라면 그럴 수밖에 없긴 하다.
그리고 또 한가지가 납득이 되었다. 본가의 무학이 백련교 화신류라면 당연히 황궁어전대회에 나갈 수 있을 리가 없다. 당장은 황궁무인들이 알아보기 힘들지 몰라도 정보가 쌓일수록 백련교와의 연관성을 이을테니 최대한 무공을 숨기려 하는 것이다.
동시에 나는 꿀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왜냐하면 머릿속에 한 가지 가정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 설마 그녀는...'
나는 묻고싶은 게 너무 많았지만 동시에 아득한 공포감이 찾아왔다. 금의위 총령조차도 호법사자를 일대일로 이길 자신이 없다고 했을 정도이니, 현재의 나로써는 상대가 불가능한 초고수였다. 내가 당황하자 한백령이 말했다.
"궁금한 게 많겠지. 허나 네가 우리 일족이 되지 않겠다고 했으니 더 이상의 이야기는 해줄 수가 없다."
나는 내심 후회했다. 이럴 거면 그냥 거짓말로라도 일족이 된다고 말해놓고 비밀을 들을걸... 이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으므로, 나는 안색에 평정을 되찾으며 말했다.
"내가 무림에 그 이야기를 누설할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 것이오?"
"그럴 필요가 있을까?"
"무슨 뜻이오?"
"뇌신류(雷神流) 또한 중원무림에서 이단(異端)적인 존재인 건 마찬가지란 거다. 또한 정체가 드러날 경우 우리는 거점을 백련교로 옮기기만 하면 되지만, 너희 뇌신류의 경우에는 중원무림은 물론이고 백련교에게도 백안시되지."
한백령이 차가운 눈빛을 흘렸다.
"물론 네가 비밀을 누설할 경우, 그 때는 내가 친히 너를 찾아가서 찢어죽여 주마. 당연한 거겠지?"
"... 알겠소."
나는 그녀의 말이 농담이나 허언으로 들리지 않았다. 왠지 한씨세가의 힘이라면 내가 세상 끝에 숨어있어도 찾아낼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물론 내가 전생하는 동안에 일부러 그 비밀을 누설시켜서 한씨세가를 골탕먹일 수는 있겠지만, 그 경우에도 왠지 나는 죽을 길을 일부러 찾아놓은 상태가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 그녀를 이길 힘이 생기기 전까지는 함부로 입을 놀리면 안되겠어.'
내가 속으로 중얼거릴 때 한백령이 말했다.
"나는 뇌신류에 마음의 빚이 있다. 뇌신류가 백련교에서 방출될 때도, 다소 어이가 없는 전개였지. 그 때 내가 적극적으로 도왔다면 뇌신류는 지금도 백련교의 호법가로 활동하고 있을터인데 아쉬운 일이다."
"그건 반세기도 훨씬 전의 일인데 당신은..."
"반로환동인 게 보이지 않느냐? 그 일은 내가 현역일 때 일어난 것이다."
"......"
뭔가 세월의 감각이 달랐다. 한숨을 쉬던 한백령이 말했다.
"되었다. 내가 추천장을 써 줄 터이니 너는 이 서찰을 가지고 관중의 청룡무관으로 가거라. 그 곳의 관주인 청룡 이광은 뇌신류의 달인이니 너에게 좋은 무공의 진보를 가져다 줄 것이다."
"무슨 소리요? 나는 황궁어전대회에 나가는 게 아니었소?"
"그건 다른 사람이 나가기로 했다. 뇌신류는 같은 뇌신류의 가르침을 받는게 제일 빠를텐데, 네 목적이 무공향상이라면 내 생각대로 하는 편이 낫겠지?"
맞는 말이었다. 확실히 내가 다시 이광의 제자로 들어갈 수 있다면 굳이 황궁어전대회에 들어가서 개삽질을 하면서 목숨의 위기를 겪을 이유가 없다. 나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질문했다.
"그가 납득한다는 말입니까?"
"물론이다. 그의 스승과 나는 알고지내는 사이였고, 제자인 이광과도 안면이 있다. 너는 그 점을 걱정하지 않아도 좋다."
나는 한백령이 내미는 서찰을 공손하게 받아들었다. 동시에 이것도 내 운(運)의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 좋군. 이걸로 위화감을 줄이고 다시 이광의 제자가 될 수 있어.'
한씨세가의 비밀을 마저 듣지 못한 것은 아쉽지만 지금까지 청룡무관 재입관 방법을 고민하던 내게 있어서 이건 큰 기회였다. 한백령이 저렇게 자신할 정도면 이광은 거의 백발백중 나를 받아들여줄 것이다.
"은혜에 감사하오."
"그만 물러가 봐라. 다음에 낙양에 올 때는 선물이나 하나 사 들고 오거라."
"알겠소."
나는 한진성을 따라서 한백령의 거처에서 물러났다. 나는 미로같은 복도를 따라서 한참동안 한진성을 따라갔는데, 어쩐지 출구에 도착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의아해서 한진성을 바라보자 그가 문득 멈추어서며 말했다.
"고맙습니다."
"뭐가 말이오?"
"내 사촌누이의 일... 고맙습니다."
강제혼례 이야기인 듯 했다.
한진성의 얼굴에는 지금까지의 담담한 표정이 믿기지 않을 정도의 격정이 흐르고 있었다. 그는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이 되어 있었다. 그는 다소 목이 메여서 말을 이었다.
"이 가문의 모든 것은 가주님의 뜻에 의해 좌우됩니다. 사실 이 부와 명예는 모두 가주의 힘으로 이룩된 것이므로, 우리는 늘 의무를 생각하면서 살지요. 지화의 혼례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의 말에는 강렬한 괴로움이 깃들어 있었다. 그래서 나는 선선히 대답해 주었다.
"나는 그저 나 자신을 위해서 거절했을 뿐이오."
한진성이 고개를 저었다.
"나는 가주 앞에서 확실하게 자신의 주관을 밝히며 거절할 수 있는 당신이 대단하다 생각했습니다. 이건 진심입니다."
"......"
누군가에게 이런 칭찬을 들어본 적이 없어서 민망하다. 내가 헛기침을 하고 있을 때 한진성이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나갔다.
"대가라고 하긴 그렇지만, 제 성의를 백웅 님께 드리고 싶습니다."
드르륵
한진성이 어떤 방의 문을 열었다. 그러자 안에는 고색창연한 한 자루의 검(劍)이 놓여 있었다. 검은 백옥으로 만들어진 거치대 위에 조용히 빛을 발하고 있었는데, 척 보기에도 굉장한 힘을 머금고 있는 검이었다.
"이건..."
한진성이 앞으로 걸어나가서 검집채 들어올렸다. 그리고 거치대를 벗어난 검의 중심 날 부분을 잡은 채 내게 내밀었다.
"이 검이 바로 용연(龍淵)입니다. 가져가 주십시오."
"용연!"
나는 깜짝 놀랐다.
용연이란 중국의 전국시대에 월나라의 명인 구야자가 간장과 함께 초나라 왕의 명으로 만들었다는 세 자루의 검 중 하나였다. 용천(龍泉)이라고도 불리는 이 검이 유명한 이유는 초패왕 항우가 지니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서진 황조의 시작을 알리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만큼 이게 진짜 용연이라면 그 진정한 가치는 상상조차 하기 힘들었다. 전설의 명검인데다가 역사적 가치로 보나 상징적 가치로 보나 일개 성(城)의 가치를 가볍게 넘어서는 것이었다. 이 검 하나때문에 전쟁이 일어난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다.
"이런 엄청난 물건을 받을 순 없소. 당신이 무슨 소리를 들으려고..."
"이 정도는 제 권한으로 드릴 수 있습니다. 용연같은 건 가주에게 있어서 그냥 수집품에 불과하니까요."
"......"
문득 나는 한씨세가가 중원 제일의 거부였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확실히 엄청난 부를 축적한 한씨세가라면 아무리 대단한 명검이라도 대단치 않게 여길 수 있다. 과거의 물건이 아무리 좋아도 현재의 권력에 비할 바는 아니기 때문이다.
"음, 그럼 잘 받겠소."
내가 용연검을 받자 갑자기 검의 전면에서 은은한 빛이 났다. 막야와 달리 갑골문같은게 떠오르지는 않았지만, 왠지 영기(靈氣)같은 게 떠올라서 내 몸을 감싸는 게 느껴졌다. 내가 그 녹색 기운을 쳐다보자 한진성이 신기한 듯 말했다.
"그런 현상은 처음 보는군요. 어쩌면 용연검이 자신의 주인을 인정한 건지도..."
잠시 후 기운은 사그라들었다. 나는 보물을 얻었다는 사실에 마음이 흡족해졌다. 하지만 이대로 가기가 아쉬워서 한진성에게 추가로 물었다.
"당신은 혹시 칠요의 비보라는 것에 대해 들은 적이 있소?"
"물론 도가의 전설이니 들어보았습니다. 하지만 너무 허무맹랑한 전설이라서 그 보물이 실제로 존재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지요."
용연검같은 보검을 수집할 정도라고 해도 칠요의 비보는 취급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하긴 너무 까마득한 전설상의 보물이니 그럴만도 했다.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재차 물어보았다.
"그렇다면... 당신은 뛰어난 두뇌를 지니고 있는 것 같은데, [세상의 남쪽 끝]이 어디라고 생각하시오?"
이건 내가 현천도인에게 들었던 화요(火曜)의 단서였다. 나는 눈 앞의 한진성이 망량에 버금가는 뛰어난 두뇌와 학식의 소유자라는 걸 직감했기에 약간이라도 비벼볼 구석이 있다는 생각을 했다. 한진성은 어리둥절해 하더니 대답했다.
"남만에서 더욱 남쪽으로 가면 천축 사이의 대해(大海)가 나오고, 대해를 더욱 넘어가면 야만(野蠻) 그 자체인 원시대륙이 있다는 걸 본 적이 있습니다. 거기서 더 가보았다는 자는 없어서 그 이상은 모르지요."
"원시대륙?"
"중화에서 그토록 머나먼 곳까지 가는 자가 있겠습니까? 일반적인 항해로는 불가능하겠지요. 제가 아는 건 거기까지입니다."
"......"
나는 왠지 칠요비보 중 화요에 도착하기 위해서는 굉장히 먼 길을 가야 할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왠지 수천 리의 단위로는 계산이 되지 않는, 그런 아득한 곳에 있지 않을까 하는 불길한 생각이 든 것이다.
나는 한진성과 작별인사를 한 후 관중의 청룡무관으로 향했다.
' 수라문의 추격자 같은건 없군.'
신기한 일이었다. 보통 전생의 경험상 이때쯤이면 기회다 싶어서 사파나 마도놈들이 다구리칠 때가 다가오곤 했는데, 그런 낌새조차 없는 것이다. 아마도 수라문에서는 한씨세가에게 밉보이기 싫어서 아예 나에게서 관심을 놓아버린 모양이었다.
그리고 며칠 후 나는 관중의 청룡무관 앞에 도착했다.
"......"
이걸로 4번째 입관인가. 나는 감개가 무량하다기보다는 기가 막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설마 내가 그냥 오는 것도 아니고 낙양에서 온갖 모험을 하다가 화신류의 추천을 받아서 여기로 돌아오게 될 줄이야.
방일 형제는 무관의 정문을 지키고 있지 않았다. 내가 성큼성큼 와룡전 앞까지 가자, 그 곳에는 내 기(氣)를 느끼고 있었는지 청룡무관의 관주 삼절 이광이 나와 있었다. 진소청 사범은 보이지 않았다.
이광은 냉막한 인상으로 나를 쳐다보다가 내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서찰을 보여 주게."
나는 그게 한백령의 추천장을 뜻하는 걸 알고 있었기에 망설임없이 이광에게 건네주었다. 이광은 약 십 초 정도 훑어보더니, 갑자기 삼매진화(三魅眞火)의 수법으로 서찰을 불살라버렸다.
화르륵
순식간에 서찰을 없애버린 이광이 씹어뱉듯이 말했다.
"... 화신류의 할망구가 미쳤군. 자기 보신에 급급해서 스승님의 위기를 외면하더니 감히 내게 타 뇌신류 제자를 추천해?"
뭔가 이상하다.
분위기가 이상하다.
' 으허억... 씨발...'
나는 뭔가 잘못되어가는 느낌에 태허천존을 떠올렸다. 분명히 지금까지는 운이 아주 좋았는데, 왜 갑자기 이런다는 말인가? 이광의 살기가 선명하게 돋아나는 걸 보니 심장이 떨어져 내리는 기분이 들었다. 저 괴물이 폭주하면 나는 도저히 살아날 방법이 없기 때문이었다.
이광이 갑자기 내게 창과 검을 한 자루씩 던졌다.
내가 엉겁결에 그걸 받아들자 이광이 나직이 말했다. 그는 진심으로 두 눈에 살기를 띄고 있었다.
"대련이다. 내가 납득하지 못하면 넌 여기서 죽는다."
그 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태허천존의 행운은, 비교적 짧은 시간만 유지되는 것이고, 그나마도 소모성이 아닌가 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