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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마전(伏魔殿)
나는 그 후 한씨세가의 소가주를 따라서 별채로 향했다. 소가주가 나보다 앞서가며 말했다.
"백웅이라 하셨습니까? 저는 한씨세가의 소가주인 한진성(韓晉星)이라고 합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나는 이제 빈객으로 있을 수 있는 것이오?"
"물론입니다. 단, 몇 가지 부탁을 들어주셔야겠지만요."
나는 힐끔 한진성을 바라보았다. 그는 곱상한 미소년이었으나 상당한 무공을 지니고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방금 나와 한백령의 대결에서 기파(氣波)에 노출되고도 멀쩡할 수 없는 것이다. 저 나이로 볼 때는 그도 상당한 무공의 기재로 보였다.
한진성은 별채의 문을 닫고는 말했다.
"혹여 황궁어전대회(皇宮御前大會)라는 걸 들어보셨습니까?"
"그건 무술대회가 아니오?"
"잘 아시는군요."
황궁어전대회!
그것은 일종의 무술대회였다. 단 보통의 무술대회와는 다르게 황제가 직접 참관해서 지켜보는 무술대회였다. 그렇기에 황궁어전대회에는 대륙 각 문파의 실력자들이 참여한다고 들었으며, 심지어는 일대 문파의 장문인급도 참전한다고 들었다. 4년에 한 번 열리는 대회이기 때문에 무림문파들은 이 대회에서 영광을 누리기 위해서 실력자를 참가시키곤 했다.
그러나 1위에서 3위까지의 수상자는 강제로 금의위에 들어가야만 했다. 그러므로 이 대회에서 무작정 우승해서 명예를 얻는 것도 생각해볼 일이었다. 하나의 문파를 이끌어야 할 장문인이나 장로가 덜컥 황궁소속이 되어버리면 곤란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무림문파들은 암묵적으로 문파를 이끌 정도의 지명도는 아니지만 무공이 뛰어난 자를 황궁어전대회에 넣고는 했다. 그래서 대개는 20~30대의 후기지수들이 출전하는 편이었다. 때때로 40대의 장년고수가 나오기는 했지만 별로 시선이 좋지는 않았다.
아마 내가 보아왔던 류 조장, 곽 조장같은 인물들도 황궁어전대회에서 최상위서열에 올랐던 극강의 실력자들일 것이다. 그들 정도 되니 구파일방의 장로에 맞먹는 실력을 보였던 것이리라. 내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한진성이 말했다.
"쌍문사가에는 황궁어전대회의 예선(豫選)을 치르지 않아도 참가할 권리가 주어집니다. 각 문파마다 이 석(二席)이 배정되며 본선 128강에서부터 시작되는 셈이지요. 대신에 쌍문사가의 무인들은 예선에 추가로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무슨 말을 하고싶은 거요?"
"가주의 뜻은, 백웅 님을 한씨세가 대표로 그 2석 중 한 자리로 내보내고 싶다는 말씀이십니다."
"......"
나는 어이가 없어서 입을 쩍 벌렸다.
4년에 한번 열리는 황궁어전대회! 그건 문파의 명예를 건 대결이자, 중원의 차세대를 책임질 후기지수들의 경연이기도 할 것이다. 그렇게 커다란 대회의 본선진출석을 뜬금없이 오늘 들어온 나같은 식객에게 내어주다니? 이건 정말로 말도 되지 않는 일이었다.
나는 말했다.
"미친 소리군. 나를 놀릴 셈이면 가만 두지 않겠소."
"농담이 아닙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습니다."
"무슨 사정 말이오?"
한진성이 한숨을 쉬었다.
"저희 가주께서는 그리 황궁어전대회를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아니, 가능하시다면 한 자리도 내보내고 싶어하지 않으시죠. 그렇기에 대개는 본가의 무인 대신에 빈객을 내보내곤 합니다. 이번에도 빈객 중에서 어전대회 출전자를 선발하려 했는데 백웅 님이 가주님의 눈에 드신 겁니다."
"나 말고도 빈객 중에는 고수가 많을 것 같소만."
"하지만 그 누구도 존재감만으로 다른 빈객들을 긴장하게 할 수는 없지요. 적어도 저는 충분한 자격이 있으시다고 생각합니다."
너무나 수상쩍다.
이런 제안을 받아들이는 게 바보짓일 것이다.
나는 지금 당장이라도 이번 제안을 물리치고 그냥 뛰쳐나가고 싶은 생각에 시달렸지만, 이내 마음을 가라앉혔다.
' 그래. 어차피 목숨을 걸고 수행을 하며 정보를 얻기로 하지 않았는가?'
황궁어전대회쯤 되는 곳이면 적어도 다굴을 맞을 일은 없을 것이다. 게다가 내가 원했던 대로 일대일의 실전경험을 쌓을 수 있는 장소이다. 내가 생각했던 수련장소로는 최적인 것이다. 이제 와서 함정일거라고 생각해서 피하기에는 매력적인 미끼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배신당해서 죽을 각오까지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그럼 나 말고 다른 자는 누구요?"
"아까 보셨던 기룡신군이라는 분이십니다. 빈객 중 최고의 실력자이시죠."
"흠."
나는 기룡신군이 누군지 잘 몰랐다. 하지만 한진성의 평가에는 동의할 수 있었다. 아까 나를 둘러싸고 있던 그 많은 고수들 중에서도 기룡신군의 기도는 단연 눈에 띄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아마 내공만으로는 현천도인이나 구파일방 장로급과 맞먹는 자가 아닐까 싶었다.
"그런데 내가 만일 입상하여 금의위가 되면 그땐 어쩔 생각이오?"
"어쩌긴요. 그냥 되시면 됩니다. 뭐라고 할 생각은 전혀 없으니까요."
"......?"
정말로 뭔가 이상하다. 보통은 강력한 전력이 될수도 있는 무인을, 황궁측에 내주고도 멀쩡할 수가 없다. 아무리 빈객을 내어준다지만 그렇게 속쓰린 일을 그냥 해버린단 말인가? 내가 의혹섞인 눈으로 한진성을 바라보자 그가 말했다.
"흠... 지금 제가 생각해도 오해의 소지가 많은 이야기를 한 것 같군요."
"당연한거 아니오? 목에 뭐가 걸린 것처럼 껄끄럽기 그지없소."
"좀 더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저희 한씨세가에서는 황궁어전대회에 일말의 집착도 없으며, 그런건 아예 나가고 싶지 않으며, 본가의 무학(武學)을 강호에 노출시키고싶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빈객을 모집해서 출세의 기회를 굳이 주며 양보하는 것입니다. 서로가 좋은 일이지요."
자파의 무학을 노출시키고 싶지 않다!
그것은 확실히 큰 이유가 될 수 있었다. 나는 비기를 철저히 숨기려 했던 진소청의 모습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빈객을 모집한 게 그런 이유였소?"
"물론 빈객들이 꼭 황궁어전대회 선발자리를 얻으려고 본가에 모이는 건 아닙니다. 본가는 빈객의 대접을 철저히 해 드리기에 그게 마음에 들어서 몇십 년째 머물고 계신 분들도 있지요. 물론 황궁어전대회가 일부러 우승하고 말고 할 정도로 만만한 대회는 아니니 너무 우습게 보지는 마시길."
"... 알겠소."
"빈객이시니 별채 하나를 내드리겠습니다. 앞으로는 여기서 지내시면 됩니다."
나는 힐끔 별채를 둘러보았다. 확실히 이 곳은 왠만한 집보다 넓고 쾌적해 보였고, 가재도구나 가구도 굉장히 고급스러웠다. 내가 금괴를 주고 구매한 집보다 더 좋을지도 모른다. 나는 어떻게 할지 고민하다가 말했다.
"아니오. 미안하지만 나는 이미 집을 한 채 구매한 상태라서, 거기서 지내고 싶소."
"그럼 빈객이라는 의미가 없습니다만..."
"어떻게 안 되겠소?"
"흐음... 이렇게 하지요."
한진성이 싱긋 웃었다.
"황궁어전대회는 지금부터 석달 후에 열립니다. 그 사나흘 전에는 본가에 돌아와서 대기해 주십시오. 이 정도면 되겠습니까?"
"다시 한가지 물어볼 게 있소. 내가 빈객 대표로 나간다 해도 다른 빈객들이 화를 내지 않겠소?"
"그들에게 불만이 있다면 직접 소협에게 결투를 청해서 자격을 얻으려 하겠지요. 그 정도는 감내해 주시길."
즉 화딱지난 빈객들이 내게 결투를 거는 것에는 간섭하지도 상관하지도 않겠다는 뜻이었다. 나는 정말로 대충대충인 걸 알자 어이가 없어질 지경이었다. 나는 한씨세가의 의도를 깨닫고 말했다.
"당신들은 한씨세가 대표로 누가 나가도 상관없는 거군."
"정확히는 망신살을 뻗치지 않을 정도라면 누구라도 상관없습니다. 백웅 님은 그 조건에 맞는 것이고요."
"좋아. 나도 내 목표가 있으니 당신들 제안을 받아들이겠소."
나는 한진성을 노려보며 으르렁거렸다.
"하지만 깔보지 마시오. 당신들이 나를 이용하려 한다면 혹독한 댓가를 치르게 해 주겠소."
이건 빈 말이 아니다.
나는 전생을 반복하면서 이미 수많은 원한을 마음속에 꿍쳐둔 상태다. 특히 마도팔문같은 경우는 나중에 시간과 여유가 된다면 언제고 복수할 의지가 충만하다. 세상에서 나에게 원한을 사는 것보다 어리석은 일은 없을 것이다. 한진성이 말했다.
"너무 화내지 마십시오. 어차피 서로가 서로를 이용하는 관계라는 걸 알고 들어오신 게 아닙니까?"
"그건 그렇지만."
"날도 늦었으니 저녁은 이쪽에서 대접해 드리겠습니다. 많이 드시고 가십시오."
나는 한진성을 따라서 식당으로 향했다. 그리고 한진성이 나가고 나서, 한씨세가에서 내놓는 융숭한 음식을 지켜보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옆에 서 있던 시비 두 명이 놀라서 말했다.
"어머..."
"왜 그러십니까?"
나는 그녀들에게 말했다.
"미안하지만 배가 별로 고프지 않군. 한진성에게는 잘 먹었다고 전해 주시오."
휘익!
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한씨세가에서 나가 버렸다. 나는 왜인지 몰라도 남이 주는 물이나 음식을 왠만해서는 먹지 않는 습관이 들어버렸다. 왠만큼 내가 안심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면 입에 안 대는 게 버릇이 된 것이다. 그것은 난데없이 중독(中毒)되어서 처참하게 죽을 수도 있다는 무의식적인 불안감 때문일지도 몰랐다.
나는 아무 객잔으로나 찾아가서 방을 잡고 누웠다.
' 황궁어전대회라.'
싸우다가 죽거나 불구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럴 경우엔 어떻게 해야하는가? 차라리 죽어버린다면 속이 시원해지겠지만 불구라면 그것또한 문제다. 시간만 낭비하고 힘들게 살아갈 확률이 컸다. 나는 불구가 되는 상황이 오면 스스로 심맥을 끊어서 자결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가능하면 이번에는 눈치보지 않고 최대한 싸워서 황궁어전대회의 우승을 노려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어전대회에 나온 절정고수들과 싸우면서 무술의 숙련도를 높이고, 덤으로 금의위에 들어가서 현재 그들의 동향을 살피는 것! 꿩먹고 알먹고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하지만 한백령을 생각하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 대체 그 여자의 정체는 뭐지?'
한씨세가의 가주라고 스스로를 밝힌 그녀는 분명한 반로환동의 고수였으며 초절정고수였다. 그것도 청룡이라고 함부로 이야기할 수 있으며 제자를 서슴없이 죽이려 할 정도면 이광과 그리 좋은 관계가 아닐 가능성이 컸다. 믿기지 않는 일이지만 한백령의 내공은 천년설삼을 몇 번이나 먹은 나에 비해 그리 떨어지지 않았다.
쌍문의 문주가 사가의 가주보다 한 수 위의 실력인 걸로 알고 있었는데 그런 존재가 있었단 말인가? 더불어 한씨세가가 중원 최고의 거부(巨富)라는 사실도 마음에 걸렸다. 무언가 내가 한씨세가에 대해서 놓치고 있는 연결고리가 있을 것 같았다.
아무튼 이제 남은 것은 3달이다.
한진성이 내게 유예기간을 준 이상, 그 동안은 내 마음대로 해도 되는 것이다.
나는 사흘 후 관리를 찾아가서 집의 문서와 인장을 받았다. 관리는 내게 문서를 내어주며 말했다.
"특별히 사람을 고용해서 집청소까지 다 해 두었네. 자네는 그냥 들어가서 살기만 하면 돼."
"고맙습니다."
"흐흐흐. 자네는 땡잡은 줄 알게. 나처럼 친절한 사람도 없건만."
메기수염을 떨며 웃는 관리를 보며 나는 속으로 비웃었다.
' 니놈이 차액으로 은자 수백 냥은 챙겨먹은 걸 누가 모르는 줄 아느냐?'
아마 자신이 금괴를 가지고, 은자 오백냥은 커녕 삼백 냥은 될까말까한 돈을 졸부에게 건네주고, 덤으로 중개료까지 챙겼을 것이다. 관리가 중간에 삥땅친 돈은 굉장한 수준인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걸 알면서도 굳이 관리에게 금괴를 넘겨준 셈이었다. 왜냐하면 큰 돈을 받은 만큼 그자 본인이 입단속을 할 것이며, 동시에 뒷말이 안나오게 하려고 일을 열심히 해 줄 것이기 때문이다. 메기수염 관리는 나를 호구로 보았겠지만 나는 단지 귀찮은 일을 피하기 위해 최선의 방식을 택했을 뿐이다.
나는 집 안에 들어가서 안온한 햇빛을 즐겼다. 내가 전생하면서 온갖 고생을 겪는 게 생각도 나지 않을 정도로 기분좋은 햇빛이었다.
' 사실 이런 집을 가져보는 게 꿈이었어.'
첫 인생에서 표사일을 하면서 찢어지게 가난하던 시절 - 나는 인생대박나서 큰 집에서 여유롭고 편하게 사는 삶을 간절히 원했었다. 그리고 수요의 유적에서 얻은 금괴를 이용해서 손쉽게 그 꿈을 이룬 것이다. 표사 일을 수십년해도 얻을 수 없었던 재산을 한순간에 손에 넣자 실감이 나지 않았다.
집의 마루에서 뒹굴대며 낮잠을 자려고 할 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 이제 열심히 살 필요가 있나?
참극의 마을 태경촌의 일도 봉인된 거 같은데, 그냥 남은 재산으로 편하게 한평생을 살면 안되는 걸까?
마음만 먹으면 가진 돈으로 뛰어난 미녀를 삼처사첩 거느리고 매일같이 태평하게 놀면서 살 수도 있다. 남아있는 금괴 9개에는 충분히 그 정도의 재력이 존재한다.
"......."
너무 혹한다.
나는 끙, 하면서 머리를 부여잡은 채 고민했다. 확실히 이제는 죽는다는 걸 전제하지 않고도 충분히 생을 누릴 수 있을 정도의 여유가 손에 들어온 것이다. 한씨세가에서 빈객대표로 황궁어전대회에 내보내니 마니 하는 이야기도 그냥 거절해버리고 이 집에서 편하게 살면 그만이다.
' 그래... 내가 왜 꼭 금의위 총령과 싸워야 하는 거지? 주술사가 사라졌으니까 인신공양을 할 일도 없을 거고, 그놈들이 칠요를 모으든 말든 지금 나랑 별 상관은 없잖아!'
나는 머릿속이 멍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왜냐하면 바로 지금, 인생의 선택의 순간이 왔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이대로 계속 나아가느냐 - 아니면 더 이상 나아가기를 포기하고 멈춰서느냐!
어느 쪽을 택하든간에 상관은 없지만, 후자를 선택할 경우 더 이상 죽음의 고통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 컸다. 나는 멍하니 앉아서 한참동안을 고민했다. 단언컨대 이번 생에서 가장 길고 고통스러운 고민의 시간이었다.
그렇게 반 시진동안 고민한 후 나는 중얼거렸다.
"안 돼. 아직 멈출 수 없다."
곰곰히 생각해 봤지만 이대로는 그만둘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아직까지 뇌신류의 무예를 다 익히겠다는 목표를 달성하지도 못했을 뿐더러, 마도팔문에게 개처럼 다굴맞아서 죽었던 원한도 아직 갚지 못했다. 무엇보다도 금의위 총령이란 놈에게 한 방 먹여주지 않으면 남자로써 사는 게 아닌 것이다.
굴러다니는 망량의 목을 보면서 내 비참함을 곱씹었던 그 원한!
그걸 갚아주기 전에는 평안한 삶을 선택할 수 없는 것이다.
부웅 부웅
나는 잠시 후 일어나서 집 안의 텅빈 공터에서 조용히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총령. 반드시 네놈 목을 베어주마."
인생은 단절된 순간이 아니다.
지금의 행동이 미래에 이어지기 때문에, 시간을 아껴서 살아야 하는 것이다.
앞으로 세 달 동안 어전대회에 나가기 전까지 나는 뇌신류의 수법과 무공을 더욱 완벽하게 터득할 생각이었다. 또한 지금 끌어내지 못했던 내공의 잠력을 더 익숙하게 사용하는 연습을 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