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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마전(伏魔殿)
나는 청마사흉을 토벌한 공적을 따로 말하지 않기로 했다. 시간을 지체하느니 한시라도 빨리 내 무공을 시험해보고싶은 생각에 가득 찼기 때문이었다. 또한 토벌의 공적은 현천도인의 것으로 해 달라고 부탁했다.
"허허, 과연 의협(義俠)이로고!"
현천도인이 감탄하며 나를 칭찬했다. 하지만 나는 그저 어슴프레 웃을 수밖에 없었다. 여하튼 내가 백수십 명의 인간을 참살(斬殺)한 건 사실인데 칭송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 웃겼다. 그런 생각을 겉으로는 표현하지 않고 현천도인에게 포권하고 떠났다.
' 칼날이 많이 상했군.'
백 명 이상 베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아무리 검기를 덧씌웠어도 칼날이 상할 수밖에 없다. 나는 검(劍)의 날이 꽤 많이 빠져있는 걸 느끼고 다시 태경촌에 들러서 검을 한 자루 샀다. 사실 칼날을 다시 갈아서 써도 되겠지만, 이광이 준 여비가 많았기 때문에 검 하나 사는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기에 그냥 새 칼을 샀다.
새로운 검을 허공에 휘둘러 보자 기분이 약간 좋아졌다.
타앗
조벽 마을로 향하는 걸음은 가벼웠다. 그것은 지금까지 내 마음속에 있었던 암울한 기분이 많이 씻겨내려갔기 때문이었다.
참극이 사라졌다.
격렬한 암울함과 의분(義憤)을 동시에 가져다주던 참극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 그건 상쾌함과 해방감을 가져다주었다. 내 힘으로 막지 않았다는 허탈감은 있었지만 그래도 좋았다. 청마사흉 토벌에 적극적으로 나선 것은 그 기분을 더욱 만끽하고 싶어서였을지도 모른다.
이제 내 맘대로 살아도 되는 거 아닐까?
그런 생각때문에 홀연히 마음속이 들뜨고 기분좋아지는 건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물론 그 이유는 알아보아야 할 것이다. 나는 조벽 마을에 도착하게되어서 흑야문과의 접선까지 성공하면, 비무에 승리한 후 망량을 찾아가 볼 생각이었다. 마도팔문 흑야문과 싸워도 살아남았다는 것이 내 충분한 자랑거리가 될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며칠 후 조벽 마을에 도착하자 나는 촌장의 말을 떠올렸다.
' 이 마을에서 한광일이라는 파락호를 찾으라고 했지?'
나는 파락호를 찾는 가장 좋은 방법은 주루(酒樓)나 도박장에 가는 거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 조벽 마을까지 온다고 피곤했기에 오늘은 객잔에서 짐을 풀어서 쉬고, 내일부터 찾아보기로 했다. 객잔에서 만두와 소채 요리를 시켜서 먹고 있을 때였다.
피리릭 피릭
"......?!"
나는 갑자기 객잔 문을 통해서 왠 시허연게 날아들자 깜짝 놀랐다. 순간적으로 베어버릴 뻔 했지만 그 새하얀 것은 종이(紙)로 만들어진 새였다. 종이새는 날개를 파닥파닥거리더니 내가 앉아있는 탁자 위에 내려앉았다.
종이새는 마치 살아있는 것 같았다. 그러더니 갑자기 힘을 잃고 풀썩 주저앉았는데, 평범한 종이로 되돌아간 듯 했다. 나는 황당해서 종이새를 잠시 지켜보다가 손을 뻗어서 종이를 풀러 보았다.
안에는 익숙한 필체로 쓰여진 편지가 쓰여져 있었다.
[ 처음 의뢰를 받은지 꽤 긴 시간이 지났구려.
당신은 충분히 많이 수행을 했소?
나 망량은 당신이 가져와 준 보검(寶劍)에 대해 많은 조사를 했소. 그리고 충분히 당신에게 알려 줄 단계가 되었다고 생각했기에 이렇게 지조(紙鳥)를 보내어 연락하오. 만일에 시간적 여유가 된다면 나를 찾아와 주길 바라오.
- 망량 남김.]
"......"
나는 이 종이새가 모종의 술법(術法)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걸 알아챘다. 그리고 그건 아마 망량 본인의 힘으로 펼친 술법일 것이다. 단지 내가 아는 망량에게는 술법의 재능이 눈곱만큼도 없었기에 이렇게 정확하고 뛰어난 술수를 구사한다는 걸 믿을 수가 없었다. 망량은 3년동안 어떤 방식으로든 술수의 능력을 높인 게 분명했다.
' 어떻게 하지?'
이미 흑야문과의 접선방법을 알고 있으니 이르면 내일 중이라도 흑야문과 바로 비무를 겨뤄서 결과를 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만일 비무에서 패배하고, 나아가서 도주마저 불가능해져서 사망하게 된다면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게 된다. 공연히 그럴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흑야문과의 대결을 서둘러야 하는가가 문제였다.
다만 지금 내 힘을 간절하게 시험해보고 싶다는 것도 사실이다. 나는 한참동안 고민을 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어쩔 수 없군. 찾아가는 수밖에."
충분한 힘을 쌓기 전에는 망량을 찾지 않기로 맹세했지만, 칠요의 비보에 관한 정보는 현재 굉장히 중요한 것이었다. 죽을 때 죽더라도 일단 그걸 알아보고 죽는 편이 낫다고 생각될 정도인 것이다. 게다가 기문둔갑에서 기초술수밖에 쓰지 못하던 망량이 이렇게 고급술법을 시전할 수 있게 된 이유도 궁금했기에 찾아가 볼 수밖에 없다.
나는 별 수 없이 조벽 마을에서 다시 망량이 있는 진랑곡으로 가기로 했다. 사실상 거의 다 왔던 길을 다시 뺑뺑 돌아가는 셈이었기에 똥개훈련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기에 나는 죽어라 산길을 다시 내달렸다.
타다다닷
"... 또 왔군..."
며칠 후 나는 태경촌에 다시 들러서 한숨을 쉬었다. 그런데 태경촌에 들러서 객잔에서 쉬고 있으니 사람들의 시선이 조금 이상했다. 의아해서 주변을 둘러보자, 개 중 한 사람이 조심스럽게 다가와서 내게 물었다.
"혹시 얼마 전 청마사흉을 토벌하신 영웅이 맞으십니까?"
"......?"
"인상착의와 생김새가 너무 비슷하셔서... 본인이시라면 꼭 저희 화씨 가문에서 모시고 싶습니다."
나는 청마사흉을 죽였던 일이 퍼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원인은 아마도 현천도인일 거라고 짐작했다. 현천도인에게 그냥 공적을 자기 걸로 하라고 말해뒀는데, 양심상 내가 함께 했다는 말을 세상 사람들에게 전파한 모양이었다.
' 으... 쓸데없는 짓을.'
나는 현천도인의 쓸데없는 배려에 기가 막혔다. 다른 사람들은 쌓지 못해서 안달인 게 명예인데 그걸 왜 굳이 내게 나누어주려 하는 걸까? 아무튼 지금의 상황은 그리 달가운 게 아니었으므로 나는 고개를 저었다.
"저는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닐뿐더러 가는 길이 멉니다. 다음에 뵙지요."
"하... 하지만..."
그 때였다.
"아! 역시 있군요."
내가 고개를 돌리자 거기에는 고양이상의 미녀가 수행원 몇 명과 함께 객잔 입구에 나타나 있었다. 사람들이 술렁이는 걸 보자 역시 그녀의 신분은 매우 높은 것 같았다. 나는 익히 아는 얼굴이었기에 별수없이 포권하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정말로 청마사흉을 토벌하실 줄은 몰랐어요. 그렇게 백웅 소협이 그렇게나 무공이 높은 소년영웅이었다니."
"저와 관계없는 일입니다. 화련 님."
그녀는 화씨 가문의 아가씨인 화련이었다.
그녀는 살포시 웃더니 말했다.
"그럴 리가요? 태정관의 현천도인께서 자신과 함께 했던 소년영웅의 이야기를 이 일대에 널리 말씀해 주셨답니다. 현재 관(官)은 물론이고 일대의 백성들은 그대의 이야기를 회자하고 있답니다."
"......"
"가시는 길이 바쁘시더라도 부디 하루라도 화씨가문에 들러주셨으면 합니다. 청마사흉은 마을의 교역길을 막아서 큰 골치였는데 소협 덕분에 큰 도움이 되었어요. 이 보은(報恩)을 하지 않는다면 세상사람들이 두고두고 화씨가문을 조롱할 것이니, 꼭 부탁드립니다."
화련의 말은 정갈하고 예의발랐다. 게다가 주변의 보는 시선도 있으니, 이 상황에서 함부로 자리를 박차고 나가는 것도 그닥 좋은 일이 아니었다.
' 크윽... 이렇게 소문이 퍼졌으면 청룡무관 출신이라는 것도 알려질지도 몰라. 함부로 행동해서 청룡무관의 명예를 떨어뜨렸다는 이야기가 퍼진다면...'
이광은 현재 나에 대해서 거리를 두면서 간을 보고 있는 상태였다. 일단은 전승자로 인정하고 비기를 전수하고 있지만, 내게 큰 하자가 있을 경우 바로 절기의 전수를 멈추고 내칠 가능성도 있었다. 예전과는 달리 강해지고자 하는 목표가 있었으므로 '명예'를 짊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호락호락한 게 아니었다.
나는 별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나는 화련과 수행원들을 따라서 화씨가문으로 향했다. 화씨가문을 따로 세가(勢家)라고 칭하지 않는 이유는 구성원들이 무림(武林)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을 뿐더러 가전무공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철저히 금력으로 이 태경촌을 지배하는 일족이었다.
잠시 후 나는 화씨가문의 주인인 화종택(華綜澤)이라는 인물과 만날 수 있었다. 그는 나를 보자마자 만면에 미소를 짓고 환대했다.
"오오! 백웅 소협 반갑소. 내 꼭 그대를 보고 싶었다오."
화종택의 주변에는 십수 명이나 되는 시비와 하인들이 도열해서 공손한 자세를 하고 있었다. 그 나름대로의 성세와 위엄을 보여주려는 행동인 듯 했지만 내게는 가소롭게 보일 뿐이었다. 이미 낙양이나 세상 각지를 여행하며 장엄한 위세를 많이 구경해봤기 때문이다.
내가 정작 놀란 것은 화종택의 얼굴을 한 번 본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 ... 첫번째 잠입 때 내가 목을 베었던 광신도다.'
그것도 여자의 목을 한쪽에 끼고 있던 기묘한 광기의 광신도! 그 때는 광신도 하나하나를 일일이 구분할 이유가 없었기에 별 생각이 없었지만, 지금 보니 그 때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화씨가문의 주인인 화종택은 이미 광기에 전염당해서 광신도로 변해서 이 저택을 떠돌고 있었던 것이리라.
화종택은 그걸 자신의 위엄에 놀란 걸로 착각했는지 껄껄 웃었다.
"하하! 소협 덕에 다시 상로(商路)가 뚫려서 큰 손해를 보지 않을 수 있었소. 적어도 은자 오백 냥의 이득을 본 셈이니, 이 어찌 고맙지 않겠소! 내 적어도 소협에게 그 절반에 상응하는 대접을 해 드리리다."
"아... 말씀은 고맙습니다만, 저는 급히 갈 길이 있기에 오래 머물 수가 없습니다."
"흠 유감이구려... 그렇다 해도 오늘 하루는 소년영웅을 우리 화씨가문이 모실 수 있도록 해 주시오 하하!"
"네에..."
"여봐라 백웅 소협을 안으로 뫼셔라."
내가 안으로 들어서자, 이미 화려한 만찬이 준비되어 있었다. 족히 이 장은 되는 평상에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호화로운 요리가 가득했다. 닭요리는 물론 오리요리, 염소요리, 거기에다가 낙양에서 본 적이 있는 고급요리도 준비되어 있었다. 내가 태어나서 이렇게 화려한 식사를 해본 일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자 많이 드시오. 오늘을 위해서 일부러 낙양에서 유명한 주사를 예까지 초빙해 왔다오."
"뭐 그러시다면..."
나는 뻘쭘하게 앉아있다가 천천히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과연 뛰어난 요리사가 만든 것인지 하나하나의 요리가 고급스럽고 맛있었다. 그동안 객지를 뛰어다니면서 그다지 좋은 식생활을 하지 못했기에 나는 기분좋게 먹을 수 있었다. 내가 닭다리를 뜯고 있을 때 화종택이 말을 걸어왔다.
"소협은 아직 나이가 덜 되어보이는데 어찌 그리 강한 무공을 지니고 있소이까?"
"그저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허허, 겸양이 과하시구려... 청마사흉의 휘하에 있던 수백의 도적을 물리치는 건 보통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거늘."
"모두 현천도인께서 하신 일이지요."
우물우물
나는 적당히 둘러대고는 맛있게 음식을 먹는데 집중했다. 어차피 대접을 해 준다는데야 거절할 이유가 없다. 여기서 때깔좋게 밥이나 잘 먹고 갈 생각이었다. 나는 문득 생각난 게 있어서 오리다리를 든 상태로 물었다.
"궁금한 게 있습니다만, 혹여 지난 3년간 이 근처에서 수상한 무리나 사교(邪敎)의 소문을 들은 적이 있으십니까?"
화종택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음... 그런 일은 없소만..."
"뭔가 특이한 일 같은것도 없었습니까?"
"흐음..."
화종택은 진지하게 고민하다가 기억이 났다는 듯 손가락을 딱 마주쳤다.
"아! 그러고보니 금의위(錦衣衛)의 위사들이 머물고 간 일이 있었지."
"......!!"
있었단 말인가?! 나는 오리다리를 내려놓고 급히 말했다.
"그 얘기를 좀 더 자세히 들려 주십시오."
"딱 3년 전의 일이오. 황궁에서 금의위의 위사들이 나와서 조사(調事)를 위해서 약 7주야동안 이 마을에 머물고 간 일이 있었소. 거절할 수 있는 일도 아니라서 그들을 대접해 주었지."
"무슨 조사였습니까?"
"나도 잘은 모르겠으나... 유적(遺跡)을 찾는다고 얼핏 들었던 것 같소. 별다른 성과가 없었는지 그냥 가버리긴 했지만."
"어떤 유적요?"
"잘 모르오. 금의위를 이끌던 자가 내게 납득시키려고 몇 마디 한것밖에 없어서. 그저 그들은 처음부터 그걸 찾기 위해 이 땅에 왔던 것 같더군."
유적.
나는 그게 왠지 칠요(七曜)와 연관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주술사의 인신공양을 위해서 비밀리에 활동해야 할 금의위가 대놓고 마을에 모습을 드러낼 리가 없는 것이다. 나는 이 식사에 초대되길 잘했다고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그랬군요.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하하... 금의위에 들어가고 싶으시오? 하긴 청년무인들은 대개 거기에 들어가는 게 꿈인 것 같더군."
"지금은 그리 흥미 없습니다."
나는 적당히 둘러대고는 잡담으로 주제를 옮겼다. 나는 화종택과 이후 한 식경 조금 넘게 식사를 하다가 내게 마련된 침실으로 들어갔다. 시비들이 따뜻한 물을 데워놓았기에 목욕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잠을 자려고 침실에 누워서 약 반 시진이 흘렀을 때였다.
"......?"
왠 가냘픈 신형이 침실로 들어오는 게 느껴졌다. 어둠 속이지만 발달된 기감이 그 사실을 쉽게 감지하고 있었다. 나는 무슨 일인가 싶어서 상체를 일으켰는데, 어느 새 가까이 다가온 그 인영이 내 가슴팍을 만지며 말했다.
"가만히 있어 보세요."
"화련 님?"
그 목소리는 화련이었다. 그녀는 천쪼가리같은 얇은 옷을 걸친 채 어두운 방으로 들어온 듯 했다. 나는 그녀의 목소리를 익히 알고 있었기에 당황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그녀의 목적은 명백했기에, 나는 그녀가 내 상체를 밀치며 서서히 침상 위로 올라오자 말했다.
"저는 손님일 뿐인데 이 집의 영애(英愛)께서 이런 짓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나는 기분좋은 게 아니라 당황스러웠다. 괜히 이상한 일로 얽혔다가 앞으로의 내 인생계획에 차질이 생길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화련은 멈칫하더니 자조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영애가 아니에요. 화종택의 5번째 첩이죠."
"뭐라고요?"
"부와 권력을 지닌 자가 여러 명을 축첩(築妾)하는 건 이상한 일도 아니죠. 저는 오늘같은 일에도 나설 뿐이에요."
스으...
"오늘 하루는 함께 즐겨요..."
화련의 살결이 내 몸에 살며시 내려앉았다. 나는 이대로 그녀의 손에 몸을 맡긴다면 틀림없이 기분좋은 경험을 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보기드문 미녀였기에 이건 내게 찾아온 좋은 기회였다. 더구나 그녀의 말로 봐서는 화종택이 시킨 게 거의 틀림없지 않은가!
하지만 나는 이건 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화련의 어깨를 살짝 밀며 상체를 일으켰다. 놀란 눈으로 화련이 나를 바라보자, 나는 담담하게 말했다.
"나는 별로 이런 걸 좋아하지 않소."
"무슨 말인가요? 주인 어르신도 이 일을 허용하셨는데..."
"내가 고자나 병신이라서가 아니오."
"그럼요?"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지금 정신을 다 집중해도 될까말까한 일을 앞두고 있어서, 다른 일에 한눈 팔 여지가 없소. 그리고 계속해서 나태해지는 나 자신을 추스리기도 힘들지. 타인을 내 마음에 받아들일 여유가 없다는 거요."
"그 말씀은, 제가 매력이 없다는 말인가요?"
"그런게 아니오. 나는 그저 더 이상 불행해지고 싶지 않소."
나는 화련과 인연을 맺을 경우 앞으로 어떻게 될지를 알고 있다. 가볍게 하룻밤의 인연이었다고 넘어가는 걸로 되지 않는다. 앞으로도 죽게 되면 전생(轉生)을 하게 될 텐데, 태경촌을 지나게 될 때마다 화련이 생각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만일에 참극이 또 반복되게 된다면 나는 정신력이 고갈되어버리고 말 것이다. 참극에 희생당한 자를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감이 몇 배나 늘어나게 될지도 모른다.
결국 나는 극도로 이기적인 이유로 그녀와의 동침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었다. 화련은 자세한 사정은 몰랐지만 여자의 감으로 내 감정을 깨달은 듯 했다. 그녀는 왠지 서글픈 표정을 짓더니 고개를 저었다.
"당신은 마음속에 타인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군요."
"이해해달란 말은 안 하겠소. 이건 내 삶이니까."
"후후... 저도 단호하게 자신의 삶이라는 걸 주장해보고 싶군요."
쓸쓸한 웃음을 남긴 화련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는 밖으로 나가며 말했다.
"방해해서 죄송해요. 편히 쉬다 가세요..."
나는 화련이 나간 후, 내공수련을 좀 더 하다가 잠이 들었다.
약간 아쉽긴 했지만 내 선택에 후회하지 않기로 했다.
단기적인 쾌락에 빠져서 큰 일을 그르쳤던 일이 너무 많으므로, 한 걸음 한 걸음 신중하게 나아가기고 마음먹은 것이다.
그리고 다음 날 화종택에게서 왠 선물을 받았다.
"이건?"
선물은 은괴로 만들어진 봉황(鳳凰) 조각상이었다. 화종택은 겸연쩍은 얼굴로 말했다.
"화련이를 거부하셨더군. 내가 귀인께 무례를 범한 것 같아서, 밤새 어떻게 해야할지를 고민하다가 가보(家寶)를 내어드리기로 했소."
"가보라고요?"
"그렇소. 내 선조께서 이 태경촌에 정착하던 당시에 얻게 된 물건인데, 이것은 동쪽의 아주 먼 나라에서 만들어진 보물이라고 하셨소. 내가 아주 아끼는 조각상이지만 귀인께 무례를 용서해달라는 마음으로 선물드리고 싶소."
"......"
여자를 주고, 그게 무례로 비칠까봐 보물까지 내어준다. 얼핏 화종택은 매우 화통하고 아낌없이 내어주는 사내같았지만 나는 오랜 인생경험으로 그게 아니란 걸 알고 있었다.
만일 내가 화련과 하룻밤을 잤다면, 그걸 빌미로 나를 태경촌에 혈연관계로 묶어두려 했을수도 있다. 그리고 이 보물을 받는 순간 내 명성이 강호에 높아질 때를 이용해서 자신의 가문을 홍보하고 나설 수도 있다. 하나같이 철저한 계산인 것이다.
하지만 나는 굳이 거절하지 않기로 했다. 왜냐하면 이 가보라는 물건이 독특한 유래를 가지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걸 망량에게 보여준다면 뜻밖의 정보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잘 받겠습니다."
"허허... 그럼 잘 가시오."
나는 화종택과 헤어진 후 그대로 지체없이 진랑곡으로 향했다.
타다닷
' 꽤 시간이 지나버렸어. 청룡무관을 떠난지 벌써 두 달이 다 되어가는군.'
스승 이광이 준 기한은 반 년이었다. 아직도 시간은 넉넉하다고 할 수 있었지만 나는 괜히 마음이 급해졌다. 이것저것 해야할 일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특히 흑야문과 싸우기 전에 실전경험을 하나라도 더 쌓고싶은 기분이 들었다.
진랑곡에 도착해서 망량의 집으로 바로 올라가려고 계단을 탔을 때였다.
우우웅 -
"... 아니?!"
나는 그때까지 내공의 묘용으로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고 물흐르듯 이동하던 망운진이 심상치 않게 흔들리는 걸 느꼈다. 내 오감(五感)이 흔들리고 환영이 계단 곳곳에서 비쳐보였다. 나는 침착하게 내공을 끌어올려서 망운진의 효과를 중화시켰지만 놀라움이 컸다.
' 망운진의 위력이 몇 배는 강해졌구나!'
내가 그 동안 수련을 통해 사용가능한 내공을 끌어올리지 않았다면 틀림없이 여기서 환술에 빠졌을 것이다. 나는 내심 놀라면서 망량의 초가집에 올라갔다.
휘이잉
"간만이오 백웅!"
그러자 망량이 흑운(黑雲)과 함께 마치 공간이동하듯 그 자리에 나타났다. 저건 단순한 흑운술이 아니라 고급술법인 게 틀림없었다. 나는 놀라서 말했다.
"어떻게 된 거지?"
"하하하... 난 당신에게 고맙단 말을 먼저 해야겠군. 나는 원래 술법을 거의 쓰지 못하는 몸이었으나, 당신 덕에 중급(中級)까지의 술법을 터득하고 상급에 발을 올리게 되었소. 당신에게 보낸 지조(紙鳥)는 중급의 술법이었고."
망량은 굉장히 전신에 힘이 넘치고 밝아보이는 안색이었다. 여태껏 제맘대로 사는 자유스러운 모습이었으나 어딘지 권태롭고 뒹굴대는 음산한 기운과는 딴판이었다. 마치 사는 게 재밌어서 견딜 수 없다는 듯한 모습이었다.
나는 궁금해져서 질문했다.
"어떻게 된 거요? 전후사정을 좀 말해 주시오."
"그럽시다. 앉아보시오. 내 당신의 의뢰를 완수했다는 걸 자세히 설명해 드리리다."
치링
내가 평상에 앉자, 망량은 허리춤에 차고 있던 보검(寶劍)을 꺼냈다. 저것은 내가 황산의 연못에 숨겨져있던 유적에서 거미를 따돌리고 얻은 보물이었다. 그리고 갑골문의 해석을 위해서 약 3년 전에 망량에게 맡겨놓았던 물건이었다.
망량은 보검을 횡으로 겨누어보더니 말했다.
"당신은 정말 심술이 가득하더군."
"무슨 말이오?"
"이 갑골문을 떠올리려면 내력(內力)이 필요하다는 걸 왜 말 안하고 갔소? 그 때문에 한참 끙끙대다가 팔자에도 없는 무공(武功)을 수련해야했소."
지잉!
"......!!"
그러자 망량이 들고 있던 보검에서 황금빛이 솟아오르더니 음각된 갑골문이 떠올랐다. 저것은 내력이 없으면 떠오르지 않는 글자라서, 망량이 그 동안 상당한 내력을 쌓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나는 놀라서 말했다.
"어떤 무공을 수련한 거요?"
"십이천간경(十二天間經)에 태을신공(太乙神功)을 함께 수련했소. 거기에 연단술로 내력향상용 약물까지 만들어서 시간을 단축했지. 그러니 1년만에 갑골문이 보이긴 하더군."
"음...!!"
나는 기가 막혔다. 지금 망량의 내공수위는 평범한 이삼류급 무인을 넘어서서 일류급 내공에 가까운 지경이었다. 고작해야 3년만에 이정도 내공을 쌓다니 평범한 일이 아닌 것이다. 망량은 그 얘기를 더 하고싶지 않은 듯 갑골문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이 갑골문은 은(殷)나라 시대에 쓰여진 것이오."
은(殷)!
상(商)이라고도 불리는 고대(古代)의 국가였다. 합칭하여 은상(殷商)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다. 은(殷)은 반경(盤庚)~제신(帝辛)시기에 도읍했던 상나라 최후의 수도인데, 당대(當代)에는 의(衣) 혹은 대읍(大邑) 상(商)이라는 별칭이 있었다. 상인(商人), 상업(商業) 등의 상(商) 자가 이 나라의 이름에서 나온 것이었다. 상나라 유민들이 나라를 잃고 이곳저곳 장사하며 떠돌아다니던 것에서 기인한 것이다.
내가 은나라에 대한 지식을 떠올리고 있을 때 망량의 말이 이어졌다.
"알다시피 은나라는 전설상 최초의 왕조인 하나라의 걸왕을 물리친 성탕(成湯)에 의해 건국되었소. 이 갑골문은 은나라의 시조(始祖)인 탕왕의 시대에 쓰여진 것으로, 보검 또한 그 시기에 함께 만들어진 걸로 보이오."
"탕왕의 시대라..."
"이 갑골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소.
[ 하늘에 제사를 지내노라.
거북이의 머리와 팔다리를 잘라서 하늘에 바치노라.
신께서 기뻐하시노라.
삼황(三皇)이여 오제(五帝)여, 축복을 내리소서.
이에 칠요(七曜)의 수(水)를 전달받았다.] "
나는 망량이 설명한 갑골문의 내용이 이해가 안되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고대의 검이라서 제사에 관련된 내용이란 건 알겠는데, 여기에 삼황오제나 칠요가 나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곧 현천도인에게서 들었던 칠요의 비보의 내력을 떠올리자 그럴듯하게 머릿속에서 연결되었다.
그런 내 생각을 돕듯 망량이 말을 이었다.
"이 검의 진정한 이름은 칠요(七曜)의 비보(秘寶) 중에서 수요(水曜)를 상징하는 신검(神劍) -"
이어진 말에 나는 눈을 부릅떴다.
"그 이름을 막야(莫耶)라고 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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