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검신-62화 (62/1,615)

0062 ----------------------------------------------

복마전(伏魔殿)

나는 다음 날부터 뇌영보(雷影步)의 비기(秘技), 천주살(天柱殺)을 배우기 시작했다. 연무장에 정좌하고 앉아서 조용히 이광의 설명을 듣는 것으로 아침이 시작되었다.

"소청이가 펼치는 천주살을 보았을 텐데 어떻더냐?"

"적의 공격을 능란하고 쉽게 피하는 것 같았습니다."

나는 감상을 솔직하게 말했다. 진소청은 천주살을 펼칠 때마다, 내가 아는 뇌영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고 현란하게 적의 공격을 피했다. 아니 피하는 차원을 넘어서 숫제 농락하는 듯 했다. 심지어 종남파 일대제자급이 펼치는 소나기같은 검기도 분영술을 펼치듯 피했으니 놀라운 일이었다.

이광이 말했다.

"천주살의 보법이야말로 뇌신류 무공의 핵심(核心)이라고 할 수 있다. 진퇴(進退)가 자유롭고, 적보다 언제나 한걸음 앞서나가서, 치명적인 요점을 제압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천주살을 익히지 않으면 다른 뇌신류 무공을 아무리 열심히 익혀도 제 위력을 발휘할 수 없다."

"궁금한 게 있습니다."

"뭐냐?"

"왜 하필 이름이 천주살입니까? 보법비기 치고는 너무 살벌한 이름입니다."

그렇다.

천주살이라는 이름은 천주(天柱)의 혈(穴)을 죽인다(殺)는 뜻으로 읽혔다. 천주란 뒷통수의 아문혈 부근에 있는 부분이었는데, 어째서 보법비기가 그런 의미로 읽힌다는 말인가? 그러자 이광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익혀보면 알게 된다. 일단 잘 따라오기나 해라."

그리고 이광의 가르침이 시작되었다. 나는 천주살에 쓰이는 보법의 형태를 잡는데 약 7주야가 걸렸고, 천주살의 진기운행과 움직임에 숙달되는데 약 두 달의 시간이 걸렸다. 그 동안에 나는 거의 쉬지도 않고 맹훈련을 했으며 매일같이 지쳐서 땀으로 목욕하며 나가떨어지기 일쑤였다.

기초전수가 끝났다고 생각한 이광이 말했다.

"이제 천주살을 펼칠 수 있는 기초가 마련되었다. 나를 따라서 칠 보(七步)를 옮기며 진기의 흐름을 빠르게 돌려라."

"네."

파아아앗

나는 천주살을 시전하려고 일곱 걸음을 옮기는 중에 세 걸음째에서 걸음이 꼬이는 것을 느꼈다. 이상한 일이지만 분명히 진기의 흐름을 옳게 잡았는데, 막상 걷다보니 툭툭 막히는 것이었다. 내가 비틀거리며 쓰러지자 이광이 혀를 끌끌 찼다.

"역시 천주살의 의미를 이해못했군. 너는 정말로 처음부터 끝까지 다 가르쳐야되는구나."

"......"

아마 이광은 내가 기초를 배우는 중에 알아서 비기의 의미를 깨우치기를 바랬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게 된다면 내가 이렇게 고생할 리가 없지 않은가? 속으로 투덜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이광이 제대로 뇌영보 천주살을 설명해주기 시작했다.

"잘 봐라. 한 걸음 한 걸음을 옮길 때마다 네 뒷목의 천주혈 부근에서 뇌기(雷氣)를 퍼뜨리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방향은 시전할 때마다 바뀔 수 있고, 뇌기가 퍼지는 순간 네 전신의 반사신경이 급격히 가속하게 된다. 걸음이 옮겨질 때마다 가속은 더욱 더 빨라지는 것이지."

파바바밧!

이광이 펼치는 천주살은 뇌영보의 형태를 하고 있었으나 전혀 별개의 보법이었다. 나는 그제서야 여태껏 했던 수련의 의미를 알 것 같았다. 지금까지 배웠던 모든 보법의 형태와 진기의 흐름, 호흡, 그에 따른 적절한 운행이 가미되어야 완성되는 종합적인 무공이 바로 비기 천주살이었다. 기술이라기보다는 그 자체로 하나의 무공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는 항의했다.

"너무 어렵습니다! 뇌영보를 펼치면서 천주살의 칠보 움직임을 가미하는 것도 그렇고, 거기에서 호흡을 섞어서 넣는 것도 어렵고, 동시에 뇌기를 천주혈에서 정확히 분산시키는 것까지 해야하는 겁니까?!"

맛이 갈 정도로 복잡하고 어려운 비기였다. 이론상으로는 쉬워보이지만 이 비기의 골때리는 점은 저 모든 과정을 [동시에] 한다는데 있었다. 하나하나의 과정만 해도 충분한 집중력을 필요로 하는데 저걸 동시에 할 경우 헷갈려서 미쳐버릴 게 분명했다. 내가 기가 질려있자 이광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러니까 뇌신류의 비기(秘技)인 것이다. 이론상 천주살을 제대로 익히는 순간 기존 뇌신류 전승자의 역량은 최소 3배 이상 상승하게 된다. 왜냐하면 천주살 자체가 모든 무공에 향상효과를 주기 때문이지.

그런만큼 어려운 것이고, 가르치는 자는 가르칠 자를 잘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자칫하다가는 배우는 자가 미쳐버리거나 주화입마에 걸릴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

"본래 너의 재능이라면 천주살을 가르치기는 커녕 천주살의 존재조차 알리지 않았을 것이다. 괜히 따라해본답시고 칭얼거리다가 망해버렸을 테니까."

고개를 돌린 이광이 조용히 말했다.

"천재적인 재능을 지닌 진소청도 천주살을 배우기 위해서 한달 내내 여기에만 매달렸다. 네가 이걸 제대로 익히기 위해서는 그 10배의 시간을 투자해도 될까말까일 것이다. 집중해서 최선을 다 해라."

"알겠습니다."

진소청이 한 달 걸려 익힌 비기 - 내가 용맹정진한다면 일 년 내에 익힐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이광의 격려이기도 했다. 나는 더 이상 징징거리지 않기로 하며 이를 악물고 천주살을 배워서 연습하기 시작했다. 말 그대로 밥먹고 생리현상을 해결하는 시간 이외에는 천주살 습득에 매달렸다.

' 힘내자!'

그렇게 반 년이 지났다.

나는 별다른 소득도 없이 시간이 지나고 있는 걸 깨달았다.

일 년째가 되었다.

나는 천주살에 대해서 조금 감을 잡은 것 같았지만, 여전히 칠 보는 커녕 사 보째에서 막히기가 일쑤였다. 나는 그때쯤 도저히 안될 것 같아서 진소청에게도 질문을 하고 다녔는데, 진소청도 나름대로 열심히 설명해주려는 기색이었다.

시간이 흐른다.

청룡무관에서 매일 수련하고 사범일하는 동안에 창 밖으로 사계절의 변화가 휙휙 흘러갔다. 천주살을 연습하고 남는 시간에는 천뢰인과 뇌신류의 무공을 다듬는 시간이 계속 흐른다.

......

"돼... 됐습니다."

2년하고도 반.

나는 그제서야 천주살을 터득해서 천주살 칠보를 어설프게나마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내 시연을 마뜩찮은 눈으로 쳐다보던 이광은 마뜩찮은 눈으로 말했다.

"너무 느리구나. 네가 천주살을 다 배우면 다음 비무에 내보내려고 했건만, 어찌 2년 반 씩이나 걸린단 말이냐?"

"... 죄송합니다."

"아무튼 되었다. 이번에는 흑야문(黑夜門)에 가라. 너 혼자."

뜻밖의 말에 눈이 둥그렇게 변했다.

흑야문!

그것은 마도팔문의 하나로써 현 무림천하에서 가장 강성한 사파 중 하나였다. 또한 나는 과거 전생 도중에 촌장의 원한때문에 고용된 흑야문 살수조에게 당해서 목이 베인 경험이 있는 것이다. 나는 그 때의 기억이 떠오르자 기분이 나빠졌지만 이내 고개를 털고는 말했다.

"저 혼자 가면 위험하지 않을까요?"

이광이 싸늘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네가 천주살을 제대로 시전한다면 어떤 상황에서도 네 몸 하나는 건사할 수 있을 것이다. 애초에 흑야문 따위에게 뇌신류 전승자가 당해서는 말이 안 돼. 설마 처음부터 끝까지 네 사형이 뒤를 닦아주기를 바라는 건 아니겠지?"

"그건 아닙니다."

"비무에서 승리하지 못해도 좋다. 네가 살아서 돌아올 수 있다면 이번 수련을 성공으로 쳐 주겠다."

나는 그제서야 이광의 의도를 알 수 있었다.

즉 - 이건 흑야문에 제대로 비무를 신청해서 승패를 가리라는 소리가 아니었다. 살수조를 운용하는데다가 개개인의 무위도 높은 마도팔문 흑야문을 상대로 시비를 걸고, 나아가서는 호랑이굴에서 살아서 귀환하는 수행인 것이다. 그것도 나 혼자서!

이광의 말이 귓가에 박혔다.

"명심해라. 어떻게든 살아서 돌아오기만 해라. 그러면 뇌영검법(雷影劍法)의 다음 단계를 전수해 주겠다."

이광이 흑야문 비무수행에 준 시간은 무려 반 년이나 되었다. 반 년 이내에 흑야문을 찾아서 한판 붙은 후 결과를 가지고 귀환하면 된다.

나는 지난 3년동안 청룡무관에서 수행하면서 몸이 꽤 많이 장성(長成)해 있었고 옷이 약간 맞지 않았다. 그래서 마을로 나오면서 편하게 입을 수 있는 옷을 하나 맞췄다. 진소청에게도 따로 인사를 하고 나왔으니 거치적거릴 일은 없었다.

' 흑야문이라.'

나는 이광이 내준 과제가 상당히 어렵다는 걸 직감했다. 흑야문과 비무를 해서 살아남는 건 둘째치고, 흑야문은 사파이기 때문에 떳떳하게 본체를 드러내놓고 운영하는 문파가 아니었다. 그들은 비밀리에 암흑가(暗黑街)를 장악해서 불법적인 돈으로 장원을 구매한 후, 거기에서 비밀리에 의뢰를 받으며 살아나갔다.

즉 흑야문과 비무를 하기 위해서는 먼저 흑야문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이광은 그 방법 또한 내가 알아서 하라고 일임해놓은 것이다.

나는 객잔에 걸터앉아서 고민했다.

' 어떻게 그 놈들을 찾지?'

이런저런 방법이 생각났지만, 암흑가에 뭔가 의뢰를 해본 일이 없었던 나로서는 현실성이 없고 막막한 일일 뿐이었다. 어둠의 정보중개상들이 섣불리 자신들의 정체를 드러낼 리가 없을 뿐더러, 이렇게 멀쑥해보이는 청년이 다짜고짜 흑야문에 의뢰를 하고싶다고 해도 의심할 게 뻔하다.

나는 잠시 머리를 굴려 보았다.

흑야문을 찾는 방법, 그건 무엇인가.

"... 그래!!"

나는 이리저리 돌아가지 않아도 방법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촌장!

촌장은 내가 협박하고 은금고를 털어서 달아나자마자 흑야문 살수조에 의뢰한 일이 있었다. 그렇게 빠르게 의뢰를 하는 것은 '이미' 흑야문과의 접선방법이나 거래내용을 알고 있었다는 말밖에 되지 않는다. 지금의 내가 촌장을 찾아가서 흑야문에 대한 접선방법을 묻는다면 그는 아마 확실히 알고있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도시의 어둠에서 오랫동안 기생하면서 관련분야의 지식을 높여서 차츰 흑야문에 접선할 수도 있다. 그러나 확실한 방법이 있다면 그걸 먼저 시도해보는 편이 나았다. 나는 첫 목표를 촌장과의 교섭으로 잡고는 고향마을으로 향했다.

다그닥 다그닥

말을 빌려타고 가는 도중에 관중의 산길을 보자 감회가 새로웠다. 그리고 산적 몇 놈이 뛰쳐나와서 소리를 지르려 할 때 대충 검을 휘둘렀다.

슈카칵

말 위에서 검을 휘둘렀는데도 산적 세 놈의 대가리가 정확하게 베여서 허공을 날았다. 뒤에서 산적놈들이 뭐라고 놀라는 소리가 들렸지만 신경쓰지 않았다. 어차피 저런 잡졸들과 오래 놀아줄 필요가 없는 것이다.

' 나는 또 변한 건가?'

나는 내가 살인에 꽤 무감각하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표사일 때도 그리 사람 죽이는데 거부감은 없었지만, 이번 생 들어서는 특히 별 생각을 하지 않게 되었다. 그것은 내가 보유한 힘이 너무 커져서 사람을 툭 치면 억하고 죽일 수 있는 경지가 되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관중을 떠나서 고향마을까지 도착하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말을 탔을 뿐더러 하루도 쉬지 않고 부지런히 왔기 때문이다. 소을(小乙) 마을의 경계비를 보자 이 비석을 참 많이도 본다는 잡생각이 들었다.

"여어, 소똥ㅇ...."

"아가리 처 닫아라."

퍼억!

퍽!

빠악!

"끄어어억..."

과거 나를 괴롭혔던 마을청년 놈들이 나와서 시비를 걸려고 했으나, 나는 놈들이 내 성질을 긁기 전에 빠르게 한 방씩 먹여서 기절시켜 버렸다. 죽이지는 않고 기절만 시킨다는 게 꽤 힘든 힘의 가감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놈들을 내려다보며 한숨을 쉬었다.

"별로 죽이고싶지는 않군. 다행이야."

내가 안도의 한숨을 쉬는 이유는, 갑자기 소을 마을에서 내가 홰까닥 돌아서 학살극을 벌일까봐 내 스스로 염려되었기 때문이다. 예전에 이 마을에 복수할 때 느꼈던 극렬한 쾌감때문에 내면에서 학살을 외칠 경우 제어할 자신이 없었다. 다행히도 내가 몇 번이고 전생하면서 충분히 복수를 했기 때문인지 지금은 별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리고 곧장 마을언덕을 올라서 촌장네 집으로 갔다. 촌장네 집은 한창 저녁준비로 분주했다. 나는 예전에 촌장집을 몰살시키고 금만재의 눈깔을 뽑았던 그 날의 상황과 매우 비슷하다는 걸 깨달았다. 그 때 내가 만들어냈던 피바다가 잠시 저녁짓는 풍경과 겹쳐졌다.

내가 조용히 서서 촌장을 응시하자, 촌장 쪽에서 나를 알아보고 다가왔다.

"소똥이 아니냐! 어딜 갔다 이제 오는게냐?"

"내가 할 일을 하러 갔소."

"하! 네가 할 일은 이 집에서 소똥을 치우는..."

쉬익

"......"

내가 순식간에 신형을 옮겨서 촌장과의 오 장 거리를 압축하자 그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주변에서 보고 있던 사람들도 놀라서 지켜보았다. 나는 코 앞에서 창백하게 질려있는 촌장의 뺨을 손가락으로 툭 치면서 싱긋 웃었다.

"그런 얘기는 하지 말고 건설적인 이야기를 해 봅시다."

"너... 너, 무림고수가 된..."

"글쎄요. 이렇게 서 있기가 힘든데 어디 앉을 자리 없습니까?"

촌장은 안색을 회복하더니 대꾸했다.

"안방으로 와 보게."

나는 촌장을 따라서 안방으로 갔다. 그는 내가 부담스러운지 한시도 가만히 있지를 못하고 불안하게 몸을 떨어대었다. 하긴 내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목숨을 거둘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을테니 저럴만도 할 것이다.

"워... 원하는 게 뭐냐?"

"촌장. 개방이나 무림문파와도 꽤 인연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왔는데요."

"누가 그러냐? 나는 그런 자들과 별로 교류하지 않..."

나는 입을 열었다.

"흑야문(黑夜門)."

"......"

"그 자들과 접촉할 수 있게 좀 도와주시죠. 그러면 아무짓도 하지 않고 물러갈 것이고, 앞으로도 내가 이 마을에 올 일은 없을 겁니다."

촌장은 진실성을 살펴보려는 듯 요리조리 내 얼굴을 뜯어보았다. 그러더니 연초를 뻐끔거리며 손을 떨었고,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알았다. 네가 뭣때문에 그 자들과 만나려는지는 몰라도, 네가 말한 건 꼭 지켜 다오. 두 번 다시 이 마을에 모습을 보이지 마라."

"후... 오라고 해도 안 올 겁니다. 대신 그 정보가 확실해야겠지만요."

촌장은 잠시 문 밖에서 누가 엿듣지 않는가 살피는 기색이었다. 그리고 한참 후에야 소곤거리며 말했다.

"흑야문과 접선하기 위해서는 조벽(朝璧) 마을로 가야 한다. 거기서 한광일(翰珖壹)이라는 파락호를 찾아서 은자 다섯 냥을 지불하며 [ 검은 사람을 찾는다 ] 라고 이야기해야 한다. 그 다음부터는 흑야문 쪽에서 너를 방문하게 된다고 알고 있다."

"확실하오?"

촌장이 몸을 떨며 말했다.

"확실하지 않으면 네놈이 우리 가족을 도륙내려 할 거 같은데 당연히 정확하지 않겠느냐!"

촌장은 아마 내 눈 깊은곳에 잠들어있는 살의와 광기를 어느정도 알아챈 모양이었다. 내가 별로 숨길 생각이 없는 것도 있지만, 아무튼 이 마을을 지탱하는 수장다운 안목은 있었다. 나는 되려 피식 웃으며 말했다.

"걱정 마시오. 복수를 하기에 당신들은 이제 너무 작은 존재가 되었구려."

"크크... 거물이 된 척 하는군."

"맘대로 생각하시오. 그럼 이만 가 보겠소."

파앗

나는 인사를 하고는 그대로 나와 버렸다.

뇌영보를 발휘해서 빠르게 촌장의 집을 멀어지며, 나는 과거에 비해 내 증오심이 현저하게 줄어들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원래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사지를 찢어버릴 개자식들이었으나, 오늘의 느낌은 그저 짜증나는 이웃사촌 수준이었던 것이다.

내 증오심이 이렇게 줄어든 것은 저 놈들이 개과천선을 해서라기 보다는 더 강력하고 사악한 적(敵)이 나타나버린 이유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술사와 금의위, 총령을 생각하니 마음이 답답해졌다.

' 하아. 귀찮군.'

나는 달리다말고 멈춰섰다. 조벽 마을까지는 약 20리밖에 안되므로 얼마 되지 않아 도착할 수 있겠지만, 더 중요한 볼일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확인하고 싶다.

'그 마을'이 어떻게 되었는지 확인하고 싶다.

일분일초를 아껴서 수련에 전념해야하는 자의 생각으로서는 옳지 않지만, 내가 버려두고 간 그 마을이 어떻게 되었는지 내 두 눈으로 다시 보고싶어진 것이다. 흐트러지는 정신을 다잡기 위한 촉매로 쓰고싶은 마음이 강했다.

"가 볼까."

그래서 나는 조벽 마을에 나중에 들르기로 하고 갑작스럽게 진로를 틀어서 '참극의 마을'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덤으로 현천도인이 남아있다면 이야기를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어차피 반 년이나 되는 시간이 주어졌으니 하는김에 정보를 더 모으겠다는 게 나쁜 생각은 아닐 것 같았다.

참극의 마을 근처에 있는 경하강까지 도착하는데는 약 10주야 정도가 걸렸다. 나는 여전히 차갑고 도도하게 흐르는 강물의 흐름을 바라보며 침묵에 잠겼다. 여기서 약 3리 정도만 더 가면 그 마을이 나타난다.

저번에 봤을 때는 흔적도 없이 화재로 전소된 처참한 모습을 확인했었다.

이번에도 나는 굳이 그걸 확인하려고 10일 밤낮을 달려왔다.

내 죄(罪)를 확인하기 위해, 그리고 금의위에 대한 적의를 높여서 수련집중력을 높이기 위해.

' 미안합니다...'

그 참극을 생각하자 숙연해지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나는 뭔가가 이상하다는 걸 알아챘다.

"어....?"

마을에 가까워질수록, 별다른 이상 없이 사람들의 모습이 많이 보인다. 행상도 보인다. 결정적으로 마을에서 밥 짓는 연기가 올라오고 있고, 멀리에서 마을 중심에 있는 6층짜리 전각도 보였다.

와글와글

나는 마을의 입구에 도착해서는 그만 털썩 주저앉았다.

"이럴수가...!!"

참극의 마을은 전소되거나 시체더미로 쌓여있지 않았다.

되려 무사(無事)했다.

지난 3년 동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번화하고 행복한 삶을 누리는 마을 사람들의 모습이 나를 혼란스럽게 했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