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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마전(伏魔殿)
다음 날부터 나는 삼절 이광에게 일대일로 뇌신류의 고급응용기와 전투법을 다시 배우게 되었다. 물론 지금까지 배운 것도 뇌신류이긴 하지만, 삼절 이광의 말에 따르면 심화단계로 가게 되면 뇌신류의 비기(秘技)를 배우게 되며 새로운 전투법도 알게 된다는 뜻이었다. 나는 이제서야 궤도에 올랐다는 생각에 약간 코끝이 시큰해졌다.
"뇌영검법을 다시 펼쳐 봐라."
"네."
아침의 연무장에 서서 중단세를 잡았다. 삼절 이광의 주문이 들려 왔기 때문이다. 나는 어제까지 십만 번이나 행한 일이므로 별 생각 없이 자연스럽게 펼쳤다. 초식의 전개가 끝나자, 그는 만족스러운 듯 말했다.
"군더더기가 떨어졌군. 네가 생각해도 약간 빨라진 것 같지 않으냐?"
"어..."
그러고보니 초식끼리 이어질 때 턱턱 막히곤 하던 호흡이 전혀 끊기지 않았다. 나는 의식하지 않고 펼쳤으나, 분명히 검속(劍速)이 빨라진 것 같기도 했다. 내가 놀라서 서 있으니 삼절 이광이 말했다.
"이제야 너는 뇌영검법을 성취한 것이다. 또한 검법의 고급 응용기를 배울 때가 되었다는 뜻이지."
"......!!"
"네 검법은 초식만을 주워삼길 뿐 내공의 운용과 호흡의 배분이 너무 서툴렀다. 내공이 굉장히 높기에 드러나지 않는 단점이었지만 너보다 한수 위의 고수에게는 헛점투성이로밖에 보이지 않았겠지. 그러나 너는 망아(忘我)의 상태에 빠지면서 무의식적으로 쓸데없는 움직임과 허점을 모두 없애버렸고, 그걸 그대로 몸에 새겨넣을 수 있었다. 그렇기에 네가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이광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쓸데없는 움직임과 허점! 나는 십만 번동안 계속 자세를 교정받고 빠르고 정확하게 검초를 펼칠 것을 주문받았고, 거기에 따라서 잡스러운 의식을 없애고 집중력을 극도로 높인 결과 검술경지를 높일 수 있었던 셈이다.
내가 신기해서 내 손을 내려다보자 피멍이 징처럼 박혀서 굳어 있었다. 손바닥에 불이 날 정도로 휘둘렀으니 당연한 일이다. 삼절 이광이 말했다.
"헌데 물어보고 싶은 게 있구나."
"네, 말씀하십시오."
"너 또한 뇌신류의 제자라면 창(槍)이 훨씬 강하다는 걸 알고 있을텐데 굳이 검법에 집착하는 이유가 무엇이느냐? 네가 창을 전문적으로 연마했다면 좋았을 텐데."
이광의 말은 단순히 아쉬움이 아니었다. 그는 진심으로 창의 무예가 칼보다 훨씬 강한 것이라고 믿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광의 무공수준으로 볼 때 그 말은 사실이었다. 나는 곰곰히 생각하다가 그의 말에 대답했다.
"호신(護身)의 극의(極意)를 얻고 싶기 때문입니다."
"호신이라! 과연..."
내 말은 이광이 예전에 설명했던 병기의 지론을 교묘하게 해석한 것이었다. 창은 전투술의 극한이며 검은 호신술의 극한이라는 게 그의 논리였는데, 나는 호신술의 극의를 얻는 것으로 족하다고 돌려서 말한 것이다. 이광은 약간 흐뭇한 미소를 짓더니 말했다.
"좋다. 너같은 무예인이 한 명쯤 있는 것도 좋겠지. 소청이와는 다른 길을 걷는 자가 있는 게 좋을지도 몰라."
그러더니 목검을 앞으로 들며 말했다.
"본래 우리 뇌신류는 백련교의 종교의식을 수호하는 호법(護法)의 역할을 했는데, 때때로 제사장을 대신해서 의식을 진행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 와중에 뇌기의 힘으로 검로를 움직이게 되니 마치 빛의 검처럼 변했고, 그것이 그대로 뇌신류의 절기가 된 것이다."
"처음 듣습니다."
"그럴 것이다. 이것은 뇌영검법을 일정수준 이상 터득한 자에게만 알려주는 비사(秘事)이기 때문이다."
내가 뇌영검법의 역사를 이제서야 듣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이전까지의 내 검법수준이 삼절 이광의 기준에서는 천박하기 그지 없었기 때문에, 전승자로 삼을 생각도 없었고, 자연히 뇌영검법의 모든 것을 가르쳐주지 않은 것이다.
' 달리 말하자면, 나는 검법에 한해서는 이광에게 인정받은 거로군.'
삼절 이광의 목검이 서서히 움직였다.
파지직
그의 목검은 잠시 후 시퍼런 뇌령지기를 일으켰는데 그것은 내가 뇌영검법의 뇌령을 끌어올리면서 검법을 펼칠 때 일어나는 현상이었다. 뇌기가 감도는 목검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던 삼절 이광이 갑자기 기합을 내질렀다.
"합!"
파캉!
"헉..!!"
놀라운 일이었다. 갑자기 일렁이던 뇌전의 기운이 하나로 모이더니 마치 뇌전의 칼날처럼 시퍼렇게 모아지는 게 아닌가? 그야말로 뇌전이 덧씌워진 것 같은 검기(劍氣)였고 예리함은 아름답기까지 했다. 거기까지 시연을 보인 삼절 이광이 말했다.
"이것이 뇌영검법의 대성(大成) 경지인 천뢰인(天雷刃)이다. 네가 그동안 뇌령지기를 칼에 머금어서 날리던 방법은 기운의 소모도 많고 너무 느리다. 천뢰인을 만들어야 절정검객들과 대등하게 겨룰 수가 있다."
"그, 그렇군요."
"먼저 뇌령을 발동하고, 분산된 뇌기를 모아서, 검극에서부터 자연스럽게 덧씌우며 칼날의 형태를 염상(念想)해라. 그러면 낭비없이 정제된 천뢰인이 만들어진다."
스카악
삼절 이광의 천뢰인이 가볍게 횡으로 휘둘러지자, 천뢰인이 목검으로부터 튕겨져 나가서 오 장 밖의 벽에 참격(斬擊)을 가했다. 저런 식으로 검기를 원거리에 뿌리는 것은 아주 고급수법이었다.
"천뢰인을 자연스럽게 사용할 수 있게 되면 원거리 무기를 다루는 자도 두렵지 않게 된다. 그리고 또 하나의 묘용(妙用)이 있는데, 그건 네가 천뢰인을 터득한 후에 가르쳐 주마."
"네!"
나는 삼절 이광의 가르침에 따라 그날 하루종일 천뢰인을 끌어올려서 형성(形成)하는 연습을 했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약 세 시진만에 천뢰인 비슷하게 검날을 만들어낼 수 있었는데 내가 생각해도 빠른 속도 같았다. 검 끝에서 꿈틀거리는 뇌전의 기운을 모으는 게 재밌기까지 했다.
"너는 이미 뇌영검법을 원숙한 경지까지 깨우쳤다. 성실하게 연습하기만 한다면 한 달이 지나지 않아서 천뢰인을 익힐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손을 들었다.
"질문이 있습니다."
"그래, 해 봐라."
"천뢰인이 오행 뇌전의 기운을 담은 검기(劍氣)를 안정적으로 만들어내는 수법이란 건 알겠습니다. 그런데 검염(劍炎)이나 검강같은 경지와는 어떤 차이가 나는 것입니까? 천뢰인으로도 이룰 수 있습니까?"
내 질문에 삼절 이광은 의자에 걸터앉으며 대답했다.
"그럼 너는 검염과 검강이 무엇이라 생각하느냐?"
"검염은 검강에 이르기 전의 회오리치는 단계이고, 검강이란 검객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지고한 경지라고 알고 있습니다."
이건 내 생각을 말하는 게 아니었다. 과거 현천도인에게서 들었던 무론(武論)이다. 무당파의 절정고수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물어보면서 조금이라도 더 확실하게 알고싶어진 것이다. 그러자 삼절 이광이 쓴웃음을 지었다.
"뭔가 어설픈 정의로군. 하긴 그게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거겠지만."
"그렇지 않습니까?"
"그럼 다시 물어보자. 검기는 무기를 명검(名劍)처럼 날카롭고 강인하게 만들어주는 위력이 있다. 그런데 어째서 절정고수들이 심력을 소모하면서까지 검염을 굳이 생성해서 싸우는 것일까? 검염을 형성한다고 딱히 물리력이 더 세지는 것도 아닌데?"
"......"
그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현천도인이나 귀영검객이 검염을 시전해서 싸우는 걸 마주해 봤지만, 솔직히 나는 내공빨로 겨우 버티는게 다였으므로 검기와 검염의 차이를 체감할 수 없었던 것이다. 내가 대답을 머뭇거리자 삼절 이광이 말했다.
"잘 들어라. 검염이란 상대의 검기를 꺾기 위해 만들어진 기술(技術)이다."
"기술...!!"
"의외로 이 세상에 검기를 시전하는 자들은 많은 편이다. 굳이 절정고수가 아니라 해도, 억지로 기운을 끌어모아서 검기의 형태를 만드는 일류고수도 많지. 그러다보니 검기를 이용한 전투기술도 발달하게 된 것이다. 검염이라고 하는 건 자신보다 약한 검기의 소유자를 손쉽게 패배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싸움기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설명한 이광이 말을 이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진짜 검기성강의 경지와는 하늘과 땅 수준의 차이가 나지. 네가 말한 정의는 검강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자들이나 하는 말이다."
"......"
나는 내심 혀를 내둘렀다. 이건 현천도인이 말해줬던 지론이자 무의 관념이었는데 삼절 이광이 아무렇지도 않게 깔아뭉개버린 것이다. 현천도인 본인이 들었다면 대노(大怒)해서 길길이 날뛸 게 뻔했다. 다만 그걸 말하지는 않고 계속해서 질문했다.
"그러면 진짜 검강이란 어떤 것입니까? 그건 어떤 위력이 있습니까?"
"진정한 강기경(罡氣境)에 오른 고수는 이 세상에 몇 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자들은 대개 힘을 숨기고 있기에 진면목이 드러날 일이 별로 없다. 그정도 경지에 이른 자들은 번잡한 세상의 일에 관여하지 않고 자신의 수련에 매진하는 편이지."
"흠 그렇군요."
"지금 네가 궁금해할 필요는 없다. 네가 우선 천뢰인을 터득한 후 비기(秘技)에 입문해야 지금의 이야기를 이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삼절 이광의 말대로 더 질문할 여유가 없었다. 바로 그 날부터 나는 새벽같이 일어나서 하루 12시진의 대부분을 연무장에 처박혀서 천뢰인을 만드는 일에만 집중했기 때문이다. 무지막지한 내공 덕에 뇌기는 숨쉬듯이 뿜어낼 수 있었지만 그걸 집중시켜서 칼날의 형태로 만드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집중력과 끈기의 싸움!
나는 그렇게 약 한 달하고도 6주야를 씨름했고 마침내 천뢰인을 제대로 만들어낼 수 있게 되었다. 이광이 예상했던 기간보다 훨씬 더 걸린 것은 역시 내 재능의 영향이 큰 것 같았다.
우웅 -
"오오..."
내 목검 위에 은은하게 떠올라있는 천뢰인의 광채가 눈부셨다. 옆에서 지켜보던 삼절 이광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너무 빛이 강하다. 네가 뇌기를 충분히 다스리지 못했다는 뜻이다."
"넵."
"보이듯 보이지 않듯 한없이 은은하게 만들어라. 그럴수록 천뢰인은 더 강해진다."
나는 이마의 땀을 겨우 닦았다. 지금까지의 고생이 보답받아서, 나도 이제 제대로 된 검기(劍氣)를 만들어낼 수 있게 된 것이다. 이걸 혼자서 익히려고 했다면 적어도 십여 년의 세월이 걸렸을 거라고 생각하니 눈앞이 깜깜할 지경이었다. 무술의 명문에서 뛰어난 스승을 두고 가르침받는 것보다 빠른 길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제는 천뢰인을 검에 두르고 기운을 끊기지 않게 하면서 움직여 봐라. 그리고 붙어있는 기운을 네 의지대로 움직여서, 외부로 방출하는 연습도 해라. 그게 된다면 네 뇌영검법은 한층 다른 국면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알겠습니다!"
나는 이광이 설명한 추가응용기를 이루기 위해서 또다시 몇 달이나 되는 시간을 소요해야 했다. 이광은 그 동안에 내 진도가 빠르다 느리다 언급하는 일이 없었다. 도리어 내가 마음이 달아서 혹시 느리지 않냐고 질문했었는데, 이광은 그 때마다 태연하게 대답할 뿐이었다.
"넌 아주 잘 하고 있다."
이광이 괜찮다는데야 믿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악착같이 뇌영검법만큼은 완벽히 터득하기 위해서 수련에 매일같이 집중했다. 내 노력의 결실이 제대로 되돌아온 것은 그로부터 약 반 년이 지나서였다.
콰광!
목검에서 튕겨나간 천뢰인이 벽에 큰 참상을 남겼다. 이제야 겨우 천뢰인을 사용해서 원거리를 공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집중력이 많이 고갈되어서 숨을 헉헉 몰아쉬고 있자 이광이 말했다.
"이제 뇌영보(雷影步)만 다듬으면 백웅 너의 큰 단점을 거의 다 없애는 셈이군."
"뇌... 뇌영보요?"
"일안이족삼담사력(一眼二足三膽四力)."
무예가에 전해져 내려오는 격언을 읊조린 이광이 갑자기 훅하고 신형을 옮겼다. 마치 실체와 같은 환영이 하나 더 생겨나는 게 선명하게 보였다.
"네가 검법을 시전하는 힘(力)을 익혔고 생각할 줄도 아니, 이제 발재간을 배워야 하지 않겠느냐."
저것은 생전 처음 보는 보법의 극치였다.
' 이형환위?'
하지만 나는 그게 이형환위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움직임의 밀도가 큰 차이가 있는데다가 저 움직임은 마치 사슬고리가 끌리듯이 연환(連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잉어처럼 쾌활하면서도 면면부절 움직임의 낭비가 없어서 마치 춤(舞)이나 다름없게 느껴졌다.
파바바밧
그림자가 꽃잎처럼 흩날리는 듯 했다.
이광은 총 일곱 걸음을 옮긴 후였다. 하지만 그 일곱 걸음에는 굉장한 발재간이 숨겨져 있었다. 마지막 일 보(一步)를 확정지은 이광이 말했다.
"뇌영보(雷影步) 절기(絶技) 천주살(天柱殺)! 이걸 익히면 네게 뇌신류 전승자의 자격을 주겠다."
"... 정말입니까!"
나는 쾌재를 불렀다.
전승자의 자격!
지금도 이광이 반쯤 나를 전승자로 인정하고 각종 비기와 응용기를 전수하는 중이지만, 정식으로 인정받는 건 이야기가 달랐다. 그 자격을 얻는 순간 나는 진정으로 진소청과 대등한 지점에서 이광의 무공을 전수받을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이 시련 자체가 이광이 내놓는 마지막 시험에 가까웠다.
고개를 끄덕인 이광이 말했다.
"기간은 삼 년이다. 그 안에 천주살을 터득해라."
"삼 년이라고요?"
"그래."
천뢰인을 익히는데 일 년 가까이 소모되었다는 걸 감안하면, 그 때보다 3배의 시간이 주어졌다. 천주살이 난이도있는 절기라는 걸 예상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광이 3년이라고 했다면 실제로는 10년이 흘러도 익히기 힘든 기술일 가능성이 높았다.
이광의 말이 이어졌다.
"거기에 추가로 과제를 더 내주마. 너는 천주살을 터득하면서, 진소청과 함께 도장깨기를 하도록 해라."
"도장깨기라고 하시면 타 문파에 도전하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렇다."
"그건 음..."
나는 적지 않게 황당함을 느꼈다.
도장깨기!
' 빌어먹을. 죽을지도 몰라.'
말은 쉬웠지만 그게 얼마나 위험한지 나는 뼈저리게 알고 있다. 내가 예전에 낙양의 쌍문사가에 겁도없이 도전했을 때, 당주까지는 쓰러뜨렸지만 장로가 나타나서 비무를 핑계로 내 모가지를 날려버렸다.
무문(武門)에 있어서 명예라는 건 목숨보다도 중요한 것이었기에, 명문대파에서도 도전자를 다구리 먹여서 죽이는 일이 빈번하게 벌어졌다. 도장깨기라는 건 도전자 스스로가 죽을 각오를 해야만 하는 위험천만한 짓인 것이다.
나는 곧 각오를 다지고 당당하게 외쳤다.
"까짓거 해보죠!"
"그래. 한 번 해 보거라."
남은 시간은 뇌영보를 지도받으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는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내 뇌영보가 너무 잡스러운 움직임이 많다고 지적하면서, 올바른 자세로 빠르게 움직이는 방법을 강연해 줬다.
그 때까지만 해도 나는 평안하고 무난한 수련의 일상이 이어질 거라고 생각했다. 그냥 가르쳐주는 대로 배우면서 덤으로 도장깨기를 하면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음 날 아침, 숙소에서 일어나서 연무장으로 향하자 사부인 삼절 이광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뜻밖의 인물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이미 짐을 다 챙긴 상태로 내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사제 왔는가!"
"진소청 사형? 여긴 무슨 일로..."
진소청이 껄껄 웃었다.
"그야 도장깨기를 오늘 가야하니까 그렇지. 날이 새기 전에 정곽(定郭)에 도착해야 하니 서둘러 출발하세."
"하아... 너무 갑작스럽습니다만."
나는 투덜대면서도 연무장에 있던 병장기를 챙겼다. 어차피 안 먹어도 거의 배가 고프지 않으니 별도의 준비물을 챙길 필요가 없었다. 나는 쓸만한 검을 허리춤에 매다가 불현듯 이상한 점을 느꼈다.
"잠깐 사형. 정곽이라고요? 거긴..."
"그래 맞아, 사제."
이어진 사형의 말에 내 표정은 일그러졌다.
"종남산(終南山) 입구에 있는 마을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