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56 ----------------------------------------------
복마전(伏魔殿)
"허억... 헉."
나는 엷은 숨을 토해냈다.
' 지금 몇 번째였지?'
기억이 잘 안 난다. 분명히 8천 번까지는 세었던 것 같은데, 잘 머릿속에서 떠오르지 않았다. 이제 9만 2천번을 더 하면 된다는 생각이 있지만서도 그걸 떠올리는 순간 정신이 피폐해질 것 같아서 억지로 떠올리지 않았다.
내 옆에서는 윤광(尹光) 사범이 매의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내 종아리를 목검으로 딱 때리며 외쳤다.
"정신 차려! 보법이 틀렸어."
"......!!"
쓰러질 것 같다. 육체는 무한정에 가까운 내공 덕에 바로바로 회복하지만, 정신력이 거의 다 고갈될 것 같다. 그도 그럴것이 나는 2박 3일째 계속 뇌영검법만 펼치고 있고, 그 동안 한 순간도 쉬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빡센 수련을 처음부터 하게 될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것이다.
' 쉬고 싶다.'
졸린다. 체력은 고갈될 리가 없을터인데 자꾸 졸린다. 내가 이 미친 짓거리를 그만하고 조금이라도 누워서 회복하게 된다면 행복해질 것 같다. 내가 비틀거리자 윤 사범이 비웃었다.
"새로 들어온 사범이라길래 뭔가 했더니 그냥 쫓겨나는 역할이었나? 하하하."
"뭐라고...?"
"내가 사범이 된지 몇 년이 넘었지만 이런 미친 수련법은 처음 본다. 슬슬 포기나 해라."
윤 사범은 원래 관중 인근에서 알아주는 일류고수였다고 한다. 그러나 청년의 나이에 출도해서 갑작스럽게 이광에게 패배했고, 그에게 감명받아서 모든 무림활동을 포기하고 뇌신류의 사범으로 살기로 한 것이다. 원래부터 잘나가던 고수였던 만큼 그의 말투에는 오만함과 경박함이 박혀 있었다.
' 하지만 저 놈의 실력도 확실해...'
나는 속으로 침음성을 흘렸다.
진소청 총사범과 함께 청룡무관을 지탱해나가는 2명의 사범 - 윤광(尹光)과 지평(支平). 이 둘의 공통점은 원래 관중의 일류고수이자 후기지수였다는 점, 그리고 뇌신류의 사범이기 때문에 상당히 강하다는 점이었다. 모르긴 몰라도 세간의 시선으로 절정고수 초입이라고 불릴만한 자격은 있을 것이다.
지금의 나라고 해도 윤광을 100초 내에 쓰러뜨린다는 보장이 없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난 포기 안해! 닥치고 지켜보기나 해."
"흥, 어린 놈이 독기는 있군. 그래 계속해 봐라."
윤광이 피식 웃으며 다시 내 자세를 감시하기 시작했다. 진소청, 윤광, 지평 세 사람은 내 '자세'가 조금이라도 틀리면 바로 목검으로 때려대었다. 아마도 이광에게 그렇게 하라는 명을 받은 듯 했다.
쉬익
나는 다시 의지를 돋우며 1만번까지 갔다.
"교대다 지평."
"음."
그 때즈음 3일째가 저물고 있었고 윤광은 지평 사범과 교대했다. 다소 경박해보이는 윤광과 다르게 지평은 우묵한 소처럼 우직한 사내였는데, 그는 조용한 눈으로 나를 지켜보기만 할 뿐이었다. 뭔가 말을 걸지도 않는 기색이었다.
따악
"윽."
지평이 침묵 속에서 지켜보다가 자세가 틀리자 한 대씩 때려대었다. 나는 내공으로 빠르게 보호했는데도 상당한 통증이 느껴지자 기가 막혔다. 이 정도면 지평의 일격에 맞으면 보통 성인남자가 골로 갈 정도였기 때문이다.
' 이, 이 자식 날 죽일 셈인가?'
하지만 소처럼 우직한 인상의 지평은 감정이 읽히지 않는 사내였다. 나는 아까보다 더 힘들게 죽어라 버텨야 했다. 뇌영검법을 하도 많이 펼쳐서 손이 부르틀 것 같았지만 억지로 참으며 계속해서 검을 휘둘렀다.
나는 머리가 하얗게 탈색되는 기분이 들었다. 이제 정말 한계다. 이제 쓰러져서 자고 싶다. 아니 잠을 자지는 않더라도 잠깐이라도 누워있고 싶다. 육체가 한계를 부르짖고 있는 것이다. 이제 몇 번째 시전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차라리 이렇게 있느니 죽는 게 낫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 때 지평이 말했다.
"포기하고 싶으면 언제든 말해라."
"......?"
"십만 번은 불가능해. 이대로면 인대가 끊어지거나 근육이 완전히 파열해서 무인(武人)으로 살 수가 없을 거다. 적당히 해."
나는 그 우묵한 지평이 이렇게 말을 많이 하는 걸 처음보았다. 그러나 이내 그게 지평의 진심이기 때문이란 걸 알 수 있었다. 지평이 보기에 이 수련법은 그저 무인의 생명을 단축시킬 뿐 영양가 없어보이기에, 나를 안쓰럽게 여겨서 충고해주는 것이다. 나는 정신이 번쩍 들어서 대꾸했다.
"나는 할 거다!"
"... 그래, 그럼 계속 해라."
지평은 다시 입을 닫고 나를 감시했다.
나는 정신이 나갈 것 같은 와중에서도 그저 몸이 알아서 움직였고, 잡생각이 갈수록 사라지는 걸 느꼈다. 힘든 것도 일정한 수준을 넘어버리자 마치 머릿속이 붕 뜬 것처럼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 것이다.
곧 지평의 차례가 끝나고 새벽밤중에 진소청이 교대했다. 그는 땀구덩이에 서 있는 나를 보더니 말했다.
"잠깐 기다려라."
촤악!
그는 갑자기 차가운 물을 양동이에 퍼 와서 내게 뿌렸다. 내가 황당한 눈으로 그를 보자 진소청이 무덤덤하게 말했다.
"지금 몇 번 쯤 했지?"
"2만 6천 번 정도..."
"속도가 느리군. 더 빨리 하지 않으면 사제는 이 수련을 하다가 죽게 될 거야."
"무슨...?"
진소청은 흠, 하고 가지고 온 건포를 뜯으며 말했다.
"이 수련은 스승님께서 나름대로의 확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시키는 것일세. 그러나 이건 반쯤 도박이지. 스승님이 사제의 잠재력을 믿고, 이겨낼 것이라 믿고, 한 단계 성장시키기 위해 도박을 거신 것일세. 그러니 믿어의심치 말게나."
"그런 건 상관없습니다. 나는 하기로 했으니 끝까지 할 겁니다."
"명심하게. 이 수련에서 중요한 건 '정확하고 빠르게'일세."
진소청은 뭔가 단서를 내게 준 것 같았다.
' 혹시 진소청은 이미 이 수련을 해 본 적이 있는 건가?'
끔찍한 생각이 떠올랐지만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렇다면 진소청이란 자는 인간이 아니라 무(武)를 위해 태어난 화신이다. 무한에 가까운 내공으로 체력을 무한대로 회복시키며 버티고 있는데도 이렇게 힘든 마당에, 어떻게 보통 인간이 이 수련을 한다는 말인가?
하지만 그의 조언은 솔직하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나는 정확하고 빠르게 뇌영검법을 펼치기 위해 계속해서 집중하기로 했다. 원래 내 집중력을 훨씬 초월해서 한계에 다달아 있었는데 뇌내에 벌레가 기어들어오는 것 같았다.
잠시 눈 앞이 암전되었다.
너무 힘들어서 잠시 정신이 나간 모양이었다. 나는 다시 정신을 차리며 또 목검을 휘둘렀다.
3만 5천번을 넘었을 때쯤 4일째가 거의 다 지나가고 있었다.
나는 이제 옆에서 감시하는 사람이 누군지 분간하기도 힘들 정도로 피폐해져 있었다. 뭔가 검은 형체가 고함을 지르면서 나를 때리는 것만 느껴질 정도였다. 눈이 꿈벅거리면서 형체도 잊어버린 채 계속 흐른다.
"야 정신 차려!"
촤악!
윤광이 내게 찬물을 퍼부었다. 내가 잠깐 서서 정신을 잃은 모양이었다. 나는 찬 물을 맞자마자 다시 기계적으로 칼을 휘둘렀다. 옆에서 윤광이 기가 질린 듯이 중얼거리는 게 들렸다.
"미친 놈... 하란다고 지금까지 계속 하는건가? 미친..."
미친 놈인가.
나는 미친 놈인가.
나는 윤광의 그 한 마디를 되새기며 계속 칼을 휘둘렀다. 뇌영검법의 검로(劍路)가 잊혀지고, 내 손 끝이 하나의 검(劍)이 된 것 같았다. 그 기묘한 감각 속에서 나는 잠시동안 과거의 일을 생각했다.
죽음. 살육. 그리고 패배감. 무력감.
나는 몇십 년 동안 너무나 그걸 많이 느껴 왔다.
그리고, 망량이 죽었다.
내 어리석은 선택 때문에 죽었고, 힘없는 나 때문에 죽었다.
앞으로도 내가 약하다면 같은 일이 계속 반복될 것이다.
' 나는 약해.'
어째서 약한가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나는 태어날 때부터 선천적인 약자의 위치에 서있었기 때문이다. 숱하게 털리고 구르면서 희망없는 인생을 살아온지 수십 년이다. 나는 그 동안에 무력감이라는 감정에 한없이 지배되어 살아왔다.
그래서 버틴다.
놓아버리기 싫다.
편하게 썩어가는 인생은 이미 질릴 정도로 살아왔다. 그리고 그 때마다 내 한계를 절감했다. 자신의 무언가를 포기하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는 냉혹한 세상의 진리를 깨달았다.
지금 내가 포기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나태함 뿐이었다.
이 수련을 도중에 포기하게 된다면, 또다시 삼절 이광은 내게 질려서 손을 놔버리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나는 망량에게 맹세한 것도 무색하게 발전없는 시간을 쳇바퀴처럼 굴리게 될 것이다.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지금까지처럼 또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건 싫다. 놓아버리기 싫다.
나는 이제 잡아야 하는 입장이 되었다.
그것도 생명을 걸고 필사적으로 잡아채야 하는 입장이 된 것이다.
그렇게 5일째에 접어들었다. 5일째가 되자 지평이 와서 걱정스럽게 쳐다보았다. 저 목석같은 인간의 얼굴에 저런 표정이 떠오를 정도니 내 모습은 어지간히 불쌍한 몰골일 듯 했다. 하지만 거기에 신경쓸 새도 없이, 나는 그저 무감각하게 마음속으로 횟수를 세고 있었다.
' 55321... 55322...'
이제 딱 절반을 왔다.
' 잠깐... 절반...? 이제 반이라고?'
그 순간 마음이 꺾일 것 같았다. 이 개지랄을 했는데 아직 2배를 더 해야 한다니. 지금까지처럼 다시 한 번 해야 한다니. 그건 도저히 사람이 할 짓이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냥 이 악물고 버텨냈다.
이제 버텨야 하는 이유같은 건 생각이 안 난다.
그냥 버티는 것이다.
손에서 검이 자라난 것 같다. 서서히 시간이 느려지는 것 같았고 몸에 느려진 시간에 맞춰지는 것 같았다. 어둠속에서 빛나는 검극(劍戟)에 정신을 빼앗기며, 나는 뇌영검법을 55623번째 시전하는 과정을 통과하고 있었다.
' 나는 포기하지 않는다.
포기하지 않는다.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
주문을 외듯이 계속 웅얼거린다.
왜냐하면 나는...
"스승님. 저건 미친 짓 같습니다."
11일째의 아침에 진소청은 마침내 의견을 내었다.
아침을 먹고 있던 청룡무관주 삼절 이광은 힐끔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수제자 진소청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고 더 이상 장저를 움직이지 않았다. 채볶음을 먹던 이광이 말했다.
"미친 짓 맞지. 근데 왜?"
"그 아이, 죽을 겁니다."
진소청이 질려서 말했다.
그렇다.
통상적인 상식으로 볼 때 백웅은 이제 곧 죽을 것이다. 보통 인간은 저렇게까지 하면 탈진하거나 맞았던 상처때문에 파상풍 내지는 피멍이 들어서 앓아눕거나 그것도 아니면 탈수증세로 죽어야 정상이다. 그것도 아니면 근육과 인대가 파열되어서 두 번다시 무술을 못하는 몸이 되어야 정상이다.
사실 진소청은 스승의 수련법을 믿고 있었다. 스승이 뭔가 생각이 있어서 십만 번 쉬지 않고 휘두르기 라는 미친 수련법을 시킨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교대를 하면서 가면 갈수록 이건 좀 아니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왜냐하면 이 무식한 초식반복 속에서 백웅의 얼굴이 실시간으로 맛이 가는 모습이 딱 보였기 때문이다.
잠시 아침식사의 여운을 즐기던 삼절 이광이 말했다.
"죽어야지. 안 그러면 안돼."
"네?!"
"백웅 저 아이는 간절함이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간절함의 원인이 재능(才能)의 부족이란 걸 알아챘지. 그런것치고는 저 나이에 저정도로 뇌신류를 터득한 게 이해가 안되긴 하지만, 저 아이에게는 상승무학을 이해하고 체득할 오성(悟性)이 절망적으로 부족하다."
"......!!"
"아마 오성이 부족한데도 저 경지까지 도달한 건 이해불가할 정도로 강력한 내공 덕분이겠지. 허나 그게 독(毒)이 되어있기에 죽여버릴 수밖에 없다. 더 나쁜 버릇이 들기 전에 빠르면 빠를수록 좋아."
죽인다.
그 말뜻을 이해한 진소청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망아(忘我)를 강제로 체현시키시려는 겁니까?"
"그렇게 죽이지 않으면 저 놈은 평생 저 단계에 머물 것이다."
진소청이 팔짱을 꼈다.
"덤으로, 저 아이는 어딘가 수상한 부분이 있다. 나는 이번 수련을 통해 저 아이의 의지를 확인해보고 싶다. 그 수상한 부분을 감안하고라도 뇌신류의 전승자로 받아들일 수 있는지를."
"하지만... 하지만 저건 너무..."
"됐다. 정 그렇게 걱정되면 나와 함께 가 보자꾸나."
아침식사를 끝낸 삼절 이광은 진소청과 함께 연무장으로 향했다. 사범 이상만 들어올 수 있는 이 연무장에서는 퀘퀘한 냄새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것은 연무장 중앙에 서 있는 한 소년의 몸에서 흘러나온 체취였다.
부웅
부웅 -
백웅은 아직도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러나 눈빛은 이미 반쯤 죽어서 넋이 나가 있었고 움직임도 그리 빠르지 않고 기계적이었다. 살아있는 해골이 검을 휘두른다고 봐도 좋을 정도였다.
하지만 진소청은 백웅의 움직임을 발견하자 놀랐다.
' 잊어버리고 있다! 그리고 잠력을 끌어내고 있어.'
이광이 경계를 서고 있던 윤광 사범에게 물었다.
"지금이 몇 번 째지?"
"이... 이제 150번 남았습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 좋아. 지켜보도록 하지."
진소청은 무덤덤하게 대답하는 스승의 눈가가 조금 꿈틀거리는 것을 보았다. 실룩거리는 눈매를 보면, 사실 스승인 삼절 이광도 약간 당황한 듯 했다. 그것은 시킨 본인도 설마 해낼 줄은 몰랐다는 뜻에 가까웠다.
' 스승님은 진짜 저 아이를 죽기 아니면 살기로 내몰려 했구나.'
타 뇌신류에 대한 경계감인가?
진소청으로써는, 그게 이광이 천령단(天靈丹)에 가까운 무적의 내공을 소유한 백웅을 경계했기 때문이라는 걸 모르고 있었다. 무술경지로는 비할 바가 되지 않지만 천령단이라는 내공의 의미를 잘 알고 있는 이광이기에 내심 백웅을 크게 경계하고 있었다.
이건 숫제 죽어도 좋다는 느낌이다.
아니 - 어쩌면 죽기를 바라지 않았을까?
동시에 진소청은 백웅을 경외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 내공으로 몸을 무한회복시키면서 잠재력을 최대한 발산하고 있다. 몸의 보호본능이 기경팔맥에 퍼져있던 내공을 회복에 쓰게 되면서 절대치를 높이고 있다. 그래서 보통 사람은 죽어야 정상인데도 버티는 건가.'
도대체 어디서 저런 의지력이 비롯되는가?
진소청은 백웅과 똑같은 내공을 받고 저 지랄을 하라고 하면 도저히 할 자신이 없었다. 물론 그건 진소청에게 재능이 있어서 저런 짓을 할 필요가 없는 이유가 컸지만, 한다고 해도 무식한 의지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우우우우 -
이제 십만 번까지의 시연이 10번 남짓 남았을 때였다. 장내에 있던 자들은 갑자기 백웅의 몸에서 환한 광채가 뿜어져 나오더니, 순식간에 몸을 다 회복시키는 걸 발견했다. 새겨져 있던 피멍이나 상처, 인대와 근육에 축적된 고통과 파열이 모조리 사라진 것이다. 백웅이 몇 번이나 먹었던 천년설삼의 내공이 뿜어져 나오면서 기이할 정도의 초회복(超回復)을 이룬 셈이었다.
"......!!"
백웅의 전신에서 지금까지와는 비교할 수 없는 웅혼한 내공이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진소청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 지금까지의 내공이... 일부에 불과했다고...?'
백웅의 내공은 일반적인 일류고수의 일백 배를 훨씬 넘어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다만 어린아이의 몸인데다가 백웅이 기와 의념을 다루는데 너무 서툴러서 그 힘을 거의 활용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도 어쨌든 진소청은 백웅의 내공이 개세적이며 천하제일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 오산이었다. 지금까지 그들이 느끼고 있던 백웅의 내공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던 것이다.
쿠구구구
연무장 전체가 뒤흔들리며 검로(劍路)에 명동하는 걸 느끼던 삼절 이광의 표정이 좋지 않게 변했다. 그조차도 이 엄청난 내공에 동요하는 중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백웅의 진실된 내공이, 저 표면적인 내공의 10배는 된다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다.
쿠오오오 -
백웅의 몸에서 기가 유형화되며 또아리를 틀었다. 그것은 쉴 새 없이 기가 외부로 방출되며 신체를 안정화시키려는 현상이었다. 백웅이 몇 번이나 죽음의 위기에 봉착하자 천년설삼 6개분의 힘이 잠재되어 있다가 폭출되고 있었다. 삼절 이광은 손을 들어서 그 영향력을 차단하며 중얼거렸다.
"괴물이었군..."
구만구천구백구십구(九萬九千九百九十九).
... 십만(十萬).
반쯤 의식을 잃고 몰아(沒我)의 경지에 잠긴 백웅의 손에서 마지막 십만 번 째의 뇌영검법이 펼쳐졌다.
그 순간, 백웅이 여태껏 다룬 적 없는 거대한 패천(覇天)의 힘이 검극에 담겨서 휘황찬란하게 뻗어 나왔다. 그 선명하게 떠오른 무지개빛 별무리를 바라본 진소청이 경악해서 외쳤다.
"검강(劍罡)!"
완전한 깨달음으로 만든 것은 아니지만 설마 순수한 내공지기로 검강을 형성할 수 있을 줄이야! 너무나 비효율적이지만 그렇기에 아름답기까지 했다. 저런 식으로 검강을 형성하는 것은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심기체가 하나가 되어서 궁극에 도달한 최고의 달인만이 사용할 수 있다는 수법을, 설마 내공만으로 억지로 엮어낼 줄 몰랐기에 진소청의 경악은 굉장히 컸다.
파아아 -
뇌영검법 검강의 빛무리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뇌영검법의 검로에 따라 흘렀다. 십만 번이나 펼친 백웅의 뇌영검법은 지금까지의 그 어떤 검로보다 빠르고 정확했다. 흘러가는 번갯불의 향연은 차라리 은하수나 다름없었다.
문득 이광이 흥에 겨워서 외쳤다.
"좋구나!"
뇌신류(雷神流)
비기(秘技)
진(眞) 뇌공섬(雷空殲)!
이광의 창이 극순의 시공간을 가르고 뻗어나갔다. 천공의 번개마저도 잘라버릴 수 있다는 뇌신류의 비기가 백웅의 검강과 맞부딪혔고, 거대한 기파(氣派)를 터뜨렸다. 소리가 들리지 않았으나, 인간의 귀에 들리지 않는 고주파의 음역이 충격파를 몇 번이나 만들어 내었다.
꾸구구궁
충격이 잦아든 실내에는 선 채로 눈을 까뒤집고 기절해 있는 백웅의 모습이 있었다.
"......"
"......"
누군들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는 미친 수련을 - 고작해야 십대 초중반의 소년이 끝까지 버텨내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마지막의 검강지기의 발현은 무인으로써 하나의 도달점이나 다름없어 보였다. 그렇기에 평소에 까불락거리던 윤광 사범도 입을 닫고 백웅을 쳐다보는 중이었다.
삼절 이광이 백웅에게 다가가서 어깨에 손을 대었다. 그러자 그의 기운이 흘러들어가며 백웅의 혈도를 자극했고, 그는 머지 않아 깨어날 수 있었다.
"어, 으, 여긴?"
백웅이 정신을 못 차리자 삼절 이광이 담담하게 말했다.
"축하한다. 너는 십만 번을 모두 수련하는데 성공했다."
"그렇군요."
"아마 이제부터는 기(氣)와 의(意)를 공부하면서 큰 진보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우오오!!"
백웅의 표정에는 숨길 수 없는 기쁨이 드러나 있었다. 그냥 펼치다가 뒈질 줄 알았는데 운좋게 살아남은 데다가 수련까지 성공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백웅의 기억속에는 자기가 검강을 펼쳤다는 사실은 없었다.
물끄러미 백웅을 쳐다보던 삼절 이광이 물었다.
"무엇이냐?"
"네?"
그는 마음의 평정을 잃고 있었다.
"무엇이 너를 그토록 간절하게 만드는 것이냐? 네 나이의 어린아이가 가질 의지력이 아니다. 역전의 용사조차도 힘들 터인데, 그 무식하기까지 한 의지력은 어디서 나오는 것이냐? 무엇이 그리 간절하길래 힘을 갈구하는 것이냐?"
이광의 의문은 당연했다.
백웅의 의지력은 현재 그의 상식을 넘어서 있었다. 백웅의 재능과 오성이 낮은 것을 간파했기에, 근성과 독기가 있어도 그저그런 수준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버텨낸 것은 차라리 수련을 하다 죽겠다는 자멸(自滅)의 마음가짐이었다.
이광은 무수한 강호행을 하면서 지금의 백웅같은 의지력을 본 일이 딱 한 번밖에 없었다. 그것은 소림사의 고승(高僧)이자 신승(神僧)이라 불리는 명호대사에게서 뿐이었다. 모든 인생을 잊어버린 듯한 탈각의 의지력이었다.
백웅은 잠시 입을 옴작거렸다.
그리고는 말했다.
"후회하기 싫습니다."
백웅은 지금도 마음 속으로 외치고 있었다.
8번의 전생을 지나온 지옥(地獄)이 마음 속에서 들끓고 있다.
나는 포기하지 않는다.
포기하지 않는다.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는...
골백 번 고쳐죽기로 했으니까.
그렇게라도 전생(轉生)하며 살아가기로 정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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