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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마전(伏魔殿)
망량에게 가기 위해서 다시 낙양 근처의 진랑곡으로 향할 때였다. 나는 진랑곡까지 아직 7주야는 남아있는 거리에서 난데없이 거대한 먹구름이 몰려오는 걸 발견했다.
' 뭐지? 비구름?'
뛰어난 안력 덕에 발견했지만 정말로 큰 먹구름이었다. 딱 봐도 뇌운(雷雲)이 섞인 거대한 비구름이었는데, 아마 한 식경 이내에 내가 서 있는 곳까지 올 것 같았다. 굉장한 수기(水氣)를 머금고 있어서 저 범위에 들어간다면 아마도 폭우(暴雨)가 쏟아질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아무리 내 경공술이 재빨라도 천상의 구름떼를 피할 정도의 속도는 아니므로, 나는 근처에 있던 마을로 들어갔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에게 말했다.
"잠시 비 좀 피해도 되겠습니까?"
마을 사람들의 이목이 나에게 쏠렸다.
"비라구? 이렇게 맑은데 무슨..."
농사를 짓다말고 나무 밑에서 앉아서 쉬던 중년인이 껄껄 웃었다. 그러나 그가 몇 마디 잡소리를 하기도 전에 강렬한 습기가 코에 들어왔다. 그리고 사람들은 차츰 하늘 저편에서 검은 구름이 몰려오는 것을 하나둘씩 발견하기 시작했다.
"비, 비다!"
"큰일났어! 말려놓은 농작물 어서 거둬!"
마을 사람들은 호들갑을 떨면서 분주하게 농작물을 챙기기 시작했다. 중년인도 멍하니 서 있다가 내게 외쳤다.
"얘야! 미, 미안한데 좀 도와줘! 얼른 안에 포대를 넣어야 해."
"물론이죠. 오늘 하루 비 좀 피해도 되는 거죠?"
"그래! 밥도 먹여 주마."
나는 쏜살같이 움직이며 그가 햇볓에 말리던 포댓자루를 빠르게 실내로 옮겨 주었다. 숨 몇 번 쉬기도 전에 무거운 포대가 안으로 들어서자 중년인은 깜짝 놀라는 듯 했다. 그도 그럴것이 성인장정 두세 명이 한참 낑낑대서 옮길만한 양을 순식간에 처리했기 때문이었다. 비가 오기도 전에 시간이 남아서 다른 사람을 좀 더 도와주었다.
쏴아아아 -
쿠르르릉
잠시 후 뇌우(雷雨)가 몰아치며 마을에 거센 비가 내렸다. 단순한 소나기로 보기에는 비의 양이 심상치 않았다. 다행히도 이 마을은 침수대비가 잘되어있는 건물이 많았으므로 비의 피해가 그리 클 것 같지는 않았다.
자신의 집에 나를 들여보내 준 중년인이 이마의 땀을 닦으며 말했다.
"후우... 정말 고맙다. 그나저나 넌 정말 힘이 장사구나. 비가 오는 건 어떻게 알았냐?"
"눈이 좋거든요."
"그래. 부엌에 죽을 쑤어둔 게 있으니 내어주마. 오늘 하루는 재워줄 수 있다."
타닥...
"이그... 불이 안 붙는군."
"잠시만요."
나는 마른장작에 잘 붙지 않자 뇌령지기를 운용해서 아궁이에 불을 때워 주었다. 내가 장작에 반쯤 억지로 불을 붙이자, 중년인은 놀라는 듯 했다. 그의 상식으로 마른장작을 땔감으로 쓰는 건 불가능하기 때문이리라.
"허어... 너는 무림인이냐?"
"그냥 돌아다니면서 수행 중입니다."
"아무튼 고맙다고밖에 할 수 없구나. 어딘가 목적지가 있냐?"
"진랑곡 쪽으로 가고 있습니다. 오늘 하루종일 걸을 생각이었는데 이렇게 꼬이네요."
그러자 중년인이 말했다.
"진랑곡이면 먼 곳인데 고생하고 있구나."
"별로 고생도 아니죠."
"아, 그래! 네가 무림인이라고 하니 좋은 걸 가르쳐주마."
"네?"
중년인이 힐끔 주변을 돌아보다가 소곤소곤 말했다.
"여기서 산을 두 개 넘으면 장령곡(長玲谷)이라는 곳이 있는데, 그곳에 사는 부자는 진기한 문제를 남에게 내어놓기를 좋아한다고 하더구나. 그 문제에 도전해서 맞춘 자는 금(金)을 받는다는 소문이 있어."
"고작 문제를 맞추는데 금을 준다고요?"
"그래! 그래서 요 몇 년간 지식이 뛰어나다는 서생이나 무림인들이 은근히 장령곡으로 향하는 것 같더구나."
"호오..."
나는 흥미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금이라는 건 보통 비싼 물건이 아니며 부(富)의 상징인데, 고작 지적 유희인 문제를 맞췄다고 그런 귀중품을 내놓는다는게 신기한 일이었다.
동시에 나는 그 장령곡이란 곳이 심상치 않은 곳이란 생각이 들었다. 일개 촌민에게까지 '금'을 내놓는다는 소문이 들어왔을 정도라면, 왠만한 산적이나 도적, 무림문파에서 장령곡 부자의 재산을 노리고 손을 뻗을 만 하다. 그러나 나는 적어도 지금까지 이 근처를 이동하면서 그런 무림인들의 이동 따위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모르긴 몰라도 장령곡의 부자는 자신의 재산을 지킬 정도의 능력은 있는 게 틀림없다.
' 뭐... 지금은 찾아갈 일이 아니군. 지금 나는 망량과 만나는 일이 훨씬 더 중요해.'
금괴같은 건 칠요의 비보를 얻을 때 충분히 보았다. 나는 그 금괴를 보고 물욕(物慾)이 생기기 보다는, 칠요의 비보를 가지고 망량을 찾아갈 생각으로 한가득이었다. 나중에 찾아가도 되는 일이니 지금은 우선 길을 서두르고 싶었다.
나는 그 날 식사를 대접받고, 중년인 일가와 함께 편하게 하루를 묵었다. 그러나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자 일이 심상치 않은 걸 깨달았다.
쏴아 -
비가 그칠 생각을 하지 않는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마을은 발목까지 물이 찰 정도로 흙탕물이 되어 있었고 비가 미친듯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이미 마을 사람들은 새벽에 깨어나서 물을 걷어낸다고 난리를 치고 있었다.
쏴아아아아!!
"빨리 움직여! 물 퍼내!!"
"소돌이네 집이 물에 잠겼대요 어쩌죠?"
"으아아!! 지금 하천이 범람해서 어떻게 해야할지..."
사람들은 당황해서 갈팡질팡하는 기색이었다. 그도 그럴것이 마을의 수로(水路)로 물이 빠지는 것도 한두 번이지, 이렇게 비가 억수처럼 내리게 되면 하천이 흘러넘쳐서 침수하게 되기 때문이다. 잘못하면 사람들은 마을과 집을 버리고 생존을 위해 도주해야 할 판이었다.
' 이거 안 되겠군.'
나는 이상함을 느끼면서도 적극적으로 나설 필요를 느꼈다. 내 기억으로 지금까지 이렇게 거대한 비가 내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게다가 이 마을에서 한번 묵었던 인연이 있으므로 도와줄 필요가 있다.
나는 주변을 잘 둘러보았고, 물이 빠질만한 지형을 살폈다.
' 저 바위를 부수면 물이 좀 빠지겠군. 그리고 옆으로 유도하면...'
계산이 서자 나는 우왕좌왕하는 사람들에게 외쳤다.
"거기 비켜 보세요! 내가 어떻게 해 보겠습니다."
"뭐? 너 같은 어린애가 어떻게..."
"잔말 말고 비켜 봐요!"
내공을 실어서 호령하자 사람들은 움찔해서 놀랐다. 살상이나 제압용으로 내지른 게 아니라 그냥 기세를 외친 것 뿐이었지만 일반인들에게는 천둥같은 압박으로 느껴졌으리라. 사람들이 주춤주춤 멀리로 물러나자, 나는 장심(掌心)에 내공을 모으며 정신을 집중했다.
"하아아아..."
마보(馬步)를 잡고 기를 집중했다. 그러자 내 몸에서 기운이 아지랑이처럼 피어나더니, 이윽고 파직거리는 기세를 떨치기 시작했다. 나는 내공의 집중력이 극한에 이르게 되자, 뇌운장(雷雲掌)의 구결 중 배자결(排字決)을 운용해서 앞으로 내질렀다.
꽈과과광!!
천둥같은 소리가 울리더니 반경 오 장 내에 있던 모든 바위나 돌무더기가 부숴지고 날아갔다. 심지어 일 장 크기의 거대한 바위까지도 조각나서 부숴져 버렸다. 조그마한 구릉의 한켠이 무너지는 소리까지 들렸다. 그리고 동시에 마을 전체에 고여있던 물이 새롭게 생긴 수로를 통해서 흐르기 시작했고, 무릎까지 차있던 빗물은 발바닥까지 내려가게 되었다.
쿠르르르
장대한 빗물이 흙탕물처럼 쏟아져 내려간다. 계곡같은 지형이었기에 이렇게 바위를 뚫는 것만으로도 부담이 한층 덜하게 되는 것이다. 소 몇 마리가 떠내려갈 뻔 하다가 다시 사람들 품으로 돌아왔다.
"......!!"
"우와아아아!!"
"고맙네, 정말 고마워!!"
사람들은 물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걸 보자 눈물을 흘리며 덩실거렸다. 이걸로 당장 익사할 위험이 사라진 것이다. 하지만 나는 하늘의 구름을 보자 이게 당장 그칠 비가 아니고, 적어도 사흘 밤낮은 내릴 거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처음에 예상했던 대로 엄청나게 큰 폭우인 것이다.
나는 사람들을 쳐다보며 말했다.
"혹시 촌장님 있으십니까?"
"나라네."
꽤 늙어보이는 60대 노인이 걸어나왔다. 체격과 체력, 강단이 있어보이는 노인네였다. 나는 그 촌장에게 말했다.
"이건 임시방편에 불과합니다. 지금이라도 당장 짐을 싸서 대피해야 합니다."
시간의 차이가 있을 뿐 이정도 비라면 이미 마을을 구하는 건 불가능하다. 하천을 막는 제방이나 둑이 있으면 모를까 마을이 전멸하는 건 필연이었다. 이건 표사 때의 경험으로 알고 있는 지식이었다.
"으음... 그 방법 말고는 없겠나?"
"적어도 두 시진 내에 짐을 싸지 않으면 이 마을에서 안전하게 나가는것도 힘듭니다. 특히 노약자 중에서는 사상자가 나올 겁니다."
"어쩔 수 없군..."
촌장은 이윽고 마을 사람들에게 외쳤다.
"여러분! 서둘러 대피합시다! 얼른!"
"아이구... 전재산이 다 날아가는구나..."
"사치스런 소리 마시오. 저 소년 덕에 목숨이라도 건지는 거니까."
사람들은 슬퍼하면서도 서둘러 자신들의 짐을 챙겼다. 나는 정신없이 뛰어다니면서 사람들을 도와주었다. 그리고 촌장과 함께 누락되거나 낙오된 사람들이 없는지 확인한 후 다같이 마을을 나섰다.
쿠구구구궁
높은 지대에서 마을이 서서히 물에 잠기는 걸 보던 마을사람들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전재산이 순식간에 날아간 것이다. 하지만 촌장의 말대로 목숨이나마 챙긴 셈이었으므로 다들 입을 꾹 다물고 불만을 토하지는 않는 기색이었다.
나는 촌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몸을 의탁하실만한 곳이 있으십니까?"
"없네... 마을 사람들이 칠십여 명인데 이 많은 사람들을 어떻게 데리고 다닐지 깜깜하군."
"근처의 관아로 가서 수해(水害)를 말해보시는건."
그러자 촌장이 헛웃음을 흘렸다.
"관아의 높으신 분이 이야기를 듣기나 할지도 의문일세... 우리같은 깡촌마을 사람들은 만나주지도 않을 게야. 그렇다고 다른 마을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 인원을 받아줄 리도 없으니 원."
"... 이 비가 그친 다음에 다시 마을을 재건하는 수밖에 없겠군요."
"하아... 몇날 며칠을 비를 맞고 다니면 다들 체력이 약해져서 죽을텐데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나는 마을 사람들이 진퇴양난의 상황에 처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설령 며칠 내에 이 폭우가 그쳐서 다시 마을에 들어간다고 하더라도, 일 년 농사물을 다 잃어버리고 절망적인 상황에서 다시 일어서야 할 것이다.
나도 이 사람들의 사정이 딱해서 도와주고 싶었지만 이 상황에서 뭔가 해줄 수 있을 리 만무하다. 내 품에 칠요의 비보가 숨겨져 있지만 이걸로 뭘 할 수 있단 말인가? 내가 침묵하고 있자 촌장이 말했다.
"소협(小俠)의 은혜는 잊지 않겠네. 다들 걸어다닐 수는 있으니 어떻게든 되겠지. 최대한 인솔해 봐야겠지."
"어디로 가시게요?"
"바로 옆마을로 가봤자 상황이 비슷할 게야... 트여있는 자백평(磁柏坪)으로 가서 비를 피하면서 생각해 봐야겠네."
촌장이 쓸쓸한 눈으로 말했다.
"소협은 이만 갈 길 가시게. 몸조심 하고."
"......"
내가 촌장 일행을 따라다닌다고 해서 뭔가 딱히 달라지는 건 아니다. 도와줄 수 있는 것도 별로 없다. 촌장은 나를 더 이용해먹기 보다는 최선을 다해서 마을사람들을 꾸릴 생각인 것 같았다. 나는 촌장에게 말했다.
"어차피 저도 당장 해야하는 일이 있는 건 아니니 좀 더 도와드리겠습니다."
"정말인가?! 고맙네..."
나는 이후 약 이틀 동안 마을 사람들을 따라다니면서 길가를 막은 아름드리 나무를 치워주거나, 산에서 떨어지는 낙석을 쳐내 주었다. 그리고 비를 맞아서 기력이 약해진 어린아이나 여인들에게 진기(眞氣)를 불어넣어줘서 생명력을 북돋아 주었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이 자백평에 도착해서 약 하루나절동안 비를 피하고 있자, 끊이지 않을 것 같았던 비가 마침내 그쳤다. 자백평은 물이 잘 빠지는 지형이었으므로 사람들은 나무 사이에서 비를 덜 맞으며 천막에서 비를 피한 것이다.
촌장은 내 손을 잡으며 기뻐서 눈물을 주륵 흘렸다.
"으흐흑... 고맙네. 사상자가 하나도 없다니 이건 기적이야. 자네가 없었다면 열 명도 넘게 죽었을 텐데... 정말 고맙네 소협!"
"아닙니다. 그보다 돌아갈 때 흙탕물때문에 길이 막혀있을텐데 조심하십시오."
"괜찮아. 그 정도는 자네가 없어도 약간 길을 돌아가면 되는 일이야. 으흐흑..."
"별 말씀을."
나는 별로 돈이나 댓가를 받은 건 아니지만, 뜻하지 않게 좋은 일을 했다는 생각이 들자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내가 의협스러운 성격은 아니었으나, 내게 충분한 능력이 있다는 생각이 들자 도와주고싶은 생각이 든 것이다.
' 내가 왜 이러지? 바보같군...'
원래라면 귀찮아서 그냥 대충 떠났을 텐데 이상한 일이었다. 눈물을 훔치던 촌장이 갑자기 내게 귓속말을 했다.
"... 마을사람끼리 얘기하다가 장령곡 이야기를 들었는데, 아마 백가 놈이 자네한테 바람을 넣었을 게야. 원체 딴 마을 일에 관심이 많은 놈이라 그랬을 텐데..."
"왜 그러십니까?"
이어진 촌장의 말은 뜻밖의 정보를 내포하고 있었다.
"장령곡은 가지 말게. 내 사촌되는 사람이 무림인(武林人)인데, 이미 무림인 사이에서는 장령곡이 사지(死地)라고 소문이 퍼졌다더군. 문제를 맞췄을 때 포상을 주는 건 사실이지만, 여태 그 3문제를 맞추지 못해서 수십 명의 목이 달아났다고 하네. 특히 장령곡주라는 자의 무공이 매우 강하다는 소문일세."
"......!!"
"소협은 우리 마을을 구해준 은인이니 반드시 다시 들러주게. 꼭 보답하겠네."
"그러죠. 그럼 안녕히."
나는 마을 사람들과 헤어져서 비가 개인 길을 걷기 시작했다. 비가 개인 도로는 흙탕물이 범람한 흔적 때문에 온통 엉망이었다. 나는 뇌영보를 운용해서 살짝 산길을 뛰어다니며 생각했다.
' 장령곡주... 문제를 맞추면 포상이지만 못 맞추면 죽음이라...'
나는 왠지 장령곡에도 희한한 비밀이 숨겨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이 근처가 강대한 대문파의 영향력이 별로 없는 진공지대이긴 하지만, 장령곡주같이 특이한 돌출행동을 하는 자가 별다른 견제를 받지 않는 건 이상한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싱긋 웃으며 중얼거렸다.
"일단 다음에."
죽음의 위기는 칠요의 유적에서로 족하다. 나중에 내 무공이 충분히 자신할 만큼 강해졌을 때 장령곡의 비밀을 풀어도 늦지 않으리라. 나는 갑작스러운 폭우 때문에 길이 꽤 늦어졌다고 생각하며 길을 재촉했다.
달리고 또 달렸다.
흙탕물을 하루종일 보는 느낌이 들었다.
결과적으로 나는 당초 예상했던 시간보다 적어도 칠 주야 이상 늦게 진랑곡에 도착하게 되었다. 이 곳으로 오는 도중에 폭우 때문에 피해를 입은 마을이 곳곳에서 보였고 도로도 거의 봉쇄되었기 때문이다.
진랑곡은 다행히도 호우대비가 잘 되어 있는 마을이고 제방이나 둑도 견고한 곳이라서 거의 피해가 없어 보였다. 아마도 망량이 기문진법과 토목술의 달인이니만큼, 자신의 본거지가 자연재해에 침수되지 않도록 신경을 많이 쓴 흔적이리라.
나는 계단을 올라서 망량을 만나러 갔다.
이번에는 망량이 딴짓거리를 하고 있지 않았다. 그는 뜻밖에도 '손님'을 만나서 초가집 앞의 평상에서 뭔가 상담을 하고 있는 중인 듯 했다.
"... 그래서, 제 안목에 따르면, 이건 흉(凶)이긴 하나 명백히 천간(天間)의 운행에 따른 것으로... 추가적인 냉해나 재앙은 없을 것입니다."
망량의 맞은 편에 있던, 귀한 비단옷을 입은 뚱뚱한 중년인이 연신 감탄하고 있었다.
"으흠 으흠... 과연 망량선사로군..."
"안심하셔도 됩니다. 액운이 미치는 상이 아니므로, 다음해에는 충분히 만회 가능하며... 농민들의 반발을 줄이기 위해서는 약간 배려를 해 주셔야겠지요."
"그건 내가 꼭 신경 쓰겠네. 하여튼 조언 고마우이."
"하하하... 별 말씀을... 어?"
뭔가 조목조목 이야기를 하고 있던 망량이 입구에 서 있던 나를 발견한 듯 했다. 그리고 당혹스러워하며 외쳤다.
"아니 당신은 누구길래 망운진을 뚫고 들어온 거요?!"
스캉!
스캉!
"네놈은 누구냐!"
"정체를 밝혀라!"
그러자 비단옷 입은 뚱뚱한 중년인 옆에 서 있던 호위무사 4명이 일제히 칼을 뽑아들었다. 나는 그들이 일류급 고수인지 알고 긴장했으나, 느껴지는 기세나 자세로 볼때 딱 표국의 표위 수준의 무인들이었다. 보통 사람과는 비교할 수 없는 전투력을 지니고 있으나 무림인의 기준에서는 그저그런 평범한 수준이다.
' 내가 너무 눈이 높아졌나? 저 자들도 일반 호위업계 기준으로는 꽤 하는 편일텐데.'
아마 온갖 절정고수나 금의위와 부딪히다보니 눈이 호사스러워진 모양이었다.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나도 손님이오. 행패를 부릴 생각이 없으니 선객(先客)의 볼일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겠소."
망량은 뭔가 깨달았는지 입을 다물고 가만히 섭선을 부쳤다. 그리고는 중년인의 귓가에 뭔가를 속삭였다. 그러자 뚱뚱한 중년인이 손을 저었다.
"칼을 거둬라. 저런 어린아이가 사악한 무림인일 것 같지는 않다."
"알겠습니다, 대인(大人)."
호위무사들이 칼을 거두었다. 대인이라고 불린 중년인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망량에게 포권을 했다.
"아무튼 고맙네, 망량선사. 내 나중에 진랑곡에 충분한 성의를 보이도록 하지."
"아닙니다 나으리. 이번 횡액에 제가 도움이 되었다니 기쁩니다."
"후후... 가자!"
저벅 저벅
잠시 후 대인 나으리와 4명의 호위무사는 계단을 내려가서 가 버렸다. 나는 평상에 앉아있는 망량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는데, 그는 한동안 섭선을 펄럭거리며 나를 응시했다. 그러더니 말을 꺼냈다.
"망운진을 아무 상처없이 뚫은 걸로 보아 고명한 무공을 지닌 무인(武人)인 듯 한데, 나 망량선사에게는 어쩐 일이오?"
"......"
나는 순간 울컥하는 기분이 들었다.
' 아...'
나는 그의 명호가 망량이고, 진짜 망량선사가 아끼는 제자이며, 무공은 익히지 않았으며, 술법의 재능은 없으나 천하일절의 두뇌를 지니고 있으며, 공부하는것도 좋아하지만 놀고먹고 여자와 떡치는 것도 좋아하며, 투덜대면서도 사악한 자들과 맞서기 위해서는 목숨을 아끼지 않는 의협(義俠)이며, 대단한 기책사(奇策士)이며, 황실 천문관 출신이며, 그가 지니고 있는 섭선이 사실은 보패 오화칠금선이라는 사실까지 알고 있다.
그러나 망량은 지금 나를 생전 처음 보는 것이다.
내가 태어나서 거의 유일하게 믿었던 동료 - 그리고 나 때문에 죽게 되었던 동료를 이런 관계로 만나게 되자 울컥하고 감정이 비어져 나올 것 같았다. 목구멍이 뜨거웠고 지금 당장이라도 그에게 꿇어앉아서 통곡하고 속죄하고 싶었다.
[ 훗... 그 동안 즐거웠소.]
망량의 체념한 듯한 미소.
그리고 내 손으로 망량을 베었을 때의 감각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겨우 감정을 추스르며 말했다.
"나... 나는 백웅(白雄). 망량 당신에게 의뢰를 하러 왔소."
"호오, 당신같은 무림인의 의뢰라면 틀림없이 큰 건이겠지. 한번 들어나 봅시다."
그는 나를 반로환동한 무림인으로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침착하게 말했다.
"... 이 물건의 갑골문(甲骨文)을 해석해 주시오."
나는 망량 앞으로 가서 고대의 보검을 들었다.
지이잉 - !!
그리고 내력을 불어넣자, 강렬한 푸른 빛과 함께 검신(劍身)에 음각되어 있던 갑골문이 드러났다. 망량은 그 갑골문을 발견하자 까무러칠 듯이 놀란 표정을 짓는 듯 했다. 그는 놀라서 말을 더듬거리며 말했다.
"이, 이, 이거어언~?!"
망량은 마치 낚아채듯이 내 손에서 보검을 가져오더니 꿇어앉아서 마치 눈빛만으로 뚫어버릴 듯이 물건을 관찰했다. 그 눈빛에는 마치 어린아이같은 열정이 새겨져 있었다. 한참이나 보검을 살펴보던 망량은 겨우 마음을 진정시키더니 말했다.
"무, 물론 이걸 해석해 드릴 순 있으나... 댓가가 뭐요?"
"댓가라..."
"이... 이건 정말 대단한 물건이라서 하루아침에 해석할 수는 없는 거요. 으음... 아니, 이번엔 특별히 해 주지! 대출혈(大出血)이야! 공짜로 해 주겠다 이 말이오."
망량이 허둥대는 걸 보니, 그 또한 저 보검이 칠요(七曜)와 관계되는 - 혹은 그 자체로 보패(寶貝)급이라고 생각하는 듯 했다. 당연히 술법계에 몸을 담은 인간이자 학자로써 목숨을 내놓고도 보고 싶을 것이리라.
나는 그의 모습을 보자 쓰게 웃으며 말했다.
"공짜라 그거 고맙군. 그러면 나는 몇 년 후가 되든간에, 반드시 당신을 다시 찾아와서 그 갑골문의 해석을 듣도록 하겠소."
그러자 망량은 좋아죽을려는 표정을 억지로 참는 듯 했다. 저 망량이 표정관리를 못할 정도이니 어지간히도 행복한 모양이었다. 하긴 저 검이 진짜 칠요의 보검이라면 연구하는 것만으로도 좋은 일일 것이다.
"하하핫! 맡겨 두시오. 나는 반드시 이걸 해석해 내겠소. 그나저나 당신은 언제쯤 찾아올 생각이오?"
"......"
"이보시오?"
나는 차마 그와 눈을 마주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간신히 속에서 비어져나오는 말을 했다.
"내가 부끄러움을 이겨낼 정도로 강해졌다고 생각했을 때 찾으러 오겠소."
"응...? 당신 시(詩) 좋아하오? 뭔 뜬구름 잡는 소리요."
"......"
망량이 황당해했지만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망량이 투덜대는 소리가 들렸다.
"하여간~ 요즘은 일이 갑자기 첩첩이 쌓여버린다니까. 지부대인이 천문점괘를 봐달라 하질 않나, 당신처럼 독특한 기인이 찾아오질 않나. 느긋하고 평안하게 사는 게 내 삶의 목표인데 것 참 힘들구려~"
"미안하오."
"아 들으라고 한 소리는 아니고~ 하하하, 여하튼 꼭 다시 찾아오시오! 내 그 때까지 반드시 해석해 놓으리다."
끓어오른다.
내 자신의 한심함이 끓어오른다...
망량이 껄껄 웃는 소리를 듣자, 나는 그만 두 눈에서 눈물을 주륵 흘리고 말았다.
그 때까지 부끄러움을 참으려고 겨우 버티고 있었으나, 나 자신이 한심하고 비겁해서 눈물이 나 버린 것이다. 왠만하면 울지 않겠다고 맹세한 나였지만 이번에는 피할 수 없는 감정의 홍수가 밀어닥치고 있었다.
"미안하오...!!"
쿵
무릎을 꿇고 머리를 박자, 되려 망량이 당황해했다.
"어?! 아, 아니 정말 농이었는데 그렇게 울면 어떡하오! 허참... 이 사람 보게."
나는 울 수밖에 없었다.
나는 지금 내 죄(罪)를 눈 앞에 두고 있다.
내 어리석음의 댓가로 희생된 사람을 눈 앞에 보고 있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힘을 얻기 위해서 수많은 실패를 거듭할텐데, 그럼에도 포기할 수 없는 나 자신에게 짜증이 나서 울고 있는 것이었다.
"그럼... 다음에 봅시다..."
"잘 가시오 백웅."
나는 겨우 눈물을 훔치고는 망량의 거처에서 걸어서 계단을 내려갔다.
계단을 걸어내려가면서 오만 생각이 들었지만 확실한 건 하나였다.
이미 일어난 일은 어쩔 수 없다.
앞으로 최선을 다해야 한다.
'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망량에게 전설적인 무기를 맡겨버렸다는 아까움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되려 그에게 그렇게라도 보상을 해줄 수 있다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무(武) 이외의 신외지물(身外之物)을 넘겨버림으로써 각오가 한층 다져진 기분도 들었다.
부끄럽지 않을 정도로 강해진 다음에 다시 찾아오겠다.
그리고 그 때 망량에게 내 죄를 털어놓겠다.
그걸 위해서는 앞으로 청룡무관에서 목숨걸고 수련해야 할 것이리라.
멈춰있으면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 나는 해내고 말겠다.'
설령 일이 꼬여 삼절 이광에게 죽는 한이 있어도, 진소청에게 죽는 한이 있어도 이를 악물고 버텨내서 상승(上昇)의 무공을 익히고 말 것이다!
설령 수십 년이 걸릴 지라도!
그것이 내가 실패를 극복하고 속죄를 하는 방법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