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51 ----------------------------------------------
복마전(伏魔殿)
7번째 삶이다.
콰앙!!
나는 외양간에서 사색에 잠길 시간도 없이 밖으로 박차고 나오고 있었다.
' 제길! 씨발!!'
이제 와서 되살아난 게 그렇게 신기한 일은 아니다. 이미 5번 이상 죽었다가 회귀한 경험이 있는데다 천암비서까지 챙긴 상황이다. 이정도쯤 되면 천암비서를 가지고 있으면 회귀가 가능하다고 확신이 가능하다.
그러나 진정으로 기분이 엿같은 것은 내 자신이, 그토록 삶과 죽음을 반복하면서도 근본적으로는 바뀌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억척같이 무공과 지식을 쌓아나갔지만 결국 중요한 국면에서는 인내력이나 지혜가 부족해서 스스로 무너져버린 것이다.
지금 나는 나를 죽게 만든 금의위보다는 나 자신에 대한 혐오가 훨씬 심하다. 당장이라도 자살하고 싶다.
원래라면 정신을 차리자마자 즐겁게 천암비서나 천년설삼을 챙기러 다녔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너무나 극렬한 자기혐오 때문에 숲 속으로 들어가서 구토를 했다.
"쿨럭! 쿨럭! 허억..."
한참동안이나 속에 있던 걸 게워내자 비릿한 토냄새가 땅바닥에서 올라왔다.
나는 왜 이럴까?
나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걸까?
[ 훗... 그 동안 즐거웠소.]
망량의 마지막 웃음이 가슴에 쐐기처럼 박혀서 떠올랐다.
그는 결국 나 때문에 죽은 것이다.
내 잘못된 선택이 다른 사람까지 죽게 만들었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었다. 무예를 쌓아온 세월도, 지식을 쌓아온 세월도 있어서 족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결국은 망량의 지혜에 의지해서 대부분의 일을 해결했고, 침착하게 다음 수를 생각하는 능력도 부족하다. 천년설삼을 먹은 것도 무용하게 그동안 시간낭비를 해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바뀌어야 한다.
뭔가 나 스스로 바뀌지 않으면 안 된다.
"... 그리고 이젠 인정해야겠군."
나직이 중얼거린다.
지난번부터 생각했던 거지만, 이제 내겐 평범한 삶을 추구하는 선택 자체가 사라져 있다. 회귀의 비법을 지닌 채로 계속해서 힘을 얻어가는 과정에 중독된 이상, 끝을 볼 때까지는 멈출 수가 없다. 그리고 남아있는 적수도 너무 많다. [죽음] 그 자체를 전제하지 않고서는 제대로 성장할 수가 없는 것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힘].
그리고 나 스스로가 정신적으로 성장하는 것!
진정으로 각오를 다지기 위해서는 앞으로 일백 번 고쳐죽을 각오를 해야만 한다.
' 잘 생각해 보자. 눈 앞의 이득을 걷어놓고 냉정하게...'
나는 자기혐오를 거두고 냉정하게 머리를 돌리기 시작했다. 6번째 삶에서 망량과의 동행은 내게 많은 것을 가져다 주었다. 망량은 종종 내게 '넓게 봐라' 라는 이야기를 했는데, 내가 너무 좁은 범위에서만 통찰하려다 보니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가는 일이 많다는 뜻이었다. 나는 최대한 넓게 생각하며 사태를 이성적으로 해결할 방법을 찾을 필요성을 느꼈다.
그리고 나는 내게 힘이 너무 부족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물론 그걸 원래부터 몰랐던 건 아니지만, 애시당초 인신공양 계획을 막기위해 나섰을 때는 금의위와 속전속결로 승부를 볼 생각이었다. 오산이 있었다면 망량의 스승인 망량선사나 사제 천우진에게는 충분히 천하를 뒤덮을 힘이 있었으나, 그들은 그걸 금의위와 싸우는데 써줄 의향이 없었다는 것이다.
' 남의 힘에 의지하려는게 잘못이었어.
나는 이대로 나서서 금의위의 첫 음모를 막는다고 하더라도 똑같은 전개가 되리라고 예상했다. 황산에서 백련교 호법사자를 사칭하지 않았어도 금의위의 정보력이라면 언젠가 범인을 알아 낼 것이다. 이 상황에서 아무리 잘 싸워봤자 결국 금의위 총령을 쓰러뜨릴 힘이 없다면 마찬가지다.
' 총령... 그리고 금의위를 궁극적으로 쓰러뜨릴 수 있는 힘이 필요해.'
그건 어느 정도의 힘이어야 할까?
지금의 나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지만, 적어도 이 세상 전체를 뒤흔들 수 있는 수준의 힘일 것이다. 그리고 그걸 얻기 위해서는 타고난 천재가 수십 년간 기연을 얻어서 뼈빠지는 노력을 해도 힘들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런 힘을 얻어야만 한다. 또다시 동료의 죽음을 보고싶지 않다면.
나는 잠시 후 내 계획을 정할 수가 있었다.
"이번에는 금의위와 관계되지 않겠어. 그리고 청룡무관에서 몇십 년이라도 좋으니 수련(修鍊)을 하겠다."
이것은 괴롭고 힘든 삶이다. 왜냐하면 내게는 마음만 먹으면 무림의 절정고수로 떵떵거리고 살 만한 무공이 있는데도, 청룡무관에서 사범질을 하며 몇십 년동안 고된 수련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일에 시간이 맞지 않는다면 - 그 때는 자살(自殺)할 것이다. 여태껏 내가 전생하면서 스스로의 손으로 죽는다는 선택을 계획에 넣은 적은 없다. 그러나 망량의 죽음과 연이은 실패 때문에 이 회귀(回歸) 능력을 적극적으로 이용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이번에는 다르다.
나는 각오를 다진 채, 천암비서가 있는 동굴으로 향했다. 촌장 집에서 은금고를 훔칠 수도 있었지만 청룡무관에서 살아갈 거라면 과거사가 깨끗한 쪽이 좋았기에 놔 두었다. 나는 천암비서가 있는 동굴에 성큼 발을 들이밀었다.
파앗!
피이잉....
"... 이 정도는 이제 쉽군."
나는 이번에는 딱히 물건을 내세워서 피하거나 막지 않은 채 화살을 손으로 잡았다. 뇌기(雷氣)가 발달하면서 반사신경이 극단적으로 높아졌고, 기관장치의 화살이라고 할지라도 순간적으로 반응해서 잡아챌 정도가 된 것이다. 일류나 절정고수들의 절초와 겨루다 보니 이 정도는 이제 식은죽먹기였다.
천암비서를 품 안에 넣은 후 곧장 뛰어서 황산으로 향했다. 황산으로 향하는 도중에 내 경공술이 한층 발달한 느낌이 들었는데, 그것은 내가 전신에 흐르는 내공을 예전보다 훨씬 효율적으로 쓰고 있다는 증거였다. 일례로 저번에는 속도를 주체하지 못해서 나무나 바위에 여러번 부딪힌 적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그런 일이 한 번도 없었다.
타닷
황산에 도착했을 때는 체감상 예전보다 시간을 하루나 이틀정도 단축시킨 느낌이 들었다. 이번에는 뛰어오는 동안에 음식을 거의 먹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신기하게도 이렇게나 격렬하게 뛰면서 체력과 정신력을 소모해도 배가 고프지 않았고 거의 지치지도 않았다. 내공이 활성화되면서 육체를 본격적인 초인(超人)의 경지로 이끌어놓은 듯 했다.
' 우선 근처 마을에서 물끓일 통을 좀 빌리자.'
나는 침착하게 돌아다니면서 예전처럼 황산파 장로에게 시비걸릴 일이 없는지 주의깊게 살폈다. 섣불리 뛰어다니지 않고 주위를 경계하며 인기척을 둘러보았다. 그러자 아니나 다를까, 예전에 봤던 황산파 장로인 냉천검 공재가 자신의 제자들과 함께 안개싸인 길을 돌아다니는 모습이 보였다.
' 숨자.'
내가 기척을 숨기고 풀숲에서 가만히 내공으로 청력(聽力)을 높이자 잠시 후 냉천검 공재의 말소리가 들려 왔다.
"... 순찰 나올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이 황산은 참으로 넓구나. 그렇지 않느냐?"
"네, 그렇습니다."
옆에 있던 제자 하나가 호롱불을 들며 걷다가 질문했다.
"헌데 이렇게 멀리까지 나올 필요가 있겠습니까? 여기는 너무 먼 곳인데..."
"세상이 흉흉하여 도적떼나 산적이 종종 출몰하느니라. 황산 일대에서 그런 놈들이 날뛴다는 소문이 돌게 되면 본파의 명예에 금이 가지. 이렇게 가끔씩 멀리 와 줘야 그런 일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느니라."
"과연...."
"이만하면 되었으니 이제 돌아가서 수련을 하자꾸나. 너희들 운룡팔검(雲龍八劍)의 수련이 미진하다."
"알겠습니다, 사부."
잠시 후 그들의 인기척이 먼 곳으로 사라졌다. 나는 한참 후 수풀에서 나와서 옷을 털었다. 그리고 약간 복잡한 심경이 되었다.
' 황산파는 일대 주민들에게 큰 상납금을 거두는 깡패같은 문파인데, 장로나 제자들은 의외로 평범한 놈들이구나. 조직과 개인의 성향은 다를 수도 있는 건가?'
그리고 내가 알기로 황산파의 장문인은 풍신류(風神流)와 관계가 있으며 백련교(白蓮敎)와도 관계가 있다. 특히 백련교 호법사자라는 자와는 절친한 관계인 것이다. 무림에서 대놓고 공적(公敵)으로 취급하지는 않지만 황실과의 껄끄러운 관계 때문에 경원시되는 백련교, 그곳과 밀집한 관련이 있다는 건 심상치 않았다.
그러고보니 황산파는 요 몇 년 사이에 급격히 성장해서 구파일방의 말석에 들어온 문파였다. 거기에는 백련교나 풍신류의 영향이 있는 게 분명했다. 좀 더 황산파의 무공의 근원을 들여다보면 그 점을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
' 단, 그건 지금 찾아볼 일은 아니지... 나중에 시간이 있으면 알아봐야겠다.'
나는 일단 정보를 머릿속에 쑤셔넣으며 천년설삼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지금까지 몇 번이고 온 곳이었으므로 동굴을 지나서 설원에 내려올 때도 태연했다. 나는 근처의 민가에서 가져온 통에 흑백련을 넣어서 삶은 후, 천년설삼과 함께 복용했다.
우우우 -
고통은 이제 없다.
운기조식을 끝내자, 이번에도 힘이 한층 더 강해진 기분이 들었다. 전신에서 쉴새없이 돌아다니던 힘이 한층 활력을 붙인 것이다. 다만 지금까지와는 달리 힘의 상승율이 약간 낮은 것 같아서 아쉽긴 했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이미 있는 내공을 다 활용하지 못하기 때문에 생기는 일이었다. 다 쓰이지 못한 힘이 누적되어서 활력을 찾고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내 수준이 높아진다면 갑작스럽게 내공이 더 증폭될 확률이 높았다.
"후, 됐어."
이제는 예전처럼 청룡무관에 들어가서 사범 일을 하면서 뇌신류를 배우면 된다.
금의위 권유를 받아도 거절해 버린다.
그걸로 아마 족할 것이다.
그리고 내가 찌뿌둥한 몸을 추스려서 밖으로 뛰쳐나가려고 할 때였다.
반짝!
"......?"
나는 흑백련을 채취했던 연못에서 왠 빛이 한순간 비치는 걸 느꼈다. 그 빛은 워낙 미약하고 오묘해서 내가 아니라면 지나칠 정도였다. 그러나 야생동물 이상으로 극도로 발달한 오감이 그 신호를 잡아챈 것이다. 나는 호기심을 느끼고 연못 근처로 갔는데, 자세히 보니 아주 작은 빛이 연못 안쪽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마 일반인은 커녕 왠만큼 수련을 쌓은 무림인도 알아채지 못하리라.
' 저 빛은 뭐지?'
연꽃이 우거져 있는 연못의 어둠 저편에서 흘러나오는 빛. 나는 그게 뭔지 알아볼 필요성을 느꼈다. 그래서 잠시 그대로 입수(入水)해 버렸다. 헤엄은 아주 잘 치기 때문에 익사할 걱정은 하지 않았다.
풍덩
부글부글...
나는 연꽃이 우거진 연못이라 그런지 뿌리와 줄기가 아주 복잡해서 헤엄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나 극한의 내공을 지닌 나는 피부로도 호흡이 가능했으며 폐활량이 굉장히 높았기에, 한 식경이라도 넉넉하게 숨을 참을 수가 있다. 그래서 느긋하게 연꽃뿌리를 헤치며 안으로 더욱 들어갔다.
그리고 조금 더 헤엄쳐 들어갔을 때 나는 놀라운 사실을 깨달았다.
"......!!"
연못 치고는 굉장히 깊다! 나는 연꽃뿌리를 헤치고도 무려 십여 장을 잠수했는데도 아직 이 연못의 바닥이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흘러나오던 빛은 이제 일반인의 눈에도 보일 정도로 선명해져 있었다.
빛에 거의 다 도달했을 때 나는 돌벽에 이상한 문양이 새겨져 있으며, 거기에 의문의 석문(石門)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명백히 인위적인 흔적이 남겨진 석문의 한가운데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둥근 구슬이 빛을 내뿜고 있었다. 아마 내가 보았던 빛은 이 구슬에서 뿜어져 나왔던 것이리라.
' 흑백련 연못에 이런 게 있었다니...'
나는 어떻게 해야할지 고민했지만 잠시 후 구슬을 빼 보기로 했다. 구슬이 석문의 정중앙에 정확하게 박혀 있기에, 어쩌면 구슬이 문을 붙잡고 있는 역할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쿠구구구구!!
내 생각은 적중했다. 구슬에 힘을 주어서 빼내자마자 석문은 둥글게 말려가더니 쩍하고 입을 벌렸고, 어디론가 향하는 수중통로(水中通路)가 드러났다. 신기하게도 갑작스럽게 문이 열렸는데도 수중통로로는 물이 한 방울도 들어가지 않았다. 통로 내부로 발을 들여놓자 편하게 숨을 쉴 수 있는 공기가 느껴졌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나는 통로를 둘러보며 신기함을 느꼈다. 연못의 물은 마치 무형의 막(膜)이라도 있는 것처럼 통로 내부로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심지어 이 공기에서는 편하게 숨을 쉴 수도 있다.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어쨌든 간에 들어온 김에 좀 더 들어가 보기로 했다.
저벅 저벅
통로는 마치 말려들어가는 듯한 나선형 계단이 이어지고 있었다. 곳곳에는 횃불이 걸려 있어서 보통 사람도 빛을 판별하고 들어올 만 했다. 나는 도중에 함정이 있지 않을까 조심했지만 그런건 없는 듯 했다.
"......"
한참을 걸어내려오자 넓은 공동(空洞)이 드러났다. 공동은 횃불이 여러 개 꽂혀 있어서 그럭저럭 밝은 편이었다. 그리고 공동의 한가운데에는 이상한 제단(祭檀)이 설치되어 있었다. 왠지 모를 기묘함에 압도되어서 망설이고 있었지만 어쨌든 간에 나는 이 공동을 좀 더 조사해 보기로 했다.
제단 앞으로 가서 근처에 놓여 있는 항아리나 돌덩어리 따위를 하나하나 살펴 보았다. 항아리 내부에는 아무것도 없이 비어있었고 돌덩어리에도 특이한 점은 없었다. 이렇게 어둡고 습기진 곳에서 아무런 퀘퀘한 냄새가 나지 않는다는 것도 신기한 일이었다.
나는 결국 제단으로 시선을 옮기게 되었다. 제단에는 알 수 없는 언어가 쓰여져 있었는데 역시 내 힘으로는 해석이 불가능한 괴어(怪語)였다. 혹시 천암비서의 것과 동일한 것인지 살펴보았지만 내 지식으로는 알 수 없는 사항이었다.
그 때였다.
[ ... 피를... 그어... 깨우는.....]
"어...?"
나는 깜짝 놀랐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제단 앞의 석판에 쓰여진 언어 중 일부의 의미를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걸 배운적도 익힌 적도 없었기에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완전한 해석은 되지 않아서, 단어 몇 개를 더듬더듬 읽으면서 대충 의미를 알아보기로 했다.
그 결과, [제단 위에 피를 떨어뜨리면 무슨 일이 일어난다] 라는 것 정도는 알 수가 있었다. 그것도 아마 손목의 피여야 할 가능성이 높았다. 나는 의혹이 넘쳐흘렀지만, 여하튼 이 상황에서 안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므로 들고 있던 단도로 손목을 살짝 그었다.
투둑
피가 떨어지자 제단의 문양을 따라서 천천히 구멍으로 흘러들어갔다.
쿠구구구구궁....
"열린다...?!"
나는 그 때까지 별 일 없던 평범한 돌벽이 갑자기 열리면서 또 다른 공간으로 향하는 문이 나타나자 놀랐다. 그 문을 따라서 안으로 들어가자, 갑자기 환한 빛이 느껴졌다.
눈이 부실 정도!
"... 저건!!"
나는 약 30여 장은 될 법한 거대한 공동의 반대쪽에 환한 빛을 내뿜는 무언가가 있다는 걸 알아챘다. 그것은 아마도 보물이나 병기(兵器)일 것 같았는데 저토록 환한 광채를 내뿜는 건 심상치 않았다.
휘오오
다만 문제가 있다면 이 공동은 마치 무저갱(無低坑)같은 나락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내가 일직선으로 놓여있는 외나무다리를 건너면 광채를 내뿜는 것에 도달할 수 있게끔 되어 있었다. 뜻밖의 보물을 얻게 되었다는 생각에 한 걸음을 내딛었을 때였다.
[ 의도가 뻔히 보이는 길을 갈 때는 조심하시오. 반드시 함정이 있다는 뜻이니.]
같이 여행하던 중 망량이 내게 종종 충고를 하곤 했었다. 그 때의 충고가 불현듯 머릿속에 떠오른 것이다.
' 그래. 조심해야 해.'
나는 혹시나 해서 한 발짝을 딛은 걸 그대로 물리며 다시 입구에 섰다. 이런 때일수록 조심성을 더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리고 그 선택은 결과적으로 옳은 것이었다.
쿠오오오....
무저갱에서 마치 뭔가가 끓어오르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무언가가 벽을 타고 올라오는 듯 질척거리며 쿵쿵대는 소리가 들렸다.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입구에서 숨죽이고 있자, 잠시 후 거대한 무언가가 쾅 하고 외나무 다리의 한가운데를 부수며 솟구쳐 올랐다!
쿠콰쾅
어둠 속에서 나타난 것 - 그것은 거미!
크기가 무려 수십 장에 이르는 엄청나게 거대한 거미가 수십 개나 되는 눈을 번득이며 무저갱에서 튀어나와 있었다. 거미는 천장에 자신의 실을 붙이고는 달라붙어서, 침입자를 찾는 듯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나는 급히 통로 뒤편으로 몸을 숨겼다.
' 빌어먹을. 곧이곧대로 외나무 다리를 건넜으면 빼도박도 못하고 잡아먹혔겠군.'
잡아먹히는 죽음을 겪고도 전생이 될까?
확실한 것은 전생이 된다고 하더라도 내 정신력은 붕괴상태가 될 거라는 사실이다. 나는 망량의 지혜를 새겨들은 사실에 감사하며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할지를 고민해 보았다.
이제 외나무다리가 끊겼으니 저 맞은 편에 가려면 30장을 뛰어야 한다. 그러나 천장에 거대거미가 붙어서 감시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 공격을 피하면서 30장이나 뛰는 것은 아무리 지금의 나라고 해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찌기긱 찌긱
거미는 막 잠에서 깨어났는지 천장에 실을 붙인 상태로 거미집을 만들고 있었다. 아마도 깨어난 김에 여기를 자신의 둥지로 삼으려는 듯 했다. 만일에 저 거미집이 다 완성될 경우, 그 누가 오더라도 거미를 뚫고 보물을 손에 넣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거대거미가 맨몸으로도 막강할 게 뻔한데 거미집이라는 지리적 이점을 지니게 되기 때문이다.
' ... 어떡하지?'
나는 시간과 거리를 잠시 가늠해 보았다. 그리고는 결심했다.
"일단 죽고 나서 생각하자!!"
파앗!
나는 더 상황이 나빠지기 전에 갑작스럽게 공동의 한가운데로 뛰어올랐다. 약 15장 정도를 뛰었을 때 거미가 반응해서 내게로 거미실을 내쏘았다. 나는 그대로 뇌령지기를 일으켜서 단도로 거미줄을 쳐 내었다.
따앙
뇌령지기는 거미줄의 점착성도 무시하는 성질이 있는지, 나는 손이 약간 저리는 것만 느끼며 그 반탄력으로 맞은 편으로 날듯이 도착할 수가 있었다. 나는 맞은편에 내려서서 환한 빛을 뿜어내는 '무언가'를 살펴보았다.
검(劍)!
그것도 아주 오래 전에 만들어졌는지 모양이 후줄그레하고 비실용적이었다. 수백 수천년 전 고대의 전장에서 썼을 법한 원시적인 모양의 칼이었다. 하지만 검신(劍身)에서는 그야말로 황금빛이 흘러나와서 강렬한 기(氣)를 전파하고 있었다. 내 내공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을 것 같은 강대한 힘이 느껴졌다.
나는 천장에 붙어서 나를 노려보는 거대거미가 이 검을 지키기 위해서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아마 제단에 뭐라고 쓰여져 있던 내용은 검의 수호자가 존재한다는 시련이었으리라. 그런 단어를 본 것 같다.
' ... 수호자?'
나는 그 순간 망량선사에게서 들었던 내용을 떠올렸다.
' 설마 이건...!!'
칠요의 비보!
일곱 가지 선인의 유물이란 게 혹시 내 손에 들려있는 이 고검(古劍)이란 말인가? 내가 뜻밖의 사실에 놀라고 있을 때였다.
츄르륵 츄르륵
갑작스럽게 거미가 전신에서 실을 내뿜기 시작했다. 가공할 속도로, 엄청나게 뽑혀나오는 실은 수십 장이나 되는 범위를 모두 뒤덮을 것 같았다. 지금의 나로써는 저렇게 엄청난 실의 폭포를 뚫고 공격하거나 다시 반대편으로 건너갈 방법이 없었다.
"빌어먹을... 검강(劍罡)이나 있어야 시도를 해 보겠군."
결국 나는 쓴웃음을 짓고는, 이 상황에서 가장 냉정한 판단을 할 수 있었다.
푸콱
"끄윽..."
나는 즉시 심맥을 터뜨리고 자진했다.
이길 방법도, 탈출할 방법도 없다면 죽는 수밖에 없다.
산 채로 빨아먹히면서 먹잇감이 되는 죽음보다는 이게 훨씬 나은 것이다.
이것이 나의 7번째 죽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