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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마전(伏魔殿)
이건 꿈인가?
나는 그렇게 독백하며 주변을 둘러 보았다. 이 곳은 어디를 봐도 내가 머물고 있던 마을이지만, 나는 이 곳이 현실(現實)이 아니란 사실을 알고 있다. 그도 그럴것이 내가 마지막으로 잠든 기억이 생생했기 때문이다. 아련한듯 몽환적인 공기 속에서 한층 더 이게 현실이 아니라는 걸 실감하고 있었다.
그 때, 길의 저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안녕 불청객. 나는 망량선사다.]
조그마한 오솔길의 한가운데로 걸어오는 것 - 그것은 한 마리의 검은 고양이(黑猫)였다. 스스로 망량선사라고 칭하는 그 고양이는 귀여운 얼굴로 빤히 이쪽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황당했지만, 동시에 이 장소가 현실이 아니라 꿈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그럭저럭 납득하게 되었다.
"망량선사? 왜 당신은 내 꿈에 나타난 거지?"
검은 고양이가 입을 열었다.
[ 자각몽(自覺夢)의 형태를 빌리지 않고 네 앞에 나타나는 건 너무 위험한 짓이니까.]
"뭐라고?"
[ 지금부터 두 달 전, 소악(小惡)이 대악(大惡)을 두려워하여 시공간을 탈출하는 일까지 벌어졌지. 내가 너의 인과(因果)에 휩쓸리게 되면 나 또한 마찬가지가 될 것이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이해 안되는 소리를 하던, 자칭 망량선사는 조그마한 몸뚱이를 움직여서 근처의 따뜻한 바윗돌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몸뚱이를 동그랗게 말아버린 채로 내 쪽을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 결론적으로 말해두지. 나는 너와 만날 생각이 전혀 없다. 지금까지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외계(外界)의 어둠을 견제하는 일만으로도 내 모든 역량을 쓰고 있기 때문이지.]
순간 힘이 빠졌다. 망량선사의 도움을 얻으려고 여기까지 왔는데 정작 본인은 결코 나를 만나거나 도와줄 생각이 없다니! 나는 악에 받쳐서 말했다.
"그게 무슨 이유냐? 넌 아까부터 알지도 못할 소리만 하고 있어!"
[ 너는 네가 무엇을 하는지 축생(畜生)에게 설명할 자신이 있느냐?]
검은 고양이, 망량선사는 자신의 꼬리를 빙글거리며 돌렸다.
[ 마찬가지다. 이미 이번 일은 인간의 인식능력을 벗어났어. 그러나 너무나 무서운 세계의 비밀을 함축하고 있기에, 너에게 설명하는 것조차 불가능한 일이다.]
"......"
[ 잘 보아라.]
우우우우우우
그 순간, 나는 이 꿈 전체가 어둠 속으로 오그라드는 것을 느꼈다. 내 몸뚱이는 물론 영혼마저 어디론가 빨려들어가는 것 같았다. 다시금 눈을 떴을 때는 천지의 별(星)이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은하수(銀河水)의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너무나 광대하기 그지없는 광경이다.
끝도 없는 암천(暗天)에 흩어져 있는 별무리!
수천만 수억 개의 광성(光星)!
내가 그 광경에 내심 압도되어서 멍하니 서 있자 망량선사가 말했다.
[ 너는 살아 생전 이 우주(宇宙)를 본 적이 있느냐? 이 풍광을 타인에게 설명할 자신이 있느냐?]
"......"
[ 뇌는 거울일 뿐이다. 작은 시선과 작은 각도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나는 그제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 이 놈은... 뭔가 달라! 초월한 무언가가 느껴진다...'
망량선사라는 자는 무림인의 시선으로 이해하거나 설명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단순히 최고의 술법사라는 영역을 넘어서 반신(半神)적인 존재, 혹은 이미 무언가를 초월(超越)해 버린 존재인 것이다.
천우진 때와는 달리 무림인과 비교하고 말고 할 게 없다. 말 한 마디 한 마디에서 느껴지는 현기는 아득한 것을 넘어서 비인간(非人間)적인 경지가 느껴졌다.
아마 저 검은 고양이 또한 인간의 몸뚱이가 아닌 화신(化神)일 것이다. 나는 여태껏 보았던 그 어떤 것보다도 초월적인 무언가를 앞두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해야 했다. 내가 뻣뻣이 굳어 있자 검은 고양이가 입을 열었다.
[ 그러나 나는 인간의 존재가 신(神)의 장난감이 되는 것 또한 원치 않는다. 그러므로 나는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존재인 너에게 약간의 도움을 주려고 한다.]
"......?"
스으
검은 고양이의 앞발이 갑작스럽게 나를 가리켰다. 그러자 갑자기 머리가 텅 비는 느낌과 함께, 머리 한켠을 짓누르고 있던 압박감이 사라지고 상쾌해 졌다. 불행하고 짜증나는 질척대는 뭔가가 사라진 것이다.
[ 이계(異界)의 암기(暗氣)를 없앴다. 당분간 네가 미치거나 오염될 일은 없을 것이다.]
"오염이라고?"
[ 네가 상대했던 그 주술사는 이 세상의 존재가 아니다. 우연히 흘러들어온 이족(異族). 놈의 술법이나 지식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보통 존재들은 오염되고 타락하여 절망을 숭배하게 된다. 내가 하는 일은 그런 떠돌이들을 이 세상에 도달하지 못하게끔 하는 것이지만 이번에는 운이 안 좋았군.]
나는 멍하니 있다가 한가지 사실을 깨닫고 반문했다.
"잠깐, 당분간이라니? 그런 놈이 또 있다는 거냐?"
[ 있겠지.]
"이계의 암기라는 걸 정화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 사악한 기운이나 지식을 봉인(封印)해 버리거나, 그것도 버텨낼 수 있는 정신력이 있으면 된다.]
"으음..."
내가 고민하고 있을 때 검은 고양이가 서서히 걸어서 차가운 시냇물에 발을 담궜다. 그렇게 시냇물의 온도를 즐기던 검은고양이는 다시 오솔길 너머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 그럼 귀찮으니 이만.]
이대로 퇴장할 기세였다.
뭐 이렇게 떡밥만 흘려놓고 대충 가버린단 말인가?! 나는 망량선사란 놈도 제자인 망량과 별 다를 바 없는 성격이란 걸 깨닫자 기가 막혔다. 그래서 재빨리 검은 고양이 앞으로 뛰어가서 가로막았다.
"잠깐! 잠깐만!"
[ 더 말할 게 남아있나?]
"네놈이 자기 할말만 하고, 떡밥 해결할 생각도 안 하고, 제멋대로라서 설명도 안 해줄거란 건 충분히 알겠다!"
망량선사가 감탄한 듯 대답했다.
[ 음... 나를 아주 잘 아는군.]
"그래도 몇 가지 질문만 대답해 줘라!"
[ 대답 못 하는 건 안할 거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질문했다.
"네녀석은 혹시 천암비서가 뭔지 알고 있냐."
[ 그게 뭔데?]
"그럼 두 달이 지나서야 떡하니 나타난 이유는 뭐지?"
[ 내 맘이지.]
"내가 세상에서 제일 위험한 존재라는 건 무슨 뜻이냐?"
[ 그냥 그래 보여. 얼굴도 못 생긴게.]
"......"
[ 뭐? 왜? 뭐?]
삐딱하게 꼬아대는 망량선사를 보자 이 놈은 역시 망량의 스승이란 걸 알 수 있었다. 나는 내 일을 더 질문해 봤자 대답해 주지 않을 거란 걸 직감하고 다른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망량선사. 나는 금의위를 쓸어버려야 하는데 도움을 줄 수 없겠나? 하다못해 네 제자인 천우진이란 놈이 도와주면 큰 힘이 될 거 같은데."
검은 고양이가 하품을 했다.
[ 귀찮고, 그건 내 일이 아니고, 나는 내 제자의 일에 강요하지 않는다. 망량이 너와 돌아다녀도 상관할 생각이 없다. 마찬가지로 네가 천우진을 동료로 만들고자 한다면 네가 알아서 할 일이다.]
"그런거 치곤 보패 오화칠금선을 도로 가져가버렸잖아."
[ 보패를 쓰는거 자체는 내가 망량에게 허용한 일이다. 그러나 제자놈의 성격상, 너를 돕는답시고 계속 써버리고 말겠지. 제자의 수명이 깎여서 단명(短命)하는 걸 두고볼 수 없기에 내린 명령이다.]
"......"
그러고보니 재능이 없는 망량이 보패를 사용하면 그 때마다 수명이 줄어든다고 했었다. 망량선사는 그 때문에 보패를 거둔 것인가? 검은 고양이가 날카로운 눈빛을 번득이며 말을 이었다.
[ 내 제자의 두뇌는 대륙제일이다. 난세(亂世)였다면 제갈량이나 소하같은 위인이 되고도 남았겠지. 술법의 재능이 없어서 떠나보냈으나 나는 내 제자의 재능을 아낀다. 보패가 없어도 충분해.]
"하지만 금의위와 대적하려면 실질적인 힘이 필요하다."
[ 니가 알아서 해라. 나는 세상 일에 관여하지 않는다.]
이건 말이 통하지 않았다. 뭐가 어찌되었든간에 강건너 불구경하겠다는 태도인 것이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다음 질문을 했다.
"내가 어떤 책을 가져올 수 있다면 해석해 줄 수 있겠는가?"
[ 무명제사서(無名祭事書)를 이야기하는 거라면, 불가능하다. 그건 이계의 존재만이 해석할 수 있다.]
"망량은 비슷한 책이 하나 더 있다면 해석할 수 있다고 하던데?"
[ 그건 내 제자의 착각이다. 그건 통상적인 언어의 법칙이나 규칙으로 만들어진 게 아니다. 아무리 머리가 좋아도 불가능하지.]
"......"
이계의 존재만이 해석 가능하다.
그 말은, 천암비서 또한 이계의 존재라면 읽을 수 있다는 말이었다. 나는 이미 주술사에게 그 책을 보여줌으로써 사실을 확인받은 바 있었다. 놈이 별 소리를 다 쫑알대었지만 알아들을 수 없었기에 신경쓰지 않는 중이었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정 그렇다면, 나도 제자로 받아 줘! 나도 술법을 배워서..."
[ 그건 무리다. 너는 무술재능이 없어보이지만, 술법재능은 더 없다. 그냥 포기해라.]
짜증나는 놈이었다. 나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빌어먹을! 어떻게 그렇게 단정지을 수 있는데?"
[ 그냥 보면 보이니까. 그리고 재능이 없는데 있다고해서 희망고문하는 게 더 잔인한 일이지. 나는 되려 친절한 편이라고 생각하는데?]
"넌 정말 재수없는 놈이다."
[ 자주 듣는 말이군...]
그렇게 중얼거리던 망량선사가 하품을 하더니 말했다.
[ 정 힘을 얻고싶다면 칠요(七曜)의 비보(秘寶)를 찾아보는 게 좋을 것이다. 그게 있다면 너같은 무식쟁이도 술법을 어느정도는 터득하는 게 가능할지도.]
"칠요의 비보?"
[ 보패와 마찬가지로 신선이 이 세상에 남긴 유물(遺物)이다. 보패와 다른 점은 그걸 지키는 수호자(守護者)가 존재한다는 것이지. 또한 술법을 고도로 터득하지 않은 일반인도 사용할 수가 있고.]
나는 귀가 솔깃함을 느꼈다. 그렇게 좋은 물건이 존재하고 있었다니! 망량선사가 이런데서 구라나 칠 리가 없었기에 약간 흥분해서 되물었다.
"오... 그걸 어디에 가면 얻을 수 있지?"
[ 나도 모른다.]
"엉?!"
[ 애초에 그걸 알면 내가 다 모았겠지. 뭐하러 너같은 놈에게 가르쳐 주겠느냐.]
"자기도 모르면서 대뜸 말해버리는건 무슨 심보냐?!"
[ 바보같은 놈. 굳이 설명을 해 줘야 알겠느냐?]
검은 고양이가 폴짝 하고 지붕 위로 뛰어올라갔다. 그리고는 느긋하게 걸어다니다가 말했다.
[ 칠요의 비보가 어딨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건 반드시 수호자가 지키고 있다. 달리 말하자면 수호자가 존재하는 유적(遺跡)만 발견하면 된다는 소리잖냐. 수호자 또한 신선이 남긴 유물이니까.]
"아..."
[ 이정도면 조언은 해 줄만큼 해 준 것 같군. 나머지는 직접 조사해 봐라.]
그렇게 말한 검은 고양이는 어느 새 오솔길을 걷고 있었다. 이번에는 막아도 멈추지 않을 기세의 총총걸음이었다.
[ 그럼 안녕이다.]
"자, 잠깐!"
힐끔 망량선사가 뒤를 돌아보며 한 마디를 남겼다.
[ 그 저주를 풀기 전에는 다시 나를 찾아와도 만나주지 않을 거다, 멍청이.]
"......"
자각몽 - 꿈이라기엔 너무나 생생한 그 꿈에서 깨어나자마자 나는 망량을 찾아갔다. 난데없이 오밤중에 방문하자 망량은 눈을 비비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뭔 일이오?"
나는 망량에게 내가 겪은 일을 말했다. 모든 걸 들은 망량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스승님은 우릴 도와주지 않을 생각인가 보군."
"어떻게 하면 좋겠소?"
망량이 머리를 긁적였다.
"어쩌기는... 그냥 마을에 계속 앉아서 힘이나 키웁시다."
뜻밖의 말이었다. 지금이라면 바로 움직여서 칠요의 비보라도 찾아나서야 하는 게 아닌가? 내 눈에 의혹이 떠오르자 망향이 부연설명을 했다.
"이 마을은 현재 천하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오. 스승님의 힘으로 보호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천우진 사제가 모든 외적을 그 전에 결계로 몰아내버릴 수 있소. 여기서 힘을 쌓는 것보다 안전한 선택지는 있을 수가 없다고 보오."
"칠요의 비보는?"
"나도 칠요의 비보가 뭔지 알고 있소. 월요(月曜), 화요(火曜), 수요(水曜), 목요(木曜), 금요(金曜), 토요(土曜), 일요(日曜)의 힘이 담긴 유물이지. 보패와 달리 술법을 모르는 자도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보물인 건 사실이오."
그렇게 말한 망량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나 그 칠요를 지키는 수호자는 무시무시하게 강력한 존재들이라고 알고 있소. 그 수호자를 쓰러뜨리고 비보를 손에 넣는다는 건 망상에 지나지 않소. 수호자를 쓰러뜨리러 가느니 금의위와 싸우는게 훨씬 나을거요."
"뭐라고? 수호자라는 건 신선이 남긴 유물이라면서 그렇게 쎈 거요?"
"술법의 힘이 퇴화한 현재에서는 상상도 되지 않는 신화시대의 힘을 지닌 자들이 직접 보물을 지키기 위해 창조한 존재들이라고 알고 있소. 금의위도 처리하지 못하면 그런 걸 찾아서 보물사냥을 떠나는 건 불가능하겠지. 칠요의 유적이 어딨는지 찾는것만 해도 한세월 걸릴 것이고."
"......"
망량이 말을 이었다.
"일전부터 당신은 실전을 통해서 감을 잡고 현재 무위(武威)를 올려가는 중이 아니오? 당신이 그 가공할만한 내공을 다스리는 능력을 기르고 무예를 더 연마한다면 그것만으로도 금의위와 싸워볼만 할것이오. 천천히 시간을 두고 실력을 키웁시다."
그 말대로였다. 나는 금의위들과 목숨을 걸고 뇌령을 운용하는 전투를 하면서 실력이 한단계 상승한 듯 했다. 뿐만 아니라 요즘은 내공을 충분히 녹여내면서 날이 갈수록 뇌신류의 수법을 자유자재로 풀어나가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재능이 없다고 해도 오랜 수련 끝에 물망울이 터지는 단계에 이른 듯 했다.
하지만 나는 조급한 마음이 들어서 고개를 저었다.
"금의위가 언제 여기로 들이닥칠 줄 알고? 그리고 금의위가 더 힘을 찾기 전에 결판을 내버리고 싶소."
"천우진 사제가 있는 이상 십만대군이 쳐들어와도 여기는 안전하오."
단정짓듯이 말한 망량이 이어서 말했다.
"어차피 금의위사 같은건 황궁에서 원하기만 하면 언제든 충원할 수 있는 존재요. 실력자를 모집한다고 무과 방을 한번 붙여버리면 그깟 일류무사 얻기가 힘든 일일 거 같소? 정말 중요한 것은 금의위 세력의 중심에 있는 총령과 부총령이라는 존재들이오. 사소한 일은 신경쓰지 말고 그 자들을 쓰러뜨릴 힘을 길러야 하오."
옳은 말이다.
' 하지만... 천암비서를 너무 오랫동안 밖에 놔두었어. 불안해.'
만일에 적이 쳐들어와서 결계가 돌파당해서 죽게되면, 나는 더 이상 회귀를 하지 못하고 영원히 죽게 되는 게 아닌가? 죽음의 공포가 몸을 휩싸자 저절로 조급해진다.
천암비서를 가지고 있어야 안심이 된다.
게다가 나는 왠지 오기가 들었다. 망량의 말은 구구절절 옳았지만, 왠지 좀이 쑤셔서 견딜 수가 없는 것이다. 특히 망량선사에게 바보취급 당했던 것 때문에 당장이라도 뭔가 해내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다. 그래서 나는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 난 그리할 수 없겠소. 무의 경지라는게 그리 쉽게 오르는 것도 아니고 천년만년 여기에 박혀있다가 나태하게 시간만 보내는 걸 견디기 힘들다는 거요."
"음... 사제의 환술은 그냥 장난끼였을 뿐이오. 그걸 심각하게 받아들이면..."
"난 조금이라도 빨리 힘을 얻고 싶소. 칠요의 비보를 찾아서 나 혼자서라도 움직이겠소."
그러자 망량은 한숨을 쉬었다.
"어쩔 수 없군... 예상보다 훨씬 이르지만 나도 같이 가겠소."
"당신은 그냥 여기에 있으시오. 당신까지 보호해 줄 여유가 없소."
"내 도움 없이 막무가내로 천하를 뒤지면서 칠요의 유적을 찾겠다고? 사막에서 바늘 하나를 찾는 짓을 하겠다는 건가."
"무사수행(武士修行)이라고 생각하면 되겠지."
"당신은 지금 너무 조급해하고 있소... 진정하고 냉정하게 생각 좀 하시오."
그러나 망량은 결국 투덜대면서도 나와 함께 마을을 나왔다. 나는 마을을 나와서 곧장 천암비서를 찾아서 다시 품에 넣었다. 사실 이걸 몸에서 떼어두고 있다는 조급함 때문에 더 보챘는지도 모른다.
지금은 밤중이다.
다소 쌀쌀해지고 있었으나 천암비서를 얻자 용기가 났다.
' 좋아, 이제 칠요의 비보를 찾아서 움직이면...'
그리고 망량과 함께 일차 목적지를 어디로 할지 정하려고 할 때였다.
"오오, 이거 '자칭' 백련교 호법사자라는 분이 여기에 있으셨군."
밤의 어둠 속에서 싸늘한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내가 그 목소리의 기척을 보자, 그 곳에는 흰색 가면을 쓴 존재가 서 있었다. 그의 양옆에는 금의위사들이 도열해서 어느새 횃불을 켜 두고 있었다. 나는 그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금의위 총령!"
"하하... 보자마자 내 정체를 알다니 과연 대단한 자로군."
금의위를 통솔하는 총대장이자 황궁제일고수가 껄껄 웃었다.
갑작스럽게 포위당한 나는 어떻게 된 일인지 당황스러웠는데, 잘 생각해 보니 이 자들은 처음부터 이 일대를 포위하고 있었으리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소나무숲 여기저기서 불쑥불쑥 모습을 드러내는 금의위의 숫자가 수십 명을 넘어설 수가 없는 것이다.
금의위 총령이 느긋하게 말했다.
"금의위 육조를 몰살시킨 범인의 인상착의와 특징을 알게 되어서 추적한 결과 한 달 전에 이 마을에 도착했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지. 하지만 전면공격을 하려 해도, 요원을 잠입시키려고 해도 의문의 안개때문에 사상자만 나서 발만 구르고 있었는데, 이렇게 제 발로 요새에서 나와 주었군."
"......"
"그것 참 조사할수록 재밌더군. 황산파에서 백련교 호법사자로 사칭이라? 하하하."
나는 크게 후회했다.
' 망량이 옳았어.'
나는 두 달 동안 너무나 평화롭길래 추적이 끊어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저 놈들은 한 달 전에 이미 행적을 알아냈지만 천우진의 환무결계때문에 그냥 손빨고 보고만 있었던 것이다. 더욱이 저 마을은 자급자족에 가까운 폐쇄적인 마을이었기에 출입하는 주민을 이용할 수도 없었으리라.
하다못해 뇌령을 더욱 발전시켜서 뇌령지기를 정제된 검기(劍氣)로 완벽하게 승화시키는 경지에 이르렀다면 크게 두렵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조급함을 이기지 못하고 섣불리 움직이는 바람에 화를 초래한 것이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망량, 미안하오."
망량은 이미 포기한 듯 힘없이 웃고 있었다.
"괜찮소. 엎질러진 물, 나는 포기하고 탈출하시오."
"......"
이 상황에서 내가 망량까지 챙기면서 금의위 9개조의 포위를 돌파할 방법은 없었다. 내 목숨도 불확실한 상황이었다. 나는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어볼 셈으로 금의위 총령에게 말을 걸었다.
"하하, 사칭이라고! 내가 백련교 호법사자인지 아닌지 네가 어떻게 아느냐?"
"아무것도 모르는 모양이군. 백련교 호법사자 3인 중에서 우리와 손을 잡은 자가 있다. 백련교에 대한 상당한 정보가 확보되어 있지. 네 인상착의는 어떻게 보아도 호법사자 중 누구와도 닮지 않았다."
"......!!"
백련교 호법사자 중 한 명이 금의위와 손을 잡았다니!
뜻밖의 정보에 놀랐지만, 동시에 놈들이 내 세세한 흔적까지 밝혀낼 정도의 정보력이 있다는 뜻이었다. 금의위 총령이 느긋하게 말을 이었다.
"주술사가 죽고 의식을 더 할 수 없는 건 아쉬운 일이지만 상관 없다. 어차피 무명제사서가 해석되어 있으니 그만큼의 술력(術力)을 지닌 자를 찾으면 돼."
"빌어먹을... 네놈들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잔혹한 짓을 벌이는 거냐? 인신공양으로 마물을 소환한다고 한들 그게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가? 마물으로 백련교가 어떻게 될 것 같냐는 말이다!"
금의위 총령은 이 자리에서 우리를 죽이기로 마음먹었는지 담담하게 정보를 말해 주었다.
"당연히 그렇지 않지. 마물이 100마리 있어도 백련교주를 어찌할 수는 없다. 마물은 그저 2차 의식을 위한 제물일 뿐이다. 그리고 그 2차 의식이 끝났을 때야말로, 우리는 백련교를 소멸시키고 황제폐하의 무궁한 영광을 이룰 수 있다."
"2차 의식?"
"하하하... 나머지 궁금증은 고문장에서 천천히 풀어라. 네게는 듣고싶은 게 많으니."
스으으으
그와 동시에 사방을 둘러싼 금의위의 고수들이 물결치듯 움직였다. 무려 수십명이나 되는 일류고수와 절정고수들이 마치 한 호흡을 이루듯이 합진(合陣)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현재의 내 실력으로 이 포위진을 벗어나는 건 불가능했다.
그 때 옆에 서 있던 망량이 말했다.
"... 부탁이 있소."
"......"
"내 목을 쳐 주시오. 고문은 싫소이다."
나는 망량의 담담한 말에 가슴이 에리는 것을 느꼈다.
이게 무슨 꼴이란 말인가.
망량이 했던 말 하나하나는 내가 죽을 위기를 몇 번이나 넘겨주었는데, 고작해야 한 순간의 조급함을 참지 못해서 이 꼴이라니! 망량에게 갚아야 하는 은혜도 아직 많이 남았는데, 내 손으로 그의 목을 쳐서 고통을 덜어줘야 하는 지경이라니!
나 자신이 어리석고 비참해서 눈물이 나올 것 같다.
나는 눈물을 억지로 참으며 말했다.
"먼저 가시오. 따라 가겠소."
망량이 피식 웃었다. 내 평생에 잊히지 않는 웃음이었다.
"훗... 그 동안 즐거웠소."
슈칵!
"아니 이런!"
금의위 총령이 눈살을 찌푸렸다. 내 검이 한바퀴 유려하게 움직이더니 깔끔하게 망량의 목을 몸통에서 분리했기 때문이다. 내 최선을 다해서 최대한 빠르게 베어낸데다가 뇌령지기가 둘러져 있었기에 망량은 거의 고통을 느끼지 못했으리라.
나는 내 자신이 미워서 견딜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입술을 피가 날 정도로 짓씹었다. 그리고는 말했다.
"총령! 네놈이 황궁제일고수면 일대일로 겨뤄보자! 그래서 내가 진다면 네놈에게 뭐든 다 이야기해 주겠다!!"
웅성
몰려있던 금의위들이 동요했다. 난데없이 포위에 갇힌 대상이 총대장에게 일기토를 신청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리라. 그러자 총령은 시원스레 승낙했다.
"좋다. 안 그래도 백련교 호법사자를 자칭하던 네 실력이 궁금하던 참이다."
"닥쳐!"
"기(氣)가 흐트러져 있군. 세 수 정도는 양보해 주마."
스으으
나는 부지불식간에 뇌령을 끌어올렸다. 동시에 전신에 퍼져 있던 막대한 내공이 그대로 뇌령지기로 전환되었고, 순식간에 내 몸은 번개의 기운으로 감싸여서 끓어올랐다. 야밤중에 갑작스럽게 번개가 친 것처럼 내 몸이 번갯불을 튀기자 주변에 있던 금의위들이 흠칫 놀랐다.
"오행의 성질을 가진 내공이 극한에 이르게 되면 그런 현상이 일어난다고 듣긴 했지만 과연 엄청난 내공이군."
파앗
나는 담담하게 평가하는 총령에게로 달려들었다. 어차피 총령같은 절대고수에게 잔재주는 의미가 없었으므로 최강의 일격을 가할 생각이었다. 게다가 자기 입으로 세 수라고 이야기한 이상 망설임없이 대갈통을 쪼개고 싶었다.
지잉 -
번개가 광채를 머금고 허공에서 명동했다. 뇌령지기를 가득 머금은 검로(劍路)가 일순간 엄청난 속도로 가속하더니 총령의 몸뚱이를 열 번이나 베고 지나갔다. 원래 이 일격이면 금의위사급은 한 방에 끝장낼 정도로 쾌속한 공격이었다.
"한 번."
하지만 총령의 목소리가 전혀 엉뚱한 곳에서 들려 왔다. 나는 그의 신형이 삼 장 밖에 나타나서 여유롭게 등을 돌리고 있는 걸 보자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잔상을 베었다고는 하지만 이건 마치 분신술이나 다름없는 빠르기인 것이다.
쐐액!
"두 번."
다시 한 번 공격해 봤지만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마지막으로 뇌령지기를 폭발시키듯이 총령의 전면에 돌격해 들어갔다. 이것만큼은 진소청조차도 막을 수 없었던 뇌영검법의 절초, 뇌영파천(雷影破天)이다.
"세 번."
까앙!
"......!!"
총령의 손가락이 튕기더니 내 검신(劍身)이 두조각 나서 날아갔다. 뇌령지기를 듬뿍 머금은 검은 그 자체로 한철에 못지 않은 강도를 지니고 있었는데 너무 손쉽게 부러진 것이다. 내가 황망하게 서 있자 총령이 담담하게 말했다.
"속도와 힘은 쓸만하지만 무공수준이 천박해. 호법사자라... 그 괴물들을 자칭하기엔 아직 멀었군. 나도 일대일로는 이길 자신이 없는 괴물들인데, 고작해야 대문파 장로급 무공을 가지고 우리 일을 방해했던 거냐?"
"......"
"백련교 교주는 그런 호법사자 3명이 동시에 덤벼도 못 이긴다는게 정말 큰 문제지만, 후후후."
나는 더 이상 망설일 상황이 아니었다.
울컥!
"아니, 이런!!"
내 입에서 미친듯이 피가 꿀럭거리며 흐르는 것을 발견한 총령이 당황했다. 그는 내가 삶의 의지가 강해보인다고 생각했는지 방심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찰나의 헛점을 놓치지 않고 내 심맥(心脈)을 스스로 끊어서 자진(自盡)하는데 성공했다.
자진은 처음이지만 정말 기분 더럽다.
풀썩
전신의 혈맥이 터지고 내장이 박살난 것 같다. 쉴새없이 목구멍에서 시뻘건 피가 솟구친다. 나는 의식이 날아가는 그 순간까지 극렬한 고통에 시달리면서 꿇어앉았다. 내 눈에는 땅에 떨어진 망량의 목이 보였다.
' 망량, 미안하오.'
나는 두 번 다시 이런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것이다.
다시 살아난다는 보장도 없지만, 다시 살아난다면, 오늘의 원한을 반드시 갚을 것이다.
그리고 의식이 사라졌다.
나의 6번째 죽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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