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9 ----------------------------------------------
복마전(伏魔殿)
나는 고민하던 끝에 망량에게 말했다.
"당신 혼자 들어가서 설득하면 안되겠소?"
"그것도 한 방법이지만, 그다지 내키지 않는구려."
"왜?"
"내가 스승님을 방문하고자 하는데 사제가 저렇게 격렬하게 막는 건 처음 봤소. 사제는 한번 아니라고 생각한 건 끝까지 밀고나가는 성격이오. 아마 그는 사기의 근원이란 걸 없애지 않는 한 나조차도 들여보내지 않을 거요."
그렇게 말하는 망량의 눈에는 나에 대한 묘한 의심의 눈초리가 있었다.
망량이 말했다.
"당신의 내공이 혹시 마도(魔道)의 공력이오?"
"그렇지 않소. 보다시피 오행의 뇌기(雷氣)를 근간으로 하는 능력이오. 뇌기에 파사현정의 효과가 있는 건 당신이 더 잘 알지 않소?"
"으음... 도무지 감이 안 잡히는군."
나는 투덜거리는 망량을 보자 가슴 속이 뜨끔했다. 사실 지금 상황에서는 천암비서를 다른 곳에 놔두는 게 최고의 해결방법이겠지만, 망량이 대번에 의심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고 섣불리 천암비서를 망량에게 이야기하는 것도 그리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내게는 천하제일급 내공이 있는데도 너무나 쉽게 환술에 걸려든 상황이라, 천우진의 환술에는 내공을 초월하는 현묘함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깡다구로 돌파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나는 별 수 없이 망량에게 사실을 털어놓아야 했다.
"망량. 아마 그가 나를 견제하는 건 이 책 때문일 거요."
"......?"
나는 망량에게 품속에 있던 천암비서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책을 얻은 경위를 설명해 주었는데, 망량은 괴어(怪語)를 확인하자 깜짝 놀라서 말했다.
"이건 황궁의 무명제사서와 동일한 글자!"
"해석할 수 있소?"
"그 주술사가 어떻게 했는지는 몰라도 내 능력으론 불가하오. 무명제사서가 있어야 대조하며 해석해 볼 수도... 하긴 이런 물건이라면 천우진 사제가 사악한 물건이라고 할 만 하군."
중얼거리던 망량이 말했다.
"헌데 말하는걸 보니 당신은 이 책을 품에서 놓고싶지 않은가 보군. 당신에게 그 책은 중요한 의미가 있는 거요?"
"딱히 그런건 아니오. 하지만 보물(寶物)일지도 모르는 귀한 책을 아무데나 버려두는 바보가 어디 있겠소."
"그것도 그렇군."
내가 둘러대자 망량은 납득하는 기색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망량이 말했다.
"그럼 이 책을 당신만이 아는 곳에 묻어두고 오시오. 그리고 스승님을 뵙고 난 후에 회수하면 되지 않겠소?"
망량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그러나 나는 저 말에 쉽사리 따를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별거 아닌 것처럼 둘러댔지만, 아마도 천암비서가 내 역행(逆行)의 원천일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만일 천암비서를 다른 곳에 놓아뒀다가 뜬금없이 사망해버리면 두 번 다시 역행을 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았다. 하물며 내 내공으로도 저항할 수 없는 환술의 소유자를 대면하는 게 아닌가? 상대방의 변덕때문에 갑작스럽게 사망해버릴 확률이 매우 높다. 누군가가 훔쳐갈 가능성보다는 그게 훨씬 걱정되었다.
' 훔쳐간 건 찾을 수라도 있지만, 죽음으로 끝장나 버리면 영영 만회할 수 없다.'
나는 여기서는 다소 무리를 해서 망량을 설득하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망량에게 말했다.
"그렇게까지 그에게 숙이고 들어가고 싶지는 않소. 어떻게 해서든 그의 환술을 깨어버리겠소."
"뭐라고? 터무니없는 소리!"
망량은 깜짝 놀라더니 내게 조목조목 설명했다.
"백웅 당신이 예전에 내 망운진(忘雲陣)을 물처럼 헤쳐 지나왔던 것은 어디까지나 내 기문둔갑이 신통력을 담고있지 않았기 때문이오. 당신의 강대한 기(氣)가 술(術)을 눌러버린 거지. 무림의 진법은 이런 경우가 대다수이기 때문에 무림인들은 기문둔갑을 얕보기가 쉽소.
하지만 사제의 환술은 진정한 기문둔갑의 정수(精髓). 술법에 신(神)이 담기게 되면 이야기가 달라지는 거요. 기가 아무리 강력하다고 하더라도 현실에 환상이 간섭하게 되는 건 어찌할 도리가 없소. 당신은 아마 의식도 하지 못하는 사이에 당해있었을 것이오."
맞는 말이라서 할 말이 없었다.
"그렇기에 무림인이 저렇게 강력한 환술을 깨기 위해서는 의(意)가 념(念)을 형성해야만 하는 것... 그건 무예에 있어서 극치 중의 극치로 알고 있소."
"으음."
나는 망량이 이야기하는 의(意)와 념(念)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히 기를 다루는 수준을 넘어서 최상승의 무학단계로 향하는 이론이었다. 나는 재능이 없어서 그걸 깨닫지 못했으나 진소청이나 이광은 그걸 이해하고 실현할 수 있는 진정한 천재들이었다. 어쨌든 지금의 내게는 까마득한 경지였기에, 나는 망량의 말을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가 있었다.
쉽게 말하자면 의지만으로 바위를 깰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였다. 나는 백날 똥마려운 표정을 지으며 집중해도 그렇게는 할 수 없다. 그저 기를 집중해서 바위를 깨는 주먹을 날리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진소청이나 이광은 의지만으로 바위를 깨버리는 게 가능하다는 차이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천암비서는 한시도 내 몸에서 떼어낼 수가 없다. 나는 고개를 크게 저었다.
"... 그렇다면 난, 망량선사에게 의지하지 않겠소!"
"뭐... 뭐라고?!"
망량은 멍하니 서 있다가 팔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는 화가 나고 억울한 듯 했다.
"이런 소인배가! 스승님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천군만마보다 귀중할 터인데 그깟 서책을 떼어놓기 싫어서 기회를 놓친다는 거요?! 제정신 차리시오, 제발! 우리가 정상적으로 싸우면 절대로 금의위를 이길 수 없소."
"내가 납득할 수가 있어야 하오. 어차피 정면대결이라면 절망적인 전력차이인데 망량선사의 도움을 받으면 뭐가 얼마나 달라진다는 것이오? 그가 금의위 위사 천호들을 일거에 술법으로 쓸어버릴 수가 있는 거요?"
"......"
"어떻게 말해도 좋소. 나는 내가 납득할 수 있을 때까지 저 환술에 도전할 생각이오. 저 자의 결계를 뚫을 수 있을지도 모르니."
망량은 답답해서 죽으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나 이내 내 땡깡이 먹혔는지 턱을 괴었다. 그리고는 생각을 거듭하다가 말했다.
"당신의 그 책에 대한 집착은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군. 하여튼 알았소. 당신이 그렇게 나온다면 나도 같이 환술에 들어가 주겠소."
"의미가 있겠소? 아까 당신도 순식간에 당했잖소."
"내가 함께 들어간다면 사제는 최소한 당신을 해치지는 않을 것이오. 내 나름대로의 타협안이라고 봐 주시오."
그렇게 나와 망량은 다시 한 번 마을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나는 망량에게 너무 강짜를 부린 것 같아서 미안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만일에 천암비서를 몸 밖에 놔뒀다가 죽어서 역행이 되지 않으면 그것보다 비상사태는 없기 때문이다. 안되면 망량선사의 도움을 포기하려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사아아...
약 이십 보 정도 걸어들어갔을까, 갑자기 발 밑에는 자욱한 운무(雲霧)가 깔리기 시작했다. 나는 옆을 돌아보았는데 어느 새 망량의 모습은 사라져 있었다. 그리고 평범한 시골마을의 풍경은 음산하기 짝이 없는 계곡처럼 되어 있었다. 나는 크게 내공을 돋우어서 이 환영을 떨쳐내려 했으나 전혀 변하는 게 없었다.
저벅
그리고 맞은 편에서 하나의 인영이 걸어왔다. 그것은 여전히 농사꾼 복장을 하고 있는 천우진이었다. 천우진이 나를 싸늘하게 노려보더니 말했다.
"정말 무식한 사람이군. 당신 내공이 천하일절(天下一絶)이란 건 인정하지만 그걸로는 내 환무(幻霧)를 죽었다 깨어나도 돌파할 수 없소."
"당신이 그토록 나를 막는 이유가 뭐요? 당신에게 스승을 방문하려는 손님을 내칠 권한이라도 있다는 것이오?"
"말했듯이 스승님은 지금 자리를 비우셔서 없소. 내가 당신을 막으려는 이유는 당신에게서 느껴지는 사기(邪氣)가 더할 바 없이 기이한 것이기 때문이오. 그런 위험요소를 스승님의 은거지에 들이는 건 제자의 도리가 아니지."
나는 억울해서 천우진에게 항변했다.
"사기라고? 나와 망량은 무고한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의(義)를 실천하고자 노력했소! 난데없이 천우진 당신이 사악한 기운으로 몰아붙이는 게 말이나 되는 거요?"
되려 천우진이 당당하게 대답했다.
"그래서 당신 목숨이 아직 붙어있는 줄 알아두시오. 극악하지는 않으나 생전 처음 느껴보는 기운이라서 아직은 경계하고 있을 뿐이오. 만일 그게 비인외도(非人外道)의 기운이었다면 당신은 세 걸음도 되지 않아 숨통이 끊어질 것이오."
"하, 그게 뜻대로 될 것..."
쿨럭!
나는 그 순간 코와 입에서 피를 토했다. 영문도 모르게 내장(內腸)에서 타격이 은은하게 올라왔다. 뭔가 공격한 기색도 없었는데 내가 당해버린 것이다. 다행히 목숨에 지장이 갈 정도는 아니었지만, 쥐도새도 모르는 은밀한 공격이었다.
"뜻대로 안 될리가 있소? 이 환무 내에서는 시간도 공간도 내가 지배하는데."
이건 위험하다!
나는 덜컥 겁이 솟아오르는 걸 느꼈다. 지금도 천우진의 모습은 나에게서 삼 장 밖에 있지만, 저기에는 무슨 수를 써도 도달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상대방은 원할 때 언제든 나를 공격할 수 있기에 압도적으로 불리한 상황이었다.
나는 천우진에게 물었다.
"도... 도대체 무슨 수로 그 정도의 힘을? 나이도 그렇게 어려보이는데."
천우진이 피식 웃었다.
"외견은 당신이 나보다 다섯 살은 어려보이는데? 역시 당신은 내 생각대로 반로환동한 고수인가 보군."
"......"
"좋게 말할 때 그냥 물러가시오. 당신때문에 망량 사형까지 고생하고 있잖소."
천우진은 망량을 그리 싫어하지 않는 듯 했다. 재능차이로 볼 때 천우진이 망량을 깔보고 있을 거라는 생각과는 대조적이었다. 그저 평범한 사제와 사형의 관계로 보였다. 나는 혹시해서 물었다.
"망량을 어떻게 했소?"
"끝나지 않는 미로를 걷고 있소이다. 기문진법을 응용한 문제를 내놓은 상태요."
"제발 그냥 비켜 주시오. 우리는 이런 곳에서 낭비할 시간이 없소이다."
"억지를 부리는 건 당신 쪽이라는 걸 슬슬 인정하는게 좋을 텐데. 내가 당신을 죽이지 못할 거라는 생각은 버리는 게 좋소."
스스스스
천우진의 위협은 단순한 수준이 아니었다.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사방에 퍼져있던 안개가 창(槍)처럼 변해서 내 몸 주변을 둘러쌌기 때문이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내게 사방에 깔린 안개의 창을 피할만한 수단은 없었다.
' 이제 틀린 건가...!!'
내가 이를 악물고 천우진과 싸울 준비를 할 때였다.
따악!
갑자기 천우진이 손가락을 마주쳐서 안개의 창을 없앴다. 그리고는 말했다.
"이번에는 내보내 주지. 사형이 기문둔갑 문제를 풀었으니. 하지만 다음번에도 문제를 끌어안고 들어오면 절대 용서하지 않겠소."
기문둔갑 문제를 풀었다?
어리둥절해 있는 사이에 눈 앞의 풍경이 바뀌어 있었다. 그리고 나와 망량은 다시금 마을 입구에 와 있었고, 망량은 반쯤 탈진한 상태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허억... 허억... 사제의 실력은 날로 일취월장 하는군..."
"이봐! 괜찮소?"
나는 급히 망량의 맥을 짚었다. 다행히도 그냥 기력이 소모되었을 뿐 별다른 외상이나 내상은 없어 보였다. 망량은 머리가 어지러운 듯 관자놀이를 짚은 채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는 그에게 물었다.
"기문둔갑의 문제를 풀었다고 하던데, 당신이 한 것이오?"
망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사제가 정말로 백웅 당신을 죽이고 싶어하길래, 부탁해서 내기를 했소. 내가 이기면 우리 둘을 무사히 환무에서 내보내주기로 했었던 거요."
"......"
머리를 긁적거린 망량이 한숨을 쉬었다.
"정말 어려운 문제였소. 틀릴까봐 가슴이 조마조마했어. 이제 나는 기문둔갑 공부에서도 사제에게 뒤쳐질지도 모르겠소."
나는 얼굴이 벌개지는 것을 느꼈다. 졌을 때의 조건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나는 아마 환무 내에서 변변히 저항도 하지 못하고 죽었을 것이고, 망량은 망량대로 환무에서 고생하다가 탈진해버렸으리라. 망량이 내 생명을 구해줬다고 생각하니 절로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 내가 너무 억지를 부렸구나.'
나는 이제 개인적인 이기심을 좀 내려놓을 때가 왔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사실 망량이 없었다면 이번 6번째 삶은 시작부터 꼬였을 것이다. 심심하면 날파리처럼 죽어나가던 내가 방향을 잡고 사교토벌에도 성공한 것은 전적으로 망량 덕분이었다. 그가 나를 동료로 생각하는 만큼 나도 내 욕심을 어느정도 포기해야만 했다.
나는 한참 후 결심하고 말했다.
"천암비서를 묻고 오겠소."
"잘 생각했소."
나는 이윽고 천암비서를 그 자리에서 약 5리 정도 떨어진 독특한 소나무 밑에 묻어놓았다. 나중에 기억력을 되살려서 찾으러 오면 크게 힘들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다시 망량과 함께 재차 마을으로 진입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신기하게도 환무가 펼쳐지지 않는 것이었다. 어디를 보나 평범한 마을 그대로였고 주변에는 행인들이 한가롭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사방을 경계하는 나에게 천우진의 목소리가 웅웅 울리듯이 들려 왔다.
[ 사기를 없애고 들어왔군. 당신들의 체재를 용인하겠소.]
그리고 목소리가 씻은 듯이 사라졌고, 한없이 평화로운 마을으로 되돌아 와 있었다. 옆에 있던 망량이 쓴웃음을 지었다.
"너무 상심하지 마시오, 백웅. 사제는 선인(仙人)의 술수를 6세 시절부터 쉽게 익혀냈던 천재(天才)요. 거기에 뛰어난 신통력까지 타고난 선골(仙骨)이지. 대륙 전체를 통틀어도 사제를 상대할만한 술법사는 아마 두세 명도 되지 않을 것이오."
"그 정도 실력이란 말이오?"
"그렇지 않고서 어찌 망량선사의 진전(眞傳)을 이어받겠소? 사제와 상대하기 위해서는 백련교주(白蓮敎主)나 백련교 호법사자쯤 되는 무림인이 찾아와야 할 것이오."
"......"
나는 망량의 이야기가 과장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 정도로 천우진의 환술은 무림인이 생각하는 좌도방문의 한계를 가볍게 박살내버리는 초월적인 수준이었다. 천우진만 하더라도 저 정도 실력일진대 그 스승인 망량선사의 능력은 어느 정도인 것일까?
하지만 나는 되려 씨익 웃었다.
"재밌겠는데."
오늘의 패배가 짜증나고 한이 된다기보다는 새로운 영역을 개안(開眼)한 느낌이었다. 게다가 아직 까마득하게 먼 경지이긴 하지만, 의(意)와 념(念)을 다룰 수 있다면 저런 최고위술법사와 싸울 수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지 않았는가!
나는 객잔에서 방을 잡은 후 쉬지 않고 내공과 무술을 연마하기 시작했다. 천우진의 환술에 걸려서 반 년 동안 허송세월한 경험으로 느낀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앞으로 나아갈 길이 멀기 그지없는데 멈춰서서 나태해질 수는 없었다. 그러다가는 골백번을 고쳐죽어도 모자랄 것이다.
그리고 망량선사를 만날 수 있었던 것은 그로부터 딱 두 달이 지나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