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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검신-48화 (48/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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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마전(伏魔殿)

나는 망량과 함께 낙양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나 혼자라면 경공으로 산과 강을 손쉽게 넘을 수 있었지만, 망량에 맞춰줘야 했기 때문에 말을 타고 다니기로 했다. 낙양으로 향하는 동안에 망량의 집에도 잠시 들르기로 했다.

망량은 자신의 오두막에 온 후 뭔가를 정리하는 기색이었다. 그것은 단순히 자신이 지니고 있던 서책이나 신변정리 뿐만 아니라, 그가 진랑곡에 여기저기 숨겨놓았던 정보원들을 재정비하는 과정이었다. 망량은 그동안 점술이나 상담으로 벌어둔 돈으로 정보원이나 부하를 사서 교묘한 조직망을 구축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번에 마을 근처의 지도를 관아에서 훔친 것도 그런 망량의 부하들이었다.

나는 망량에게 물었다.

"그 정도의 조직망이면 일개 방파를 꾸려도 될텐데 왜 그리 남루하게 진랑곡에서 점치면서 살고 있었소?"

망량이 손사래를 쳤다.

"물론 내가 정보조직을 결성해서 활동했다면 지금보다 열 배는 더 부유했겠지. 허나 정보라는 건 그걸 지킬만한 무력(武力)이 있을 때 가치가 있소. 한낱 중견방파의 무력에도 목숨을 걱정받을 정도라면 굳이 정보상을 할 이유가 없는 거지."

"흠..."

"그리고 나는 진랑곡의 생활이 꽤 마음에 들었소. 적당히 돈은 벌리고, 책도 원할 때 실컷 봤고, 놀고싶을 때 놀았으니까."

여자랑 떡치고 싶을 때 떡치고... 라는 비꼬기를 하고 싶었지만 그냥 관두었다. 대신에 망량의 서책 중 한 권을 집어서 훑어보며 말했다.

"그럼 당신은 왜 스승의 명성을 빌려서 살고 있었던 거요?"

"허락을 받았기 때문이오. 내가 그 분의 이름을 부끄럽지 않게 하면 되는 일이라서."

"그렇다고 해도 사칭은..."

망량이 쓴웃음을 지었다.

"내 스승님은 관대하시오. 만일 내가 스승의 명성에 똥칠을 한다고 해도 전혀 개의치않을 분이오. 세상 만사에 거의 관심이 없는 분이라. 명예에도 관심이 없으셨으나 어쩌다보니 유명해지셨지."

"실력이 있는 자는 어디서든 두각을 드러내는 법이오."

"여하튼 지금 우리를 도와줄 수 있는 건 내 스승, 망량선사밖에 없소. 스승님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만사가 형통할 것이오."

나는 궁금한 점을 물었다.

"그러고보니 망량 당신은 왜 무공(武功)을 익히지 않았소? 황궁에서 천문관을 한다면 무공서적을 볼 기회도 있었을텐데."

"물론 있었소. 하지만 무공이란 결국 몸으로 하는 것이기에 나같은 책상물림 인생이 틈틈히 하는 건 한계가 있소. 내공을 쌓아서 건강을 도모할 수는 있겠지만 의미가 없소. 어설프게 문무(文武)를 추구하느니, 내 특기분야에 모든 정력(精力)을 쏟고자 했던 거요."

망량의 사고방식은 무림인의 입장에서 볼 때는 신선한 것이었다. 무공을 익힐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도 그 시간을 아껴서 자기 공부에 매진하다니! 하지만 나는 망량의 천재적인 기책(奇策)과 지혜를 직접 옆에서 보았기에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쉬지 않고 지식과 지혜를 갈고닦았기에 어설픈 자보다 훨씬 뛰어나게 될 수 있었던 것이리라.

망량은 방을 정리하던 중에 갑자기 생각난 듯 말했다.

"아, 독이 든 호리병은 버리지 말고 계속 보관하시오. 반드시 쓸 일이 생길 것이오."

"알겠소."

"그럭저럭 정리가 다 됐군. 당신은 혹시 읽고싶은 책이 있으면 내가 말하시오, 빌려줄 테니."

나는 망량의 제안에 그의 서재를 훑어보았다. 과거 3년동안 머리가 박살나게 공부했을 때의 기억이 났다. 나는 그 때 그다지 즐겁게 공부한 것 같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지나고보니 피와 살이 되는 지식이었다. 망량이 모아둔 서책이라면 틀림없이 공부할만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 나는 책장에서 한 권의 책을 꺼냈다.

"이걸 보고 싶군."

"<포박자(抱朴子)>? 당신은 연단술(鍊丹術)에 관심이 있는 건가?"

"그야 뭐, 불로불사의 비술(秘術)이 있다고 하니."

포박자란 연단술 및 방중술, 기타 식이요법이나 호흡명상법이 적혀있는 책이었다. 딱히 비서(秘書)도 아니었고 세간의 서생들도 한두권씩 구해서 보는 편이었다. 망량이 낄낄 웃으며 말했다.

"세상에서 말하는 연단술은 9할 9푼이 사기꾼들이오. 이제는 황실에서조차 연단술을 믿지 않소."

"엉? 연단술은 원래 불로불사의 비약을 만드는 학문이 아닌가?"

"연단술의 목표는 궁극의 금단(金丹)을 만드는 건데 이 금단이라는 걸 만들기 위해 수은(水銀)을 대량으로 섞는 게 보통이오. 그러나 수은은 상당한 독성(毒性)을 갖고있기 때문에, 연단술로 약을 제조해 먹다보면 중독사(中毒死)하기 일쑤지."

중독사!

연단술과는 안 어울리는 단어였기에 나는 내심 놀랐다. 망량이 말했다.

"진짜 연단술이란 극소수의 좌도방문, 혹은 우도의 도인들이 비밀리에 전승하는 것이오. 이런 서책으로 알 수 있는 게 아니지. 그래도 이 책에서 방중술은 쓸만하오."

"진짜 연단술? 그럼 금단이 존재하긴 한단 말인가?"

"그렇소. 하지만 그걸 얻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니 그냥 흘려들으시게."

망량은 그렇게 말하더니 다른 책을 내게 내밀었다.

"차라리 이걸 읽어보시오. <산해경(山海經)>이오."

"그림책 같군."

"그렇소. 이 책에 등장하는 요물(妖物)들은 흥미로운 것들이니 심심풀이로 볼 만 하오."

"잘 보겠소."

그 말대로, 산해경에는 기이한 지명이나 요괴(妖怪) 따위가 나왔다. 이게 실용성이 있어보이지는 않았지만 나는 망량의 말대로 산해경을 읽기로 했다. 직접 마물(魔物)을 두 눈으로 본 나로써는 이 책에 강하게 끌릴 수밖에 없었다.

진랑곡의 신변정리가 끝나고 낙양으로 떠나자, 약 사나흘 만에 낙양성 앞까지 올 수 있었다. 낙양은 예전에 봤을 때와 마찬가지로 멀리 외성에서부터 호화롭고 거대한 성벽과 인파가 인상적이었다.

푸르륵

말이 투레질을 하자 망량이 고삐를 다잡으며 말했다.

"성 안에 들어갈 필요 없소. 스승님은 다른 곳에서 지내시니."

"낙양성 안에 사는 게 아니었소?"

"번잡한 게 싫다고 성 밖에서 살고 계시오. 어차피 우리가 지금 낙양성 안으로 들어가는 건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일이니 잘된 셈이지."

우리는 낙양에서 남서쪽으로 갔다. 약 5리 정도를 가자 여동빈(呂洞賓)의 사당이 있는 조그마한 마을이 나왔다.

여동빈은 도교(道敎) 팔선(八仙)의 한 명으로, 세간에서 검선(劍仙)이라고 불리는 전설적인 선인이었다. 도호는 순양자(純陽子)로써 세간의 무속신앙은 물론 구파일방이나 온갖 도가종파에서 그를 숭앙하고 있었다. 또한 그는 전설적인 검술으로 용마저 퇴치했다는 일화가 있어서 민간의 인기도 좋았다.

망량은 여동빈의 사당에서 말에서 내렸다. 그리고는 자신의 섭선을 공손히 사당 제단 위에 올린 후 말했다.

"제자가 도착했습니다."

그러자 잠시 후, 검선 여동빈의 사당이 부르르 떨렸다. 진동이 약 반 각 동안 흐르다가 이윽고 멎었다.

그리고 낯선 목소리가 뒤편에서 들려 왔다.

"사형(師兄), 때가 안 좋았구려. 스승님은 볼일이 있어서 외출중이시오."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 곳에는 나이가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앳된 인상의 청년이 있었다. 특이한 점은 도복을 입고 있는 게 아니라 그냥 농사꾼 복장을 하고 있으면서 외모에 왠지 모를 귀티가 흐른다는 점이었다. 망량은 그를 발견하자 뻘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사제. 나는 스승님께 긴히 볼일이 있어서 찾아온 거라네."

"누가 뭐랬소? 단지 지금은 안 계실 뿐이오."

"......"

사제라고 불린 청년은 무표정하게 말했다.

"다만 보패 오화칠금선은 그 자리에 가만히 놔두고 가시오. 그 물건을 더 이상 사용하는 건 용납하지 않겠다는 스승님의 말씀이 있었소."

"......!!"

망량은 놀라는 기색이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네. 그럼 나는 이만 가 보겠네."

"마음대로 하시오. 그럼 나도 농사나 지으러 가겠소."

사제라는 청년은 허리에 걸어두었던 호미를 한 손에 들고는 다시 어디론가 가 버렸다. 아무래도 정말로 농사를 짓는 사람 같았다. 나는 사제의 모습이 사라지자 황당해서 망량에게 말했다.

"농사? 당신 사제라는 자는 뛰어난 술법사인데 어찌 농사나 짓고 있는 거요?"

농사를 짓는 건 평범한 사람들이 늘상 하는 일이었다. 물론 농사를 짓는 게 나쁜 일은 아니었으나, 대륙 최고의 술법사인 망량선사의 제자라는 인물이 그 능력을 살리지 않는 건 약간 황당하다고 볼 수 있었다.

"내 사제는 농사지은 걸로 자급자족하는 중이오. 근처 사람들도 그를 그냥 평범한 농민으로 알고 있지."

"아, 농사를 지으면서 신묘한 술법으로 엄청난 수확을 거두는 거군."

"그런 거 없소. 그는 술법같은 거 안 쓰고 평범하게 농사를 짓소."

"선사 밑에서 수행 중이라서 그런 건가?"

"그런것도 아니오. 내 사제는 이미 예전에 면허(免許)를 취득하여 한 명의 술사로 인정받았소."

내가 망량을 쳐다보자,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냥 그런 인간이오. 세속의 가치는 내 스승과 사제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지."

"으음."

"여하튼 당분간은 이 마을에서 스승님을 기다려야겠구려."

"망량선사는 언제쯤 오는 거요?"

"나도 모르겠소. 워낙 제멋대로인 분이니 몇 년이 걸릴지도..."

나는 이 조그마한 마을에 머무는 게 시간을 낭비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며칠 후면 본격적으로 금의위의 실종을 조사하려고 황궁에서 움직일 텐데, 황금같은 시간을 아껴도 모자랄 판에 그냥 대기만 하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기에 은괴를 꺼내서 오랫동안 객잔에서 머물기로 했다.

망량이 말했다.

"마침 잘 된 거요. 당신도 자신의 무술을 되짚어볼 필요가 있지 않겠소? 수련하는 기간이라고 칩시다."

바로 금의위가 쫓아오지는 않을 것이다. '뒷처리'는 할만큼 했고 목격자도 없었기에, 어쩌면 몇 년이 지나도 그들이 진상을 밝히지 못할 확률이 컸다. 지금은 만에 하나를 대비하고 있을 뿐이다.

"뭐 다 좋지만... 궁금한 게 있소. 나는 이제부터 당신을 뭐라고 부르면 좋소?"

이건 중요한 문제였다. 나는 지금까지 망량선사를 줄여서 망량이라고 대충 부르고 다녔지만, 진짜 망량은 따로 있는 것이다. 내가 문제를 제기하자 망량은 왜 쓸데없는 걸 묻느냐는 듯 당당하게 대답했다.

"그냥 계속 망량이라고 부르시오."

"당신 스승이나 제자가 껄끄러워하지 않겠소?"

"그런 건 신경도 안 쓰는 인간들이오. 그리고 애초에 망량이라는 칭호를 써도 괜찮다고 인정받았기 때문에 자칭하고 다녔소. 당신이 그 문제를 걱정할 필요는 없소이다."

사칭을 해도 용납하는 사제관계!

일반적인 문파에서는 이해할수도 이해될수도 없는 일이었기에 어이가 없었다.

"하아, 뭐 그렇다 치고 당신 사제의 이름은 뭐요?"

"천우진(天雨進)이오."

"특이한 이름이군."

"저래봬도 사제는 무섭소. 그를 적으로 돌리는 건 십만대군을 적으로 만드는 거나 다름없는 어리석은 짓이오."

망량의 사제 천우진은 평범한 농사꾼 청년의 외견과 달리 대단한 실력자인 것 같았다. 나는 공연히 긁어부스럼을 만들 필요가 없었기에 망량의 충고를 새겨듣기로 했다.

그 날부터 객잔에서 하릴없이 먹고 자면서 때때로 수련을 하는 나날이 반복되었다. 거진 일 년치 숙박비를 냈기에 객잔주인은 온갖 비위를 맞추려는 듯 했다.

"당신도 알아서 볼 일 보시오."

망량은 그렇게 말하고는 책을 읽으러 들어갔다.

나는 하루에 세 시진씩 무공수련을 하고, 남는 시간에는 내공운용을 하면서 세맥을 뚫는 작업을 했다. 망량은 망량대로 책을 읽으면서 뭔가 공부를 하는 것 같았다. 나도 책을 영 안 읽으면 무식해질 것 같아서 망량에게서 빌렸던 산해경을 틈틈히 읽었다.

그래도 시간이 남아서 멍하니 객잔 방 안에서 푸른 창공을 보는 나날이 이어졌다. 나는 매일매일 쳇바퀴 돌듯이 같은 일과를 반복하면서 정신이 멍해지는 걸 느꼈다. 벌써 시간이 꽤 지나서 십 주야는 지나 있었는데 아직도 망량선사는 나타날 기색이 없었다.

"......"

전생(轉生)하고 거의 처음 느껴보는 생소한 감정이 몸을 감싸고 있었다.

찌뿌둥하고 지루하다.

그리고 심심하다.

그렇게 시간이 계속 흘렀다.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고, 세 달째로 접어들었다. 여태껏 금의위가 추적하기는 커녕 세상은 조용하기 그지없었다. 나는 어느 새 수련하는 일도 조금씩 게을러져서 하루에 한 시진만 초식수련을 했고, 남는 시간에는 객잔을 뒹굴거리거나 산천의 경치를 구경하러 다녔다.

' 이건 뭔가 좀 아닌 거 같은데.'

나는 당초에 대기타는 시간 동안에 더 빡세게 수련을 해서 무공경지를 올리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다. 그런데 늘어지는 시간이 길어지고 아무도 내게 간섭이나 말을 하지 않자, 수련에 집중을 할 수 없었다. 무관에서 사범으로 있는 동안 열심히 대련하고 무공을 닦았던 때와는 아주 대조적이었다.

나는 반 년째에 접어들어서야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내 의지력은 특출나지 않다. 누가 잡아주지 않으면 굳게 맹세했던 것도 흐지부지해서 어느 새 대충대충이 되고 만다. 도리어 그 동안에 비정상적으로 열심히 살고 있었던 셈이리라. 나는 어느덧 무공수련도 대충대충하며 객잔 침상에서 뒹굴뒹굴 만두나 처먹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망량이 어느 날 내게 말했다.

"백웅. 당신 살찐 거 아니오?"

"......"

그 말대로였다. 거의 몸을 안 움직이고 가끔 내공수련을 하는 정도로, 매일마다 객잔의 닭고기나 술이나 만두요리를 먹어대었다. 내 아랫배는 약간 불룩해져서 인덕을 과시하는 중이었다. 나는 당황해서 말했다.

"어... 이런 건 좀 움직이면 빠지는 거요."

"나태해지지 마시오. 정 그렇게 심심하면 내 사제와 얘기나 좀 하고 오시오."

"천우진과?"

망량의 사제인 천우진은 마을의 개울가에서 조그마한 텃밭 농지를 가꾸고 있었다. 물론 나는 그에게 괜히 친한척을 하지 않았기에 반 년동안 소 닭보듯 하는 관계가 지속되고 있었다.

"딱히 할일도 없잖소?"

그건 그랬다.

나는 망량이 갑작스럽게 그를 만나라고 하자 황당했지만 어차피 딱히 할 일도 없었으므로 그에게 놀러 갔다.

' 산해경 책이나 들고 가봐야겠다.'

천우진은 감자 뿌리를 캐고 있는 중이었다. 쪼그려앉아서 열심히 호미를 움직이는 모습은 농사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나는 천우진을 보고 인사했다.

"안녕하시오."

천우진은 나를 물끄러미 보더니 말했다.

"... 백웅 당신은 배가 튀어나왔구려."

아니 이놈의 사제들은 왜 남자 배가 튀어나온 문제를 자꾸 걸고넘어진단 말인가? 나는 속으로 약간 짜증이 났지만 그러려니 하고 넘기며 말했다.

"내가 이름을 가르쳐 준 적이 있던가? 어떻게 내 이름을 알고 있소?"

"그야 당신이 내게 가르쳐줬기 때문이오."

"뭐라고?"

천우진이 싱긋 웃었다.

"아직도 꿈을 꾸고 있군. 당신의 본성은 볼만큼 보았으니 슬슬 잠에서 깨시오."

파앗!

다음 순간, 나는 눈 앞의 광경이 뒤바뀌는 걸 느꼈다.

그리고 처음 이 마을에 도착했을 때 검선 여동빈 앞에 서 있던 상황이 펼쳐져 있었다. 망량은 막 오화칠금선을 제단 위에 놓고 있었고, 나는 그 모습을 뒤에서 바라보는 중이었다. 딱 그날의 일 그대로였기에 나는 당황했다.

' 뭐야?! 시간이 되돌아간 건가?'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또 다시 뒤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꿈은 잘 꾸셨소?"

천우진이 걸어오고 있었다. 망량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나는 그 순간 소름이 돋았다. 천우진의 손에는 어느 새 내가 읽고 있던 <산해경> 책이 들려있었다. 반 년동안 저 책을 보면서 실수로 닭죽을 책 표지에 흘린 적이 있었는데, 그 국물흔적이 고스란히 책에 나타나 있었다.

나는 그제서야 알 수 있었다.

환술!

천우진은 그 짧은 순간에, 내게 반 년(半年)동안의 삶을 환술(幻術)로 보여준 것이다! 나는 지금 내가 서서 숨쉬고 있다는 사실도 믿겨지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지금 이 순간도 환술이 아닐까?

대체 나는 언제 환술에 걸린 건가?

사당에 들어섰을 때? 망량과 이야기했을 때? 그것도 아니면 마을에서 거주할 때?

나는 내가 언제 환술에 걸렸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 헉...'

더 놀라운 것은, 내 아랫배에는 현재 두툼하게 살이 붙어있다는 점이었다. 반 년 동안 놀고먹은 결과다. 환술은 아마 실제로 현실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듯 했다.

' 무, 무섭군...!!'

내가 환술의 위력에 경악하고 있을 때 천우진이 말했다.

"사형. 나는 방금 방문자를 시험했소이다. 사형이야 원래 술법의 역량이 없어서 따로 술수를 걸지 않았으나, 동행한 자에게 반 년의 삶을 느끼게 했소."

"헉!"

망량은 깜짝 놀랐다. 난데없이 천우진이 저렇게 말하고 있었지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스승님을 쓸데없는 위험에 노출시키지 않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일이었소. 뭐, 저 백웅이란 인간은 그리 사악한 인간은 아니었지만."

내가 황망한 표정으로 천우진을 바라보고 있자, 천우진은 나를 지그시 바라보다가 호미로 내 쪽을 가리켰다.

"당신은 스승님을 뵐 자격이 없소. 기묘한 사기(邪氣)가 당신 몸에서 감돌고 있소. 그 사기의 근원을 떨쳐내기 전에는 마을에 들어올 자격도 없소이다."

파앗

다음 순간 정신을 차려보니, 나와 망량은 마을 밖에 서 있었다. 둘 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어서 눈만 꿈벅거리고 있었다. 망량은 한참 후에야 사태를 파악했는지 내게 말했다.

"사제가 우리에게 축객령(逐客令)을 내렸소."

망량의 손에서는 보패 오화칠금선이 사라져 있었다.

"......"

생전 처음 느껴보는 진짜 좌도방문의 술수였다.

내 감각과 오감 전체를 신용할 수 없다니!

나는 망량에게 내가 겪었던 일을 자세히 설명했다. 그러자 망량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내 사제의 주특기는 환술(幻術)이오. 당신이 반 년을 보낸 시간은 전부 감각을 속여서 찰나지간에 일어난 망상에 지나지 않소."

"내 배에는 진짜로 살이 붙었는데 말이오?"

"그게 천우진의 환술이 무서운 이유지. 그는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무너뜨릴 수 있는 능력이 있소."

실로 무서운 능력이었다. 어지간한 무공을 익혔다고 그 앞에서 자랑하는 건 불가능했다. 마음만 먹으면 십만대군도 쌈싸먹을 수 있는 기이한 환술이었다.

"이대로라면 평생이 지나도 저 마을에 들어가는 게 불가능할 것이오."

"난데없이 사기의 근원이라니 저 자는 무슨 말을 하는 거지?"

"나도 모르겠군. 하지만 내 사제가 저토록 격렬하게 우리를 거부하는 건 뭔가 이유가 있을 것이오."

그 때였다. 내 머릿속에 한가지 가정이 스치고 지나갔다.

' 설마...?'

천암비서(天暗秘書)!

사기라고 하면 그것밖에 생각나는 게 없었다. 아니, 거의 틀림없을 것이다. 천우진은 틀림없이 천암비서의 사이한 기운을 느낀 것이리라. 그렇지 않다면 저렇게 단호하게 나를 내칠 리가 없다.

하지만 여기서 천암비서를 어디에다가 놔둔다는 말인가? 이건 내 전생(轉生)에 직결되는 중요한 물건이었기에 결코 몸에서 떼어놓을 수가 없었다.

' 이거 어떻게 해야하지?'

망량이 꺼져라 탄식했다.

"하아, 큰일났군."

그로써는 뛰어난 술법사에게 저항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술법이란 신통력의 영역이었기에 인간의 지혜로 어떻게 해볼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하물며 중원제일 술법사의 유능한 제자가 펼친 환술을 뚫는건 불가능한 일인 것이다.

"저 마을에 들어가지 않으면 우리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소. 여기서 허송세월하다가는 시간만 낭비하고 금의위를 칠 기회가 사라질 것이오."

내게 선택의 순간이 다가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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