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1 ----------------------------------------------
금의위(錦衣衛)
끼이잉 -
피리 소리는 낮고 깊다.
마치 동물 우는듯, 나지막하고 고요하게 마을을 뒤덮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사신의 선율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기문둔갑을 배웠던 나로써는 이 피리소리 자체가 술법의 일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 저주파(詛呪波)의 근원을 찾기 위해서 정신을 집중했다. 아무리 낮고 깊은 소리라고 하더라도 일단 소리인 이상 발신지가 존재하기 마련이었다. 나는 소리가 강해지는 방향을 추적하며 동시에 지붕 위에서 행인의 모습을 살폈다. 근원에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사람들이 괴로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 이 쪽이군.'
파앗!
지붕 사이사이를 뛰는 동안에 한번에 최소한 6장은 도약하는 듯 했다. 마치 날아다닌다고 해도 좋을 정도의 경공술이었다. 보통의 무림인들이 이 정도의 경공술을 발휘하면 머지않아 지쳐서 쓰러질 테지만 내게는 무한이라고 해도 무방한 내공이 있었다. 이 상태로 몇 시진이고 계속 뛰어다닐 수도 있는 것이다. 더욱이 청룡무관에서 뇌영보의 정밀한 운용과 신법지도를 받았기에 나는 신법에는 상당한 자신감이 있었다.
그러나 그런 신법과는 별개로 마음이 복잡했다.
그것은 피리 소리의 막강한 능력 때문이었다.
' 일개 술법에 이정도의 범위와 파괴력이 가능한 것인가? 이건 법칙을 뛰어넘는 힘이야!'
기문둔갑은 언뜻 편리해보이는 만능수단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기문둔갑의 달인(達人)이라고 할 수 있는 망량조차도 신통력이 없다면 변성술이나 흑운술같은 기초술법밖에 쓰지 못한다. 만일 신통력이 있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이 생각하는 호풍환우(呼風喚雨)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건 불가능했으며, 상당한 시일과 노력을 거쳐서 충분한 댓가를 치른 후에야 비로소 위력을 얻을 수 있었다.
이런 식으로 반경 수십 리(里)나 되는 거리에 전조도 없이 강력한 대규모 세뇌파장을 뿌리는 것은, 명백히 술법의 상식에 어긋나고 있었다. 내 내공이 워낙 막강하기에 이 세뇌파장을 가볍게 무효화시킬 수 있을 뿐, 실제로는 3년 이하의 내공을 지닌 일반인이라면 한 시진도 되지 않아서 정신을 잃고 저주파에 감염되어버린다. 일개 피리만으로 이렇게 막강한 술법을 자유자재로 시전한다는 얘기는 전혀 들어보지도 못했다.
대술법사는 대체 뭐 하는 놈인 걸까?
나는 머지않아서 술법의 진원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진원지는 마을의 딱 중앙이었는데 나는 그 자리에 내려서자마자 눈을 부릅떴다.
"......!!"
지옥도(地獄圖)!
푸콱
피리 괴인의 주변에 있던 인간들은 자신의 목을 벅벅 쥐어뜯다가 혈관이 터져서 쓰러져 있거나, 갑작스럽게 도끼로 서로를 찍어내리며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혹은 미쳐버린 듯 쓰러져서 웃고 있거나 별반 이유도 없이 남자가 여자를 강간(强姦)하고 있었다. 장기자랑을 하려는 듯 할복 준비를 하는 인간도 있다. 아이의 시체를 뜯어먹는 맛이 간 식인마도 존재했다.
피빛이 흘러내리는 거리.
마치 - 자신의 고통따윈 어찌되어도 좋다는 듯한 잔학한 광경! 그것보다는 아예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듯 희열에 미쳐있는 인간떼가 거기에 있었다. 다른 곳에서는 그저 정신을 잃고 쓰러지는 정도였는데 중심지는 이다지도 무서운 효과가 발현되는 것이다.
"... 윽."
나는 잠시 머리가 띵해지는 걸 느끼고 기가 막혔다. 잠깐 방심했을 뿐인데 저주파가 내 저항력을 뚫고 두통을 준 것이다. 나는 이 곳에 오래 서 있으면 말도 안 되는 파장이 발현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 흥, 좋아. 네 녀석은 천천히 요리해 주지.'
나는 지붕에서 내려오지 않은 채로 슬며시 발에 힘을 주었다. 대주술사 피리괴인은 눈치챈 건지 눈치채지 못한 건지 계속 피리를 불고 있었다. 나는 입가에 싸늘한 미소를 지은 채, 지붕 위의 기와를 두 장 찼다.
뻐벅
"......!!"
한 장은 피리괴인의 어깨에 맞았고, 다른 한 장은 허벅지에 맞았다. 난데없이 내공이 실린 기왓장을 맞자 피리괴인은 비틀거리며 무릎을 꿇었다. 피리를 놓지는 않았지만 광기의 연주는 잠시 멈출 수 있었다.
그러자 즉시 주변을 맴돌던 광기가 씻은듯이 사라졌다. 광기에 세뇌되어 있던 주민들은 본래대로 돌아오고 있었고 이윽고 자신들이 저지른 참상(慘狀)에 경악했다.
"아아아아악!"
"끄아아아아아악!!"
인간의 윤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끔찍한 행위가 자신들의 손에 의해 저질러져 있었고 그걸 실감하는 주민들은 이미 정신력이 피폐해져 있었다. 잠깐 연주가 되었을 뿐인데 광기의 연회가 인간의 삶을 집어삼켜버린 것이다. 나는 그들을 돌봐줄 여유가 없었기에 재빨리 내려가서 피리괴인 앞으로 갔다.
놈은 예전과 같았다. 몸을 다 가리는 누더기같은 갈색옷을 입어서 성별을 확인할 수 없었고 한쪽 손에는 흑색 피리를 꾹 쥐고 있었다. 나는 꿇어앉아있는 그 놈에게 다가가서 말했다.
"너 이름이 뭐냐?"
놈은 묵묵부답이었다. 나는 왠지 열받아서 놈의 얼굴을 가리고 있는 황색 옷을 확 젖혀버렸는데 그 순간 깜짝 놀랐다.
"헉..."
이건 흉측한 정도가 아니었다.
진짜 괴물(怪物)이다!
두상은 넙적하면서도 혈관이 돋아 있었고, 좁쌀만한 눈에는 눈동자가 없이 흰자위가 가득했다. 뿐만 아니라 귀도 없었다. 게다가 코와 입이 있어야 할 곳에는 알 수 없는 촉수(觸手)가 뻗어나와서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움직이고 있었으며 촉수의 내밀한 곳에 음식물을 섭취하는 타원형의 입이 옴작거리고 있다. 나는 놈의 손을 잘 봤는데 마치 개구리의 손처럼 손가락 사이에 기묘한 수막(水膜)이 존재했다.
이걸 인간이라고 칭하는 건 정말로 무리가 있었다. 이건 틀림없이 이형(異形)의 괴족(怪族)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 괜히 류 천호가 기가 질려서 흉물이라고 하는 게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나는 즉시 오른손에서 검은색 피리를 빼앗아버렸다. 놈은 피리를 빼앗기는데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새하얀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나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혹시나 싶어서 놈에게 폭행을 가해 봤다.
퍽! 퍼벅! 퍽!
무공수법을 섞어서 주먹과 슬격(膝擊), 발차기를 난타했다. 가볍게 내공을 담아서 열 방 정도를 치자 놈은 괴로운지 몸을 꿈틀거리며 주춤주춤거렸다. 나는 일반인이라면 반쯤 죽을 정도로 패고 있는데도 놈이 기절안하고 버티는 걸 보며 생각했다.
' 이 놈은 내구도가 굉장히 좋군. 따로 무공을 익히지는 않았는데 선천적인 육체가 이렇게나 튼튼하단 말인가?'
왠만큼 금종조를 익힌 외공수련자에 못지 않은 신체였다.
여하튼 여기서 너무 시간을 오래 끌면 좋지 않다. 나는 이 놈에게 점혈법이 먹힐지 확실하지 않았기에 마지막은 인간이 내장을 토할 정도로 강하게 발차기를 했다.
뻐어억!
[ @&$*&*@$....]
그제서야 놈은 고통어린 신음을 뱉어냈다. 그 마저도 인간의 성대로는 발성(發聲)할 수 없는 괴이쩍은 소리라서 소름이 돋았다. 눈 앞에 있는 이 놈은 인간체형을 하고 있지만 결코 인간이 아닌 것이다. 놈이 푸른색 피를 입에서 토해내며 정신을 못 차리자 그제서야 목덜미를 잡고 다른 곳으로 날아갔다.
쐐애액
' 이걸 어쩐다, 저질러버렸군.'
나는 날듯이 다른 곳으로 향하면서 씁쓸하게 웃었다. 원래는 이 놈이 인신공양 주술을 하는 걸 볼 때까지 참으려고 했는데, 며칠 전에 숲에서 만났던 소녀가 생각나서 그렇게 하지 못했다. 갈수록 무고한 인간의 희생이 늘어나고 마을 중심부의 참상이 대규모로 일어난다고 생각하니 전신의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 드는 것이다.
다소 이르지만 하는 수 없다. 일단은 내 몸을 숨기고 이 놈에게서 최대한 정보를 얻어내는 수밖에 없다. 그 이후에 금의위와 맞짱을 뜨든 습격해서 금의위들을 암살하든 행동을 선택해야 할 것이다.
나는 한참을 달리다가 마을을 나와서 북서쪽 절벽으로 갔다. 나는 피리괴인의 목덜미를 잡은 채 겨우 두세 번의 도약으로 절벽을 뛰어넘었다. 그리고 내리막길을 지나서 외딴 산을 찾아보다가 천연의 동굴을 찾아냈다. 이 정도면 거리만 해도 20리나 되었으므로 금의위라도 단시간에 쫓아오지 못할 것이다.
쾅
나는 동굴 바닥에 놈을 거세게 내팽개쳤다. 이것도 보통 인간이라면 두세 번 튕겨나가다가 즉사할 만큼 세게 내팽겨친 건데도, 놈은 촉수를 떨며 푸른 피를 토할 뿐 큰 외상이 없어 보였다. 이 놈의 종족은 선천적으로 강인한 육체를 보유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검은색 피리를 흔들며 말했다.
"이게 네 놈의 법구(法具)냐? 보아하니 피리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하는군. 무공도 전혀 익히지 않았고."
[ &@*#%...]
놈의 흰색 눈은 마치 분노하듯이 약간 확대되어 있었다. 나는 왠지 저 놈이 내 말을 알아듣는 것 같은데, 나는 놈의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어서 짜증이 났다. 그래서 화가 난 김에 다시 발길질을 했다.
뻐억!
[ *(!(#*%(@#*....!!]
"뭐라고? 이 괴물 새끼야, 사람 말을 하라고."
뻐억!
[ ......!!]
나는 놈이 고통스러워하며 동굴 바닥을 구르는 걸 보자 왠지 기분이 좋았다. 이 놈이 죽인 인간의 숫자만 해도 일만 단위가 넘을 텐데, 그들의 고통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만일에 여유가 있다면 천천히 놈을 상대해 줄 테지만 그렇지 않았기에 나는 놈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렇게 얼마나 폭행을 가했을까.
갑자기 놈이 수막 달린 손바닥을 내밀며 손을 저었다. 그러더니 갑작스럽게 머리 속에 괴인놈의 말이 들려오는 것이었다.
[ 그만 해라. 이건 너의 파멸을 초래할 뿐이다.]
전음(傳音)인가?
하지만 나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나도 청룡무관에서의 수행을 통해 이제 전음을 구사할 줄 알지만, 이건 전음과 완전히 다른 능력이었다.
전음이라는 건 자신의 의지를 속삭이듯이 바람에 섞어서 전달하고, 귓가에서 나직이 울려퍼지게 하는 내공수법이다. 그러나 지금 놈이 했던 것은 차라리 전설의 혜광심어(慧光心語)나 다름 없었다. 언어를 초월해서 의지 자체를 머릿속에서 깨닫게 만드는 것은 그 어떤 초절정고수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비직하고 웃음을 흘렸다.
"이것도 네놈의 술법인가? 네 놈은 대체 무엇때문에 인신공양을 벌이고 마물을 소환하는 거지?"
[ ......]
"사람 말을 할 수 있으면 해라. 나는 그냥 네놈을 단매에 때려죽이고 싶으니까."
내가 슬며시 주먹을 들자, 놈은 겁먹었는지 주춤거리며 엉덩이를 뒤로 뺐다. 놈은 아마 더 맞으면 자신이 죽을 거라고 생각했는지 재빨리 내게 말했다.
[ 잠시만. 인간이여. 내가 그걸 말하면 놓아줄 것인가?]
"들어보고 놓아주지. 네 녀석은 아직 쓸모가 있어 보이니까."
물론 거짓말이다. 나는 들을 거 다 들으면 이 놈을 해체해서 찢어죽여버릴 생각이었다. 하지만 삶의 희망을 남겨둬야 이 괴인놈이 정보를 토해낼 것이다. 괴인은 내 마음을 알 수 없었기에 천천히 심어(心語)를 날려 왔다.
[ 나는 계약(契約)을 맺었다. 신에게 공물을 바쳐 제사를 지내는 대신, 나는 너희를 도와준다. 나는 너희의 요구대로 계획을 진행하고 있으며 이제 2번만 더 하면 계약이 끝난다. 너는 황제의 부하일텐데 왜 나를 고문하는 것이냐?]
놈은 도리어 억울해 보였다. 금의위가 자신을 배신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는 어조가 느껴졌다.
뭔가 엄청난 이야기가 나온 것 같았다. 게다가 이 놈은 괴물같은 외형과는 다르게 상당한 지성(知性)을 지니고 있는 듯 했다. 그것도 꽤 머리가 좋아 보였다. 나는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정보를 얻기 위해 되물었다.
"그게 뭐지?"
[ 그건...]
쿨럭!
쿨럭!
놈은 갑자기 푸른 피를 토하며 더 말을 잇지 못했다. 체력이 한계에 도달한 모양이었다. 거의 죽기 직전의 상태라서, 나는 너무 많이 팼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나는 이제 더 끌어낼 정보가 없는지 고민을 하다가 아주 명쾌하고 좋은 질문이 생각났다.
' 아, 그래!'
나는 품속에 늘 넣고 다니던 천암비서를 꺼냈다. 그리고는 놈에게 첫 장을 보여주었다.
"자 봐라! 너는 이 괴어(怪語)를 해석할 수 있느냐?"
망량이 말하기를 천암비서의 괴어는 무명제사서의 괴어와 거의 동일한 언어라고 했다. 만일 눈 앞의 이 괴물이 무명제사서를 해석한 것이 사실이라면 당연히 천암비서 또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괴물은 천암비서를 보고 글자를 확인하자 갑자기 촉수를 딱하고 멈추어 버렸다.
[ ......]
"왜? 이건 해석 못 하겠냐?"
[ 이... 이것은... 어떻게 인간 따위가 이걸...?]
놈은 굉장히 놀라는 듯 했다. 지금까지 내게 납치되어서 동굴에 끌려오고 처맞을 때까지도 거의 당황하지 않던 놈이 명백히 동요하고 있었다. 그것은 입가의 촉수가 움직임을 멈추고 전신을 사시나무처럼 떨고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닥치고 대답이나 해. 이건 어떤 내용이냐?"
[ 설마... 네가 그 물건의 주인이 되었느냐?]
"대답이나 하라고. 이 천암비서는 무슨 내용이냐."
[ 흐... 흐하하... 이럴수가... 설마 이런 함정이 있었을 줄이야... 나는...]
놈은 갑자기 울부짖듯이 흐느꼈다. 그러더니 몸뚱이가 서서히 붉어지며 불길한 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나는 천암비서를 거두며 뒤로 물러섰는데 괴인은 입에서 푸른색 피를 토해내며 외쳤다.
[ 제물(祭物)이여! 너의 악몽에 애도를 표한다!]
"......?!"
슈르르르륵
그 순간이었다. 갑자기 천지(天地)가 부숴지듯 흔들리는 게 느껴졌다. 이 동굴 뿐만이 아니라 산, 개천, 하늘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진동(振動)하고 있었다. 동시에 나는 하늘 저너머에서부터 무시무시한 기운이 쏟아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쿠구구궁
심상치가 않다. 뭔가 엄청난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
나는 놈의 멱살을 잡으며 외쳤다.
"이 개새끼가! 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
[ 흐흐흐.. 딱히 아무것도... 너는 의식이 도중에 방해받으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모르는가 보구나...]
"뭐라고?"
[ 나는 먹이를 주기 위해 놈들을 부르고 있었다... 그리고 놈들은 다 불러진 상태에서... 목표를 잃게 되었지... 이제 놈들은 살아있는 제물을 찾아서 천지를 날뛰게 될 것이다... 파멸(破滅)이다.]
콰콰쾅!
약 삼십 장 떨어진 곳에서 거대한 폭음과 함께, 하나의 구릉이 사라졌다. 나는 구릉을 뚫고 솟아난 거대한 존재를 보자 그만 숨을 꿀꺽 삼켰다.
"마물..."
그것은 예전에 내가 봤었던 마물이었다. 단지 다른 점이 있다면, 그 때는 몸 크기가 약 3장 정도였는데 지금은 더더욱 커져서 무려 10장이나 되는 크기였다. 꿈틀거리며 산을 먹어치운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마치 고깃덩어리가 일렁이며 수백 개의 눈과 촉수를 내뻗는 모습은 가히 악몽이나 다름없었다.
콰과과광
그게 끝이 아니었다. 여기저기 곳곳에서 마물이 땅에서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그 초거대 마물들은 무려 수십 마리나 되었는데 그 놈들이 인신공양을 받기 위해 이 자리까지 찾아온 것이다.
괴인놈이 히쭉 웃었다.
[ 잘 가라... 네놈도 나도 이제 죽은 목숨이다...]
"웃기고 있네. 지금의 내가 저깟놈들에게 쫄 거 같나?"
정면대결이라면 몰라도 빠르게 농락하면서 도망칠 자신은 있었다. 놈들이 먹이를 찾아서 날뛴다는 것은 나만이 목표가 아니라는 뜻이다. 나는 동굴에서 기회를 봐서 나가려 했지만 그 순간 천지사방에서 엄청난 살기가 쏠리는 걸 느꼈다.
"......?!"
천지에 흩어져 있던 마물의 시선이 나를 향하고 있었다.
놈들은 명백히 나만을 노리고 있는 게 확실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지?
뒤에 널부러져 있던 괴인이 허탈한 듯 낄낄대는 게 들렸다.
[ 놈들은 의식을 방해한 자가 누군지 아주 잘 알고 있나 보군...]
쿠구구구구!!
마물들이 일제히 엄청난 속도로 이쪽으로 쇄도해오는 게 보인다.
나는 피하고 싶었지만 도대체 어디로 피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내 경공 최고속도라고 해도 놈들의 직선공격을 피할 수 있을지 불확실할 뿐더러, 수십 마리나 되는 초거대 괴물이 날아들듯 덮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으아! 아! 크아아아아악!!"
나는 비명을 지르며 죽을 힘을 다해서 경공을 시전했다. 땅을 박차고 날듯이 지상을 유영했다. 그 덕분에 첫 마물의 몸통박치기는 피할 수 있었고, 나는 절벽동굴에서 지면으로 내려올 수 있었다.
"헉...!!"
어둠의 벽이 순간적으로 내 눈에 비쳤다.
수십 마리나 되는 마물이 연속으로 교차하며 달려드는 것이다.
쿠콰콰쾅
다음 순간 또 다른 마물의 몸통박치기가 내 몸을 분쇄하고 지나갔다.
나는 찢어지는 듯한 고통과 함께 모든 것이 새하얗게 변하는 것을 느꼈다.
그것이 나의 5번째 죽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