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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의위(錦衣衛)
육조 조장인 류 천호를 따라서 간 곳은 99개의 황궁건물 중에서 어딘지 알 수 없는 외진 궁(宮)이었다. 나는 망량이 줬던 황궁지도를 통해서 얼추 구조를 파악하고 있었지만, 류 천호를 따라다니다보니 그 지도를 전면적으로 신뢰하는게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았다.
큰 구조는 알겠지만 세세한 구조는 달랐다. 샛길이나 요철형태의 통로도 많았으므로 마치 미로(迷路)와 같았고, 심지어 이렇게 복잡한 건물이 기문진법에 따라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움직인다면 침입자는 어쩔 도리가 없다.
' 황궁지도를 받아도 그걸 완전히 암기할 수준이 아니면 무리겠군...'
더불어 기문둔갑을 배우기를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류 천호는 큰길만 걷고있었지만 몇발자국만 떨어져도 폐쇄적인 지형으로 바뀌었다. 모르는척 하면서 걷고 있지만, 설령 길을 다 외웠다고 하더라도 기문진법 지식이 없으면 이중함정에 갇히게 되는 천혜의 요새라는 걸 깨달은 것이다.
아마도 궁에서 일하는 무사나 궁녀들은 모두 정해진 길만 따라서 걷게 되어있으리라.
이 궁은 특이하게도 경비무사가 한 명도 없는 곳이었다. 류 천호는 궁의 지하에 나 있는 계단으로 따라들어갔는데, 그 곳에는 10명의 고수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하나같이 류 천호와 마찬가지로 흑의를 입고있는 자들이었다.
류 천호가 나를 그들에게 소개했다.
"신입 금의위사인 백웅이다. 앞으로 육조의 막내가 될테니 너희가 잘 이끌어라."
"알겠습니다, 조장."
그들은 육조였으며, 류 천호는 육조의 조장이었다. 한 명의 천호가 하나의 조(組)를 이끄는 단순하고 직관적인 조직구조였다.
"선배님들 잘 부탁드립니다."
"그래."
나는 포권을 하며 육조 조원들 하나하나에게 인사를 했다. 육조 금의위들은 내게 딱히 호의도 적의도 없는 것 같았다. 나는 인사를 하던 중 이상한 사실을 깨달았다.
"......?"
뭔가 이상하다. 아까 곽 천호도 그렇고 통상적인 금의위들은 흰색을 바탕으로 금색 수실을 영롱하게 박아넣은 독특한 무복(武服)을 입는다. 그런데 류 천호를 비롯해서 육조의 금의위들은 모두 흑의를 입고 있는 게 아닌가?
아까는 그냥 천호급에게 복장선택의 자유가 있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육조 전체가 흑의를 입게 되어있다.
게다가 이 흑의는 왠지 낯이 익다. 나는 끔찍한 상상을 떠올렸으나 굳이 티를 안 내려고 했다. 수상해보이는 행동을 하면 이 곳이 내 무덤이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잠시 후 소개가 끝나자 류 천호가 임무를 설명했다.
"이번의 우리 임무는 지난번과 같다. 의식(儀式)을 호위하고 사전준비를 한다. 모두들 마음의 준비는 되었겠지?"
그러자 육조 금의위들이 다소 힘빠진, 그러나 결연한 목소리로 일제히 대답했다.
"네!"
"물론입니다."
의식의 호위? 사전준비?
나는 무슨 소리인지 알 수가 없어서 멀뚱멀뚱 그들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류 천호가 내게 말했다.
"우리 육 조의 임무는 다소 특수하다. 각 조(組)가 번갈아가면서 특수임무를 맡는데, 그게 이번 반기(半期)에는 육 조가 맡기로 되었다. 이 임무는 굉장히 특수한 임무이기 때문에 강한 정신무장이 필요하다."
"어떤 임무든 해낼 수 있습니다."
"훗... 여기 있는 모두가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지. 허나 정말로 보통 일이 아니니, 임무에 들어가기에 앞서 자네에게 사전교육을 하겠네."
류 천호가 씁쓸하게 웃고는 나머지 육 조에게 명령했다.
"모두 임동(壬凍) 지역으로 가라. 철전(鐵田) 마을이 이번 목표이니, 사전준비를 위해 침투준비를 하도록."
"알겠습니다!"
우르르
명령이 끝나자 육 조 금의위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궁에서 나갔다. 목표지역이 확실하니 망설이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내가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자 류 천호가 말했다.
"거기 앉아 봐."
"네."
진지한 이야기를 할 셈인 듯 했다. 탁자 하나를 두고 대면한 상황에서 류 천호가 진중하게 말했다.
"백웅. 자네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하고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이건 아까 교육받은 내용이었다. 금의위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이 질문에는 단 하나의 대답만이 허용된다.
"황제 폐하와 황실의 안녕과 무궁한 영광입니다."
"좋아. 제대로 배웠군."
흡족하게 읊조리던 류 천호가 말을 이었다.
"그럼 황실의 안위에 가장 위협이 되는 게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북적(北敵)이나 동이(東夷)같은 외적이 아니겠습니까?"
"후... 확실히 그럴 수도 있지. 북방의 야만족은 중토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지속적으로 거대한 위협이었으니. 허나 그들이 진실로 중화(中華)를 지배한 적은 한 번도 없고, 그들에게서 황실을 지키는 건 본질적으로 장군(將軍)들이 수십만 대군을 이끌고 하는 일이야. 우리가 금의위라고는 하지만 야만족과 직접 싸우지는 않아."
"그러면 조정의 권신(權臣)이 아니겠습니까?"
"그들을 다스리고 제어하는 것은 황제폐하께서 하시는 일일세. 물론 그들을 견제하는 것도 우리의 주 임무이긴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일은 따로 있지."
나는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야만족의 침입이나 권신의 모반보다 더 황실에 위협이 되는 게 무엇이란 말인가? 나는 그래서 되물었다.
"그럼 무엇입니까?"
이어진 말은 충격적이었다.
"무림(武林)이다."
"......!!"
이게 무슨 소린가? 금의위 천호가 이런 생각을 하는 게 허용된다는 말인가? 그러나 류 천호는 전혀 거리낌없이 말했다.
"자네는 태조 홍무제와 진우량의 고사(古事)를 알고 있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충분한 공부를 했기에 역사를 잘 알고 있다.
"진우량은 태조께서 명을 건국할 때 가장 강력한 적수였고, 그가 결국 홍무제께 패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네. 거기에는 약간의 뒷이야기가 있지."
류 천호는 차주전자를 자신의 찻잔에 따랐다. 그리고 내 차에도 따르길래 두 손으로 공손히 받았다. 그는 따뜻한 차를 한 모금 머금고는 말을 이었다.
"태조께선 진우량때문에 죽을뻔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네. 특히 진우량을 따르던 호광(湖廣)의 전사들이 늘 눈엣가시였지. 태조께서는 원래 진우량을 따르던 모든 호광 사람들을 홍선(紅船)에 태워 평생 육지에 내리지 못하게 하려고 하셨네. 그대로라면 호광 사람들은 평생 가장 비천한 신분으로 유랑걸식하며, 남자는 거지가 되고, 여자는 창기(娼妓)로 몸을 팔았겠지.
그렇게 강력한 본보기를 보임으로써, 안전하고 거대한 명 제국이 완성되는 것이었네. 그 누구도 황권에 도전하면 안된다는 사실을 보임으로써, 무수한 반란을 막고, 우리가 안심할 수 있는 평화(平和)가 이루어지는 게야."
"......"
할 말은 많지만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는 내 목숨이 소중하기 때문이다. 반론을 하려면 일박 이일동안 밤을 새서라도 할 수 있는 지식이 있더라도, 지금 당장은 목숨을 지켜야만 한다.
"하지만 태조께선 홍선을 끝까지 실천하지 못하셨지. 홍선에 태워져야 했을 반역도들은 얼마 후 제재가 풀려서 뭍으로 나와서 양민이 되었고, 그들 중 대다수가 남쪽으로 갔다네. 왜였을것 같은가?"
"잘 모르겠습니다."
"백련교(白蓮敎)였네. 일개 무림방파이자 종교가 태조의 행동을 억제하고, 나아가서는 유민들을 자기들의 교도로 끌어들인 것이었지. 그게 가능했던 이유는 백련교의 교주(敎主)가 가히 초월적(超越的)인 무공을 소유하고 있어서, 그에게는 백만대군도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야. 백련교주가 직접 태조를 찾아와서 홍선을 풀라고 했고, 태조께선 그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지."
백만 대군도 의미가 없는 무공이란 게 상상도 가지 않는다.
그게 정말 인간이란 말인가?
백련교의 힘은 내 생각보다 훨씬 거대한 듯 했다.
' 뇌신류(雷神流)가 백련교에 복수를 포기할 만 하군.'
나는 류 천호가 하는 말 하나하나가 황실모독죄에 해당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황제가 일개 무림방파에 의지가 꺾였다는 건 그 자체로 비사(秘事)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금의위 천호쯤 되면 금의위사에게 교육을 위해 이 정도 이야기를 터놓는 건 당연할지도 모른다. 황실의 어둠을 위해서 일하려면 이 정도는 알고 있어야 이야기가 되기 때문이다.
류 천호가 말을 이었다.
"그 이후로 약 백 오십 년이 지났네. 그 동안 황실은 금의위를 비롯해서 동창, 서창, 오군영을 비롯해서 부단히도 무력을 확장시켰고, 특히 초기에는 변변치 않았던 금의위를 엄청나게 키웠지. 현재 금의위의 힘은 구파일방과 맞먹는다고 확신할 수 있어."
나는 그렇게 말할 만 하다고 생각했다. 기본적으로 금의위는 최하위 위사라도 무림의 후기지수급 일류무인이다. 게다가 부총령이나 천호들의 실력이 절정고수급이라면 숫자만으로는 충분히 그렇게 말할 수 있다. 또한 총령의 실력은 아마 초절정급으로 예상이 된다. 무력 평균수준이 이토록 높으며 하나의 단체로 결속되어 있는 경우는 무림에 전무했다.
아마 금의위에서 작정하고 구파일방을 친다면, 순식간에 두세 개쯤은 멸망시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 구파일방이라고 하더라도 이렇게 거대한 무력단체를 홀로 감당하는 건 불가능했다.
"백련교에게서 황제 폐하를 지키기 위해서입니까?"
"그렇네. 당대의 백련교주가 어떤 수준의 무공을 지니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국가급의 무력을 보유한 자가 존재한다는 것 자체로 무서운 일이지."
왠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백련교를 백만대군으로 토벌하려고 해도 소용없다. 전성기 태조 홍무제의 백만대군을 돌파해서 혈혈단신으로 황제를 암살하고 갈 수 있는 초월자가 존재한다면, 그게 의미나 있는 일일까? 뿐만 아니라 황제를 포함한 황족과 귀족, 권신들을 제멋대로 살해할 수 있다면 그 자체로 엽기적인 억제력이 완성되는 것이다.
나는 그러고보니 백련교의 성련(聖蓮)에 대해서 삼절 이광에게 들은 적이 있었다. 성련이란 백련교에서만 특수하게 제조되는 영약으로써, 성련을 복용한 자는 굉장한 공력을 손에 얻는다고 한다. 만일에 백련교에 성련을 복용한 절정고수가 넘친다면, 교주를 제외하고도 무시무시한 무림방파라고 할 수 있다.
류 천호가 말했다.
"하지만 마침내, 우리 금의위는... 아니, 황궁은 백련교에 대항할 방법을 찾아냈지. 이 계획은 대계(大計)이므로 우리 생이 다할 때까지 추구해야만 해. 그것이 바로 우리가 하게 될 특수임무이다."
"어떤 임무입니까?"
이어진 말에 나는 헛숨을 들이켰다.
"이계(異界)의 마물(魔物)을 소환하고, 그걸 이용해서 마지막에는 마신(魔神)의 힘을 얻는 것이다."
"허어억."
"우리를 도와주는 대주술사(大呪術師) 덕분에 가능한 계획이지."
놀랄 수밖에 없다.
이로써 확실해진 것이다.
' 이... 이 놈들이 바로 인신공양을 주도한 흑의인들이었구나! 황실을 호위하는 금의위가 대학살을 저지른 거였다고?!'
설마했던 예상이 들어맞자 눈 앞이 깜깜해졌다.
사실 아니었길 바랬다. 망량과 이야기할 때 거의 짐작하고 있었지만, 앞으로의 장미빛 인생을 위해서 아니겠지 하고 바라면서 낙양까지 왔다.
그렇지만 역시 사실은 사실이었다. 황실과 금의위가 바로 인신공양을 주도한 악마(惡魔)들인 것이다.
동시에 내가 이번 생에 바로 참극을 막지 않고 움직인 게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정말로 참극을 벌인 주체가 금의위라면 죽을 위기가 차고 넘친다.
"놀랄 만 하지. 다 그래."
다행히도 류 천호는 내가 놀라는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듯 했다. 그가 씁쓸하게 말했다.
"그 과정에 양민이 조금 희생되겠으나 그것은 당연한 희생(犧生)이다. 우리는 황실을 위해서 지옥에 갈 각오를 해야만 해. 우리의 행동은 대명제국의 천만 민초의 행복과 안녕을 도와줄 것이다."
"그... 그건."
"자! 마음을 굳혀라. 더 자세한 건 임무지에 도착해서 말해주겠지만, 너는 이미 황실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금의위다. 세간의 하잘것없는 윤리와 도덕은 황제폐하를 위한 일이라면 모두 내려놓아라."
울렁...
나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류 천호의 말은 분명히 개소리이고,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백날 저런 말로 설득해도 혀만 내두를 뿐 동조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류 천호의 말 자체에서 기묘한 힘이 느껴지며 머리가 어지러워지고, 몽롱해진다. 머릿속으로는 개소리라는 걸 알고 있는데 어쩐지 그럴듯하게 들리는 것이다.
만일 직접 참극을 보지 않았다면 나도 지금쯤 류 천호의 말에 반쯤 수긍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신공양과 마물을 직접 보았던 나로써는 도저히 그 말에 동조할 수 없다. 비인외도(非人外道)인 게 틀림없는 인신공양을 대체 어떻게 납득하라는 말인가?
' 뭐지? 뭔가 이상해. 저 말 자체에서 강한 힘이 느껴지고 있어.'
나는 어지러워서 일어나는 척 했다.
"죄송합니다. 머리가 어지러워서..."
"가만 앉아! 내 말은 끝나지 않았다. 그대는 황제 폐하를 위하지 않는 것인가? 적도(敵徒)들이 황제 폐하를 위협해도 좋다는 것인가? 그것이 금의위사가 할 말인가?"
"......"
아까까지의 친절한 태도와 달리 엄한 호통이 섞여 있었다. 아마도 채찍과 당근 작전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려는 듯 했다.
"잘 들어라. 모든 것은 황제폐하의 이름으로 허용된다. 우리는 칼이고, 칼은 그 이상 생각할 필요가 없다. 네게 필요한 것은 유해한 자들을 배제하고 임무를 수행하는 것 뿐이라는 말이다."
그제서야 나는 어지러움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언령(言靈)에 의한 세뇌(洗腦).
기문둔갑 공부를 오래 했던 나는 알 수 있다. 지금 류 천호의 말은 기묘한 억양에 따라서 흐르고 있고, 이 궁 자체에는 이상한 문양이 여기저기에 새겨져 있다.
' 이 자는 언령을 쓸 수 있군. 하긴 언령도 특수한 신통력이 없어도 되니 가능한 일이야.'
언령이란 말 자체에 담긴 힘인데, 마치 공식처럼 발동하여 말을 하게되면 힘을 부여하는 방식이었다. 류 천호는 언령을 시전해서 상대방의 정신력을 약하게 하며 폐쇄적인 공간에서 반복적으로 강요하고 있었다. 강화판 암시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걸 오래 당하면, 아무리 의지가 굳은 무림인이라고 해도 그럴듯하게 납득해버리고 만다. 아마도 천호들은 신입이 들어오면 지속적으로 세뇌교육을 시키는 역할을 맡은 것 같았다.
나는 일부러 그의 말을 따르는 척 눈을 흐리멍텅하게 만들었다.
"네... 알겠습니다..."
"다시 한 번 말하겠다. 잘 들어..."
이후로도 나는 류 천호가 폐쇄된 공간에서 무려 한 시진동안 했던 말 또 하고 또 하면서 언령암시를 걸려는 걸 버텼다. 다행히 세뇌되는 척 했기에 그 이상은 지속되지 않았고, 자기 나름대로 [교육]이 끝났다는 걸 확인하자 류 천호가 빙긋이 웃었다.
"아직 썩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백웅 너도 곧 우리의 대의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이제 임무지인 임동 철전마을로 출발할 것이니 잘 따라와라."
나는 그를 뒤따라가면서 생각했다.
' 빌어먹을... 대체 어떻게 해야하지?'
나는 보고들은 참극의 실상이 있으므로 저 정도의 세뇌에는 걸리지 않는다. 다른 놈이었다면 언령때문에 세뇌에 걸렸겠지만, 기문둔갑 중에서 뇌정경을 몰래 암송하며 버텼기에 언령도 무용지물이었다.
지금 내가 골치아픈 것은 이제부터 어떻게 행동해야 하느냐였다. 천호의 말은 당연히 개소리이지만 이대로 그를 따라가게 된다면, 주기적으로 마을을 학살하고 인신공양하는 행위에 동참하게 된다.
그건 과연 옳은 일인가?
하지만 그렇다고 류 천호의 말에 따르지 않는다면 그 즉시 나는 반역죄로 간주되거나 즉결처분당할 것이다. 내가 들었던 비사나 마물에 관련된 계획은 모두 극비(極秘)이기 때문에 그들은 날 가만 놔두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나처럼 세뇌에 걸리지 않았는데도 그냥 못본 체 따르고 있는 금의위사도 있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자기 목숨이 아깝고 현실의 금의위직을 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다그닥 다그닥
"......"
나는 말을 타고 류 천호를 뒤따르며 계속 고민했다. 그러던 중에 망량의 말이 문득 생각났다.
[ 백웅. 당신이 보았던 그 참극(慘劇)이란 언젠가 반드시 불특정다수에게 몰아치게 될 거요. 그것도 그 마을의 비극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정도로 거대한 규모로. 그 때 무작정 운에 맡기고 도망을 칠 생각이오? 그것도 아니라면 권력자들의 개가 되어서 더러운 일을 도맡아 할 생각이란 말이오?]
권력의 개.
더러운 일이라.
"......"
다그닥 다그닥
말을 타고 달리는 도중에 달빛이 호수에 스쳐 지나갔다. 그 와중에 류 천호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자넨 복 받은 친구야."
"네?"
"들어오자마자 특수임무를 받다니... 특수임무가 끝나고 나면 해당 조(組)에게는 거대한 포상이 주어지지. 금 20관과 더불어서 낙양 근처에 봉지(捧地)를 하사받게 된다. 다른 금의위들은 은근히 특수임무를 다시 하기를 바라는 자들도 많아."
나는 순간 어이가 없어서 되물었다.
"다시 하기를 바란다고요...?"
"어차피 실행하는 건 우리가 아니라 그 주술사니까. 우리는 그냥 감시하고 지켜보기만 하는 게 대부분이지."
류 천호의 말에는 한 줌의 죄책감이나 망설임도 없었다. 아마도 일의 제반사항을 모르는 자라면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가겠지만, 일의 내용이 인신공양에 광신도에 심장적출, 인육, 대량학살이 버무려져 있다는 걸 알고 있는 나였다. 금의위들이 그런 악마스러운 행위를 또다시 참여하고 싶어한다는 게 치가 떨릴 정도였다.
금의위가 아니라 그 대주술사의 단독소행이었다면 현천도인과 내가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금의위가 끼어들어서 몰래 감시하고 있기에 마을의 대학살은 누구도 막을 수가 없다.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물었다.
"양민의 희생이 나오지 않습니까? 죄책감이 들 것 같은데요."
류 천호는 되려 웃었다.
"하하하! 죄책감이라니? 우리 말고 다른 금의위도 전부 하는 일이야. 또한 이건 대의를 위한 것이지. 그들 모두는 폐하를 위해 꼭 필요한 희생을 하는 것이다."
"......"
그 순간 망량의 말이 머릿속에 다시 스쳐지나갔다.
[ 이 세상에서 나보다 황실(皇實)의 성격을 잘 알고 있는 자는 없소. 천문관으로 일하면서 알 수 있었소. 그들은 이 세상을 뚜껑 정도로 여기고 있소. 그 자들이 주재(主宰)하는 일이라면 언젠가 말도 안 되는, 무시무시한 환란이 닥쳐올 게 분명하오. 막을 수 있을 때 막아야 하는게 당연하지 않소?]
그의 말이 옳았다.
무시무시한 환란은 이미 닥쳐오고 있었던 것이다.
아까 반기(半期)라고 표현하는 걸 보면, 반 년에 한 번씩 하나의 마을을 희생양으로 바쳤음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내가 전생(轉生)한지 약 5년이 지났으니, 그 동안 최소 열 개의 마을이 전소되었다는 뜻이다. 그건 명백한 이상상태인데도 천하사람들이 전혀 모르는 걸 보면, 그 모든 사실을 금의위가 전력으로 은폐하고 있다는 말이었다.
나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인가?
무엇이 행복한 삶이란 말인가?
"... 하핫."
내가 낮게 웃었다. 류 천호가 빙글빙글 웃었다.
"좋아! 기왕 할 거면 긍정적으로 가세."
"뭐 그래야겠습니다. 긍정적으로 해야죠."
나는 힘있게 뇌까렸다.
"목숨걸고 긍정적으로 해 봐야겠습니다."
말 등에 타고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류 천호는 내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건 정말로 다행인 일이다. 각오를 다진 채, 마치 흉신악살(凶神惡殺)처럼 일그러져 있는 내 얼굴을 그에게 보여줄 수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