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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의위(錦衣衛)
함곡관의 관문에 도착하자 남궁환의 말대로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자들이 있었다. 관문 근처에 대기하고 있던 무인(武人)들이었는데 하나같이 청색(靑色) 옷을 입고 있는 무사들이었다. 그들은 남궁환을 발견하자 부복했다.
"천공대(天空隊)가 소가주를 뵙습니다!"
천공대는 아마 남궁세가의 직속무력단체인 듯 했다. 나는 약 20여명은 될법한 그들의 면면을 살폈는데, 그 중 반수 이상이 일류급 고수였다. 이정도 전력이면 군소문파 정도는 하루아침에 쓸어버릴 수 있을 정도라서 나는 상당히 놀랐다. 남궁환은 천공대를 통솔하는 천공대주에게 말했다.
"자네는 어째서 관중 성내까지 마중을 나오지 않은 거지?"
"죄송합니다. 저희가 관중 성에 들어가면 관중 육대가문이 크게 신경쓰게 됩니다. 마찰을 피하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였습니다."
"그게 정말 자네 생각인 건가?"
"......"
"훗."
남궁환은 쓴웃음을 짓고는 고개를 돌렸고 천공대주는 묵묵히 서 있기만 했다. 나는 그 모습에서 그들 사이에 모종의 갈등이 있다는 걸 알 수 있었지만, 지금은 그걸 캐어낼 때가 아니었다. 남궁환이 진소청 사형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정말 고맙네. 자네와 백웅이 아니었다면 나는 조가장에서 백 장도 벗어나지 못하고 죽었을 걸세."
"아니야. 나를 신뢰해서 위험을 무릅쓰고 청룡무관까지 찾아오지 않았나? 나는 그게 더 고맙군."
그들은 나름대로의 우정이 있는 듯 했다. 나는 어떤 연유때문에 남궁환이 모용연만 데리고 단둘이서 강호의 고수들에게 쫓기고 있었고, 천공대와 남궁환은 또 어떤 관계인지 궁금했다. 하지만 정면에서 바로 물어볼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서 일단 참았다.
남궁환은 또한 내 손을 붙잡고 말했다.
"소협, 정말 고맙네. 만일 언제고 남궁세가를 찾아온다면 소협도 내 생명의 은인으로 귀하게 대접하겠네. 꼭 찾아와 주게."
"별 말씀을..."
나는 겉치레 인사를 받아주고는 힐끔 모용연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이번 일에서 이상하게도 별다른 행동이나 말이 없었다. 마치 그래야 하는 것처럼, 묵묵히 남궁환을 따라다니고 있었을 뿐이다.
' 붙잡히면 바로 윤간(輪姦)이나 강간을 당했을 위기인데 저렇게 침착할 수 있는 건가?'
나는 뭔가 위화감을 느꼈다. 그녀가 아무리 심지가 굳은 강인한 여협이라고 하더라도, 이번 일은 무려 수십 명이나 되는 무림인들이 떼거지로 몰려다니며 오로지 그녀를 범하려는 목적이었다. 어지간한 여자라면 공포에 질리거나 감정선의 변화가 굽이쳐야 정상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마치 '그럴 일은 없다' 라는 것처럼 한 줌의 동요조차 없는 것이다.
"그럼 살펴 가게."
"아아. 그럼."
진소청의 송별이 끝나자 남궁환과 모용연은 천공대와 동행해서 밤길으로 사라졌다. 꽤 피곤할텐데도 억지로 움직이는 걸 보면 추격자들을 조금이라도 더 따돌리려는 목적 같았다. 두 사람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쯤 진소청이 내게 말을 걸었다.
"그럼 이만 돌아가지, 사제."
그는 이제 완전히 의심없이 나를 새로운 사제로 인정하는 모습이었다. 예전에는 필요에 따라서 키우는 실험동물같은 취급이었다면 지금은 기꺼운 모습이 완연했다. 나는 속으로 약간 뿌듯함을 느끼며 말했다.
"사형. 여쭤볼 게 있습니다."
"무엇이냐?"
"오늘 일은 너무 이상합니다. 천하의 남궁세가 소가주가 호위도 없이 천음지체만 데리고 다닌것도 그렇고, 천공대는 아마 함곡관에 예전에 도착해 있었을 텐데 소가주를 호위하러 산에서 내려오지도 않았습니다."
"......"
"사형께선 뭔가 아시는게..."
내가 말꼬리를 흐리자 진소청은 한참 침묵하다가 말했다.
"더 이상은 우리가 끼어들 일이 아니다. 나는 남궁환과 친구의 의리를 다했으니, 남은 것은 그가 알아서 했으면 한다. 여하튼 더 이상 뭔가 일이 꼬이진 않을 테니."
"뭔가 이번 일의 전모를 알고 계신 겁니까?"
"말해주기를 바라는 거냐?"
"그렇습니다."
그러자 진소청이 내 머리를 헝클어트리며 피식 웃었다.
"좋아, 그럼 내기를 해 보는 게 어떠냐?"
"내기요?"
"네가 무관에서 나와 겨루기를 해서 창술로 일백 합을 버틴다면 말해 주마."
나는 약간 놀랐다.
"그건..."
"어때? 수련거리도 되고 괜찮지 않느냐?"
나는 호승심이 생겼다. 진소청은 내게 있어서 단순히 사형같은 존재가 아니다. 실질적으로 내 무공의 거의 모든 것을 가르쳐 준 사부격임과 동시에, 나와는 비교할 수 없는 압도적인 재능과 능력을 갖춘 자였다. 그런 진소청이 무예 내기를 걸어오는 걸 피하고 싶지는 않았다.
"좋습니다."
나와 진소청은 밤길을 다시 달려서 청룡무관에 도착했다. 상당한 거리였으므로 도착했을 때는 술시(戌時)가 가까워져 있었다. 하지만 피곤하다고 해도 어쨌든 사부인 삼절 이광의 명령이 우선이었으므로 재빨리 보고부터 해야 했다.
"다녀왔습니다."
"그래, 어서 오너라."
삼절 이광은 와룡전에서 호롱불을 켠 채 책을 읽고 있었다. 그는 책을 덮고는 진소청에게 말했다.
"약간 늦은 것 같구나."
"친구를 돕다가 늦었습니다."
"네 자신에게 떳떳하다면 더 캐묻지 않겠다."
삼절 이광은 그렇게 이번 일을 넘겨버렸다. 나는 그 모습을 보자 내심 부러운 감정이 들었다. 보통 이건 캐어물어도 단단하게 캐어물을 일인데, 삼절 이광은 자신의 제자가 언제나 떳떳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신뢰하고있을 뿐이었다. 저런 태도가 제자에게 있어서 얼마나 큰 힘이 되어주는지 부럽기만한 것이다.
그리고는 삼절 이광이 말했다.
"이야기는 들었을 테지. 타 뇌신류에서 내 제자가 되기 위해 찾아온 아이다."
"네. 제 일도 많이 도와 주었습니다."
삼절 이광이 흐뭇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보다시피 굉장한 내공을 보유하고 있는 아이다. 차후 너와 함께 뇌신류를 중흥시킬 수 있을테니 서로 도와서 천하제일을 목표로 하거라."
"네. 명심하겠습니다."
천하제일!
나는 갑자기 큰 단어가 나오자 가슴이 두근거렸다. 세상의 모든 무인들이 꿈꾸는 단어이지만, 삼절 이광같은 절정고수가 말하는 건 상당한 현실감을 지니고 다가왔다. 정말로 그의 밑에서 수련하다보면 천하제일이 될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대감이 마음속에 내려앉은 것이다.
"그만 물러가거라."
"넵."
"안녕히 주무십시오."
우리 둘은 삼절 이광 앞에서 물러나왔다. 그리고 어두운 무관의 복도를 걷던 중에 진소청이 나직이 내게 말했다.
"너도 나도, 아까부터 몸이 덜 풀렸다. 기왕 하는 김에 아까의 내기를 지금 해보지 않겠느냐?"
"그 내기는 제가 이길 때까지 할 수 있습니까?"
"물론이다."
"그럼 당연히 해야죠."
나와 진소청은 와룡전에서 나와서 수련당으로 향했다. 그리고 불빛을 수련당 내에 가득 차도록 키우고는 서로가 목창(木槍)을 들고 기수식을 잡았다. 나도 뇌령팔식이었고 그도 뇌령팔식이었다.
진소청이 말했다.
"참고로 네 내공을 부담없이 모두 사용해도 좋다."
"괜찮겠습니까? 사형은 몰라도 이 수련당이 다 부숴질텐데."
"걱정 말아라. 네 실력을 보고싶은 것 뿐이니까."
"네."
나는 내심 내공을 너무 많이 쓰다가 야밤에 난리를 칠까봐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내가 대련용 목창을 들고 진소청과 삼 장 거리를 잡자 그런 걱정은 기우였다는 걸 알 수 있엇다.
"......!!"
전신이 따끔따끔 꿰뚫리는 것 같다.
진소청은 그냥 가만히 자세를 잡고있을 뿐인데, 이미 내 급소는 알몸처럼 훤히 모습을 드러내보이고, 더불어 그의 창날은 이미 내 심장에 비수처럼 박혀있는 기분이 들었다. 이래서는 내가 천하제일의 내공을 쓸 수 있다고 해도 무용지물이다. 내가 뭘 해보려고 창을 휘두르는 순간, 저 수련당의 불빛 아래에서 일렁이는 창날이 내 목젖을 가르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건 주특기가 창이고 검이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 뭐...?! 내, 내가 천년설삼을 3번이나 먹었는데!'
하지만 나는 그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다. 기가 막히는 일이다. 남들이라면 평생가도 얻을 수 있는 최대급의 기연인 천년설삼을 3번씩이나 먹고, 몸에 거의 무진장한 내공이 흐르고 있는데도 고작해야 진소청을 이길 수가 없다니! 게다가 내 기억으로 이 때의 진소청은 갓 절정고수에 진입한 것으로 알고 있었기에 놀라움이 더했다.
이건 숫제 철혈문의 제일장로 앞에 섰을 때 이상의 압박이 아닌가?
창을 잡고 있는 내 손에서 땀이 송골송골 흘러나왔다. 나는 뇌령팔식의 자세를 잡다 말고 눈 앞의 환영이 내게 말을 걸어오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솜털을 간질이는 기운이 내 숨을 턱턱 막히게 했다.
"크윽...!!"
나는 도저히 버틸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내공을 끌어올려서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는 걸 생각했지만, 생각이 의지가 되어서 행동까지 가는 게 되지 않았다. 그 때마다 저 창날은 살아있는 것처럼 움직여서 나를 따라붙는 기분이 드는 것이다.
안 된다.
이건 도저히 안 되겠다.
내공으로는 도저히 안 되는 문제다.
"... 졌습니다."
결국 나는 일 초도 움직여보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패배를 시인하고 말았다. 그러자 그제서야 진소청은 압박을 풀어 주었다. 그는 자신의 나무창을 다시 수련당에 거치를 해 두며 말했다.
"미안하네 사제. 첫 날부터 내 실력이나 과시할 생각은 아니었지만 사제의 현재 상태가 너무 위험해서 충고를 하지 않을 수 없었어."
"위험하다고요?"
달칵
나도 나무창을 거치한 후, 진소청의 앞에 가서 정좌하고 앉았다. 전투의 결과를 떠나서 진소청이 뭔가 하고싶은 말이 있어서 이 내기를 제안했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진소청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사제는 아마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거야. 자신에게 부족한 것은 기(氣)를 다스리는 요령과 무술 뿐이고, 그것만 충족시키면 즉시 천하제일급 고수가 될 수 있다! ... 라고."
"...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진소청은 짧게 한숨을 쉬었다. 진심으로 걱정스러워하는 기색이었다.
"허나... 그건 잘못된 생각이야. 제아무리 천하제일의 내공을 갖고있어도 그걸 다스리는 사제의 몸뚱이는 인간이지. 기(氣)만을 가지고 의(意)를 얻은 자에게 나서는 것은 마치 북극(北極)의 한파에 맨몸뚱이로 서 있다 죽어가는 것과 다른 것이 아닐세. 아주 안타까운 일이 되는 것이다."
"......?"
의(意)?
의지가 대체 뭐가 중요하다는 것인가?
나는 그의 말 뜻을 이해할 수 없어서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 때까지만 해도 나는 그가 후발선제(後發先制)의 무술원리를 이야기하며 속도 이야기를 하는 줄 알았다. 내가 허둥대자 진소청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내 행동이 속좁은 견제로 보일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일부터 사제가 스승님께 일대일로 가르침을 받는다면, 사제의 그런 심리는 스승님께 바로 읽히게 될 것이야. 스승님은 실망한 것을 겉으로 표현하는 분이 아니기 때문에, 자칫하면 사제는 아무런 단서도 잡지 못한 채 제자리에서 빙빙 돌 가능성도 있지. 나는 그게 걱정되어서 지적을 해 주고 싶었던 것이네."
그건 확실히 위험한 일이다. 사람을 가르칠 때 언제나 열성적으로 임하는 진소청과 달리, 삼절 이광은 천재를 가르치는데 익숙해서 어설픈 자는 그냥 손에서 놓아버리는 방임형 스승으로 보였다. 그것은 아마 본인이 천재인 것에서 비롯되는 성향이리라.
나는 진소청의 호의를 왜곡시키지 않고 순수하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진소청의 실력은 방금 전 몸으로 겪었으니 의심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게 중요한 것이다.
"으음... 제가 그렇게 생각하는건 부정하지 않겠습니다만, 역시 무슨 말씀을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의지라니요? 이런 걸 말씀하시는 겁니까?"
쿠우우우
나는 내공과 더불어 살기를 끌어내었다. 보통 사람들은 이 살기만 맞아도 몸이 움츠러들고 움찔거린다. 그러나 진소청이 손을 저었다.
"아니, 그건 의지가 아니야. 굳이 말하자면 심기혈정(心氣血精)때문에 사제의 내공이 흘러넘치는 현상일 뿐... 그것도 크게 보자면 기(氣)라고 할 수 있지."
"인간이 의지만으로 이 세상에 영향을 줄 수 있다고 하시는 겁니까?"
"바로 그것이 무학의 고급(高級) 단계이지. 초식이나 내공의 단계를 벗어나기 시작하면, 전혀 다른 차원에서 고수들이 겨루게 된다네. 물론 초식과 내공을 아예 무시할 수는 없으나 적어도 아랫차원의 무학과는 궤를 달리한다."
나는 그 순간 알 수 있었다.
' 진소청도 그 영역에 발을 들이밀었구나!'
그리고 삼절 이광은 그 영역에 한참전에 도달해버린 진정한 달인(達人)인 것이다. 나는 그제서야 삼절 이광의 무형지기를 상대할 때 느꼈던 무시무시한 위화감이 무엇인지 알 수가 있었다. 삼절 이광이든 진소청이든 세간의 무공구분으로는 나눌 수 없는 영역에 도달해있는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나는, 오늘 내가 간섭하지 않았더라도 진소청 혼자서 어떻게든 그 일류고수들을 처리할 수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왜냐하면 원래역사에서 진소청이 누구한테 다치거나 죽음을 당하는 일은 아예 없었는데 오늘의 일은 내 간섭과 무관하게 벌어진 사건이다.
즉 - 실제역사에서 진소청은 10여명의 일류고수를 혼자 힘으로 다 물리쳐버렸다는 뜻이다. 아까는 그냥 상황을 탐색하며 적당히 싸우고 있었을 뿐이리라.
진소청이 말했다.
"우선 내일부터 수련이 끝나면 나와 오늘같은 대련을 계속 해 보세. 이건 틀림없이 자네의 무공증진에 도움이 될 것일세."
"넵."
나는 거절할 이유가 없어서 즉시 승낙했다.
' 목창대련으로 100초 버티는 것 쯤이야 뭐... 오래 걸리진 않겠지.'
그리고 곧 이런저런 잡담을 하다가 헤어져서 잠자리에 들었다. 오늘은 꽤 피곤했기에 몸을 씻고 푹 잤다.
다음 날부터 나는 삼절 이광에게 가르침을 받기 시작했다. 다소 이른 아침부터 와룡전에 따로 마련된 수련당으로 나온 삼절 이광은 말했다.
"너는 우리 뇌신류의 무공수법 중에서 검법(劍法)을 주특기로 삼는 것 같더구나. 뇌영검법(雷影劍法)이 마음에 드느냐?"
나는 머리를 긁적거렸다.
"네. 뇌령팔식이 가장 강력하다는 건 알고 있으나 창술은 적성에 맞지 않아서..."
"검법은 사실 약한 무공이라는 걸 알고 있구나. 그것만으로도 대견하다."
"......"
대놓고 검법이 약하다고 하지만 뭐라 대답할 도리가 없다. 그도 그럴것이 삼절 이광은 진소청 이상의 달인인데다가 삼절이라고 해서 검, 권, 창을 모두 통달한 자였다. 나같은 햇병아리가 그에게 의견을 내놓는 일은 우스꽝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광은 내 불퉁한 기색을 읽었는지 빙긋 웃으며 말했다.
"나도 무공에 고하우열을 가리고싶지는 않으나, 현실은 현실이니 알아두어야 한다. 창(槍)이 검(劍)보다 약했던 적은 고대이래로 한 번도 없었으며, 창술은 전투술(戰鬪術)이나 검술은 호신술(護身術)의 연장으로 발달했다는 점부터 이해를 하거라."
"네."
"물론 최고의 달인이 되면 창과 검은 대등한 영역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그 전까지는 창술을 기본으로 하여 검술을 익히는 편이 낫다. 그게 자신의 재능과 시간을 최대한 아낄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재능 또한 소모되는 겁니까?"
이광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재능이란 무한한 게 아니다. 정해진 시간과 가능성 속에서 차츰 소모되는 것이지. 그래서 젊을 적에는 뛰어난 수재였다가 세월이 지날수록 범재(凡才)가 되어버리는 경우도 허다하다. 인간이란 젊을 적에 하나라도 많이 익혀두는 게 삶의 진리다."
"네, 알겠습니다."
"너는 뇌령팔식의 기본을 모두 터득했으니, 오늘부터는 창술의 고급응용기를 가르쳐 주며 무공의 헛점을 바로잡아 주겠다."
그렇게 나는 십수 년이나 지나서 다시 청룡무관에서 무공을 배우기 시작했다. 삼절 이광의 지도대로 나는 성실하게 창술을 처음부터 다시 수련했고, 그 와중에 찰(札)과 경(驚), 착(着)이라는 3개의 고급응용기를 배울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기술을 오늘부터 하루에 최소 500번씩 연습해라."
나는 아침부터 시작해서 하루종일 죽어라 기술을 연습했다. 구슬땀이 코끝에 맺혀서 뚝뚝 떨어질 정도로 체력을 소모하는 일이었다.
그 날의 수업이 끝나고 나서는 진소청에게로 찾아가서 목창 대련을 개시했다. 어제는 진소청의 압박에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었으나 오늘은 좀 다를 것이라고 생각해서 마음을 단단히 먹고 갔다.
목창을 쥐고 맞은 편에 섰다.
"......"
하지만 나는 어제와 마찬가지로 거미줄에 박제된 마냥 진소청에게로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었다. 움직이는 순간 전신의 급소가 베여버릴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도무지 이해가 안되서 그 자리에 앉아서 골똘히 생각했다.
' 왜 움직일 수가 없을까? 움직이기도 전에 모든 움직임을 제압당해버리는데, 대체 무슨 원리일까?'
내가 고민하고 있을 때 진소청이 말했다.
"사제. 간격(間格)을 눈이 아니라 육감(六感)으로 느끼게."
뭔가 중요한 조언 같았으나, 나는 뭔 말인지 전혀 알아듣지 못해서 그 날도 허탕만 치고 말았다. 내가 조언 한 번에 뭘 깨달을 정도의 천재였다면 지금쯤 세상을 제패하고도 남았으리라.
"어쩔 수 없군. 오늘 배운 거나 좀 도와주지."
대련의 실력향상이 통하지 않자, 별 수 없다는 듯 진소청이 쓴웃음을 지으며 내가 오늘 배웠던 응용기를 친절하게 추가설명해 주었다. 나는 진소청의 설명을 듣자 이광에게 들은 게 더 쉽게 이해되는 기분이 들었다.
' 좋아, 할 수 있어!'
역시 독학(獨學)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생각이었다.
이제 나는 이런 식으로 무공을 수련해서 차후에는 반드시 절정고수의 경지를 거머쥐고 말 것이다!
"사제. 이런 말 하고싶지는 않지만..."
그로부터 3년이 지난 어느 날.
진소청은 나와 대련장에서 목창을 쥐고 마주서 있었다. 그리고 나는 목창이 떨궈진 채로 멍하니 서 있었다. 청룡무관에 재입관한지도 3년째인데, 이제 겨우 80초를 버틴 것이다. 진소청이 씁쓸하게 말했다.
"사제는 재능이 없군."
그렇다.
내기를 한지 3년이 지났지만 나는 아직도 목창대련에서 100초를 버티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도 내공을 다 끌어올린 대결이었음에도, 모든 움직임이 사전에 읽히고 그 전에 제압당하기 일쑤라서 진전이 거의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 동안 청룡무관에서 용맹정진한 덕에 내 무공이 훨씬 늘어서 이제 뇌령팔식이나 뇌영검법을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숙련도로 시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약 1년 전부터 삼절 이광은 나를 일대일로 가르치는 걸 관둔 상태였다. 그는 내가 범재라는 걸 알게 된 후에도 나름대로 열심히 가르쳐보려는 듯 했으나, 이내 흥미를 잃고는 진소청에게서 배우라고 던져버린 상황이었다. 물론 성실하고 착한 진소청의 성격상 그는 최선을 다해서 나를 가르쳐주는 중이었지만 이미 내 자존감은 갈기갈기 찢긴 후였다.
나는 무덤덤하게 그 사실을 인정했다.
"그런 것 같군요."
진소청이 애써 나를 위로해 주었다.
"사부의 냉담한 태도를 미워하지 말게. 원래 그런 분인 것이고 악의는 없으시지."
"미워하고 말 것도 없습니다. 너무 수준차이가 까마득해서 그런 기분조차 들지 않아요."
나는 솔직한 기분을 토로했다.
청룡무관의 관주, 삼절 이광.
그 수제자인 진소청 총사범.
이 두 사람은 괴물이다! 3년 전부터 이미 절정고수의 틀 안에서 분류할 수 없는 실력을 가지고 있었고, 또한 3년 동안 신입인 나보다 더 빠른 성장세를 보인 것이다. 천재가 노력까지 하니까 도저히 따라가는 게 불가능했다.
물론 내 나름대로의 성취는 있었다. 3년 전의 나보다는 훨씬 성장했다고 자부한다. 단지 천재가 주변에 2명이나 있으니 내 자신이 초라해보일 뿐이다.
잠시 후 진소청이 말했다.
"사실 사부님께서 그저께 내게 말씀하셨네. 이제 자네를 위해 따로 시간을 할애하지 말고 내 개인수련시간을 가지라고."
"......"
아마 삼절 이광이 보기에는 천재인 진소청의 재능을 내가 깎아먹는 걸로 보이는 것이다. 그래도 지금까지는 같은 뇌신류의 의리가 있으니 지켜보고 있었지만, 이제는 진소청의 수련시간이나 주려는 모양이었다. 나는 꽤 비참한 기분이 들었지만 근성으로 버텨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총관주님의 판단이 옳습니다."
"미안하네. 하지만 수련하다가 모르는 게 있으면 언제든 찾아오게. 뭐든 도와줄 테니."
"그 전에 한 가지... 3년 전의 그 일이 어찌된 건지 알 수 있겠습니까?"
진소청은 대답했다.
"오늘이 막날이니 이야기해 주겠네."
"네."
"그 날의 일은... 솔직히 말하자면 남궁환의 자업자득(自業自得)이었지."
"네? 자업자득요?"
이어진 말은 충격적이었다.
"그는 보기보다 과시욕이 많고 허세가 강한 성격이었어. 그래서 원래는 천음지체인 정혼자 모용연의 비밀을 무덤에 갈때까지 숨겨야 했지만, 그녀와 결혼 전에 강호나들이를 나오면서 자기도 모르게 술김에 말해버린 거지."
"......"
강호에 천음지체의 비밀을 흘린게, 정혼자인 남궁환 그 자신이었다니! 내가 놀라워하고 있자 진소청이 수련당에 앉으며 말을 이었다.
"모용세가에서는 당연히 노발대발하면서 당장 남궁환과의 혼사를 파기하려 했네. 하지만 남궁환의 아버지인 남궁세가 가주가 시간을 벌기 위해 급히 두 사람을 강호로 내보냈지. 너무 급하게 내보내서 호위도 없는 상태로 쫓겨나다시피 했지. 그는 이리저리 피하다가 나를 찾아왔던 것이네."
진소청도 어지간히 사람이 좋았다. 아마 강호에 있는 남궁환의 친구들이 전부 도움을 거절한 가운데 진소청만이 홀로 도와주러 나선 것이리라.
"남궁세가의 천공대가 남궁환을 호위하러 바로 오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남궁세가 내에서 그와 차기가주 경쟁을 하는 형제가 손을 쓴 거겠지. 죽으면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방치를 했던 것이다."
"......"
"뭐, 결국 그를 호위해가긴 했지만 지금도 남궁환은 가문 내에서 박터지게 후계경쟁을 하고 있겠지."
나는 그 날의 일이 얼추 다 이해되는 듯 했다.
그러나 딱 하나 이해가 되지 않는 게 있었다.
"그 때 모용연 소저는 범해질 위기의 여인이라고 보기엔 너무나 감정동요도 없고 침착했습니다. 이건 이상한 일 아니었습니까?"
"음... 그건 아마 그녀가 남궁환을 진심으로 사랑하기 때문이었겠지."
"네? 사랑?"
"그렇지 않고서야 자기 천음지체의 비밀을 흘린 당사자를 믿고 단 둘이서 강호를 떠돌아다닐 수 있겠는가? 나로써는 잘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지만, 모용연은 배신따위는 생각도 안할 정도로 남궁환을 신뢰하고 사랑했다는 거겠지."
"......"
정말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남궁환이 아무리 미남이라지만 그렇게까지 좋아하는 게 있을 수 있는 일일까? 아마 내가 살아생전에 봐왔던 괴이한 일 중에서 제일 기이한 일일지도 모른다. 동시에 나는 모용연이 불쌍한 여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왠지 모용연과 달리 남궁환은 하나의 여자에게 그 정도로 순정을 바치는 남자는 아닐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야기가 끝나자 진소청이 말했다.
"사제. 너무 낙심하지 말고 앞으로도 정진하게. 사제의 실력은 이제 세상 어디를 가도 빠지지 않는 일류(一流)야. 적어도 이 관중 일대에서 사제를 상대할 무림인은 거의 없을 것일세."
"네, 고맙습니다."
나는 진소청과 헤어져서 내 개인실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벽에 등을 기대어앉아서 복잡한 상념에 잠겼다.
사실 이제와서 3년 전 일의 비밀따윈 아무래도 좋았다. 그러나 정말로 화가 나는 것은 끝내 나는 창술로써 진소청에게 백초지적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지금껏 제대로 실감하지 못했던 거대한 재능의 벽을 느끼니 답답하기 그지 없었다. 물론 내 개인적인 무공은 증진했지만, 더 위를 보고 있는 상태라서 그리 기분이 좋지 않다.
' 씁, 어쩔 수 없지.'
나는 고개를 젓고는 다시 무공을 연습했다.
앞으로 10년을 더 해봐야 한다.
나는 열패감을 해소하기 위해 다른 방향을 잡기로 했다.
[ 네 검술을 10년만 닦고 왔으면 나는 네 상대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과거, 내 목을 베었던 방립 검객의 말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 그 말대로 해주지.'
적어도 철혈문의 장로에게 그 때의 패배를 설욕할 정도로 강해진다면 지금의 열패감이 사라질 것이다. 새로운 동기를 만들어내며 자신을 속이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