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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검신-34화 (34/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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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의위(錦衣衛)

다그닥 다그닥

앞쪽에서 모용연의 말이 달리는 소리가 들린다.

도주는 순조로웠다. 떡하니 눈에 보이는 것 치고는 은근히 먼 거리에 있던 함곡관이지만, 한 번 거리가 벌어지자 뒤쳐진 추격자들은 따라잡기 힘겨워하는 기색이었다. 그도 그럴것이 정작 잡아야하는 모용연은 말을 타고 빠르게 달려가고 있는데다, 이쪽도 이제는 쉽사리 거리를 주지 않으며 견제하고 있다. 게다가 밤중이라서 시각이 많이 불편하기 때문에 함부로 달려오다가 넘어질까봐 조심해야만 했다.

아까 내가 대지를 부쉈을 때 4명이 인사불성이 되었는지 지금 쫓아오는 것은 5명이었다. 남는 1명은 수투를 쓰는 권법의 고수였는데 그 자는 아까 진소청 사형에게 많이 당했는지 추격해오지 않고 있었다. 나는 그들의 숫자를 힐끔 살피며 말했다.

"3 대 5라면 해볼만 하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다. 저들 중에는 암기(暗器)의 고수가 한 명 있어서 섣불리 정면대결을 받아주면 안 된다."

"암기라고요?"

"잔룡(殘龍)이라는 자다. 조심해야 해."

진소청의 말에는 강한 경계의 기색이 깃들어 있었다.

' 아까 그 대치상황은 정말 위험한 상황이었나보군.'

암기고수가 있어서 정면대결만은 피하고 싶어하는 진소청 사형이, 억지로 합공을 받으며 버텨내야 했던 상황이었던 셈이다. 나는 내가 일 각만 늦었어도 안좋은 상황이 벌어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약간 소름이 돋았다. 잔룡이 누군지는 몰라도 암기를 쓴다면 확실히 정면대결을 피하는 게 맞다. 암기라는 건 독(毒)을 묻힐 수 있기 때문에 언제든지 전황을 바꿀 수가 있었다.

잔룡이라는 자는 우리를 쫓아오면서 섣불리 암기를 낭비하지 않고 기회를 노리는 모양이었다. 하긴 지금 급하게 던지는 것보다는, 달리기 때문에 우리의 체력이 소모되는 헛점을 노리는 편이 나을 것이다. 곧 산길이 출현하므로 거기서부터는 잔룡이 뒤에서 날려대는 암기를 조심해야 했다.

타닷

나는 뛰던 중에 남궁환에게로 질문을 돌렸다.

"창천검룡. 가문의 호위대는 안 데리고 다니십니까?"

남궁환은 내 질문에 씁쓸하게 웃었다.

"내부사정이 있네. 다만 함곡관까지만 가면 괜찮을 것일세."

"정말입니까?"

"그렇네."

나는 남궁환에게서 무슨 사정이 있는지 듣고 싶었다. 하지만 추격당하며 뛰고 있는 도중에 더 이상 말을 하면서 체력을 낭비할 수가 없었다. 나는 뒤쪽에서 추격하는 5인 중 한 명이 슬며시 속도를 내며 거리를 좁히는 걸 알아채고는 빠르게 반회전하며 품속의 단도(單刀)를 날렸다.

피잉!

"단도 따위..."

콰아앙!

"크아아악!"

철쇄(鐵鎖)를 쓰는 고수가 내 단도를 철쇄로 막았는데, 쇳소리와 함께 비명소리를 내며 저 멀리로 튕겨나갔다. 철쇄가 부숴져서 두동강 난 채로 땅에 꽂혔다. 그 모습에 뒤따라오던 다른 4명의 움직임이 주춤해졌는데 아마 눈이 휘둥그레졌으리라. 내 단도에 실린 내력(內力)이 철쇄고수의 힘과 내력을 몇 배나 상회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남궁환이 질린 듯 말했다.

"정말... 괴물같은 내공이군... 우리 가문의 그 누구도 백웅 자네보다 내공이 많지 않을걸세."

"내공이 전부는 아닌지라."

"겸손하군."

남궁환은 내가 겸손해한다고 생각하며 감탄했지만 나는 실제로 '내공이 전부가 아니다'라는 걸 알고 있다. 무술의 고위경지로 올라갈수록 내공으로 인한 순수한 공방력보다는 기(氣)의 이해도와 무술의 상승지기(上昇之技)가 중요해진다.

내가 천하를 뒤덮는 힘으로 백날 때려봐도 그걸 전부 흘려내고 반격할 수 있는 달인이 어딘가에 존재한다. 달인 위에 또 달인이 있을 것이고, 그것조차 초월하는 절대고수가 있으리라.

' 그렇기 때문에 나는 꼭 청룡무관에서 무공을 깊이있게 배워야 한다.'

단순히 평범하게 잘먹고 잘살려고 하면 방법은 많다. 그러나 힘이 부족하면 반드시 어디에선가 한계가 느껴진다. 그걸 극복하기 위해서는 내가 익힌 무공의 원류를 달인의 영역까지 탐구하는 게 반드시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 때였다.

히히힝

갑자기 약 7장 밖에서 앞서 달리던 모용연의 말이 속도를 줄이기 시작했다. 말 엉덩이가 점점 커지며 우리와의 거리가 좁혀지자, 우리 세 사람은 본능적으로 직감할 수 있었다. 이제 평탄한 평원길이 끝났고 관문 함곡관으로 올라가는 산길의 초입에 도착한 것이다.

다행히도 이 산길은 잘 닦여져있는 관도인데다가 경사도 꽤 낮게끔 길을 깎아놓아서 오르는게 크게 힘든 곳은 아니었다. 문제는 그렇다고 하더라도 말을 타고 올라가기에는 버거운 길이기에 말에서 내려야만 하는 것이다.

모용연이 말에서 내리자 남궁환이 걱정스럽게 그녀에게 물었다.

"괜찮소?"

"전 괜찮아요. 그보다 가가, 땀이..."

"하하... 괜찮소."

잔뜩 달려와서 우리 이마와 등에는 땀이 흐르고 있었다. 자기 이마의 땀을 훔쳐 낸 남궁환이 뒤쪽을 흘끔 보며 말했다.

"이제 우리가 저 자들과 결판을 내야만 할 것 같구려."

그렇다. 이제 거리가 완전히 좁혀져서, 도망칠래야 도망칠 수가 없다. 아까부터 남궁환이 모용연을 감싸는 걸 보면 모용연의 무공은 약한 편으로 보였다. 3대 4라서 아까보다는 낫지만, 모용연을 지키면서 싸우다보면 이 쪽이 좀 더 불리해질 것 같았다.

고요한 정적이 우리와 일류고수들 사이에 감돌았다.

그 때 일류고수들 중, 마치 기생오래비처럼 생겼고 음기가 감도는 요사스러운 미남이 히죽 웃으며 앞으로 걸어나왔다. 저 자는 대낮의 저잣거리에서 스쳐지나간 적이 있었다.

"창천검룡! 아까도 말했지만, 당신 혼자서 천음지체(天陰之體)를 독차지하는 건 너무하지 않소?"

남궁환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는 분노로 주먹을 꽉 쥐며 말했다.

"닥쳐라, 음적(淫敵)! 색마(色魔) 따위가 어디서 감히....!!"

색마?

그러고보니 저 자의 용모나 기세는 풍문으로만 듣던 색마와 거의 다를바가 없어보였다. 색마들은 주로 채음보양술을 연마하기 때문에 외모가 갈수록 여성적으로 변해가고, 몸에서 괴이한 냄새가 나기 때문에 분칠을 자주 하고 다녔다.

색마들은 선천적으로 성욕이 강한 변태들이었기에 여염집의 여인들이나 무림의 여협들이 색마에게 잘못 걸리면 신세를 망치는 일이 허다했다. 게다가 채음보양술의 특성상 보통의 무림인보다 내공이 많은 편이었기에 색마를 잡기도 쉬운 일이 아니라고 들은 적이 있었다.

진소청 사형이 옆에 서 있는 세 명을 둘러보더니 말했다.

"잔룡(殘龍), 전도귀(戰刀鬼), 단강부(斷鋼斧). 당신들은 모두 안휘성에서 명성을 날리는 일류고수들일 텐데 힘없는 아녀자를 강제로 취하려고 색마를 따라 여기까지 온 것이오?"

"......"

진소청의 비난에 잔룡이라는 자는 부끄러움을 느끼는지 대답을 못 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전도귀 위종은 뭘로 만들었는지 내 공력과 부딪혔는데도 휘어지기만 한 목도를 이쪽으로 겨누며 코웃음쳤다.

"하! 천음지체라는 건 그런 부끄러움을 감수할 만 하지. 그녀를 취하면 내공이 단번에 몇 갑절이 늘어나고, 천음지기(天陰之氣)를 품을 수가 있지 않은가? 나는 그걸 위해서라면 목숨이라도 걸 수 있다!"

옆에 있던 단강부라는 도끼쓰는 일류고수가 맞장구를 쳤다. 그는 험상궂게 생긴 전형적인 산적인상의 체구 큰 사내였다. 그가 모용연의 굴곡있는 몸매를 음충맞은 눈으로 훑어보더니 말했다.

"어차피 항구에 배 몇 번 지나간다고 티도 안 나잖아?"

"캬하하! 단강부, 당신 입담 대단하군 캬하하하하핫!!"

단강부의 저질스러운 음담패설에 색마가 깔깔 웃었다.

"아아..."

성적인 모욕을 받은 모용연은 안색이 새파래졌고, 특히 그녀의 정혼자인 창천검룡 남궁환은 얼굴이 시뻘개져 있었다. 그는 이를 으득 갈면서 말했다.

"안휘성에서는 고개도 마주치지 못할 놈들이..."

색마가 피식 웃었다.

"흐하하. 물론 안휘성에서는 남궁세가에게 왕후장상이라도 양보해야하지. 허나 여기는 관중, 당신네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곳인데 백날 외쳐서 어쩔 생각인가."

그렇다.

아무리 강대한 명문세가나 대문파라고 한들 그 지역에서만 영향력이 미칠 뿐, 전 중토(中土)에 영향력을 미칠만한 문파는 정말로 거의 되지 않았다. 그 때문에 대문파와 원한관계를 가지게 된 무림인들이 어떻게든 그 지역만은 벗어나려고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이다.

나는 지금 정면승부를 하게 되면 결론이 어떻게 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지금까지 많은 사선(死線)을 넘어왔던 나였지만, 이렇게 본격적인 무림인끼리의 단체전은 거의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암기를 상대해봤던 경험은 전무하기 때문에 자칫하다가는 내공의 고하에 상관없이 나도 치명상을 입을 가능성이 있었다.

물론 쉽게 질 거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어려운 고비를 앞두고서는 생각을 많이 할 수밖에 없었다. 자칫하다가는 하나의 선택실수로 돌이킬 수 없는 결과가 나오기 때문이다.

이 상황을 타개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나는 생각을 하던 중에 성큼 앞으로 나섰다. 모두의 이목이 내게 쏠렸는데, 특히 일류고수들이 나를 보는 시선은 약간 두려움이 섞인 것이었다. 하긴 아까 그 엄청난 내공을 보았으니 어쩔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약간 허세를 부려보기로 했다.

"한 방에 죽어나갈 것들이 지랄하는군. 너희는 내가 무섭지도 않으냐?"

"으윽..."

내가 살기를 뿜어내자 지금까지 기세등등하던 색마와 단강부가 찔끔해서 한발짝 뒤로 물러섰다. 내가 다시 달려들어서 내공이 실린 발차기를 할까봐 두려운 모양이었다. 특히 잔룡은 명백히 나를 경계하면서 손가락 사이에 왠 암기를 여러개 준비해두고 있었다.

그러자 전도귀 위종이 나를 보며 말했다.

"흥! 백웅 네 내공이 엄청난 건 사실이다. 하지만 내공과 초식의 운용이 서투르고 요혈(要穴)을 아예 방어하지 못하더군? 직접 부딪히지만 않으면 나 혼자서도 어떻게든 네놈을 상대할 수 있다."

"......"

아마 오늘의 짧은 대결에서 실력을 간파한 건 나뿐만이 아닌 모양이었다. 확실히 전도귀 위종의 말대로, 실전대결이 되기 시작하면 내 내공이 아무리 많든간에 먼저 상대방에게 치명상을 주는 쪽이 이긴다.

내 내공이 아무리 강해도 맞추지를 못하면 소용이 없다. 전도귀의 신법과 보법은 굉장히 훌륭한 편이었기에 그가 나를 상대로 지구전과 견제를 펼칠 경우 그 혼자서도 나를 붙잡아 둘 수 있는 것이다.

' 아니 그렇다고 해도 나를 상대하는 게 부담스러운 일일텐데 목숨을 걸 정도로 모용연 저 여자가 가치있다는 건가?'

나는 이미 대화를 통해 맥락을 파악한 상태였다.

천음지체(天陰之體) 모용연!

잘은 모르겠으나 그녀와 성교(性交)를 하는 남성은 내공이 증강되고 천음지기라는 특수한 기운을 품을 수 있는 모양이었다. 그 때문에 아까부터 무려 열 명이 넘는 일류고수들이 떼거리로 달라붙으며 추격전을 하고 있는 것이리라.

물론 나는 그녀와 성교를 하고싶다거나 강간을 하고싶다거나 하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굳이 그녀가 없어도 천년설삼을 3번 먹은 내공만으로도 천하를 오시(傲視)하고 있기 때문이다. 되려 천음지기라고 하는 불확실한 힘 때문에 내 내공의 균형이 흐트러지는 게 걱정되므로, 내가 모용연을 취할 일은 일단 없다고 봐도 좋았다.

그래서 나는 전도귀 위종에게 이죽거렸다.

"쉽게 말하자면 여자 하나 제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어서 떼로 몰려온 강간마(强姦魔) 집단이군. 그렇게 떡을 치고 싶으면 홍루나 갈 것이지 왜 발정난 개새끼마냥 고추 세우고 지랄이냐? 너희 부모가 그렇게 가르쳤냐 애미뒤진 개새끼야?"

"......"

"......"

순간 장내가 정적에 휩싸였다.

' 아차.'

사형을 천룡무관에 데려오는 간단한 임무가 꼬여서 목숨을 거는 임무가 되어버리자, 그만 짜증나서 표사시절에 배웠던 욕지거리를 해 버렸다. 그 시절에 내가 하는 표사일은 산적들과 싸우며 몸으로 굴러먹다보니 저절로 질낮고 험한 욕을 배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일류고수들은 어쨌든간에 기본적으로 제대로 된 스승을 두고 어린 시절부터 무공을 수련했던 무림인들이었다. 살아오면서 이런 천박한 저질욕을 먹을 일이 의외로 많지 않았으리라. 특히 색마나 단강부와 달리 전도귀 위종은 정식문파에서 사사한 흔적이 강했기에 내성이 덜한 듯 했다.

그래서인지 전도귀 위종은 아예 정신이 반쯤 나가있다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져서 평정을 잃어버렸다. 의도치않게 도발에 성공한 듯 하다.

"이, 이, 쳐죽일 놈!"

쐐애액!

그는 대낮에 겨뤘을 때보다 훨씬 빠르고 신속하게 목도를 휘두르며 공격해 왔다. 굉장히 빠른 속도라서 마치 그의 몸뚱이는 두 개의 분신(分身)이 생긴 것처럼 흩날렸고, 밤중이라서 거의 간파가 되지 않을 정도였다.

' 온다.'

나는 그의 환도(丸刀)가 날아오자 입을 딱 다물고 정신을 집중했다. 아까 겨룰 때는 그의 보법을 전혀 간파할 수 없었으므로, 그냥 눈에 내공을 집중해서 동체시력에 모든 것을 걸어보기로 한 것이다. 내공이 눈에 집중되면 일순간 동체시력이 상승하므로 그 효과를 이용하면 전도귀 위종의 공격을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오른쪽!

쏴아앗 -

어깨죽지에 한 치 정도 베인 상처가 생겼다. 하지만 나는 몸을 약간 회전시키며 아슬아슬한 차이로 전도귀 위종의 공격을 피했다. 전도귀 위종은 설마 이렇게 깔끔하게 피할 줄은 몰랐는지 경악했다. 그가 알고 있는 내 실력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리라.

"아니?!"

회심의 공격이 허공을 가르자 나는 그의 빈틈이 모두 보였다. 그래서 가차없이 오른발을 축으로 회전력을 실어서, 들고 있던 검(劍)을 횡으로 휘둘렀다.

촤악!

다음 순간, 전도귀 위종의 몸뚱이는 두동강이 나서 상체가 내장을 뿌리며 허공으로 치솟았다. 선혈이 마치 강물처럼 튀었고, 주인을 잃은 하체가 앞으로 털썩 무릎을 꿇었다. 전도귀 위종은 죽을 때까지 자기가 졌다는 걸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털썩 하고 위종의 상체가 떨어졌다. 나는 옷 가득 선혈이 튀자 불쾌해져서 얼굴부터 쓱싹쓱싹 닦았다. 그리고는 위종의 시체를 보며 비웃음을 지었다.

"이걸 어쩌나, 내가 널 쳐죽였군."

남은 세 명은 당황한듯 뒤로 물러서는 기색이었다.

"으으윽..."

그들의 계산으로는 쪽수가 많으니 어떻게든 암기의 힘을 빌어서 이길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을 텐데, 뜻밖에도 나를 맡겠다고 호언장담한 전도귀 위종이 한방에 황천으로 가버린 셈이었다.

"나는 천음지체를 반드시 얻고 말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색마는 얼굴 가득 난색을 표하더니 한번 일갈하고는 도망쳐 버렸다. 경신술이 굉장했는데 전도귀 위종보다 더 빨라보였다. 아마도 색마의 무공이 저 자들 중에서 가장 높을 것 같았다.

"어, 그럼 나도..."

뻘쭘하게 서 있던 단강부도 슬며시 몸을 빼려고 했다. 그러나 그 때는 가만히 사태를 지켜보고 있던 창천검룡 남궁환이 움직이고 있었다.

까강!

단강부가 채 두 걸음을 빼기도 전에 마치 번개처럼 그의 검이 치솟았고, 단강부가 첫 공격을 어쩔 수 없이 도끼로 막았다. 하지만 이미 쉽게 도망칠 수 없는 형국이 되어 있었다. 단강부의 실력은 창천검룡 남궁환보다 확실히 한 수 아래로 보였다. 연신 밀리던 단강부가 울부짖듯 외쳤다.

"잔룡! 지금이다!"

"......"

"잔룡!"

하지만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쓔콱!

"컥... 으으어억..."

남궁환이 씹어뱉듯 말했다.

"네 천박한 입을 탓해라."

남궁환은 직후 오 초만에 남궁세가의 가전무공인 제왕검법(帝王劍法)을 사용해서 단강부의 상반신을 도륙(屠戮)해 버렸다. 목에 칼이 박히고 곧장 심장까지 찢어발겨진 단강부는 원독에 찬 눈빛으로 남궁환을 노려보았으나, 잠시 후 남궁환의 검이 뽑히자 천천히 모로 쓰러졌다.

남궁환의 손에 단강부가 사망하자 거의 상황정리가 다 되어가는 듯 했다. 이제 장내에 남아있는 적은 잔룡 뿐이었는데, 그는 아까부터 아무런 행동도 안 하고 묵묵히 서 있었다. 남궁환이 잔룡을 향해 검을 겨누며 말했다.

"잔룡. 당신은 안휘 땅에서도 명성높은 암기고수라서 당신을 가장 경계하고 있었소. 하지만 아까도 그렇고 기회가 있는데도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더군.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이오?"

"......"

잔룡은 머뭇거리다가 남궁환의 말에 대답했다.

"진 대협의 말에 부끄러움을 느꼈소. 더 강해지고 싶어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여기까지 왔지만, 내가 하려는 일이 아녀자를 범하는 일이란 걸 새삼 깨달으니 의욕이 나지 않더군."

"그런 말을 한다고 해서 당신의 죄가 없어지는 건 아니오."

"훗... 내가 목숨구걸을 할 것 같은가."

고소(苦笑)를 머금은 잔룡이 말을 이었다.

"또 하나, 나는 안 움직인 것이지만 못 움직인 것이오. 진 대협은 내가 조금이라도 움직였다면 날 공격했을 텐데 도저히 막을 자신이 없더군. 목숨을 걸면 어떻게든 되었겠지만 치명상은 피할 수 없었겠지."

"그랬군..."

나는 잔룡의 말에서, 가만히 서 있는 것처럼 보였던 진소청 사형이 사실은 잔룡을 전담해서 견제하고 있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 덕분에 나와 남궁환이 편하게 적들을 도살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저자들과의 거리는 상당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잔룡만한 암기고수에게 목숨의 위협을 느낄만큼의 견제력을 가질 수 있단 말인가?

잔룡이 나에게 고개를 돌리곤 말했다.

"백웅이라 했던가?"

"그렇소."

"앞으로는 그런 무모한 짓 하지 말게."

뭐라고?

"만일 이 자리에 자네 사형이 없었다면 나는 촌각(寸覺) 사이에 자네를 5번도 넘게 죽일 수 있었다네. 내공이 아무리 넘쳐나도 자네는 사혈(死穴)이 텅텅 비어있어서 죽이려 하면 여반장(如反掌)이었으니, 두 번 다시는 암기고수 앞에서 그렇게 함부로 나대지 말게. 정 하려면 방어술부터 확실하게 하시게."

"......"

나는 마치 자상한 선배처럼 내게 충고하는 잔룡을 보자 어이가 없었지만, 이내 그가 진심(眞心)으로 말한다는 걸 눈빛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뿐만아니라 진 사형도 딱히 말은 안하고 있지만 그의 충고를 긍정하는 기색이었던 것이다. 순간적으로 화가 오른 것도 잊혀질 정도로 암기고수의 충고는 도움이 되는 면이 있었다.

' 그렇군... 나는 암기나 독에 너무 취약해. 이것도 수련해야겠다.'

"알겠소."

내가 대답을 하자 잔룡은 훗하고 웃었다.

"말을 끝낼 때까지 기다려줘서 고맙네. 그럼..."

푸욱!

"......!!"

갑자기 잔룡이 품 속에서 장침(長針)을 꺼내더니 자신의 미간에 박아버렸다. 굉장히 빠른 속도라서 어떻게 할 여지가 없었다. 놀랍게도 장침이 대뇌를 관통했을 텐데도 피가 거의 흐르지 않았고, 잔룡은 잠시 몸을 떨다가 앞으로 쓰러져서 사망했다. 이미 그는 살아남을 생각이 없었기에 강호인의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자진(自盡)한 것이다.

굉장히 잔인한 자살방법 같았지만, 아마 암기고수인 잔룡이 선택한것인만큼 고통없이 빠르게 죽는 방법일 가능성이 높았다. 남들 눈에 어떻게 보이든간에 대뇌가 파괴되어서 빠르게 의식이 사라지면 고통을 느낄 새도 없는 것이다.

잔룡의 시체를 내려다보던 남궁환이 씁쓸하게 말했다.

"그는 다른 자들과 다르게 양심이 존재했군."

"......"

"그렇다면 잔룡의 명예는 지켜줘야겠지."

아마도 남궁환은 함곡관을 넘어가서 추적에서 안전해지면 오늘의 습격자들을 모조리 남궁세가의 추살령에 걸어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강호의 음적에 색마로 선포함으로써 사냥감으로 낙인찍어버릴 게 뻔했다.

다만 잔룡은 마지막에 자신의 양심을 선택했으므로 남궁환은 무덤까지 비밀을 가지고 가 줄 것이다. 그건 잔룡의 남아있는 지인이나 사문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었다.

"자, 이제 갑세. 나머지 추격자가 오기 전에."

그리고 우리는 함곡관으로 걸음을 옮겼다.

' 정말로 그걸로 좋은 걸까?'

나는 방금 전 일을 생각했다.

잔룡이 조금만 더 머리를 굴리고 잔인하고 빈틈없게 행동했다면, 그는 자신의 목숨을 보전함은 물론 우리를 전멸직전까지 몰아넣을수도 있었으리라. 실제로도 그 2번의 빈틈을 찔렀다면 위험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심을 선택한 잔룡. 언뜻 강호인답고, 멋있는 죽음 같다. 하지만 내가 봤을 때 잔룡의 죽음은 뭔가 석연치 않았다. 멋있어보이지만 나는 그건 아닌 것 같아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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